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제22여단 소멸


1942년 1월 26일 오후에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조호르 철수계획을 하달했다. 여기에 따라 동부부대는 28일 아침에 제말루앙을 떠나 30일에 조호르바루에 도착했다. 서해안의 제11사단은 동부부대가 철수할 때까지 스쿠다이의 도로교차점을 지켜야했다. 제11사단장 키 소장의 명령에 따라 제53여단은 28일 오후에 베눗을 떠나 스쿠다이 도로 22마일 이정표 지역을 지키다가 29일 밤에 싱가포르로 후퇴했다. 제28여단은 29일 저녁까지 폰티안케칠을 지키다가 일본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스쿠다이 도로의 27마일 이정표 지점으로 후퇴하여 거기서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할 때까지 버텼다. 제15여단은 적에게 포위되어 해상철수했다.

 

(남부 조호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46)


중앙전선을 지키던 서부부대는 조호르에서의 마지막 재앙을 맞이하게 된다. 1월 26일 현재 서부부대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제27호주여단(던칸 맥스웰 준장)은 간선도로를 지키고 있었다. 제2고든대대는 48마일 이정표 지역, 제2/26호주대대는 44.5마일 이정표 지역, 제2/30호주대대는 41마일 이정표 지역을 방어했다. 제2고든대대는 제2로얄대대를 대신하여 싱가포르로부터 제27호주여단에 파견되었다. 26일 오후에 일본보병제21연대가 제2고든대대를 공격했다. 탄약이 떨어진 제2고든대대는  제27호주여단장 맥스웰 준장의 허락을 받아 제2/26호주대대의 방어선을 지나 42.5마일이정표 지역으로 후퇴했다.


간선도로 동쪽의 철도를 따라서는 제9사단(아서 바스토우 소장)이 배치되어 있었다. 바스토우 소장은 제8여단(윌리엄 레이 준장)을 사용강 정류소에, 제22여단(조지 페인터 준장)을 렝감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제8여단은 제1/13FF소총대대, 제2/10발루치대대, 그리고 제3/17도그라스대대의 1개 중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22여단은  제5/11시크대대와 혼성대대(제2/12FFR대대 + 제2/18갈월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서부부대 사령관 고든 베넷 소장은 1월 27일 새벽 0시 20분에 서부부대의 후퇴 순서와 시간표를 포함한 제4호 작전명령(Operational Instruction No.4)을 내렸다. 여기에 따르면 제27호주여단은 간선도로를 따라 후퇴하고 제9사단은 간선도로 동쪽의 철도를 따라 철수하게 되어 있었다. 제9사단의 철수로인 철도 옆에는 도로가 나란히 달리고 있었지만 라양라양 남쪽에서 도로와 멀어져 남쪽 쿨라이에 가서야 간선도로와 만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브렌건캐리어, 자동차 그리고 차량으로 견인하는 야포와 대전차포 등은 27일 오후에 모두 렝감 남쪽에서 간선도로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간선도로 쪽으로 빠져나갔다. 이때 통신트럭도 빠져나감으로써 이제 제9사단의 통신망은 철도를 따라 설치된 유선전화만이 남았다. 제9사단의 후위를 맡은 제22여단은 일본군이 도로를 타고 간선도로 쪽으로 진출하여 제27호주여단의 우익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렝감 남쪽의 도로 교차점을 28일 오후 4시까지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27일 오후 4시 30분에 제22여단의 후위로서 렝감 남쪽을 지키던 제5/11시크대대가 일본보병제9여단의 공격을 받았다. 시크대대는 5km 쯤 남쪽으로 후퇴했고 오후 7시 30분까지 제22여단은 도로교차점을 중심으로 밀집하여 방어선을 편성했다.

 

(간선도로 철수 상황.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36)


그동안 제22여단의 남쪽에서는 치명적인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제8여단은 라양라양 남쪽의 다리를 굽어보는 고지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는데 27일 밤에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철수해 버렸다. 뿐만 아니라 다리를 건넌 직후 28일 0시경에 철교와 도로교를 폭파해 버렸다. 이로써 제22여단은 보급로가 끊겼을 뿐 아니라 철교를 따라 가설된 전화선이 끊기면서 통신마저 두절되었다.

28일 아침이 되자 일본보병제9여단의 일부가 제22여단을 동쪽으로 우회하여 라양라양역과 남쪽의 고지를 점령했다. 포위될 위기를 느낀 제22여단은 28일 오후 4시까지 도로교차점을 지키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라양라양역을 탈환하기 위하여 오전 10시 15분에 방어선을 떠나 남진했다.

남쪽 세데낙에 사령부를 차리고 있던 제9사단장 바스토우 소장은  28일 아침에 제22여단과 연락이 끊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스토우 소장은 제22여단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사단참모인 트롯 호주대령 및 AIF 연락장교인 모지스 호주소령과 함께 트롤리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트롤리. https://en.wikipedia.org/wiki/Rail_push_trolley)


트롤리를 타고 북상하던 바스토우 소장은 세데낙과 라양라양의 중간 지접에서 제8여단 사령부를 만났다. 그는 제8여단이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라양라양을 떠남으로서 제22여단과 연결이 끊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제22여단이 큰 위험에 처했음을 깨달은 바스토우 소장은 제8여단장 레이 준장에게 1개 대대를 라양라양으로 파견하라고 명령한 다음 제22여단을 찾아 계속 북상했다. 다리에 도착해 보니 다리가 폭파되어 있었는데 철교는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아서 1명씩 조심스럽게 걸어서 건널 수 있었다. 바스토우 소장, 트롯 대령, 그리고 모지스 소령이 철교를 건넜을 때 철교를 굽어보는 고지를 점령한 일본군이 총격을 가해왔다. 세 사람은 총알을 피하여 급히 강둑 뒤로 숨었는데 이때 바스토우 소장이 미끄러져 강에 빠졌다. 바스토우 소장의 시체는 나중에 일본군에 의하여 하류의 강둑에서 발견되었다.

트롯 대령과 모지스 소령은 강을 헤엄쳐 건넌 후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북상 중이던 제2/10발루치대대를 만났다. 트롯 대령의 설명을 들은 발루치 대대는 고지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후퇴해 버렸다.


(1942년 1월 28일 오전 7시 현재 나마지에 농장 전투 상황.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 P.275)


그동안 간선도로와 나마지에 농장을 지키던 제27호주여단의 제2고든대대와 제2/26호주대대는 28일 하루 동안 일본보병제21여단의 거듭되는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오후 1시에 일본군 1개 대대가 방어선을 동쪽으로 우회하여 제27호주여단의 남쪽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예비대인 프레드릭 갈레간 중령의 제2/30호주대대가 백병전을 불사하는 처절한 전투 끝에 막아내었다. 포위될 위험을 깨달은 제27호주여단장 맥스웰 준장은 28일 해가 지면 31마일 이정표 지역까지 철수하겠다며 서부부대에 승인을 요청했다.

서부부대장 베넷 소장은 제27호주여단의 철수를 승인하면서 제9사단도 28일 밤에 세데낙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베넷 소장은 바스토우 소장의 실종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제22여단의 상태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제8여단장 레이 준장은 철수 명령이 떨어지자 제22여단 문제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제22여단을 구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철수했다.


남쪽으로 진격한 제22여단은 28일 정오에 약 5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라양라양 역을 탈환했다. 제22여단장 페인터 준장은 그때서야 제8여단이 이미 철수해 버렸으며 다리는 끊어져 자신이 고립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을 앞에 두고 적에게 포위된 페인터 준장은 탈출하기 위하여 정글로 들어갔다.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제22여단은 길도 없는 정글 속을 헤매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페인터 준장은 2월 1일에 5백명의 부하들과 함께 총탄이 떨어진 상태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항복했다. 제5/11시크대대의 병력 약 60명과 제2/12FFR대대의 장교 몇 명만이 싱가포르까지 후퇴했다. 이로써 제22여단은 사라졌다.

Posted by 대사(PW)
,

46. 엔다우 양륙


말레이 반도의 동해안에서는 호주군이 후퇴하면서 일본군 보병제55연대가 1월 21일에 엔다우를 점령하고 22일에는 일본군 정찰대가 메르싱 강에서 제2/20호주대대와 접촉했다. 


(메르싱과 엔다우.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 P.333)


쿠안탄 비행장을 상실한 이래 영국군은 적의 상륙에 대비하여 엔다우 부근 해상을 항공정찰했다. 1월 26일 아침 7시 45분에 허드슨 2대가 엔다우 북동쪽 30km 해상에서 일본선단을 발견했다. 이 선단은 순양함 1척(센다이), 제20구축대(아마기리, 아사기리, 유기리), 그리고 소해정들의 호위를 받는 수송선 간사이마루와 캔버라마루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항공관계 자재와 지상요원을 싣고 24일 오후 11시에 싱고라를 떠나 엔다우를 향하여 남하중이었다.

일본군의 통신방해로 인하여 발견 보고가 말레이 항공사령부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 20분이었다. 당시 출격 가능한 폭격기는 허드슨 9대(제1 및 제8비행대대), 빌데비스트 21대, 알바코어 3대로 합계 33대였다. 그 중에서 제36 및 제100뇌격비행대대 소속의 빌데비스트와 알바코어는 바투파핫에서 해상철수 중인 제15여단으로부터 일본군의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전날 밤에 2회에 걸쳐 일본군을 야간 폭격하고 돌아온 이후 재급유와 재무장이 되어 있지 않았다. 빌데비스트에는 어뢰 대신 113kg 짜리 폭탄 4발을 장착했는데 일본선단이 얕은 해역으로 들어와서 뇌격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항공사령부는 수마트라에 전개한 제225폭격비행전대에 모든 폭격기를 엔다우로 보내라고 명령하고 미국 중폭격기로 적의 호송선단을 공격해 달라고 ABDA 사령부에 요청했다.

그동안 간사이마루와 캔버라마루는 엔다우에 도착하여 26일 오전 10시 45분에 닻을 내리고 양륙을 시작했다.


재급유와 재무장에 시간이 걸려 영국군의 출격은 26일 오후 1시에야 이루어졌다. 허드슨 9대와 빌데비스트 12대가 버팔로 15대와 허리케인 8대의 호위를 받으며 300m 의 저공으로 날아갔다. 영국기들은 오후 3시 30분에 선단 상공에 도착하여 일본제12비행단 소속 전투기 19대의 요격과 대공포화를 무릅쓰고 폭격을 감행했다. 명중탄은 없었으며 빌데비스트 5대가 격추되었다.

오후 5시 30분에 전투기 12대의 호위를 받는 빌데비스트 9대와 알바코어 3대가 다시 일본선단을 공습했다. 영국기는 수송선 1척의 선미에 폭탄 1발을 명중시켜 화재를 일으켰으나 승조원이 곧 진화했다. 일본전투기 13대의 반격을 받아 빌데비스트 5대, 알바코어 2대, 전투기 1대가 격추되었다.

오후 8시에는 수마트라를 출발한 허드슨 5대가 버팔로 4대 및 허리케인 8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엔다우 강에 들어선 일본군 주정들을 폭격했다. 일본전투기 16대가 요격했으나 폭격 과정에서는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어두워진 후에 싱가포르의 비행장에 착륙 도중 2대가 추락했다.

영국군은 이날 하루동안의 폭격으로 수송선 1척에 1발의 명중탄을 기록했다. 댓가는 컸다. 빌데비스트 11대, 알바코어 2대, 허드슨 2대, 허리케인 2대 및 버팔로 1대, 합계 18대가 격추되었고 제36 및 제100뇌격비행대대장을 포함하여 승무원 대부분이 전사했다. 살아남은 비행기들도 큰 피해를 입은 기체가 많았으며 많은 승무원들이 부상을 당했다.


(비커스 빌데비스트 뇌격기. https://en.wikipedia.org/wiki/Vickers_Vildebeest)


영국함정들도 일본선단 공격에 나섰다. 26일 오후 4시 30분에 구축함 뱀파이어와 타넷이 엔다우를 향하여 싱가포르를 떠났다. 2척의 낡은 구축함은 27일 오전 4시 30분에 엔다우 부근 해상에서 일본순양함 센다이와 구축함 3척을 만났다. 1시간에 걸친 일방적인 교전 끝에 타넷은 침몰했고 뱀파이어는 연막을 뿌리면서 도망쳤다. 그동안 일본수송선은 제96비행장대대와 통신대, 그리고 카항 및 클루앙 비행장에서 사용할 부품, 장비, 항공유 및 폭탄을 하역했다. 간사이마루가 27일 밤까지, 켄버라마루가 28일 정오까지 하역을 마치고 싱고라로 돌아갔다. 이로써 일본군은 조호르의 항공작전을 지원할 물자와 인력을 확보했다.


