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기습 사흘 후인 1941년 12월 10일에 말레이 반도의 쿠안탄 앞바다에서 영국 전함과 일본 항공기가 전투를 벌였다.
어뢰와 폭탄을 사용한 일본 항공기에게 대공포로 맞섰던 신형전함 프린스오브웨일스와 순양전함 리펄스는 격침되었다.
타란토 공습이나 진주만 기습과 달리 영국 전함은 전투준비를 갖추고 정상적으로 항행 중인 상태에서 일본 항공기와 싸워 참패했다.
전투의 결과는 전함이 폭탄 및 어뢰를 장비한 항공기의 공격에 맞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으며 이로써 전함의 시대는 끝났다.
(말레이 해전시 일본항공기가 찍은 사진. 위가 프린스오브웨일스이고 아래가 리펄스다.
http://en.wikipedia.org/wiki/Sinking_of_Prince_of_Wales_and_Repulse)
일본은 이 전투에 말레이 해전(マレー沖海戦)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서방 측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영국해군의 공식전사는 이 전투를 다룬 장에 '태평양의 재앙'(Disaster in the Pacific) 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전투에는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영어권에서는 이 전투를 지칭할 때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침몰'(Sinking of Prince of Wales and Repulse) 정도의 용어를 사용한다.
1. 싱가포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일본은 동맹국이었다.
일본은 과중한 부담에 허덕이던 영국해군을 위하여 1917년에 몇 척의 군함을 파견하여 지중해에서 선단 호위를 거들었다.
동시에 일본은 열강들이 유럽 전선에 몰두해 있는 틈에 아시아의 독일 식민지를 공격했다.
일본군은 독일 식민지였던 중국의 청도를 점령했고 소규모의 원정함대를 조직하여 태평양 상의 독일 식민지들을 공격했다.
그 결과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승전국으로서 태평양 상의 독일 영토였던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 그리고 괌을 제외한 마리애나 제도를 차지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이 부상하면서 이 지역에 커다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영국 및 미국과 긴장이 생겨났다.
영국은 말레이, 보르네오, 뉴기니, 호주 및 뉴질랜드를 잇는 교통로가 위협받는다고 느꼈고, 미국 또한 미서 전쟁으로 얻은 필리핀에 대한 위협을 느꼈다.
이런 정세 하에서 열강들 사이에 건함 경쟁에 일어났다.
전쟁을 치르면서 피폐한 영국에게 건함 경쟁은 버거운 일이었고 뒤늦게 근대화하여 아직 경제력이 약한 일본에게도 마찬가지였으며 미국 또한 전쟁이 끝난 마당에 막대한 군비 지출을 원하지 않았다.
열강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1922년에 워싱턴 해군조약이 맺어졌다.
일본함대의 배수량은 미국 및 영국에 대하여 60% 로 억제되었으며 일본 본토를 제외하고 싱가포르의 동쪽인 동경 110도에서 하와이 서쪽에 이르는 태평양 지역에서 군사기지 건설이 중지되었다.
워싱턴 해군조약은 일시적으로 태평양의 긴장을 완화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영국 해군성(Admiralty)은 일본의 부상으로 빚어진 극동 지역의 안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극동 지역에는 전함이 들어갈 수 있는 건선거가 없어서 수리 및 정비가 불가능했다.
또한 건선거가 있더라도 극동 지역에 전함을 항상 배치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피폐해진 영국으로서는 무리였다.
따라서 해군성은 극동 지역에 새로운 해군기지를 건설하되 전함들은 모두 본국함대(Home Fleet)와 지중해 함대(Mediterranean Fleet)에 배치하는 방안을 마련하여 정부에 제출했다.
여기에 따르면 극동 지역에는 순양함과 구축함만이 배치되며 전함은 포함외교의 일환으로 가끔씩 들르게 될 것이었다.
전쟁이 터지면 영국에서 전함이 극동 지역으로 향할 것이며 건선거가 갖추어진 극동의 해군기지에서 정비와 보급을 받으면서 적을 물리칠 것이었다.
