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슬림강 방어선 붕괴


1942년 1월 7일 아침에 일본군이 트롤락 지구에서 제12여단을 유린하는 동안 남쪽의 탄종말림에 사령부를 둔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상황 파악에 애를 먹고 있었다. 말레이 주둔 영국군의 고질적 문제인 무전기 부족 때문에 제11사단사령부와 제12여단과의 통신선은 철도를 따라 부설된 민간전화선 뿐이었는데 오전 6시 30분에 슬림강의 철교를 폭파하면서 끊겼다. 따라서 파리스 준장은 트롤락 지구에서 일어난 재앙의 규모를 몰랐으나 격전이 벌어졌고 상황이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오전 7시에 캄퐁슬림 남쪽의 야영지에서 대기중이던 제5/14펀자브대대와 제28여단에게 설정된 방어선으로 출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제28여단 소속 대대들이 방어선으로 출발했다. 캄퐁슬림 부근의 방어선으로 북상하던 제2/9구르카대대는 오전 8시에 도로에서 일본전차대를 만났으나 공격당하기 전에 편제를 유지한 채로 도로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일본전차대는 제2/9구르카 대대를 무시하고 남쪽으로 사라졌다. 제2/9대대는 캄퐁슬림 방어선을 점령하고 후속할 일본군을 막을 채비를 서둘렀다.


잠시 후 일본전차대는 클러니 고무농원으로 이동 중이던 제2/1구르카대대를 따라잡았다. 도로에서 이동 중에 기습을 당한 제2/1구르카대대는 제압되어 붕괴했다. 일본전차대는 이어서 클러니 농원의 도로 양측에 방열하고 있던 제137야포연대의 2개 포대를 덮쳤다. 일본전차는 전차포와 기관총으로 불과 몇 분만에 영국 포병대를 전멸시키고 다시 전진했다. 오전 8시 40분이 되자 일본전차대가 슬림강 지구의 동쪽 끝인 슬림강 다리에 도착했다.

당시 슬림강 다리는 40mm 보포스 대공포 4문을 보유한 홍콩싱가포르포병대 제16경대공포대의 1개 중대가 지키고 있었다. 트럭을 타고 후퇴한 병사로부터 일본전차대가 오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포수들은 대공포를 황급히 도로 쪽으로 조준했다. 잠시 후 일본전차대가 나타났다. 포수들은 선두 전차가 90m 까지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격을 가하여 여러 발의 명중탄을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 대공포중대에는 철갑탄이 없었으므로 일본전차의 장갑을 뚫을 수 없었다. 일본전차가 반격을 개시하자 대공포중대는 큰 피해를 입고 제압당했다.


슬림강 다리를 건넌 일본전차대는 오전 9시 30분에 다리 남쪽 3km 지점에서 북상 중이던 제155야포연대를 덮쳤다. 선두에 섰던 연대본부는 제압당했으나 뒤따르던 야포가 방열에 성공했다. 4.5인치 곡사포 1문이 빗발치는 일본전차의 기관총 세례를 무릅쓰고 불과 30m 거리에서 사격을 가하여 선두 전차를 파괴했다. 이 일격이 6시간 만에 제12여단을 와해시키고 제28여단을 궁지에 몰아넣은 일본전차대의 진격을 막았다. 위협을 느낀 일본전차대는 일단 물러났으며 오전 내내 제155야포연대의 포격에 시달리다가 오후가 되자 슬림강 다리를 건너 후퇴했다.


(슬림강 전투.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80)


남쪽의 탄종말림에서는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이 상황을 몰라 애태우고 있었다. 제12여단과의 연락수단인 전화선은 오전 6시 30분에 끊겼고 얼마 후 제28여단의 무전기도 일본전차에게 파괴당했다. 파리스 준장은 상황파악을 위하여 제11사단의 제1일반참모(GSO1 = General Staff Officer 1)인 해리슨 대령을 차에 태워 북쪽으로 파견했다. 해리슨 대령은 북상하다가 탄종말림으로 철수중이던 제350포대의 병사를 만났다. 제12여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트롤락 지구에 배치되었던 제350포대의 패잔병들은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가 와해되었으며 일본전차대가 고속으로 남하 중이라고 말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던 해리슨 대령은 운전병에게 계속 가자고 말했다. 슬림강 다리를 건너 클러니 고무농원으로 향하던 해리슨 대령은 동진하던 일본전차대와 만났다. 일본전차가 쏘아댄 기관총에 차량은 벌집이 되고 운전병이 다쳤지만 해리슨 대령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나무 뒤에 숨었다. 서쪽으로 향하는 일본전차대를 보며 해리슨 대령은 슬림강 다리가 함락되리라는 걸 알았지만 알릴 방법이 없었다. 이후 해리슨 대령은 자전거를 하나 주워서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도중에 클러니 고무농원에서 파괴되거나 버려진 야포를 보았고 농원 서쪽의 도로에서는 제2/1구르카대대가 제압당한 흔적을 보았다. 잠시 후 캄퐁슬림에 있는 제28여단사령부에 도착한 해리슨 대령은 영국군에게 일어난 재앙의 규모를 알 수 있었다.


파리스 준장은 오전 8시 30분에 놀라운 보고를 받았다. 일본전차대가 트롤락 지구를 통과하여 고속으로 남하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탄종말림 북쪽에 대전차포대를 배치하고 휘하 병력에게 전차 경보를 내렸으며 제3인도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보고했다. 히스 중장은 즉시 라왕에 주둔 중이던 제15여단으로부터 제2/16펀자브대대를 떼내어 탄종말림으로 보냈다. 오전 10시에 제155야포연대로부터 슬림강다리 남쪽 3km 지점에서 일본전차대를 저지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파리스 준장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그는 이날 아침에 벌어진 재앙의 규모를 알게 되었다.


오전11시에 제28여단장 셀비 중령은 캄퐁슬림 동쪽의 언덕에 제12여단장 스튜어트 중령과 함께 사령부를 차렸다. 제12여단은 4개 대대를 모두 잃었으며 제28여단은 제2/1구르카대대를 잃고 2개 대대만을 가지고 있었다. 셀비 중령은 2개 대대와 패잔병들을 지휘하여 캄퐁슬림을 7일 오후까지 지키다가 저녁이 되면 철로를 통하여 남쪽인 탄종말림으로 후퇴하기로 했다. 7일 오후가 되자 캄퐁슬림 북쪽에 일본보병제42연대의 제1 및 제2대대가 집결했다. 저녁이 되어 제28여단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일본군이 추격하여 후위를 맡은 제2/9구르카대대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슬림강의 철교는 오전에 파괴되었지만 제3공병중대가 널빤지로 끊어진 부분을 연결했다. 따라서 차량이나 장비는 모두 버리고 철수해야 했다. 일본군이 추격하자 겁에 질린 제2/2구르카대대 병사 여러명이 강에 뛰어들었다가 급류에 휘말려 익사하거나 실종되었다. 강을 건너는데 성공한 병사들은 19km 를 걸어 8일 오전 3시에 탄종말림에 도착했다. 이날의 전투로 제12여단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제28여단은 전력이 1/3로 줄었다.

1942년 1월 8일 현재 제12 및 제28여단 소속 소총대대의 병력 수는 다음과 같다.(소총대대의 정원은 786명이다.)

제12여단 -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 : 113명, 제2아길&서덜랜드하이랜더대대 : 94명, 제5/2펀자브대대 : 81명, 제5/14펀자브대대 : 135명

제28여단 - 제2/1구르카소총대대 : 약간명, 제2/2구르카소총대대 : 약 400명, 제2/9구르카소총대대 : 약 350명

전사총서에 따르면 일본군의 전과는 확인한 영국군 시체 약 300구, 포로 약 1,000명이며 노획품은 야포 37문, 고사포 6문, 브렌건캐리어 84대, 차량 약 600대이다.


슬림강 전투는 일대 재앙이었다. 이 패배의 결과로 중부 말레이의 상실이 빨라졌으며 북부 조호르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여 당시 싱가포르로 접근하던 증원군이 무장하고 전투에 대비할 시간을 벌겠다는 계획이 결정적인 차질을 빚었다. 얼마 후 유효한 전력으로서의 제11사단은 사라졌다.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은 제11사단이 보유하고 있던 대전차 전력을 활용하는데 실패했기 떄문이었다. 당시 제11사단에는 대전차포 연대가 있었으나 최전방의 제12여단에는 1개 대전차포중대만 주어졌다. 사단이 보유한 대전차지뢰는 1,400개가 넘었으나 제12여단에 주어진 건 24개였다. 제12여단은 이런 빈약한 대전차 전력과 몇 개의 대전차 장애물만 가지고 일본군과 맞서야 했다.

이렇게 된 원인은 파리스 준장이 사단의 주방어선을 탄종말림으로 생각하고 슬림강 방어선은 단순한 임시지연지역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슬림강 방어선의 목적은 도하점의 다리를 끊어서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단순히 슬림강의 교량을 폭파하여 시간을 끌 생각이었으면 공병대와 엄호를 위한 약간의 병력만을 보내면 충분할 것을 2개 여단이나 배치한 것이 문제였다. 결국 강력한 대전차 전력은 탄종말림에 남겨두고 2개 여단에 빈약한 대전차 전력만을 붙여 임시지연지역에 지나지 않는 슬림강 방어선에 배치한 것이 참패를 불러왔다. 


여단장들 또한 대전차포가 부족하면 주어진 야포를 대전차전력으로 전용하는 조치를 취해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통신불량도 참패의 원인 중 하나였다. 무전기가 없어서 여단사령부는 휘하 대대의 상황을 알기 어려웠고 결정적인 순간 사태에 개입할수 없었다. 