동부부대는 1월 25일 저녁에 제3군단의 명령에 따라 메르싱을 떠나 제말루앙으로 후퇴했다.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은 추격하는 일본군에게 반격을 가하여 추격의지를 꺾을 목적으로  제2/18호주대대를 제말루앙에서 북쪽으로 16km 떨어진 니츠데일 농장에 잠복시켰다. 추격하던 보병제55연대가 26일 밤에 매복에 걸렸다. 제2/18대대는 2개 야포대의 지원을 받아 제55연대를 공격했고 일본군이 반격하면서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27일 정오에 사전 계획에 따라 제2/20대대가 제말루앙으로 철수하면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제2/18대대는 92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약 110명이었으며 뜻밖의 역습에 충격을 받은 제55연대는 테일러 준장의 의도대로 추격을 포기하고 메르싱으로 후퇴했다. 보고를 받은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중장은 제5사단수색연대, 보병제56연대제2대대, 야포병제5연대의 1개 중대, 그리고 공병 1개 중대를 제말루앙 쪽으로 급파했다. 제55연대는 추격을 그만두고 클루앙으로 가서 제18사단 주력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Posted by 대사(PW)
,

45. 제15여단의 탈출


1942년 1월 24일 아침 현재 제3인도군단의 배치는 다음과 같다.

동해안에서는 동부부대가 메르싱 강을 경계로 일본군과 접하고 있었다.

간선도로에서는 서부부대가 포진해 있었다. 제9사단(제 8 및 제22인도여단)은 제5 및 제88야포연대의 지원을 받아 클루앙을 지키고 있었고, 제27호주여단은 제2/15야포연대와 제155야포연대 1개 포대의 지원을 받아 아예르히탐을 지켰다.

서해안에서는 폰티안케칠에 사령부를 둔 제11사단이 제135야포연대와 제155야포연대 1개 포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제15여단은 바투파핫에서 일본군과 접하고 있었고 제28여단은 폰티안케칠에 있었으며 제53여단은 스쿠다이를 떠나 베눗으로 이동 중이었다.

퍼시발 중장은 1월 24일에 싱가포르 섬으로의 철수를 위한 개략적인 명령을 내렸다.


23일에 바투파핫으로 돌아온 제15여단은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근위보병제4연대의 주력이 24일 밤에 바투파핫의 북쪽 및 북동쪽으로부터 강력한 압력을 가해왔다. 25일 아침에 제15여단장 찰렌 대령은 제11사단장 키 소장에게 다시 후퇴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키 소장은 25일 오후에 퍼시발 중장과의 회의에서 메르싱-클루앙-바투파핫 방어선을 포기한다는 결정이 날때까지 기다리라고 대답했다. 그동안 남쪽을 살피러 갔던 제15여단의 정찰대가 셍가랑 북쪽의 고무농원에 숨어있던 1개 대대 규모의 일본군을 발견했다. 말라카에서 주정을 타고 남하하여 16일에 바투파핫 남쪽에 상륙했던 근위보병제4연대제1대대였다. 찰렌 대령으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키 소장은 즉시 히스 중장에게 제15여단의 후퇴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역시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답변을 받았다.


제53여단은 25일 아침에 탄약을 실은 트럭과 함께 베눗에 도착했다. 당시 제53여단은 3개가 아닌 2개 보병대대(제6노퍽 및 제3/16펀자브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각 대대는 4개가 아닌 2개 보병중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베눗에서 제3기병연대의 2개 중대와 1개 야포대가 배속되었다. 듀크 여단장은 베눗에 사령부를 차리고 1개 중대를 렝깃에 수비대로 파견한 다음 제6노퍽대대에게 탄약트럭을 호위하면서 셍가랑으로 북상하라고 명령했다. 오전 8시에 노퍽대대의 선두가 셍가랑에 도착했을 때 시가지에서 남쪽으로 800m 떨어진 곳에서 노퍽대대의 후위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뿌리치고 시내로 들어갔다. 일본군은 그 지점에 바리케이드를 만들었으며 25일 저녁까지 셍가랑-렝깃 도로에 몇 개의 바리케이드를 더 만들었다.


1월 25일 오후 3시 25분에 서부부대사령부에서 퍼시발 중장이 주관하는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25일 밤을 기하여 방어선을 약간 물리기로 결정했다. 서해안의 제15여단은 바투파핫을 떠나 셍가랑까지 후퇴할 것이었다. 서부부대는 간선도로 상의 사용강 정류장-48마일 이정표 선까지 철수하고 동부부대는 제말루앙까지 후퇴한다는 것이었다. 서해안을 담당한 제11사단은 제3군단 직속에서 벗어나 서부부대 휘하로 들어갔다. 


(남부 조호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46)


제15여단은 1월 26일 오전 4시에 강상포함 드래건플라이의 포격 지원 아래 근위보병제4연대의 추격을 뿌리치면서 바투파핫을 떠나 아침에 셍가랑에 도착했다. 셍가랑 남쪽에는 이미 일본군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상태였는데 도로 양옆은 늪지라 차량은 통과가 불가능했고 보병도 겨우 통과할 정도였다. 제15여단은 26일 오전에 바리케이드를 제거하려고 3번이나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드래건플라이와 같은 급의 강상포함인 그래스호퍼. https://en.wikipedia.org/wiki/HMS_Grasshopper_(T85)


베눗에 있던 제53여단장 듀크 준장은 26일 오전 10시 30분에 렝깃 북방에 일본군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직후 제11사단장 키 소장이 여단사령부에 들이닥쳐서 지금 장장 병력을 보내어 렝깃 북쪽의 바리케이드를 제거하라고 윽박질렀다. 시간에 쫓긴 듀크 준장은 제대로 작전 계획을 세우지도 못한 채 동원할 수 있는 장갑차, 브렌건캐리어, 포병을 끌어모아 트럭에 태운 보병과 함께 제135야포연대장 벤함 소령의 지휘 아래 오후 12시 30분에 렝깃 북쪽으로 파견했다. 이 부대는 렝깃 북쪽에서 일본군의 바리케이드를 공격하던 중 강력한 역습을 받아 포병대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벤함 소령을 태운 브렌건캐리어는 전투 와중에 바리케이드를 통과했다. 


26일 저녁에 근위보병제5연대가 바투파핫과 셍가랑을 우회하여 렝깃을 공격했다. 렝깃을 지키던 1개 중대는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자정이 되기 전에 렝깃이 일본군 손에 떨어졌다. 이로써 4개 대대(영국대대, 제5 및 제6노퍽대대, 제2캠브리지셔대대)로 이루어진 제15여단은 일본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렝깃 북쪽의 바리케이드를 통과한 벤함 소령의 브렌건캐리어는 이후 5개의 바리케이드를 더 통과하여 27일 오후 12시 30분에 셍가랑에 도착했다. 벤함 소령의 보고를 들은 제15여단장 찰렌 대령은 자신이 이미 포위되었으며 편제를 유지한 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15여단은 26일 오후에 모든 화포와 차량을 파괴하고 걸을 수 없는 부상자들을 적십자 기가 걸린 건물에 수용한 다음 도보로 셍가랑을 탈출했다.


탈출 행렬은 크게 두개로 나뉘었다. 약 1,200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그룹은 지형에 익숙한 말레이 경찰대 장교의 안내를 따라 해안도로 동쪽을 따라 내륙으로 탈출하여 27일 오후에 완전히 지친 상태로 베눗에 도착했다. 


찰렌 대령이 이끄는 주력은 해안도로 서쪽을 따라 해안 쪽으로 탈출했는데 26일 밤에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나 발이 묶이고 말았다. 찰렌 대령은 정찰대를 이끌고 다른 길을 찾아보다가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여단지휘권을 이어받은 모리슨 중령은 부하들을 이끌고 강을 따라 내려가 27일 정오 경에 셍가랑에서 남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해안에 도달했다. 여기서 모리슨 중령은 작은 보트 하나를 구해 여단부관인 라만 소령을 제11사단 사령부가 있는 폰티안케칠로 파견했다. 라만 소령은 27일 밤에 무사히 폰티안케칠에 도착하여 제11사단장 키 소장에게 상황을 알렸다. 키 소장의 보고를 받은 말레이 사령부는 제15여단을 해상철수 시키기로 결정했다.


싱가포르에서 달려온 포함 드래건플라이와 스콜피온이 몇 척의 주정과 함께 해상철수를 실시했다. 철수작전은 일본군의 눈을 피해 1월 28일 밤부터 31일 밤까지 4일에 걸쳐 실시되었다. 그리하여 2월 1일 아침까지 해안에서 기다리던 약 1,500 명을 모두 철수시켰다. 이로써 육로로 철수한 병력을 합쳐 약 2,700 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비록 화포, 차량 및 장비를 모두 잃고 부상자들을 남겨두고 와야 했지만 제15여단에서는 파릿술롱에서 포위당했던 제45여단의 3배 가까운 병력이 탈출했다.

Posted by 대사(PW)
,

44. 항공작전(1942.1.15-31)


1942년 1월 15일 - 24일에 걸쳐 연합군 항공기의 숫자는 평균 폭격기 74대, 전투기 28대였다. 여기에 대하여 일본군은 태국 남부와 말레이에 폭격기 250대와 전투기 150대를 전개하고 있었다. 빈약한 연합군 항공력은 대부분 싱가포르로 접근하는 증원선단 호위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가끔씩은 지상군의 요청에 따라 버팔로 5-6대 정도로 이루어진 편대가 세가맛 및 무아르 전선을 기총소사하기도 했고 전투기의 호위를 받는 폭격기 소수가 무아르와 게마스 남쪽의 일본군 수송대나 병력을 폭격하기도 했다. 또한 소수의 허드슨, 블레님, 빌데비스트 등이 쿠알라룸푸르와 쿠안탄 비행장을 야간폭격하여 약간의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1월 20일에는 자바에 배치된 미육군항공대의 B-17 중폭격기 5대가 팔렘방을 경유하여 2,400km 를 날아와 승게파타니 비행장을 폭격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이런 폭격은 규모가 작아서 의미있는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서부부대가 세가맛에서 철수하면서 말레이 반도에 마지막으로 남은 비행장들이 사용불가 상태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카항 및 클루앙 비행장은 1월 23일까지 인원 및 운반가능한 장비를 철수시켰으며 24일에는 건물, 장비, 연료를 모두 파괴하고 활주로에 구멍을 뚫었다.

이로써 연합군 항공력은 싱가포르 섬의 4개 비행장에 집결했다. 이 상태에서는 표적이 제한되고 비행장에 비행기들이 몰려있어 한번의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따라서 비행기들을 분산해야 했다.

우선 네덜란드 비행기들이 자바로 돌아갔다. 이어서 23일부터 27일에 걸쳐 블레님 3개 비행대대와 허드슨 2개 비행대대가 지상요원들과 함께 자바로 떠났다. 28일에는1월 7일에 싱가포르에 도착했던 카탈리나 비행정 3대가 자바로 날아갔으며 일부 비행기들은 수마트라의 팔렘방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로써 1월말까지 육군이 통제하던 소드피시 3대를 제외한 모든 폭격기들이 싱가포르를 떠났다.


일본군은 1942년 1월 15일부터 싱가포르에 대한 공습을 다시 강화했다. 27대 이상의 일본폭격기가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면서 매일 싱가포르를 폭격했으며 어떤 날은 여러번 폭격하기도 했다. 주요 목표는 비행장 및 해군기지였으나 가끔씩 시가지도 폭격을 받아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1942년 1월 한달동안 싱가포르에서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는 사망 600명, 부상 1,500명 정도이다.

