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개전
코타바루는 말레이 반도 북동쪽에 있으며 인도부대인 제3/17 도그라 대대가 10km 의 해안선을 지키고 있었다.
1941년 12월 8일 0시가 막 지났을 때 초병이 해안선에서 약 3km 떨어진 해상에서 3척의 수송선을 발견했다.
잠시 후 해안에 일본군의 포탄이 쏟아졌고 일본군 보병 제56연대가 상륙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대부분 실전 경험을 가진 고참병인데 비하여 도그라 대대의 병사들은 대부분 어린 징집병들로 실전 경험은 커녕 훈련도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영국군 야포가 불을 뿜어 수송선과 상륙주정에 몇 발의 명중탄을 기록했지만 일본군이 해안에 교두보를 형성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본군이 상륙한 시간은 현지시간으로 12월 8일 오전 0시 45분으로 진주만 기습보다 70분 앞선 시간이었다.
잘못하면 진주만 기습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었으나 만조 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일본군은 상륙을 감행했다.
일본군의 목표는 코타바루 시내와 상륙 해안 사이에 위치한 비행장이었다.
이 비행장에는 영국공군 제36비행대대 소속의 빌데비스트 뇌격기 12대와 제1호주비행대대 소속의 허드슨 경폭격기 12대가 작전하고 있었다.
(말레이 반도 및 타이 침공. 출처 : The Sinking Of The Prince Of Wales & Repulse : The End Of The Battleship Era, P.103)
날이 밝자 일본군은 비행장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남부 인도차이나에서 날아온 일본기들이 비행장을 폭격하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비행장의 지상요원들은 공습에 이어 일본군이 비행장에 접근하여 총을 쏘기 시작하자 공포에 질려 철수 명령도 없이 건물과 장비에 불을 지른 다음 자동차를 타고 철수했다.
뒤늦게 철수 명령이 떨어지자 살아남은 18대의 비행기도 이륙하여 도망쳤고 이어서 비행장을 지키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싸우던 도그라 대대도 비행장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로써 접근하는 일본선단을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잡은 코타바루 비행장은 개전 첫날 일본군 손에 넘어갔다.
다른 곳에서도 일본군은 성공을 거두었다.
진주만에서는 일본함재기들이 미국전함 4척을 격침하고 4척에 피해를 입혀 태평양함대의 주력을 일거에 궤멸시키고 167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필리핀에서는 일본기들이 미국 항공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면서 제공권을 장악했으며 홍콩에서도 일본군이 성공적으로 침공을 시작했다.
싱가포르도 사이공 부근에 전개한 일본제22항공전대로부터 폭격을 받았다.
폭탄을 장비한 원산 및 미호로 해군항공대의 96식 육상폭격기 54대가 싱가포르의 텡가 비행장을 목표로 이륙했다.
그러나 악천후로 인하여 원산항공대의 폭격기 모두와 미호로 항공대의 폭격기 일부가 되돌아갔다.
미호로 항공대의 폭격기 17대만이 8일 새벽 4시에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텡가 비행장을 폭격했다.
블레넘 폭격기 3대가 파괴되었고 폭탄 일부가 시가지에 떨어져 약 200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영국군은 레이더로 230km 밖에서 일본기의 내습을 감지하고 탐조등을 비추면서 대공포로 반격했으나 일본기는 피해를 입지 않고 빠져나갔다.
1941년 12월 8일 오전 6시 30분에 극동총사령관(Commander-in-Chief, Far East) 로버트 브룩포팸 공군대장과 중국총사령관(Commander-in-Chief, China) 제프리 레이턴 해군중장이 공동 명의로 극동 지역의 영국령에 거주하는 군인 및 민간인에게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서 두 사령관은 영국이 일본과의 전쟁에 들어갔음을 밝히고 영국은 대비가 되어 있으며 일본의 침공을 물리칠 것이라고 다짐했다.
각국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전파된 이 성명서는 당시 영국이 일본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쟁이 일어날 당시 극동에 전개한 영국해군의 지휘체계는 혼란스러웠다.
동양함대 총사령관 필립스 제독은 극동총사령관 브룩포팸 대장의 지휘를 받지 않고 런던의 해군성으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았다.
