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석유 문제

 

1941년 7월 26일에 전면적 금수 조치가 떨어지기 전까지 일본에 대하여 수출이 금지되고 있던 석유 제품은 1년 전인 1940년 7월 26일에 금수 품목으로 묶인 항공기용 고옥탄가 휘발유와 항공기용 윤활유가 모두였다.

정부의 눈치를 보던 미국 해운사들은 자율 규제 형식으로 중유나 원유를 포함하여 모든 석유 제품을 일본으로 운송하지 않고 있었으나 일본은 자국이나 중립국의 유조선을 사용하여 막대한 양의 석유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해 갔다. 

이제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해졌다.

 

영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도 곧 미국을 따라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중단하고 자산을 동결했다.

다만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는 현찰 지급을 조건으로 이미 계약한 물량의 선적은 허용했다.

그러나 많은 현금을 미국 은행에 예치하고 있던 일본 기업들은 자산이 동결되면서 석유 대금을 결제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결국 선장이 일본에 가서 힘들게 현금을 구해오는 동안 일본 유조선들은 보르네오나 수마트라의 항구에 몇 주씩 발이 묶여 있어야만 했다.

 

석유 금수 조치가 발동되면서 미국이나 일본 중 어느 한 국가가 물러서지 않는 한 전쟁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미국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인내심이 바닥난 루스벨트 행정부는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다시 일본과의 교역을 허락하고 자산을 풀어주어 일본의 침략을 방조할 생각이 없었다.

 

(프랭클린 댈러노 루스벨트 대통령.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 정부가 군부를 설득하여 중국에서 철수할 준비를 시작하는 동시에 남방으로 진출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다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일본군부 또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영국이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에게 고전 중이고, 네덜란드는 항복하여 동인도 제도가 고아 신세가 되고,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을 격파하여 만주에 대한 위협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석유가 펑펑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차지하여 일본의 숙명적인 아킬레스 건인 석유 문제를 영구히 해결할 기회로 보았다. 

미국의 석유 금수 조치로 자신들의 처지가 얼마나 허약한지 깨달은 일본군부에게 일시적으로 양보하여 파국을 막자는 일각의 목소리는 앞으로 정복에 나설 때마다 미국에게 허락을 구하자는 소리와 마찬가지로 들렸다.

 

일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석유 수입이 끊긴 상태로 시간을 끌다보면 경제가 망가질 뿐 아니라 연료가 없어서 막상 전쟁이 벌어졌을 때 함대는 항구에 머물러야 할 것이고 비행기는 뜰 수 없을 것이었다.

석유금수조치 이후 일본은 자신의 꼬리를 잘라먹으면서 연명하고 있었다.

 

일본은 자체적으로 석유를 조달하기 위하여 곳곳에 시추를 하고 1937년부터 인조 석유 생산을 늘리려고 노력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1941년에 일본이 채굴한 석유는 190만 배럴, 합성한 석유는 120만 배럴로 합계 310만 배럴이었는데 이것은 소비량의 12% 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88% 는 수입했는데 수입 물량의 약 80%를 미국으로부터 들여왔다.

 

일본은 전쟁을 앞둔 몇 해동안 가능한 한 많은 석유를 수입했다.

석유 수입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40년 4월 1일 - 1941년 3월 31일 사이의 1년 동안 일본은 원유 2,285만 배럴과 각종 정제유 1,511만 배럴을 수입했는데 이는 일본이 1년간 전쟁을 치르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그 결과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이 비축한 석유의 양은 해군 650만톤, 육군 120만톤, 민간 70만톤으로 합계 840만톤이었다.

이것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약 1년 6개월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양이었다.

(원유 톤수에 7을 곱하면 대략적인 배럴이 나온다. 중유는 6.7, 휘발유는 8.5를 곱하변 대략적인 배럴을 구할 수 있다.)

 

고무, 고철, 주석, 텅스텐 등의 전략물자는 중요하다.

그러나 석유는 필수적이었다.

부족한 인조 석유 생산 능력을 고려할 때 석유 수입이 끊긴 일본은 석유를 찾아 침략을 강행할 도리 밖에 없었는데 루스벨트 행정부는 석유를 끊어버렸다.

미국인들은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일본을 석유와 고철로 달래는데 지쳤고, 석유 금수 조치는 미국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 대중들은 석유 금수 조치가 필연적으로 가져올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석유 수입이 끊긴 일본은 석유가 풍부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점령할 것이었다. 

미국으로서는 그걸 막기 위하여 일본과 전쟁을 하든지 아니면 손쉽게 산유 지대를 손에 넣어 엄청나게 강력해진 일본과 마주해야 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그 사실을 솔직하게 설명할 수 없었으나 석유금수조치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제 미국과 일본은 전쟁준비에 한층 열을 올렸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석유 금수 조치를 발표한 당일인 1941년 7월 26일에 필리핀 군을 정식으로 미군에 편입시키고 필리핀 육군 원수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현역 미육군대장의 계급으로 극동지역미군사령관(Commanding General United States Army Far East)에 임명했다.

전쟁에 대비한 산업계의 동원도 더욱 빨라졌다.

 

일본도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대본영과 연합함대에서는 군사 전략가들이 말레이 반도, 필리핀, 홍콩, 북부 보르네오, 괌, 웨이크,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진주만에 대한 공격계획을 작성하고 다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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