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레가스피 및 다바오 상륙


파커 장군이 지휘하는 남부루손군 담당 구역은 마닐라 남동쪽의 루손 지역이었다. 마닐라에서 루손 남동쪽 끝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400km 였으며 베이 호와 타알 호라는 큰 호수 2개가 있었다.  이 지역에는 5개의 만이 있었는데 모두 상륙작전에 적합하여 상륙가능한 해안선의 길이가 400km 에 달했다. 지역 내에는 도로가 발달했으며 마닐라에서 다라가에 이르는 철도가 있었다. 루손 섬의 남동쪽 끝에 가까운 부분, 철도 종점인 다라가에서 1.6km 떨어진 알베이 만의 레가스피가 일본군 상륙지점이었다.


남부 루손군에는 2개 필리핀군 사단이 있었으며 아티모난을 경계로 빈센트 림 준장의 제41사단(PA)은 서쪽을, 엘버트 존스 준장의 제51사단(PA) 은 레가스피를 포함한 동쪽을 담당했다.

제51사단(PA) 또한 다른 필리핀군 사단과 마찬가지로 장비가 열악하고 훈련이 부족했다. 모든 병사들이 5년 이내 어느 시점에선가 5.5개월의 훈련을 거쳤으나 사단장 존스 준장에 의하면 효과가 없었다. 따라서 동원 이후의 훈련이 중요했는데 이때 언어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다. 부사관과 병들은 바이콜 사투리를 쓰는데 비하여 장교는 타갈로그어를 썼다. 어쨌든 동원 이후 1개 연대는 13주, 1개 연대는 5주 동안 훈련을 받았으며 나머지 1개 연대는 전혀 훈련을 받지 못했다. 존스 사단장의 견해에 따르면 제한적으로나마 전투를 치를만한 부대는 13주 동안 훈련받은 제52연대뿐이었다.


레가스피 상륙을 위하여 혼마 중장은 제16사단 소속 2,500명의 병력을 준비했다. 제16보병단장 기무라 나오키 소장이 지휘하는 기무라 지대는 제16보병단사령부, 보병제33연대(제1대대 감편), 야포병제22연대제4중대, 공병제16연대의 1개 중대(1개 소대 감편), 독립공병제6연대의 1개 중대(2개 소대 감편) 그리고 구레제1해군특별육전대 575명 및 제1설영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무라 지대가 탄 수송선 7척은 제1근거지대사령관 쿠보 규지 소장이 지휘하는 해군제4급습대의 호위를 받았다. 제4급습대는 경순양함 나가라, 제24구축대(우미카제, 야마카제, 카와카제, 스즈카제), 제16구축대 제1소대(유키카제, 도키즈카제), 부설함 아오타카, 소해정 2척, 초계정 2척, 기타 소함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후지타 류타로 소장이 지휘하는 제11항공전대(수상기모함 치토세, 미즈호)도 동행했다.


진주만 기습 이틀 전인 12월 6일에 가쿠다 가쿠지 소장이 이끄는 제4항공전대가 팔라우를 떠났다. 8일 아침에 다바오 동쪽 200km 지점에 도착한 제4항공전대는 경항모 류조로부터 함재기를 내보내어 다바오 만에 정박해 있던 미해군의 수상기모함 프레스톤을 공격했다.

8일 오전 9시에는 기무라 지대를 실은 선단이 팔라우를 출항했다. 프레스톤을 공격한 제4항공전대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9일 아침에 기무라 선단과 합류하여 레가스피로 향했다.


(일본항공모함 류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aircraft_carrier_Ry%C5%ABj%C5%8D)


선단이 샌 베르나디노 해협에서 220km 떨어진 지점을 통과할 때 부설함 아오타카가 구축함 2척의 호위 아래 샌 베르나디노 해협에 기뢰 300개를 설치했다. 샌 베르나디노 해협 부근의 소르소곤 만을 초계하던 잠수함 S-39 함이 아오타카를 공격하려다가 일본구축함의 폭뢰 세례를 받고 쫓겨났다.


해안에서 160km 떨어진 곳까지 다가서자 류조가 함재기를 내보내어 알베이 만 연안을 공격했다. 기무라 지대를 태운 선단은 제4항공전대와 헤어져 알베이 만으로 진입했고 11일 밤 11시에 레가스피 앞바다에 도착했다.


기무라 지대는 12월 12일 새벽 2시 15분부터 상륙을 시작했는데 저항은 없었다. 가장 가까운 필리핀군 부대는 240km 떨어져 있었다. 일본군은 오전 8시 30분까지 레가스피 비행장과 다라가에 있던 마닐라 철도의 종착역을 확보했다.