결국은 주요 도로를 따라 전차를 대담하게 운용하는 전술에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인데 일본군이 이런 전술을 사용한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영국군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Posted by 대사(PW)
,

36. 트롤락 함락


제11사단은 슬림강 도하지점에서 일본군 진격을 4일 정도 막을 생각으로 중간지연지역을 설정했다. 중간지연지역은 2개 지구로 나뉘어졌다. 철도와 간선도로가 나란히 통과하는 트롤락 지구는 트롤락 북쪽 5.6km부터 트롤락을 지나 캄퐁슬림 북쪽 2.4km까지 총 12km 길이로 설정되었다. 슬림강 지구는 캄퐁슬림부터 동쪽으로 슬림강 다리까지 슬림강을 따라 11km에 걸쳐 있었다. 트롤락 지구는 이안 스튜어트 중령의 제12여단이 지켰는데 제3기병연대의 1개 중대, 제5/14펀자브대대, 제137야포연대, 제3공병중대, 제215대전차포대의 1개 중대가 추가로 배속되었다. 슬림강지구는 월레스 셀비 중령의 제28여단이 지켰는데 제155야포연대, 제23공병중대, 그리고 제215대전차포대의 1개 중대가 추가로 배속되었다. 탄종말림에 있는 제11사단사령부 부근에는 제80대전차연대가 예비대로 주둔했다. 모든 다리에는 폭약을 설치하여 사단사령부의 명령이 있으면 즉시 폭파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슬림강 방어선.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80)


제12여단장 스튜어트 중령은 트롤락 지구 방어선을 종심깊게 배치했다. 북쪽의 60마일이정표 지역에는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가 콘크리트로 만든 이동식 대전차장애물의 도움을 받아 전방 방어선을 형성했다. 주방어선은 제61 및 제62마일이정표 지역에 배치된 제5/2펀자브대대가 맡았다. 주방어선에는 대전차포 1개 중대가 배속되었고 대전차지뢰도 보급되었는데 숫자가 24개 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제11사단이 보유한 대전차지뢰는 1,400개가 넘었지만 전방으로 추진되지 않았다. 제5/2펀자브대대의 후방에는 아길대대가 배치되어 일본군이 우회하는지 감시했다. 일본군이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트롤락 남쪽으로 진출할 경우에 대비하여 65마일 이정표 지역에 예비방어선을 설정했다. 명령이 떨어지면 캄퐁슬림 남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제5/14펀자브대대가 북상하여 예비방어선에 배치될 것이었다. 트롤락 지구에서는 포격을 위한 시계가 불량하여 제137야포연대의 1개 포대만 배치되고 나머지 2개 포대는 슬림강 지구에 있는 클러니 고무농원에 배치되었다.

슬림강 지구를 담당한 제28여단은 캄퐁슬림과 클러니 고무농장에 방어선을 설정했으나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제28여단 병력들을 캄퐁슬림 남쪽의 야영지에서 좀 더 휴식시키라고 말했다. 제28여단은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방어선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야영지에서 대기했다.


제12여단 병력들은 1942년 1월 4일에 방어선에 배치되어 이틀동안 방어준비에 매달렸다. 일본제3비행단은 4일부터 일본제5사단 전면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따라서 영국군은 낮에는 일본기의 공습과 기총소사로 작업을 할 수 없어 밤에만 작업해야 했다. 일본기의 공격으로 인하여 자동차 10대가 불에 탔으나 더 큰 문제는 지속적인 공습으로 병사들이 낮에는 잠을 자지 못하고 밤에는 작업을 했으므로 피로가 누적되고 사기가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제5/2펀자브대대장 디킨 중령은 대대의 전투효율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고 평가했는데 제12여단 전체가 마찬가지였다. 어쨌건 6일 아침까지 병사들은 참호를 파고 대전차장애물을 설치했다.


최초의 전투는 5일 밤에 있었다. 일본제42연대 소속 2개 중대가 철도를 따라 남하하다가 트롤락 서북방 약 5km 지점에서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의 기습적인 총격을 받고 약 60구의 시체를 남긴 채 물러났다. 캄파르에서 남하한 피난민이 6일 오후에 일본군의 탱크 수십대가 간선도로를 따라 진격 중이라는 정보를 전했다. 이 정보는 제11사단과 제12여단에는 전달되었으나 제28여단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제42연대장 안도 타다오 대좌는 전력을 가다듬어 본격적인 공세를 가했다. 6일 저녁에 제1대대가 동쪽의 간선도로, 제2대대가 서쪽의 철도를 따라 남하하여 자정을 막 넘긴 7일 새벽에 동시에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를 공격했다. 오전 3시 30분에 일본전차가 트럭에 탄 보병과 함께 가세했다. 일본군은 대전차장애물을 제거하고 하이드라바드대대의 선두 중대를 섬멸했다. 트롤락 지구 내에는 전쟁 전에 간선도로를 직선화하면서 사용하지 않는 원형 우회로 3개가 생겼다. 일본군이 가장 북쪽의 우회로를 찾아내어 하이드라바드대대를 포위하려 했다. 하이드라바드대대는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철도를 따라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하이드라바드대대의 병사들은 거의 흩어졌다.


일본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간선도로를 따라 남하했다. 7일 오전 4시 30분에 선두 전차가 61마일이정표 바로 앞에서 제5/2펀자브대대가 깔아놓은 대전차지뢰를 밟았다. 이를 신호로 영국군의 대전차포가 사격을 가하여 일본전차 3대를 추가로 파괴했다. 일본군은 멈칫했으나 곧 2번째 우회로를 찾아서 방어선을 뒤에서 덮쳐 붕괴시켰다. 일본군은 다시 남하하여 800m 후방의 방어선을 덮쳤다. 대전차포가 없던 펀자브대대의 2번째 방어선은 곧 무너졌다. 일본군은 이어 펀자브대대의 예비중대를 노리고 남하하다가 62마일이정표 바로 앞에서 선두전차가 다시 대전차지뢰를 밟으면서 진격을 멈추었다. 예비중대에 배속된 대전차포 2문이 포탄을 2발씩, 총 4발을 쏘아 1발을 명중시킨 후 아길대대 지역으로 후퇴했다. 여기에 더하여 예비중대의 대전차총이 전차 1대의 캐터필러를 끊었다.

제5/2펀자브대대본부와 예비중대는 일본군 주력과 격전을 벌여 1시간 동안 저지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마지막 우회로를 발견하여 펀자브대대의 잔여병력을 포위했다. 가까스로 일본군의 포위망을 탈출하는데 성공한 소수의 펀자브대대원들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정글로 들어가 남동쪽에 있는 슬림강다리 쪽으로 도망쳤다. 이제 일본군은 제2아길대대가 지키는 트롤락을 향하여 남하했다. 제2아길대대가 필사적으로 트롤락 북방에 대전차장애물을 설치하는 동안 제5/14펀자브대대는 대전차포 1개 중대와 함께 65마일이정표를 향하여 북상했다.


오전7시에 전차를 앞세운 일본군이 트롤락 북쪽에서 급조한 대전차장애물을 만났으나 간단히 치워버리고 계속 전진했다. 잠시 후 일본군은 도로 방책을 만났다. 주변에 매복 중이던 영국군 대전차총과 브렌건캐리어가 공격했으나 일본전차는 브렌건캐리어를 순식간에 전멸시킨 다음 방책을 뚫고 지나갔다. 다가오는 일본전차를 본 아길대대가 트롤락 다리를 폭파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다. 일본전차는 유유히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일본전차의 돌파를 허용하자 아길대대 병력 중 철도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은 캄퐁슬림을 향하여 남쪽으로 철수했다. 간선도로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들은 일본전차가 지나간 후 트롤락 다리를 지키기 위하여 다시 집결했으나 오전 9시에 일본군 추가 병력이 전차를 앞세우고 트롤락에 도착하자 전투를 포기하고 정글로 들어가 남동쪽의 슬림강다리쪽으로 도망쳤다.


트롤락을 통과하여 남쪽으로 달리던 일본전차대는 오전 7시 30분에 캄퐁슬림에서 1.6km 정도 북쪽에서 북상중이던 제5/14펀자브대대를 정면으로 덮쳤다. 앞장선 2개 중대가 순식간에 붕괴하면서 병사들이 흩어졌다. 뒤따르던 2개 중대는 고무농원으로 도망쳐서 가까스로 붕괴를 면하고 도로 주변에 방어선을 폈으나 얼마 후 전차를 앞세운 일본군 추가 병력에 의하여 쫓겨났다. 펀자브대대에는 제28여단으로부터 배속받은 대전차포 1개 중대가 있었으나 방열할 시간이 없었다.

이로써 트롤락 방어선은 무너졌다.

Posted by 대사(PW)
,

35. 셀랑고르 방어선


서부 말레이에서는 캄파르에서 일본군 주력의 남진을 막고 있던 제11사단이 텔록안손 방향에서 밀고 들어오는 일본군 때문에 보급로가 차단될 위기에 처하자 캄파르를 포기하고 1942년 1월 4일까지 승카이-슬림강 지역으로 후퇴했다. 증원군을 실은 선단이 싱가포르에 접근하고 있었으므로 퍼시발 중장은 히스 중장에게 1월 14일까지 쿠알라룸푸르 부근의 비행장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명령했다. 히스 중장은 간선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일본군 주력을 저지할 병력에서 일부를 차출하여 쿠알라셀랑고르와 포트스웨튼햄에 일본군이 상륙할 경우에 대비하기로 했다. 이를 위하여 히스 중장은 1942년 1월 1일에 보급로 사령부(Line of Communication Command)를 만들고 로버트 모이어 준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모이어 준장은 셀랑고르에 일본군이 상륙하지 못하게 만드는 임무를 맡았다. 


(셀랑고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 268)


히스 중장은 간선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일본군 주력을 저지할 지점으로 탄종말림을 선택했다. 1월 4일 밤에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제15여단(제3/16펀자브대대 제외)을 탄종말림에, 제3/16펀자브대대를 라왕에 배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1사단의 나머지 병력은 트롤락-슬림강 지역에 배치되어 도하점을 감시했다. 파리스 준장은 도하점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4일 이상 저지하기를 원했다.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중장은 간선도로를 따라 제5사단을 남하시켰다. 선두는 전차 1개 대대의 지원을 받는 제42연대였다. 제11연대가 뒤를 따르다가 영국군이 쿠알라룸푸르 북쪽에서 패배하면 제42연대를 초월하여 전면에 나설 것이었다. 제41연대는 예비대였다. 서쪽에서는 제11연대제3대대와 근위제4연대가 육로와 해로로 남하하여 셀랑고르와 포트스웨튼햄를 점령한 다음 서쪽으로부터 쿠알라룸푸르를 공격할 것이었다.


1월 2일과 3일에 일본군이 셀랑고르에 상륙하려다가 영국군의 포격을 받고 실패했다. 그러자 히스 중장은 제15여단으로부터 자트/펀자브대대와 제1독립중대를 모이어 준장의 보급로 사령부에 증강했다. 이로써 보급로 사령부의 병력은 제3기병연대, 제3/17도그라스대대, 자트/펀잡대대, 제1독립중대, 로즈부대, 제88야포연대, 제73야포대, 제272대전차포대, 그리고 2개 의용대대, 1개 의용경포대 및 1개 의용장갑차중대가 되었다.

4일 아침에 쿠알라셀랑고르 북방 13km 지점에서 제3기병연대의 1개 중대와 자트/펀자브대대의 1개 중대가 해안도로를 따라 남하하던 이치카와 지대(보병제11연대제3대대)와  만나 교전 끝에 후퇴했다. 이치카와 지대는 그날 저녁 셀랑고르 강 북안에 도달한 다음 동쪽으로 꺾어 19km 떨어진 바탕베르준타이에 있는 다리로 향했다. 이 다리는 라왕에서 불과 18km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영국군은 다리를 지키던 제1독립중대에 로즈부대를 증원했다. 이치카와 지대는 5일 아침에 다리 북쪽에 도착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히스 중장은 탄종말림에 있던 제15여단을 라왕으로 불러들였다. 동시에 보급로 사령부는 해체되고 그 병력은 모두 제15여단장 무어헤드 중령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무어헤드 중령은 제3/17도그라스대대에게 반격을 명했다. 도그라스대대는 5일 밤에 다리 북쪽의 도로교차점에서 이치카와 지대를 공격하여 쫓아내었다. 그러나 무어헤드 중령은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고 6일 날이 밝자 도그라스대대를 다리를 건너 철수시킨 다음 다리를 끊었다. 이로써 해안 지역은 셀랑고르 강을 경계로 안정되었다.


