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마지막 나날


1942년 2월 13일이 되자 싱가포르 시내의 상황이 심각해졌다. 기존 인구에 약 50만명의 피난민이 몰려들어 해안을 중심으로 반경 5km 내에 100만명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방어선이 시내에 접근함에 따라 공습 또는 포격에서 군사 표적과 민간 표적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공습과 포격으로 수도관이 파열되어 물 공급이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고 부킷티마의 식량창고를 잃으면서 이제 말레이 사령부가 보유한 식량은 약 1주일치로 줄어들었다. 각 부대가 보유한 식량이 약 1주일치였으므로 군대가 먹을 식량은 약 2주일치가 남은 셈이었다. 민간이 보유한 식량은 약 1주일치였다. 소화기용 탄약 보유 상황은 그나마 나았으나 야포탄은 많이 모자랐고 대공포탄과 연료는 거의 떨어졌다. 

말레이 해군사령관은 13일에 부쿰 섬에 있던 대규모 중유 저장고를 폭파했는데 완전 폭파에는 실패했다.


13일 오후 2시에 퍼시발 중장은 포트캔닝에 있던 말레이 사령부에서 3명의 지역사령관, 사단장들, 그리고 말레이 사령부의 고위 참모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었다. 지휘관 모두가 병력이 지치고 예비대가 없는 상황에서 대규모 반격은 성공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많은 병사가 일본군 상륙 이후 5일간 모두 합쳐 3-4시간 밖에 자지 못했으며 지난 48시간 동안은 전혀 눈을 붙이지 못했다. 히스 중장과 벤넷 소장이 처음으로 조건부 항복을 거론했으나 퍼시발 중장은 거부하고 방어 지속을 명했다.


이 회의에서는 부녀자, 여성 간호병, 일부 참모 및 기술자의 탈출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큰 선박은 이미 싱가포르를 떠났으므로 말레이 해군사령관 스푸너 해군소장은 남아있던 소형 선박 약 40척으로 13일 밤에 마지막 철수를 실시했다. 승조원을 제외하고 육군 1,800명(호주군 100명 포함), 그리고  말레이 사령부 회의에서 결정된 인원과 민간 행정요원 1,200명, 총 3,000명이 13일 밤에 자바를 향하여 싱가포르를 떠났다. 스푸너 소장은 말레이 공군사령관 펄포드 공군소장과 함께 해군 모터 란치인 ML310 함을 타고 선단을 이끌었다.


(페어마일 급 모터 란치. https://en.wikipedia.org/wiki/Fairmile_B_motor_launch)


선단의 운명은 비참했다. 싱가포르를 떠난 직후부터 공습에 시달리던 선단은 수마트라와 방카 섬 사이의 방카 해협을 통과한 직후 오자와 중장이 이끌던 제7전대를 만나 풍비박산이 났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북쪽으로 도망친 몇몇 선박들도 2-3일 내로 공습을 받아 격침되면서 약 40척의 선박이 모두 격침되었다. ML310 함도 2월 15일에 공습을 받아 방카 섬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체비아라는 무인도에 좌초했다. 스푸너 소장과 펄포드 소장을 포함한 약 40명은 섬에 상륙했으나 체비아 섬에는 식수와 식량이 거의 없었으며 말라리아 모기가 득실거렸다. 결국 생존자들은 두달 후 현지인의 배를 타고 수마트라에 상륙하여 일본군에게 항복했다. 체비아 섬에서 버티는 동안 스푸너 소장과 펄포드 소장을 포함한 18명이 기아와 말라리아로 죽었다.


2월 13일에 퍼시발 중장은 웨이벌 대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이제 저항은 하루이틀 밖에 지탱하지 못할 것이라고 전한 다음 병사와 민간인의 무익한 희생을 막기 위한 보다 폭넓은 자유재량권(사실상 항복할 권한)을 요청했다. 아직 처칠 수상의 엄격한 명령에 묶여 있던 데다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방어 준비를 위하여 시간이 필요했던 웨이벌 대장은 다음과 같이 강경한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귀관은 필요하다면 시가전을 감행해서라도 적에게 최대한 오래, 최대한 많은 피해를 주어야 한다. 귀관이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면서 최대한 오래 묶어두는 것은 다른 전역에 결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귀관의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반드시 저항을 계속해야 한다." 


2월 13일 전투는 주로 방어선의 서쪽 끝에서만 이루어졌다. 전날 호주군과 교전했던 일본제18사단장 무다구치 렌야 중장은 호주군 방어선을 뚫기가 어렵다고 보았는데 정확한 판단이었다. 제8호주사단장 벤넷 소장은 5개의 소규모 분견대를 제외한 모든 병력을 탕글린 막사를 중심으로 한 비교적 좁은 방어구역 내에 집결시켰다. 따라서 참호마다 병력이 꽉꽉 들어차 있었으며 측면이나 심지어 후방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선에도 대량의 병력을 배치했다.

