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바탄 섬 상륙과 아파리 및 비간 상륙부대 발진


일본군은 필리핀의 미국 항공력과 해군력을 제거하기 전에 선견부대를 상륙시켰다. 도쿄시간 12월 7일 저녁에 북부 루손을 향하는 2개 부대가 펑후 제도를, 그리고 루손에서 북쪽으로 240km 떨어진 바탄 섬에 상륙할 부대가 대만 남단의 가오슝을 떠났다. 다음날에는 루손 남동쪽 레가스피에 상륙할 부대가 팔라우 제도를 떠났고 며칠 후에는 민다나오의 중심도시 다바오에 상륙할 부대가 팔라우를 떠났다.


(일본선견부대의 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6.html P.99)


선견부대의 상륙지역은 바탄 섬, 아파리, 비간, 레가스피, 다바오, 그리고 홀로제도였다. 앞의 4곳은 주력의 상륙을 앞두고 가까운 곳에 비행장을 확보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미국 항공력을 공격하고 상륙한 일본군을 지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레가스피 상륙은 이외에도 루손과 사마르 사이의 샌 베르나디노 해협을 제압하여 미군이 남쪽으로부터 루손에 증원군을 투입하는 것을 막을 것이었다.


다바오와 홀로제도 상륙은 남쪽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공격하기 위한 전진기지를 얻는다는 목적이 컸다. 더하여 필리핀을 남쪽으로부터 고립시켜 필리핀 수비대의 보급을 끊고 탈출을 저지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선견부대는 비교적 소규모로 가장 큰 부대가 연대 규모였으며 가장 작은 부대는 증강된 중대 규모였다. 규모에서 알 수 있듯이 선견부대의 상륙은 주력의 상륙 예정 지점에서 미군 주력을 끌어내려는 양동 작전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상륙 병력이 적고 호위 함대도 약했으며 상륙 지점 또한 비행장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읽히는 위치였다. 


필리핀에 가장 먼저 상륙한 부대는 루손 북쪽의 바탄 섬에 상륙한 해군육전대 490명과 제24비행장대대였다. 상륙부대는 수송선 2척(하요마루, 쿠마카와마루)에 분승하여 제2근거지대사령관 히로세 수에토 소장이 지휘하는 해군제3급습대의 호위를 받았다. 제3급습대는 구축함 야마구모, 제21수뢰정대(치도리, 하츠카리, 마나즈루, 토모즈루), 소해정 2척, 초계정 2척, 특설구잠정 9척, 특설포함 3척으로 이루어져 12월 7일 오후 6시 30분에 가오슝을 출항했다.


해군육전대는 8일 아침 7시에 저항을 받지 않고 바탄 섬에 상륙하여 바스코 비행장을 점령했다. 이어서 제24비행장대대가 상륙하여 비행장을 정비했으며 다음날부터 비행제24 및 제50전대 소속 97식 전투기가 바스코 비행장을 기지로 작전을 시작했다. 바스코 비행장은 규모가 작아서 본격적으로 운용하려면 확장해야 했으나 8일 낮에 실시한 클라크 비행장 공습이 성공하자 확장을 포기했다. 이후 바스코 비행장은 주로 대만과 루손을 오가는 비행기의 중계 기지로 활용되었다.


10일 오전 8시 30분에 제3급습대의 일부가 아파리에서 북쪽으로 60km 떨어진 카미귄 섬을 점령하고 수상기 기지를 만들었다. 일본군의 바탄 섬 상륙은 전혀 저항을 받지 않았다. 사실 미군은 바탄 섬 상륙을 몰랐다.


루손 북해안에 있는 아파리는 1941년 당시 인구 26,500명의 항구도시였다. 카가얀 강 하구에 자리잡은 아파리는 북쪽을 제외한 3면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마닐라로 가려면 5번 도로를 따라 벨레테 고개를 통하여 남쪽으로 440km 를 달리든지 좁은 해안평야에 만들어진 서해안 도로를 따라 600km 를 달려야 했다. 따라서 아파리에 상륙한 부대가 남하하여 마닐라를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남일로코스 주의 주도인 비간은 바닐라에서 3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350km 떨어진 루손 서해안에 있었다. 동쪽으로는 코르디예라 산맥이 카가얀 하곡과 좁은 해안평야를 가르고 있었으며 남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는 루손의 5대강 중 하나인 아브라 강의 하구가 있었다. 비간의 외항인 판단은 아브라 강 하구의 북안에 있었으며 전천후 포장도로로 비간과 이어져 있었다.