말레이 사령부는 서해안에서 일본군의 상륙작전을 막아달라고 해군에 요청했다. 그러나 페락전대는 일본군의 반복적인 공습을 받아 사실상 전멸했기 떄문에 일본군의 상륙을 막을 수 없었다.

Posted by 대사(PW)
,

34. 쿠안탄 함락


영국군과 일본군의 주력이 말레이에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제9인도사단은 제8인도여단을 쿠알라리피스-제라툿 방면에, 제22인도여단을 쿠안탄에 배치하여 동부 말레이를 방어하고 있었다.


일본보병제56연대를 주축으로 한 다쿠미 지대는 1941년 12월 19일에 쿠알라크라이를 점령한 후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동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트렝가누는 18일에 제56연대 제7중대가 이미 점령한 상태였다. 다쿠미 지대는 트렝가누를 통과하여 마랑, 둔군, 파카를 거쳐 25일에 추카이를 점령했다. 그동안 다쿠미 지대는 23일에 제22인도여단 정찰대와 접촉했을 뿐 영국군의 방해를 받지 않았다. 남하 경로에는 걸어서 건널 수 없는 하천이 10개 정도 되었으나 영국군의 방해가 없었기 때문에 공병이 만든 다리와 주정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건널 수 있었다. 다쿠미 지대는 12월 26일 정오부터 추카이 남쪽에서 케마만 강을 건넜는데 다리를 만들 수 없어 주정을 타고 건너야 했다. 케마만 강은 한번에 2개 중대를 수송할 수 있는 주정대가 1번 왕복하는데 40분이 걸리는 큰 강이었으나 영국군의 방해가 없어서 무사히 도하를 완료했다. 다쿠미 지대의 주력은 예상보다 빠른 27일 저녁에 쿠안탄 북방 25km 지점에 도달했다.

남방군은 보병제55연대를 쿠안탄에 상륙시킬 생각이었으나 다쿠미 지대의 전진이 빨라서 위험한 적전 상륙작전을 감행할 이유가 사라졌다. 결국 제55연대는12월 28일에 코타바루에 상륙하여 다쿠미 지대를 따라 쿠안탄으로 남하했다.


(쿠안탄)


쿠안탄에 배치된 제22여단(조지 페인터 준장)의 임무는 쿠안탄 비행장을 지키는 것이었다. 비행장은 쿠안탄 강가에 펼쳐져 있었다. 페인터 준장은 해안으로부터 공격과 북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모두 대비해야 했다. 제2/18왕립갈월소총대대는 제2/12FFR(Frontier Force Regiment)대대의 1개 중대를 배속받아 쿠안탄에서 북쪽으로 18km 에 걸친 해안선을 방어했다. 제5/11시크대대는 쿠안탄 강을 지켰다. 제2/12FFR대대는 여단의 예비대로서 제란툿 도로에서 24km 서쪽에 떨어진 감방 부근에 주둔하면서 파항 강 상류 쪽에서 접근하는 통로를 방어했다. 여단은 제5야포연대와 제88야포연대의 1개 포대로부터 화력지원을 받았는데 야포의 일부는 쿠안탄 강의 동쪽에 있었다. 비행장은 강의 서쪽, 해안으로부터 14km 떨어진 간선도로 부근에 있었다.


(말레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152)


서부 말레이의 전황이 악화되자 제3인도군단장 루이스 히스 중장은 제9사단이 동서로 뻗은 제란툿-라우브-쿠알라쿠부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진출하여 남하하는 일본군의 좌익을 공격해 주길 원했다. 따라서 그는 제22여단이 쿠안탄 비행장을 지키려다가 큰 피해를 입을까 봐 두려워했다. 히스 중장은 28일에 제9사단장 바스토우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만일 일본군이 북쪽으로부터 쿠안탄 비행장을 위협하면 전초와 정찰대를 제외한 제22여단의 주력은 쿠안탄 강 너머로 후퇴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 바스토우 소장은 페인터 준장을 찾아와 히스 중장의 의도를 전했다. 그러나 쿠안탄 비행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모든 병력을 쿠안탄 강 너머로 철수시킬 수는 없었다. 결국 해안을 지키던 제2/18왕립갈월소총대대는 그대로 전선을 지켰다.

그러자 29일에 히스 중장은 바스토우 소장에게 명백하게 철수를 명령하는 전문을 보냈다. 명령문에서 히스 중장은 퍼시발 중장 또한 쿠안탄 비행장 사수보다는 제22여단의 보존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면서 쿠안탄 강 북서쪽의 병력을 모두 쿠안탄 강 너머로 철수시키라고 적었다. 나중에 퍼시발 중장은 히스 중장이 자신의 의도를 오해했다고 말했다. 당시 퍼시발 중장은 제22여단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오랫동안 일본군이 쿠안탄 비행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들기를 바라고 있었다.


(쿠안탄.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72)


바스토우 소장은 다음날인 30일에 페인터 준장에게 히스 중장의 명령을 전했다. 제2/18왕립갈월대대가 철수를 시작했을 때 다쿠미 지대의 주축인 제56연대가 북쪽으로부터 공격을 가해왔다. 제56연대장 나스 요시오 대좌는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 제1대대가 해안을 따라 배치된 갈월대대의 주력을 견제하는 동안 제2 및 제3대대가 자보르 방면으로 우회하여 북쪽으로부터 쿠안탄 시가지를 공격, 점령하여 영국군의 퇴로를 끊으려고 했다. 제56연대 주력은 쿠안탄 북서쪽에서 다시 갈라져 제2대대가 북쪽에서, 제3대대가 북서쪽에서 쿠안탄 시가지에 접근했다. 퇴각하던 영국군 갈월대대의 2개 중대가 쿠안탄 북쪽에서 일본군 제2대대에게 차단당하여 전멸했다.


살아남은 갈월 대대의 병력들은 쿠안탄 시가지 남쪽의 나루터에서 쿠안탄 강을 건너 남쪽으로 철수했다. 쿠안탄 시가지에 진입한 일본제3대대가 나루터를 공격하여 영국군의 퇴로를 끊으려고 했으나 갈월대대의 후위부대가 치열한 시가전 끝에 막아내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의 포격을 받아 제3대대장이 중상을 입고 제12중대장이 전사했다. 한편 일본기들은 쿠안탄 강을 건너 병력과 장비를 실어나르는 영국군 나룻배를 공격했다. 영국군은 나룻배 절반을 잃으면서 31일 새벽까지 모든 야포와 차량, 그리고 나루터에 도착한 병력을 강을 건너 철수시켰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일본제56연대가 31일에 쿠안탄 시가지를 점령했다.


이때 증원군을 실은 선단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쿠안탄 비행장을 최소한 1942년 1월 5일까지 지키라는 명령이 제22여단에게 떨어졌다. 이제 병력이 300명 수준으로 떨어진 제2/18왕립갈월대대는 비행장에 집결했다.

일본군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1일 오후에 제56연대 제1대대가 쿠안탄 비행장의 북서쪽에서 쿠안탄 강을 건넜고 2일에는 제2 및 제3대대가 비행장 북쪽에서 강을 건넜다.


2일 저녁에 서부 말레이의 영국군이 캄파르 방어선을 포기하면서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이제 제9사단은 파항 지역에서의 철수를 위하여 쿠알라리피스-라우브-제란툿 지역에 집결해야 했다. 제22여단도 쿠안탄 비행장을 포기하고 제란툿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2여단은 비행장의 건물과 장비들을 파괴하고 활주로에 구멍을 뚫은 후 3일 오후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추격을 시작했고 오후 8시에 제56연대제1대대가 영국군을 따라잡았다. 후위를 맡은 제2/12FFR대대장 아서 커밍 소령은 1개 중대를 이끌고 2번에 걸쳐 도로에 매복하여 쫓아오는 일본군에게 기습적인 반격을 감행했다. 격전 끝에 중대는 병력이 40명으로 줄어들었지만 추격하던 일본군도 제1대대장이 부상을 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자 추격을 단념했다. 덕분에 여단 주력은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이 공로로 커밍 소령은 빅토리아 십자장을 받았다. 제22여단은 4일 밤에 마란을 통과했으며 6일 밤에 제란툿 나루터를 거쳐 라우브 지역으로 철수했다. 이제 제22여단의 병력은 2/3로 줄어들었다.


제22여단이 철수하자 3일 밤에 일본군이 쿠안탄 비행장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영국군이 뚫어놓은 활주로의 구멍을 메우는 등 비행장을 정비하여 11일부터 비행기 이착륙이 가능해졌다.

다쿠미 지대는 쿠안탄 전투에서 영국군의 브렌건캐리어 7대, 자동차 57대, 박격포 7문, 기관총 13정, 그리고 탄약, 연료 및 보급품을 노획했다. 포로는 564명, 확인한 영국군 시체는 약 760구였다. 다쿠미 지대의 사상자는 약 150명이었는데 지휘관의 손실이 컸다. 제1 및 제3대대장이 부상당했고 중대장 2명이 전사했으며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로써 개전 당시 보병제56연대의 대대장 3명 중 1명은 전사하고 2명은 부상을 당했다.

Posted by 대사(PW)
,

33. ABDA 사령부 


일본과의 전쟁이 벌어진 지 5일 후에 처칠 수상과 참모총장들은 미국과의 회담을 위하여 전함 듀크오브요크를 타고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이후 워싱턴에서 열린 아카디아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은 몇가지 합의에 도달했다. 중요한 것으로는 독일우선원칙, 중국을 지원하여 전쟁에 머물러 있도록 할 것, 그리고 극동 지역에서는 나중에 반격으로 나갈 때까지 일본의 진격을 멈출 수 있는 수준의 전력만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미본토가 일본군에게 침공당할 가능성은 없었다. 일본의 목표는 말레이, 필리핀을 거쳐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장악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간다면 호주를 침공하거나 버마를 거쳐 인도에 침공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공격으로 북으로는 대만에서 남으로는 호주, 서로는 벵골만에서 동으로는 뉴기니에 이르는 지역이 전란에 휩싸였다. 이 지역에는 4개 국가의 5개 총사령부가 있었다. 필리핀에는 미군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있었고 호주에는 호주군인 토머스 블레이미 장군이 있었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는 네덜란드군인 차르다 켄 스타켄보로 스타초워 총독이 있었다. 말레이의 헨리 파우널 장군과 인도의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은 영국군이었다. 이들은 모두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자바, 그리고 뉴기니까지 늘어선 섬들로 이루어진 말레이 방어선의 중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면 각국의 이해 관계는 차이가 있었다.