탕글린 막사에는 보급품이 가득했다. 식량이 넘쳐흘러 병사들이 맛없는 표준 전투식량을 거부하고 별미를 찾아먹을 정도였다. 수영장에는 식수를 가득 채워 적어도 며칠 간은 물 걱정이 없었으며 피복도 충분했다. 심지어 위스키와 술도 사방에 널려있어 헌병대는 눈에 띄는대로 술을 압수하고 병사들이 취하지 않도록 감시하는데 골머리를 앓았다. 다만 탄약, 특히 야포탄이 부족했으나 단기간의 방어전을 치르는 데에는 충분했다.


따라서 제18사단은 호주군을 피해 남쪽의 제1말레이여단 방어선을 공격했다. 보병제56연대는 산포병제1대대 및 320mm 구포를 보유한 독립구포제14대대 1개 중대의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파시르판장 능선의 요충지인 270고지를 공격했다. 270고지를 지키던 제1말레이대대는 고정식 대구경 해안포의 지원 아래 열심히 싸워 능선을 지켰다. 하지만 일본군은 하루 종일 끈질기게 공격을 계속했고 말레이 여단은 힘껏 싸웠으나 오후가 되면서 서서히 압도되기 시작했다. 오후 5시가 되자 북쪽 125고지를 지키던 제2로얄대대가 보병제114연대에게 거의 포위당했고, 남쪽의 제2베드포드셔앤드하트포드셔 대대도 중형전차 1개 중대의 지원을 받은 제56연대제1대대의 공격을 받아 고지에서 쫓겨났다. 결국 해가 진 후에 제1말레이여단은 파시르판장 능선을 내어주고 알렉산드라 막사까지 철수했다. 이곳은 핵심 보급창과 싱가포르 최대의 탄약창, 그리고 군병원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제44여단도 함께 후퇴하여 말레이여단과 제8호주사단 사이를 방어했다. 그날 제2고든대대는 제27호주여단 휘하에 들어갔다.


제5사단은 가벼운 저항을 물리치면서 전진하여 수원지의 남쪽을 점령하고 13일 밤에 제54여단 정면에 진출했다. 이날 제5사단에 배속된 야전중포대가 케펠 항의 영국군 고정식 해안포와 포격전을 벌여 침묵시키기도 했다.

근위사단 또한 13일 하루동안 가벼운 저항을 받으면서 전진하여 13일 저녁까지 수원지 동쪽으로부터 제53여단, 제11사단 및 제2말레이여단 정면에 진출했다. 이날 근위보병제5연대제2대대는 영국군 식량창고를 점령하여 많은 식량을 노획했다.


(1942년 2월 12일 - 15일에 걸친 싱가포르 섬의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415)


14일 아침에 퍼시발 중장은 민방위 사령관 심슨 준장으로부터 조만간 물 공급이 끊길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오전 10시에 시청에서 퍼시발  중장은 시장과 민방위 사령관이 참석한 회의를 열었다. 시의 수도 기술자는 공습과 포격으로 수도관이 터져 2/3가 누수되고 있으며 물 공급이 길어야 48시간, 아마도 24시간 내로 중단될 것이라고 말했다. 퍼시발 중장은 보병으로서 남서부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공병 100여명을 불러들여 수도관 수리를 맡겼다.

이후 토머스 총독을 만난 퍼시발 중장은 조만간 물 공급이 끊길 것이라고 말했다. 토머스 총독은 런던의 식민성에 전문을 보내어 물 공급이 끊기면 전염병 발생으로 100만명에 달하는 민간인 사이에 엄청난 피해가 예상된다고 보고했다. 퍼시발 중장도 웨이벌 대장에게 비슷한 내용의 전문을 보냈으나 군대가 마실 물이 남아 있는 한 최후까지 싸우라는 답변을 받았다.


보병제55 및 제114연대는 14일 아침 8시 30분부터 박격포 및 야포의 화력 지원 아래 제1말레이여단의 방어선을 공격했다. 일본군이 몇 차례에 걸쳐 방어선을 돌파하자 영국군이 결사적인 총검돌격으로 몰아내었으며 그때마다 양쪽이 큰 피해를 입었다. 승부는 오후 4시에 일본전차가 투입되면서 결정났다. 전차의 지원을 받은 보병제114연대제2대대가 방어선의 좌익을 돌파하자 기진맥진한 제1말레이여단은 부킷처민까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말레이여단이 물러나면서 제2/13호주통합병원이 일본군 손에 떨어졌다. 일본군은 수술 중이던 부상병을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등 14일과 15일에 걸쳐 의료진과 부상병 약 150명을 학살했다. 이때 희생된 인물 가운데는 11일에 부상을 입고 입원 중이던 제22호주여단 부관 빌 소령도 있었다.

