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G부대(2)-프린스오브웨일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영국이 기대를 걸고 있던 신형전함 킹조지5세급의 2번함이었다.
영국은 1930년대 말에 비상건함계획을 통해 킹조지5세급 전함 5척을 건조했는데 킹조지5세급은 1927년에 취역한 넬슨 이래 최초로 만든 전함이었으며 기술발전에 따라 전함의 방어력과 순양전함의 속력을 함께 가진 고속전함이었다.
문제는 제2차 런던조약의 제한 조건을 지키느라 배수량이 35,000톤으로 제한되었고 주포도 14인치(356mm) 10문으로 다소 약하다는 점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취역한 독일전함 비스마르크는 380mm 주포 8문, 미국전함 노스캐롤라이나는 16인치 주포 9문, 야마토는 460mm 주포 9문을 장착하고 있었다.
킹조지5세급의 부포는 5.25인치 양용포 연장 8기, 16문을 보유했으며 대공포로는 40mm 폼폼포 8연장 4기, 32문을 탑재했다.
방어력은 뛰어난 편이었으며 진보된 설계의 벌지와 격벽 덕분에 수선하 방어력도 좋은 편이었다.
영국해군은 킹조지5세급 전함이 불침함이라고 비공식적으로 선전하고 있었다.
(영국전함 프린스오브웨일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title=Sinking_of_Prince_of_Wales_and_Repulse)
프린스오브웨일스는 1937년 1월 1일에 버큰헤드 조선소에서 기공하여 1939년 5월 4일에 5만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수했다.
1940년에 리버풀에서 의장 공사를 받던 중 공습을 받아 독일기가 떨어뜨린 폭탄이 함체와 안벽 사이에 떨어져 폭발하는 바람에 함체가 기울어질 정도로 심하게 침수되었고 이후 불운함이라는 평판이 생겼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1941년 1월 19일에 리버풀에서 취역했는데 다음날 예인선 4척이 로지스를 향하여 리버풀을 떠나는 프린스오브웨일스를 예인하다가 모래톱에 좌초시켰다.
로지스에 머무르는 동안 폼폼대공포원이 실수로 포탄 2발을 발사하여 부두 노동자 1명이 다쳤고 B 포탑의 장전실에서 불이 3번이나 났으며 수병 2명이 낙상을 입었다.
함장 존 리치 대령은 포술 장교로서 만능 스포츠맨이었으며 테넌트 대령과 마찬가지로 동년배에서 가장 뛰어난 장교 중 한명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싱가포르로 향할 당시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승조원은 사령관 톰 필립스 제독의 참모를 포함하여 110명의 장교와 1,502명의 부사관 및 수병이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 역시 리펄스와 같은 거즈쉽으로 수병들은 대부분 데븐포트 훈련소 출신이었는데 리펄스보다 징집병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시험항해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스캐파플로우에 불려와서 비스마르크 추격전에 투입되었다.
많은 기기들이 아직 조정이 끝나지도 않았으므로 조선소 기술자들이 승함하여 전투 해역으로 달려가는 도중에도 기기를 조정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후드와 함께 홀랜드 제독의 지휘 하에 스캐파플로우를 출항하여 아이슬란드 남서쪽 해상으로 나아갔다.
1941년 5월 24일 오전 5시 35분에 독일함대와 만나자 후드에 승좌한 홀랜드 제독은 거리를 좁히도록 명령했다.
앞장 선 후드는 거리가 24,000m 까지 줄어들자 포격을 시작했는데 독일중순양함 프린츠오이겐을 비스마르크로 착각하여 공격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어서 비스마르크가 포격을 개시했고 아침 6시에 약 14,000m 거리에서 발사한 일제사격 중 1발이 후드의 탄약고에 직격했다.
후드는 엄청난 폭발과 함께 침몰했고 1,419명의 승조원 중 3명만이 구조되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처음부터 비스마르크와 교전했는데 독일함대에 접근하는 중이라 전방 6문의 함포만이 사용가능했다.
첫 5번의 일제사격은 비스마르크를 넘어갔으며 이때 주포 1문이 고장을 일으켜 전투가 끝날 때까지 수리할 수 없었다.