허리케인을 장비한 제232전투비행대대는 1월 20일에 첫 전투를 치렀다. 그날 90대 이상의 일본폭격기가 싱가포르를 폭격했고 허리케인이 날아올라 폭격기를 호위하던 일본전투기와 교전했다. 3대의 허리케인이 격추되어 대대장을 포함한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기는 1대가 격추되었다. 다음날인 21일에 100대의 폭격기가 시가지를 폭격했을 때 다시 허리케인이 날아올라 요격하다가 2대가 격추되었다. 이틀 동안 영국조종사들은 일본기 14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22일에 인도차이나에서 27대의 해군폭격기가 날아와 6,600m 고도에서 싱가포르를 폭격했다. 영국군은 15분 전에 경고를 받고 허리케인과 버팔로를 띄웠다. 이들은 폭격기를 호위하던 제로기와 격돌했고 허리케인 5대와 버팔로 4대가 격추되었으며 일부 기체는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연합군 조종사들은 일본기 6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1월 15일에서 31일까지 연합군 항공기 26대가 파괴되고 10대가 손상되었다. 연합군 조종사는 같은 기간에 일본기 26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허리케인의 성능은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 허리케인은 6,000m 이상의 고도에서는 제로기보다 뛰어난 성능을 발휘했으나 그 이하 고도에서는 속력과 기동성에서 밀렸다. 게다가 북아프리카의 사막에서 필요한 흡기필터를 장착한 상태여서 최고 속력이 시간당 50km 정도 줄었다. 1월 8일에 51대가 도착한 허리케인은 1월 28일이 되자 17대가 파괴되고 13대가 수리 중이어서 21대만이 가용했다. 버팔로는 6대만 남았다.


(호커 허리케인.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Hawker_Hurricane)


증원선단이 싱가포르로 접근하면서 21에서 30일 사이에 연합군 공군은 선단 호위에 만전을 기했다. 매일 8대의 허드슨과 글렌마틴 폭격기가 나투나 제도까지 날아가 적의 함대 출현에 대비했다. 그동안 카탈리나 비행정은 싱가포르 남쪽에서 대잠초계 활동을 했다. 선단이 전투기 행동반경 내로 들어오자 6대의 버팔로가 하루종일 선단 상공을 지켰다. 이외에도 폭격기와 뇌격기가 적의 함대 출현에 대비하여 즉각 이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활주로에서 대기했다.

이러한 호위 덕분에 증원선단은 무사히 도착했다. 1월 22일에 제44인도보병여단(제6/1, 제6/14 및 제7/8펀자브대대)이 인도군 보충병 7,000명과 함께 도착했으며 24일에는 제2/4호주기관총대대가 1,900 명의 호주군 보충병과 함께 도착했다. 29일에는 제18영국사단(사단사령부, 제54 및 제55보병여단)이 도착했다.


제44여단의 훈련상태도 제45여단과 마찬가지로 엉망이었다. 1941년 6월에 제44여단이 창설될 때 대부분의 부대가 인원부족으로 많은 병력을 징집병으로 충당해야 했으며 인도에서의 훈련은 전적으로 중동에서의 사막전투에 대비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창설 이후 12월까지 6개월 동안 대규모의 우유짜기로 그나마 제대로 훈련받고 경험있는 장교와 병사들을 급속히 팽창하는 인도 육군의 다른 부대에 뺏겼다. 우유짜기로 유출된 숫자는 정원 786명의 보병대대에서 평균 250명에 달했는데 그 빈자리는 다시 경험없는 신임 장교와 훈련소에서 갓 나온 신병들로 채워졌다. 신병들의 복무기간은 보통 4-5개월 정도였으며 일부는 심지어 훈련소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승선하여 말레이로 왔다. 따라서 경험이 풍부한 고참병사는 거의 없고 신병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장교 또한 마찬가지로 보병대대의 장교 33명 중 전쟁 발발 전부터 근무했던 정규 장교는 평균적으로 3명 뿐이고 나머지는 전시 비상계획에 따라 대량으로 속성 배출되어 임관된 장교였다. 이런 비상 임관 장교 중 가장 오래 근무한 사람이 12개월을 근무했는데 이는 부하들과 소통하기 위한 언어를 배우기에도 빠듯한 기간이었다.

7,000 명의 인도군 보충병은 훈련상태가 더 엉망으로 대부분 기초군사훈련도 완전히 마치지 못한 징집병으로 지휘관을 맡을만한 고참병사나 부사관, 장교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보충병들은 싱가포르 도착 후에 추가 훈련을 받아야만 했으며 바로 전투에 투입할 수 없었다. 인도육군이 급팽창하던 상황에서 기존 부대로부터 경험이 풍부한 장교와 병사들을 빼돌려 새로 편성되는 부대의 기간 전력으로 삼는 우유짜기는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말레이로 파병되는 부대 입장에서 우유짜기는 자살을 강요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호주군의 경우 제2/4호주기관총대대의 훈련상태는 양호하여 바로 싱가포르 북해안 방어에 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주보충병 1,900명의 훈련상태는 충격적이었다. 일부는 입대한 지 15일 만에 승선했다. 당연히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병사는 거의 없었으며 일부는 소총 다루는 법조차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애송이들을 파견한 호주군의 결정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중동에는 독일군과의 전투로 단련된 호주군 16,600 명이 있었으며 호주 본토에는 민병대 87,000 명이 맹훈련 중이었는데 이들 중 12,500명은 개전 직후 AIF 로 편성될 만큼 훈련 상태가 좋았다. 따라서 호주군이 마음만 먹었다면 기초군사훈련도 마치지 못한 징집병 대신 실전경험이 있는 고참병이나 최소한 충분히 훈련받은 정예병 1,900 명을 파견하는 것은 가능했다.


1942년 1월 동안 싱가포르의 민간인 노동력 동원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민방위 사령관은 3군의 요청에 따라 노동력을 징발하여 필요한 곳에 투입할 임무를 맡았으나 수행이 불가능했다. 민간인 노동자들은 일본기의 공습이 집중되는 비행장, 해군기지 및 케펠항에서 일하기를 거부했는데 민방위 사령관에게는 강제로 일을 시킬 권한이 없었다. 결국 민간인 노동자가 가장 많이 필요한 이들 시설의 공사는 해당 부대가 병사를 동원하여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싱가포르의 전쟁위원회는 법을 바꾸어 민간인에게 강제로 일을 시킬 권한을 민방위 사령관에게 부여했다. 하지만 실제로 민간인에게 위험한 일을 시키려면 총칼로 위협하기보다 위험수당을 주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었는데 문제는 정부가 인부에게 지급할 수 있는 임금 상한선이 본국의 법으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말레이 총독과 3군 사령관이 함께 런던에 임금 상한선의 예외를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영국정부가 1월 31일에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2월부터는 민간인 노동력의 사용이 원활해졌으나 이미 늦었다.

Posted by 대사(PW)
,

43. 바투파핫의 위기


1942년 1월 19일에 ABDA 사령관 웨이벌 대장은 싱가포르 북해안에 방어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처칠 수상에게 전문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알리면서 만일 조호르를 상실할 경우 싱가포르가 오래 버틸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의견을 전했다.

다음날인 20일에 퍼시발 중장은 히스 중장, 벤넷 소장, 그리고 요새사령관 프랭크 시몬스 소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극비리에 조호르 철수 계획을 알렸다. 이에 따르면 동부부대는 메르싱, 서부부대는 아예르히탐, 그리고 제11사단은 서부해안도로를 거쳐 조호르 남부의 조홀바루에 도달한 다음 해협을 건너 싱가포르로 철수할 것이었다. 철수 과정은 제3인도군단이 조율할 것이었다. 철수 도중 후위부대는 적절한 곳에서 제한적인 반격을 가하여 일본군의 추격을 뿌리칠 것이었다.

웨이벌 대장은 20일 저녁에 런던의 합동참모본부에 전문을 보내어 영국군이 빠른 시일 내에 메르싱-클루앙-바투파핫 선에서 물러나 싱가포르 섬으로 후퇴해야 할 것이라고 보고한 후 21일에 자바에 있는 ABDA 사령부로 돌아갔다.

영국참모본부는 말레이의 상황에 대해 논의한 후 웨이벌 대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싱가포르 방어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안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명령했다.


1. 해안포를 육지로부터의 침공에 대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

2. 조호르 수로를 가로지르는 방죽길을 파괴할 것

3. 섬으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보트와 주정을 파괴할 것

4. 해안에 배치된 기관총 일부를 섬의 북쪽 방어선에 옮길 것

5. 상륙한 적군의 예상 진격로를 따라 여러 개의 독립적인 방어 진지를 설치할 것

6. 차량화된 강력한 기동예비대를 확보할 것


처칠 수상은 싱가포르 북해안에 방어시설이 없다는 전문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웨이벌 대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싱가포르의 땅은 인치 단위로 끝까지 지켜야 하며 시가지의 폐허 속에서 기나긴 전투를 치르기 전에는 항복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웨이벌 대장에게는 싱가포르 절대 사수를 명했지만 사실 처칠 수상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21일에 참모본부에 비밀 각서를 보내어 싱가포르로 향하고 있는 증원선단을 버마로 돌리는 문제에 대하여 참모총장들의 의견을 물었다.


이 비밀 각서를 받아든 영국군 수뇌부는 싱가포르 상실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 들이기 시작했다. 참모본부는 퍼시발 중장에게 싱가포르를 초토화할 수 있도록 폭파준비를 하라고 명령했으며 해군성은 말레이 해군사령관에게 해군병력 및 해군공창 기술자들의 철수계획을 작성하라고 명령했다. 퍼시발 중장은 폭파준비를 한다면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려서 통제불능 상태가 될 것이라면서 적이 싱가포르 섬에 상륙하기 전에 폭파준비를 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답했다. 참모본부는 받아들였다


21일 밤에 런던에서 열린 국방위원회에서 참석자들은 싱가포르로 가고 있는 증원선단을 버마로 돌릴 것인지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증원선단이 도착해도 싱가포르 함락을 겨우 2-3 주 정도 지연시킬 정도라면 버마로 돌려야 한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어쩌면 3개 여단과 보충병 7,000 명에 달하는 증원군이 일본군의 전진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이 미묘한 균형을 깨뜨린 것은 호주정부였다. 처칠 수상은 21일 밤에 있었던 국방위원회의 논의 사항을 호주정부에 비밀로 했으나 수완좋은 호주 연락관이 처칠 수상의 각서를 몰래 읽어보고 즉시 커틴 호주수상에게 보고했다. 23일에 격노한 커틴 수상이 처칠 수상에게 전문을 보내어 강력하게 항의했다.

커틴 수상으로서는 화를 낼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호주는 이미 제8호주사단을 말레이로 보내어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을 뿐 아니라 추가로 기관총대대 1개와 보충병 1,900 명이 싱가포르를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제6 및 제7호주사단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로 파견하기로 약속하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싱가포르를 포기한다는 사실을 호주정부가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마침 당시 라바울이 함락되면서 국가안보에 대한 호주국민들의 불안감이 최고로 높아져 있었기 떄문에 만일 호주정부가 영국의 싱가포르 포기를 덥썩 받아들였가는 국민의 분노를 사서 정권이 무너질 수 있었다.


물론 호주 수상이 화를 내었다고 하여 처칠 수상이 증원 선단을 그대로 싱가포르에 보낸 것은 아니었으며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증원군이 일본군을 막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커틴 수상의 전문은 처칠 수상에게 싱가포르를 포기할 경우 맞닥뜨릴 외교적 후폭풍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특히 영국이 싱가포르를 포기할 경우 똑같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바탄 반도에 틀어박혀 처절하게 싸우고 있던 미군의 사기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칠 것이었다. 처칠 수상은 필리핀에서 싸우고 있는 미군의 사기를 꺾음으로서 미국의 비위를 거스르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결국 증원선단은 예정대로 싱가포르로 향했다.


웨이벌 대장은 20일에 싱가포르에서 퍼시발 중장과 회담했다. 그는 일본군이 싱가포르 섬의 북서쪽 해안에 상륙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여기에 가장 강한 제18사단을 배치하고 북동쪽에 제8호주사단을 배치하라고 권고했다. 퍼시발 중장은 일본군이 북동쪽 해안으로 상륙할 것으로 보고 제18사단을 북동쪽에, 제8호주사단을 북서쪽에 배치하는 안을 제시하여 웨이벌 대장의 동의를 받았다. 결국 웨이벌 대장이 옳았다.