일본군이 상륙하자 레가스피에서 1.6km 떨어진 다라가 역의 역장이 전화로 보고했다. 제51사단장 존스 장군은 남하하여 기습을 가하려고 생각해 보았으나 일본군이 제공권을 가진 상황에서 기습은 불가능했다. 결국 화차를 회수하고 마닐라 철도와 마닐라로 이어지는 1번 도로를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제51공병대대가 모든 교량에 폭파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고 남쪽으로 파견되었다. 제52연대 제1대대의 B 및 C 중대가 기관총 1개 소대와 함께 엄호를 맡았다.


12일 저녁부터 일본해군비행장정비부대가 레가스피 비행장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선단과 호위함대는 다음 상륙을 위하여 13일에 팔라우로 돌아갔다. 14일에 세토 마스즈 중위가 이끄는 제23항공전대의 제로기 1개 중대(9대)가 레가스피 비행장에 진출했다.


기무라 지대에 최초로 반격을 가한 것은 극동미육군항공대였다. 12일 오후3시에 미군전투기 2대가 일본군이 장악한 레가스피 비행장을 공격하여 3명을 죽이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14일에는 델몬테비행장에서 날아온 B-17 폭격기 3대가 레가스피 앞바다의 소해정과 수송선, 그리고 비행장을 폭격했다. 호위기도 없이 날아온 B-17은 막 도착한 제로기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어 3대 중 1대만이 델몬테 비행장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2대는 귀환 도중 불시착했다. 일본군의 피해는 가벼웠다.


레가스피를 장악한 기무라 지대는 13일 아침부터 1번 국도를 따라 서진했다. 12월 17일에 일본군 정찰대가 나가에서 북서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라게이 부근의 다리에 도달했을 때 다리에 폭약을 설치하고 있던 필리핀군 제51공병연대와 처음으로 만났다. 공병대는 서둘러 다리를 폭파했다. 다음날 기무라 지대는 나가에 입성했고 이후 부서진 다리를 수리하면서 서진하여 21일에는 선두가 다깃에 도달했다. 필리핀군과 기무라 지대의 본격적인 교전은 12월 22일에 이루어졌다. 1번 도로 상의 팀부요에 방어선을 편 매트 도브리닉 중위의 B 중대가 일본군 1개 중대의 공격을 물리쳐 10km 밖으로 밀어내었다. B 중대도 병력의 15% 를 잃었다.


23일 밤에 라몬 만에 상륙하는 일본제16사단의 주력을 태운 선단이 아티모난에 접근하자 제51사단장 존스 장군은 철수명령을 내렸다. 제51사단(PA)은 라몬 만에서 다나카 지대가 제16사단 주력을 맞이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임무를 완수한 셈이었다.


(일본선견부대의 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6.html P.99)


민다나오 섬의 다바오와 술루제도의 홀로 섬에 대한 상륙은 일본해군의 기지항공대를 위한 비행장을 확보하고 필리핀 수비대의 퇴각로를 차단하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침공하기 위한 기지를 얻는데 목적이 있었다.

다바오 상륙부대는 처음에는 미우라 도시오 중좌가 지휘하는 제16사단 보병제33연대 제1대대, 공병제16연대의 1개 소대, 독립공병제6연대의 1개 소대로 편성되어 4척의 수송선에 승선했다. 여기에 제56사단의 보병단장 사카구치 시즈오 소장이 지휘하는 사카구치 지대가 가세했다. 사카구치 지대는 제56사단 보병제146연대를 중심으로 전차 1개 중대, 사단포병 1개 대대로 이루어져 수송선 8척에 승선했다. 다바오 상륙부대의 병력은 합계 5,000명 정도였다.


다바오 상륙부대의 출항 날짜는 필리핀을 담당한 제14군이 결정했지만 일단 출항한 이후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맡은 제16군의 지휘를 받았다. 다바오를 점령한 이후에 미우라 지대는 제14군 휘하로 돌아가고 사카구치 지대는 제16군의 지휘 아래 술루 제도의 홀로 섬을 거쳐 북보르네오의 타라칸으로 진출했다. 홀로 섬 상륙을 위하여 레가스피에 상륙했던 해군제2특별육전대와 해군비행장부대가 2척의 수송선에 타고 사카구치 지대에 합류했다.


다바오 상륙부대를 실은 14척의 수송선은 12월 16일 오후 4시부터 17일 오후 2시에 걸쳐 차례로 팔라우를 떠났다. 직접 호위를 맡은 것은 제2수뢰전대 사령관 다나카 라이조 소장이 지휘하는 해군제5급습대로서 경순양함 진츠, 제15구축대(쿠로시오, 오야시오, 하야시오, 나츠시오), 제16구축대제2소대(하츠카제, 아마츠카제), 부설함 시라타카, 기타 소함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제5전대사령관 다카기 다케오 소장이 지휘하는 직접지원부대가 있었는데 그 구성은 제5전대(중순양함 나치, 하구로, 묘코), 제4항공전대(항공모함 류조, 구축함 시오카제), 제11항공전대(수상기모함 치토세)와 초계정 2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2월 19일 오후에 다바오 동쪽 360km 해상에서 류조는 함상폭격기 6대를 내보내어 다바오 만의 동쪽 끝인 산 오스틴 곶의 통신소를 폭격했다. 동시에 수상기모함 치토세는 수상기를 내보내어 다바오 시가지를 정찰했다.


