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고립지대 전투(1) - 고립지대 형성


바탄반도 동쪽에서 제65여단이 고전하는 사이 서쪽에서는 기무라지대가 마우반을 점령한 기세를 몰아 제1필리핀군단을 추격하고 있었다. 제14군 사령관 혼마 중장이 1942년 1월 26일에 내린 명령에 따르면 기무라지대는 미-필리핀군이 방어를 강화할 시간을 주지 않도록 단번에 비누안간강까지 밀어붙이도록 되어 있었다. 혼마 중장은 동쪽의 제65혼성여단이 맡은 리마이에서 마리벨스산을 거쳐 기무라지대가 맡은 비누안간강을 잇는 선이 미-필리핀군의 최종방어선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당시 기무라지대는 제65혼성여단에서 파견된 보병제122연대(2개 중대 감편)와 요시오카 요리마사 대좌가 지휘하는 제16사단보병제20연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실제로 요시오카 대좌가 이끌던 병력은 연대본부, 제3대대(1개 중대 감편), 그리고 지원부대로서 1,000명 남짓했다. 제2대대는 상륙작전에 투입되었고 제1대대를 포함한 병력은 마닐라를 비롯하여 딴곳에 파견나가 있었다.


혼마 중장은 마우반선에서 기무라지대가 거둔 손쉬운 승리를 활용하기 위하여 기무라지대를 증강시키기로 결정했다. 마닐라에 머물던 제16사단장 모리오카 중장은 25일에 2개 대대와 독립공병제21연대본부를 이끌고 북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개 대대 중 제1대대는 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전멸했다. 모리오카 중장은 28일에 전선에 도착하여 기무라 소장으로부터 지휘권을 인수했으나 이후로도 제14군은 기무라지대라는 명칭을 폐지하지 않았다.


(오리온-바각 방어선.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8.html#18-1 P.325)


웨인라이트 장군이 지휘하는 제1군단의 방어선은 브라우어 장군의 우측 구역과 존스 장군의 좌측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브라우어 장군의 방어선은 동쪽의 판틴간강에서 서쪽의 7번오솔길까지 이어져 있었다. 7번오솔길은 필러-바각도로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서부도로까지 이어지는 산길이었다. 방어선의 우익은 제2경찰연대가 맡아 제2군단과의 연결을 확보했다. 중앙과 좌익은 제11사단(PA)이 맡았는데 중앙은 제13보병연대가 담당했고 7번오솔길이 포함된 좌익은 글렌 타운젠드 대령의 제11보병연대가 지켰다.


존스 장군의 방어선은 7번오솔길 바로 서쪽에서 서해안까지였다. 좌익은 스티븐스 장군의 제91사단이 맡았다. 카밀류 강에서 7번오솔길 바로 서쪽까지의 우익은 원래 제45보병연대(PS)가 맡았으나 극동미육군의 예비대가 되면서 26일에 전선에서 빠졌다. 존스 장군에게는 대신 세군도 장군의 제1사단(PA)이 주어졌다. 제1보병연대의 급조한 2개 대대와 제3보병연대의 1개 대대가 투입되었으나 여전히 스카우트가 지키던 방어선의 중앙이 비어 있었다. 다음날인 27일 오후에 바각 부근의 해안선을 지키던 제1보병연대제2대대가 철수하여 방어선의 빈틈에 투입되었다.


