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일촉즉발

 

Z 부대가 해상에 나온 사실을 알게 된 일본군은 재빨리 반응했다.

남파함대 사령장관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은 자신이 동원가능한 전력(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5척)으로 Z 부대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기함 죠카이와 제7전대의 중순양함 4척(모가미, 미쿠마, 구마노, 스즈야)이 일제히 정찰기를 사출했으며 제4잠수전대 기함인 경순양함 키누도 독자적으로 정찰기를 사출했다.

잠수함들은 Z 부대가 발견된 해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함대 사령장관 곤도 노부다케 중장은 전함 2척(공고, 하루나)와 순양함 6척, 구축함 여러 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까지는 전장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었다.

상륙해안에서 양륙 중이던 일본수송선들은 양륙을 중단하고 북쪽으로 피신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전투함들은 일부러 무전통신을 활발히 하여 Z 부대의 관심을 상륙해안에서 떼어내 전투함 쪽으로 끌어들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Z 부대는 일본함정들 사이의 무전을 수신하지 못했다.

사이공 부근에 전개한 제22항공전대도 수색에 참가했다.

9일 오후에 4대의 정찰기와 53대의 육상공격기가 이륙했는데 육상공격기 중 44대는 어뢰를 장비했고 9대는 폭탄을 달았다.

 

그 시각 Z 부대는 I-65함에 들킨 줄 모르고 북상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I-65함이 놓쳐버린 Z 부대를 찾기 위하여 잠수함 몇 척, 순양함에서 사출한 수상기 6대, 사이공에서 이륙한 정찰기 4대를 투입했고 Z 부대와 교전하기 위하여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5척, 어뢰를 장비한 육상공격기 44대, 폭탄을 장비한 육상공격기 9대를 동원했다.  

1941년 12월 9일의 일몰시간은 오후 6시 9분이었으며 달은 오후 10시 38분에야 뜰 것이었다.

 

9일 오후에 필립스 제독은 작전을 확정하고 발광신호로 Z 부대에 명령을 내렸다.

 

1. 코타바루 상륙은 소규모이며 후속 상륙도 없다. 싱고라와 파타니 사이에서 상륙이 진행 중이고 주력은 싱고라 북쪽 150km 지점에 상륙 중이다.

2. 그 지역에 있는 적의 상황은 거의 알 수 없다. 우리가 만날 주력함은 공고급 1척으로 믿고 있다. 순양함은 아타고급 3척, 카고급 1척, 진츠급 2척을 만날 가능성이 있다. 이외에 함대형 구축함 몇 척을 만날 가능성이 있다.

3. 내 목표는 기습을 가해 적의 항공력이 개입하기 전에 적의 수송선과 전투함을 격침하는 것이다. 표적은 10일 아침 정찰결과를 보고 확정한다. 만약 공고급과 교전하게 되면 최고의 우선권을 가진다.

4. 위급시 함장의 기동에 대한 자율권은 제한된다. Z 부대는 교전에 들어가기 전까지 엄격한 통제 하에 하나의 집단으로 기동한다. '독립적으로 행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전술적 협력이 가능한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기동할 수 있다.

5. 교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25노트로 추적하며 교전이 끝나면 항속거리가 허용하는 최대 속력으로 후퇴한다.

6. 주력함은 효과적인 포격을 위하여 18,000m 이내까지 표적에 접근한다. 하지만 교전시에는 변침하여 전면의 함포만 사용하는 상황을 피한다. 표적의 종류에 따라 대응이 가능하도록 각 함은 지연신관과 접촉신관을 모두 준비한다.

7.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는 수상기를 1대씩 급유하고 사출준비를 갖추어 두었다가 필요하면 사출한다. 사출된 수상기는 지상기지에 착륙한다. 코타바루 비행장은 사용할 수 없다.

8. 테네도스는 해지기 전에 분리하여 혼자 싱가포르로 간다.

9. 나머지 구축함들은 9일 밤에 분리하여 10노트로 아남바스 제도로 가서 싱고라에 대한 공격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프린스오브웨일스 및 리펄스와 합류한다.

 

필립스 제독은 이어서 나머지 구축함 3척의 분리시간은 9일 밤 10시이며 아남바스 제도 근해의 합류지점에 10일 오후 4시까지 도착하라고 명령했다.

싱고라에 대한 공격은 구축함없이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만을 사용하여 실시할 예정이었으며 공격 예정 시간은 10일 오전 7시 45분이었다.

구축함은 항공공격에 취약하고 연료량이 적어 공격시 급격한 기동을 하게 되면 재빨리 철수할 때 연료가 떨어질 수 있었다.

 

일몰을 2시간 앞둔 9일 오후 4시 45분에 흐리던 하늘이 개면서 Z 부대를 일본기의 눈에서 가려주던 구름과 해무가 걷혔다.

오후 5시 45분, Z 부대의 레이더가 접근 중인 3대의 비행기를 발견했다. 

Z 부대의 승조원들은 아군이길 바랬으나 잠시 후 수평선 상에서 모습을 드러낸 비행기는 일본순양함 키누, 스즈야 및 구마노가 사출한 0식 수상정찰기였다.

 

(아이치 E13A 0식 수상정찰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Aichi_E13A)

 

Z 부대를 발견한 일본수상기들은 접촉 보고를 하고 대공포 사정거리 밖에서 뒤따르기 시작했다.

지금이야말로 전투기가 필요한 순간이었으나 사용가능한 항공기는 Z 부대의 전방을 정찰하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1대 뿐이었다.

일본수상기들은 해가 지고 연료가 떨어지자 모함으로 돌아갔다.

 

일본순양함에서 사출한 수상기들의 정찰은 성공했지만 큰 대가를 치렀다.

구마노의 정찰기는 실종되었고 유라의 정찰기는 프로콘도르 섬에 충돌하여 크게 망가졌다.

스즈야의 정찰기는 해상에 불시착하여 구축함 하마카제가 달려가 승조원을 구했다. 

 

이제 일본군은 Z 부대의 위치와 침로를 알았다.

오자와 제독은 수상기가 보고한 Z 부대의 침로와 속력을 바탕으로 미래 위치를 계산한 후 야간 전투를 위하여 휘하 함정들을 이끌고 달려갔다.

 

필립스 제독은 이제 자신이 들켰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작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12월 9일 오후 6시 35분에 연료가 모자라는 구축함 테네도스가 Z 부대에서 떨어져 남하했다.

테네도스는 단독 항진하여 다음날 싱가포르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함장 리처드 다이어 중령은 싱가포르에 도착하자마자 팔리서 소장에게 필립스 제독의 명령을 전달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내용은 공격에서 돌아오는 Z 부대를 맞이하도록 구축함들을 아남바스 제도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Z 부대의 행동. 출처 :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t Sea, P. 565)

 

테네도스를 분리한지 15분 후인 9일 오후 6시 50분에 Z 부대는 좌현으로 꺾어 320도로 변침했으며 속력을 26노트로 올렸다.

변침한 지 1시간 20분 후인 오후 8시 15분, 선두에 섰던 구축함 엘렉트라의 견시가 전방에서 조명탄을 발견했다.

조명탄은 해상에 잠시 떠 있다가 사라졌다.

보고를 받은 필립스 제독은 Z 부대에게 좌현으로 꺾어 남하하라고 명령했다.

 

다케다 중위는 사이공에서 이륙한 정찰기 4대 중 1대의 조종사였다.

해는 이미 졌고 달은 밤 10시 38분에야 뜨기 때문에 바다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레이더가 없는 정찰기는 적의 함영을 찾기 위하여 300m 이하의 고도로 비행했다.

저공을 비행하며 바다를 훑어보던 정찰기 승무원이 2개의 가느다란 항적을 발견했다.

영국함대의 항적이라고 확신한 다케다 중위는 항적을 쫓아갔고 얼마 가지 않아 커다란 함정을 발견했다.

다케다 중위는 육상공격기들이 듣고 있는 주파수로 적함을 발견했다고 보고한 다음 함정 상공을 지나가면서 조명탄을 떨어뜨렸다.

해상에 나와 있던 육상공격기들은 다케다 중위가 보고한 위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함 죠카이에 승좌한 오자와 제독은 깜짝 놀랐다.

아군 정찰기가 죠카이 상공을 지나가면서 조명탄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Z 부대의 엘렉트라가 보았던 조명탄이 바로 이것이었다.

오자와 제독은 아군 정찰기가 죠카이를 영국함정으로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북쪽으로 변침했다.

동시에 사이공의 제22항공전대 사령부에 무전을 보내어 정찰기가 발견한 것은 영국함정이 아니라 죠카이라고 밝혔다.

 

(1941년 12월 9일 상황도. 출처 : The Sinking Of The Prince Of Wales & Repulse : The End Of The Battleship Era, P.149)

 

제22항공전대 사령관 마츠나가 소장은 오자와 제독의 무전을 받고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수색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닫고 정찰기와 육상공격기에게 귀환을 명했다.

마츠나가 소장은 달이 뜨면 수색을 재개하려 헸으나 항공기의 착륙이 늦어졌고 승조원이 너무 지쳐서 10일 새벽에 수색을 재개하기로 했다.

 

변침하여 북쪽으로 달리던 오자와 제독도 달이 뜨면 남하하여 수색을 재개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함 공고와 하루나를 이끌고 남하하던 제2함대 사령장관 곤도 노부다케 중장이 오자와 중장에게 계속 북상하여 자신과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수색은 10일 날이 밝은 다음 재개할 것이었다.

 

이로써 일촉즉발 상태까지 갔던 Z 부대와 오자와 함대 간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조명탄이 터지던 순간 죠카이와 Z 부대와의 거리는 10km 가 채 되지 않았다.

대형함정의 경우 40km 밖에서 탐지가 가능한 Z 부대의 레이더가 죠카이를 탐지하지 못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남쪽으로 달리는 Z 부대의 승조원들은 곧 다시 서쪽으로 변침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필립스 제독은 생각을 바꾸었다.

조명탄은 일본군이 자신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는 증거였으며 기습은 이미 물 건너갔다.

일본군 지휘관이 바보가 아닌 이상 10일 새벽에 싱고라에 도착해 봐야 수송선들은 모두 도망쳤을 것이다.

전투기의 엄호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싱고라를 향해 계속 간다는 것은 극동에서 유일한 주력함인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를 아무런 소득없이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필립스 제독은 심사숙고 끝에 싱가포르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싱가포르로 후퇴하겠다는 결정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필립스 제독은 강력한 주력함을 2척이나 가지고 일본군을 찾아 당당하게 바다에 나섰다가 조명탄에 놀라 도망친 제독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었다.

그러나 훈련된 장교인 필립스 제독은 비겁하다는 세간의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쓸데없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보다 비난을 받더라도 귀중한 전력을 아껴서 훗날에 대비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명탄을 발견하고 남쪽으로 변침한 지 5분 후인 오후 8시 20분에 프린스오브웨일스로부터 함대 속력을 20노트로 떨어뜨리라는 명령과 함께 싱가포르로 돌아간다는 명령이 나왔다.

8시 55분에 필립스 제독은 리펄스에 보내는 점멸신호를 통하여 작전 중지를 공식화했다.

리펄스의 함장 테넌트 대령은 역시 점멸신호로 보낸 답신에서 필립스 제독의 결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고 있으며 결정에 동의한다고 전했다.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한다는 필립스 제독의 결정은 옳은 것이었지만 계획대로 철수했을 때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영국해군의 공식전사는 계획대로 철수했어도 10일 오전에 싱가포르까지 남하했던 일본기의 공습으로 주력함 2척이 격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반면 실제 역사보다 가까운 해상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싱가포르의 영국 전투기들이 제때 개입하여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잔인한 운명의 여신은 또다른 변수를 만들어서 Z 부대를 확실하게 파멸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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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출항

 

1941년 12월 8일 오후 5시 10분, Z 부대는 구축함 테네도스, 호주구축함 뱀파이어, 리펄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순서로 출항했다.

구축함 엘렉트라와 익스프레스는 이미 출항하여 창이 곶 부근에서 기뢰제거기를 시험하고 있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가 조호르 수로를 빠져나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해안에 나와서 배웅했는데 군중 가운데 이 전함의 최후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수평선 너머로 싱가포르의 해안선이 사라지자 구축함 엘렉트라와 익스프레스가 합류하여 선두에 섰다.

이어서 기함 프린스오브웨일스가 항진하고 리펄스가 730m 뒤에서 따라갔다.

승조원들은 다가올 전투에 대해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리펄스의 승조원 중 일부는 요나라는 별명을 가진 프린스오브웨일스와 함께 출격하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했지만 대부분은 일본군이 자신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출항한 지 5시간쯤 지난 오후 10시 43분에 동양함대 참모장 아서 팔리서 소장으로부터 필립스 제독에게 전문이 들어왔다.

팔리서 소장은 싱가포르에 남아서 극동총사령부와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다.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공군은 9일 오전 8시에 1대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을 보내어 귀관의 전방 190km 해역에 대해 정찰을 실시할 예정임.

2. 10일 수요일 새벽에 싱고라 부근에 대한 정찰은 가능함.

3. 10일에 전투기에 의한 엄호는 불가능함, 반복함, 불가능함.

4. 일본은 남부인도차이나와 어쩌면 타이에 대규모 폭격기 부대를 가지고 있음. 극동총사령관은 맥아더 장군에게 장거리 폭격기를 사용하여 최대한 빨리 인도차이나의 항공기지를 폭격해달라고 요청했음.

5. 코타바루 항공기지는 철수했으며  다른 북부 항공기지들도 적의 공습에 의하여 거의 무력화 됨.

6. 코타바루의 군사적 상황은 나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음.