영국의 목표는 싱가포르를 지키고 인도양의 동쪽 출구를 열린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필리핀 상실을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반격의 발판으로 사용할 호주와 미본토 사이의 보급로를 확보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호주는 당연히 본국의 안전이 우선이었으며 네덜란드 또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안전에 관심을 기울였다. 본토를 독일에게 점령당한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는 실질적인 경제적 가치 이외에도 감정적인 가치가 매우 컸다.  반면 일본군에게는 이해관계의 충돌이 없었으며 균질한 단일 군대와 내선의 잇점을 누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부족한 이 지역의 연합군 전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이해관계의 조정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각국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최고사령부를 만드는 것이 방법 중 하나였다.


최고사령부의 필요성을 처음 제기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1941년 크리스마스에 미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대장은 영국참모본부와의 회의에서 일본과 교전 중인 극동 지역에 최고사령관을 임명하자고 주장했다. 최고사령관은 각국 정부의 이해를 초월하여 일본에 맞서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국적에 상관없이 담당 지역 내의 모든 군대를 지휘할 권한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처칠 수상은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극동 지역에 군대와 보급품을 보내는 일은 각국 정부의 소관인데 최고사령관 입장에서 자신이 지휘할 군대를 파견하고 먹여살릴 각국 정부의 의사를 무시한 채 독자적으로 전략을 세우고 실행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보았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마셜 장군의 아이디어에 찬성하자 처칠 수상도 태도를 바꾸어 최고사령부 설립을 지지했다. 최고사령부의 관할 지역은 ABDA 지역으로 불리게 되었다. ABDA 는 미국(American), 영국(British), 네덜란드(Dutch), 그리고 호주(Australian)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ABDA 지역의 최고사령관으로 영국군인 아치볼드 웨이벌 대장을 추천했다. 영국참모본부는 영국군 최고사령관 아래에서 싸운 결과가 파국으로 끝났을 때 - 실제로 그럴 확률이 높았다 - 미국 여론에 끼칠 악영향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처칠 수상은 영국군에게 최고사령관을 양보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호의로 해석하여 받아들였다.

12월 29일에 웨이벌 장군은 자신이 최고사령관에 임명될 것이라는 처칠 수상의 전문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듯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니라 십중팔구 패배의 멍에를 짊어져야 할 자리였으나 웨이벌 장군은 묵묵히 받아들였다. 웨이벌 장군은 단지 새로 맡은 임무를 파악할 최소한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발표를 보류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s://en.wikipedia.org/wiki/Archibald_Wavell,_1st_Earl_Wavell)


아카디아 회담에서는 또한 미군과 영국군의 작전을 지도할 최고기구로 연합참모본부(Combined Chiefs of Staff)를 설립했다. 워싱턴에서 상설기구로 운용될 연합참모본부는 미국합동참모본부와 영국참모본부의 대리인인 고위 장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리인을 통하여 런던의 참모본부는 전략 수립의 모든 단계에 직접 관여할 수 있었으며 국방상의 자격으로 참모본부를 손수 통제하던 처칠 수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연합참모본부를 통하여 미국과 영국은 사상 유례없이 밀접한 연합작전을 실시할 수 있었다.


ABDA 지역을 확정하는 데에는 논란이 따랐다.

중국을 중시하던 미국은 외부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보급로인 버마로드가 지나가는 버마를 ABDA 지역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영국은 버마는 행정적으로나 병력 파견 및 보급 면에서 인도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ABDA 지역에서 제외하여 인도 총사령부 관할로 두는 것이 옳다고 맞섰다. 결국 양측 입장을 조율하여 버마로드가 통과하는 지역은 ABDA 지역에 포함하고 버마의 나머지 지역은 인도 총사령부가 관할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태국을 ABDA 지역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는데 미국은 이미 장개석 총통에게 이 두 지역을 중국 전역(china Theatre)에 포함시키자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문제는 ABDA 지역의 획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중국군을 영국인 또는 미국인 사령관의 지휘 아래 둘 수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미국은 중국이 전쟁을 계속하도록 고무하는 일을 중시했고 이를 위하여 버마로드의 방어에 집착했다. 중국 또한 영국보다는 미국을 신뢰했다. 따라서 미국은 영국군을 포함하여 버마로드의 방어에 관련된 모든 부대를 미군 장성이 지휘하기를 원했다. 영국군은 ABDA 지역 내에서 미군 장성이 영국군을 지휘하는 상황을 거부했다. 결국 타협이 이루어졌다. 미육군 장성이 중국정부에 파견되어 중국 내의 모든 미군과 그에게 주어진 중국군을 지휘기로 했으나 그가 버마로드를 지키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버마로 진입하면 최고사령관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1942년 1월 23일에 미육군은 중국에 파견할 장성으로 조셉 스틸웰 소장을 임명했다.


미국과 영국은 ABDA 지역의 동쪽 경계를 호주의 서해안 및 북해안으로 규정하여 호주와 뉴질랜드를 ABDA 지역에서 제외했다. 그러자 미국의 관심이 ABDA 지역에 집중됨으로써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까봐 겁에 질린 호주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호주의 불안감은 미해군참모총장 어네스트 킹 대장이 호주 동해안과 뉴질랜드를 포함하는 안잭 지역을 설정하면서 사라졌다. 안잭 지역 내의 미해군은 미해군참모총장의 전략적 지도에 따라 운용되며 미해군 제독이 사령관을 맡고 호주 또는 뉴질랜드 제독이 부사령관을 맡게 되어 있었다. 안잭 지역의 목표는 미본토에서 출발하여 뉴질랜드 및 호주 동해안에 이르는 해상보급로를 보호하고 해당 지역 내에서 호주 및 뉴질랜드의 항공기와 미군 항공기의 작전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협의가 끝난 후 1942년 1월 3일에 웨이벌 대장은 ABDA 지역의 경계와 임무가 명시된 전문을 받았다. ABDA 지역은 버마, 안다만 및 니코바르 제도, 말레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필리핀, 크리스마스 및 코코스 제도를 포함했다. 호주, 중국, 인도차이나 및 태국은 제외했다.

웨이벌 대장은 ABDA 지역을 좀 더 명확하게 정의했다. 서쪽경계는 동경 92도, 동쪽 경계는 동경 143도였으며 남서쪽 경계는 호주의 북서쪽 해안선이었다. 나중에 다윈을 포함한 호주의 북서쪽 해안지역이 ABDA 지역에 포함되도록 웨이벌 대장과 호주 정부가 협의하여 연합참모본부의 동의를 얻었다. 웨이벌 장군은 또한 미국이 바랐던대로 버마 전체를 ABDA 지역에 포함시켰다.


(ABDA 지역. https://en.wikipedia.org/wiki/American-British-Dutch-Australian_Command)


ABDA 최고사령관의 권한은 1942년 1월 4일에 발효되었다. 같은 날 최고사령관 임명이 공표되었고 처칠 수상과 루스벨트 대통령이 담화를 통하여 최고사령관의 임무와 권한을 확인했다. ABDA 사령부의 설립과 동시에 헨리 파우널 중장을 총사령관으로 한 극동총사령부는 해체되었다. 웨이벌 대장의 취임식은 1월 15일에 있었으며 같은날 장개석 총통은 중국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ABDA 사령부는 긴박한 상황에서 급조한 것이었다. 참모 숫자가 모자랐으며 주어진 병력은 일본을 막는다는 임무를 완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6주라는 짧은 존속 기간 동안 ABDA 사령부는 제대로 활약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휘하 병력은 사령부가 책임진 방대한 지역을 지키기 위하여 정비되기 전에 일본의 파상 공격 앞에 무너졌다. ABDA 사령부의 의의는 최초의 다국적 연합사령부로서 나중에 북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그리고 유럽에서 출현하게 되는 다국적 연합사령부의 모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Posted by 대사(PW)
,

32. 증원(2) - 한계


1941년 12월 25일까지의 증원결정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의 항공기 부족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빅토리아포인트의 상실로 인하여 전투기는 배로 수송해야 했는데 당시 전투기가 있던 가장 가까운 항구인 더반에서 싱가포르 사이의 거리는 8,000km 나 되었다. 폭격기는 증원경로를 따라 싱가포르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증원경로는 멀고 위험했으며 중계지점의 지원 능력이 빈약하여 많은 폭격기들이 중간에 탈락했다. 실제로 12월 12일부터 이집트에서 블레넘 폭격기 18대가 출발했으나 12월 25일까지 싱가포르에 도착한 것은 7대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도중에 추락하거나 불시착했다. 무사히 싱가포르에 도착해도 조종사들에게 현지 적응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바로 실전에 투입할 수는 없었다. 포장되어 배로 수송된 허리케인 51대는 1942년 1월 8일에 싱가포르에 도착했으나 이 전투기들을 조립하고 시험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12월 26일에 처칠 수상은 중동 총사령관 클로드 오킨렉 장군에게 전문을 보내어 허리케인 전투기 4개 비행대대와 1개 기갑여단을 말레이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12월 31일에 더반에 입항한 항공모함 인도미터블이 포트수단으로 가서 허리케인 48대와 조종사 48명을 실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인도미터블은 이후 지중해에서 파견된 호주구축함 3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동쪽으로 항진하여 수마트라나 자바로 허리케인을 날려보내고 허리케인은 급유를 받은 후 싱가포르로 향할 것이었다. 이러면 전투기의 조립 및 시험 기간을 없애 실전 투입을 앞당길 수 었다. 

또한 미제 경전차 50대로 이루어진 제7기갑여단도 말레이로 향할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12월 29일에 참모본부는 중동으로 향하던 중 더반에 입항한 제21경대공포연대, 제77중대공포연대, 그리고 허리케인 3개 비행대대를 위한 비행대 지휘부와 지상요원들을 싱가포르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클로드 오킨렉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s://en.wikipedia.org/wiki/Claude_Auchinleck)


말레이에 대한 위협이 커지면서 호주의 불안감이 높아졌다. 싱가포르에 주재하던 영연방판무관 비비안 보우덴은 12월 26일에 호주정부에 암울한 내용의 보고서를 보냈다. 여기서 그는 당시까지 결정된 영국의 증원 계획은 보여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그가 보기에 싱가포르를 구하기 위해서는 당장 중동으로부터 충분한 숫자의 최신형 전투기와 실전경험을 가진 다수의 조종사들이 달려와야 했다. 또한 지상병력은 여단 단위가 아니라 사단 단위로 증원해야 했다. 싱가포르에 파견된 제8호주사단장 고든 베넷 소장은 12월 18일과 23일에 호주 육군본부(Army Headquarter)에 보낸 보고서에서 그때까지 확정된 증원 병력으로는 전투에 지친 병력들을 교체하는 것이 고작이라고 평가했다.