브라우어 장군의 방어선은 정글이 울창하고 지형이 복잡하여 연속된 방어선을 만들기가 어려웠는데 제1사단이 담당한 우익이 더 심했다. 우익에서는 서쪽으로부터 카밀류강, 코타강, 투올강이 북쪽으로 흐르다가 고고강에서 합류했다. 제1필리핀군단 방어선의 남쪽에는 서해안에서 7번오솔길로 연결되는 5번오솔길이 있었는데 미-필리핀군 공병대가 조금 북쪽에서 7번오솔길에 연결되는 오솔길을 새로 만들어 새5번오솔길이라고 이름붙였다. 복잡한 지형 때문에 이곳에 배치된 필리핀군은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데 애를 먹었으며 일본군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고립지대 전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8.html#18-3 P.336)


제1군단에 대한 일본군의 공세는 1942년 1월 26일에 시작되었다. 기무라 소장은 서해안의 미-필리핀군이 재편성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하여 서부도로를 따라 급히 내려와 제91사단 정면의 바각을 들이쳤다. 그러나 제91사단의 방어선은 견고하여 26일과 27일에 걸친 공격을 막아내었다. 그러자 일본군은 마우반에서 했듯이 미-필리핀군 방어선의 빈틈을 찾기 시작했다. 28일 밤에 일본군은 제1사단 구역에서 구멍을 찾았다.


제1사단은 바탄으로의 철수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어 후방에서 재편성 중에 제45보병연대를 대신하여 급히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병사들은 최선을 다하여 방어준비를 했으나 진도는 지지부진했다. 참호를 팔 도구와 도끼가 모자라서 식기와 숟가락으로 참호를 파고 총검으로 관목을 베는 형편이었다.


요시오카 대좌의 보병제20연대가 공격했을 때 제1사단은 열심히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제1사단 구역에서 아직 철조망을 치지 않은 구간을 발견했다. 방어선을 지키던 1개 중대 규모의 필리핀군을 간단히 제압한 일본군은 방어선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 코타강과 투올강을 따라 남진했다. 이때 방어선을 돌파한 요시오카연대는 연대본부와 제3대대(나카니시 간 소좌)를 기간으로 하여 약 1,0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선의 필리핀군은 반격을 가하여 31일에 돌파구를 닫았다.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 강을 따라 남하하던 일본군은 예상보다 험악한 정글에 당황했다. 강 양옆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대나무숲 때문에 강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어쩌다 발견하는 소로도 정글도로 관목과 덩굴을 쳐내면서 전진해야 했으며 시계는 3m 밖에 되지 않았다. 이곳에 주둔하던 필리핀군도 코타강과 투올강을 구별하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지도는 커녕 믿을만한 스케치 한장없는 일본군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방어선을 뚫고 들어온 일본군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정글 속을 헤매면서 필리핀군의 통신선을 끊고 적당한 곳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근처를 지나는 필리핀군을 공격하는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따라서 제1사단 병사들이 침투한 일본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한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착각은 역설적으로 필리핀군에게 도움이 되었다. 1,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지만 일본군의 소규모 정찰대가 침투했다고 믿은 필리핀 병사들은 공황에 빠지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요시오카연대는 침투 초기에 2개로 갈라졌다. 감편된 중대 규모의 병력은 코타강과 고고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필리핀군은 주방어선에서 370m 후방, 7번오솔길에서 서쪽으로 910m 떨어진 이곳을 작은 고립지대(Little Pocket)라고 불렀다. 


요시오카연대의 주력은 동쪽으로 나아가 새5번오솔길과 7번오솔길이 만나는 제11보병연대의 구역 안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29일 아침에 고든 마이어스 대위의 제51사단 임시대대가 제1사단을 증원하러 7번오솔길을 따라 북상하다가 남쪽으로 이동하던 일본군과 맞닥뜨렸다. 총격전에 이어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일본군은 갑자기 교전을 회피하고 사라졌다. 잠시 후 이번에는 북쪽에서 남하하던 제11보병연대가 사격을 받아 사망자가 발생했다. 명령을 받고 정찰을 나섰던 부사관 1명은 7번오솔길과 새5번오솔길의 교차로에서 북쪽으로 180m 떨어진 지점에서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이로써 일본군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곳은 큰 고립지대(Big Pocket)로 불렸다. 큰 고립지대 때문에 제11보병연대는 7번오솔길과 새5번오솔길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제11보병연대장 타운젠드 대령은 큰 고립지대 내의 일본군 숫자를 과소평가하여 달랑 2개 중대를 보냈다가 소탕에 실패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타운젠드 대령이 증원을 요청하자 극동미육군사령부에서 제45보병연대제1대대(PS)를 파견했다. 스카우트대대의 선두중대가 29일 오후 8시에 현장에 도착하여 다음날로 예정된 공격을 준비했다.