 

팔리서 소장이 모르고 있던 사실은 12월 8일에 일본기들이 필리핀의 클라크 비행장을 공습하여 B-17 폭격기의 절반을 파괴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맥아더 장군에게는 인도차이나의 일본군 비행장을 공습할 여력이 없었다.

 

필립스 제독은 항공엄호가 불가능하다는 팔리서 소장의 전문을 받은 뒤에도 작전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날씨가 흐렸으므로 일본기에게 발견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필립스 제독은 다음날인 9일 저녁까지 일본기에게 발견되지 않으면 싱고라로 가서 10일 새벽에 일본선단을 공격하고 9일 낮동안 일본기에게 발견되면 싱가포르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영국공군이 Z 부대의 엄호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싱가포르의 셈바왕 비행장을 기지로 하는 호주군 제453전투비행대대가 Z 부대 엄호를 위하여 배정되어 있었다.

버팔로 전투기 12대를 보유한 제453전투비행대대는 모든 임무에서 벗어나 순전히 Z 부대 엄호에만 집중하라는 명령을 받고 9일 아침부터 비상태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다만 싱고라는 너무 멀고 말레이 북부의 비행장이 사용불가 상태였기 때문에 싱고라에서의 항공엄호는 불가능했다.

 

(브류스터 F2A 버펄로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Brewster_F2A_Buffalo)

 

Z 부대는  밤새 17.5노트의 속력으로 일본잠수함의 위협을 피하여 지그재그로 항진하면서 북동쪽으로 향했다.

9일 아침이 되었을 때 날씨는 흐리고 비까지 내려 필립스 제독은 일본기에게 들킬 위험이 없다고 생각했다. 

오전 7시 13분에 아남바스 제도 북동쪽에 도달한 Z 부대는 330도로 변침하여 북상했다.

필립스 제독은 변침 이후 경계태세를 2급으로 내렸다.

이 경우 모든 포에 장전하고 일부 병력이 배치되어야 하지만 비번인 병력들은 식사를 하고 자거나 쉴 수 있었으므로 오전 9시까지 승조원들이 아침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전원 전투배치되는 제1급 경계태세로 들어가 오래 지속될 경우를 대비하여 승조원들의 체력을 비축해 두는 일은 중요했는데 환기능력이 떨어져 승조원들이 더위에 시달리고 있던 프린스오브웨일스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변침한 후 날씨는 더욱 나빠져서 Z 부대는 레이더에 의존하여 항해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레이더는 함정을 40km 거리에서, 그리고 고공으로 비행하는 항공기를 130km 거리에서 포착할 수 있었다.

9일 오전 9시 6분에 리펄스의 함장 테넌트 대령은 프린스오브웨일스에 발광신호를 보내어 구축함 테네도스에 급유해야 한다고 전했다.

Z 부대는 엄격한 무선침묵 상태에 있었다.

급유에는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속력을 8노트로 낮추어야 했으므로 필립스 제독은 요청을 거부했다.

9일 오전 중에 Z 부대는 일본잠수함 초계선을 피하여 침로를 345도로 바꾸었고 정오에 즈음하여 거의 정북으로 변침했다.

 

일본은 싱가포르와 상륙해안 사이의 해역을 감시하기 위하여 10척의 잠수함을 투입하여 3중 초계선을 쳐 두었는데 6척을 투입한 제2초계선이 핵심이었다.

제2초계선의 가장 동쪽을 맡은 잠수함은 I-65함으로 하라다 하쿠에 소좌가 지휘했다.

 

9일 오후 2시에 잠망경을 들여다보던 I-65함의 장교가 관측한계에 가까운 거리에서 2개의 희미한 함영을 발견했다.

보고를 받은 하라다 소좌는 잠망경을 들여다 보고 영국전함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I-65함은 영국함대가 지나가기를 기다린 다음 부상하여 뒤따르면서 오후 2시 15분에 무전으로 영국함대의 위치와 침로, 속력을 보고했다.

 

Z 부대는 운이 없었다.

만일 침로가 몇 km 만 동쪽으로 치우쳐 있었으면 I-65함은 Z 부대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Z 부대의 이동경로와 발각 상황. 출처 : The Sinking Of The Prince Of Wales & Repulse : The End Of The Battleship Era, P.127)

 

Z 부대를 뒤따르던 I-65함은 오후 2시 20분에 스콜 속에서 영국함대를 놓쳐버렸지만 계속 추격하여 오후 3시 20분에 다시 접촉했다.

오후 4시에 수평선에서 갑자기 1대의 비행기가 날아오자 I-65함은 자신을 공격하려는 영국기로 생각하고 급히 잠항했는데 사실은 일본제4잠수전대 기함인 경순양함 키누의 수상기였다.

30분 후에 부상해보니 영국함대는 사라지고 없었다.

 

일본군의 불안정한 통신망 때문에 I-65함의 접촉보고는 늦게 전달되었다.

I-65 함의 보고를 수신한 것은 제4 및 제5잠수전대 기함인 경순양함 키누와 유라였는데 양 함은 1시간 30분이나 우물거리다가 이 통신을 중계했고 이후 30분이 더 지나서야 중순양함 죠카이에 승조하고 있던 남파함대 사령장관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에게 도달했다.

영국전함들이 싱가포르에 있다고 믿고 있던 오자와 중장은 깜짝 놀랐다.

 

일본군은 전날인 12월 8일 오후에 싱가포르에 정찰기를 보내어 전함 2척이 아직 항구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9일 오전에도 일본정찰기가 싱가포르를 정찰했는데 조종사는 부유선거를 전함으로 착각하여 여전히 영국전함들이 정박 중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따라 중순양함을 보유한 남파함대의 주력은 다음 작전을 위하여 캄란 만으로 철수 중이었고 병력과 물자를 양륙한 수송선들도 경순양함과 구축함의 빈약한 호위를 받으며 뒤따라 철수 중이었다.

사이공 부근의 제22항공전대에서는 다음날인 10일 새벽에 싱가포르에 기습을 가해 진주만에서 했던 것처럼 영국전함 2척을 항구 내에서 격침하려고 했다.

따라서 정비사들이 항공기를 정비하는 동안 조종사들은 싱가포르 지도를 들여다보며 항구의 수심과 진입 및 철수 경로를 확인하고 있었다.

 

I-65함의 접촉보고를 받은 일본군의 첫 반응은 I-65함이 무엇인가 착각했으며 영국전함은 아직 싱가포르에 있다는 것이었다.

확인을 위하여 사이공에서 즉시 정찰기가 이륙하여 가능한 최고속력으로 싱가포르로 날아갔다.

항구를 자세히 살펴본 정찰기 조종사는 오전의 정찰기가 부유선거를 전함으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싱가포르에 영국전함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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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개전

 

코타바루는 말레이 반도 북동쪽에 있으며 인도부대인 제3/17 도그라 대대가 10km 의 해안선을 지키고 있었다.

1941년 12월 8일 0시가 막 지났을 때 초병이 해안선에서 약 3km 떨어진 해상에서 3척의 수송선을 발견했다.

잠시 후 해안에 일본군의 포탄이 쏟아졌고 일본군 보병 제56연대가 상륙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대부분 실전 경험을 가진 고참병인데 비하여 도그라 대대의 병사들은 대부분 어린 징집병들로 실전 경험은 커녕 훈련도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영국군 야포가 불을 뿜어 수송선과 상륙주정에 몇 발의 명중탄을 기록했지만 일본군이 해안에 교두보를 형성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본군이 상륙한 시간은 현지시간으로 12월 8일 오전 0시 45분으로 진주만 기습보다 70분 앞선 시간이었다.

잘못하면 진주만 기습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었으나 만조 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일본군은 상륙을 감행했다.

일본군의 목표는 코타바루 시내와 상륙 해안 사이에 위치한 비행장이었다.

이 비행장에는 영국공군 제36비행대대 소속의 빌데비스트 뇌격기 12대와 제1호주비행대대 소속의 허드슨 경폭격기 12대가 작전하고 있었다.

 

(말레이 반도 및 타이 침공. 출처 : The Sinking Of The Prince Of Wales & Repulse : The End Of The Battleship Era, P.103)

 

날이 밝자 일본군은 비행장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남부 인도차이나에서 날아온 일본기들이 비행장을 폭격하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비행장의 지상요원들은 공습에 이어 일본군이 비행장에 접근하여 총을 쏘기 시작하자 공포에 질려 철수 명령도 없이 건물과 장비에 불을 지른 다음 자동차를 타고 철수했다.

뒤늦게 철수 명령이 떨어지자 살아남은 18대의 비행기도 이륙하여 도망쳤고 이어서 비행장을 지키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싸우던 도그라 대대도 비행장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로써 접근하는 일본선단을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잡은 코타바루 비행장은 개전 첫날 일본군 손에 넘어갔다.

 

다른 곳에서도 일본군은 성공을 거두었다.

진주만에서는 일본함재기들이 미국전함 4척을 격침하고 4척에 피해를 입혀 태평양함대의 주력을 일거에 궤멸시키고 167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필리핀에서는 일본기들이 미국 항공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면서 제공권을 장악했으며 홍콩에서도 일본군이 성공적으로 침공을 시작했다.

 

싱가포르도 사이공 부근에 전개한 일본제22항공전대로부터 폭격을 받았다.

폭탄을 장비한 원산 및 미호로 해군항공대의 96식 육상폭격기 54대가 싱가포르의 텡가 비행장을 목표로 이륙했다.

그러나 악천후로 인하여 원산항공대의 폭격기 모두와 미호로 항공대의 폭격기 일부가 되돌아갔다.

미호로 항공대의 폭격기 17대만이 8일 새벽 4시에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텡가 비행장을 폭격했다.

블레넘 폭격기 3대가 파괴되었고 폭탄 일부가 시가지에 떨어져 약 200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영국군은 레이더로 230km 밖에서 일본기의 내습을 감지하고 탐조등을 비추면서 대공포로 반격했으나 일본기는 피해를 입지 않고 빠져나갔다.

 

1941년 12월 8일 오전 6시 30분에 극동총사령관(Commander-in-Chief, Far East) 로버트 브룩포팸 공군대장과 중국총사령관(Commander-in-Chief, China) 제프리 레이턴 해군중장이 공동 명의로 극동 지역의 영국령에 거주하는 군인 및 민간인에게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서 두 사령관은 영국이 일본과의 전쟁에 들어갔음을 밝히고 영국은 대비가 되어 있으며 일본의 침공을 물리칠 것이라고 다짐했다.

각국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전파된 이 성명서는 당시 영국이 일본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쟁이 일어날 당시 극동에 전개한 영국해군의 지휘체계는 혼란스러웠다.

동양함대 총사령관 필립스 제독은 극동총사령관 브룩포팸 대장의 지휘를 받지 않고 런던의 해군성으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았다.

반면 중국에 있는 영국해군 병력들은 여전히 중국총사령관 레이턴 중장의 지휘를 받았다.

해군성은 지휘권을 통일하기 위하여 12월 8일에 전문을 보내어 이틀 간의 준비과정을 거친 후 12월 10일 0시 30분을 기하여 동양함대 총사령관이 중국총사령관의 권한을 인수하라고 명령했다.

이제 레이턴 중장에게 남은 일은 고문 역할 정도였는데 필립스 대장은 조언을 청하지 않았다.

일이 없어진 레이턴 중장은 여객선을 타고 영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말레이 해전의 참패로 인하여 눌러앉게 된다.

극동에서 오래 근무하여 지역 정세에 정통한 레이턴 중장이 결정적인 시기에 지휘 계통에서 밀려난 사실은 영국군에게 불행이었다.

 

해군성은 해군 내의 지휘권을 단일화하는데는 적극적이었으나 극동 지역 지휘권의 단일화를 위하여 동양함대 총사령관이 공군대장인 극동 총사령관의 명령을 받는 것은 반대했다.

따라서 극동 지역의 지휘권은 이원화되어 육군과 공군은 극동 총사령관이, 해군은 동양함대 총사령관이 지휘했다.

 

필립스 제독은 12월 7일 저녁 늦게 브룩포팸 대장과 최근 정세와 향후 활동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이 내용을 해군성에 보고하면서 자신의 향후 의도를 모호하게 얼버무렸다.

해군참모차장으로서 런던의 해군성에 앉아 수많은 해전을 지휘해 본 경험이 있는 필립스 제독은 자신이 했던 것처럼 지구 반바퀴 떨어진 런던의 해군성에서 자신에게 이러쿵저러쿵 명령을 내리는 것을 싫어했다.

때문에 극동총사령관은 물론 해군성도 동양함대의 의도와 움직임을 제대로 모르게 되었다.

 

8일 아침이 되자 전선에서 단편적인 보고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상황은 알기 어려웠으나 일본군이 타이와 말레이 북부의 몇 곳에 상륙했고 그 지역의 육군과 공군이 치열한 전투에 휘말렸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12월 8일 오후 12시 30분에 필립스 제독은 프린스오브웨일스 함상에서 회의를 열었다.

동양함대 사령부의 참모들과 프린스오브웨일스의 함장 리치 대령, 리펄스의 함장 테넌트 대령 그리고 구축함장들이 참석했다.

극동 총사령부나 공군은 초대받지 못한 해군만의 회의였다.

 

필립스 제독은 우선 가용한 함정을 확인했다.

전함 프린스오브웨일스와 순양전함 리펄스는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에는 순양함이 4척(더반, 다나에, 드래건, 모리셔스) 있었는데 모리셔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초계 및 정찰에나 적합했지 본격적인 해전을 치르기는 무리였으며 다나에와 드래건은 정비 중이라 사용이 불가능했다.

6인치 주포 12문을 보유한 모리셔스는 전투에 적합했으나 역시 정비 중이라 사용할 수 없었다.