1942년 1월 1일에 영국참모본부는 새해를 맞아 전쟁 상황을 평가하고 대응 방침을 결정하여 전쟁내각의 승인을 받았다. 방어 면에서 싱가포르 방어와 인도양의 해상보급로 유지는 영국본토방어 및 해상보급로 유지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우선순위를 받았다. 공세 면에서 제1목표는 여전히 독일 타도였으며 따라서 극동에 대한 증원은 일본의 전진을 막는 수준으로 제한했다. 리비아에서의 공세는 극동에 대한 증원을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 추진하기로 했다.

참모본부는 이러한 상황판단에 따라 극동에 증원할 병력을 말레이에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 버마에 2개 사단과 1개 경전차대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2개 사단으로 결정했다. 또한 말레이의 목표 항공력을 8개 경폭격비행대대, 8개 전투비행대대, 2개 뇌격비행대대, 버마의 목표 항공력을 6개 경폭격비행대대, 6개 전투비행대대로 정했다.


그 시점에서 이미 싱가포르 해군기지의 유지는 실질적인 효과가 없었다. 진주만 기습과 말레이 해전으로 일본해군은 서부 태평양의 제해권을 확고하게 틀어 쥐었으며 영국해군이 유럽과 지중해 전선에서 빼낼 수 있는 모든 함정을 싱가포르에 투입해도 간단히 분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고려 때문에 참모본부는 싱가포르 해군기지를 포기한다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참모본부의 결정에 따라 부대들이 싱가포르로 향했다. 봄베이에 기항 중이던 제18사단의 나머지 병력들이 싱가포르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중동 사령부는 제7기갑여단을 싱가포르로 파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호주정부는 영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제6 및 제7호주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호주군단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로 파견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 와중에 인도 총사령관 웨이벌 대장은 버마를 지킬 병력을 확보하는데 애를 먹었다. 인도로 오기로 했던 제18사단은 통째로 싱가포르로 갔으며 제17인도사단의 2개 여단도 싱가포르에 뺏겼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제17인도사단의 1개 여단 뿐이었다. 이론상으로는 1942년 상반기에 제14 및 제19인도사단이 준비될 것이지만 이들은 훈련도 부족하고 장비도 모자랐다.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s://en.wikipedia.org/wiki/Archibald_Wavell,_1st_Earl_Wavell)


증원병력이 싱가포르에 도착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도착 마감일은 제45인도여단의 경우 병력은 1942년 1월 3일, 장비는 6일, 제53영국여단(차량 및 야포 없음), 추가 허리케인 및 야포연대는 13일, 제44인도여단, 제2/4호주기관총대대 및 제8호주사단 증원병은 25일, 제18사단의 나머지 병력은 31일, 그리고 제9 및 제11인도사단의 보충병은 2월 5일이었다.

제7기갑여단은 1월말까지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었다. 60,000 명의 병력과 8,000대의 차량을 보유한 호주군단의 수송을 위해서는 3개의 커다란 선단이 필요했다. 호주군단의 선두는 아무리 빨라도 2월 초가 되어야 호주를 떠날 수 있을 것이었다.


증원 병력들은 서류에서만큼 강하지 않았다. 제44및 제45인도여단은 장비가 부족했으며 훈련을 마치지 못하여 전장에서 제 역할을 하려면 몇 달간 추가로 훈련을 받아야 했다. 훈련 부족은 제18사단도 마찬가지여서 중동에 도착한 다음 추가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또한 제18사단의 선발대인 제53여단은 긴 항해 끝에 차량, 야포, 그리고 적절한 정비 시설 없이 도착할 것이었다. 병사들은 좁은 수송선에 갇혀 수주간 항해하면서 체력이 약해졌으며 정글 전투 훈련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완전히 훈련되고 실전 경험이 있어서 충분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대는 제7기갑여단과 호주군단이었으나 이들은 수송 순서가 마지막이었다. 시간이 촉박하고 선박은 부족했으므로 참모본부는 비록 전투력이 떨어지더라도 즉시 동원할 수 있으면서 말레이 부근에 있는 부대를 먼저 수송할 수 밖에 없었다.


개전 초기에 일본군이 버마 남단의 빅토리아포인트를 점령함으로써 가장 필요한 전투기의 증원이 지장을 받았다. 전투기는 상자에 포장하여 수송선에 실어 보낼 수 밖에 없었는데 수송선의 느린 속력에다가 하역 후 조립 및 시험하는 시간 때문에 실전 투입이 늦어졌다. 수송선의 부족으로 충분한 지상요원 및 부품을 공급할 수 없어서 정비능력이 저하되었고  일본기가 지속적으로 비행장을 공습하는 바람에 새로 도착한 항공기의 전력화에 큰 지장을 받았다. 이런 요인들이 겹쳐서 항공력을 증강하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극동에서 제공권을 확보할 수 없었다.

Posted by 대사(PW)
,

31. 증원(1) - 경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진주만 기습까지 영국의 방어 중점은 본토와 지중해였다. 따라서 1941년 12월 8일이 되었을 때 홍콩과 말레이 수비대의 전력은 방어에 필요한 수준보다 한참 약했다.

인도의 사정도 비슷했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 2년간 인도군의 병력은 100만명 이상으로 늘어났지만 장비와 훈련이 모자랐으며 그나마 훈련된 장교와 병사들이 지속적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부대에 흩어져 배치되면서 전반적인 수준이 떨어졌다. 인도군은 훈련을 마치자마자 해외로 파견되었는데 20만명 이상의 병력이 중동, 이라크, 이란, 버마, 그리고 말레이에 파견되었다.


영국에게 인도양은 대서양 다음으로 중요했다. 인도양을 통하여 중동에서 싸우는 영국군을 보급하고 이란을 통하여 러시아에 렌드리스 물자를 전달하고 인도, 버마, 말레이를 증원했으며 호주 및 뉴질랜드를 지원할 수 있었다.

진주만 기습과 말레이 해전의 결과 일본은 개전 3일 만에 서부 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남서태평양에 남은 미국, 영국 및 네덜란드의 수상전투함은 순양함 9척과 구축함 23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 해역에서 그나마 기대를 걸어볼만한 전력은 잠수함이었다. 호주에는 순양함 5척과 구축함 3척이 있을 뿐이었다. 큰 피해를 입은 태평양함대는 당분간 미드웨이 서쪽으로는 진출하지 못했다. 인도양에는 소형항모인 허미즈와 선단을 호위하던 순양함 몇 척 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수리를 마친 항공모함 인도미터블이 케이프타운에 도착한 것은 1942년 1월 1일이 되어서였다.


말레이 해전에서 전사한 필립스 제독을 이어 동양함대 사령관에 임명된 제프리 레이턴 해군중장은 1941년 12월 11일에 해군성에 전문을 보내어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그의 전략은 아군의 해상보급로를 유지하는 동시에 적의 해상보급로에 대하여 항공기와 잠수함으로 최대한의 타격을 입히며 싱가포르를 극동함대의 기지로서 최대한 오래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잠수함, 소해함, 구축함 및 항공기를 가능한 한도까지 증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참모본부는 이 전략에 찬성했으나 당장은 증원이 불가능했다. 홍해에 있던 소해함들은 이미 중동사령관 지휘 아래 들어가 있었다. 모든 가용한 순양함은 이미 레이턴 중장 지휘 아래 있었다. 구축함은 수요에 비하여 숫자가 부족하여 추가로 할당할 수 없었다. 잠수함 또한 북아프리카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극동에 돌릴 여유가 없었다. 보낼 수 있는 것은 구형전함 4척으로 1척은 이미 인도양에 도착해 있었다. 참모본부는 극동함대의 전력을 신형 주력함 5척, 구형전함 4척, 항공모함 2-3척으로 증강하고 싶어했으나 말레이 해전의 결과 이러한 증강은 아무리 빨라도 1942년 4월 이전에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레이턴 중장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버틸 수 밖에 없었다.


(제프리 레이턴 제독. https://en.wikipedia.org/wiki/Geoffrey_Layton)


병력과 항공기의 경우는 상황이 좀 나았다. 소련군의 선전으로 코카서스에 대한 독일군의 압력이 줄어들고 로멜에 대한 오킨렉 장군의 반격이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중동 정세가 호전되었다. 따라서 이쪽 방면으로 투입될 전력을 전용할 여유가 생겼다.

참모본부는 중동과 이라크에 있는 병력은 극동으로 빼지 않았다. 그리스로 병력을 뺐다가 로멜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었던 리비아에서의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중동으로 가기 위하여 선단에 실려 희망봉을 돌고 있던 제18영국사단과 제82대전차연대가 인도 총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 대장 지휘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같은 선단에 실려 있던 제85대전차 연대(48문), 제6중대공포연대(16문) 및 제35경대공포연대(24문)은 일단 인도로 갔다가 말레이로 파견될 것이었다. 또한 1942년 2월 중순에 이라크에 파견할 목적으로 인도에서 훈련 중이던 제17인도사단도 일단 인도에 머무르기로 했다.


1941년 12월 8일에 극동총사령관 및 동양함대사령관은 공동 명의로 참모본부에 전보를 보내어 북부 말레이의 전황은 항공기 숫자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므로 최대한 많은 항공기를 최대한 빨리 증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참모본부는 이 요청에 부응하기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최초의 증원은 호주에서 이루어졌다. 1941년 12월 23일에 8대의 허드슨2 경폭격기가 호주 북서부의 다윈을 떠나 싱가포르로 향했다. 이보다 앞선 12월 12일 - 14일에는 블레넘4 폭격기 12대가 이집트를 출발하여 싱가포르로 향했고 며칠 후 6대가 뒤를 따랐다.

당시 영국에서 싱가포르까지 항공기가 증원되는 경로는 영국을 출발하여 지브롤터-몰타-이집트-하바니아(이라크)-바스라-샤르자-카라치-알라하바드-캘커타-랑군-빅토리아포인트를 거쳐 싱가포르로 이어졌다. 5-6대가 편대를 이루어 영국을 출발한 항공기가 싱가포르에 도착하는데 빠르면 15일, 늦으면 21일이 걸렸다. 이 경로는 길고 위험했으며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계지점의 지원 능력이 빈약했다.

설상가상으로 태국 춤폰에 상륙한 일본군 보병제143연대가 북상하여 12월 14일 저녁에 버마 남쪽 끝의 빅토리아포인트를 점령했다. 따라서 영국에서 싱가포르로 이어지는 항공기 증원 경로는 랑군에서 빅토리아포인트 대신 북수마트라의 사방을 거쳐 싱가포르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경로는 폭격기만 사용가능했고 항속거리가 짧은 전투기는 사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서쪽에서 싱가포르로 증원되는 전투기는 배로 수송할 수 밖에 없었다.

