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삼국 동맹
미함대의 훈련이 진행되던 1940년 4월에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대해 석유 수출을 포함한 통상 조약을 맺자고 추근대면서 압력을 넣었다.
미국의 헐 국무장관이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대하여 경고하자 일본은 조약 체결에서 물러서는 대신 고압적인 태도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구매 사절단을 보냈다.
독일군은 1940년 5월 10일에 프랑스를 침공했고 프랑스는 6주 만인 6월 22일에 항복했다.
유럽 제일의 육군 대국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프랑스의 어이없는 참패는 미국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당장 일본이 이 기회를 어떻게 살리려고 할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프랑스의 패색이 짙어진 6월 7일,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대장은 하와이에
'서쪽에서 대양을 건너오는 호전적인 국가의 공격'
에 주의하라고 경고했고 리처드슨 제독은 오아후 서쪽 해상에 대하여 항공초계를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육군의 장비를 몽땅 잃어버리고 병력만 간신히 빼내온 영국은 독일의 침공 위협에 노출되었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던 영국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해 1940년 7월 18일에 중국으로 통하는 버마로드를 폐쇄했다.
이로써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는 프랑스령 북부 인도차이나의 하노이 항만이 남게 되었다.
영국본토항공전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자 영국은 버마로드를 재개통했다.
독일이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석권하자 일본에게는 손쉬운 정복의 기회가 열렸다.
중일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본국이 함락되어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는 먹음직스러운 먹이였다.
이제 독일이 자신의 강력함을 증명하자 연합국 측에 호의적이었던 일본해군의 고위 장교들 사이에서도 연합국과의 충돌 가능성을 무릅쓰고 남방으로 진출하고픈 욕망이 커졌다.
프랑스가 항복한 1940년 6월 22일에 일본에서는 제2차 고노에 내각이 성립되었다.
육상으로 도조 히데키 중장이 입각했고 외상은 친독파인 마츠오카 요스케가 맡았다.
10대 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마츠오카 외상은 당시 일본인 중에서는 영어가 능숙했고 미국과 미국인을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한정된 경험으로 미국과 미국인을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마츠오카가 아는 미국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을 피하려고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고노에 내각 아래에서 일본의 전체주의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정부는 경제의 큰 부분을 이루는 재벌에게 특혜를 주면서 유착하여 거의 지배했다.
정당은 해체되어 대정익찬회로 통합되었고, 노동 운동은 탄압을 받았으며, 국민들은 근검절약을 강요받았다.
1940년 8월 30일, 프랑스의 페탱 정부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북부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의 진주를 용인했다.
일본군의 북부 인도차이나 진주는 미국이 주장하던 동남아시아의 현상유지 정책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미국은 대단히 불쾌했지만 남방으로의 진출이라기보다는 중국전선을 지원하기 위한 의도라고 보았기 때문에 즉각 행동하지는 않았다.
이로써 장제스 정권은 외부와 통하는 유일한 항구인 하노이 항을 잃었다.
1940년 9월 27일,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조약을 체결함으로서 공식적으로 추축진영에 가담했다.
일본은 독일 주도의 '유럽 신질서'를 지지했으며 독일과 이탈리아는 일본 주도의 '대동아 신질서'를 지지했다.
또한 삼국 중 누군가 유럽전쟁과 중일전쟁에 참가하고 있지 않은 세력의 공격을 받으면 서로 돕기로 했는데 이는 공공연히 미국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 조항이 나중에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는 근거가 된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양면전쟁의 위협을 가하여 미국을 중립상태로 묶어 둘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일본 또한 삼국동맹으로 미국의 배후에 위협을 가함으로써 미국이 일본의 팽창정책에 간섭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비록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만 태생을 보나, 정치 형태를 보나, 국민들의 정서를 보나 추축진영을 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삼국동맹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추축 진영으로서 독일 및 이탈리아와 한배를 타게 되었고 이제 미국으로부터는 확실한 적으로 분류되었다.
(삼국동맹조약 조인식. http://en.wikipedia.org/wiki/Tripartite_Pact)
고노에 수상은 삼국동맹을 내켜하지 않았으나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마츠오카 외상에게 밀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지 못했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삼국동맹을 반대했다.
그는 삼국동맹조약 체결 직후 고노에 수상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저는 만일 뒷일을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싸우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6개월이나 1년은 마음껏 설칠 자신이 있으나 2년, 3년째는 전혀 자신이 없습니다. 삼국동맹은 이미 체결되어 이제는 손 쓸 도리가 없습니다. 총리께서는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함대 총사령관 제임스 리처드슨 대장은 위에서 시킨다고 고분고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침공하건 말건 아시아 문제는 미국이 신경쓸 일이 아니었으며 미해군은 본토를 지키는데 집중해야 했다.