8인치 주포 8문을 가진 중순양함 엑시터가 벵골만으로부터, 그리고 5.9인치 주포를 가진 네덜란드 경순양함 자바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로부터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으나 36시간 이후에야 도착할 것이었다.

사용가능한 순양함은 6인치 포를 갖추고 속력도 충분하지만 전투에는 부적합한 경순양함 더반 뿐이었다.

 

구축함은 조금 사정이 나았다.

영국에서부터 프린스오브웨일스를 따라온 익스프레스와 엘렉트라는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었다.

지중해 함대에서 파견된 인카운터와 주피터는 싱가포르에 도착하자마자 기관이 고장나서 수리 중이었다.

인카운터의 수리에는 3일, 상태가 심각한 주피터의 수리에는 3주가 걸릴 예정이었다.

대신 싱가포르에는 테네도스와 호주구축함 뱀파이어가 있어 언제라도 출동가능한 상태였으며 최근에 정비를 마친 스트롱홀드도 있었다.

모란과 다이어도 사용가능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형이라 전투는 무리였다.

이외에도 미국구축함 4척이 발릭파판에서 달려오고 있었고 홍콩에서 탈출한 구축함 2척이 남하 중이었으나 모두 이틀 후에나 도착할 것이었다.

 

전함이나 순양전함, 또는 항공모함이 1주일 이내에 도착할 가능성은 없었다.

결론적으로 필립스 제독이 당장 사용가능한 함정은 전함 1척, 순양전함 1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5척 정도였다.

 

당시 필립스 제독은 영국 및 미국의 정보기관과 영국공군의 정찰기로부터 꽤 많은 정보를 얻고 있었다.

일본선단은 순양함과 구축함으로부터 호위를 받고 있었고 최소한 1척의 공고급 전함(실제로는 2척)을 포함한 함대가 뒤를 받치고 있었다.

필립스 제독은 사이공 부근에 전개한 일본항공기의 세력도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일본이 설치한 기뢰원과 싱가포르 부근에서 경계 중인 일본잠수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제독은 부하들에게 프린스오브웨일스, 리펄스, 엘렉트라, 익스프레스, 테네도스, 뱀파이어로 구성된 작지만 빠르고 강력한 함대를 이끌고 당일 오후 5시에 싱가포르를 출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함대의 명칭은 Z 부대(Z Force)로 정했다.

Z 부대는 타이 만으로 북상한 다음 서쪽으로 항진하여 10일 아침에 말레이 반도 및 타이 해안선에 상륙 중인 일본선단을 공격할 것이었다.

부하들은 필립스 제독의 계획에 찬성했고 회의는 30분 만에 끝났다.

 

함장들은 서둘러 자기 배로 돌아가 출항준비를 서둘렀고 필립스 제독은 항공엄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말레이 항공사령관(Air Officer Commanding Malaya) 펄포드 공군소장을 만났다.

필립스 제독은 펄포드 소장에게 3가지를 요구했다.

 

1. 12월 9일 낮동안 Z 부대의 북방 180km 에 대한 정찰

2. 10일 아침에 싱고라 상공 정찰

3. 10일 낮동안 싱고라 상공에서 전투기에 의한 항공엄호

 

요구사항을 보면 필립스 제독이 10일 해가 뜨기 전에 코타바루가 아니라 북쪽으로 220km 더 나아가 싱고라에 상륙 중인 일본군을 공격할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싱고라 및 파타니 지역에 상륙한 일본군이 주력이었다.

당시 영국공군의 능력으로 1번과 2번은 가능했으나 3번 요구는 말레이 북부의 비행장이 초기에 함락되고 그곳의 영국공군이 일본항공력에 제압당한 상황에서 실행이 불가능한 것이었으므로 펄포드 소장은 브룩포팸 대장에게 보고했다.

브룩포팸 대장은 항공엄호 없이 Z 부대가 타이 만에 진입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나 지휘권이 없었으므로 출항을 막을 수 없었다. 

 

필립스 제독이 이틀만 기다렸다면 그는 중순양함 1척, 네덜란드 경순양함 1척, 미국구축함 4척을 추가로 이끌고 출항할 수 있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Z 부대의 대공능력도 강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필립스 제독은 시간이 관건이며 또한 사이공의 일본기들이 자신이 가려는 말레이 북부까지 740km 이상을 날아와 공격을 가하고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바로 그날 새벽에 일본기들이 훨씬 먼 거리를 날아와 싱가포르를 폭격했다.

 

결국 지휘권의 통일을 반대한 해군성의 고집이 말레이 해전의 참패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였다.

공군 장교로서 항공기의 위력을 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던 브룩포팸 대장에게 지휘권이 있었다면 그는 Z 부대의 출항을 불허하거나 최소한 추가 함정들이 도착할 때까지 연기시켰을 것이다.

 

부두에서 출항 준비가 한창일 때 프린스오브웨일스의 함장 존 리치 대령은 짬을 내어 상륙했다.

소위 후보생으로서 모리셔스에서 근무하고 있던 아들 헨리 리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부자는 기지의 수영장에서 만나 음료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존 리치 대령은 몇 시간 후 출항하여 돌아오지 못했다.

헨리 리치는 나중에 해군참모총장까지 승진하여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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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마지막 1주일

 

프린스오브웨일스는 1941년 12월 2일 오후에 싱가포르 해군기지에서 가장 좋은 정박지인 서벽에 접안했다.

톰 필립스 제독이 부두에 나와 자신의 기함이 정박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전날인 12월 1일을 기하여 필립스 제독은 대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새로 편성된 동양함대 총사령관(Commander-in-Chief of the Eastern Fleet)에 임명된 상태였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도착은 전 세계에 예고되어 있었으나 필립스 제독은 동양함대의 전력을 자세히 밝히기 싫었다.

따라서 함명은 프린스오브웨일스만 밝혔을 뿐 리펄스는 그냥 대형함(heavy ship)이라고 표현했고 호위함정들의 규모도 밝히지 않았다.

자신들의 실력이 프린스오브웨일스보다 낫다고 자부하던 리펄스의 승조원들은 프린스오브웨일스만 부각되고 자신들의 함정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상황에 불만을 터뜨렸다.

 

필립스 제독은 프린스오브웨일스가 도착하는 부두에 소수 기자들만 출입을 허락했다.

대다수 기자들은 해군당국이 나누어 준 보도자료를 손에 쥔 채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서 프린스오브웨일스의 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싱가포르의 지역 언론사들은 일제히 해군의 비밀주의를 성토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틀만에 해군이 손을 들었다.

필립스 대장은 프린스오브웨일스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어 수많은 기자를 초대했으며 장교들은 기자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자들은 만족했고 다음날부터 해군에 우호적인 기사를 쏟아내었다.

기사 내용은 대개 동양함대의 도착으로 일본이 싱가포르를 공격할 기회는 사라졌다는 것이었으며 당시 싱가포르 주민이 믿고 싶어하던 희망사항일 뿐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싱가포르에 정박하는 동안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승조원들은 낮이면 장거리 항해에 지친 함정을 정비하느라 힘들었지만 밤이 되면 상륙하여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해군기지에서 약 25km 떨어진 싱가포르 시내까지 가는데 버스는 30센트였으며 택시는 2말레이달러였는데 당시 환율은 1파운드 = 9말레이 달러였다. 

싱가포르에는 12월 1일을 기하여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으나 시가지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시내에는 수많은 영화관과 캬바레가 정상 영업을 하고 있었으며 래플즈 호텔을 비롯한 여러 호텔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음악회나 무도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리펄스는 곧 호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승조원을 상륙시키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의 협상은 1941년 11월 들어 난항을 겪으면서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일본은 11월 25일까지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12월 1일을 기하여 개전한다고 결정한 바 있었다.

이후 도조 수상은 협상 시한을 11월 29일까지 연장했으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미국은 11월 26일에 중국으로부터의 철병과 삼국동맹 파기를 요구하는 헐 노트를 전달하여 일본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1941년 12월 1일에 도쿄 황궁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 12월 8일을 기하여 미국, 영국 및 네덜란드에 대해 개전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남방작전 계획에 따르면 일본은 개전과 동시에 다섯 방면으로 공격을 실시할 생각이었다.

 

1. 진주만 : 6척의 정규항모로 이루어진 항공모함기동부대가 기습하여 미태평양함대의 주력을 격멸한다.

2. 필리핀 : 대만에 주둔 중인 지상발진항공기가 장거리 공습을 실시하여 미국의 항공력을 말살하고 함정들을 타격한다. 이후 수송선이 확보되는 즉시 상륙한다.

3. 괌, 웨이크, 길버트 제도 : 중부 태평양 상에 있는 미국 및 영국의 전진기지인 이 섬들은 공습한 후 상륙하여 점령한다. 이후 비행장을 건설하여 미국의 반격에 대비하는 거점으로 삼는다.

4. 홍콩 : 영국의 중국 내 거점인 홍콩은 1개 사단을 투입하여 점령한다.

5. 말레이 반도 : 해군 함정의 호위 하에 병력을 말레이 반도에 상륙시켜 북쪽으로부터 싱가포르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상륙하여 석유가 펑펑나는 유전을 차지하고 버마로 진격하여 중국에 대한 지원 루트를 끊을 것이었다.

버마를 제외한 남방작전 전체에 걸리는 기간은 6개월로 예상하고 있었다.

 

(일본의 전쟁계획. 출처 : The Sinking Of The Prince Of Wales & Repulse : The End Of The Battleship Era, P.80)

 

영국전함 2척을 포함한 Z 부대의 파견은 말레이 침공에 위험 요소였으므로 일본해군은 대응책을 마련했다.

말레이 침공을 지휘하는 제2함대 사령장관 곤도 노부다케 중장은 14인치 주포 8문을 장착한 전함 공고와 하루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태생이 순양전함인데다가 함령이 오래되어 대규모 개조를 거쳤음에도 Z 부대와의 포격전에서 열세라고 판단했다. 

말레이 반도에 상륙하는 제25군을 직접 호위하는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의 남파함대에는 아예 전함이 없었다.

일본해군 내부에서는 Z 부대에 대응하기 위하여 전함을 추가로 파견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으나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항공력을 사용하여 Z 부대를 격멸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말레이 침공을 지원하는 제22항공전대의 전력을 보강하는 동시에 육상공격기의 뇌격훈련을 강화했다.

 

(미츠비시 G3M 96식 육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G3M)

 

사이공 근교에 전개한 마츠나가 사다이치 소장의 제22항공전대는 원산 및 미호로해군항공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각각 96식 육상공격기 36대씩 보유하고 있었다.

야마모토 대장은 필리핀 공격을 담당한 제21항공전대로부터 신형 1식 육상공격기 27대를 보유한 가노야해군항공대를 빼내어 제22항공전대에 추가했다.

이로써 제22항공전대는 96식 육공 72대, 1식 육공 27대, 전투기 36대와 정찰기 6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미츠비시 G4M 1식 육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G4M)

 

일본해군은 Z 부대의 항해를 방해하기 위하여 기뢰를 설치했다.

기뢰부설함 다츠미야마루와 나가사가 1941년 12월 6일 밤과 7일 새벽에 걸쳐 싱가포르의 북동쪽에 있는 티오만 섬과 아남바 제도 사이에 1,000개의 기뢰를 설치했다.

Z 부대의 출항을 감시하기 위하여 잠수함도 파견했다.

12월 2일까지 10척의 잠수함이 싱가포르 북동쪽에 3중 초계망을 폈으며 2척이 따로 싱가포르 부근을 감시했다.

12월 8일까지 4척의 잠수함이 추가로 투입되었다.

 

1941년 12월 4일 아침에 말레이 침공을 담당한 일본제25군의 주력을 태운 수송선 19척이 해남도의 삼아항을 떠났다.

이후 5일부터 7일에 걸쳐 사이공을 비롯한 인도차이나의 항구에서 수송선 9척이 추가로 출항했다.

28척으로 이루어진 수송선단은 35척이 넘는 전투함으로부터 호위를 받았다.

수송선들은 캄보디아 앞바다에서 집결한 후 연합군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남쪽이 아닌 서쪽으로 항진하기 시작했다. 

선단은 타이만 중앙에서 각자의 목표를 향해 흩어질 것이었다.

 

연합국은 일본군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으나 전쟁이 현실화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는 일본의 기만이 통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서구 열강이 일본을 과소평가한 결과였다.

평균적인 서구인의 인식으로 일본인이란 뻐드렁니에​ 근시면서 왜소한 체격을 가진 열등한 인종으로 기계문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조잡한 장비를 사용했다.

서구인들은 일본이 감히 영국이나 미국같은 선진국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41년 12월 초의 일주일 동안 연합국 측의 동정은 다음과 같다.

12월 1일 월요일

​말레이 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영국해군성은 필립스 제독에게 Z 부대가 도착하면 최대한 빨리 싱가포르를 떠나 동쪽 바다를 초계하라고 명령했다.

타란토의 경우처럼 싱가포르에 정박한 상태로 일본군의 공습을 받는 상황을 염려한 명령이었다.

12월 2일 화요일​

필리핀에서 이륙한 미국 정찰기가 남쪽으로 향하는 일본잠수함 12척을 발견했다.

연합국 정보기관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캄란 만에 21척의 일본군 수송선이 집결했으며 ​태평양, 대서양 및 인도양 전역에서 일본상선이 사라졌다.

정보기관들은 또한 남부 인도차이나에 집결한 일본군의 항공세력은 180대로 그중 90대는 중폭격기라고 평가했다.

12월 3일 수요일

영국해군성은 다시 필립스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최대한 빨리 Z 부대를 이끌고 출항하라고 요구했다.