선단은 20일 새벽 4시 10분에 다바오에 도착하여 류조에서 발진한 함재기의 지원 아래 상륙을 시작했다. 다바오의 북동쪽 해안에는 미우라 지대, 사카구치 지대 사령부, 그리고 사카구치 지대의 1개 대대가 상륙했고 남서쪽 구역에는 사카구치 지대의 1개 대대가 상륙했다. 다바오를 지키던 필리핀군은 로저 힐스맨 중령의 제101보병연대(PA) 제2대대를 중심으로 한 2,000명 정도였다. 필리핀군의 기관총좌 하나가 상륙하는 미우라 지대에게 약간의 피해를 입혔지만 곧 일본구축함의 함포사격을 얻어맞고 분쇄되었다. 그러자 필리핀군은 전의를 잃고 오전 10시 30분까지 도시에서 철수했는데 이때 남부 루손군 직속의 75mm 야포 8문 중 3문을 방기했다.


다바오의 남서쪽 해안에 상륙한 사카구치 지대의 1개 대대는 저항을 받지 않았으며 북동쪽으로 진격하여 미우라 지대와 연결했다. 오후 2시 30분까지 시가지와 비행장이 일본군 손에 들어갔으며 저녁에는 다바오 남쪽에 수상기 기지가 들어섰다. 다바오에 살던 일본인 23,000명은 일본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다바오와 주변 지역의 점령임무를 맡은 미우라 지대는 제16군 지휘에서 벗어나 제14군 휘하로 돌아갔다.

21일에 제11항공함대 동항해군항공대 소속 97식대정 12대가 팔라우를 떠나 다바오 만에 진출했고 23일 오후에는 제11항공함대의 전투기 12대와  육상정찰기 2대가 다바오 비행장에 진출하여 제4항공전대로부터 다바오방면 상공직위 임무를 이어받았다.


사카구치 장군은 홀로 섬 상륙을 위하여 마츠모토 지대를 편성했다. 보병제146연대제3대대장 마츠모토 오사무 소좌가 지휘하는 마츠모토지대는 제3대대주력, 구레제2특별해군육전대, 포병 1개 소대, 무선 1개 분대로 이루어져 22일 밤에 다바오를 출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호주 다윈 부근의 바첼로 비행장을 이륙한 B-17 폭격기 9대가 22일 석양 무렵에 다바오에 정박 중이던 일본선단 상공에 500파운드(227kg) 폭탄 30발을 떨어뜨렸다. B-17은 기습을 달성했으나 일본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날씨가 나빠서 피해는 크지 않았다. B-17은 델몬테 비행장에 내려 재급유를 받은 후 5대는 바로 호주로 돌아가고 4대는 23일 새벽에 다시 다바오의 일본선단을 공습했으나 이번에도 피해를 주지 못했다. 24일까지 B-17 폭격기 9대는 모두 무사히 다윈으로 돌아갔다. 

24일에는 B-17폭격기 3대가 300파운드(136kg) 폭탄 7발씩을 싣고 다윈을 떠나 다바오로 날아가서 폭격을 가했다. 2대는 다바오 비행장을 폭격하고 1대는 일본선단을 공격했으나 이번에도 전과는 크지 않았다. 3대는 모두 다윈으로 돌아왔으나 2대는 제로기의 반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마츠모토 지대는 폭격으로 인하여 예정보다 몇시간 늦은 23일 아침에 수송선 3척에 타고 다바오를 출항했다. 제5급습대(경순 1척, 구축함 4척, 초계정 2척)가 직접 호위를 맡고 제4 및 제11항공전대가 항공엄호를 담당했다. 선단은 24일 한밤중에 홀로 앞바다에 도착했으며 상륙은 크리스마스 아침에 실시되었다. 제4항공전대는 24일에 다바오로 돌아갔고 제11항공전대의 수상기모함 치토세가 상륙작전을 엄호했다. 일본군은 홀로 섬을 지키던 필리핀 경찰대 300명의 미약한 저항을 물리치고 25일 오전 중에 홀로 시가지와 비행장을 점령했다. 26일에 일본전투기가 홀로 섬에 진출하여 제11항공전대로부터 상공직위 임무를 이어받았다. 제5전대는 홀로 섬 남쪽 약 100km 까지 진출했다가 팔라우로 돌아갔다. 이제 일본군은 다바오와 홀로 섬을 기지로 하여 보르네오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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