(루손 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6.html#6-2 P.101)


아파리와 비간은 조너선 웨인라이트 소장의 북부루손군 구역 내에 있었다. 필리핀군 사단 3개, 필리핀 스카우트 기병연대와 보병대대 1개, 야포 1개 포대, 그리고 지원부대로 이루어진 북부루손군은 1,000 x 200km 넓이의 지역을 지켜야 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링가옌 만 이북의 넓은 지역에 윌리엄 브루거 대령의 필리핀군 제11사단만 배치했다.


제11사단(PA)은 다른 필리핀군 사단과 마찬가지로 9월에 동원이 시작되었으나 전쟁이 터졌을 때 보병연대의 병력은 정원인 1,500명의 2/3에 불과했다. 포병대는 합류하지 않았으며 지원부대는 편성되었으나 훈련이 부족했다. 수송수단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모든 장비가 부족했다. 보병의 개인 훈련은 부족했으며 부대 훈련도 마찬가지였다. 1개 연대만이 중대 이상 규모로 훈련해 본 경험이 있었다. 


제11사단(PA) 주력은 링가옌 만에서 라 유니온 주의 산 페르난도에 걸쳐 있었다. 루손에는 산 페르난도라는 지명이 2개다. 라 유니온 주의 산 페르난도는 링가옌 만 북쪽에 있고 팜팡가 주의 산 페르난도는 바탄반도 입구에 있다.


카가얀 하곡 전체를 지키는 것은 1개 대대(제11사단 제12보병연대 제3대대)뿐이었다. 대대본부는 투게가라오에 있었으며 아파리에 1개 중대가 있었고 비간에는 병력이 없었다.


북부 루손에 상륙할 일본군 부대는 제48사단의 대만보병제2연대 소속이었다. 아파리에 상륙할 부대는 약 2,000명으로 연대장 다나카 토루 대좌의 이름을 따서 다나카 지대라고 불렀다. 다나카 지대는 6척의 수송선에 분승하여 12월 7일 오후 4시에 해군제1급습대의 호위 아래 펑후 제도의 마궁을 출항했다. 다나카 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대만보병제2연대본부

대만보병제2연대 제2대대 및 제1대대(2개 중대 감편)

산포병제48연대제1대대(1개 중대 감편)

공병제48연대의 1개 중대(2개 소대 감편)

제1비행장정비부대

독립공병제10연대(1개 중대 감편)

독립공병제21연대의 1개 소대

제1선박포병연대 일부


제5수뢰전대사령관 하라 겐자부로 소장이 지휘하는 해군제1급습대는 경순양함 나토리, 제22구축대(사츠키, 미나즈키, 후미즈키, 나가즈키), 제5구축대의 1개 소대(하루카제, 하타카제), 소해정 3척(15호, 16호, 19호), 구잠정 6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간에 상륙할 부대 또한 약 2,000명으로 대만보병제2연대제3대대장 가노 젠키치 소좌의 이름을 따서 가노 지대라고 불렀다. 가노 지대는 6척의 수송선에 분승하여 12월 7일 오후 5시 30분에 해군제2급습대의 호위아래 펑후 제도의 마궁을 출항했다. 가노 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대만보병제2연대 제3대대및 제1대대(2개 중대 감편)
산포병제48연대의 1개 중대
야전고사포제45대대의 1개 중대
공병제48연대의 2개 소대
제2비행장정비부대
독립공병제10연대의 1개 중대
제2선박포병연대 일부

제4수뢰전대사령관 니시무라 쇼지 소장이 지휘하는 해군제2급습대는 경순양함 나카, 제2구축대(무라사메, 유다치, 하루사메, 사미다레), 제9구축대( 아사쿠모, 나츠쿠모, 미네쿠모), 소해정 6척(7호, 8호, 9호, 10호, 17호, 18호), 구잠정 9척, 어선 5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북부 루손 상륙을 중시한 일본해군은 호위함정과는 별도로 제3함대사령장관 다카하시 이보우 중장이 이끄는 중순양함 2척(아시가라, 마야), 경순양함 쿠마, 구축함 2척(아사카제, 마츠카제), 특설수상기모함 2척(산요마루, 사누키마루)을 내보내어 상륙을 지원했다.

아파리와 비간 상륙부대가 펑후 제도의 마궁을 출항하자 곧 비행제24 및 제50전대 소속의 97식 전투기가 날아와 선단 상공을 엄호했다. 9일과 10일에도 제5비행집단의 전투기가 선단 상공을 엄호했다. 10일 아침에 다나카 지대는 아파리에, 가노 지대는 비간에 상륙을 시작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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