10. 일촉즉발
Z 부대가 해상에 나온 사실을 알게 된 일본군은 재빨리 반응했다.
남파함대 사령장관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은 자신이 동원가능한 전력(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5척)으로 Z 부대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기함 죠카이와 제7전대의 중순양함 4척(모가미, 미쿠마, 구마노, 스즈야)이 일제히 정찰기를 사출했으며 제4잠수전대 기함인 경순양함 키누도 독자적으로 정찰기를 사출했다.
잠수함들은 Z 부대가 발견된 해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함대 사령장관 곤도 노부다케 중장은 전함 2척(공고, 하루나)와 순양함 6척, 구축함 여러 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까지는 전장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었다.
상륙해안에서 양륙 중이던 일본수송선들은 양륙을 중단하고 북쪽으로 피신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전투함들은 일부러 무전통신을 활발히 하여 Z 부대의 관심을 상륙해안에서 떼어내 전투함 쪽으로 끌어들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Z 부대는 일본함정들 사이의 무전을 수신하지 못했다.
사이공 부근에 전개한 제22항공전대도 수색에 참가했다.
9일 오후에 4대의 정찰기와 53대의 육상공격기가 이륙했는데 육상공격기 중 44대는 어뢰를 장비했고 9대는 폭탄을 달았다.
그 시각 Z 부대는 I-65함에 들킨 줄 모르고 북상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I-65함이 놓쳐버린 Z 부대를 찾기 위하여 잠수함 몇 척, 순양함에서 사출한 수상기 6대, 사이공에서 이륙한 정찰기 4대를 투입했고 Z 부대와 교전하기 위하여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5척, 어뢰를 장비한 육상공격기 44대, 폭탄을 장비한 육상공격기 9대를 동원했다.
1941년 12월 9일의 일몰시간은 오후 6시 9분이었으며 달은 오후 10시 38분에야 뜰 것이었다.
9일 오후에 필립스 제독은 작전을 확정하고 발광신호로 Z 부대에 명령을 내렸다.
1. 코타바루 상륙은 소규모이며 후속 상륙도 없다. 싱고라와 파타니 사이에서 상륙이 진행 중이고 주력은 싱고라 북쪽 150km 지점에 상륙 중이다.
2. 그 지역에 있는 적의 상황은 거의 알 수 없다. 우리가 만날 주력함은 공고급 1척으로 믿고 있다. 순양함은 아타고급 3척, 카고급 1척, 진츠급 2척을 만날 가능성이 있다. 이외에 함대형 구축함 몇 척을 만날 가능성이 있다.
3. 내 목표는 기습을 가해 적의 항공력이 개입하기 전에 적의 수송선과 전투함을 격침하는 것이다. 표적은 10일 아침 정찰결과를 보고 확정한다. 만약 공고급과 교전하게 되면 최고의 우선권을 가진다.
4. 위급시 함장의 기동에 대한 자율권은 제한된다. Z 부대는 교전에 들어가기 전까지 엄격한 통제 하에 하나의 집단으로 기동한다. '독립적으로 행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전술적 협력이 가능한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기동할 수 있다.
5. 교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25노트로 추적하며 교전이 끝나면 항속거리가 허용하는 최대 속력으로 후퇴한다.
6. 주력함은 효과적인 포격을 위하여 18,000m 이내까지 표적에 접근한다. 하지만 교전시에는 변침하여 전면의 함포만 사용하는 상황을 피한다. 표적의 종류에 따라 대응이 가능하도록 각 함은 지연신관과 접촉신관을 모두 준비한다.
7.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는 수상기를 1대씩 급유하고 사출준비를 갖추어 두었다가 필요하면 사출한다. 사출된 수상기는 지상기지에 착륙한다. 코타바루 비행장은 사용할 수 없다.
8. 테네도스는 해지기 전에 분리하여 혼자 싱가포르로 간다.
9. 나머지 구축함들은 9일 밤에 분리하여 10노트로 아남바스 제도로 가서 싱고라에 대한 공격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프린스오브웨일스 및 리펄스와 합류한다.