전날 발견된 일본잠수함이 U-47 처럼 싱가포르 해군기지에 잠입하여 뇌격을 가할까봐 두려워한 명령이었다.

해군성은 또한 미국아시아함대 총사령관 토머스 하트 제독에게 미국구축함 8척의 싱가포르 파견을 요청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영국함대에 미국함정을 끌어들여 미국의 참전을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으로서 일본과의 개전시 미국이 자동적으로 참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영국이 확신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

필립스 제독은 해군성에 보낸 답신에서 자신이 곧 마닐라로 가서 하트 제독을 만날 것이며 호주 국민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리펄스를 호주의 다윈으로 파견할 예정이라고​ 보고했다.

또한 R급 전함 4척과 전함 워스파이트를 최대한 빨리 싱가포르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12월 4일 목요일​

필립스 제독이 2명의 참모와 함께 항공기를 타고 싱가포르를 떠나 마닐라로 향했다.​

12월 5일 금요일

리펄스가 구축함 테네도스 및 호주구축함 뱀파이어와 함께 싱가포르를 떠나 호주 다윈으로 향했다.

필립스 제독은 마닐라에서 하트 제독과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12월 6일 토요일

필립스 제독과 하트 제독은 마닐라에서 전날에 이어 회담을 계속했다.

하트 제독은 영국 측이 홍콩에 있던 구축함 3척을 불러들인다면 당시 보르네오의 발릭파판에 있던 미국구축함 4척을 싱가포르로 파견하겠다고 말했고 필립스 제독이 동의했다.​

회담 도중 놀라운 소식이 들어왔다.

그동안 캄란 만에 집결해 있던 일본수송선들이 집결지를 떠나 타이 만을 항진 중이라는 사실을 말레이 북부의 코타바루에서 이륙한 호주군 허드슨 경폭격기가 발견한 것이었다.

기장 잭 램쇼 중위는 25척 이상의 일본상선이 전함 1척, 순양함 5척, 구축함 7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코타바루 북방 300km 해상에서 서쪽으로 항진 중이라고 보고했다.(전함이라고 보고한 함정은 중순양함이었다.)

연합군은 예민하게 대응했다.

발릭파판에 있던 미국구축함들은 24시간 내로 준비를 갖추고 싱가포르로 출발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리펄스도 싱가포르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필립스 제독은 소식을 들은지 1시간 이내로 비행기에 올라 싱가포르로 출발했는데 얼마나 서둘렀는지​ 마닐라 시내에 놀러 나갔던 비행기 승조원 1명은 버려둔 채였다.

일본군은 운이 좋았다.

선단이 발견되었을 때 필립스 제독은 마닐라에 있었고 리펄스는 싱가포르를 떠나 호주를 향하고 있었다.

만일 그 순간 필립스 제독과 리펄스가 싱가포르에 있었다면 필립스 제독은 즉시 Z 부대를 이끌고 일본선단을 수색했을 것이다.

물론 일본제22항공전대가 비상사태에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일본군은 Z 부대를 무찌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진주만 기습이 실시되기 전이었다.

영국전함이 일본선단을 요격하려다가 반격을 받아 격침당해 버리면 전 세계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며 진주만을 포함한 연합군 기지의 경계 태세를 최고도로 끌어올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남방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진주만 기습 작전이 위험해질 것이었다.

곤도 제독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일본선단은 뱃머리를 돌려야만 했을 것이고 남방작전 시간표는 처음부터 헝클어졌을 것이다.

물론 그랬다고 싱가포르가 살아남았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레이 반도의 영국군에게 방어태세를 가다듬을 시간을 벌어줄 수 있었다.

12월 7일 일요일

필립스 제독은 아침 일찍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그러자 걱정에 휩싸인 호주 및 뉴질랜드 해군 관계자가 면담을 요청했다.

한시바삐 자신의 참모들과 회의를 해야만 했으나 필립스 제독은 꾹 참고 동맹국 대표들을 만나 안심시키고 이어서 네덜란드 해군 및 미해군의 연락장교까지 면담했다.

오후에는 리펄스가 도착했고 벵골만에서 선단을 호송하던 순양함 엑서터는 선단을 떠나 전속력으로 싱가포르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날씨가 나빠 항공정찰은 어려움을 겪었다.

악천후를 무릅쓰고 이륙한 정찰기 몇 대가 일본선단과 잠깐 접촉했지만 시계가 나쁘고 보고가 단편적이라 전체적인 상황을 알기 어려웠다.

일본선단에 너무 접근했던 정찰기 1대는 일본기에 의하여 격추되었다.

결국 상황파악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전쟁을 앞둔 마지막 날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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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항해

 

1941년 10월 26일 토요일 오후 1시 8분에 프린스오브웨일스는 닻을 올리고 외해로 나갔다.

전쟁내각에서 싱가포르 파견을 결정한지 6일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구축함 엘렉트라와 익스프레스, 그리고 긴 여정의 첫 단계에 동행하도록 서부연안사령부(Western Approach)에서 내어준 구축함 헤스페러스가 호위했다.

톰 필립스 제독의 참모들이 지참한 열대용 방서모를 보고 자신들의 행선지를 알아차린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승조원들은 미국과 협상 중인 일본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중요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유럽을 떠나 머나먼 극동으로 간다고 생각하여 분노했다.

 

정식으로 G 부대라는 이름을 받은 4척의 함정은 프랑스에서 발진하는 독일의 장거리 정찰기를 피해 아일랜드의 북쪽을 돌아 대서양으로 진입했다.

지중해를 통과하는 것은 위험했으므로 아프리카를 돌아서 가야 했다.

첫 목적지는 시에라리온의 프리타운이었다.

G 부대는 18 - 20노트의 속력을 유지했는데 이 정도면 유보트가 추적하기 힘들었으며 더 빠르면 구축함의 연료소비가 심했다.

유보트의 위협을 피하여 G 부대는 지그재그로 운행했다.

일상은 4시간 근무 8시간 휴식이라는 사이클로 돌아갔으며 하루 2시간씩 매일 포격 연습이 있었다.

모두들 이번 임무를 전투보다는 일종의 외교임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4번째 구축함인 레기온이 합류했으며 나흘째 되던 날 구축함 헤스페러스와 레기온은 지브롤터로 돌아갔다.

 

그리녹을 출발한지 11일째인 1941년 11월 5일에 G 부대는 프리타운에 들러 급유를 받고 다음날 출항했다.

승조원들은 상륙허가를 받아 하룻밤을 육지에서 즐겼으며 다음날 출항할 때 전원 시간 내로 돌아왔다.

프리타운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G 부대에서는 적도제가 치러졌다.

 

열대 해역에 들어섬에 따라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시원찮은 환기 능력 때문에 승조원들의 고생이 심해졌다.

군의관 퀸 소령은 전투배치 훈련 중에 해치를 닫으면 열사병의 우려가 있다고 필립스 제독에게 경고했다.

기관실이나 보일러실에서 일하는 승조원의 고생이 특히 심하여 2시간마다 교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부 몇몇은 더위먹고 실신했다.

당시 보고서에 나타난 구역별 최고 온도는 다음과 같다.

 

기관실 - 섭씨 50도, 보일러실 - 섭씨 58도, 기계실 - 섭씨 66도, 작업장 - 섭씨 38도, 어뢰작업실 - 섭씨 43도, 하갑판 - 섭씨 35도, 사관실 - 섭씨 27도

 

G 부대가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던 11월 10일에 처칠 수상은 런던 시장의 취임식에서 연설했다.

이 연설에서 처칠은 강력한 신형전함과 가장 큰 항공모함으로 이루어진 막강한 함대가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으로 향하고 있으며 만일 미국이 일본에게 선전포고한다면 영국은 1시간 내로 미국을 따를 것이라고 선언했다.

 

두번째 기항지 케이프타운을 앞두고 G 부대는 심한 풍랑을 만나 구축함 익스프레스에서 1명이 실종되었다.

프리타운을 떠난지 10일 만인 1941년 11월 16일에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케이프타운에 입항했다.

필립스 제독은 비행기를 타고 프리토리아로 가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상인 스머츠 원수와 회담했다.

G 부대는 이틀간 머물렀는데 승조원들은 최소한 1박은 육지에서 지냈다.

시민들은 우호적이었으며 많은 승조원들이 시민들의 집에 초대받아 하룻밤을 지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케이프타운에서 39명의 승조원을 새로 받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먼저 기항했던 영국함정에서 탈영했다가 붙잡혀 영창을 살던 장병들이었다.

리치 대령은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전과 기록을 말소하겠다고 약속했다.

 

스머츠 원수와 회담을 마친 필립스 제독이 돌아오자 G부대는 11월 18일 오후에 케이프타운을 출항했다.

그날 아침에 항공모함 헤르메스가 간단한 정비를 위하여 인접한 시몬스타운 해군기지에 입항했는데 당시 헤르메스에게는 특별한 임무가 없었다.

따라서 피해를 입은 인도미터블 대신 헤르메스를 G 부대에 편성하는 것은 가능했다. 

헤르메스는 탑재기가 20대로서 영국해군에서 가장 작은 항공모함이었지만 그래도 G 부대에 배속되었으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군성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프린스오브웨일스는 헤르메스의 불과 몇 km 옆을 지나 바다로 나섰다.

 

(영국항공모함 헤르메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HMS_Hermes_(95))

 

케이프타운을 떠난 G 부대는 콜롬보를 향했으며 도중에 급유를 위하여 모리셔스와 아두 환초에 들렀다.

아두 환초에는 영국해병대의 분견대가 근무 중이었는데 프린스오브웨일스의 방문은 축복이었다.

2달 동안 해병대의 식사는 딱딱한 비스킷과 청어 또는 정어리, 토마토, 분말 계란이 전부였고 하루 물 사용량은 식수와 세면을 합쳐 1리터 남짓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해병대를 위하여 크리스마스 만찬 수준의 식사를 만들어 보내주었을 뿐 아니라 갓 구운 빵과 싱싱한 과일, 야채, 고기 등 신선 식품과 식수에다가 맥주 및 럼주까지 잔뜩 주었다.

갑자기 너무 잘 먹은 해병대원 대부분이 설사를 했다.

 

G 부대는 1941년 11월 27일에 콜롬보에 도착했다.

리펄스는 이미 도착하여 트링코말리에 정박중이었으나 지중해 함대에서 파견한 구축함 인카운터와 주피터는 도착하지 않았다.

톰 필립스 제독은 콜롬보에 도착하자마자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을 타고 싱가포르로 먼저 날아가 작전을 논의했다.

 

11월 28일에 인카운터와 주피터가 도착하자 다음날인 29일에 프린스오브웨일스는 구축함 엘렉트라, 익스프레스, 인카운터, 주피터와 함께 콜롬보 항을 나섰고 리펄스도 트링코말리를 출항했다.

해상에서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가 만나면서 G 부대는 Z 부대(Z Force)로 이름이 바뀌었다.

필립스 제독이 없는 상황에서 리펄스의 함장 윌리엄 테넌트 대령이 선임이었으므로 Z 부대를 지휘했다.

Z 부대는 3일 간의 항해를 마치고 1941년 12월 2일 오후에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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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G부대(2)-프린스오브웨일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영국이 기대를 걸고 있던 신형전함 킹조지5세급의 2번함이었다.

영국은 1930년대 말에 비상건함계획을 통해 킹조지5세급 전함 5척을 건조했는데 킹조지5세급은 1927년에 취역한 넬슨 이래 최초로 만든 전함이었으며 기술발전에 따라 전함의 방어력과 순양전함의 속력을 함께 가진 고속전함이었다.

문제는 제2차 런던조약의 제한 조건을 지키느라 배수량이 35,000톤으로 제한되었고 주포도 14인치(356mm) 10문으로 다소 약하다는 점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취역한 독일전함 비스마르크는 380mm 주포 8문, 미국전함 노스캐롤라이나는 16인치 주포 9문, 야마토는 460mm 주포 9문을 장착하고 있었다.

킹조지5세급의 부포는 5.25인치 양용포 연장 8기, 16문을 보유했으며 대공포로는 40mm 폼폼포 8연장 4기, 32문을 탑재했다.

방어력은 뛰어난 편이었으며 진보된 설계의 벌지와 격벽 덕분에 수선하 방어력도 좋은 편이었다.

영국해군은 킹조지5세급 전함이 불침함이라고 비공식적으로 선전하고 있었다.

 

(영국전함 프린스오브웨일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title=Sinking_of_Prince_of_Wales_and_Repulse)

 

프린스오브웨일스는 1937년 1월 1일에 버큰헤드 조선소에서 기공하여 1939년 5월 4일에 5만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수했다.

1940년에 리버풀에서 의장 공사를 받던 중 공습을 받아 독일기가 떨어뜨린 폭탄이 함체와 안벽 사이에 떨어져 폭발하는 바람에 함체가 기울어질 정도로 심하게 침수되었고 이후 불운함이라는 평판이 생겼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1941년 1월 19일에 리버풀에서 취역했는데 다음날 예인선 4척이 로지스를 향하여 리버풀을 떠나는 프린스오브웨일스를 예인하다가 모래톱에 좌초시켰다. 

로지스에 머무르는 동안 폼폼대공포원이 실수로 포탄 2발을 발사하여 부두 노동자 1명이 다쳤고 B 포탑의 장전실에서 불이 3번이나 났으며 수병 2명이 낙상을 입었다.

 

함장 존 리치 대령은 포술 장교로서 만능 스포츠맨이었으며 테넌트 대령과 마찬가지로 동년배에서 가장 뛰어난 장교 중 한명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싱가포르로 향할 당시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승조원은 사령관 톰 필립스 제독의 참모를 포함하여 110명의 장교와 1,502명의 부사관 및 수병이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 역시 리펄스와 같은 거즈쉽으로 수병들은 대부분 데븐포트 훈련소 출신이었는데 리펄스보다 징집병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시험항해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스캐파플로우에 불려와서 비스마르크 추격전에 투입되었다.