30일 아침에 스카우트중대가 남쪽에서, 제11보병연대가 북쪽에서 공격했지만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큰 고립지대 내의 일본군은 숫자도 많았을 뿐 아니라 만반의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모든 병력이 개인호를 파고 들어앉아 있었으며 개인호 사이는 교통호로 연결하여 적의 눈에 띄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기관총좌는 쓰러진 나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만들었다. 심지어 참호를 파면서 나온 흙도 조심스럽게 처리하여 주변에 참호가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


해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군의 야포는 나쁜 시야, 부정확한 지도, 그리고 빽빽한 나무 때문에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박격포 또한 불발율이 높아서 효과가 제한적이었다. 결국 병사들이 의지할 수 있는 지원화기라고는 브라우닝자동소총이나 기관총 정도가 한계였다.


큰 고립지대는 대부분 우측구역에 있었으나 일부가 좌측구역에 걸쳐 있었다. 따라서 웨인라이트 장군은 우측구역사령관인 브라우어 장군에게 큰 고립지대 소탕에 필요한 지역 전체에 대한 지휘권을 주었으며 브라우어 장군은 제11보병연대장 타운젠드 대령에게 현장지휘를 맡겼다. 이로써 좌측구역사령관 존스 장군은 작은 고립지대 소탕에 전념할 수 있었다. 


고립지대에 갇힌 일본군의 처지는 암담했다. 제1사단이 31일에 돌파구를 닫으면서 요시오카연대는 필리핀군 후방에 고립되었다. 일본제16사단장 모리오카 중장은 비행기로 요시오카연대에게 식량과 탄약을 떨어뜨려 주었으나 해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낙하산이 필리핀군 지역에 떨어져 식량부족으로 고생하던 필리핀군의 환영을 받았다. 


요시오카연대를 구출하려면 북쪽으로부터 필리핀군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 연결하는 수 밖에 없었으나 당장에는 병력이 없었다. 보병제122연대의 전력으로는 제1 및 제91사단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곧 병력이 생겼다. 아부케이로부터 남하한 보병제33연대제2대대가 2월 4일에 전선에 도착했으며 다음날에는 제65혼성여단 휘하에서 싸우던 다케치 대좌의 보병제9연대(제3대대감편)가 바각에 도착했다.


모리오카 중장은 6일 밤늦게 공세를 시작했다. 보병제9 및 제122연대가 방어선 중앙에 공세를 가하여 필리핀군을 고착시키는 사이 보병제33연대제2대대가 7번오솔길을 따라 공격했다. 일본군은 자정을 막 넘긴 7일 새벽에 제11보병연대의 방어선을 뚫었다. 공격을 정면으로 받은 F중대의 한 소대는 27명의 소대원 중 18명이 개인호 안에서 죽었으며 생존자는 전원 부상을 입었다. 이제 일본군이 7번오솔길을 따라 남하하기만 하면 큰 고립지대와 연결될 것이었다. 이 사태를 막은 건 제11보병연대제2대대장 헬머트 뒤스터호프 소령이었다. 그는 대대본부 병력을 중심으로 전방에서 도망쳐오는 부하들을 규합하여 거침없이 남하하는 일본군에게 날카로운 역습을 가했다. 놀란 적이 움찔하는 동안 브라우어 장군이 급파한 보병중대와 전차소대가 도착하여 550m 까지 밀고 들어온 일본군을 막아섰다. 큰 고립지대까지는 아직 730m가 남은 상태였다. 이때 밀고 들어온 일본군은 손가락같이 길쭉한 돌출부를 형성했는데 필리핀군은 이걸 윗쪽 고립지대(Upper Pocket)이라고 불렀다.