퍼시발 중장은 23일에 싱가포르를 북부, 서부 및 남부 지역으로 나누었다. 제18사단이 북부, 제8호주사단이 서부를 맡았으며 남부에는 주로 인도부대들이 예비대로 주둔했다.


그동안 바크리와 파릿술롱 사이에서 제45인도보병여단을 분쇄한 근위사단장 니시무라 중장은 상황을 판단했다. 제5사단의 진격 속도가 빨라 이제는 용펭을 점령하더라도 간선도로 상의 영국군을 포위하기에는 늦었다. 따라서 근위사단은 해안도로에 집중하기로 했다. 근위보병제4연대가 바투파핫을 공격하는 동안 근위보병제5연대는 바투파핫-아예르히탐 도로를 건너 동쪽으로부터 렝깃을 점령함으로써 바투파핫의 영국군을 포위하는 동시에 구원을 위하여 북상하려는 영국군을 차단하기로 했다. 

(북부조호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26)


1942년 1월 21일 오후에 제11사단장 키 소장과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이 바투파핫에 있는 제15여단사령부를 방문했다. 여단장 찰렌 대령은 후퇴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히스 중장은 바투파핫이 토브룩이 했던 것처럼 적의 진격을 막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말은 열흘치 식량을 가진 제15여단이 일본군에게 포위되더라도 바투파핫에서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뜻이었다. 21일 저녁이 되자 일본군이 바투파핫의 북동쪽에서 제15여단과 접촉하기 시작했으며 일본군 일부가 바투파핫-아예르히탐 도로의 72마일 이정표 부근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22일 오전 6시 30분에 영국대대(British Battalion)가 바투파핫 쪽에서, 제5노퍽대대가 아예르히탐 쪽에서 협격을 가하여 바리케이드를 뚫었다. 이날 하루동안 보급물자를 실은 트럭들이 뚫린 도로를 통하여 바투파핫으로 들어갔으나 제5노퍽대대는 아예르히탐을 지키느라 바투파핫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23일에 호주군이 아예르히탐에 도착하자 찰렌 대령은 제5노퍽대대를 바투파핫으로 불렀다. 그러나 23일 새벽에 일본군이 다시 72번 이정표 지역을 봉쇄했다. 제5노퍽대대는 봉쇄를 뚫는데 실패하여 바투파핫에 가지 못했다. 23일 정오에 제5노퍽대대는 키 소장의 명령에 따라 버스를 타고 탄약을 실은 트럭과 함께 아예르히탐을 떠나 바투파핫 남쪽의 폰티안케칠로 갔다. 24일에 북상하여 바투파핫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23일 하루동안 영국군은 클루앙-아예르히탐-바투파핫 선으로 물러났다. 부킷펠란독 북쪽에 주둔중이던 제53여단은 23일 오후에 철수하다가 전차를 앞세운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24일 새벽에 아예르히탐에 도착했다. 제2로얄대대를 제27호주여단에 넘기고 2개 대대(제3/16펀자브대대, 제6노퍽대대)로 줄어든 제53여단은 24일 오전 중에 아예르히탐을 출발, 베눗을 지나 남부 조호르의 스쿠다이로 향했다.


그동안 바투파핫을 지키던 제15여단장 찰렌 대령은 처절한 고립감을 맛보고 있었다. 시가지 북쪽의 일본군은 시시각각 증강되고 있는데 아예르히탐으로 통하는 도로는 막혔고 남쪽으로 뚫린 도로도 언제 막힐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23일 아침에 제11사단과의 무전마저 끊겼다. 자신의 처지가 바크리에서의 제45여단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찰렌 대령은 23일 오전에 제15여단을 이끌고 바투파핫을 떠나 남쪽 셍가랑으로 향했다. 도중에 제11사단과의 무전이 복구되었다. 제11사단장 키 소장은 찰렌 대령에게 정지명령을 내렸으나 차마 바투파핫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은 내리지 못하고 제3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보고했다. 이제 조호르 작전을 총괄하게 된 히스 중장으로서는 바투파핫을 포기할 수 없었다. 바투파핫이 함락되면 제말루앙-클루앙-아예르히탐-바투파핫을 잇는 방어선이 무너질 것이었다. 그럴 경우 카항과 클루앙의 비행장이 적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데 그건 증원군을 실은 선단이 싱가포르로 접근하고 있는 상황에서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히스 중장은 퍼시발 중장과 상의한 후에 제15여단에게 바투파핫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제15여단은 23일 저녁에 바투파핫으로 돌아와 텅 빈 시가지에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던 일본군 정찰대를 쫓아내고 다시 시가지를 점령했다.

Posted by 대사(PW)
,

42. 제45여단의 고난


1942년 1월 19일이 되자 바크리를 지키고 있던 제45인도보병여단의 운명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19일 아침에 일본군 2개 대대가 남쪽으로부터 바크리를 공격했다. 바크리 시가지를 노린 근위보병제4연대제2대대의 공격은 제2/19호주대대 B중대가 증원차 달려온 A 중대 2개 소대의 지원을 받아 막아내었다. 호주군이 확인한 일본군 시체는 140구였으며 호주군 인명피해는 전사 10명, 부상 15명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 바크리 동쪽을 공격한 근위보병제5연대제2대대가 재수없게 도로 위에서 포착된 영국군 수송대를 전멸시키고 바크리 동쪽 5km 지점에서 용펭으로 통하는 도로를 차단했다.

19일 오전 10시에 제45여단 사령부가 폭격을 받아 제65호주야포대장 줄리어스 소령과 여단의 통신병들이 죽었으며 여단참모 중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여단장 허버트 던칸 준장 또한 뇌진탕을 일으켰으므로 제2/19호주대대장 찰스 앤더슨 중령이 여단의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바크리의 호주대대 배치도.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P.228)


부킷파시르를 출발한 제4/9자츠대대가 19일 오후2시에 바크리에 도착하여 제45여단에 합류했다. 자츠대대는 철수 도중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대장 윌리엄스 중령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병사들이 흩어져서 개별적으로 용펭 방면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바크리에 도착했을 때는 약 200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자츠대대가 도착하자 앤더슨 중령은 바크리 서쪽에 있던 제2/29대대도 바크리로 철수시켰다. 제2/29호주대대가 철수하자 근위보병제5연대제3대대가 따라붙어 공격했다. 그리하여 전날 이미 큰 피해를 입었던 제2/29대대는 대대장 올리프 소령이 전사하는 등 다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제2/29호주대대의 중대장이었던 마허 대위가 19일 밤부터 이제 약 200명으로 줄어든 제2/29호주대대를 지휘했으며 로스 중위는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줄리어스 소령을 이어 제65호주야포대를 지휘했다.

제2/29호주대대의 후퇴과정에서 많은 호주병사들이 길을 잃고 낙오되었는데 자츠대대의 낙오병들과 만나 숫자가 150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제2/29호주대대의 부관인 모간 대위의 인솔 하에 용펭으로 후퇴하다가 대부분 포로가 되었다.


19일 오후에 근위보병제5연대제1대대가  부킷펠란독을 점령하면서 제45여단에 대한 보급이 끊겼다. 보급이 끊긴 상태로 바크리에 머무르는 것은 자살행위였으므로 제3군단은 19일 오후 8시에 제45여단에 탈출명령을 내렸다. 앤더슨 중령은 병력을 재편성했다. 2개 대대였던 호주군은 5개 중대(제2/19중대 3개, 제2/29중대 1개, 혼성중대 1개)를 가진 1개 대대로 개편했다. 3개 인도대대는 통합하여 3개 중대(자츠중대 2개, 라지푸트/갈월혼성중대)를 가진 1개 대대로 만들었다. 앤더슨 중령은 3개 호주중대(제2/19대대의 A 및 B중대, 혼성중대)를 전방에 세우고 1개 호주중대(제2/29중대)와 2개 자츠중대를 후위로 삼았다. 중앙에는 라지푸트/갈월중대와 포병, 수송대 및 지원부대가 위치했다. 제2/19대대 C중대는 예비대로서 차량에 타고 대열 중앙에서 이동하다가 상황에 따라 앞으로든 뒤로든 바로 달려갈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 대전차포 2문은 대열의 앞뒤에 1문씩 배치했으며 대전차포를 잃어버린 병사들은 모두 소총수가 되었다. 이 진형으로 바크리 동쪽 5km 지점에서 도로를 막고 있던 근위보병제5연대제2대대의 포위망을 돌파하기로 했다.


제45여단은 20일 오전 7시에 바크리를 떠나 용펭으로 향했다. 선두에 선 제2/19호주대대 B중대는 제2/5근위대대의 방어선을 공격했으나 뚫지 못했다. 그동안 뒤쪽에서는 바크리를 점령한 제3/5근위대대가 경전차를 앞세우고 추격해 왔다. 정오에 벌어진 전투에서 후위부대가 큰 희생을 치른 끝에 추격을 막았다. 이때 후위전투를 지휘하던 던칸 준장이 전사했다.

후방의 불을 일단 끈 제45여단은 오후에 가용한 모든 병력과 화력을 동원한 총공격을 펼쳤다. 박격포가 선두 보병에서 불과 몇 m 앞에 있던 일본군에게 포격을 가하고 25파운더 야포가 70m 거리에서 일본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직접사격으로 파괴했다. 브렌건캐리어는 일본군 기관총좌에 5m 앞까지 밀고 들어가 기관총을 쏘았다. 보병들은 근거리에서 소총사격을 가한 다음 돌격하여 총검과 전투도끼로 백병전을 벌였다. 공격을 지휘한 앤더슨 중령도 수류탄으로 일본군 기관총좌 2개를 제거하고 권총으로 일본군 2명을 사살했다. 혼신을 다한 공격에 제2/5근위대대가 마침내 물러섰다.

포위망을 벗어난 제45여단이 수많은 부상병과 함께 21일 새벽2시경 파릿술롱에 접근했을 때 파릿술롱 시가지에서 3km 떨어진 심팡기리 강의 다리를 일본군(근위보병제4연대제3대대)이 이미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파릿술롱은 제6노퍽대대의 2개 소대가 지키고 있었으나 18일에 식량이 떨어진데다가 19일 아침에는 대대본부와의 연락마저 끊겼다. 그러자 병사들은 파릿술롱을 떠나 바투파핫으로 철수해 버렸다. 따라서 제3/4근위대대는 아무런 저항없이 파릿술롱과 다리를 점령했다. 이제 제45여단은 다시 포위망에 갇혔다. 


(북부조호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26)


그동안 서부부대는 세가맛 강과 무아르 강의 다리를 폭파한 다음 철수하여 1월 21일에는 제22여단이 리비스 부근에, 제27호주여단이 용펭에 도착했으며 제8여단은 그 중간쯤에 있었다. 서부부대가 철수하자 퍼시벌 중장은 1월 21일 오전 8시 30분을 기하여 무아르-용펭 전선을 다시 서부부대 관할로 옮기고 오후 12시 30분에 용펭에서 부하 사령관들과 회의를 가졌다.


제53인도보병여단은 부킷펠란독 탈환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제11인도사단장 키 소장은 21일 오전 10시 30분에 제53여단사령부를 찾아 공격명령을 내렸으나 지휘권이 서부부대로 넘어간 것을 알게 된 여단장 듀크 준장은 서부부대사령관 베넷 소장의 확인을 요구했다.

정오에 베넷 소장의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듀크 준장은 로얄대대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는데 이 명령이 대대장 엘링턴 중령에게 도달한 시간은 오후 2시였다. 엘링턴 중령이 흩어져 있는 중대를 모으는데 시간이 걸려 공격시간은 오후 5시로 결정되었다. 퍼시발 중장과 회담 중에 제53여단의 공격이 오후 5시에 실시된다는 보고를 들은 베넷 소장은 참모를 보내어 오후 4시에 실시하라고 다그쳤으나 불가능했다. 로얄대대의 병력을 모으는 것도 문제였을 뿐 아니라 화력지원을 담당할 야포대와 조율을 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결국 공격시간은 오후 6시로 밀렸다가 다시 22일 새벽으로 연기되었다.


22일 새벽이 되자 야포대의 시사가 늦어져서 공격시간은 다시 오전 9시로 연기되었다. 그동안 집결하여 공격명령을 기다리던 로얄대대는 일본기로부터 심한 공습을 받았다. 기습이 불가능해지자 듀크 준장은 공격을 망설였다. 그는 제45여단이 반대쪽에서 동시에 협공하지 않는 이상 제53여단 단독으로는 부킷펠란독을 탈환하기 어렵다는 보고를 올렸다. 베넷 소장이 어쩔 수 없이 이 의견을 받아들임에 따라 제53여단은 공격을 포기했다.