많은 기기들이 아직 조정이 끝나지도 않았으므로 조선소 기술자들이 승함하여 전투 해역으로 달려가는 도중에도  기기를 조정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후드와 함께 홀랜드 제독의 지휘 하에 스캐파플로우를 출항하여 아이슬란드 남서쪽 해상으로 나아갔다.

 

1941년 5월 24일 오전 5시 35분에 독일함대와 만나자 후드에 승좌한 홀랜드 제독은 거리를 좁히도록 명령했다.

앞장 선 후드는 거리가 24,000m 까지 줄어들자 포격을 시작했는데 독일중순양함 프린츠오이겐을 비스마르크로 착각하여 공격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어서 비스마르크가 포격을 개시했고 아침 6시에 약 14,000m 거리에서 발사한 일제사격 중 1발이 후드의 탄약고에 직격했다.

후드는 엄청난 폭발과 함께 침몰했고 1,419명의 승조원 중 3명만이 구조되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처음부터 비스마르크와 교전했는데 독일함대에 접근하는 중이라 전방 6문의 함포만이 사용가능했다.

첫 5번의 일제사격은 비스마르크를 넘어갔으며 이때 주포 1문이 고장을 일으켜 전투가 끝날 때까지 수리할 수 없었다.

 

후드가 격침된 후 홀로 남은 프린스오브웨일스는 독일함대와 포격전을 벌여 비스마르크에게 14인치 주포탄 2발을 명중시켰으나 자신 또한 비스마르크로부터 4발, 프린츠오이겐으로부터 3발의 명중탄을 맞았다.

홀랜드 제독의 전사에 따라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순양함 노퍽에 승좌한 웨이크워커 소장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웨이크워커 소장은 홀로 싸우고 있던 프린스오브웨일스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연막을 치면서 전장을 이탈하여 순양함 노퍽 및 서퍽과 합류했다가 나중에 아이슬란드로 향했다.

이 전투에서 프린스오브웨일스는 13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린스오브웨일스에게 맞은 명중탄으로 연료탱크가 깨져 중유가 흘러나왔으므로 임무를 중단하고 프랑스로 돌아가다가 3일 후 영국함대에 걸려 격침되었다.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동행했던 후드가 격침되면서 프린스오브웨일스는 불행을 몰고 다니는 사람인 '요나'(Jonah) 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었다.

 

상처를 수리한 프린스오브웨일스는 1941년 8월에 처칠 수상을 태우고 캐나다의 뉴펀들랜드로 항해했다.

이곳에서 처칠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회담한 후 대서양 헌장을 발표했다.

 

8월 말에 영국으로 돌아온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지중해 함대에 배치되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1941년 9월 말에 군수품 81,000톤을 실은 수송선 9척을 몰타로 수송하는 할버드 작전에 투입되었다.

할버드 작전에 참가한 함정은 전함 3척(프린스오브웨일스, 넬슨, 로드니), 항공모함 1척(아크로열), 순양함 5척 및 구축함 12척이었다.

선단은 19412년 9월 27일에 이탈리아 공군의 공습을 받았으며 이어 이탈리아 함대가 접근했다.

그러나 프린스오브웨일스, 로드니, 그리고 아크로열이 선단에서 떨어져나와 요격에 나서자 이탈리아 함대는 도망쳤다.

수송선 9척 중 항공어뢰에 격침된 1척을 제외하고 8척이 몰타에 도착함으로써 할버드 작전은 성공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할버드 작전 당시 최고 31.5노트까지 속력을 내었으며 2대의 이탈리아 뇌격기를 격추했으나 아크로열의 전투기 1대도 실수로 격추했다. 

할버드 작전을 마친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지브롤터를 거쳐 10월 6일에 스캐파플로우에 도착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취역하자마자 시험항해도 마치기 전에 여러 임무에 투입되었지만 함체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승조원들은 경험이 일천한 상황에서 후드의 끔찍한 최후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이후 끊임없이 임무에 투입되면서 차분히 배를 정비하거나 제대로 쉴 시간을 갖지 못했다.

게다가 지중해에서의 경험은 열대 기후에서 작전하기에는 킹조지5세급의 환기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 승조원의 사기는 낮은 편이었다.

 

(항공모함 인도미터블.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HMS_Indomitable_(92)

 

인도미터블은 영국이 비상건함계획에 따라 건조 중이던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의 4번함으로 1937년 11월 10일에 빅커스 암스트롱 사에서 기공하여 1940년 3월 26일에 진수하고 1941년 10월 10일에 취역했다.

배수량 23,000톤의 신예 항공모함인 인도미터블은 취역 1주일 후인 1941년 10월 17일에 함장 해럴드 모스 대령의 지휘 하에 시험항해를 위하여 영국을 떠나 카리브 해로 향했다.

인도미터블은 허리케인 전투기 9대, 풀마 전투기 12대, 알바코어 뇌격기 24대를 싣고 있었고 속력이 31노트에 달해 프린스오브웨일스 및 리펄스와 좋은 조합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인도미터블은 버뮤다에 도착한 지 일주일 후인 1941년 11월 3일에 킹스턴 항 바깥의 산호초에 좌초되었다.

인도미터블은 다음날 자력으로 빠져나와 킹스턴 항에 입항했다.

잠수부를 동원하여 함체를 살펴본 결과 함체의 철판이 심하게 우그러들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도미터블은 함재기들을 육지에 내려놓고 미국 버지니아 주 노퍽으로 가서 수리를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미해군은 동맹국 함정의 수리에 가장 높은 우선권을 주어 12일 만에 수리를 마쳤다.

노퍽을 떠난 인도미터블은 킹스턴에 들러 함재기를 실은 다음 싱가포르로 향했으나 너무 늦었다.

인도미터블이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동안 일본항공기들이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를 격침했다.

 

G부대에 편성된 구축함은 4척으로 익스프레스와 엘렉트라는 본국함대에서 차출되어 프린스오브웨일스를 따라 영국을 출발했다.

인카운터와 주피터는 지중해 함대에서 차출되어 콜롬보에서 합류했는데 싱가포르에 도착한 후 2척 다 기관고장을 일으켜 말레이 해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Z부대 사령관 톰 필립스 대장과 참모장 아서 팔리서 소장.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Tom_Phillips_(Royal_Navy_officer))

 

G 부대 사령관은 53세의 톰 필립스 중장으로 37년간 해군에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1915년의 갈리폴리 상륙작전 때 순양함 버캔티를 타고 참가했으나 유틀란트 해전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종전 이후에 참모대학을 나온 후 필립스 제독은 중요한 보직을 차례로 거쳤다.

해군성 계획국 부국장, 동인도 총사령부 참모장을 거쳐 1935년부터 38년까지 해군성 계획국장을 지냈다.

1938년에 준장으로 진급한 필립스 제독은 본국함대의 구축함전대 사령관이 되었으며 39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해군참모차장이 되었다.

필립스 제독은 해군참모차장 시절에 해상이었던 처칠의 눈에 들어 큰 신임을 받았으며 1940년 2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키가 작아 '엄지손가락 톰'(Tom 'Thumb' Philips) 이라는 별명을 가진 필립스 제독은 동년배 중에서 지적이고 결단력을 가진 최고의 제독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권한 위임보다는 중앙집권적인 지휘를 좋아했고 세부 사항을 철저하게 챙겼다.

전체적으로 보아 전략적인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했으나 결코 인기가 높거나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G 부대 사령관으로서 필립스 제독에게는 2가지의 결격 사유가 있었다.

첫쨰로 그는 1917년 이후 해상에서 전투를 치러본 경험이 없었다.

물론 해군참모차장으로서 제2차 대전 초기의 여러 해전을 지휘했지만 육지에서 해상지휘관을 통하여 해전을 지휘하는 것과 해상에서 직접 지휘하는 것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둘째로 그는 항공기의 위협에 둔감한 편이었는데 특별히 심한 것은 아니었고 당시 영국해군의 고위 장교 대부분이 비슷했다.

 

필립스 제독의 참모장은 아서 팔리서 소장으로 포술장교였다.

말레이 해전 당시 팔리서 소장은 싱가포르에 남아 육군 및 공군과의 연락을 담당하게 된다.

 

1941년 10월 20일 월요일에 싱가포르 파견이 결정되었을 때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스캐파플로우에 정박 중이었다.

그날 오후에 탄약을 실은 바지선이 현측에 와서 탄약을 싣기 시작했다.

이후 이틀 동안 프린스오브웨일스와 구축함 익스프레스 및 엘렉트라의 승조원들은 긴 항해에 대비하여 탄약, 식량 및 물을 실었다.

 

목요일 아침에 3척의 군함은 스캐파플로우를 빠져나와 금요일에 그리녹에 도착하여 톰 필립스 제독과 참모들을 태웠다.

프린스오브웨일스가 정박한 사이 바지선들이 다가와 탄약, 식량 및 물을 가득 채웠다.

그리녹에서는 프리타운이나 남아프리카로 가는 영국공군 장교 몇 명이 올라탔고 싱가포르에 보내는 오리콘 대공기관포와 그 탄약도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필립스 제독과 참모들이 승함하자 함대기(Admiral's Flag)가 올라갔다.

 

다음날인 1941년 10월 26일 토요일에 출항할 때 필립스 제독의 참모들은 행선지를 알고 있었지만 프린스오브웨일스에서는 수뇌부를 제외하고는 어딘가 먼 곳으로 간다는 것만 알았을 뿐 행선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필립스 제독의 참모들이 열대용 방서모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승조원들은 행선지를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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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G부대(1) - 리펄스

 

G부대의 파견 결정이 났지만 3척의 함정이 싱가포르에 도착하려면 몇 주가 필요했다.

전함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지중해에서의 선단호송임무를 마치고 2주 전에 스캐파플로에 돌아온 참이었다.

신예 항공모함 인도미터블은 사흘 전에 영국을 출항하여 카리브 해를 향하여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다.

인도미터블은 카리브 해에서 함재기 및 함정 승조원들을 훈련시킨 후 극동으로 향할 것이었다.

순양전함 리펄스는 인도양을 향하고 있었다.

 

(순양전함 리펄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HMS_Repulse_(1916)

 

리펄스는 1914년에  R급 전함으로 기공되었으나 자매함 리나운과 함께 건조 도중에 순양전함으로 바뀌어 1916년에 취역했다.

주포는 15인치 연장포 3기, 합계 6문이었으며 부포는 4인치 포 12문이었다.

배수량은 32,000톤, 출력은 112,000마력으로 최고 속력은 32노트였다. 

어뢰에 대비하여 수선하 함체 일부에 폭 5.2m 의 벌지를 두르고 있었다.

 

리펄스는 1917년 11월에 벌어진 제2차 헬리골란트 바이트 해전에 참가하여 독일순양함 쾨니히스베르크에게 15인치 주포탄 1발을 명중시켰는데 이것이 리펄스가 함생을 통하여 유일하게 적함에게 명중시킨 주포탄이었다.

종전 이후 리펄스는 다른 영국해군함정들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1925년에 리펄스는 황태자였던 에드워드를 태우고 남미와 남아프리카를 순항했으며 나중에는 싱가포르도 방문했다.

 

리펄스는 86만 파운드를 들여 1919년부터 21년까지 개장을 실시했다.

장갑판이 6인치에서 9인치로 늘어났으며 벌지도 추가했다.

이로써 중량이 4,600톤 늘어났는데 기관은 교체하지 않았으므로 최고 속력은 29노트로 떨어졌다.

리펄스는 1933년부터 3년간 100만 파운드 이상을 들여 다시 개장했는데 이때는 주로 대공무장을 강화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개전했을 때 리펄스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순양전함 특유의 약한 방어력에 더하여 제2차 개장에도 불구하고 대공 무장이 빈약한 것이 결점이었다.

리펄스의 대공 무장은 수동으로 조작하는 4인치 대공포 8문과 2파운더(40mm) 폼폼 기관포 8연장 2기, 16문이 전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지 4일 만에 리펄스는 해상에 나가 아이슬란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해역을 감시했다.

리펄스는 대서양으로 뛰쳐나오는 독일순양함을 격침하고 독일로 돌아가는 독일 상선들을 나포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후 리펄스는 39년 12월에 영국에 파병되는 제1캐나다사단 장병 20,000명을 실은 병력수송함 5척을 안전하게 호송했다.

1940년에는 노르웨이 전역에 참가했으나 독일함정들을 만나지 못했으며 이후 북대서양 초계와 선단 호송임무에 참가했는데 비스마르크 추격전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말레이 해전 당시 리펄스의 승조원들은 대다수가 1939년부터 근무했으며 리펄스의 모항 플리머스에 있는 데번포트 훈련소(Devonport Manning Depot)출신이었다.

데번포트 주민들은 대주가(guzzler)로 유명했으므로 해군기지의 별명은 "Guz" 였고 데븐포트에서 수병들을 공급받은 리펄스의 별명 또한 "거즈쉽"(Guz Ship)이었다.

 

리펄스는 1,181명의 승조원과 필요시 사령부 요원 24명을 태울수 있게 설계되었으며 싱가포르로 향할 당시 장교 69명과 부사관 및 수병 1,240명이 타고 있었다.

전쟁시 리펄스 크기의 배에 104명 정도 인원이 늘어나는 것은 평균보다 적은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승조원 1인당 공간이 넓었으며 환기도 잘 되었기 때문에 열대 해역에서 리펄스는 프린스오브웨일스보다 쾌적했다.

