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고립지대 전투(1) - 고립지대 형성
바탄반도 동쪽에서 제65여단이 고전하는 사이 서쪽에서는 기무라지대가 마우반을 점령한 기세를 몰아 제1필리핀군단을 추격하고 있었다. 제14군 사령관 혼마 중장이 1942년 1월 26일에 내린 명령에 따르면 기무라지대는 미-필리핀군이 방어를 강화할 시간을 주지 않도록 단번에 비누안간강까지 밀어붙이도록 되어 있었다. 혼마 중장은 동쪽의 제65혼성여단이 맡은 리마이에서 마리벨스산을 거쳐 기무라지대가 맡은 비누안간강을 잇는 선이 미-필리핀군의 최종방어선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당시 기무라지대는 제65혼성여단에서 파견된 보병제122연대(2개 중대 감편)와 요시오카 요리마사 대좌가 지휘하는 제16사단보병제20연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실제로 요시오카 대좌가 이끌던 병력은 연대본부, 제3대대(1개 중대 감편), 그리고 지원부대로서 1,000명 남짓했다. 제2대대는 상륙작전에 투입되었고 제1대대를 포함한 병력은 마닐라를 비롯하여 딴곳에 파견나가 있었다.
혼마 중장은 마우반선에서 기무라지대가 거둔 손쉬운 승리를 활용하기 위하여 기무라지대를 증강시키기로 결정했다. 마닐라에 머물던 제16사단장 모리오카 중장은 25일에 2개 대대와 독립공병제21연대본부를 이끌고 북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개 대대 중 제1대대는 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전멸했다. 모리오카 중장은 28일에 전선에 도착하여 기무라 소장으로부터 지휘권을 인수했으나 이후로도 제14군은 기무라지대라는 명칭을 폐지하지 않았다.
(오리온-바각 방어선.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8.html#18-1 P.325)
웨인라이트 장군이 지휘하는 제1군단의 방어선은 브라우어 장군의 우측 구역과 존스 장군의 좌측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브라우어 장군의 방어선은 동쪽의 판틴간강에서 서쪽의 7번오솔길까지 이어져 있었다. 7번오솔길은 필러-바각도로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서부도로까지 이어지는 산길이었다. 방어선의 우익은 제2경찰연대가 맡아 제2군단과의 연결을 확보했다. 중앙과 좌익은 제11사단(PA)이 맡았는데 중앙은 제13보병연대가 담당했고 7번오솔길이 포함된 좌익은 글렌 타운젠드 대령의 제11보병연대가 지켰다.
존스 장군의 방어선은 7번오솔길 바로 서쪽에서 서해안까지였다. 좌익은 스티븐스 장군의 제91사단이 맡았다. 카밀류 강에서 7번오솔길 바로 서쪽까지의 우익은 원래 제45보병연대(PS)가 맡았으나 극동미육군의 예비대가 되면서 26일에 전선에서 빠졌다. 존스 장군에게는 대신 세군도 장군의 제1사단(PA)이 주어졌다. 제1보병연대의 급조한 2개 대대와 제3보병연대의 1개 대대가 투입되었으나 여전히 스카우트가 지키던 방어선의 중앙이 비어 있었다. 다음날인 27일 오후에 바각 부근의 해안선을 지키던 제1보병연대제2대대가 철수하여 방어선의 빈틈에 투입되었다.