용펭에서의 회의 결과 제말루앙-클루앙-아예르히탐-바투파핫을 잇는 선에서 일본군을 막기로 했다. 방어선은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제말루앙에서 동해안 메르싱 지역의 코타팅기 도로에 이르는 구간은 동부부대가, 용펭-클루앙-아예르히탐에 이르는 간선도로 지역은 서부부대가, 그리고 바투파핫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은 제11사단이 지키기로 했다. 일단 부대들이 방어선의 지정된 위치에 도달하면 제3인도군단이 전체를 지휘할 것이었다.


파릿술롱 서쪽에서 포위당한 제45여단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제45여단은 21일 아침에 다리 돌파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잠시 후 추격해 온 제2/5근위대대가 뒤쪽에서 전차와 함께 공격했다. 제65호주야포대의 25파운더 야포 2문이 전차를 파괴하면서 공격을 일단 막았다. 그러나 제2/5근위대대는 하루종일 제45여단을 압박했다. 사단포병에서 파견나온 야포 1개 대대 및 제15유탄포대대의 1개 소대와 제3비행단 소속 항공기들이 제2/5근위대대를 지원했다. 그리하여 21일 저녁이 되자 제45여단은 다리 서쪽에서 사방 1km 정도의 좁은 포위망 안에 갇혔다.

21일 밤에 제45여단장 앤더슨 중령은 구급차 2대에 중상자를 가득 싣고 백기를 매단 채 다리 쪽으로 보냈으나 통과를 거부당했다. 일본군은 만일 항복하면 부상자는 돌보아 주겠다면서 여단 전체의 항복을 요구했으나 앤더슨 중령은 거부했다.

그러는 동안 뒤쪽에서는 제2/5근위대대가 전차를 앞세우고 다시 공격해왔으나 대전차포가 선두 전차를 파괴하자 물러났다. 제45여단의 식량은 이틀 전에 떨어졌으며 박격포탄과 25파운더 야포탄도 거의 바닥났다. 앤더슨 중령은 무전으로 벤넷 소장에게 식량과 의약품 투하를 요청했다.


22일 날이 밝자 싱가포르 셈바왕 기지에서 이륙한 알바코어 2대가 버팔로 3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날아와 저공비행으로 약간의 식량과 의약품을 투하했다. 제2/5근위대대가 아침에 전차와 함께 공격해왔으나 제45여단이 가까스로 막아내었다. 직후에 제45여단은 다시 다리 돌파를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앤더슨 중령은 이제 외부의 지원이 없는 한 편제를 유지한 상태로 탈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22일 오전 9시에 베넷 소장이 앤더슨 중령에게 무전을 보내어 제45여단을 구출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렸다. 앤더슨 중령은 제45여단의 병사가 모두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으로 탈출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부하들에게 정글과 습지를 통하여 각자 탈출한 다음 용펭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45여단 병사들은 22일 오전 10시까지 모든 중장비와 중화기를 파괴한 다음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일본군의 눈을 피해 포위망을 빠져 나갔다. 이렇게 빠져나와 용펭에 도착한 호주군은 제2/19대대 271명(경상자 52명 포함), 제2/29대대 130명, 제65호주야포대 98명(경상자 24명 포함)으로 499명이었으며 인도군은 약 400명이었다. 

제45여단은 바크리에서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했으며 5개 대대로 이루어진 제45여단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용펭에 집결한 병력은 900명 남짓했다. 탈출 과정에서 여단장이었던 던칸 준장이 전사했으며 대대장 5명 중 앤더슨 중령을 제외한 4명도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유효한 전력으로서의 제45여단은 사라졌으나 그래도 제45여단이 처했던 절망적인 상황에 비추어보면 900명 가까이 탈출에 성공한 것도 기적이라고 보아야 했다. 일개 대대장 신분으로 얼떨결에 낯선 제45여단의 지휘를 맡아 남다른 용기와 훌륭한 지휘로 숱한 난관을 뚫고 900명 가까운 병력을 탈출시킨 앤더슨 중령은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았다.


(빅토리아 십자훈장. https://en.wikipedia.org/wiki/Victoria_Cross)


제45여단이 탈출할 때 걸을 수 있는 경상자는 가급적 빠져나왔지만 걸을 수 없는 중상자는 남겨 놓을 수 밖에 없었으며 일부는 다친 동료를 돌보기 위하여 자진하여 남았다. 일본군은 이렇게 남겨진 병사들을 대부분 학살했다. 이 만행으로 호주군 약 110명과 인도군 약 40명이 희생되었으며 학살당한 동료 사이에 쓰러져 죽은 척 하다가 탈출한 몇 명만이 목숨을 건졌다.


전사총서에 따르면 1942년 1월 17일부터 22일까지 근위사단이 잡은 포로는 398명이며 노획품은 야포 8문, 대전차포 9문, 기관총 10정, 경기관총 62정, 브렌건캐리어 19대, 자동차 180대이다. 같은 기간 근위사단의 손해는 전사 348명, 부상 253명으로 합계 601명이다.

Posted by 대사(PW)
,

41. 부킷펠란독 함락


1942년 1월 17일에 서부부대사령관 고든 벤넷 소장은 바크리를 지키던 제45인도보병여단장 허버트 던칸 준장에게 반격을 실시하여 무아르를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던칸 준장은 18일에 반격을 실시하기로 했다. 17일 오후에 바크리에 도착한 제2/29호주대대는 바크리를 출발하여 심팡제람을 거쳐 무아르를 공격하고 제4/9자츠대대는 바투파시르를 출발하여 무아르를 공격하며 제5/18갈월대대는 파릿자와를 출발하여 해안도로를 따라 무아르를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갈월대대는 바크리를 떠나 파릿자와를 향하여 남하했는데 파릿자와는 이미 근위보병제4연대가 점령한 상태였다. 이를 모르고 파릿자와에 접근하던 갈월대대는 오후 8시에 파릿자와 북동쪽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렸다. 기습을 당한 갈월대대는 참패하여 병력을 대부분 잃고 바크리로 쫓겨왔다. 일본군이 해안도로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걸 깨닫자 던칸 준장은 18일 0시에 무아르 탈환을 위한 반격을 취소했다. 대신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바크리.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08)


근위사단장 니시무라 중장은 바크리를 지키는 제45여단을 무아르 강과 바투파핫 강 사이에서 포위하여 섬멸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근위보병제5연대(제2/5, 제3/5 및 제2/4대대)가 바크리의 영국군을 고착시키는 동안 근위보병제4연대(제3/4 및 제1/5대대)가 해안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바투파핫 강을 건넌 다음 부킷펠란독과 파릿술롱 사이의 도로를 점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8일 아침에 근위사단은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지금까지 큰 효과를 보았던 대로 보병없이 전차대를 먼저 보냈으나 호주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전 6시 45분에 경전차 5대가 바크리 서쪽에 있던 제2/29호주대대의 방어선으로 접근했다. 대전차포 4문을 가진 제2/4호주대전차연대의 1개 중대가 사격을 가했다. 철갑탄으로 사격을 가하자 포탄이 경전차를 뚫고 지나가 버렸다. 고폭탄으로 바꾸어 사격하자 경전차 5대가 모두 파괴되었다. 잠시 후 3대의 경전차가 더 접근했으나 역시 고폭탄을 얻어맞고 모두 파괴되었다. 경전차 8대가 파괴되자 근위보병제5연대는 정면공격을 포기하고 우회로를 찾기 시작했다.

18일 오후에 일본군 보병 일부가 제2/29호주대대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대대 방어선과 바크리 사이의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제2/29대대에서는 1개 중대를 보내어 브렌건캐리어와 함께 바리케이드를 공격했으나 제거하는데 실패했다. 이때 공격을 지휘하던 제2/29대대장 로버트슨 중령이 부상을 입어 부대대장 올리프 소령이 대대의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잠시 후 지원군이 도착했다. 오전 10시에 바크리에 도착한 700명의 병력을 가진 제2/19호주대대(찰스 앤더슨 중령)가 바리케이드 소식을 듣고 2개 소대를 파견했다. 제2/29대대의 1개 중대와 제2/19대대의 2개 소대가 양쪽에서 협공하자 바리케이드는 뚫렸다.

그러자 일본군은 제2/29대대의 방어선에 지속적으로 야포와 박격포를 동원하여 포격을 퍼부었고 밤이 되자 2번에 걸쳐 방어선을 공격했다. 제2/29대대는 수류탄을 던지고 백병전까지 불사하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막았으나 그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동안 무아르 탈환 계획을 포기한 던칸 준장은 자츠 대대에게 다음날인 19일에 부킷파시르를 떠나 바크리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동안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무아르를 공격한 일본군이 근위사단이며 제5사단은 여전히 간선도로를 따라 공격 중임을 알았다. 여기에 더하여 18일 하루 동안 바투파핫 강의 북쪽은 물론 남쪽에서도 일본군 정찰대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퍼시발 중장은 서부부대의 보급선이 차단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18일 저녁에 벤넷 소장이 서부부대를 세가맛 강 너머로 후퇴시킬 허가를 요청하자 군말없이 승인했다. 또한 서부부대가 간선도로에 집중할 수 있도록 18일 오후 9시 45분을 기하여 무아르 전선을 제3인도군단에게 맡겼다.


19일 아침에 바투파핫에 대한 위협이 늘어나자 제11사단장 키 소장은 찰렌 대령이 지휘하는 제15여단에 영국대대(British Battalion)를 증원한 다음 바투파핫으로 보냈다. 찰렌 대령은 제3/16펀자브대대장으로 복귀하고 싶다고 요청한 무어헤드 중령에 이어 제15여단장에 되었다. 키 소장은 제3/16펀자브대대를 부킷펠란독 계곡으로 파견했다. 제53여단(듀크 준장)의 제2캠브리지셔대대가 바투파핫에, 제5노퍽대대가 제말루앙에 파견되면서 부킷펠란독에는 제6노퍽대대만이 남아 있었다. 키 소장은 제말루앙에 파견된 제5노퍽대대를 아예르히탐으로 불러들이겠다고 제3인도군단에 요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19일 오후에 퍼시발 중장은 제53여단에게 부킨펠란독을 지키라고 명령하면서 제9사단으로부터 제2로얄대대를 떼내어 제53여단에 배속시켰다. 퍼시발 중장은 다음날인 20일에 제45여단은 용펭으로, 서부부대는 라비스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45여단을 철수시키라는 퍼시발 중장의 명령은 너무 늦었다. 19일 오후 1시 30분에 근위보병제5연대제1대대가 부킷펠란독을 기습하여 제6노퍽대대의 주력을 몰아내었다. 일본군은 이어서 도로 북쪽의 부킷벨라를 정찰했는데 영국군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 부킷벨라의 북사면에는 제6노퍽대대의 1개 중대가 대대본부와 연락이 끊긴 채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다. 19일 밤에 노퍽중대는 부킷벨라 정상을 점령했는데 노퍽대대본부도 모르고 일본군도 모르고 있었다.

싱가포르를 출발한 제2로얄대대의 1개 중대가 대대에 합류하러 트럭을 타고 가다가 19일 오후에 부킷펠란독 부근에 도달했다. 로얄중대는 정글 속으로 들어가 남쪽으로부터 부킷펠란독을 공격하여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낯선 지형에서 정글에 들어간 로얄중대는 밤이 되자 물도 없고 식량도 없는 상태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결국 20일 날이 밝자 로얄중대는 영국 야포가 부킷펠란독을 때려서 엄호하는 가운데 정글을 빠져나와 20일 오후에 대대에 합류했다.

 

(부킷펠란독.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10)


듀크 준장은 19일 오후 5시에 부킷펠란독 지역에 도착한 제3/16펀자브대대에게 20일 새벽을 기하여 부킷벨라를 점령한 다음 남쪽으로 공세를 가해 부킷펠란독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3/16펀자브대대는 20일 새벽 4시에 부킷벨라 정상에 올랐다가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노퍽중대와 충돌했다. 영국군은 치열한 총격전을 벌인 끝에 상대가 우군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이미 늦었다. 부킷펠란독에 있던 근위보병제5연대제1대대가 전투의 소음을 듣고 상황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영국군이 오인 사격을 멈추고 방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일본군이 강력한 일격을 가했다. 영국군은 제3/16펀자브대대장 무어헤드 중령이 전사하는 등 큰 인명피해를 입으면서 참패했다. 이로써 부킷펠란독 탈환은 실패했다.