이렇게 극동 지역에 현대적인 해군기지를 갖추어 두고 전함은 필요시 증원한다는 개념이 전간기 영국의 방어전략이었다.
해군기지 후보로 중국의 홍콩, 실론 섬의 트링코말리, 호주의 시드니, 그리고 말레이 반도의 싱가포르가 물망에 올랐다.
홍콩은 일본에 너무 가까웠고 트링코말리는 너무 멀었다.
후보지는 시드니와 싱가포르로 압축되었는데 해군성은 전략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싱가포르로 결정했다.
워싱턴 해군조약을 5개월 앞둔 1921년 5월에 영국 내각은 싱가포르에 현대적인 해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해군기지는 싱가포르 섬 북쪽에 건설되었으며 방어시설이 갖추어졌다.
신생 영국공군은 항공기를 사용하여 싱가포르를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항공기의 성능이 제한적이던 1920년대 초반에는 너무 앞선 주장이었다.
물론 싱가포르 섬의 셀레타에 비행장이 건설되었으나 보조적인 역할이었으며 싱가포르 방어의 주력은 대구경 해안포였다.
해군기지 건설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24년에 집권한 노동당 정부는 건설을 중단했으나 다음해에 집권한 보수당 정부가 건설을 재개했다.
이후 해군기지는 집권당, 재정, 국내 정치 상황 및 국제 정세에 따라 건설이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면서 꾸준히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38년에 현대적인 대규모 해군기지가 완성되었다.
싱가포르 해군기지의 건선거는 길이가 307m 에 달했고 262m 짜리 부유선거도 있었다.
따라서 영국의 가장 큰 전함 2척을 동시에 수리할 수 있었고 작은 부유선거도 있어 순양함이나 구축함을 수리할 수 있었다.
커다란 기중기, 공창시설, 거대한 연료탱크와 함께 수리 중인 함정의 수병 3,000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막사도 들어섰다.
기지의 면적은 3.9㎢ 에 달했고 총 건설비는 6000만 파운드 이상이었다.
싱가포르 해군기지의 개소식은 1938년 2월 15일에 있었다.
순양함 노퍽을 위시하여 극동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영국함정 16척이 개소식에 참가했고, 미국과 인도 자치정부도 각각 3척의 함정을 파견했다.
개소식에 전함은 참가하지 않았다.
싱가포르 주재 일본총영사 오카모토는 개소식에 참석했으나 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자리를 떴다.
일본은 당연히 싱가포르 해군기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일본 사이에 감돌던 친밀감은 종전과 동시에 사라져갔다.
영국은 극동 지역에서 강자로 부상한 일본을 의혹과 불신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나마 1920년대에는 일본에서 내각이 군부를 통제했기 때문에 긴장이 급격하게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일본 정부는 군부를 억누르고 워싱턴 해군조약을 체결했으며 중국을 일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9개국 조약에도 조인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를 지키려면 국제 협조를 중시하는 일본 정부가 군부를 억누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최선이었으나 당시 서구 열강의 사정은 일본 정부의 편리를 봐 줄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구 열강의 지도자들도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 정부를 지지할만큼 현명하지 못했다.
국제연맹은 일본을 상임이사국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일본이 강력하게 요구했던 인종평등 결의안을 채택하지 못했다.
이는 주로 호주 총리인 빌리 휴이의 반대 때문이었는데 당시 국제연맹을 주도하던 영국은 호주를 제지하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일본 정부의 위신을 추락시키고 일본 내에서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미국 또한 1924년에 이민법을 개정하면서 상징적인 수준으로라도 여타 아시아 국가와 차별화되는 처우를 원한 일본 정부의 탄원을 무시하고 일본을 여타 아시아 국가와 똑같이 취급하여 이민을 제한했다.
무신경한 미국 정부의 이런 처사는 자신들이 여타 아시아 국가와는 격이 다르며 국제적 의무를 다하는 당당한 열강의 일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일본국민에게 엄청난 배신감과 적개심을 심어주면서 서구 열강과의 협조를 중시하는 일본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결정타는 1927년의 쇼와금융공황이었다.