제1말레이여단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 상황은 북쪽에 있던 호주군 전선에서 잘 보였으며 호주군 야포에게 절호의 표적을 제공했다. 그러나 벤넷 소장은 포탄 부족을 이유로 호주군 전선에 대한 야포사격만 허용했다. 따라서 호주군 포병은 빤히 보이는 일본군에게 포탄 1발도 쏘아보지 못한 채 말레이 여단이 패배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호주군의 남쪽에 배치된 제2/4호주기관총대대 병사들은 남쪽에서 제1말레이여단을 공격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이동하는 일본군 종대를 몇 개나 발견했다. 기관총 1정만 있으면 몰살시킬 수 있었으나 이미 보병으로 개편된 그들도 뻔히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부킷티마 도로 북쪽에서는 일본제5사단이 14일 오전 내내 제54 및 제55여단 방어선에 포격을 가했다. 오후가 되자 일본군 중형전차들이 제55여단의 방어선을 뚫고 사임 도로를 따라 진격했다. 제55여단은 플레즌트 산의 주택지구에서 겨우 진격을 저지했다. 14일 밤이 되자 제55여단의 방어선은 맥리치 저수지의 부두에서 플레즌트 산 도로를 지나 부킷 브라운의 남쪽을 지나 아담 도로에서 제54여단과 연결했다.


저수지 동쪽에서는 근위보병제3연대제3대대가 톰슨 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105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제53여단과 제55여단 사이에 틈이 생겼다. 제11사단에서 1개 대대가 파견되어 틈을 메꾸었다.


동쪽에서는 근위보병제4연대가 14일 오후에 파야레바 활주로를 향하여 공격을 실시했다. 제2말레이여단의 방어선이 일시적으로 뚫렸으나 인접한 제11사단의 예비대가 달려와 일본군을 몰아내고 전선을 안정시켰다.


일본군은 14일에 호주군을 제외한 전 전선을 공격했다. 벤넷 소장은 약화된 주변 방어선에 일체의 도움을 주지 않은 채 완고하게 탕글린 막사를 중심으로 한 자신의 방어지역만 고수했다. 실제로 벤넷 소장은 이날 멜버른에 있는 호주육군본부에 보낸 전문에서 일본군이 호주군을 우회하여 싱가포르를 함락한다면 쓸데없는 희생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이제 벤넷 소장은 패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호주군의 희생을 줄이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있었다.


(1942년 2월 14일 아침 상황. Australia in the War of 1939–1945, Army, The Japanese Thrust, P.374)


이날 일본해군 선발대가 해군기지에 도착하여 조사를 실시했으며 근위사단은 우들라이 펌프장에서 불과 몇 백미터 떨어진 곳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싱가포르 섬의 일본군도 조호르 해협을 건너는 보급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다. 특히 탄약 부족이 심각하여 야포탄같은 경우 15일 아침이 되자 1문당 200발 정도 남았는데 이는 불과 2회의 교전을 치를만한 분량이었다. 


일본군의 포격과 공습으로 14일 저녁이 되자 싱가포르 시내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도로는 무너진 건물과 쓰러진 전신주, 망가진 자동차 등으로 막혔다. 민방위 조직은 최선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민간인 노동자들이 사라져서 잔해를 치우기는 커녕 시체를 매장할 수도 없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조직이 붕괴하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었다. 민간 병원은 부상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으며 임시 구호소로 사용되던 대형 호텔과 빌딩의 로비도 부상자로 들어찼다.


퍼시발 중장은 14일 오후 5시에 시청에서 다시 물 공급 회의를 열었다. 시의 수도 기술자는 공병대의 노력으로 물 공급 사정이 약간 호전되었다고 말했다. 퍼시발 중장은 민방위 사령관 심슨 준장에게 다음날 아침 7시에 다시 물 공급 상황에 대해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회의를 마쳤다. 저수지는 일본군 손에 떨어졌지만 영국군이 아직 우들라이 펌프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 공급은 지속되고 있었다.


14일 밤은 조용한 편이었다. 일본군은 어둠을 이용하여 대부분 전선에서 영국군 바로 앞까지 접근했으나 제18사단이 약간의 침투를 시도한 것 이외에는 방어선에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