(북부조호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26)


부킷펠란독 계곡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함으로써 제45여단의 보급로가 끊겼고 서부부대 전체의 보급로까지 위태로워졌다. 퍼시발 중장은 20일 오후 8시에 서부부대에게 라비스를 지나 게르창 강 너머의 팔로로 후퇴하고 1개 여단을 용펭의 도로교차점으로 보내어 보급로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Posted by 대사(PW)
,

40. 무아르 함락


1942년 1월 15일 아침에 무카이데 지대가 게마스에서 패배하자 제5사단 주력이 나섰다. 제5사단장 마츠이 다쿠로 중장은 보병제9여단(보병제11 및 제41연대)에 무카이데 지대를 편입한 후 간선도로를 따라 게마스를 거쳐 바투아남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보병제21여단(보병제21 및 제42연대)는 남서쪽 아예르쿠닝 방면으로 우회한 후 오피르 산 서쪽의 제맨타를 거쳐 세가맛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보병제9여단은 무카이데 지대를 패배시킨 제2/30호주대대를 몰아내고 오후 10시에 게마스를 점령했다. 일부 병력이 철수하는 호주군을 추적했으나 후위부대의 빈번한 역습 때문에 주력을 포착하는데 실패했다.

16일 하루동안 부대를 정비하면서 공격 준비를 마친 보병제9여단은 17일 아침부터 바투아남의 제27호주여단 방어선에 강력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북부조호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326)


서해안에서는 근위보병제4연대가 1월 14일 오후8시에 말라카를 점령했다. 근위사단장 니시무라 다쿠마 중장은 무아르 강을 무사히 건너기 위하여 2개 연대를 따로 진격시켰다. 해안을 따라 진격한 근위보병제4연대가 무아르 시가지 정면에서 영국군의 주의를 끄는 동안 근위보병제5연대가 무아르 강 상류에서 밤에 몰래 강을 건너 동쪽으로부터 무아르 시가지를 공격할 것이었다. 무아르 강을 건넌 후 제4연대는 해안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바투파핫을 점령하고 제5연대는 내륙으로 진격하여 용펭을 점령할 것이었다. 바투파핫에서 영국군을 포위하기 위하여 제4연대 제1대대가 해상기동할 것이었다. 제1대대는 바투파핫 남쪽에 상륙하여 숨어 있다가 제4연대 주력이 바투파핫을 공격하면 해안도로를 점령하여 영국군의 퇴로를 차단할 계획이었다.


무아르 강을 지키던 영국군은 제45인도보병여단으로 1942년 1월 3일에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12일에 무아르에 배치된 제45여단은  전투를 치르지 않았으므로 완편 상태였으나 대부분의 병력이 신병으로 이루어져 훈련과 경험이 부족했다. 여단장 허버트 던칸 준장은 제8호주사단장 베넷 소장의 명령에 따라 휘하 대대를 배치했다. 제7/6라지푸트소총대대는 무아르에서 조락까지 14km 의 전선을 지켰고 제4/9자츠대대는 그리섹에서 렝가까지의 24km 를 지켰는데 양 대대는 2개 중대를 다리 너머에 배치하여 유사시 대대가 양분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제5/18왕립갈월소총대대는 예비대로서 바크리 부근에 주둔했는데 1개중대는 심팡제람에 있었고 추가로 파릿자와에 분견대를 파견했다. 

베넷 소장은 제45여단의 배치에서 초심을 잃었다. 제45여단의 원래 임무는 일본군이 무아르 강을 건너 최단거리로 용펭을 점령함으로써 서부부대의 보급로가 차단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런데 베넷 소장은 원래 목적을 잊어버리고 무아르 강에서 남쪽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틀어막으려는 욕심으로 제45여단을 너무 넓게 배치했다.


무아르 시가지는 11일부터 매일 폭격을 받았다. 15일 아침에 일본군이 출격하여 케상-승게마티 지역에 주둔 중이던 라지푸트 소총대대의 2개 중대를 제압했는데 라지푸트 대대본부에서는 강 건너편에 파견한 중대 2개가 전멸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오전 11시에 근위보병제4연대가 무아르 시가지 건너편의 강둑에 나타나 주정 몇 척을 띄우려고 하자 영국군이 포격을 가했다.

영국군의 신경이 온통 제4연대에 쏠려있는 동안 근위보병제5연대는 무아르 강 상류에 몰래 접근했다. 15일 밤 11시에 제5연대 제3대대가 무아르 강에 도달했다. 제3대대는 주변을 샅샅이 뒤져 작은 보트 3척을 찾았다. 보트를 타고 강을 건넌 선발대는 남쪽 강둑에 매어져 있던 원주민들의 좀 더 큰 주정 몇 척을 찾았다. 이 주정을 이용하여 16일 오전 3시까지 제3대대 전체가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는 도중에 인도군 순찰대가 이들을 발견했으나 겁을 먹고 도망쳤다. 황당하게도 이 병사들이 보고도 안하고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영국군은 기습을 당하기 전까지 일본군이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16일 동이 트자 근위보병제5연대 주력이 계속하여 강을 건너는 가운데 제3대대는 남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잠시 후 제3대대는 야영 중이던 제7/6라지푸트대대의 1개 중대를 만나 기습했다. 걸어총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영국군은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이어서 무아르 방면으로 진격하던 일본군은 오전 11시에 심팡제람에 도착하여 갈월대대와 라지푸트 소총대대에서 각각 파견된 2개 중대를 공격했다. 그때서야 상황을 파악한 제45여단장 던칸 준장이 예비대로서 바크리에 주둔 중이던 갈월대대에게 1개 중대를 심팡제람에 보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중대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바크리로 되돌아갔다. 그동안 갈월대대장은 부하를 이끌고 직접 정찰을 나섰다가 일본군을 만나 전사했다.


심팡제람을 지키던 2개 중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일단 막아내었으나 오후 들어 점점 더 많은 일본군이 밀려들었다. 결국 2개 중대는 심팡제람을 포기했다. 갈월중대는 큰 피해를 입고 바크리로 후퇴하던 도중 와해되었고 라지푸트 중대는 무아르로 후퇴했다.


무아르에서는 근위보병제4연대가 16일 오후에 주정을 타고 강을 건너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제65호주야포대가 포격을 가해 주정 1척을 격침하자 나머지는 되돌아갔다. 오후 늦게 근위보병제5연대 일부가 동쪽으로부터 무아르를 공격했다. 동쪽에서 공격해 온 일본군에게 영국군의 주의가 쏠리는 틈을 타서 근위보병제4연대가 무아르 강을 건넜다. 무사히 강을 건넌 제4연대는 무아르 시가지로 진입하여 중대 규모로 약화된 라지푸트 소총대대를 제압하고 대대본부를 점령했다. 라지푸트 대대장과 부대대장이 전사했으며 제65호주야포대를 포함하여 살아남은 영국군은 파릿자와를 거쳐 바크리로 후퇴했다.


그리섹-판초르-조락 지역에 흩어져 있던 자츠대대는 16일 오전에 일본군이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대장은 반격을 위하여 흩어진 휘하 중대들을 무아르-렝가 도로의 12마일 이정표 지점에 집결시켰다.

16일 저녁이 되자 자츠대대를 제외한 제45여단은 무아르 강 전선에서 밀려나 바크리로 후퇴했다. 16일 하루만에 갈월대대는 1개 중대와 대대장을 잃었으며 라지푸트 소총대대에는 장교 2명을 포함하여 122명 밖에 남지 않았다.


무아르가 공격당했다는 보고를 들은 서부부대사령관 베넷 소장은 제27호주여단으로부터 제2/29호주대대를 파견했다. 당시 베넷 소장의 언행을 보면 그가 무아르를 공격한 일본군 병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29호주대대는 1개 중대와 1개 소대가 감편되었으며 대대장 존 로버트슨 중령은 베넷 소장으로부터 적의 병력이 약 200명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실제로는 2개 연대로 이루어진 근위사단 주력이 진격하고 있었다. 제2/29호주대대는 17일 오후에 바크리에 도착하여 시가지 서쪽에 방어선을 폈다.


1월 15일 오후 6시에 말라카를 떠나 해상기동으로 남하한 근위보병제4연대제1대대는 16일 오전 8시에 바투파핫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등대 부근에 상륙하여 근처에 펼쳐진 고무농원에 숨었다. 말레이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바투파핫 남쪽에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보고를 듣자  서부부대의 보급로가 위험하다고 판단했는데 서부부대에는 병력의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퍼시발 중장은 서부부대와 제3군단의 담당 구역을 변경하여 바투파핫을 포함한 서부부대의 보급로를 제3군단의 책임 지역에 넣었다. 동시에 불과 사흘 전에 싱가포르에 도착한 제53영국보병여단(듀크 준장)에게 아예르히탐으로 가서 제3인도군단의 지휘를 받으라고 명령했다.

1월 17일 낮에 제53여단이 아예르히탐에 도착하자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제53여단을 제11사단에 배속했다. 제11사단이 조호르에 도착하자 히스 중장의 명령에 따라 제8여단장이었던 베르톨드 키 준장이 파리스 준장을 이어 사단장이 되었다. 파리스 준장은 원래 직위인 제12여단장으로 돌아가 여단을 재건하기 위하여 싱가포르로 갔다. 키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듀크 여단장은 제2캠브리지셔대대를 바투파핫으로 보내어 영국대대와 교대시켰다. 그리하여 바투파핫을 지키는 병력은 제2캠브리지셔대대, 제3기병연대의 1개 중대, 제1독립중대 및 말레이대대의 1개 중대가 되었다. 제6노퍽대대는 18일 아침일찍 용펭-무아르 도로가 좁아지는 78.5마일 지점에 있는 부킷펠란도와 부킷벨라를 점령하고 2개 소대를 전방에 파견했다. 1개 소대는 파릿술롱의 다리를 지키고 다른 소대는 주변 도로를 순찰했다.


17일에 서부부대사령부에서 베넷 소장, 키 준장 그리고 퍼시발 중장이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세가맛을 포기할 경우 사기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고 반드시 방어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세가맛을 방어하려면 무아르 지역을 지켜야 했다.  따라서 16일에 무아르 지역에서 큰 피해를 입은 제45여단을 강화해야 했다. 베넷 소장은 동해안의 메르싱을 지키던 제22호주여단으로부터 제2/19호주대대(찰스 앤더슨 중령)를 떼내어 제45여단에 배속했다. 대신 제53여단의 제5노퍽대대가 메르싱으로 파견되었다. 제2/19호주대대는 19일 오전 10시에 바크리에 도착했다.