리처드슨 대장은 보급과 정비 문제 때문에 진주만을 싫어했다.
진주만을 모항으로 하는 함대에 보급하기 위해서 수송함들이 미서해안으로부터 3,000km 넘는 거리를 쓸데없이 왕복해야 했다.
연료의 비축량이 모자라서 함대는 마음껏 훈련할 수 없었으며 장비와 보급품의 수급에도 지장을 받았고 수병을 모집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미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하와이에 근무하게 된 장병들은 사기가 떨어졌다.
호놀룰루에는 백인 여성이 거의 없고 상점이나 식당의 여자 종업원들도 미본토의 예쁜 백인 여자 종업원들보다 못 생긴데다가 불친절해서 수병들이 싫어했다.
리처드슨 제독이 생각하기에 일본과의 전쟁이 임박할 경우 함대는 진주만보다는 시설이 좋고 수병들의 충원이 용이한 미본토 서해안에서 전쟁준비를 더 잘 갖출 수 있었다.
진주만으로 옮긴 직후부터 리처드슨 제독은 해군 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에게 함대를 미본토 서해안으로 철수시켜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으나 묵살당했다.
그러자 그는 1940년 7월과 10월에 워싱턴으로 날아가 국무부와 의회를 포함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함대가 미본토 서해안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0월 8일에 리처드슨 제독을 불러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함대가 하와이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일본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이 견해는 헐 국무장관도 동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리처드슨 제독이 계속 의원들을 만나 함대의 서해안 철수를 주장하고 다니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해임해 버렸다.
뻣뻣한 리처드슨 제독의 태도에 화가 난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투부대를 태평양함대로, 정찰부대를 대서양함대로 만들고 상징성이 큰 명칭인 미함대 사령관직을 폐지해 버렸다.
미함대 사령관직은 전쟁이 터진 이후에 부활한다.
태평양함대 사령관은 젊은 장성 중에서 뽑기로 했다.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는 소장파 장교 중에서 유능하다고 손꼽히는 2명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추천했다.
항해국장 체스터 니미츠 소장과 전투부대 순양함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소장이었다.
녹스 장관은 니미츠 소장을 염두에 두고 의사를 타진해 보았으나 뜻밖에도 사양했다.
이유는 50명이 넘는 선배들을 제치고 그런 중요한 자리에 가게 되면 질시에 휩싸이고 그러면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태평양함대 사령관 자리는 니미츠 소장의 3년 선배인 허즈번드 킴멜 소장에게 돌아갔다.
킴멜 소장은 1941년 2월 1일에 임시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사령관으로 취임했고 킴멜 제독의 취임과 함께 전투부대는 태평양함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허즈번드 킴멜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만일 전투부대를 진주만에서 미본토 서해안으로 철수시키자는 리처드슨 제독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면 태평양함대는 진주만 기습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야마모토 제독이라도 미본토 서해안까지 항공모함들을 끌고 와서 미함대를 기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리처드슨 제독이 진주만을 싫어한 까닭이 적의 항공공격에 대한 우려라기보다는 주로 보급과 후방지원 문제였기 때문에 그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태평양함대의 주력이 진주만에 전진배치된 일은 전쟁 초반에 기습을 당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는 원인이 되었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덕분에 진주만의 급속한 개발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1940년 5월부터 태평양 함대가 주둔한 이래 1년 만에 진주만의 해군공창에 근무하는 민간인의 수가 2배로 늘었고 해군 소속의 인원은 몇 배로 늘었다.
공창을 확장하기 위하여 드넓은 땅을 매입하는데 예산이 아낌없이 투입되었다.
공창에서 일하는 해군과 민간인의 숙소가 건설되고 새로운 건선거가 만들어지고 넓은 대지에 주물공장, 기계공장 및 공구공장이 들어서면서 진주만은 본토의 대기지와 맞먹는 함선 수리 및 정비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진주만 기습 이후의 복구 과정이나 미드웨이 해전 당시 요크타운의 수리를 비롯하여 전쟁의 여러 국면에서 진주만의 뛰어난 함선 수리 및 정비 능력은 큰 도움이 되었다.
진주만이 짧은 시간에 대규모로 개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태평양 함대의 모항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태평양 함대가 미본토 서해안으로 돌아가 버렸으면 진주만의 개발은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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