후드가 격침된 후 홀로 남은 프린스오브웨일스는 독일함대와 포격전을 벌여 비스마르크에게 14인치 주포탄 2발을 명중시켰으나 자신 또한 비스마르크로부터 4발, 프린츠오이겐으로부터 3발의 명중탄을 맞았다.
홀랜드 제독의 전사에 따라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순양함 노퍽에 승좌한 웨이크워커 소장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웨이크워커 소장은 홀로 싸우고 있던 프린스오브웨일스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연막을 치면서 전장을 이탈하여 순양함 노퍽 및 서퍽과 합류했다가 나중에 아이슬란드로 향했다.
이 전투에서 프린스오브웨일스는 13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린스오브웨일스에게 맞은 명중탄으로 연료탱크가 깨져 중유가 흘러나왔으므로 임무를 중단하고 프랑스로 돌아가다가 3일 후 영국함대에 걸려 격침되었다.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동행했던 후드가 격침되면서 프린스오브웨일스는 불행을 몰고 다니는 사람인 '요나'(Jonah) 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었다.
상처를 수리한 프린스오브웨일스는 1941년 8월에 처칠 수상을 태우고 캐나다의 뉴펀들랜드로 항해했다.
이곳에서 처칠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회담한 후 대서양 헌장을 발표했다.
8월 말에 영국으로 돌아온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지중해 함대에 배치되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1941년 9월 말에 군수품 81,000톤을 실은 수송선 9척을 몰타로 수송하는 할버드 작전에 투입되었다.
할버드 작전에 참가한 함정은 전함 3척(프린스오브웨일스, 넬슨, 로드니), 항공모함 1척(아크로열), 순양함 5척 및 구축함 12척이었다.
선단은 19412년 9월 27일에 이탈리아 공군의 공습을 받았으며 이어 이탈리아 함대가 접근했다.
그러나 프린스오브웨일스, 로드니, 그리고 아크로열이 선단에서 떨어져나와 요격에 나서자 이탈리아 함대는 도망쳤다.
수송선 9척 중 항공어뢰에 격침된 1척을 제외하고 8척이 몰타에 도착함으로써 할버드 작전은 성공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할버드 작전 당시 최고 31.5노트까지 속력을 내었으며 2대의 이탈리아 뇌격기를 격추했으나 아크로열의 전투기 1대도 실수로 격추했다.
할버드 작전을 마친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지브롤터를 거쳐 10월 6일에 스캐파플로우에 도착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취역하자마자 시험항해도 마치기 전에 여러 임무에 투입되었지만 함체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승조원들은 경험이 일천한 상황에서 후드의 끔찍한 최후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이후 끊임없이 임무에 투입되면서 차분히 배를 정비하거나 제대로 쉴 시간을 갖지 못했다.
게다가 지중해에서의 경험은 열대 기후에서 작전하기에는 킹조지5세급의 환기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 승조원의 사기는 낮은 편이었다.
(항공모함 인도미터블.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HMS_Indomitable_(92)
인도미터블은 영국이 비상건함계획에 따라 건조 중이던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의 4번함으로 1937년 11월 10일에 빅커스 암스트롱 사에서 기공하여 1940년 3월 26일에 진수하고 1941년 10월 10일에 취역했다.
배수량 23,000톤의 신예 항공모함인 인도미터블은 취역 1주일 후인 1941년 10월 17일에 함장 해럴드 모스 대령의 지휘 하에 시험항해를 위하여 영국을 떠나 카리브 해로 향했다.
인도미터블은 허리케인 전투기 9대, 풀마 전투기 12대, 알바코어 뇌격기 24대를 싣고 있었고 속력이 31노트에 달해 프린스오브웨일스 및 리펄스와 좋은 조합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인도미터블은 버뮤다에 도착한 지 일주일 후인 1941년 11월 3일에 킹스턴 항 바깥의 산호초에 좌초되었다.
인도미터블은 다음날 자력으로 빠져나와 킹스턴 항에 입항했다.
잠수부를 동원하여 함체를 살펴본 결과 함체의 철판이 심하게 우그러들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도미터블은 함재기들을 육지에 내려놓고 미국 버지니아 주 노퍽으로 가서 수리를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미해군은 동맹국 함정의 수리에 가장 높은 우선권을 주어 12일 만에 수리를 마쳤다.
