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탈출
싱가포르 수비대의 모든 병사가 항복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많은 병사가 1942년 2월 12일 이후에 작은 배를 타고 탈출을 감행했다. 그 시기에는 바다가 잔잔한 데다가 조류가 남서쪽으로 강하게 흘렀기 때문에 일본함정이나 비행기에 들키지만 않는다면 전문적인 항해 지식이 없이 작은 배를 띄워도 조류를 타고 남부 수마트라의 동해안에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
양쯔강에서 운항하던 객선을 개조한 보조초계함 리워는 자바의 탄종프리옥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고 2월 13일 아침에 싱가포르를 출항했다. 탑승 인원은 84명이었는데 승조원 이외에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생존자 몇 명, 육군 5명, 공군 2명, 말레이인 10명, 중국인 6명을 포함한 숫자였다. 리워는 14일 아침에 방카 해협 북쪽에서 수마트라 침공부대를 싣고 가던 일본선단을 만났다. 함장 토머스 윌킨슨 대위는 적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리워는 전속력으로 선단으로 접근하여 1문 뿐인 4인치 주포로 수송선 1척에게 가지고 있던 포탄 13발을 모두 쏘았다. 기습을 받은 수송선은 불이 붙었으나 리워도 선단 호위 중이던 경순양함 유라, 구축함 후부키 및 아사기리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침몰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윌킨슨 대위는 배를 몰아 불타는 수송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아 버렸다. 리워는 결국 침몰했고 84명의 탑승자 중 윌킨슨 대위를 포함한 77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고 7명만이 살아남아 포로가 되었다. 윌킨슨 대위는 사후 소령으로 특진되었으며 빅토리아 십자장이 추서되었다.
(리워의 모형. https://en.wikipedia.org/wiki/HMS_Li_Wo)
제8호주사단장 고든 베넷 소장은 일본군의 포로가 될 생각이 없었다. 2월 15일 오전에 항복을 결정한 회의를 마치고 탕글린 막사에 있던 제8호주사단사령부로 돌아온 그는 참모들을 모아 탈출 방안을 논의했다. 처음에 그는 15,000명에 달하는 호주군 모두를 이끌고 탈출하려 했으나 참모들이 현실성이 없으며 일본군의 보복으로 대량 학살을 당할 것이라고 주장하자 단념했다. 그는 자신의 포병단장인 세실 캘러헌 준장에게 사단장직을 물려주고 16일 새벽 1시에 참모인 모지스 소령 및 워커 중위와 함께 싱가포르를 탈출했다.
베넷 일행은 말레이 의용대원 몇 명과 함께 현지인의 보트를 얻어타고 말라카 해협을 건너 수마트라 동해안에 도착했다. 여기서 싱가포르 항만국의 란치인 턴을 타고 바탕하리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일행은 바탕하리 강의 상류인 잠비에서 자동차로 바꿔타고 수마트라 서해안의 파당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베넷 소장은 역시 싱가포르를 탈출한 제12인도여단장 아치볼드 파리스 준장과 제6/15인도여단장 존 코츠 대령을 만났다. 베넷 소장이 탈출한 것을 알게된 ABDA 사령관 웨이벌 대장이 자바까지 올 수 있도록 비행기를 수배해 주었다. 자바에 도착한 베넷 일행은 콴타스 항공을 타고 호주로 귀국했다. 탈출한 지 2주일 만인 1942년 3월 2일에 베넷 소장은 멜버른에서 호주육군참모총장 스터디 대장에게 신고했다.
제12인도여단장 아치볼드 파리스 준장과 제6/15인도여단장 존 코츠 대령은 퍼시발 중장의 명령에 따라 항복 직전에 수마트라로 탈출했다. 파당에서 대기하던 파리스 준장과 코츠 대령은 함께 탈출한 영국병들과 함께 2척의 배에 타고 실론을 향했다. 코츠 대령과 220명의 영국병이 탄 배는 무사히 실론에 도착했다.