반면 중국에 있는 영국해군 병력들은 여전히 중국총사령관 레이턴 중장의 지휘를 받았다.
해군성은 지휘권을 통일하기 위하여 12월 8일에 전문을 보내어 이틀 간의 준비과정을 거친 후 12월 10일 0시 30분을 기하여 동양함대 총사령관이 중국총사령관의 권한을 인수하라고 명령했다.
이제 레이턴 중장에게 남은 일은 고문 역할 정도였는데 필립스 대장은 조언을 청하지 않았다.
일이 없어진 레이턴 중장은 여객선을 타고 영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말레이 해전의 참패로 인하여 눌러앉게 된다.
극동에서 오래 근무하여 지역 정세에 정통한 레이턴 중장이 결정적인 시기에 지휘 계통에서 밀려난 사실은 영국군에게 불행이었다.
해군성은 해군 내의 지휘권을 단일화하는데는 적극적이었으나 극동 지역 지휘권의 단일화를 위하여 동양함대 총사령관이 공군대장인 극동 총사령관의 명령을 받는 것은 반대했다.
따라서 극동 지역의 지휘권은 이원화되어 육군과 공군은 극동 총사령관이, 해군은 동양함대 총사령관이 지휘했다.
필립스 제독은 12월 7일 저녁 늦게 브룩포팸 대장과 최근 정세와 향후 활동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이 내용을 해군성에 보고하면서 자신의 향후 의도를 모호하게 얼버무렸다.
해군참모차장으로서 런던의 해군성에 앉아 수많은 해전을 지휘해 본 경험이 있는 필립스 제독은 자신이 했던 것처럼 지구 반바퀴 떨어진 런던의 해군성에서 자신에게 이러쿵저러쿵 명령을 내리는 것을 싫어했다.
때문에 극동총사령관은 물론 해군성도 동양함대의 의도와 움직임을 제대로 모르게 되었다.
8일 아침이 되자 전선에서 단편적인 보고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상황은 알기 어려웠으나 일본군이 타이와 말레이 북부의 몇 곳에 상륙했고 그 지역의 육군과 공군이 치열한 전투에 휘말렸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12월 8일 오후 12시 30분에 필립스 제독은 프린스오브웨일스 함상에서 회의를 열었다.
동양함대 사령부의 참모들과 프린스오브웨일스의 함장 리치 대령, 리펄스의 함장 테넌트 대령 그리고 구축함장들이 참석했다.
극동 총사령부나 공군은 초대받지 못한 해군만의 회의였다.
필립스 제독은 우선 가용한 함정을 확인했다.
전함 프린스오브웨일스와 순양전함 리펄스는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에는 순양함이 4척(더반, 다나에, 드래건, 모리셔스) 있었는데 모리셔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초계 및 정찰에나 적합했지 본격적인 해전을 치르기는 무리였으며 다나에와 드래건은 정비 중이라 사용이 불가능했다.
6인치 주포 12문을 보유한 모리셔스는 전투에 적합했으나 역시 정비 중이라 사용할 수 없었다.
8인치 주포 8문을 가진 중순양함 엑시터가 벵골만으로부터, 그리고 5.9인치 주포를 가진 네덜란드 경순양함 자바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로부터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으나 36시간 이후에야 도착할 것이었다.
사용가능한 순양함은 6인치 포를 갖추고 속력도 충분하지만 전투에는 부적합한 경순양함 더반 뿐이었다.
구축함은 조금 사정이 나았다.
영국에서부터 프린스오브웨일스를 따라온 익스프레스와 엘렉트라는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었다.
지중해 함대에서 파견된 인카운터와 주피터는 싱가포르에 도착하자마자 기관이 고장나서 수리 중이었다.
인카운터의 수리에는 3일, 상태가 심각한 주피터의 수리에는 3주가 걸릴 예정이었다.
대신 싱가포르에는 테네도스와 호주구축함 뱀파이어가 있어 언제라도 출동가능한 상태였으며 최근에 정비를 마친 스트롱홀드도 있었다.
모란과 다이어도 사용가능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형이라 전투는 무리였다.