12월 17일, 중동으로 가기 위하여 희망봉을 돌고 있던 선단에 실린 허리케인 비행대가 싱가포르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선단에는 상자에 포장된 허리케인 51대, 조종사 24명, 비행대 지휘부, 그리고 4개 비행대대를 위한 지상요원이 실려 있었다. 다음날인 18일에 선단은 더반에 입항하여 비행대 지휘부와 3개 비행대대를 위한 조종사 및 지상요원을 내려주고 허리케인 51대와 1개 비행대대의 조종사 및 지상요원만 태우고 24일 출항하여 싱가포르로 향했다. 더반에 내린 비행대 지휘부와 3개 비행대대를 위한 조종사 및 지상병력은 항공편으로 인도로 가서 인도총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 대장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호커 허리케인.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Hawker_Hurricane)


참모본부는 영국본토에서도 36대의 허드슨3 경폭격기를 증원하기로 결정했다. 12월 29일에 최초 편대가 이륙하여 1월 6일까지 29대가 증원 경로상에 있었다. 그러자 미비하기 짝이 없는 증원 경로상 중계지점의 지원 능력이 당장 포화상태에 도달하여 폭격기들은 2월이 되기 전에는 싱가포르에 도달하기 힘들었다. 이때 미국이 보낸 B-17 폭격기들이 호주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급해진 참모본부는 B-17 폭격기를 말레이나 네덜라드령 동인도제도로 파견해 달라고 호주 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호주에는 B-17 폭격기가 없었다. 당시 미국의 처지도 암담하기는 마찬가지여서 호주까지 B-17 폭격기를 파견할 여력이 없었다.


처칠 수상은 12월 12일에 인도 총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 대장에게 전문을 보냈다. 이 전문에서 수상은 인도 총사령관의 관할권에 버마를 포함시켰으며 원래 중동이나 코카서스로 향하던 제18사단과 허리케인 비행대의 일부를 인도로 보냈다고 설명했다.

참모본부는 12월 13일에 웨이벌 장군에게 버마의 방어를 강화하라고 명령했다. 웨이벌 장군은 이 명령에 따라 제17인도사단의 제45인도보병여단을 12월 22일에 봄베이 항에서 출항시켜 버마로 보내기로 했다.


태평양 전쟁 초기에 극동을 향하는 증원은 전투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인도와 버마를 목적지로 삼았다. 영국은 말레이에 이미 배치되어 있는 수비대만으로 일본군을 상당 기간 막아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 믿음은 곧 산산조각났다.

케다 주에서 영국군이 큰 피해를 입자 1941년 12월 16일에 극동총사령관 브룩포팸 대장은 제9 및 제11사단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하여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2개 여단을 파견해달라고 참모본부에 요청했다. 참모본부는 웨이벌 대장에게 제17인도사단의 제44 및 제45여단을 말레이로 파견할 것을 권고했다. 웨이벌 대장은 버마로 보낼 예정이었던 제45여단의 파견은 찬성했으나 제44여단의 파견은 반대했다. 대신 미국수송함 마운트버넌에 실려 인도로 오고 있던 제18영국사단의 제53여단을 파견하자고 제안했다.


제53여단의 파견에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었다.

첫번째 방법은 마운트버넌이 제18사단을 태운 선단과 함께 봄베이에 기항하여 1주일 후에 도착하는 사단의 장비 및 보급품과 함께 싱가포르로 향하는 방법이었다. 이럴 경우 제53여단의 병사들은 봄베이에서 1주일 동안 쉬면서 두달동안 항해했던 피로를 풀고 충분한 장비 및 보급품과 함께 싱가포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럴 경우 싱가포르 도착은 아무리 빨라야 1월 24일이 되어야 가능할 것이었다.

두번째 방법은 마운트버넌이 제18사단을 태운 선단과 헤어져 몸바사로 가서 급유를 받은 다음 12월 24일에 더반을 출발한 선단에 합류하여 바로 싱가포르로 가는 방법이었다. 이럴 경우 병사들은 몸바사에서 2-3일 밖에 쉬지 못하여 피로를 풀기 어려웠으며 차량과 야포는 없이, 그리고 보급품은 최소한만 가진 상태로 싱가포르에 도착할 것이었다. 대신 싱가포르 도착은 열흘 이상 빨라질 것이었다.

첫번째 방안이 이상적이기는 했으나 관건은 시간이었다. 12월 23일에 퍼시발 중장과 참모본부는 두번째 안으로 결정했다.


12월 23일이 되자 일본군이 말레이를 먼저 침공하고 버마 침공은 뒤로 미루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따라서 참모본부는 웨이벌 장군에게 제44여단을 말레이로 파견하라고 명령했다. 제44여단은 1942년 1월 1일 이후 선박과 호위함정이 준비되는대로 말레이로 향할 것이었다.

이때 호주정부가 제2/4호주기관총대대와 함께 제8호주사단 증원병 1,900 명을 추가로 파견하겠다고 제안했다. 제2/4호주기관총대대는 호주정규군(Australian Imperial Force = AIF)소속이었는데 당시 정규군 소속의 기관총 대대는 호주 내에 2개 밖에 없었다. 영국정부는 즉시 깊은 감사를 표하면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941년 12월 25일 현재 말레이로 증원이 확정된 병력은 제44 및 제45인도여단, 제53영국여단,  제85대전차 연대(48문), 제6중대공포연대(16문), 제35경대공포연대(24문), 포장된 허리케인 전투기 51대, 제2/4호주기관총대대, 제8호주사단의 증원병 1,900명이 되었다.

Posted by 대사(PW)
,

30. 캄파르 전투


쿠알라룸푸르 부근의 포트스웨튼햄에 기지를 둔 페락전대의 고속정 몇 척이 12월 28일에 트롱 부근에 로즈부대 병력을 침투시켜 일본군의 보급로를 공격했다. 습격조는 해안도로에 매복하여 일본군 트럭 몇 대와 장교를 태운 승용차 1대를 파괴한 후 포트스웨튼햄으로 무사히 철수했다. 여기에 고무된 영국군은 이런 공격을 반복하려 했으나  일본군이 이틀 후에 포트스웨튼햄을 폭격하여 페락전대의 기반인 보급함 쿠닷을 격침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페락전대에 합류하기 위하여 싱가포르를 떠나 북상 중이던 고속정 5척이 공습을 받아 모두 격침 또는 좌초되자 페락전대는 두번 다시 그런 침투작전을 실시할 수 없었다.


히스 중장이 방어선으로 선정한 캄파르의 동쪽은 부장멜라카라고 부르는 정글로 뒤덮인 언덕이었다. 부장멜라카는 디팡 남쪽에서 시작하여 남북으로 14km, 동서로 10km에 걸쳐 있었으며 서쪽으로 간선 도로(Trunk Road)가, 동쪽으로는 사훔 도로가 달리고 있었다. 북서쪽은 탁 트인 주석광산 지대로 소화기의 사계가 1km 이상에 달했고 남서쪽에는 시슬리 고무농장이 있었다. 적이 캄파르를 우회하려면 바다를 통하든지 아니면 페락 강을 타고 내려와 남서쪽의 텔록안손을 점령해야 했다.  


(캄파르 전투 상황도.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48)


캄파르 방어선의 중핵인 제15여단은 제88야포연대 및 제273대전차포대의 지원을 받아 캄파르 마을을 통과하는 간선도로를 따라 종심깊은 방어진지를 만들었다. 제28여단은 제155야포연대와 제215대전차포대 1개 중대의 지원을 받아 사훔도로에 종심깊은 방어선을 만들었다. 제28여단은 사훔도로를 지키는 동시에 일본군이 캄파르 마을을 공격하면 측면에서 적의 보급로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적이 바다나 페락강을 통하여 텔록안손에 도달하여 캄파르 방어선의 후방을 위협할 경우에 대비하여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제12여단에 제137야포연대와 제215대전차포대의 2개 중대를 붙여 비도르에 주둔시켰다. 또한 제1독립중대를 텔록안손에, 제3기병연대를 우탄멜린탕에 배치했다. 제5/14펀자브대대, 1개 산포대, 그리고 1개 대전차포대는 사단예비대로서 테모에 주둔했다.


(페락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27)


12월 30일에 부장멜라카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제2/2구르카대대가 일본군의 정찰대를 발견했다. 같은 날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이 사단예비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제2/1구르카대대를 테모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제12여단장 셀비 중령은 최전방의 제2/2구르카대대를 후퇴시켜 제2/1구르카대대가 쓰던 방어선에 투입했다.


다음날인 31일에 영국군 정찰기가 서해안을 따라 남하 중인 일본군 주정을 발견했다. 이 주정은 보병제11연대 중심의 와타나베 지대를 수송하던 주정대의 일부였다.

일본제5사단장 마쿠이 다쿠로 중장은 제25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12월 25일에 보병제11연대장 와타나베 츠나히코 대좌에게 해상기동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페낭 섬 점령을 위하여 싱고라에서 소발동정 약 40척을 철도와 도로를 통하여 서해안으로 수송했다. 그러나 페낭 섬 점령이 현지에서 징발한 주정을 사용하여 실행되었기 때문에 소발동정은 하릴없이 알로스타 부근에 묶여 있었다. 일본군은 여기에 페낭에서 노획한 증기선과 주정 약 20척을 합쳐 해상기동을 위한 주정대를 편성했다. 제11연대를 주축으로 한 와타나베 지대는 단번에 쿠알라룸푸르까지 남하하여 영국군의 퇴로를 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31일에 좀 더 북쪽인 쿠알라셀랑고르에 상륙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캄파르의 방어가 강력하여 제5사단 주력의 남하가 늦어질 가능성이 크고 쿠알라룸푸르 부근 해상에서 영국함정의 활동이 활발하며 페락전대의 기지인 포트스웨튼햄의 방어가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출항지인 루뭇에서 쿠알라셀랑고르까지는 직선으로 130km, 항해거리로 150km 가 넘는 거리였다. 아무리 제공권을 장악했다고 해도 호위함정 1척도 없이 허약하고 느려터진 주정 60척에 1개 연대를 태워 150km 가 넘는 거리를 단번에 해상으로 기동한다는 것은 대담함을 넘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시도였다. 도메이 통신사의 종군기자로 말레이 전투 당시 제25군을 취재했던 시노하라 시게루는 훗날


"이 해상기동은 '무식하면 용감하다' 는 경우로서 바다를 모르는 육군이니까 가능했던 발상"


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무모한 시도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군이 이토록 단순무식하게 해상기동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영국군이 허를 찔려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와타나베 지대가 주정을 타고 루뭇을 출발한 시간은 31일 새벽 1시였다.


31일 오후에 페락강을 감시하던 제1독립중대의 정찰대가 루뭇과 심팡암팟에서 일본군 정찰대를 발견했다. 영국군은 캄파르 마을의 남동쪽인 시슬리 고무농장 부근에서도 강력한 일본군 정찰대를 발견했다.

파리스 준장은 서쪽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여 31일 저녁에 테모에 주둔 중이던 사단예비대(제5/14펀자브대대, 제2/1구르카대대, 제7산포대)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캄파르-창캇종 도로에 배치했다.


캄파르 공격을 맡은 보병제9여단장 가와무라 사부로 소장은 포위 작전을 구상했다. 즉 보병제41연대가 캄파르의 영국군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동안 보병제42연대가 서쪽으로 우회하여 영국군 방어선의 좌익을 들이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회로는 가와무라 소장의 생각보다 훨씬 험난했다. 보병제42연대는 캄파르 강 주위의 늪지대를 헤치면서 3일 간의 힘든 행군 끝에 기진맥진한 상태로 목표 지점에 도달했으나 이미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는 늦었다.