한편 동해안에서는 제22호주여단의 정찰대가 1월 14일부터 엔다우 북쪽에서 일본군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16일과 17일에 엔다우와 메르싱은 폭격을 받았으며 호주 정찰대는 해안에서 일본군이 집결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17일에 제2/19호주대대를 서쪽으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제22호주여단장 테일러 준장은 엔다우를 포기하고 메르싱 강에 기대어 메르싱을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17일 밤에 제22호주여단은 메르싱 강 이남으로 후퇴했다. 호주군은 후퇴하면서 엔다우-메르싱 도로의 모든 다리와 메르싱 강의 모든 선착장을 파괴했다.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19일 아침 6시를 기하여 동해안을 담당하는 동부부대를 창설하고 테일러 준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동부부대는 제22호주여단(제2/18 및 제2/20대대), 제5노퍽대대, 자트/펀자브대대, 제2/17도그라스대대, 조호르의용대 2개 중대, 조호르의용공병대로 이루어졌다. 임무도 바뀌어 동부부대는 메르싱 대신 남쪽의 제말루앙-코타팅기 도로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Posted by 대사(PW)
,

39. 게마스 전투


쿠알라룸푸르를 점령한 1942년 1월 11일자 일본제25군 사령부의 정세판단에 따르면 후퇴 중인 영국군은 싱가포르 섬 이북의 마지막 자연방어선인 무아르 강에 의존하여 조호르를 방어하려고 할 것이었다.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개전 이래 30일 이상 계속 전투를 치러온 제5사단은 셈바란 지역에서 잠시 휴식하면서 제21보병연대를 기다리도록 했다. 그동안 근위사단이 말라카를 공격할 것이었다.  이후 휴식을 취하고 제21연대를 받아들인 제5사단은 간선도로를 따라 사가맛과 클루앙 방면으로 공격할 것이었다. 근위사단은 서해안을 따라 무아르 강과 바투파핫 강을 공격하여 제5사단을 방어하는 영국군의 서쪽 측면을 위협할 것이었다. 동해안에서는 2개 대대로 이루어진 제55연대가 쿠안탄에 주둔 중인 제56연대를 대신하여 남쪽으로 공격하여 엔다우와 메르싱을 점령할 것이었다. 제55연대와 교대한 제56연대는 1월 24일까지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남방군은 제114연대를 중심으로 한 제18사단의 잔여 병력을 엔다우에 상륙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쿠알라룸푸르의 영국군이 예상보다 일찍 철수하고 12일부터 3일간 실시한 공습으로 엔다우 상공에 충분한 제공권을 장악하는데 실패하자 생각을 바꾸었다. 제18사단의 잔여 병력은 22일까지 싱고라에 상륙하여 육로로 조호르까지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야마시타 대장은 조호르에서의 항공작전까지 지원하기에는 일본군 보급로가 포화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는 제55연대가 엔다우를 점령하면 항공유와 폭탄을 엔다우에 직접 상륙시켜 달라고 요청하여 남방군 사령부의 승인을 받았다.

1월 14일에 제5사단 주력은 휴식 및 재정비에 들어갔다. 제5사단은 개전 이래 35일 동안 전투를 치르면서 1월 12일까지 전사 및 실종 349명, 부상 745명, 총 1,094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남쪽으로 철수하는 영국군을 추격하는 임무는 전차제1연대, 보병제42연대제2대대(자전거 탑승), 그리고 약간의 포병과 공병으로 이루어진 무카이데 지대가 맡았다.

 

(말레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152)


서부부대 사령관 베넷 소장은 바투아남-무아르 선에 걸쳐 방어선을 만들었다. 제27호주여단(던칸 맥스웰 준장)은 바투아남 부근에 주 방어선을 펴고 게마스 서쪽의 간선도로에 제2/30호주대대를 파견하여 전방 방어선을 만들었다. 제9사단의 제8여단(윌리엄 레이 준장)도  바투아남 부근의 간선도로를 지켰다. 제22여단(조지 페인터 준장)은 세가맛-말라카 도로를 따라 방어선을 폈다. 이들 3개 여단은 1개 대전차연대 및 3개 야포연대의 지원을 받았다. 제45인도보병여단(허버트 던칸 준장)은 1개 야포대의 지원을 받아 무아르 강을 지키면서 일본군의 상륙을 방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베넷 소장은 일본군의 진격을 느리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매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증명할 장소로 게마스 서쪽의 간선도로를 골랐다. 게마스를 지키던 프레드릭 갈레간 중령의 제2/30호주대대가 더피 대위의 B중대를 게마스 시가지에서 서쪽으로 11km 떨어진 작은 강(게멘체 강)으로 파견했다. 제2/12공병중대가 강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에 폭발물을 설치하는 동안 B 중대는 다리 동쪽의 정글에 몸을 숨겼다. 적의 선두가 다리를 건너면 다리를 끊어 적을 양분한 후 공격할 생각이었다. 강 건너편의 적은 제30야포대 1개 중대의 25파운드 야포 4문이 타격할 것이었다.

14일 오후 4시에 무카이데 지대의 선발대 약 200명이 자전거를 타고 왁자지껄 떠들면서 다리를 건넜다. 더피 대위는 당시 일본군이 전쟁에 나선 군인이 아니라 마치 소풍가는 사람들 같았다고 회고했다. 선발대는 매복 중인 B중대를 발견하지 못한 채 눈앞을 지나갔는데 B 중대는 후방에서 처리하도록 그대로 통과시켰다.

약 20분 후에 오토바이 3대가 인솔하는 수백명의 일본군이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넜다. 일본군의 선두에 선 제2중대가 다리를 건넜을 때 B중대는 다리를 폭파시켰다. 폭음과 함께 다리를 건너던 병사와 자전거가 공중을 날았고 제2중대는 강을 경계로 주력과 분단되었다. 앞서 지나갔던 선발대가 B중대와 제30야포대를 연결되는 전화선을 발견하여 끊어버리는 바람에 강 서쪽의 일본군 주력에 대한 포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강을 건너 약 270m 에 걸친 매복 지대에 들어선 일본제2중대에게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B중대의 기습공격에 대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B 중대는 수류탄을 던진 다음 브렌 경기관총, 토미건, 그리고 소총을 사용하여 도로 위의 일본군을 공격했다. 일본군 일부가 도로 남쪽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피해 북쪽으로 도망쳤지만 더피 대위는 그런 상황에 대비하여 도로 북쪽에도 기관총을 보유한 2개 분대를 배치해 두었다. 일본제2중대는 전투가 시작된 지 몇 분 내로 전멸했다. 70명이 죽고 5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운좋게 총탄을 피한 병사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시체 사이에 쓰러져 꼼짝않고 죽은 척 했다. B 중대의 피해는 전무했다.

전투가 끝나자 B 중대는 강 건너편에 대한 포격이 실시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강 건너편에서 일본군이 증강되는 것을 본 B  중대는 공격을 시작한 지 20분 만에 후퇴했다. 앞서 통과했던 일본군 선발대가 전투의 소음을 듣고 되돌아왔으나 B 중대는 충돌을 피해 소대별로 흩어져 도로 남쪽의 정글을 통하여 대대로 복귀했다. 이로써 대규모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교전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복귀 도중 벌어진 몇 번의 작은 교전에서 B 중대는 7명의 전사 및 실종자와 3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한편 무카이데 지대 주력은 끊어진 다리 주변에서 제재소를 발견하고 그곳에 있던 미리 잘라둔 목재를 가지고 다리를 6시간 만에 복구했다. 따라서 15일 아침까지는 전차를 포함한 병력 전체가 게멘체 강을 건넜다.

 

(11월 14일 현재 제2/30호주대대의 배치상황.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P.212 )


15일 아침부터 무카이데 지대가 게마스 서쪽 6km 지점에 있는 제2/30호주대대의 방어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전 9시에 전차 2대가 라마크래프트 대위의 C 중대가 지키던 바리케이드에 접근하다가 호주군의 대전차포 사격을 받고 도망쳤다. 

잠시 후 전차 2대와 경전차 1대가 접근했다. 2문 밖에 안 되는 대전차포를 지원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A 중대 앞에 방열 중이던 호주군의 25파운더 야포 4문이 사격을 가했다. 야포가 철갑탄을 발사하여 경전차를 맞추자 그대로 뚫고 지나가 버렸다. 고폭탄으로 바꾸어 사격을 가하자 경전차가 불길에 휩싸였고 2번째 전차도 명중탄을 맞고 멈추었다. 3번째 전차가 2번째 전차를 견인하여 도망쳤다. 

그러자 일본군은 보병과 함께 전차 4대를 보냈다. 일본군 보병과 전차들은 불타는 경전차를 방패삼아 사방으로 기관총을 난사하여 호주군을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제2/30대대는 당황하지 않고 대전차포, 야포, 박격포, 그리고 기관총의 화력으로 맞섰다. 대전차포가 전차 3대를 파괴하고 25파운더 야포가 마지막 전차를 파괴했다. 전차를 해치운 야포가 서쪽 도로를 포격하여 일본군의 증원을 막는 사이 박격포와 기관총이 일본군 보병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결국 1시간에 걸친 무카이데 지대의 공격은 실패했다.


(25파운더 야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Ordnance_QF_25-pounder)


일본군의 공격이 멈추자 제2/30호주대대장 갈레간 중령은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멜빌 대위가 지휘하는 D 중대에게 서쪽으로 900m 정도 진격하여 도로 남쪽의 고지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D 중대가 퇴로를 차단하면 정면에서 반격을 가하여 무카이데 지대를 포위섬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고지에 접근한 D 중대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일본군이 전차와 함께 꾸역꾸역 몰려드는 것을 발견했다. 보병제9여단이 전차와 함께 무카이데 지대를 구하러 달려온 것이었다. D 중대는 불과 270m 거리까지 다가온 일본군과 격렬한 총격전을 치르면서 후퇴했으며 와중에 멜빌 대위가 부상을 입었다. 이로써 제2/30호주대대는 감당할 수 없는 전력을 가진 일본군이 몰려오고 있으며 적의 전차 때문에 자칫하면 퇴로마저 끊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5일 저녁에 제2/30호주대대는 게마스를 떠나 바투아남에 있던 제27호주여단에 합류하러 철수했다. 일본군이 오후 10시에 게마스를 점령하고 계속 추격했지만 제30야포대가 도로에 포격을 가하여 일본전차의 추격을 방해했다. 또한 호주군은 후퇴하면서 소규모지만 날카로운 반격을 반복하여 일본군을 놀라게 만들면서 추격 속도를 떨어뜨렸다. 


무카이데 지대가 제2/30호주대대를 공격한 15일에 일본의 경폭격기 9대와 전투기 12대가 5번에 걸쳐 게마스 시가지와 호주군 방어선을 공습했다. 오전에 일본군의 경폭격기 1대가 대대본부를 폭격했다. 본부 밖에 세워져 있던 무선통신트럭이 파괴되었으나 다행히 통신병은 멀쩡했다. 당시 통신병이 발신 중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전파를 포착하여 대대본부의 위치를 알아낸 것이라는 의심이 생겼다. 이러한 의심 때문에 연합군은 그나마 부족한 무전기를 사용하는데 주저하게 되었다. 오후 1시에는 또다른 일본기가 대전차포와 25파운더 야포를 노리고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빗나갔다. 

빈약하나마 영국기도 반격하여 버팔로의 호위를 받는 폭격기 몇 대가 탐핀-게마스 도로에서 일본군의 수송차량 대열을 공습하여 트럭 몇 대를 불태웠다.


제2/30호주대대는 중과부적으로 게마스를 넘겨주기는 했지만 이틀간 무카이데 지대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잘 싸웠다. 무카이데 지대는 전차 6대를 잃고 보병중대장 3명이 전사하는 등 큰 인명피해를 입었는데 사상자가 1,000명을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호주군의 인명피해는 전사 및 실종 26명, 부상 55명이었다. 게마스 전투는 말레이 전역에서 드물게 연합군이 선전한 전투였다. 다만 아쉬운 점은 호주대대가 보유했던 대전차포 2문과 야포 4문을 브렌건캐리어로 끌면서 후퇴하다가 진창에 빠지는 바람에 25파운더 야포 1문을 제외하고 모두 포기한 것이었다.

Posted by 대사(PW)
,

38. 쿠알라룸푸르 함락


1942년 1월 4일에 제8호주사단장 고든 베넷 소장이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에게 제안을 했다. 제3인도군단이 남하하여 조호르에 진입할 경우 자신의 지휘 아래 두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제8호주사단이 일본군 주력이 남진 중인 조호르 서부를 맡고 제3군단이 조호르 동부를 맡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퍼시발 중장은 제3군단과 제8호주사단의 결합이 지휘 및 행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낳을 것이며 전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말레이 반도를 가로질러 동서로 대규모 부대이동을 실시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베넷 소장의 제안을 거부했다.

다음날인 1월 5일에 퍼시발 중장, 히스 중장, 그리고 베넷 소장이 세가맛에서 회담했다. 참석자들은 쿠알라룸푸르를 잃으면 방어선을 메르싱-세가맛-무아르 선까지 단번에 끌어내려야 한다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 중간에는 도로망이 발달하여 일본군의 전차가 쉽게 방어선을 우회할 수 있었다. 다만 쿠안탄을 지키던 제9사단의 철수를 위하여 제3군단은 쿠알라룸푸르 지역을 1월 14일까지는 유지해야 했다. 퍼시발 중장은 이를 위하여 제45여단을 제3군단에 배속했다. 제45여단은 1월 3일에 싱가포르에 도착한 후 말라카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3군단은 일본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후퇴하여 조호르 서부를 방어하고 제8호주사단은 조호르 동부를 맡을 것이었다.