이외에도 미국구축함 4척이 발릭파판에서 달려오고 있었고 홍콩에서 탈출한 구축함 2척이 남하 중이었으나 모두 이틀 후에나 도착할 것이었다.
전함이나 순양전함, 또는 항공모함이 1주일 이내에 도착할 가능성은 없었다.
결론적으로 필립스 제독이 당장 사용가능한 함정은 전함 1척, 순양전함 1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5척 정도였다.
당시 필립스 제독은 영국 및 미국의 정보기관과 영국공군의 정찰기로부터 꽤 많은 정보를 얻고 있었다.
일본선단은 순양함과 구축함으로부터 호위를 받고 있었고 최소한 1척의 공고급 전함(실제로는 2척)을 포함한 함대가 뒤를 받치고 있었다.
필립스 제독은 사이공 부근에 전개한 일본항공기의 세력도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일본이 설치한 기뢰원과 싱가포르 부근에서 경계 중인 일본잠수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제독은 부하들에게 프린스오브웨일스, 리펄스, 엘렉트라, 익스프레스, 테네도스, 뱀파이어로 구성된 작지만 빠르고 강력한 함대를 이끌고 당일 오후 5시에 싱가포르를 출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함대의 명칭은 Z 부대(Z Force)로 정했다.
Z 부대는 타이 만으로 북상한 다음 서쪽으로 항진하여 10일 아침에 말레이 반도 및 타이 해안선에 상륙 중인 일본선단을 공격할 것이었다.
부하들은 필립스 제독의 계획에 찬성했고 회의는 30분 만에 끝났다.
함장들은 서둘러 자기 배로 돌아가 출항준비를 서둘렀고 필립스 제독은 항공엄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말레이 항공사령관(Air Officer Commanding Malaya) 펄포드 공군소장을 만났다.
필립스 제독은 펄포드 소장에게 3가지를 요구했다.
1. 12월 9일 낮동안 Z 부대의 북방 180km 에 대한 정찰
2. 10일 아침에 싱고라 상공 정찰
3. 10일 낮동안 싱고라 상공에서 전투기에 의한 항공엄호
요구사항을 보면 필립스 제독이 10일 해가 뜨기 전에 코타바루가 아니라 북쪽으로 220km 더 나아가 싱고라에 상륙 중인 일본군을 공격할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싱고라 및 파타니 지역에 상륙한 일본군이 주력이었다.
당시 영국공군의 능력으로 1번과 2번은 가능했으나 3번 요구는 말레이 북부의 비행장이 초기에 함락되고 그곳의 영국공군이 일본항공력에 제압당한 상황에서 실행이 불가능한 것이었으므로 펄포드 소장은 브룩포팸 대장에게 보고했다.
브룩포팸 대장은 항공엄호 없이 Z 부대가 타이 만에 진입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나 지휘권이 없었으므로 출항을 막을 수 없었다.
필립스 제독이 이틀만 기다렸다면 그는 중순양함 1척, 네덜란드 경순양함 1척, 미국구축함 4척을 추가로 이끌고 출항할 수 있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Z 부대의 대공능력도 강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필립스 제독은 시간이 관건이며 또한 사이공의 일본기들이 자신이 가려는 말레이 북부까지 740km 이상을 날아와 공격을 가하고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바로 그날 새벽에 일본기들이 훨씬 먼 거리를 날아와 싱가포르를 폭격했다.
결국 지휘권의 통일을 반대한 해군성의 고집이 말레이 해전의 참패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였다.
공군 장교로서 항공기의 위력을 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던 브룩포팸 대장에게 지휘권이 있었다면 그는 Z 부대의 출항을 불허하거나 최소한 추가 함정들이 도착할 때까지 연기시켰을 것이다.
부두에서 출항 준비가 한창일 때 프린스오브웨일스의 함장 존 리치 대령은 짬을 내어 상륙했다.
소위 후보생으로서 모리셔스에서 근무하고 있던 아들 헨리 리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부자는 기지의 수영장에서 만나 음료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존 리치 대령은 몇 시간 후 출항하여 돌아오지 못했다.
헨리 리치는 나중에 해군참모총장까지 승진하여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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