보병제33연대제2대대의 공세는 비록 큰 고립지대와 연결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제1군단의 방어선에 구멍을 내어 위기를 불러왔다. 이로써 3개의 고립지대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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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2번오솔길(Trail 2) 전투


(오리온-바각 방어선.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8.html#18-1 P.325)

제2필리핀군단에 대한 일본제65혼성여단의 공격은 C구역에 집중되었다. 길이가 4,100m 인 C구역 전선의 서쪽에서 1/4 지점에는 사맛산의 동쪽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2번오솔길이 있었는데 2번오솔길은 제2필리핀군단의 방어 지역에서 동부도로를 제외하고는 남쪽으로 가장 쉽게 내려갈 수 있는 통로였다.


(2번오솔길 전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8.html#18-2 P.333)


C구역 사령관인 제31사단장(PA) 블루멜 준장은 2번오솔길을 중심으로 서쪽 1/4에는 제51사단의 잔존병 1,500명으로 이루어진 제51전투단을 배치하고 동쪽 3/4에는 자신의 사단인 제31사단을 배치했다. 가장 중요한 방어목표인 2번오솔길 좌우 550m 에는 개인호를 여러개 파서 강력한 방어준비를 갖추었다.


26일 아침에 방어선을 시찰한 블루멜 준장은 방어선의 동쪽 끝에 배치된 제31보병연대제1대대가 이동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대장에게 물어보니 그날 새벽에 명령을 받았는데 A구역으로 이동하여 제31보병연대 주력에 합류하라는 것이었다. 블루멜 준장은 금시초문이었으므로 자신의 직접 명령이 있기 전에는 방어선을 떠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오전 10시에 방어선의 중앙에 도착한 블루멜 준장은 깜짝 놀랐다. 2번오솔길의 동쪽을 지키던 제33보병연대가 통째로 사라져 그 중요한 방어선이 텅 비어 있었다. 사라진 연대를 찾아 헤매던 블루멜 준장은 오후 2시가 되어서야 제33보병연대가 오전 8시에 방어선을 떠나 D구역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원래 D구역을 지키던 제57보병연대(PS)가 극동미육군사령부의 예비대가 되어 후방으로 빠졌기 때문이었다.

블루멜 준장은 예비대인 제32보병연대제2대대와 보병으로 개편된 제31포병연대본부포대 병력 60명을 2번오솔길 동쪽으로 파견했다. 이들이 방어선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30분이었다. 따라서 거의 10시간동안 그 중요한 방어선이 비어 있었다. 그 사이 일본군이 공격했으면 텅빈 방어선을 지나 단번에 리마이까지 도달했을 것이다.


방어선의 빈틈을 메운지 30분이 지난 오후 6시에 제2필리핀군단장 파커 장군이 전화를 걸어와 아침에 블루멜 준장이 이동을 불허했던 제31보병연대제1대대를 A구역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대신 D구역으로부터 제41보병연대(제1대대 감편)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도착시간이 다음날 오후였으므로 블루멜 준장은 예비대에서 제32보병연대의 마지막 대대를 빼내어 제31보병연대제1대대가 떠난 자리를 메꾸어야 했다. 그리하여 26일 밤에 블루멜 준장은 2번오솔길 동쪽의 긴 방어선을 제32보병연대의 3개 대대와  제31포병연대본부포대만으로 지켜야 했다. 예비대라고는 소총으로만 무장한 제31공병대대 450명이 모두였다.


26일 오후 4시에 제65여단은 제14군사령관 혼마 중장으로부터


"사맛산과 오리온 지역으로 공격하여 바각 지역을 공격하는 기무라 지대와 연결하라."


는 명령을 받았다. 오후 7시에 일본제65여단의 정찰대가 2번오솔길로 남하하다가 총격을 받고 물러났다.