 

리펄스의 함장 윌리엄 테넌트 대령은 영국해군에서 가장 뛰어난 장교 중 한명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테넌트 대령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시 구축함 울프하운드를 타고 해안에 상륙하여 뛰어난 통솔력으로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질서정연하게 보트에 실어 대기 중인 철수선에 보냈다.

그는 6월 2일에 마지막 보트에 올라 해안을 돌며 확성기로 방송하여 해안에 남은 영국병사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철수했다.

테넌트 대령은 이 일로 동료와 상관들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으며 6월 7일에 바스 훈장을 받았다.

이후 수병들은 테넌트 대령을 '던커크 조'(Dunkirk Joe)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리펄스의 장교들은 다른 배와 마찬가지로 현역 장교와 예비역 장교가 섞여 있었으며 해병대 장교가 3명, 그리고 왈루스 수상정찰기를 다루는 해군항공대(Fleet Air Arm) 장교가 3명 있었다.

특이한 것은 호주해군의 장교후보생 5명으로서 이들은 영국에서 호주순양함 오스트레일리아에 오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영국에 도착해 보니 이미 오스트레일리아는 인도양으로 떠난 후였으므로 이들은 클라이드에서 리펄스를 타고 인도양으로 향했다.

 

부사관 및 수병의 60% - 70% 정도는 전쟁 전부터 복무 중이던 정규병이었으며 나머지는 개전 이후 징집된 병력이었다.

120명 정도는 16세 내지 17세의 소년이었으며 130명은 해병대였다.

 

전반적으로 리펄스의 규율은 엄정했고 사기는 높았으며 함장은 존경받고 있었다.

승조원들은 사격술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개전 이래 56,000km 에 달하는 호송 임무를 맡으면서 1척의 수송선도 상실하지 않았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다만 개전 이래 한번도 적에 대해 15인치 주포를 사용해 보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했으며 주포 사격을 해 볼 기회를 바라고 있었다.

1941년 8월 28일에 리펄스는 WS11 선단을 호송하라는 명령을 받고 영국 클라이드 항을 출항했다.

WS11 선단은 아프리카를 돌아 수에즈로 병력과 군수품을 수송하는 선단이었다.

리펄스는 인도양에 들어서면 선단을 떠나 트링코말리로 향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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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함 파견 결정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은 극동 지역에 전함을 보낼 여력이 없었으나 1940년에 영국본토항공전에서 승리하고 킹조지5세급 전함들이 차례로 취역하면서 여유가 생겼다.

영국함대가 1941년 5월에 비스마르크를 격침하자 영국 해군성(Admiraty)은 극동 지역에 전함을 보내는 문제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1941년 초여름에 작성한 해군성의 계획은 강력한 함정들을 인도양의 트링코말리에 집결시켜 본국함대(Home Fleet)와 지중해 함대(Mediterranean Fleet)에 이어 제3의 함대인 동양함대(Eastern Fleet)를 창설한다는 것이었다.

동양함대는 전함 및 순양전함 7척(넬슨, 로드니, 리나운, 리벤지, 래밀리즈, 레절루션, 로열소버린), 항공모함 1척(허미즈), 순양함 10척, 구축함 24척으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새로 만들어질 동양함대는 진주만에 전진 배치된 미태평양함대와 힘을 합쳐 일본의 확장 야욕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었다.

 

동양함대는 서류에서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R급 전함 4척(리벤지, 래밀리즈, 레절루션, 로열소버린)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건조된 것으로 작고 느렸으며 종전 이후 건조한 넬슨과 로드니는 크고 강력했으나 역시 느렸다.

순양전함 리나운은 빨랐으나 역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건조된 구형함이었으며 순양전함의 특성상 방어력이 약했다.

크고 강력하며 빠른 신형전함 킹조지5세급은 1척도 없어서 전제적으로 질보다는 양을 중시한 편성이었다.

 

함대 창설 시기도 문제였다.

동양함대에 배정된 전함들 중 많은 수가 오버홀이 필요했으며 신형 레이더도 달아야 했다.

게다가 순양함과 구축함도 당장은 본국함대, 지중해함대 및 선단호송에 필요했으므로 필요한 숫자를 차출할 수 없었다.

동양함대의 창설은 아무리 빨라도 1942년 3월이 되어야 가능했다.

 

사건의 진행은 해군성의 예상보다 빨랐다.

일본의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1941년 7월 26일에 석유금수조치를 취하면서 태평양에는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 전개되었다.

해군성은 1941년 8월 13일에 긴급 계획안을 만들어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에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회담 중이던 처칠 수상에게 보고했다. 

개요는 2달 내로 인도양에 순양전함 1척과 R급 전함 4척을 보내고 전함 넬슨과 로드니는 상황이 허락하는대로 추가 파견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해군성은 극동에 파견할 순양전함을 리나운에서 리펄스로 바꾸었으며 상황이 급박하므로 R급 전함의 개조는 미루었다.

 

해군성은 신형전함인 킹조지5세급을 극동지역에 보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속력이 빠른 독일전함 티르피츠나 샤른호르스트 및 그나이제나우가 대서양에 뛰쳐나와 호송선단을 공격하는 사태를 두려워했다.

해군참모총장(First Sea Lord) 더들리 파운드 원수는 1941년 8월 20일 회의에서 티르피츠에 대항할 수 있도록 미해군이 신형전함 2척 이상을 스캐파플로우에 파견할 경우에 한해서 극동 지역에 킹조지5세급 전함 1척을 파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해군이 2척 밖에 없는 자신들의 신형전함 모두를 티르피츠 잡는데 쓰라면서 스캐파플로우에 파견할 일은 없으니 사실상 극동 지역에 킹조지5세급 전함을 보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처칠 수상은 생각이 달랐다.

뉴펀들랜드에서 돌아온 처칠은 1941년 8월 25일에 파운드 제독에게 각서를 보냈다.

여기에서 처칠은 극동에 파견할 함대는 구형함으로 구성된 대규모 함대가 아닌 신예함으로 구성된 소규모 함대여야 한다면서 막 취역한 킹조지5세급 3번함 듀크오브요크, 순양전함 리펄스, 그리고 항공모함 포미더블로 이루어진 함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칠은 규모는 작지만 빠르고 강력한 이 함대가 싱가포르-트링코말리-시몬스타운을 잇는 삼각형 내에서 돌아다니면 일본해군의 활동을 마비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Winston_Churchill)

 

이후 파운드 제독과 주고받은 전문을 보면 처칠이 두가지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처칠은 일본에게는 말레이를 침공할 의사가 없고 단지 태평양과 인도양의 영국 수송선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보았으나 일본은 말레이를 침공할 생각이었다.

둘째로 만일  처칠의 생각처럼 일본이 말레이를 침공하는 대신 영국의 해상교통로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전함, 순양전함, 항공모함 각 1척으로 구성된 영국의 소규모 함대는 일본의 강력한 전함과 항공모함 세력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처칠이 요구한 함대는 비스마르크 추격전과 같은 상황에서 유효한 구성으로 처칠은 일본해군이 공고급 전함 1-2척을 사용하여 비스마르크처럼 영국의 해상교통로를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운용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독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력한 전함 및 항공모함 세력을 가진 일본이 독일해군처럼 소극적으로 행동할 이유는 없었다.

진주만 기습 이후 6개월간 벌어진 일들을 돌이켜 보면 3척으로 이루어진 영국의 소규모 함대가 인도양에 출현하는 것만으로 일본해군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처칠의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 소리였는지 알 수 있다.

다만 당시 미국과 영국에서 일본을 얕잡아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만큼 처칠만 비난할 일은 아니다.

 

처칠의 각서를 받은 파운드 제독은 3일 후인 8월 28일에 답신을 보냈다.

킹조지5세급 전함을 극동에 파견할 수 없다는 해군성의 입장은 변화가 없었으며 전문의 대부분은 티르피츠에 대비하여 킹조지5세급 전함 3척 모두를 본국 수역에 두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는데 할애했다.

처칠은 다음날인 29일에 7개 항으로 이루어진 강경한 어조의 전문을 파운드 제독에게 보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느리고 낡고 현대화 개수를 받지 않은 구형전함 여러 척을 인도양으로 보내는 것은 쓸데없이 비용과 인력만 많이 들 뿐이다. 신형전함 소수를 보내는 것이 일본에게 더 큰 억지력을 발휘한다.

2. 낡은 R급 전함은 8인치 포를 가진 적의 순양함에게는 대응이 가능하나 적이 고속전함 1-2척을 투입할 경우 물에 뜬 관이 될 뿐이다. 호주정부는 다수의 구형전함이 오는 것을 좋아할지 모르나 우리가 할 일은 동맹국의 어리석은 바람에 호응하는 것보다는 소수의 신형전함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일이다. 

3. 독일해군은 티르피츠 1척으로 우리의 킹조지5세급 전함 3척을 본국수역에 묶어두고 있다. 우리가 킹조지5세급 전함 1척을 극동으로 보내면 티르피츠가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는 골칫거리을 그대로 일본에게 강요할 수 있다.

4. 티르피츠에 대항하기 위하여 킹조지5세급 전함 3척이 모두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미국해군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고 비스마르크 때처럼 항공모함을 사용하여 티르피츠의 속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소련해군이 있는 한 티르피츠가 발틱해의 제해권을 위태롭게 내버려두고 대서양에 나오기는 어렵다. 게다가 독일해군은 비스마르크를 잃은 충격 때문에 감히 티르피츠를 대서양에 내보내지 못할 것이다.

5. R급 전함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은 대공방어를 강화한 후에 지중해에 투입하는 것이다.

6. 일본은 적어도 앞으로 3개월 간은 공격하지 않고 미국과 협상할 것이다. 그 기간 동안 킹조지5세급 전함이 극동에 도착하면 일본에게 결정적인 억지력을 발휘할 것이다. 

7. 이 문제에 관하여 귀관과 논의하고 싶다.

 

처칠이 요구한 파운드 제독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후 7주간 이 문제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1941년 10월 중순이 되자 누구도 극동 지역의 위기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과 일본의 협상은 난항을 겪고 있었고 영국은 도처에서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를 포착했다.

 

일찌기 1941년 6월부터 일본 외무성과 싱가포르, 몸바사 및 베이루트 주재 일본영사관 사이의 암호통신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케냐에서는 일본인 사업가들이 사업을 헐값에 처분하고 서둘러 귀국했다.

8월부터 일본상선의 해외 스케줄은 모두 취소되었으며 해외에 나와있던 일본상선은 서둘러 귀국했다. 

이에 따라 9월에는 인도양 전역에서 일본상선이 사라졌으며 10월이 되자 일본상선이 사기(house flag)와 국적 표시를 제거한 채 일본 내의 몇몇 커다란 항구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일본 국내의 해군예비역은 소집 통보를 받고 해군기지로 가서 신고했다.

이제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941년 10월 16일에 고노에 내각이 붕괴하고 이어서 도조 내각이 출범하자 도쿄주재 각국 대사들은 전쟁이 임박했다고 자국에 경고했다.

다음날인 10월 17일에 영국 전쟁내각은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외상 앤서니 이든은 킹조지5세급 전함 1척을 극동에 파견한다는 처칠의 계획에 찬성했고 노동당 당수 클레먼트 애틀리도 찬성했다.

유력한 각료들의 지원을 등에 업은 처칠은 해군 측에 말했다.

 

"우리에게 미해군의 지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전함 티르피츠는 우리의 신형전함 3척과 맞먹고 있다. 우리가 극동 지역에 신형전함을 1척 보내면 일본해군에게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고 그들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출장간 파운드 제독을 대신하여 회의에 참석한 해상(First Lords of the Admiralty) 앨버트 알렉산더 경은 영국과 일본은 경우가 다르다고 반박했다.

독일은 영국의 해상교통로를 위협했지만 영국은 일본의 해상교통로를 위협할 생각이 없었으며 일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어서 해군참모차장(Vice-Chief of the Naval Staff) 톰 필립스 중장이 구형전함을 파견한다는 해군성의 계획을 되풀이했다.

육군참모총장 존 딜 대장과 공군참모총장 찰스 포털 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칠은 해군참모총장이 없는 상황에서 결정을 내리지 않겠다면서 전쟁내각이 찬성하는 안에 해군이 끝까지 반대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은근한 경고와 함께 회의를 마쳤다.

 

1941년 10월 20일 월요일 오후 12시 30분에 다우닝가 10번지 수상 관저에서 열린 전쟁내각 방위위원회 회의에서 운명적인 결정이 내려졌다.

이번에는 해군참모총장 더들리 파운드 제독이 참석했고, 지난 회의에 참석했던 필립스 차장도 참석했다.

처칠은 처음부터 거칠게 나왔다.

그는 티르피츠가 대서양으로 뛰쳐나올 경우에 대비하여 킹조지5세급 전함 3척 모두를 본국 수역에 배치해야 한다는 해군성의 논리는 지겹도록 들었으며 전쟁내각은 티르피츠가 대서양에 튀어나옴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선박의 손실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파운드 제독은 구형전함을 파견하려는 해군성의 계획을 되풀이했으나 장황하기만 할 뿐 힘이 없었다.

킹조지5세급 전함 1척을 극동에 파견한 사이 티르피츠가 대서양에 뛰쳐나옴으로서 생길 수 있는 손실을 영국의 최고통치기구인 전쟁내각이 감당하겠다고 선언한 이상 해군성이 반대할 명분이 약했다.

이든 외상은 신형전함 1척을 극동으로 보냄으로써 얻는 정치적 이익이 상당하다면서 처칠을 지지했다.

