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마지막 1주일

 

프린스오브웨일스는 1941년 12월 2일 오후에 싱가포르 해군기지에서 가장 좋은 정박지인 서벽에 접안했다.

톰 필립스 제독이 부두에 나와 자신의 기함이 정박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전날인 12월 1일을 기하여 필립스 제독은 대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새로 편성된 동양함대 총사령관(Commander-in-Chief of the Eastern Fleet)에 임명된 상태였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도착은 전 세계에 예고되어 있었으나 필립스 제독은 동양함대의 전력을 자세히 밝히기 싫었다.

따라서 함명은 프린스오브웨일스만 밝혔을 뿐 리펄스는 그냥 대형함(heavy ship)이라고 표현했고 호위함정들의 규모도 밝히지 않았다.

자신들의 실력이 프린스오브웨일스보다 낫다고 자부하던 리펄스의 승조원들은 프린스오브웨일스만 부각되고 자신들의 함정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상황에 불만을 터뜨렸다.

 

필립스 제독은 프린스오브웨일스가 도착하는 부두에 소수 기자들만 출입을 허락했다.

대다수 기자들은 해군당국이 나누어 준 보도자료를 손에 쥔 채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서 프린스오브웨일스의 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싱가포르의 지역 언론사들은 일제히 해군의 비밀주의를 성토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틀만에 해군이 손을 들었다.

필립스 대장은 프린스오브웨일스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어 수많은 기자를 초대했으며 장교들은 기자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자들은 만족했고 다음날부터 해군에 우호적인 기사를 쏟아내었다.

기사 내용은 대개 동양함대의 도착으로 일본이 싱가포르를 공격할 기회는 사라졌다는 것이었으며 당시 싱가포르 주민이 믿고 싶어하던 희망사항일 뿐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싱가포르에 정박하는 동안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승조원들은 낮이면 장거리 항해에 지친 함정을 정비하느라 힘들었지만 밤이 되면 상륙하여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해군기지에서 약 25km 떨어진 싱가포르 시내까지 가는데 버스는 30센트였으며 택시는 2말레이달러였는데 당시 환율은 1파운드 = 9말레이 달러였다. 

싱가포르에는 12월 1일을 기하여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으나 시가지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시내에는 수많은 영화관과 캬바레가 정상 영업을 하고 있었으며 래플즈 호텔을 비롯한 여러 호텔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음악회나 무도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리펄스는 곧 호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승조원을 상륙시키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의 협상은 1941년 11월 들어 난항을 겪으면서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일본은 11월 25일까지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12월 1일을 기하여 개전한다고 결정한 바 있었다.

이후 도조 수상은 협상 시한을 11월 29일까지 연장했으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미국은 11월 26일에 중국으로부터의 철병과 삼국동맹 파기를 요구하는 헐 노트를 전달하여 일본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1941년 12월 1일에 도쿄 황궁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 12월 8일을 기하여 미국, 영국 및 네덜란드에 대해 개전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남방작전 계획에 따르면 일본은 개전과 동시에 다섯 방면으로 공격을 실시할 생각이었다.

 

1. 진주만 : 6척의 정규항모로 이루어진 항공모함기동부대가 기습하여 미태평양함대의 주력을 격멸한다.

2. 필리핀 : 대만에 주둔 중인 지상발진항공기가 장거리 공습을 실시하여 미국의 항공력을 말살하고 함정들을 타격한다. 이후 수송선이 확보되는 즉시 상륙한다.

3. 괌, 웨이크, 길버트 제도 : 중부 태평양 상에 있는 미국 및 영국의 전진기지인 이 섬들은 공습한 후 상륙하여 점령한다. 이후 비행장을 건설하여 미국의 반격에 대비하는 거점으로 삼는다.

4. 홍콩 : 영국의 중국 내 거점인 홍콩은 1개 사단을 투입하여 점령한다.

5. 말레이 반도 : 해군 함정의 호위 하에 병력을 말레이 반도에 상륙시켜 북쪽으로부터 싱가포르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상륙하여 석유가 펑펑나는 유전을 차지하고 버마로 진격하여 중국에 대한 지원 루트를 끊을 것이었다.

버마를 제외한 남방작전 전체에 걸리는 기간은 6개월로 예상하고 있었다.

 

(일본의 전쟁계획. 출처 : The Sinking Of The Prince Of Wales & Repulse : The End Of The Battleship Era, P.80)

 

영국전함 2척을 포함한 Z 부대의 파견은 말레이 침공에 위험 요소였으므로 일본해군은 대응책을 마련했다.