제65여단장 나라 중장은 공격의 중점을 C구역에 두었다. 가장 중요한 목표인 2번오솔길은 다케치 대좌의 보병제9연대가 맡을 것이었다. 그 동쪽에서는 보병제141연대가 공격할 것이었다. 보병제9연대의 서쪽은 요시자와 마사타로 대좌의 보병제142연대(제1대대 감편)가 맡아 C구역과 D구역의 경계선을 공격할 것이었다. 동해안에서는 다나베 타다지 소좌의 보병제142연대제1대대가 견제공격을 담당할 것이었다. 야포는 후방에 있어 화력지원이 불가능했다.


27일에 실시된 제65여단의 공세는 부대 이동에 시간이 걸려 오후 3시에 시작했다. 우선 동해안의 다나베 소좌가 지휘하는 보병제142연대제1대대가 동부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미-필리핀군의 주의를 끌었다. A 구역을 지키던 제31보병연대(PA)가 몇 발의 총격을 가하자 다나베대대는 진격을 멈추었다. 다나베 소좌는 이로써 미-필리핀군의 주의를 충분히 끌었다고 생각했으나 정작 제31보병연대는 이것을 적의 공격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다나베대대를 제외한 보병제142연대 주력은 오후 4시에 C구역과 D구역의 경계선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방어선에 접근하여 거센 총격을 받자 진격을 멈추었다.


주공을 맡은 보병제9연대와 보병제141연대는 필러강과 방어선 사이의 작은 마을인 카폿을 노렸다. 양 연대는 해가 어스름하게 넘어갈 때쯤 공격을 시작했는데 대부분 필러강을 건너는데 실패했다. 단지 보병제9연대의 1개 대대만이 필러강을 건너 방어선의 70m 전방에 위치한 대나무숲까지 전진하는데 성공했다.

전방에서의 보고를 받은 나라 중장은 부하들이 예상보다 강한 저항에 직면했다는 것을 알았으나 27일 밤에도 여전히 자신이 미-필리핀군의 주저항선이 아닌 전초선을 공격하고 있다고 믿었다.


27일 저녁이 되자 파커 장군이 약속했던대로 제41보병연대(제1대대감편)가 C구역에 도착했다. 블루멜 준장은 제3대대를 2번오솔길 동쪽 1,100m 에 걸쳐 배치했다. 기존에 배치되어 있던 제31보병연대제2대대는 방어선을 물려주고 동쪽으로 방어지역을 옮겼다. 제41보병연대제3대대에는 기관총이 없었으므로 제32보병연대제2대대는 화기중대인 H중대를 넘겨주고 떠났다.

제41보병연대F중대는 전선 바로 뒷쪽에서 2번오솔길에 주둔하여 적의 기습적인 강행돌파에 대비했다. F중대를 제외한 제41보병연대제2대대는 연대예비대가 되었다. 

따라서 C구역의 동쪽은 제31보병연대(H중대 감편), 중앙은 제41보병연대(제31보병연대H중대와 제31포병연대지휘포대 증편), 그리고 2번오솔길 서쪽은 제51전투단이 지켰고, 전선 바로 뒤의 2번오솔길상에 제41보병연대F중대가 주둔했다.


28일 하루동안 나라 중장은 공격을 중단하고 야포의 도착을 기다리면서 전선을 재편했다. 그는 공격의 중점을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보병제9연대의 동쪽에 있던 보병제141연대에게 서쪽으로 이동하여 보병제142연대와 보병제9연대 사이에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다나베대대는 여전히 동해안을 맡았다.


29일 공격은 오후 6시 30분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서쪽에서 진격한 보병제142연대는 티아위르강을 건너 D구역의 제22보병연대 정면으로 공격했으나 저지당했다. 보병제141연대는 자정이 되어서야 도착했기 때문에 공격에 참가할 수 없었다.