보병제41연대의 공격은 1942년 1월 1일 아침 7시에 시작되었다. 사단중포병제5연대제2대대가 30분 간의 준비사격을 실시한 후에 제41연대가 전차제6연대에서 파견된 중형전차 1개 중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캄파르 마을 북쪽에서 간선도로를 지키던 영국대대(British Battalion)에 강력한 공격을 가했다. 격전이 하루종일 지속되었으나 영국대대는 필요한 때 필요한 곳을 정확하게 때려주는 영국군 야포의 화력 지원에 힘입어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저녁이 되었을 때 일본군 선두는 아직 영국대대의 방어선인 톰슨 능선의 북사면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날 사훔도로 쪽은 하루종일 조용했으므로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제28여단에게 제2/2구르카대대를 부장멜라카의 남쪽인 슬림강 쪽으로 파견하여 서쪽으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하라고 명령했다. 


서해안에서는 1일 오전 9시에 페락강 하구에 배치된 제1독립중대의 정찰대가 앞바다를 남하 중인 일본군 주정을 다시 발견했다. 이번에는 싱가포르에서 폭격기들이 날아올랐으나 현장에 도착하자 주정대는 사라진 후였다. 영국군에게 포착된 것을 깨달은 와타나베 대좌는 주정을 타고 쿠알라세랑고르까지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제5사단 사령부에 전문을 보내어 가까운 버남 강 하구에 상륙하겠다고 건의했다. 마침 제5사단 주력에 의한 캄파르 공격이 지지부진했으므로 제5사단장 마쿠이 중장은 와타나베 대좌의 건의를 받아들여 버남 강 하구에 상륙한 다음 동쪽으로 진격, 승카이를 점령하여 캄파르를 방어하고 있는 영국군의 퇴로를 끊으라고 명령했다. 


와타나베 지대는 1일 오후 7시 30분부터 버남 강 하구의 우탄멜린탕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우탄멜린탕을 지키던 제3기병연대를 쫓아내고 순식간에 시가지를 점령했으며 상륙 30분 만인 오후 8시에는 선두가 시가지에서 북쪽으로 2.4km 떨어진 교차로에 도달했다.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제12여단에게 제137야포연대의 지원을 받아 텔록안손에서 비도르 및 타파로 접근하는 통로를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이 제11사단의 후방을 위협하자 파리스 사단장은 제3인도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캄파르에서 철수할 허가를 요청했고 히스 중장은 이 요청을 퍼시발 중장에게 전달했다. 당시 영국군은 싱가포르로 증원되는 병력을 실은 선단의 안전을 위해서 중부 말레이에서 최대한 오랫동안 버틸 필요가 있었다. 퍼시발 중장의 계획에 따르면 말레이 동해안을 지키던 제9사단이 쿠안탄 비행장을 1월 10일까지 방어하고 그 이후에는 제란툿 서쪽으로 철수할 예정이었다.  따라서 영국군은 말레이 동부에서 철수한 제9사단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쿠알라쿠부를 1월 15일까지 지켜야 했다. 퍼시발 중장은 제3군단이 쿠알라쿠부를 1월 15일까지 지킨다는 조건으로 제11사단의 캄파르 철수를 허가했다.

 

(1941년 12월 7일 말레이의 영국군 배치 현황.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lim_River)


캄파르 북쪽의 일본군은 2일 아침부터 강력한 공격을 재개했다. 이날 공격에서도 톰슨 능선에 펼쳐진 영국대대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자 일본군은 일부 병력을 우회시켜 2일 오후에 기습적으로 톰슨 능선 남쪽의 그린 능선을 점령했다. 이로써 방어선이 위험에 빠졌으나 영국대대의 예비대인 1개 중대가 치열한 전투 끝에 큰 피해를 입으면서 일본군을 그린 능선에서 몰아내어 파국을 막았다. 영국대대장 찰스 모리스 중령의 지휘는 훌륭했다. 모리스 중령은 2개 대대를 합쳐 급조한 영국대대를 이끌고 일본군 주력의 맹공을 이틀 동안 막아내었다. 영국대대의 방어선은 아직 튼튼했다. 게다가 영국대대는 제15여단의 전초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대대의 남쪽인 캄파르 마을에는 3개 대대로 이루어진 제15여단의 주방어선이 펼쳐져 있었다.


문제는 서쪽이었다. 근위사단장 니시무라 다쿠마 중장은 캄파르에서 고전 중인 제5사단을 돕기 위하여 요시다 지대(근위보병제4연대제3대대)를 파견했다. 요시다 지대는 1월 1일에 이포를 떠나 주정을 타고 페락강을 남하하여 2일 아침 7시에 기습적으로 텔록안손에 상륙했다. 텔록안손을 지키던 영국제1 독립중대는 치열한 시가전 끝에 쫓겨났다.

그동안 제12여단은 텔록안손에서 동쪽으로 6km 떨어진 지점에 제2아길대대를 배치한 것을 시작으로 종심깊은 방어선을 폈다. 일본군에게 쫓긴 제1독립중대와 제3기병연대가 오전 9시에 제2아길대대의 방어선을 통과하여 데공으로 후퇴했다. 우탄멜린탕에 상륙한 와타나베 지대는 텔록안손에 상륙한 요시다 지대와 합류한 다음 2일 오후 2시부터 제2아길대대의 방어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도로를 따라 공격을 가하는 동시에 주정을 이용하여 제2아길대대의 후방에 상륙하려 했다. 제2아길대대는 포위되지 않으려고 서서히 5km 를 후퇴하여 2일 저녁에 텔록안손에서 동쪽으로 11km  떨어진 곳에 방어선을 폈다. 


2일 저녁이 되자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캄파르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파리스 준장의 철수명령에 따라 사훔을 지키던 제28여단은 남쪽의 타파로, 텔록안손의 동쪽을 지키던 제12여단은 아예르쿠닝으로 철수했다. 이틀간 일본제5사단 주력의 맹공을 막아낸 제15여단도 철수 명령에 따라 2일 오후 9시에 캄파르를 떠나 비도르로 남하했다.

다음날인 3일 저녁까지 제12여단과 제28여단은 모두 제15여단이 지키는 비도르를 통하여 남쪽인 슬림강 유역으로 철수했고 이어서 제15여단도 비도르를 떠나 승카이로 철수했다. 영국군이 철수함에 따라 일본제41연대가 3일 저녁에 타파를 점령했으며 우탄멜린탕에 상륙했던 와타나베 지대와 텔록안손에 상륙했던 요시다 지대도 동진하여 아예르쿠닝을 점령했다. 이로써 캄파르 방어선도 무너졌다.


캄파르 전투 기간을 통하여 영국 항공세력은 제한적인 정찰 이외에는 지상전투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반면 일본기들은 영국군에게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하여 지상전투를 직접 지원했다. 이러한 항공공격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는 가벼웠지만 반복되는 일방적인 공습은 영국군을 피로하게 만들고 사기를 떨어뜨렸다. 

당시 살아남은 영국군의 항공력, 특히 전투기들은 증원군을 실은 선단이 무사히 싱가포르에 도착하도록 엄호를 제공하는 일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42년 1월 3일에 제45인도보병여단을 실은 첫번째 증원 선단이 무사히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Posted by 대사(PW)
,

29. 극동 총사령관 교체 


1941년 12월 23일에 극동총사령관이 로버트 프룩포팸 공군대장에서 헨리 파우널 육군중장으로 바뀌었다. 원래 전쟁 전에 교체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지휘체계 안정을 위하여 연기했다가 싱가포르 지역상 더프 쿠퍼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이날 교체를 단행했다. 파우널 신임사령관은  전임자와 달리 작전지도에 적극적이었다.


(헨리 파우널 중장. https://en.wikipedia.org/wiki/Henry_Pownall#World_War_II)


파우널 사령관은 취임 다음날인 24일에 제11인도보병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을 제12인도보병여단장이었던 아치볼드 파리스 준장으로 교체했다. 제11사단의 기존 여단장들은 모두 입원해 있었으므로 파리스 신임사단장은 제11사단의 고참 대대장들을 여단장으로 임명했다. 제2아길서덜랜드하이랜더대대장 이안 스튜어트 중령이 제12인도보병여단장, 제3/16펀자브대대장이었던 헨리 무어헤드 중령이 제15인도보병여단장, 그리고 제3/9구르카소총대대장이었던 월레스 셀비 중령이 제28인도보병여단장이 되었다.


제3인도군단장 루이스 히스 중장은 페락강 방어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캄파르와 그 남쪽에서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제12여단과 제28여단이 이포와 블란자 방면에서 지연작전을 수행하고 캄파르 방어선의 주력은 제15여단이 맡는다는 구상이었다. 제6여단을 흡수한 제15여단은 영국대대(British Battalion, 제1레스터셔대대와 제2이스트서레이대대를 합침), 자트/펀자브혼성대대, 제1/14, 제2/16 및 제3/16펀자브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휴식을 취하고 장비 일부를 보충한 제15여단은 23일에 캄파르 지역으로 이동하여 방어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날 히스 중장은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에게 제3군단의 후방에 병력들이 축차적으로 철수하면서 사용할 방어진지를 건설해 달라고 요청했다. 캄파르에서 쿠알라룸푸르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를 따라 축차적으로 철수하면서 일본군의 진격을 늦추려는 계획이었다. 이 지역은 우회가 힘들어 적이 방어선에 정면공격을 가할 수 밖에 없었다. 퍼시발 중장은 공공사업국(Public Works Department = PWD) 공무원들에게 인부를 모아 제3군단 지역으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인부를 모으지 못하여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말레이 사령부 공병대가 제3군단의 후방 방어 시설을 건설해야 했다. 따라서 방어시설은 대부분 좁아지는 길목에 대전차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이것도 도움이 되었다.


그동안 일본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이포를 목표로 근위사단과 제5사단을 진격시켰다. 근위사단은 쿠알라캉사르에서, 제5사단은 남서쪽 블란자에서 페락 강을 건너 이포로 진격할 것이었다. 야마시타 중장은 캄파르에서 남쪽으로 쿠알라룸푸르까지 이어지는 주요 도로 주변의 우회가 힘든 지형을 따라 축차적으로 철수와 방어를 반복하여 시간을 끌려는 히스 중장의 계획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야마시타 중장은 쿠알라룸푸르에서 제3군단을 포위격멸하고 싶어했는데 포위망 남쪽에 근위사단을 투입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근위사단은 이포를 점령한 후에는 예비대로서 제5사단의 뒤를 따를 것이었다. 제5사단이 주요 도로를 따라 영국군 방어선을 격파하면서 남하하다가 쿠알라쿠부에 이르면 뒤따르던 근위사단이 벤통을 통하여 쿠알라룸푸르 남쪽으로 우회, 제3군단의 퇴로를 끊는다는 작전이었다. 야마시타 중장은 또한 1개 연대를 주정에 실어 해상으로 기동한다는 대담한 작전도 구상했다.