이 회의의 결과를 가지고 히스 중장은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에게 다음과 같이 날짜별로 후퇴 가능한 선을 제시했다. 

1월 10일 : 쿠알라쿠부, 14일 : 울루얌, 16일 : 세렌다, 21일 : 세렘반-포트딕슨, 24일 : 탐핀

물론 이 시간표는 지켜질 수 없었다.


(말레이.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152)


서부 조호르로 남하할 일본군 주력과의 전투를 자신이 지휘하겠다는 베넷 소장의 제안은 다른 경로로 실현되었다. 슬림강 전선이 붕괴한 7일에 ABDA 최고사령관 웨이벌 대장이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슬림강 패배의 보고를 들은 웨이벌 대장은 제3군단이 지속적인 전투임무를 감당할 수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웨이벌 대장은 제3군단에게 쿠알라룸푸르를 최대한 오래 방어하되 일본군이 총공격을 실시하기 전에 도로와 철도를 사용하여 단번에 조호르 남부까지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3군단은 철수하기 전에 일본군의 진격을 최대한 늦추기 위하여 보유한 모든 폭약을 사용하여 다리와 도로를 철저히 파괴할 것이었다. 조호르에서 일본군의 주공을 저지하는 임무는 베넷 소장이 맡고 제3군단은 후방에서 휴식과 재편성을 실시할 것이었다. 동부 말레이에서 철수하는 제9인도사단과 1월 3일에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말라카에 주둔 중인 제45여단은 베넷 소장의 지휘를 받을 것이었다. 이러한 웨이벌 대장의 명령은 4일에 베넷 소장이 퍼시발 중장에게 제안한 내용과 비슷했다.


웨이벌 대장의 명령에 따라 퍼시발 중장은 히스 중장 및 베넷 소장과 일련의 회의를 거친 후 1월 10일에 다음과 같은 세부 명령을 내렸다.


1. 제8호주사단장 고든 베넷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서부부대(Westforce)를 창설한다. 서부부대는 제8호주사단, 제9사단(제8 및 제22인도여단) 및 제45여단으로 이루어져 바투아남-무아르 선을 따라 조호르의 서북부를 방어한다.

2. 제3인도군단은 엔다우-클루앙-바투파핫을 잇는 도로와 그 남쪽인 조호르의 서남부와 동부를 방어하면서 휴식과 재편성을 실시한다. 동해안 메르싱에 주둔 중인 제22호주여단은 제3군단 휘하에 들어간다.

3. 제11사단(제15 및 제28여단)은 조호르에 주둔하면서 휴식과 재편성을 실시한다. 제12여단은 싱가포르 섬으로 철수하여 재편성 및 재무장을 실시한다.


영국군이 조호르 방어계획을 짜는 동안 일본군도 조호르 점령을 위하여 일선으로 증원부대를 보내고 있었다. 1월 8일에 제5사단 보병제21연대가 많은 행정부대와 함께 싱고라에 상륙했다. 근위보병제5연대는 태국을 떠나 10일에 이포에 도착했다. 남방군 사령부는 보병제114연대를 중심으로 한 제18사단의 잔여 부대를 1월 말까지 엔다우에 상륙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해군은 아남바스 제도를 점령하여 전진 기지로 사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42년 1월의 전반기 동안 말레이에 전개한 일본기들은 제11인도사단을 공격하고 제3인도군단의 보급로를 공습했다. 이러한 공습으로 인한 직접 피해는 가벼웠으나 병사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사기를 떨어뜨려 제3군단의 패배에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이때 일본군은 전투기의 호위없이 폭격기만으로 공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공습 규모는 주로 3-4대 정도로 작은 편이었다. 또한 공습 목표를 상급 부대에서 일관된 원칙에 따라 선정하지 않고 조종사들이 즉석에서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서 결정적인 전과를 올리기가 어려웠다. 이는 영국군에게 그나마 다행으로서 웨이벌 대장은 만일 일본군이 제공권을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했더라면 제3군단이 1942년 1월 전반기에 붕괴했을 것으로 보았다.

소규모의 영국 및 네덜란드 공군은 제3군단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1월 7일에 싱고라의 정박지와 철도 조차장을 폭격했으며 이포, 승게파타니 및 쿠안탄 비행장에 대해 소규모 공습을 반복했다.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섬에 대한 사진정찰과 함께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말레이 동해안과 북수마트라에 대한 정찰도 매일 실시했다.


일본군은 1월 둘째주부터 영국군 항공력을 말살하기 위하여 싱가포르 섬에 대한 폭격을 강화했다. 연합군의 버팔로 전투기가 일본기를 잡으려면 7,200m 상공에서 대기하다가 기습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30분 전에 경보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빠른 전진으로 전방 관측소가 남쪽으로 밀려나고 레이더 성능은 아직 미흡하여 공습 30분 전에 경보하기는 어려웠다.

대공포의 대응도 한계가 있었다. 일본기는 대공포를 피해 주로 6,000m 높이에서 폭격했는데 이 고도까지 포탄을 쏘아올릴 수 있는 3.7인치 대공포는 40문이 채 되지 않았다.

1월 12일 오전 10시에 일본제12비행단의 전투기 71대가 호위하는 제7비행단의 중폭격기 68대가 텡가 비행장을 폭격했다. 제488네덜란드전투비행대대의 버팔로 8대가 날아올라 압도적인 열세를 딛고 요격을 실시했으나 일본기를 격추하는데 실패했다. 오후 2시 30분에 제12비행단의 전투기 70대가 날아와 셀레타 비행장을 기총소사했다. 네덜란드의 버팔로가 다시 요격하여 1대를 격추했다. 이날 하루동안 버팔로 2대가 격추되고 5대가 손상을 입었다. 조종사 중 전사자는 없었으며 부상자는 3명이었다.

13일에는 전투기 20대의 호위를 받는 80대의 일본해군폭격기가 싱가포르를 공습했다. 마침 증원군을 실은 호송선단이 싱가포르로 접근하고 있었으나 상공에 구름이 끼어 발각되지 않았다. 일본기는 구름 위에서 어림잡아 폭탄을 던졌는데 대부분 바다에 떨어졌으나 일부가 시가지에 떨어져 민간인 약 200명이 죽었다. 버팔로 20대가 요격했으나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3대가 격추되었다.

호송선단은 최대한 빨리 하역을 실시한 후 싱가포르를 떠났다. 제18사단의 제53보병여단, 제6중대공포연대, 제35경대공포연대, 제85대전차연대가 상륙했다. 또한 상자에 포장된 허리케인 전투기 51대와 조종사 24명도 상륙했다. 허리케인은 최대한 빨리 조립한 다음 비행장으로 보내 비행시험을 실시했다. 영국군은 허리케인을 사용하여 중부 말레이에서 제공권을 잡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동안 중부 말레이에서는 쿠알라룸푸르의 함락이 눈 앞에 다가왔다. 슬림 강에서 대패하여 탄종말림을 포기하고 쿠알라룸푸르 북방까지 밀려난 제11사단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제12여단은 와해되었고 제28여단 또한 큰 피해를 입었으므로 셀랑고르를 지키던 제15여단이 간선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일본군 주력을 막아야 했다.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제11사단에게 10일 밤까지 쿠알라룸푸르를 방어한 후 11일 0시를 기하여 쿠알라룸푸르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세렘반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제11사단장 파리스 준장은 쿠알라룸푸르 주변의 방어구역을 3개 지구로 나누었다. 간선도로지구는 제3/17도그라스대대를 증원받은 제28여단이 담당했다. 바탕베르준타이-라왕 도로를 포함한 중앙지구는 제22여단으로부터 제5/11시크대대를 증원받은 제15여단이 맡았다. 해안지구는 자트/펀자브대대와 제3기병연대가 담당했다. 제15여단과 제28여단은 담당 지구를 10일 오후 4시까지 지킨 다음 쿠알라룸푸르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후 쿠알라룸푸르를 10일 자정까지 지킨 다음 11일 0시부터 차량으로 철수할 것이었다.


일본군은 슬림강 전투에서 대승한 여세를 몰아 추격했다. 제5사단장 마츠이 다쿠로 중장은 전투에 지친 보병제42연대 대신 와타나베 츠나히코 대좌의 보병제11연대를 선두에 세웠다. 보병제11연대는 8일 오후 4시에 제11인도사단 사령부가 있던 탄종말림을 점령한 후 남하하여 10일 아침부터 중앙지구와 간선도로지구의 영국군 방어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15 및 제28인도보병여단은 일본제11연대의 강력한 공격에 맞서 10일 오후 4시까지 담당 지구를 방어한 다음 쿠알라룸푸르로 철수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제15여단의 제1/14펀자브대대와 제28여단의 제3/17도그라스대대가 전멸했다. 일본제11연대는 11일 오전 6시에 라왕을 점령한 다음 쿠알라룸푸르를 향하여 전진했다. 영국제11사단은 11일 0시부터 쿠알라룸푸르에서 철수를 시작하여 마지막 부대가 11일 오후에 쿠알라룸푸르 남쪽의 카장을 통과하여 철수했다.


해안지구에서는 7일 오전 3시에 이포를 출발한 근위보병제4연대가 클랑을 노리고 남하했다. 제4연대는 9일 밤에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셀랑고르 강을 건넜다. 셀랑고르에서 제4연대제3대대는 주정을 타고 남쪽으로 향했고 제4연대 주력은 동진하여 10일 오후가 되자 클랑 부근에 걸린 다리에 도착했다. 다리는 자트/펀자브대대장 찰스 테스터 소령이 이끄는 영국군이 지키고 있었다.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자트/펀자브대대, 제3기병연대, 그리고 제73야포대로 이루어진 영국군은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에 맞서 다리를 지켰다. 오후 4시 30분이 되자 일본군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영국군이 동쪽 바투티가 방면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추격하여 밤까지 격전이 벌어졌으며 영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11일 오전 1시에 바투티가에 도착했을 때 영국군의 병력은 약 200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들은 바투티가에서 버스를 타고 카장을 거쳐 남쪽으로 철수했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제4연대가 11일 정오에 클랑을 점령했다.

셀랑고르에서 주정에 타고 남쪽으로 향한 제4연대제3대대는 포트스웨튼햄 앞바다를 지나 11일 오후 5시 30분에 마리브에 상륙했다. 제3대대는 제11인도사단의 퇴로를 막기 위하여 쿠알라룸푸르 남쪽의 카장으로 돌진했다. 일본군은 11일 오후 9시에 카장을 점령했는데 몇 시간 전에 영국군의 마지막 부대가 통과한 후였다.


쿠알라룸푸르를 지키던 영국군이 철수하자 보병제11연대가 11일 오후 4시 30분에 쿠알라룸푸르 북쪽에 도달했고 오후 8시에 시가지로 진입하여 관공서를 점령했다. 다음날 제5사단장 마츠이 다쿠로 중장이 쿠알라룸푸르에 사령부를 차렸다. 말레이연방의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를 점령함으로써 제25군의 제1단계 작전이 끝났다.


제3인도군단과 북부 말레이에서 활동하던 영국항공부대의 근거지였던 쿠알라룸푸르에는 막대한 양의 보급품이 있었다. 영국군은 최대한 많은 보급품을 철도나 도로를 통하여 싱가포르로 빼돌렸으며 그러지 못한 보급품은 파괴했다. 쿠알라룸푸르와 포트스웨튼햄에 있던 막대한 양의 석유를 태우는 연기가 하늘을 메웠고 비행장의 건물들은 파괴되었으며 활주로에는 구멍이 뚫렸다.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슬림강에서의 패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여 막대한 보급품이 일본군 손에 들어갔다.


제3군단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지 않고 철수를 계속하여 13일에는 후위부대가 탐핀에 도착했다. 제3군단은 13일 밤까지 서부부대의 방어선을 통과하여 클루앙-렝감 지역으로 후퇴했다.

동부 말레이를 지키던 제9인도사단은 슬림강 패배 이후 예정보다 빨리 서부 말레이로 철수했다. 11일에 제9사단의 선두인 제8여단이 기차를 타고 바투아남에 도착했으며 12일에는 사단 주력이 탐핀에 도착하여 서부부대사령관 고든 베넷 소장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이제 서부부대가 제3군단을 대신하여 북부 조호르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