2번오솔길을 노린 보병제9연대의 공격은 좀 더 위협적이었다. 보병제9연대 주력은 필러강을 건너 전날밤부터 방어선 전방 70m 지점에 위치한 대나무숲에 숨어있던 대대와 합류했다. 여기서 일본군은 필리핀군 방어선을 향하여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참호가 필리핀군의 철조망에 닿자 연대장 다케치 대좌는 화력지원을 요청했다. 일본군의 야포가 1시간의 준비포격을 마치자 보병제9연대가 일제히 참호에서 일어나 바로 눈앞의 필리핀군 방어선으로 돌격하면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2번오솔길과 그 동쪽을 지키던 제41보병연대는 제32보병연대H중대의 기관총 사격에 힘입어 일본군의 돌격을 가까스로 저지했다. 2번오솔길 자체를 지키던 K중대는 백병전까지 치르는 격전 끝에 일본군을 막았다. 오솔길 서쪽의 제51전투단은 일본군에게 밀려 전선이 붕괴될 위기에 처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증원군이 도착하여 일본군을 몰아내었다. 날이 밝았을 때 필리핀군은 방어선 140m 이내에서 100구 가까운 일본군 시체를 확인했다.


30일에는 일본군이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전투에 참가한지 1달이 넘어가면서 제65여단의 피해도 누적되었으며 특히 장교의 피해가 컸다. 이에 따라 전투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었으며 살아남은 병사들의 피로 또한 극심했다. 설상가상으로 30일 아침에 제65여단의 핵심 전력인 보병제9연대를 31일 밤까지 제16사단으로 복귀시키라는 제14군사령관 혼마 중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어쨌든 공격은 재개해야 했으므로 동해안에 있던 다나베대대가 보병제9연대를 대신하기 위하여 불려왔다. 전력 약화를 보상하기 위하여 나라 중장은 충실한 항공 및 야포지원을 계획했다.


31일 공격은 오후 5시에 일본항공기가 판단강 남쪽에 배치되어 있던 제2필리핀군단 포병단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1시간에 걸친 공습이 끝나자 일본야포가 90분에 걸쳐 2번오솔길 좌우를 연대예비선까지 조직적으로 포격했다. 오후 7시 30분이 되자 포격이 멈추었고 보병이 이동을 시작했다. 블루멜 준장은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야포가 포격을 멈추자 C구역의 미-필리핀군 야포들이 일제히 포문을 열어 필러강 한가운데에 포탄을 쏟아부었다. 마른 강바닥을 건너던 일본군은 갑작스런 포격에 큰 피해를 입었으며 간신히 강을 건넌 일본군에게는 엄청난 기관총 세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으로 공격은 끝났다.


보병제9연대장 다케치 대좌는 전투의 혼란통에 대나무숲에서 빠져나와 북상할 생각이었지만 일본군의 공격이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로 끝나버리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부상자가 많았기 때문에 적의 눈앞에서 연대가 한꺼번에 탈출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보병제9연대는 밤새 1개 대대만 철수시킬 수 있었다. 일단 날이 밝으면 이동이 불가능했고 밤이 되어서야 다시 1개 대대가 철수했다. 따라서 2일 아침에도 대나무숲에는  보병제9연대의 1개 대대가 남아 있었다.


2일 아침에 C구역 사령관 블루멜 준장은 대나무숲에 역습을 감행했다. 2.95인치 산포 1개 포대가 300m 거리에서 대나무숲에 직사를 가한 다음 제31공병대대(PA) 450명이 방어선을 넘어 대나무숲으로 진격했다. 방어선에 포진한 병력이 소화기 사격으로 엄호해 주었다. 공병대대는 대나무숲 입구에서 강력한 저항을 받아 진격을 멈추었다. 대나무숲에는 블루멜 준장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일본군 1개 대대가 숨어 있었다. 즉시 제41보병연대에서 1개 대대가 증원되었으나 역시 공격에 실패했다. 보병대대와 공병대대는 대나무숲 앞에 참호를 팠다.