노퍽을 떠난 인도미터블은 킹스턴에 들러 함재기를 실은 다음 싱가포르로 향했으나 너무 늦었다.
인도미터블이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동안 일본항공기들이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를 격침했다.
G부대에 편성된 구축함은 4척으로 익스프레스와 엘렉트라는 본국함대에서 차출되어 프린스오브웨일스를 따라 영국을 출발했다.
인카운터와 주피터는 지중해 함대에서 차출되어 콜롬보에서 합류했는데 싱가포르에 도착한 후 2척 다 기관고장을 일으켜 말레이 해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Z부대 사령관 톰 필립스 대장과 참모장 아서 팔리서 소장.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Tom_Phillips_(Royal_Navy_officer))
G 부대 사령관은 53세의 톰 필립스 중장으로 37년간 해군에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1915년의 갈리폴리 상륙작전 때 순양함 버캔티를 타고 참가했으나 유틀란트 해전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종전 이후에 참모대학을 나온 후 필립스 제독은 중요한 보직을 차례로 거쳤다.
해군성 계획국 부국장, 동인도 총사령부 참모장을 거쳐 1935년부터 38년까지 해군성 계획국장을 지냈다.
1938년에 준장으로 진급한 필립스 제독은 본국함대의 구축함전대 사령관이 되었으며 39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해군참모차장이 되었다.
필립스 제독은 해군참모차장 시절에 해상이었던 처칠의 눈에 들어 큰 신임을 받았으며 1940년 2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키가 작아 '엄지손가락 톰'(Tom 'Thumb' Philips) 이라는 별명을 가진 필립스 제독은 동년배 중에서 지적이고 결단력을 가진 최고의 제독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권한 위임보다는 중앙집권적인 지휘를 좋아했고 세부 사항을 철저하게 챙겼다.
전체적으로 보아 전략적인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했으나 결코 인기가 높거나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G 부대 사령관으로서 필립스 제독에게는 2가지의 결격 사유가 있었다.
첫쨰로 그는 1917년 이후 해상에서 전투를 치러본 경험이 없었다.
물론 해군참모차장으로서 제2차 대전 초기의 여러 해전을 지휘했지만 육지에서 해상지휘관을 통하여 해전을 지휘하는 것과 해상에서 직접 지휘하는 것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둘째로 그는 항공기의 위협에 둔감한 편이었는데 특별히 심한 것은 아니었고 당시 영국해군의 고위 장교 대부분이 비슷했다.
필립스 제독의 참모장은 아서 팔리서 소장으로 포술장교였다.
말레이 해전 당시 팔리서 소장은 싱가포르에 남아 육군 및 공군과의 연락을 담당하게 된다.
1941년 10월 20일 월요일에 싱가포르 파견이 결정되었을 때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스캐파플로우에 정박 중이었다.
그날 오후에 탄약을 실은 바지선이 현측에 와서 탄약을 싣기 시작했다.
이후 이틀 동안 프린스오브웨일스와 구축함 익스프레스 및 엘렉트라의 승조원들은 긴 항해에 대비하여 탄약, 식량 및 물을 실었다.
목요일 아침에 3척의 군함은 스캐파플로우를 빠져나와 금요일에 그리녹에 도착하여 톰 필립스 제독과 참모들을 태웠다.
프린스오브웨일스가 정박한 사이 바지선들이 다가와 탄약, 식량 및 물을 가득 채웠다.
그리녹에서는 프리타운이나 남아프리카로 가는 영국공군 장교 몇 명이 올라탔고 싱가포르에 보내는 오리콘 대공기관포와 그 탄약도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필립스 제독과 참모들이 승함하자 함대기(Admiral's Flag)가 올라갔다.
다음날인 1941년 10월 26일 토요일에 출항할 때 필립스 제독의 참모들은 행선지를 알고 있었지만 프린스오브웨일스에서는 수뇌부를 제외하고는 어딘가 먼 곳으로 간다는 것만 알았을 뿐 행선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필립스 제독의 참모들이 열대용 방서모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승조원들은 행선지를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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