필립스 제독은 이어서 나머지 구축함 3척의 분리시간은 9일 밤 10시이며 아남바스 제도 근해의 합류지점에 10일 오후 4시까지 도착하라고 명령했다.
싱고라에 대한 공격은 구축함없이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만을 사용하여 실시할 예정이었으며 공격 예정 시간은 10일 오전 7시 45분이었다.
구축함은 항공공격에 취약하고 연료량이 적어 공격시 급격한 기동을 하게 되면 재빨리 철수할 때 연료가 떨어질 수 있었다.
일몰을 2시간 앞둔 9일 오후 4시 45분에 흐리던 하늘이 개면서 Z 부대를 일본기의 눈에서 가려주던 구름과 해무가 걷혔다.
오후 5시 45분, Z 부대의 레이더가 접근 중인 3대의 비행기를 발견했다.
Z 부대의 승조원들은 아군이길 바랬으나 잠시 후 수평선 상에서 모습을 드러낸 비행기는 일본순양함 키누, 스즈야 및 구마노가 사출한 0식 수상정찰기였다.
(아이치 E13A 0식 수상정찰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Aichi_E13A)
Z 부대를 발견한 일본수상기들은 접촉 보고를 하고 대공포 사정거리 밖에서 뒤따르기 시작했다.
지금이야말로 전투기가 필요한 순간이었으나 사용가능한 항공기는 Z 부대의 전방을 정찰하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1대 뿐이었다.
일본수상기들은 해가 지고 연료가 떨어지자 모함으로 돌아갔다.
일본순양함에서 사출한 수상기들의 정찰은 성공했지만 큰 대가를 치렀다.
구마노의 정찰기는 실종되었고 유라의 정찰기는 프로콘도르 섬에 충돌하여 크게 망가졌다.
스즈야의 정찰기는 해상에 불시착하여 구축함 하마카제가 달려가 승조원을 구했다.
이제 일본군은 Z 부대의 위치와 침로를 알았다.
오자와 제독은 수상기가 보고한 Z 부대의 침로와 속력을 바탕으로 미래 위치를 계산한 후 야간 전투를 위하여 휘하 함정들을 이끌고 달려갔다.
필립스 제독은 이제 자신이 들켰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작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12월 9일 오후 6시 35분에 연료가 모자라는 구축함 테네도스가 Z 부대에서 떨어져 남하했다.
테네도스는 단독 항진하여 다음날 싱가포르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함장 리처드 다이어 중령은 싱가포르에 도착하자마자 팔리서 소장에게 필립스 제독의 명령을 전달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내용은 공격에서 돌아오는 Z 부대를 맞이하도록 구축함들을 아남바스 제도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Z 부대의 행동. 출처 :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t Sea, P. 565)
테네도스를 분리한지 15분 후인 9일 오후 6시 50분에 Z 부대는 좌현으로 꺾어 320도로 변침했으며 속력을 26노트로 올렸다.
변침한 지 1시간 20분 후인 오후 8시 15분, 선두에 섰던 구축함 엘렉트라의 견시가 전방에서 조명탄을 발견했다.
조명탄은 해상에 잠시 떠 있다가 사라졌다.
보고를 받은 필립스 제독은 Z 부대에게 좌현으로 꺾어 남하하라고 명령했다.
다케다 중위는 사이공에서 이륙한 정찰기 4대 중 1대의 조종사였다.
해는 이미 졌고 달은 밤 10시 38분에야 뜨기 때문에 바다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레이더가 없는 정찰기는 적의 함영을 찾기 위하여 300m 이하의 고도로 비행했다.
저공을 비행하며 바다를 훑어보던 정찰기 승무원이 2개의 가느다란 항적을 발견했다.
영국함대의 항적이라고 확신한 다케다 중위는 항적을 쫓아갔고 얼마 가지 않아 커다란 함정을 발견했다.