3일 아침이 되자 보병대대와 공병대대는 대나무숲으로 쳐들어갔으나 일본군은 밤새 달아난 후였다. 이로써 보병제9연대는 탈출에 성공했으나 연속된 전투로 큰 피해를 입어 중대당 평균 병력이 60명으로 줄어들었다. 필리핀군은 대나무숲을 통과한 후 그대로 북상하여 필러-바각도로에서 남쪽으로 140m 지점에 도달한 다음 전초선을 형성했다. 이로써 2번오솔길에 대한 위협은 사라졌다.


3번의 공격실패로 큰 타격을 입은 제65여단은 이후 8일까지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면서 피해를 추스르고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2월 8일이 되자 공격준비가 완료되어 다음날인 9일에 공격을 시작할 계획이었으나 이날 제14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공격을 중단시켰다. 이후 밤 11시 30분에 다시 제14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제65여단에게 필러-바각도로 북쪽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잇따른 공격실패로 전력이 소진된 제14군이 바탄공략을 포기하고 봉쇄로 방침을 바꾼 것이었다. 단지 제65여단의 공격 실패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바탄반도 서해안에 상륙했던 보병대대 2개는 증발했으며 1월 26일에 제1필리핀군단을 공격했던 다나카지대에도 참극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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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오리온-바각 방어선


바탄반도 서해안에 상륙한 일본군에 대한 소탕전이 벌어지는 동안 제1 및 제2필리핀군단의 방어선에서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1942년 1월 26일 아침까지 제1및 제2필리핀군단의 병사들은 동해안의 오리온에서 서해안의 바각을 잇는 최종방어선에 배치되었다. 이 방어선은 바탄을 동서로 연결하는 필러-바각도로를 따라 설정했으나 일치하지는 않았다.


오리온-바각 방어선은 나티브산이 중간에 박혀 있어 제1 및 제2필리핀군단이 분리되었던 아부케이-마우반 방어선과 달리 두 군단이 접촉하여 연속적인 방어선을 이루었다. 또한 아부케이-마우반 선을 지킬 때보다 방어해야 할 해안선이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해안선의 방어도 충실해졌다.


이제 미-필리핀군이 장악한 지역은 약 520㎢ 로 줄어들었으며 여기에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90,000명의 인원이 들어 있었다. 가장 높은 산은 마리벨스산으로 지역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동해안의 좁은 평야 지역을 제외하면 모두 산지로서 짙은 정글에 덮여 있었다. 평균기온은 섭씨 35도로 햇볕이 들지 않는 정글 속에서도 한낮의 열기는 대단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었으며 갈증에 시달렸다. 이 시기는 건기라 더위를 식혀줄 스콜도 거의 내리지 않았다. 반면 해가 지면 기온은 급격히 떨어져서 낮에 폭염으로 고통받던 병사들을 추위로 떨게 만들었다.


제1 및 제2필리핀군단의 경계는 마리벨스산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판틴간강이었다. 판틴간강의 동쪽인 제2필리핀군단 지역에는 545m 높이의 사맛산이 있어서 전장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사맛산의 동쪽은 늪지, 덤불, 사탕수수밭, 평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몇개의 강이 마닐라만으로 흘러들어 갔다. 건기인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강이 말라 있었지만 그래도 군대의 이동에 방해가 되었다.

판틴간강의 서쪽인 제1필리핀군단 지역에는 사탕수수밭이나 평지가 없었다. 마리벨스산에서 급격하게 떨어지는 사면이 바로 바다로 이어지고 있었으며 정글은 동쪽보다 더욱 울창했다.


미-필리핀군은 최종방어선으로 철수하면서 바탄반도를 동서로 관통하면서 차량 통행이 가능한 유일한 도로인 필러-바각도로를 잃었다. 그러나 도로의 대부분 구간을 야포의 사정거리 내에 두고 도로 중간 부분을 점유함으로써 일본군의 사용 또한 거부했다. 공병대가 방어선 후방에서 동서의 오솔길을 연결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2월 중순에 완성함으로써 사람과 보급품을 짊어진 가축은 동서를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차량은 여전히 해안을 따라 달리는 동부도로와 서부도로를 통하여 동서를 오가야 했다.


