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아파리 상륙


다나카 지대를 실은 해군제1급습대는 1941년 12월 10일 오전 3시 30분에 아파리 앞바다에 도착하여 오전 5시 30분부터 상륙을 시작했다. 바탄 섬에서 날아온 97식 전투기들이 선단 상공을 지켰다. 아파리에서 미군의 저항은 없었으나 바다가 거칠어 상륙이 어려웠다. 결국 2개 중대를 상륙시킨 상태에서 선단은 남동쪽으로 35km 떨어진 곤자가로 이동하여 나머지 병력을 상륙시켰다. 곤자가는 엥가노 곶이 부분적으로 바람을 막아주었기 때문에 바다가 덜 거칠었다.


미군은 상륙 목적이 비행장 확보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링가옌 만을 지키던 북부루손군의 제11(PA) 및 제12사단(PA)은 아파리 상륙을 무시했다. 단지 카가얀 하곡에 주둔 중인 부대와 연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제26기병연대(PS)소속의 장갑차 몇 대를 파견했을 뿐이었다. 대신 카가얀 하곡의 다리를 폭파하고 벨레테 고개에 장애물을 설치했다.


아파리에는 필리핀군 제11사단 제12보병연대 제3대대의 1개 중대가 지키고 있었다. 중대장 앨빈 해들리 중위가 상륙하는 일본군을 보고 투게가라오의 대대본부에 보고했다. 대대장은 즉시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나 해들리 중대는 1발의 총탄도 쏘지 않고 3번 도로를 따라 후퇴했다. 해들리 중위는 그날 아침 아파리에 일본군 10,000명이 상륙했다고 주장했다.


연대 규모의 일본군이 아파리에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은 맥아더 장군은 비행기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2월 5일에 민다나오의 델몬테 비행장으로 이동했던 B-17 폭격기들은 12월 9일 저녁까지 루손의 클라크 비행장과 산 마르셀리노 임시비행장에 돌아와 있었다. 10일 아침에 일본군 상륙 소식이 전해지자 10대의 B-17 중 8대는 비간 상륙부대를 공격했고 제14폭격비행대대의 2대만이 아파리 상륙부대를 공격했다.


조지 섀첼 중위가 조종하는 B-17은 10일 오전 9시 30분에 클라크 비행장을 이륙하여 아파리로 날아갔다. 정오에 섀첼 중위는 곤자가 부근 해상에 늘어선 일본수송선 위를 통과하면서 7,600m 높이에서 600파운드(272kg)짜리 폭탄 6발을 떨어뜨렸으나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B-17 은 선단 상공을 지키던 일본기의 요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으나 사상자없이 산 마르셀리노로 돌아왔다.


콜린 켈리 대위가 조종하는 B-17은 600파운드 폭탄 3발만을 실은 상태에서 클라크 비행장을 급히 이륙하여 루손 서해안을 따라 남하중이라고 잘못 알려진 적의 항공모함을 찾아 나섰다. 적 항모를 찾지 못한 채 해안선을 따라 비행하던 켈리 대위는 오후 1시에 곤자가 부근 해상에서 적의 수상전투함을 발견했다.  켈리 대위는 6,700m 높이에서 3발의 폭탄을 떨어뜨리고 돌아섰다.

켈리 대위의 B-17 이 클라크 비행장 가까이 왔을 때 타이난 항공대 소속 제로기 5대의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으로 승무원 1명이 전사하고 기체에 불이 붙었다. 켈리 대위는 나머지 승무원에게 탈출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마지막까지 조종석을 지켰다. 부조종사가 탈출한 직후 B-17은 폭발했으며 켈리 대위의 시체는 추락한 잔해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살아남은 B-17 승무원들은 자신들이 하루나급 또는 야마시로급 전함에 폭탄 1발을 명중시켰으며 전함은 검은 연기에 휩싸인 채 해상에 멈추었다고 보고했다. 미육군항공대는 전쟁 기간 동안 켈리 대위가 전함 하루나를 격침했다고 주장했으나 사실 그때 하루나는 수백km 떨어진 남중국해 건너편에 있었다. 켈리 대위가 공격한 함정은 다나카 지대의 상륙을 엄호하던 경순양함 나토리였으며 그나마 지근탄을 기록했을 뿐 명중시키지 못했다. 


나토리는 좌현 부근 해상에 떨어진 지근탄으로 함체 손상과 함께 전사 7명, 중상 6명 , 경상 16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나토리에 승좌하여 상륙을 지휘하던 제5수뢰전대장 하라 겐자부로 소장은 사령기를 구축함 나가즈키로 옮겨 달았고 나토리는 응급수리를 위해 마공으로 돌아갔다.


대신 나토리 옆에 있던 제19호소해정이 후방 선체에 명중탄을 맞아 기뢰가 유폭되면서 대파되어 좌초했으며 결국 일본해군은 제19호를 포기했다. 제19호소해정의 인명피해는 승조원 120명 중 전사 및 행방불명 72명, 중상 10명에 달했다. 구축함 하루카제와 하타카제가 부상자를 싣고 마공으로 돌아갔다.


켈리 대위에게는 수훈십자장이 추서되었다. 하루나 격침은 오보였지만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불타는 폭격기에서 승무원이 모두 탈출할 때까지 조종석을 지킨 책임감과 희생정신만으로도 자격은 충분했다.


B-17 의 공격에 놀란 하라 소장은 곤자가에 병력 상륙이 끝나자 비행장 정비에 필요한 롤러를 비롯한 중장비 하역을 미루고 수송선에게 아파리 앞바다로 퇴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파리 앞바다는 여전히 풍랑이 심하여 정상적인 하역이 불가능했으므로 수송선 승조원들은 휘발유가 들어있는 드럼통을 바다에 던졌다. 조류를 따라 해안으로 떠내려가면 해안에서 회수한다는 생각이었다.

수송선들은 13일 오후까지 하역을 마치고 오후 4시 30분에 구축함 후미즈키와 사츠키의 호위를 받으면서 가오슝으로 돌아갔다.


B-17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곤자가에 무사히 상륙한 다나카 지대의 주력은 아파리로 이동하여 10일 오후 1시 40분에는 그날 아침에 상륙하여 아파리 활주로를 장악하고 있던 2개 중대와 합류했다. 오후 6시에는 다나카 지대의 선두가 아파리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카말라뉴간의 활주로를 점령했으며 곧 제1비행장정비부대가 도착했다. 다음날부터 비행제50전대 주력인 97식전투기 24대가 아파리 비행장에서 작전을 시작했다. 

아파리와 카말라뉴간 활주로를 살펴본 비행장정비부대는 침공 전의 정보와는 달리 중폭격기 운용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중폭격기를 쓰려면 남쪽으로 80km 떨어진 투게가라오 비행장이 필요했다.

 

(일본선견부대의 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6.html P.99)


다나카 지대는 11일 새벽부터 5번 도로를 따라 투게가라오로 남하했다. 투게가라오를 지키던 필리핀군 제11사단 제12연대 제3대대는 개전 이래 계속 폭격을 얻어맞아 사기가 꺾인 상태였다. 게다가 아파리에서 철수한 해들리 중위의 보고를 듣고 10,000 명의 일본군이 진격해 온다고 착각하여 겁에 질렸다. 결국 제3대대는 다나카 지대가 접근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바로 투게가라오를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따라서 다나카 지대는 80km 를 아무런 저항없이 남하하여 12일 오전 5시 30분에 투게가라오 비행장을 점령했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