말레이 침공을 지휘하는 제2함대 사령장관 곤도 노부다케 중장은 14인치 주포 8문을 장착한 전함 공고와 하루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태생이 순양전함인데다가 함령이 오래되어 대규모 개조를 거쳤음에도 Z 부대와의 포격전에서 열세라고 판단했다. 

말레이 반도에 상륙하는 제25군을 직접 호위하는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의 남파함대에는 아예 전함이 없었다.

일본해군 내부에서는 Z 부대에 대응하기 위하여 전함을 추가로 파견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으나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항공력을 사용하여 Z 부대를 격멸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말레이 침공을 지원하는 제22항공전대의 전력을 보강하는 동시에 육상공격기의 뇌격훈련을 강화했다.

 

(미츠비시 G3M 96식 육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G3M)

 

사이공 근교에 전개한 마츠나가 사다이치 소장의 제22항공전대는 원산 및 미호로해군항공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각각 96식 육상공격기 36대씩 보유하고 있었다.

야마모토 대장은 필리핀 공격을 담당한 제21항공전대로부터 신형 1식 육상공격기 27대를 보유한 가노야해군항공대를 빼내어 제22항공전대에 추가했다.

이로써 제22항공전대는 96식 육공 72대, 1식 육공 27대, 전투기 36대와 정찰기 6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미츠비시 G4M 1식 육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G4M)

 

일본해군은 Z 부대의 항해를 방해하기 위하여 기뢰를 설치했다.

기뢰부설함 다츠미야마루와 나가사가 1941년 12월 6일 밤과 7일 새벽에 걸쳐 싱가포르의 북동쪽에 있는 티오만 섬과 아남바 제도 사이에 1,000개의 기뢰를 설치했다.

Z 부대의 출항을 감시하기 위하여 잠수함도 파견했다.

12월 2일까지 10척의 잠수함이 싱가포르 북동쪽에 3중 초계망을 폈으며 2척이 따로 싱가포르 부근을 감시했다.

12월 8일까지 4척의 잠수함이 추가로 투입되었다.

 

1941년 12월 4일 아침에 말레이 침공을 담당한 일본제25군의 주력을 태운 수송선 19척이 해남도의 삼아항을 떠났다.

이후 5일부터 7일에 걸쳐 사이공을 비롯한 인도차이나의 항구에서 수송선 9척이 추가로 출항했다.

28척으로 이루어진 수송선단은 35척이 넘는 전투함으로부터 호위를 받았다.

수송선들은 캄보디아 앞바다에서 집결한 후 연합군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남쪽이 아닌 서쪽으로 항진하기 시작했다. 

선단은 타이만 중앙에서 각자의 목표를 향해 흩어질 것이었다.

 

연합국은 일본군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으나 전쟁이 현실화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는 일본의 기만이 통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서구 열강이 일본을 과소평가한 결과였다.

평균적인 서구인의 인식으로 일본인이란 뻐드렁니에​ 근시면서 왜소한 체격을 가진 열등한 인종으로 기계문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조잡한 장비를 사용했다.

서구인들은 일본이 감히 영국이나 미국같은 선진국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41년 12월 초의 일주일 동안 연합국 측의 동정은 다음과 같다.

12월 1일 월요일

​말레이 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영국해군성은 필립스 제독에게 Z 부대가 도착하면 최대한 빨리 싱가포르를 떠나 동쪽 바다를 초계하라고 명령했다.

타란토의 경우처럼 싱가포르에 정박한 상태로 일본군의 공습을 받는 상황을 염려한 명령이었다.

12월 2일 화요일​

필리핀에서 이륙한 미국 정찰기가 남쪽으로 향하는 일본잠수함 12척을 발견했다.

연합국 정보기관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캄란 만에 21척의 일본군 수송선이 집결했으며 ​태평양, 대서양 및 인도양 전역에서 일본상선이 사라졌다.

정보기관들은 또한 남부 인도차이나에 집결한 일본군의 항공세력은 180대로 그중 90대는 중폭격기라고 평가했다.

12월 3일 수요일

영국해군성은 다시 필립스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최대한 빨리 Z 부대를 이끌고 출항하라고 요구했다.

전날 발견된 일본잠수함이 U-47 처럼 싱가포르 해군기지에 잠입하여 뇌격을 가할까봐 두려워한 명령이었다.