브라우어 장군의 방어선은 정글이 울창하고 지형이 복잡하여 연속된 방어선을 만들기가 어려웠는데 제1사단이 담당한 우익이 더 심했다. 우익에서는 서쪽으로부터 카밀류강, 코타강, 투올강이 북쪽으로 흐르다가 고고강에서 합류했다. 제1필리핀군단 방어선의 남쪽에는 서해안에서 7번오솔길로 연결되는 5번오솔길이 있었는데 미-필리핀군 공병대가 조금 북쪽에서 7번오솔길에 연결되는 오솔길을 새로 만들어 새5번오솔길이라고 이름붙였다. 복잡한 지형 때문에 이곳에 배치된 필리핀군은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데 애를 먹었으며 일본군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고립지대 전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8.html#18-3 P.336)
제1군단에 대한 일본군의 공세는 1942년 1월 26일에 시작되었다. 기무라 소장은 서해안의 미-필리핀군이 재편성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하여 서부도로를 따라 급히 내려와 제91사단 정면의 바각을 들이쳤다. 그러나 제91사단의 방어선은 견고하여 26일과 27일에 걸친 공격을 막아내었다. 그러자 일본군은 마우반에서 했듯이 미-필리핀군 방어선의 빈틈을 찾기 시작했다. 28일 밤에 일본군은 제1사단 구역에서 구멍을 찾았다.
제1사단은 바탄으로의 철수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어 후방에서 재편성 중에 제45보병연대를 대신하여 급히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병사들은 최선을 다하여 방어준비를 했으나 진도는 지지부진했다. 참호를 팔 도구와 도끼가 모자라서 식기와 숟가락으로 참호를 파고 총검으로 관목을 베는 형편이었다.
요시오카 대좌의 보병제20연대가 공격했을 때 제1사단은 열심히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제1사단 구역에서 아직 철조망을 치지 않은 구간을 발견했다. 방어선을 지키던 1개 중대 규모의 필리핀군을 간단히 제압한 일본군은 방어선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 코타강과 투올강을 따라 남진했다. 이때 방어선을 돌파한 요시오카연대는 연대본부와 제3대대(나카니시 간 소좌)를 기간으로 하여 약 1,0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선의 필리핀군은 반격을 가하여 31일에 돌파구를 닫았다.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 강을 따라 남하하던 일본군은 예상보다 험악한 정글에 당황했다. 강 양옆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대나무숲 때문에 강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어쩌다 발견하는 소로도 정글도로 관목과 덩굴을 쳐내면서 전진해야 했으며 시계는 3m 밖에 되지 않았다. 이곳에 주둔하던 필리핀군도 코타강과 투올강을 구별하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지도는 커녕 믿을만한 스케치 한장없는 일본군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방어선을 뚫고 들어온 일본군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정글 속을 헤매면서 필리핀군의 통신선을 끊고 적당한 곳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근처를 지나는 필리핀군을 공격하는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따라서 제1사단 병사들이 침투한 일본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한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착각은 역설적으로 필리핀군에게 도움이 되었다. 1,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지만 일본군의 소규모 정찰대가 침투했다고 믿은 필리핀 병사들은 공황에 빠지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요시오카연대는 침투 초기에 2개로 갈라졌다. 감편된 중대 규모의 병력은 코타강과 고고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필리핀군은 주방어선에서 370m 후방, 7번오솔길에서 서쪽으로 910m 떨어진 이곳을 작은 고립지대(Little Pocket)라고 불렀다.
요시오카연대의 주력은 동쪽으로 나아가 새5번오솔길과 7번오솔길이 만나는 제11보병연대의 구역 안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29일 아침에 고든 마이어스 대위의 제51사단 임시대대가 제1사단을 증원하러 7번오솔길을 따라 북상하다가 남쪽으로 이동하던 일본군과 맞닥뜨렸다. 총격전에 이어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일본군은 갑자기 교전을 회피하고 사라졌다. 잠시 후 이번에는 북쪽에서 남하하던 제11보병연대가 사격을 받아 사망자가 발생했다. 명령을 받고 정찰을 나섰던 부사관 1명은 7번오솔길과 새5번오솔길의 교차로에서 북쪽으로 180m 떨어진 지점에서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이로써 일본군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곳은 큰 고립지대(Big Pocket)로 불렸다. 큰 고립지대 때문에 제11보병연대는 7번오솔길과 새5번오솔길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제11보병연대장 타운젠드 대령은 큰 고립지대 내의 일본군 숫자를 과소평가하여 달랑 2개 중대를 보냈다가 소탕에 실패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타운젠드 대령이 증원을 요청하자 극동미육군사령부에서 제45보병연대제1대대(PS)를 파견했다. 스카우트대대의 선두중대가 29일 오후 8시에 현장에 도착하여 다음날로 예정된 공격을 준비했다.