급속히 악화되는 경제 상황 아래에서 국제 협조를 중시하던 일본 정부는 세력이 꺾였고 결국 1927년 4월 다나카 내각의 성립과 함께 군부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잃었던 권력을 되찾았다.
이후 아시아의 정세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일본군부는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으며 국제연맹에서 만주국 승인을 거부하자 연맹을 탈퇴해 버렸다.
이제 일본은 자신의 팽창 정책에 위협이 되는 싱가포르에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해군 장교 이시무라 도타는 영어로 번역되어 영국에서만 11,000 부 이상 팔린 자신의 책에서 싱가포르를 일컬어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라고 표현했다.
서구 열강들은 일본의 팽창정책이 가져올 위험을 알고 있었으나 대처할 여력이 없었다.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유럽에서도 커다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1935년에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고, 다음해에는 독일이 라인란트를 점령하더니 이어서 스페인 내전이 터졌다.
영국도 대공황에서 겨우 벗어나던 중이라 경제 상황이 안 좋았으며 1936년에는 국왕 에드워드 8세가 즉위 8개월만에 퇴임했다.
나라가 어수선한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기억하고 있는 국민의 여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그러나 국내의 반전 여론에 안주하기에는 국제 정세가 너무 엄중했으므로 영국 정부는 주저하면서도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극동 방어의 핵심인 싱가포르에도 방어력 증강이 실시되었다.
중포 숫자가 늘어났고 싱가포르 섬의 텡가와 셈바왕에 비행장이 추가로 건설되었으며 말레이 반도에도 5개의 비행장이 들어섰다.
영국은 1936년까지 싱가포르에 대한 공격은 바다에서 올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1937년에 말레이 사령관 도비 소장은 일본군이 말레이 반도에 상륙하여 북쪽으로부터 싱가포르를 공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 정부는 도비 소장의 경고를 받아들였으나 돈 쓸 곳은 많고 예산은 부족했다.
1,600km 에 달하는 말레이 해안선을 요새화하라며 정부가 도비 소장에게 배정한 예산은 60,000 파운드에 불과했다.
영국 정부 입장에서 극동 지역은 우선 순위가 떨어졌다.
제1순위는 본토 방어였고 제2순위는 석유를 비롯한 필수 물자의 통로인 지중해 및 수에즈 운하의 확보였으며 극동 지역 방어는 세번째였다.
영국은 전함 5척과 항공모함 6척을 건조하는 자신들의 비상건함계획이 끝날 때까지 일본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모든 전함, 순양전함 및 항공모함들은 본국함대와 지중해 함대에 배치하고 극동 지역에는 필요하면 전함과 항공모함을 차출하여 보낸다는 전략은 바뀌지 않았다.
지중해나 수에즈 운하가 막혀도 함정들이 극동으로 갈 수 있도록 영국은 시에라리온의 프리타운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시몬스타운에 연료보급시설을 설치했다.
태평양의 긴장이 높아지자 호주와 뉴질랜드는 극동 지역에 전함을 붙박이로 배치하라면서 큰집인 영국을 압박했다.
극동 지역에 배치된 영국 외교관들은 전함이 상시 배치된다면 일본에 대하여 싱가포르 해군기지보다 더 큰 억지력을 보일 것이라는 보고서를 본국에 보냈다.
동맹국의 압력에 직면한 외무성은 문제를 해군성에 떠넘겼다.
해군성의 입장은 단호했다.
유럽이 우선이었으며 독일과 이탈리아가 먼저 무찔러야 할 적이었다.
따라서 모든 전함과 항공모함은 본국함대와 지중해함대에 배치되어야 했으며 극동 지역에 배치할 여유는 없었다.
극동 지역에 전함을 상시 배치하는 문제는 비상건함계획이 끝난 이후에야 검토해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9년 9월 1일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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