해군성은 또한 미국아시아함대 총사령관 토머스 하트 제독에게 미국구축함 8척의 싱가포르 파견을 요청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영국함대에 미국함정을 끌어들여 미국의 참전을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으로서 일본과의 개전시 미국이 자동적으로 참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영국이 확신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

필립스 제독은 해군성에 보낸 답신에서 자신이 곧 마닐라로 가서 하트 제독을 만날 것이며 호주 국민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리펄스를 호주의 다윈으로 파견할 예정이라고​ 보고했다.

또한 R급 전함 4척과 전함 워스파이트를 최대한 빨리 싱가포르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12월 4일 목요일​

필립스 제독이 2명의 참모와 함께 항공기를 타고 싱가포르를 떠나 마닐라로 향했다.​

12월 5일 금요일

리펄스가 구축함 테네도스 및 호주구축함 뱀파이어와 함께 싱가포르를 떠나 호주 다윈으로 향했다.

필립스 제독은 마닐라에서 하트 제독과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12월 6일 토요일

필립스 제독과 하트 제독은 마닐라에서 전날에 이어 회담을 계속했다.

하트 제독은 영국 측이 홍콩에 있던 구축함 3척을 불러들인다면 당시 보르네오의 발릭파판에 있던 미국구축함 4척을 싱가포르로 파견하겠다고 말했고 필립스 제독이 동의했다.​

회담 도중 놀라운 소식이 들어왔다.

그동안 캄란 만에 집결해 있던 일본수송선들이 집결지를 떠나 타이 만을 항진 중이라는 사실을 말레이 북부의 코타바루에서 이륙한 호주군 허드슨 경폭격기가 발견한 것이었다.

기장 잭 램쇼 중위는 25척 이상의 일본상선이 전함 1척, 순양함 5척, 구축함 7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코타바루 북방 300km 해상에서 서쪽으로 항진 중이라고 보고했다.(전함이라고 보고한 함정은 중순양함이었다.)

연합군은 예민하게 대응했다.

발릭파판에 있던 미국구축함들은 24시간 내로 준비를 갖추고 싱가포르로 출발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리펄스도 싱가포르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필립스 제독은 소식을 들은지 1시간 이내로 비행기에 올라 싱가포르로 출발했는데 얼마나 서둘렀는지​ 마닐라 시내에 놀러 나갔던 비행기 승조원 1명은 버려둔 채였다.

일본군은 운이 좋았다.

선단이 발견되었을 때 필립스 제독은 마닐라에 있었고 리펄스는 싱가포르를 떠나 호주를 향하고 있었다.

만일 그 순간 필립스 제독과 리펄스가 싱가포르에 있었다면 필립스 제독은 즉시 Z 부대를 이끌고 일본선단을 수색했을 것이다.

물론 일본제22항공전대가 비상사태에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일본군은 Z 부대를 무찌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진주만 기습이 실시되기 전이었다.

영국전함이 일본선단을 요격하려다가 반격을 받아 격침당해 버리면 전 세계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며 진주만을 포함한 연합군 기지의 경계 태세를 최고도로 끌어올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남방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진주만 기습 작전이 위험해질 것이었다.

곤도 제독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일본선단은 뱃머리를 돌려야만 했을 것이고 남방작전 시간표는 처음부터 헝클어졌을 것이다.

물론 그랬다고 싱가포르가 살아남았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레이 반도의 영국군에게 방어태세를 가다듬을 시간을 벌어줄 수 있었다.

12월 7일 일요일

필립스 제독은 아침 일찍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그러자 걱정에 휩싸인 호주 및 뉴질랜드 해군 관계자가 면담을 요청했다.

한시바삐 자신의 참모들과 회의를 해야만 했으나 필립스 제독은 꾹 참고 동맹국 대표들을 만나 안심시키고 이어서 네덜란드 해군 및 미해군의 연락장교까지 면담했다.

오후에는 리펄스가 도착했고 벵골만에서 선단을 호송하던 순양함 엑서터는 선단을 떠나 전속력으로 싱가포르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날씨가 나빠 항공정찰은 어려움을 겪었다.

악천후를 무릅쓰고 이륙한 정찰기 몇 대가 일본선단과 잠깐 접촉했지만 시계가 나쁘고 보고가 단편적이라 전체적인 상황을 알기 어려웠다.

일본선단에 너무 접근했던 정찰기 1대는 일본기에 의하여 격추되었다.

결국 상황파악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전쟁을 앞둔 마지막 날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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