30일 아침에 스카우트중대가 남쪽에서, 제11보병연대가 북쪽에서 공격했지만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큰 고립지대 내의 일본군은 숫자도 많았을 뿐 아니라 만반의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모든 병력이 개인호를 파고 들어앉아 있었으며 개인호 사이는 교통호로 연결하여 적의 눈에 띄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기관총좌는 쓰러진 나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만들었다. 심지어 참호를 파면서 나온 흙도 조심스럽게 처리하여 주변에 참호가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
해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군의 야포는 나쁜 시야, 부정확한 지도, 그리고 빽빽한 나무 때문에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박격포 또한 불발율이 높아서 효과가 제한적이었다. 결국 병사들이 의지할 수 있는 지원화기라고는 브라우닝자동소총이나 기관총 정도가 한계였다.
큰 고립지대는 대부분 우측구역에 있었으나 일부가 좌측구역에 걸쳐 있었다. 따라서 웨인라이트 장군은 우측구역사령관인 브라우어 장군에게 큰 고립지대 소탕에 필요한 지역 전체에 대한 지휘권을 주었으며 브라우어 장군은 제11보병연대장 타운젠드 대령에게 현장지휘를 맡겼다. 이로써 좌측구역사령관 존스 장군은 작은 고립지대 소탕에 전념할 수 있었다.
고립지대에 갇힌 일본군의 처지는 암담했다. 제1사단이 31일에 돌파구를 닫으면서 요시오카연대는 필리핀군 후방에 고립되었다. 일본제16사단장 모리오카 중장은 비행기로 요시오카연대에게 식량과 탄약을 떨어뜨려 주었으나 해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낙하산이 필리핀군 지역에 떨어져 식량부족으로 고생하던 필리핀군의 환영을 받았다.
요시오카연대를 구출하려면 북쪽으로부터 필리핀군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 연결하는 수 밖에 없었으나 당장에는 병력이 없었다. 보병제122연대의 전력으로는 제1 및 제91사단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곧 병력이 생겼다. 아부케이로부터 남하한 보병제33연대제2대대가 2월 4일에 전선에 도착했으며 다음날에는 제65혼성여단 휘하에서 싸우던 다케치 대좌의 보병제9연대(제3대대감편)가 바각에 도착했다.
모리오카 중장은 6일 밤늦게 공세를 시작했다. 보병제9 및 제122연대가 방어선 중앙에 공세를 가하여 필리핀군을 고착시키는 사이 보병제33연대제2대대가 7번오솔길을 따라 공격했다. 일본군은 자정을 막 넘긴 7일 새벽에 제11보병연대의 방어선을 뚫었다. 공격을 정면으로 받은 F중대의 한 소대는 27명의 소대원 중 18명이 개인호 안에서 죽었으며 생존자는 전원 부상을 입었다. 이제 일본군이 7번오솔길을 따라 남하하기만 하면 큰 고립지대와 연결될 것이었다. 이 사태를 막은 건 제11보병연대제2대대장 헬머트 뒤스터호프 소령이었다. 그는 대대본부 병력을 중심으로 전방에서 도망쳐오는 부하들을 규합하여 거침없이 남하하는 일본군에게 날카로운 역습을 가했다. 놀란 적이 움찔하는 동안 브라우어 장군이 급파한 보병중대와 전차소대가 도착하여 550m 까지 밀고 들어온 일본군을 막아섰다. 큰 고립지대까지는 아직 730m가 남은 상태였다. 이때 밀고 들어온 일본군은 손가락같이 길쭉한 돌출부를 형성했는데 필리핀군은 이걸 윗쪽 고립지대(Upper Pocket)이라고 불렀다.
보병제33연대제2대대의 공세는 비록 큰 고립지대와 연결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제1군단의 방어선에 구멍을 내어 위기를 불러왔다. 이로써 3개의 고립지대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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