이든 또한 처칠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개전과 동시에 말레이를 침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진 파운드 제독은 마침내 항복했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파운드 제독은 킹조지5세급 전함 1척을 케이프타운으로 파견하되 최종 목적지는 그곳에 도착한 후 상황을 종합하여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처칠은 그 대답에 만족했고 이제 주제는 북아프리카의 사막에서 오킨렉 장군이 준비하고 있던 십자군 작전으로 옮겨갔다.

이번에도 전함 파견 문제에 대해서는 처칠과 이든, 파운드 제독만이 발언했고 육군과 공군은 침묵했다.

 

이 회의에서 극동에 파견할 킹조지5세급 전함은 2번함 프린스오브웨일스로, 항공모함은 인도미터블로 정해졌다.

킹조지5세급의 3번함 듀크오브요크는 취역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준비가 부족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 리펄스, 인도미터블 그리고 호위 함정들로 구성되어 싱가포르로 향할 함대의 이름은 G 부대로 정해졌으며 향후 G 부대를 중심으로 동양함대를 창설할 것이었다.

회의에서는 G 부대와 동양함대의 사령관으로 해군참모차장인 톰 필립스 중장을 임명했다.

 

다음날인 1941년 10월 21일에 해군성은 프린스오브웨일스를 파견하기 위한 예비 명령을 내렸다.

특이한 점은 전날 파운드 제독이 말했던 바와는 달리 케이프타운에 도착한 다음 최종 목적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항공모함 인도미터블과 함께 트링코말리에 가서 이미 인도양으로 향하고 있던 순양전함 리펄스와 합류한 다음 싱가포르로 가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파운드 제독이 회의에서 했던 말과 실제 명령이 다른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아마 처칠 수상의 의지가 굳다는 걸 깨달은 해군성이 케이프타운에서 반전을 노리는 것이 부질없다고 생각하고 명령에 순순히 따르기로 결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로써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파견 결정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처칠 수상과 이든 외상은 일본이 말레이를 침공하지 않고 영국의 해상교통로 차단에 집중하리라고 예상한 반면 해군성은 말레이 침공 가능성을 높게 보고 침공 저지에 적합한 전력을 파견하려고 했다. 

사실 말레이를 침공하려는 일본군 입장에서는 구형전함을 여럿 파견한다는 해군성의 계획이 훨씬 위협적이었다.

비록 구형이라고는 하나 무려 7척의 전함이 한꺼번에 또는 1-2척씩 흩어져 병력과 장비를 실은 일본군 선단을 찾아 타이 만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상황은 함께 행동하는 신형전함 1척과 순양전함 1척을 상대했던 실제 역사보다 훨씬 까다롭고 위험한 상황이다.

구형전함이 느리다고는 하지만 일본군 선단을 찾아 공격하는 데에는 충분한 속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낡았다고는 하나 명색이 전함이라 일본이 수송선단을 보호하려면 전함 세력의 대부분과 수척의 항공모함을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일본군의 의도에 관해서는 해군성이 처칠 수상이나 외무성보다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군성은 논의 과정에서 말레이 침공 가능성을 강하게 언급하지 않았는데 근거가 될만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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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평양의 전운

 

영국은 전함 12척, 순양전함 3척, 항공모함 7척을 가지고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했다.

독일은 전함 2척을 가지고 전쟁에 돌입했다.

동맹국인 프랑스가 전함 5척과 항공모함 1척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영국은 해상에서 추축국을 겁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1940년 6월에 프랑스가 독일에게 무릎을 꿇고 전함 5척을 보유한 이탈리아가 참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게다가 영국이 보유한 전함 및 순양전함 중에서 3척(넬슨, 로드니, 후드)만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취역했으며 항공모함들 또한 대부분 전함으로 기공되었다가 도중에 개조한 함정들이었다.

그에 비하면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전함은 새로 건조하거나 대규모 개조를 거친 함정이었다.

개전 당시 영국은 전함 5척과 항공모함 4척을 건조하고 있었으며 독일은 전함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 그리고 항공모함 그라프체펠린을 건조 중이었는데 그라프체펠린은 완성하지 못했다.

 

프랑스가 전열에서 탈락하고 이탈리아가 참전해도 영국은 여전히 해군력에서 우세했다.

그러나 섬나라인 영국은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바다를 통해 수입해야 하지만 독일과 이탈리아는 대륙국가로서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바다를 통하지 않고 들여올 수 있었다.

따라서 영국이 생존에 필수적인 해상교통로를 지키는데 해군력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야 하는 반면 독일과 이탈리아는 함정을 항구에 정박시켜 두었다가 기회를 잡아 한꺼번에 출격시킬 수 있었다.

이런 면을 생각하면 영국의 해군력이 충분히 강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진주만 기습으로 일본이 참전하면서 영국해군은 세계3위의 일본해군을 적으로 맞게 되었다.

일본해군은 규모가 크고 숙련도가 뛰어날 뿐 아니라 강력한 자체 항공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유럽의 추축국 해군과는 다른 상대였다.

실제로 일본해군의 힘은 막강한 항공전력에 있었다.

 

말레이 해전의 의문 중 하나가 어째서 톰 필립스 제독이 아군의 항공엄호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일본기의 행동반경 내에 전함과 순양전함을 밀어넣는 무모한 행동을 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까지 전함과 순양전함의 상실 원인을 살펴보면 필립스 제독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부터 진주만 기습에 이르기까지 2년 3개월 동안 격침된 전함 및 순양전함은 모두 9척으로 영국 3척(로열오크, 후드, 바르함), 이탈리아 3척(리토리오, 콘테디카보우르, 카이오두일로), 프랑스 1척(브르타뉴), 독일 1척(비스마르크), 소련 1척(마라)이었다.

로열오크는 1939년 10월 14일에 군항 스캐파플로에 잠입한 독일잠수함 U-47의 뇌격을 받고 침몰했다.

후드는 1941년 5월 24일에 독일전함 비스마르크의 주포탄에 맞아 격침되었다.

바르함은 1941년 11월 25일에 지중해에서 독일잠수함 U-331의 뇌격을 받고 격침되었다.

이탈리아 전함 3척은 모두 1940년 11월 12일 밤에 타란토 항에서 영국해군 소드피쉬 뇌격기의 기습을 받아 항내의 얕은 바다에 침몰했다.  

프랑스 전함 브르타뉴는 본국이 항복한 후 이 전함이 독일에 넘어갈 것을 우려한 영국함대의 포격을 받아 1940년 7월 3일에 오랑에서 격침되었다.

독일전함 비스마르크는 1941년 5월 27일에 영국전함 킹조지5세와 로드니에게 난타당한 후 순양함 도싯셔의 뇌격을 받고 격침되었다.

소련전함 마라는 1941년 9월 23일에 레닌그라드 항에서 독일공군의 급강하폭격을 받고 항내의 얕은 바다에 침몰했다. 

 

9척의 격침원인을 보면 잠수함에 의한 것이 2척, 포격에 의한 것이 2척, 포격과 수상함의 뇌격에 의한 것이 1척, 항공어뢰에 의한 것이 3척, 항공폭탄에 의한 것이 1척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소드피쉬의 뇌격은 야간에 항구에 정박한 전함을 상대로 올린 전과였으며 마라도 항구에서 폭격을 받았고 진주만에서 일본함재기들이 올린 전과 역시 항구에 정박 중인 전함을 기습하여 거둔 것이었다.

말레이 해전까지 항행 중에 항공기의 공격을 받아 격침된 전함이나 순양전함은 없었다.

따라서 전 세계의 해군 관계자들은 항행 중인 전함을 격침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전함의 주포탄이나 잠수함의 어뢰 뿐이라고 믿었으며 항공기가 항행 중인 전함을 격침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말레이 해전 이전에도 전함이나 순양전함들은 항행 중에 자주 공습을 받았으나 한번도 격침되지 않았으므로 항공기가 항행 중인 전함이나 순양전함을 격침할 수 없다고 믿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진주만 기습 이전까지 전함은 그럭저럭 제 역할을 했다.

영국은 1940년 4월에 전함 워스파이트와 구축함들을 나르빅 협만에 보내어 독일구축함 8척과 유보트 1척을 격침했는데 이는 노르웨이 전역에서 영국이 거둔 거의 유일한 성공이었다.

마타판곶 해전에서는 전함 3척(워스파이트, 바르함, 밸리언트)과 항공모함 1척(포미더블)으로 이루어진 영국함대가 피해없이 이탈리아 순양함 3척을 격침함으로써 이탈리아 함대를 괴멸시켰다.

독일전함 그나이제나우와 샤른호르스트는 영국항공모함 글로리어스를 격침했고, 비스마르크는 영국해군에서 가장 큰 함정인 순양전함 후드를 격침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1940년 6월에 프랑스가 무너지자 독일의 승리에 편승하려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일본은 고립무원이 된 영국 또한 오래지 않아 패배할 것이며 그러면 아시아에 있는 프랑스, 네덜란드 및 영국의 식민지를 차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에서 일본은 1940년 9월에 독일 및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었으며 1941년 4월에는 소련과 일소중립조약을 맺어 남방으로 진출하기에 앞서 후방의 위협을 없앴다.

중일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본은 당장 서구 열강과 전쟁을 치를 형편이 되지 않았으므로 전쟁이 나지 않을 정도의 압력을 가하면서 남방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일본이 요구하는 물량만큼 석유를 수출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일본은 또한 비시 정부를 압박하여 1940년 9월에 북부 인도차이나에 진주했으며 다음해 7월에는 남부 인도차이나에 진주했다.

영국도 일본의 압력에 밀려 천진과 상해의 수비대를 철수시켰으며 중국과 외부 세계를 이어주던 버마로드를 일시적으로 폐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극동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영국함정은 낡은 항공모함 이글, 중순양함 3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5척, 슬루프함 6척, 잠수함 15척이었으며 구축함 2척, 슬루프함 1척, 그리고 잠수함 3척은 수리 중이었다.

인도양의 트링코말리에는 경순양함 3척, 슬루프함 12척, 잠수함 1척이 있었는데 슬루프함 3척은 인도자치정부 소속이었다.

강력한 일본해군에게 맞서기에는 어림도 없는 빈약한 전력이었으며 이마저도 얼마 후에는 대부분 대서양이나 지중해 방면으로 이동했다.

 

영국은 독일의 본토 침입 위협이 사그라들자 1940년 10월에 싱가포르 방어회의(Singapore Defence Conference)를 열어 극동정세를 논의했다.

중국기지총사령관(Commander-in-Chief China Station)인 제프리 레이턴 해군중장이 의장을 맡았으며 육군을 대표하여 본드 중장, 공군을 대표하여 바빙턴 소장이 참가했다.

그리고 미해군의 방콕 주재 무관인 토머스 중령이 싱가포르로 날아와 참관했다.

 

정세는 엄중하여 태평양의 미국 및 영국함대를 합쳐도 일본해군에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미 일본군이 인도차이나에 들어온 이상 싱가포르는 바다에서 뿐 아니라 말레이 반도에 상륙한 일본군에 의하여 북쪽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수 있었다.

일본해군은 당장이라도 400대의 지상발진 항공기와 280대의 함재기를 동원할 수 있었다.

 

회의 결과 싱가포르를 지키기 위해서는 582대의 현대화된 항공기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당시 영국이 말레이 반도 및 싱가포르에 보유하고 있는 항공기는 불과 88대로서 그나마 48대만이 신형기였다.

영국정부는 싱가포르 방어에 582대의 신형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였으나 실제 항공기의 증원은 지지부진하여 결국 진주만 기습 당시 말레이 반도 및 싱가포르에 배치된 항공기는 158대에 지나지 않았다.

기종도 전투기는 미국산 브류스터 버팔로였으며 폭격기는 블레넘이었는데 두 기종 다 1941년 말의 시점에서 신형기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브류스터 F2A 버펄로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Brewster_F2A_Buffalo)

 

당시 영국은 극동 지역에 582대의 신형기를 배치할 여력이 있었다.

영국 본토에는 신형기를 장비한 전투비행대대가 100개 이상 있었으며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공군은 소련과 지중해 방면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신형기들을 극동 지역으로 보내지 않았다.

당시까지 영국은 독일의 본토 침공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했으며 독일공군은 영국 본토에 야간공습을 가하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독일에게 전략폭격을 가하겠다는 처칠 수상과 영국공군의 의지였다.

 

극동 지역에 신형기 582대가 배치되었다고 하여 일본의 침공을 막아내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신형기들이 극동 지역에 대량으로 배치되었다면 최소한 독일에 대한 전략폭격에 동원되는 것보다는 의미있는 활약을 펼쳤을 가능성이 많다.

물론 이것은 나중에 일어난 일들을 알 수 있는 후대에 가능한 평가이다.

 

싱가포르 방어회의 직후에 영국은 극동 지역의 방어체계를 변경했다.

1937년부터 케냐 총독을 맡고 있던 로버트 브룩포팸 공군대장이 현역으로 복귀하여 1940년 11월에 극동총사령관(Commander-in-Chief, Far East)이 되었다.

극동총사령관은 버마, 말레이, 싱가포르, 홍콩에 있는 모든 영국육군 및 공군을 지휘했다.

그러나 해군성의 요구로 극동 지역의 해군함정은 극동총사령관의 지휘에서 벗어났으며 이것이 말레이 해전에서 영국이 참패한 이유 중 하나이다. 

 

1941년 7월이 되자 일본은 남부 인도차이나에 진주하기 위하여 비시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일본외무성이 비시 주재 대사관에 보내는 암호를 해독하여 일본의 속셈을 알아낸 미국은 즉시 영국에 통보했다.

미국은 영국에게 만일 일본군이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하다면 석유를 비롯한 모든 교역을 중단할 것이라고 언명했으며 영국은 동참할 것을 약속했다.