다케다 중위는 육상공격기들이 듣고 있는 주파수로 적함을 발견했다고 보고한 다음 함정 상공을 지나가면서 조명탄을 떨어뜨렸다.
해상에 나와 있던 육상공격기들은 다케다 중위가 보고한 위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함 죠카이에 승좌한 오자와 제독은 깜짝 놀랐다.
아군 정찰기가 죠카이 상공을 지나가면서 조명탄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Z 부대의 엘렉트라가 보았던 조명탄이 바로 이것이었다.
오자와 제독은 아군 정찰기가 죠카이를 영국함정으로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북쪽으로 변침했다.
동시에 사이공의 제22항공전대 사령부에 무전을 보내어 정찰기가 발견한 것은 영국함정이 아니라 죠카이라고 밝혔다.
(1941년 12월 9일 상황도. 출처 : The Sinking Of The Prince Of Wales & Repulse : The End Of The Battleship Era, P.149)
제22항공전대 사령관 마츠나가 소장은 오자와 제독의 무전을 받고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수색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닫고 정찰기와 육상공격기에게 귀환을 명했다.
마츠나가 소장은 달이 뜨면 수색을 재개하려 헸으나 항공기의 착륙이 늦어졌고 승조원이 너무 지쳐서 10일 새벽에 수색을 재개하기로 했다.
변침하여 북쪽으로 달리던 오자와 제독도 달이 뜨면 남하하여 수색을 재개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함 공고와 하루나를 이끌고 남하하던 제2함대 사령장관 곤도 노부다케 중장이 오자와 중장에게 계속 북상하여 자신과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수색은 10일 날이 밝은 다음 재개할 것이었다.
이로써 일촉즉발 상태까지 갔던 Z 부대와 오자와 함대 간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조명탄이 터지던 순간 죠카이와 Z 부대와의 거리는 10km 가 채 되지 않았다.
대형함정의 경우 40km 밖에서 탐지가 가능한 Z 부대의 레이더가 죠카이를 탐지하지 못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남쪽으로 달리는 Z 부대의 승조원들은 곧 다시 서쪽으로 변침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필립스 제독은 생각을 바꾸었다.
조명탄은 일본군이 자신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는 증거였으며 기습은 이미 물 건너갔다.
일본군 지휘관이 바보가 아닌 이상 10일 새벽에 싱고라에 도착해 봐야 수송선들은 모두 도망쳤을 것이다.
전투기의 엄호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싱고라를 향해 계속 간다는 것은 극동에서 유일한 주력함인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를 아무런 소득없이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필립스 제독은 심사숙고 끝에 싱가포르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싱가포르로 후퇴하겠다는 결정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필립스 제독은 강력한 주력함을 2척이나 가지고 일본군을 찾아 당당하게 바다에 나섰다가 조명탄에 놀라 도망친 제독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었다.
그러나 훈련된 장교인 필립스 제독은 비겁하다는 세간의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쓸데없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보다 비난을 받더라도 귀중한 전력을 아껴서 훗날에 대비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명탄을 발견하고 남쪽으로 변침한 지 5분 후인 오후 8시 20분에 프린스오브웨일스로부터 함대 속력을 20노트로 떨어뜨리라는 명령과 함께 싱가포르로 돌아간다는 명령이 나왔다.
8시 55분에 필립스 제독은 리펄스에 보내는 점멸신호를 통하여 작전 중지를 공식화했다.
리펄스의 함장 테넌트 대령은 역시 점멸신호로 보낸 답신에서 필립스 제독의 결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고 있으며 결정에 동의한다고 전했다.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한다는 필립스 제독의 결정은 옳은 것이었지만 계획대로 철수했을 때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영국해군의 공식전사는 계획대로 철수했어도 10일 오전에 싱가포르까지 남하했던 일본기의 공습으로 주력함 2척이 격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반면 실제 역사보다 가까운 해상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싱가포르의 영국 전투기들이 제때 개입하여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잔인한 운명의 여신은 또다른 변수를 만들어서 Z 부대를 확실하게 파멸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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