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경제 제재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래 미국은 극동 지역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미국은 일본에게 정복에 필요한 물자들을 팔면서 극동에서의 침략에 반대하고 있었고,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방대한 양의 강철, 석유, 그리고 전략 물자들을 구매하여 미군에 대항할 전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러한 딜레마는 군사력을 키울 시간을 벌기 위하여 불가피한 것이었다.

미국이 석유를 비롯한 전략물자의 수출을 중단하면 일본은 영령 말레이 반도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침공할 것이 분명했는데 미국은 군사력을 충분히 키우기 전에 그런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최초의 경제 제재는 1938년 7월부터 실시된 도덕적 금수조치(moral embargo) 로서 민간인을 폭격하는 국가에 대한 항공기와  관련 부품의 수출을 금지한 것이었다.

1940년 들어서면서 미국 내에서 일본에게 경제 제재를 가하라는 압력이 높아졌다.

1940년 2월 초에 네바다 출신의 피트먼 상원의원은 일본에 대한 전쟁 물자의 수출 금지를 요구했는데 이는 여론을 반영한 것이었다.

2월 14일에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유권자의 75%가 무기, 항공기, 휘발유 및 기타 전쟁물자에 대한 금수조치에 찬성했다.

그러나 과격한 금수조치가 전쟁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루스벨트 행정부는 금수 조치를 실시하되 점진적으로, 또한 일본을 덜 자극하는 방식으로 실시하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940년 6월에 프랑스가 독일에게 무릎을 꿇자 충격을 받은 미의회는 7월에 "국가 방위의 강화를 촉진하기 위한 법안"("Act to Expedite the Strengthening of the National Defense"), 줄여서 국가방위법(National Defense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대통령에게 별다른 전제 조건 없이 단지 국가 방위에 필요하다는 판단만으로 특정 국가에 대해 군사장비나 탄약 뿐만 아니라  전쟁물자의 생산에 필요한 기계나 공구, 또는 작전에 필요한 물자나 보급품 등 광범위한 물품의 수출을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가방위법이 부여한 권한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그는 금수조치를 단행하면서 영연방, 중국,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그리고 유럽의 저항세력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을 모두 대상에 넣어 버렸다.

따라서 실제로는 일본에게 금수조치를 취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몇몇 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 금수조치를 실행하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일본 정부의 체면을 세워 주어 반발할 여지를 최소화시켰다.

 

이런 식으로 단행된 금수조치는 다음과 같다.

 

1940년 7월 5일 : 다양한 금속과 화학물질, 항공기의 엔진, 부품 및 장비

1940년 7월 26일 : 항공기 연료와 윤활유, 일부 종류의 고철

1940년 9월 30일 : 모든 종류의 고철

 

이러한 금수 조치는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10월 20일에 실시된 갤럽 여론조사에서 미국 유권자의 90%가 정부의 조치에 찬성했으며 더 나아가 96% 가 모든 전쟁물자에 대한 완전한 금수조치를 요구했다.

 

일본은 금수조치가 지난 수년간 미국 고철의 중요한 소비자였던 일본에 대한 비우호적인 행동이라고 항의했다.

일본대사가 국무성에 찾아와 구두로 이런 의사를 전달하자 헐 국무장관은 다음과 같이 맞받아쳤다고 한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있는데 중립을 지키는 또다른 나라가 침략국에게 열광하면서 정복에 필요한 물자를 팔지 않았다고 해서 비우호적인 행동으로 비난받아야 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소."

 

(코델 헐 국무장관.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0년 12월 10일과 1941년 1월 10일에 미국이 추가로 금속, 철광석, 그리고 공작기계에  대하여 금수 조치를 단행하자 일본의 반발이 심해졌다.

조셉 그루 주일 대사는 1941년 1월 말에 국무성에 보낸 보고서에서 만일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도쿄 시내에 돌아다닌다고 적었다.

국무성은 이 내용을 해군에 통보했으나 해군 정보기구는 신빙성이 낮다고 보았다.

사실 이때는 야마모토 제독이 진주만 기습 계획을 짜기 시작할 때였다.

 

일본은 급속히 진행되는 미국과의 관계 악화 속도를 다소나마 늦추고자 1941년 1월 말에 미국 측에서 호감을 가지고 있고 외상을 맡은 적이 있는 거물급 외교관인 노무라 기치사부로 제독을 주미대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일본은 노무라 대사의 임명과 동시에 마셜 제도와 캐럴라인 제도에 비행장, 수상기 기지 및 요새 등을 지으면서 급속히 군사기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여 미국과의 전쟁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일본은 타이를 끌어들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전략을 쓰고 있었다.

타이 정부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빼앗긴 자신들의 영토를 돌려달라면서 분쟁을 일으켰고 일본은 중재한다는 명목으로 끼어들었다.

그 결과 1941년 3월에 타이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영토 일부를 가져갔고 일본은 나머지 지역들을 타이로부터 지켜 주었다는 공을 내세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쌀에 대한 독점 수입권과 함께 사이공 비행장을 얻었다.

사이공 비행장을 출격한 일본기는 싱가포르를 폭격할 수 있었다.

 

일본이 계속 남진하자 미국의 여론은 전쟁 불사를 외칠 정도로 악화되었다.

1941년 3월 10일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미국 유권자들 중 일본과의 전쟁을 지지하는 비율이 처음으로 절반을 넘는 51%로 나타났다.

전쟁 반대는 31%였으며 18% 는 대답을 유보했다.

다음날 최초의 렌드리스 안이 법률로 성립되었다.

 

일본에 대한 여론은 계속 나빠져 5월 초에는 70%의 유권자가 전쟁에 찬성하고 18%가 반대하여 전쟁 지지율이 최고를 기록했으며 이후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진주만 기습 3주 전인 1941년 11월 12일의 여론조사에서 전쟁 지지율은 다소 떨어져 64% 였고 반대는 다소 올라가 25% 가 되었다.

 

1941년 4월 13일에 일본외상 마츠오카와 소련외상 몰로토프 사이에 일소중립조약이 조인되었다.

이로써 독일의 침공을 예상하고 있던 스탈린은 배후의 위험을 없앴으며 일본 또한 만주에 주둔시킬 병력을 남방작전에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1941년 전반기 동안 일본은 북부 인도차이나에 병력을 증강시켜 여차하면 인도차이나 전역을 석권할 태세를 갖추었다.

7월 2일, 일본정부는 100 만명 이상의 병력을 징집하고 대서양에 나가있던 자국의 상선들을 불러들이는 등 임박한 전쟁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1년 7월 25일, 일본 외무성은 그루 주일대사에게 비시 정부가 일본군에게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허용했다고 통보했다.

일본군이 곧 남부 인도차이나로 쏟아져 들어가 인도차이나 전역을 차지함으로써 이제 일본은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필리핀의 코 앞까지 도달했다.

 

북부 인도차이나 진출 때까지만 해도 중일 전쟁의 연장선이라고 자위하며 억지로 참았던 루스벨트 행정부는 일본이 남부 인도차이나까지 진출하자 인내심이 바닥났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과의 전쟁 위험을 무릅쓰기로 결심했다.

 

미국의 반응은 재빨랐으며 말보다 주먹이 앞섰다.

일본의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가 결정된 바로 다음날인 1941년 7월 26일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석유를 포함한 미국과 일본 사이의 모든 교역을 금지하고 미국 내의 일본 자산을 동결했다.

미국 항구에 정박 중이던 일본 선박은 8월 1일 이전에 모든 화물을 내려놓고 항구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일본의 모든 선박은 화물을 싣거나 내리기 위하여 미국 항구에 들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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