이후 미국은 인도차이나를 중립지역으로 간주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일본에게 경고했으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일본은 1941년 7월 25일에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강행했다.

 

미국의 대응은 신속했으며 거칠고 단호했다.

일본군이 진주한 다음날인 7월 26일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석유를 포함한 일본과의 모든 교역을 중단하고 미국 내의 일본자산을 동결했다.

곧이어 영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가 미국의 조치에 동참했다.

 

일본의 고노에 내각은 예상보다 격렬한 미국의 반응에 놀랐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석유였다.

일본은 자국이 사용하는 석유의 12% 정도만을 자체 생산했을 뿐 나머지는 수입에 의존했는데 수입 물량의 90% 는 미국으로부터 들여왔고나머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서 수입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이 비축한 석유는 약 840만톤으로 이는 전쟁시 약 1년 6개월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양이었다.

 

이 시점에서 일본이 택할 수 있는 길은 3가지 정도였다.

 

1. 남부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한다.

2. 미국과 협상한다.

3. 미국 및 영국을 상대로 개전한다.

 

1은 재빨리 실행했으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금수조치가 내려지자마자 남부 인도차이나의 일본군을 철수시키면서 동시에 미국에 금수조치의 해제를 요구했다면 성공할 수 있었으나 일본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2를 택하여 남부 인도차이나에 눌러앉은 채 미국과 협상하면서 동시에 전쟁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미국과의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도조 육상으로 대표되는 국내의 강경파와 미국 사이에 끼어 전쟁을 막아보려던 고노에 내각은 활로를 찾지 못한 채 1941년 10월 16일에 붕괴했고 이어서 도조 내각이 출범했다.  

중일전쟁의 수렁에 빠진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새로운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호전적인 도조로서도 어려운 결정이었다.

따라서 도조 내각도 초기에는 미국과의 협상에 매달렸으나 타결의 전망은 어두웠다.

결국 1941년 11월 5일에 도쿄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 미국과 협상을 계속하되 25일까지 타결이 되지 않으면 12월 1일을 기하여 미국 및 영국과 개전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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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기습 사흘 후인 1941년 12월 10일에 말레이 반도의 쿠안탄 앞바다에서 영국 전함과 일본 항공기가 전투를 벌였다.

어뢰와 폭탄을 사용한 일본 항공기에게 대공포로 맞섰던 신형전함 프린스오브웨일스와 순양전함 리펄스는 격침되었다.

타란토 공습이나 진주만 기습과 달리 영국 전함은 전투준비를 갖추고 정상적으로 항행 중인 상태에서 일본 항공기와 싸워 참패했다.

전투의 결과는 전함이 폭탄 및 어뢰를 장비한 항공기의 공격에 맞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으며 이로써 전함의 시대는 끝났다.

 

(말레이 해전시 일본항공기가 찍은 사진. 위가 프린스오브웨일스이고 아래가 리펄스다.

http://en.wikipedia.org/wiki/Sinking_of_Prince_of_Wales_and_Repulse)

 

일본은 이 전투에 말레이 해전(マレー沖海戦)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서방 측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영국해군의 공식전사는 이 전투를 다룬 장에 '태평양의 재앙'(Disaster in the Pacific) 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전투에는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영어권에서는 이 전투를 지칭할 때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침몰'(Sinking of Prince of Wales and Repulse) 정도의 용어를 사용한다.

 

1. 싱가포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일본은 동맹국이었다.

일본은 과중한 부담에 허덕이던 영국해군을 위하여 1917년에 몇 척의 군함을 파견하여 지중해에서 선단 호위를 거들었다.

동시에 일본은 열강들이 유럽 전선에 몰두해 있는 틈에 아시아의 독일 식민지를 공격했다.

일본군은 독일 식민지였던 중국의 청도를 점령했고 소규모의 원정함대를 조직하여 태평양 상의 독일 식민지들을 공격했다.

그 결과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승전국으로서 태평양 상의 독일 영토였던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 그리고 괌을 제외한 마리애나 제도를 차지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이 부상하면서 이 지역에 커다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영국 및 미국과 긴장이 생겨났다.

영국은 말레이, 보르네오, 뉴기니, 호주 및 뉴질랜드를 잇는 교통로가 위협받는다고 느꼈고, 미국 또한 미서 전쟁으로 얻은 필리핀에 대한 위협을 느꼈다.

이런 정세 하에서 열강들 사이에 건함 경쟁에 일어났다.

전쟁을 치르면서 피폐한 영국에게 건함 경쟁은 버거운 일이었고 뒤늦게 근대화하여 아직 경제력이 약한 일본에게도 마찬가지였으며 미국 또한 전쟁이 끝난 마당에 막대한 군비 지출을 원하지 않았다.

 

열강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1922년에 워싱턴 해군조약이 맺어졌다.

일본함대의 배수량은 미국 및 영국에 대하여 60% 로 억제되었으며 일본 본토를 제외하고 싱가포르의 동쪽인 동경 110도에서 하와이 서쪽에 이르는 태평양 지역에서 군사기지 건설이 중지되었다.

워싱턴 해군조약은 일시적으로 태평양의 긴장을 완화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영국 해군성(Admiralty)은 일본의 부상으로 빚어진 극동 지역의 안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극동 지역에는 전함이 들어갈 수 있는 건선거가 없어서 수리 및 정비가 불가능했다.

또한 건선거가 있더라도 극동 지역에 전함을 항상 배치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피폐해진 영국으로서는 무리였다.

따라서 해군성은 극동 지역에 새로운 해군기지를 건설하되 전함들은 모두 본국함대(Home Fleet)와 지중해 함대(Mediterranean Fleet)에 배치하는 방안을 마련하여 정부에 제출했다.  

여기에 따르면 극동 지역에는 순양함과 구축함만이 배치되며 전함은 포함외교의 일환으로 가끔씩 들르게 될 것이었다.

전쟁이 터지면 영국에서 전함이 극동 지역으로 향할 것이며 건선거가 갖추어진 극동의 해군기지에서 정비와 보급을 받으면서 적을 물리칠 것이었다.

이렇게 극동 지역에 현대적인 해군기지를 갖추어 두고 전함은 필요시 증원한다는 개념이 전간기 영국의 방어전략이었다.  

 

해군기지 후보로 중국의 홍콩, 실론 섬의 트링코말리, 호주의 시드니, 그리고 말레이 반도의 싱가포르가 물망에 올랐다.

홍콩은 일본에 너무 가까웠고 트링코말리는 너무 멀었다.

후보지는 시드니와 싱가포르로 압축되었는데 해군성은 전략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싱가포르로 결정했다.

워싱턴 해군조약을 5개월 앞둔 1921년 5월에 영국 내각은 싱가포르에 현대적인 해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해군기지는 싱가포르 섬 북쪽에 건설되었으며 방어시설이 갖추어졌다.

신생 영국공군은 항공기를 사용하여 싱가포르를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항공기의 성능이 제한적이던 1920년대 초반에는 너무 앞선 주장이었다.

물론 싱가포르 섬의 셀레타에 비행장이 건설되었으나 보조적인 역할이었으며 싱가포르 방어의 주력은 대구경 해안포였다.

 

해군기지 건설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24년에 집권한 노동당 정부는 건설을 중단했으나 다음해에 집권한 보수당 정부가 건설을 재개했다.

이후 해군기지는 집권당, 재정, 국내 정치 상황 및 국제 정세에 따라 건설이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면서 꾸준히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38년에 현대적인 대규모 해군기지가 완성되었다.

 

싱가포르 해군기지의 건선거는 길이가 307m 에 달했고 262m 짜리 부유선거도 있었다.

따라서 영국의 가장 큰 전함 2척을 동시에 수리할 수 있었고 작은 부유선거도 있어 순양함이나 구축함을 수리할 수 있었다.

커다란 기중기, 공창시설, 거대한 연료탱크와 함께 수리 중인 함정의 수병 3,000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막사도 들어섰다.

기지의 면적은 3.9㎢ 에 달했고 총 건설비는 6000만 파운드 이상이었다.

 

싱가포르 해군기지의 개소식은 1938년 2월 15일에 있었다.

순양함 노퍽을 위시하여 극동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영국함정 16척이 개소식에 참가했고, 미국과 인도 자치정부도 각각 3척의 함정을 파견했다.

개소식에 전함은 참가하지 않았다.

싱가포르 주재 일본총영사 오카모토는 개소식에 참석했으나 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자리를 떴다.

 

일본은 당연히 싱가포르 해군기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일본 사이에 감돌던 친밀감은 종전과 동시에 사라져갔다.

영국은 극동 지역에서 강자로 부상한 일본을 의혹과 불신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나마 1920년대에는 일본에서 내각이 군부를 통제했기 때문에 긴장이 급격하게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일본 정부는 군부를 억누르고 워싱턴 해군조약을 체결했으며 중국을 일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9개국 조약에도 조인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를 지키려면 국제 협조를 중시하는 일본 정부가 군부를 억누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최선이었으나 당시 서구 열강의 사정은 일본 정부의 편리를 봐 줄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구 열강의 지도자들도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 정부를 지지할만큼 현명하지 못했다.

 

국제연맹은 일본을 상임이사국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일본이 강력하게 요구했던 인종평등 결의안을 채택하지 못했다.

이는 주로 호주 총리인 빌리 휴이의 반대 때문이었는데 당시 국제연맹을 주도하던 영국은 호주를 제지하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일본 정부의 위신을 추락시키고 일본 내에서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미국 또한 1924년에 이민법을 개정하면서 상징적인 수준으로라도 여타 아시아 국가와 차별화되는 처우를 원한 일본 정부의 탄원을 무시하고 일본을 여타 아시아 국가와 똑같이 취급하여 이민을 제한했다.

무신경한 미국 정부의 이런 처사는 자신들이 여타 아시아 국가와는 격이 다르며 국제적 의무를 다하는 당당한 열강의 일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일본국민에게 엄청난 배신감과 적개심을 심어주면서 서구 열강과의 협조를 중시하는 일본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결정타는 1927년의 쇼와금융공황이었다.

급속히 악화되는 경제 상황 아래에서 국제 협조를 중시하던 일본 정부는 세력이 꺾였고 결국 1927년 4월 다나카 내각의 성립과 함께 군부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잃었던 권력을 되찾았다.

이후 아시아의 정세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일본군부는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으며 국제연맹에서 만주국 승인을 거부하자 연맹을 탈퇴해 버렸다.

이제 일본은 자신의 팽창 정책에 위협이 되는 싱가포르에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해군 장교 이시무라 도타는 영어로 번역되어 영국에서만 11,000 부 이상 팔린 자신의 책에서 싱가포르를 일컬어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라고 표현했다.

 

서구 열강들은 일본의 팽창정책이 가져올 위험을 알고 있었으나 대처할 여력이 없었다.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유럽에서도 커다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1935년에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고, 다음해에는 독일이 라인란트를 점령하더니 이어서 스페인 내전이 터졌다.

 

영국도 대공황에서 겨우 벗어나던 중이라 경제 상황이 안 좋았으며 1936년에는 국왕 에드워드 8세가 즉위 8개월만에 퇴임했다.

나라가 어수선한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기억하고 있는 국민의 여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그러나 국내의 반전 여론에 안주하기에는 국제 정세가 너무 엄중했으므로 영국 정부는 주저하면서도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극동 방어의 핵심인 싱가포르에도 방어력 증강이 실시되었다.

중포 숫자가 늘어났고 싱가포르 섬의 텡가와 셈바왕에 비행장이 추가로 건설되었으며 말레이 반도에도 5개의 비행장이 들어섰다.

 

영국은 1936년까지 싱가포르에 대한 공격은 바다에서 올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1937년에 말레이 사령관 도비 소장은 일본군이 말레이 반도에 상륙하여 북쪽으로부터 싱가포르를 공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 정부는 도비 소장의 경고를 받아들였으나 돈 쓸 곳은 많고 예산은 부족했다.

1,600km 에 달하는 말레이 해안선을 요새화하라며 정부가 도비 소장에게 배정한 예산은 60,000 파운드에 불과했다.

 

영국 정부 입장에서 극동 지역은 우선 순위가 떨어졌다.

제1순위는 본토 방어였고 제2순위는 석유를 비롯한 필수 물자의 통로인 지중해 및 수에즈 운하의 확보였으며 극동 지역 방어는 세번째였다.

영국은 전함 5척과 항공모함 6척을 건조하는 자신들의 비상건함계획이 끝날 때까지 일본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모든 전함, 순양전함 및 항공모함들은 본국함대와 지중해 함대에 배치하고 극동 지역에는 필요하면 전함과 항공모함을 차출하여 보낸다는 전략은 바뀌지 않았다.

지중해나 수에즈 운하가 막혀도 함정들이 극동으로 갈 수 있도록 영국은 시에라리온의 프리타운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시몬스타운에 연료보급시설을 설치했다.

 

태평양의 긴장이 높아지자 호주와 뉴질랜드는 극동 지역에 전함을 붙박이로 배치하라면서 큰집인 영국을 압박했다.

극동 지역에 배치된 영국 외교관들은 전함이 상시 배치된다면 일본에 대하여 싱가포르 해군기지보다 더 큰 억지력을 보일 것이라는 보고서를 본국에 보냈다.

동맹국의 압력에 직면한 외무성은 문제를 해군성에 떠넘겼다.

 

해군성의 입장은 단호했다.

유럽이 우선이었으며 독일과 이탈리아가 먼저 무찔러야 할 적이었다.

따라서 모든 전함과 항공모함은 본국함대와 지중해함대에 배치되어야 했으며 극동 지역에 배치할 여유는 없었다.

극동 지역에 전함을 상시 배치하는 문제는 비상건함계획이 끝난 이후에야 검토해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9년 9월 1일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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