그러나 파리스 준장이 500명의 병사와 함께 탄 네덜란드 증기선 루즈붐은 3월 1일 오후 11시 55분에 수마트라 서해안에서 일본잠수함 I-59의 어뢰를 맞아 침몰했다. 파리스 준장은 유일하게 띄워진 구명정에 올라탔으나 28명 정원에 80명이 올라탄 구명정의 물과 식량은 금방 떨어졌다. 구명정은 그 상태로 28일간 무려 1,600km 이상 표류한 후에 파당에서 160km 떨어진 산호초에 도착했으며 그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4명이었다. 파리스 준장도 3월 3일에 환각에 시달리다가 정신을 잃고 죽었다.
(네덜란드 증기선 루즈붐. http://www.kingshottgenealogy.co.uk/Pages/RobertWGKingshott.aspx)
싱가포르 영연방 판무관 비비안 보우덴은 2월 15일에 증기선 메리로즈를 타고 싱가포르를 탈출했다. 메리로즈는 17일에 방카 해협을 통과하다가 일본군 초계함에 나포되어 방카 섬으로 끌려갔다. 일본군이 탑승자들의 가방을 검색하다가 보우덴의 가방에서 중요한 서류 몇 개를 발견하고 압수했다. 보우덴은 압수 조치에 항의하다가 심하게 얻어맞고 처형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병사들이 항복을 거부하고 탈출을 감행했다. 2월 12일 이후 싱가포르를 탈출한 삼판이나 정크선을 포함한 소형 선박이 수백척에 이른다. 이들은 대부분 격침되거나 나포되었지만 1,600명의 영국군을 포함하여 약 3,000명이 수마트라를 통하여 실론 또는 자바로 탈출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당국은 영국군과 협력하여 수마트라 동해안에 도착한 탈출자들이 서해안의 파당까지 갈 수 있는 3가지 통로를 확보했다.
제1통로는 바탕하리 강을 따라 잠비까지 올라온 다음 자동차로 파당까지 가는 남쪽 길로써 베넷 일행이 사용했던 길이었다. 이 길은 일본군에 의해 가장 먼저 폐쇄되었다.
제2통로는 벵칼리스 섬을 거쳐 파당으로 가는 북서쪽 길이었다.
제3통로이자 가장 중요한 통로는 동해안의 탐빌라한과 내륙의 렝앗을 통하는 길이었다. 렝앗에서 버스를 타고 사왈룬토까지 가면 파당까지 철도가 연결되어 있었다.
파당에 도착한 탈출자는 배를 타고 실론이나 자바로 갈 수 있었다. 영국군은 파당에 사령부를 설치하여 탈출자를 처리하고 네덜란드 군의 수마트라 방어를 지원했다. 네덜란드 당국은 일본군의 수마트라 침공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렝앗과 사왈룬토 사이에 버스를 운행하는 등 탈출자에게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했다.
(남부 수마트라.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 P.384)
하지만 수마트라 동해안에 도착한 탈출자들은 먼저 렝앗까지 인드라기리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싱가포르에서 일본인이 소유했던 90톤 짜리 어선을 타고 탈출한 레이놀즈가 여기서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동해안에 탈출자가 표착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선을 몰고가서 렝앗까지 실어 날랐다. 3월 15일에 렝앗이 점령될 때까지 그가 실어나른 탈출자가 약 2,000 명에 달한다. 렝앗이 점령 위기에 빠지자 레이놀즈는 수마트라 동해안을 따라 위험한 항해를 감행한 끝에 인도로 탈출했다.
호주군의관이었던 알버트 코츠 중령은 란치를 타고 수마트라 동해안의 탐빌라한에 도착한 후 탈출해 온 다른 군의관들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 진료소를 열었다. 이후 영국군과의 협력을 통하여 탐빌라한에서 파당까지 연결되는 탈출로의 주요 지점마다 진료소가 들어섰다. 이제 부상을 입은 탈출자들은 군의관이 제공하는 의료 지원을 받으면서 파당으로 갈 수 있었다.
일본군이 수마트라 동해안을 침공함에 따라 2월 28일에 파당으로 옮긴 코츠 중령은 3주 후 파당이 함락될 때 철수를 거부하고 킬고어 소령과 함께 파당에 남아 탈출하지 못한 부상병을 돌보다가 포로가 되었다. 싱가포르를 탈출한 후 수마트라가 함락될 때 탈출하지 못하고 포로가 된 인원은 약 80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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