근위사단은 26일 아침부터 근위제4연대를 선두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쿠알라캉사르 부근에서 페락강을 건넜다. 근위제4연대 주력이 오전 11시 40분까지 도하를 마쳤고 근위사단의 후속부대들이 뒤따랐다. 영국군 제12여단은 제137야포연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포 북쪽의 체모르에서 도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26일 오후에 근위제4연대 제1대대가 승게이시풋에 도달하자 영국군의 야포가 불을 뿜었다. 다음날인 27일 아침에 근위제4연대 주력이 전투에 참가했으나 영국군의 포격에 눌려 진격하지 못했다. 27일 오후에 일본군의 야전중포병제6중대가 포격을 시작하자 드디어 제12여단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추격했으나 제12여단은 5km 정도 후퇴한 후 다시 방어선을 폈다. 근위제4연대는 만 하루 동안 5km 를 전진하기 위하여 큰 피해를 입었고 제12여단에서는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의 1개 중대가 후퇴 과정에서 포위되어 전멸하는 등 약 2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페락.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27)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제12여단의 피로도가 걱정이었다. 제12여단은 그떄까지 12일 동안 적과 접촉하면서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낮에는 적의 공습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밤에는 이동하거나 참호를 파야만 했다. 체력의 한계에 달한 장교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지시에 따라 로봇처럼 움직였으며 간단한 지시마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파리스 준장은 제12여단이 체모르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제12여단이 철수한다면 블란자 방면에서 일본 제5사단을 상대로 지연작전을 펴고 있던 제28여단 또한 철수해야 했다. 파리스 준장은 제12 및 제28여단에게 27일 밤을 기하여 이포 남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12여단은 고펭과 디팡 사이의 도로를 점거할 임무를 받았으며 제28여단은 사훔에 전개하여 캄파르 방어선의 우익을 담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2여단이 체모르에서 철수하자 근위사단은 조심스럽게 진격하여 29일 새벽 3시에 이포와 카퐁케파얀을 점령했다. 이후 근위사단은 진격을 중단하고 부대를 정비하면서 제25군 사령부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쿠알라캉사르 남쪽의 블란자 방면에서는 제5사단이 페락강 도하를 강행하고 있었다. 선발대인 제11연대 제1대대가 26일 밤 9시 15분에 영국군 제28여단의 포격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 블란자 동쪽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제5사단은 27일 하루동안 병력을 추가로 도하시켜 교두보를 강화했다. 27일 밤에 제28여단이 철수하자 28일 아침부터 제5사단 주력이 강을 건너 영국군을 추격했다. 제28여단은 제12여단의 방어선을 통과하여 후퇴했다.


28일 오후에 제5사단의 선두인 보병제41연대가 고펭 남쪽에 급조한 제12여단의 방어선을 공격하여 다음날 오후까지 격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이 급강하폭격과 야포의 지원 하에 맹공을 퍼붓자 제12여단은 큰 피해를 입고 29일 오후에 디팡 북쪽 5km 지점까지 밀려났다.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사훔까지 후퇴한 제28여단에게 디팡 다리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28여단에서는 2개 중대를 보내어 디팡 남쪽에서 캄파르 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켰다. 제12여단장 스튜어트 중령은 디팡을 거쳐 철수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오후 3시에 디팡 북쪽 1km 지점에서 전차 8대의 지원을 받는 보병제41연대의 선두가 후퇴하는 영국제12여단의 후위인 아길대대를 따라잡았다. 아길대대에는 제2대전차포대가 배속되어 있었으나 기습을 당하여 방열할 여유가 없었다. 일본전차에 기가 눌린 아길대대의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앞서가던 제5/2펀자브대대를 앞질러 달아났다. 제12여단 전체가 와해될 수 있는 일대 위기였으나 제5/2펀자브대대장 세실 디킨 중령이 파국을 막았다. 디킨 중령은 달아나던 제2대전차포대의 1개 중대를 붙잡아 도로 주변에 방열시키고 이 대전차포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급조하여 전차를 앞세운 일본군의 맹공을 막아냈다. 가까스로 일본군의 예기를 꺾은 제12여단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오후 6시 15분에 제2/2 및 제2/5구르카소총대대에서 파견된 2개 중대가 지키던 디팡 다리를 건너 캄파르 강 남쪽의 비도르로 후퇴했다.


디팡 다리의 폭파는 불완전했다. 제28여단 소속의 제23공병중대(23rd Field Company)가 28일 저녁까지 다리에 폭약 설치를 마쳤으나 29일 아침에 제28여단사령부로부터 폭약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8여단이 그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아무튼 제23공병중대는 명령에 따라 폭약을 제거한 후 철수했다. 29일 오후에 제12여단이 다리를 통과할 때 제12여단 소속의 제3공병중대는 다리에 폭약이 설치되지 않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제3공병중대는 주변을 뒤져 제23공병중대가 다리에서 제거하여 쌓아둔 폭약을 찾았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정신없이 후퇴하는 부대 사이로 공병들이 이를 악물고 폭약을 다시 설치했으나 시간이 부족했으며 도화선이 대부분 젖어 있었다. 결국 폭약 설치를 마치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군이 접근하자 폭약이 설치된 부분만 폭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폭약은 대부분 폭발하지 않았고 단지 다리의 남쪽 끝 부분만 폭파되어 상판이 강으로 떨어졌다.

Posted by 대사(PW)
,

28. 항공작전(1941년 12월 후반기)


제3군단이 무다강에서 페락강으로 철수하는 동안 일본기들은 영국기들이 북부말레이의 비행장을 사용하는 것을 저지하면서 이포 비행장을 폭격했다. 그 결과 19일이 되자 쿠알라룸푸르 부근의 비행장이 영국기가 작전 가능한 가장 북쪽 비행장이 되면서 다른 비행장에서 철수한 인원, 장비, 그리고 보급품이 집결했다.


영국군의 계획은 비행장을 포기할 때 건물을 파괴하고 활주로에 구멍을 뚫고 수송이 불가능한 보급품, 탄약, 연료는 폭파하는 것이었는데 모두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촉박한 일정 속에서 폭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병종간 의사소통의 혼선으로 인하여 연료를 남겨두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옥탄가 90의 항공유 90만 리터가 승게파타니 비행장에서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계획대로 활주로에 구멍을 뚫어도 일본군은 빨리 수리했다. 활주로 옆에는 수리용 자갈이 쌓여 있었는데 이것은 옮기거나 폭파하기가 곤란했으며 활주로 복구에 필요한 노동력도 충분했다. 영국군과 달리 노동력을 징발하는데 제약이 없는 일본군은 현지 주민을 총칼로 위협하여 활주로 복구에 투입했다. 20일 아침에 영국군 정찰기가 찍은 승게파타니 비행장 사진에는 약 50대의 일본전투기가 전개해 있었다. 극동항공사령부는 21일 새벽에 싱가포르에서 블레넘 폭격기들을 이륙시켜 승게파타니 비행장을 폭격하려 했으나 날씨가 나빠 포기했다. 다음날인 22일에 일본제3비행집단 사령부는 프놈펜을 떠나 승게파타니로 이동했다.


(나카지마 ki-43 1식 전투기 하야부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Nakajima_Ki-43)

 

 

12월 22일에 비행제64전대의 하야부사 18대가 쿠알라룸푸르 비행장을 공격했다. 15대의 버팔로를 장비한 호주제453전투비행대대가 3.7인치 대공포 6문, 3인치 대공포 4문과 함께 용감하게 싸웠으나 11대가 격추되고 1대가  지상에서 파괴되는 피해를 입으면서 참패했다. 그리하여 22일 저녁이 되자  비행가능한 버팔로가 3대로 줄어들었다. 격추된 하야부사는 1대였다. 결국 살아남은 버팔로는 싱가포르로 후퇴했으며 23일 아침을 기하여 쿠알라룸푸르 비행장에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극동항공사령부는 증원군을 실은 선단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마트라의 비행장을 활용하기로 하고 1942년 1월 초에 싱가포르에 파견되어 있던 네덜란드 전투기들을 수마트라의 팔렘방 비행장으로 보냈다.


(브류스터 F2A 버펄로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Brewster_F2A_Buffalo)

 

 

당시 말레이의 영국공군은 일본군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항공기 숫자도 형편없이 밀릴 뿐 아니라 버팔로 전투기의 성능도 제로기에 밀렸다. 조종사의 숙련도 또한 중일전쟁에서 이미 실전을 겪은 일본군 조종사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지원 및 정비체계도 부실했고 북부 말레이의 비행장에는 조기경보체계도 없었다. 게다가 유색인종에 대한 근거없는 우월감 탓에 개전 당시까지도 일본군 항공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1941년 6월까지 일본군 항공력에 대한 연구는 영국해군이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군 측의 인식이 공군보다는 조금 나았다. 1941년 4월 25일에 런던에서 열린 합동참모회의에서 해군참모차장은 허리케인 전투기를 말레이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군참모차장은 버팔로 전투기로 일본기를 충분히 이길 수 있다면서 반대했다. 1941년 5월에 중국에서 격추된 제로기가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노획되었다. 충칭에 파견되어 있던 공군무관이 이 제로기의 성능에 대하여 비교적 정확한 보고서를 제출했고 합동정보부는 1941년 9월 29일에 이 보고서를 극동항공사령부에 건네주었다. 그러나 극동항공사령부는 이 보고서의 가치를 모른 채 산같이 쌓인 보고서 더미에 처박아 두었다.


(미츠비시 A6M 제로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A6M_Zero)


싱가포르의 전투기 세력은 쿠알라룸푸르의 비행장을 전방 기지로 삼아 제3군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재편성되었다. 버팔로의 기동성을 높이려고 무장과 연료를 제한하여 무게를 450kg 이상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로기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인도차이나에 대기중인 일본군 예비병력이 메르싱이나 쿠안탄에 상륙하지 못하도록 매일 남중국해에 대해 강도높은 정찰비행이 이어졌다. 네덜란드 비행기들은 수마트라의 해안선에 대한 기습 상륙에 대비하여 정찰했다. 이러한 정찰에서 말레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일본군 주정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는 일본군이 낮에는 주정을 숨겼다가 밤에만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버팔로를 일본군이 장악한 북부 말레이에 보내어 귀중한 정보를 수집했다. 12월 26일에 버팔로는 싱고라에서 34척의 수송선이 정박한 광경을 찍어왔고 27일에는 승게파타니 비행장에 120대 이상의 일본기가 전개한 사진을 찍어왔다. 그날밤 싱가포르에서 6대의 블레넘 폭격기가 이륙하여 승게파타니 비행장을 폭격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다음날인 28일 밤에도 폭격을 가했는데 이번에는 1대가 격추되었다. 일본군의 피해는 대단치 않았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