오리온-바각 방어선은 아부케이-마우반 방어선과 달리 단위부대가 아닌 구역(sector)으로 나누고 구역사령관이 직접 군단장의 지휘를 받는 구조로 바꾸었다. 전투를 거치면서 같은 급의 단위부대끼리 전력 격차가 크게 벌어진 상황에서 이는 합리적인 방안이었다. 제2필리핀군단의 방어선은 A, B, C, D 구역으로 나누었으며 해안방어를 담당한 동부지구사령부를 E 구역으로 삼았다. 제1필리핀군단의 방어선은 우측 및 좌측구역으로 나누었으며 해안방어를 담당한 서부지구사령부를 남측구역으로 삼았다.


처음에 군단장들은 중요한 구역에 정예보병인 필리핀사단 소속의 스카우트 연대를 배치했으나 맥아더 사령부는 필리핀사단 전체를 직할 예비대로 삼기를 원했다. 따라서 스카우트 연대는 1월 26일에 후방으로 이동했으며 이후 군단의 지휘에서 벗어나 극동미육군사령부의 직접 지휘 아래 있다가 군단장의 요청에 따라 지원해 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조치로 방어선에 배치된 스카우트 연대가 후방으로 빠지면서 제1필리핀군단의 방어선에 혼란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오리온-바각 방어선.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8.html#18-1 P.325)


1942년 1월 27일 현재 오리온-바각 방어선의 배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제2필리핀군단은 동해안에서 판틴간강까지 14,000m 를 맡았으며 방어선은 동쪽으로부터 A, B, C, D 4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다.

A 구역은 리마이 북쪽 해안으로부터 오리온 남서쪽까지 2,300m 에 걸쳐 있었으며 제31보병연대(PA)가 담당했다.

B구역은 약 1,800m 에 걸쳐 있었는데 육군항공대 요원 1,400명으로 이루어진 임시항공연대가 담당했으며 사령관은 제31보병연대(US)에서 파견된 노련한 보병 지휘관인 어빈 도안 대령이었다.

C 구역은 4,100m 에 걸쳐 있었으며 제32보병연대(PA)와 제51전투단(PA, 제51사단의 잔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령관은 제31사단장 클리포드 블루멜 준장이었다.

D구역은 사맛산에서 판틴간강에 이르는 5,500m 구간으로 제21 및 제41사단(PA)과 제33보병연대(PA, 제1대대 감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령관은 필리핀 사단장인 맥슨 로우 준장이었다.

E 구역은 해안방어를 담당하던 기존의 동부지구사령부 구역으로 배치된 병력도 동일했으며 사령관 또한 동부지구사령관이었던 프란치스코 장군이 유임되었다. 

군단예비대는 제33보병연대제1대대(PA), 그리고 필리핀육군 전투공병대였다. 여기에 추가하여 극동미육군사령부 직할인 제31보병연대(US)가 리마이에 주둔하고 있어서 제2필리핀군단장이 요청하면 배속될 것이었다.


방어정면이 가장 넓은 D 구역의 화력지원을 위하여 75mm 야포 16문과 2.95인치 산포 8문을 가진 제41야포연대(PA)가 사맛산 능선에 포진했다. 나머지 구역의 화력지원을 위하여 40문의 75mm 야포를 갖춘 제21, 제31 및 제51(PA) 사단포병과 75mm 야포와 2.95인치 산포를 가진 스카우트 야포대대 2개가 전개했다. 해안방어를 맡은 E 구역은 제21야포연대의 지원을 받았으며 추가로 10문 정도의 해군포가 가세했다. 구형 155mm 평사포를 가진 제301야포연대(PA)와 제86야포대대(PS)로 이루어진 군단포병은 리마이 부근에 주둔했다.


제1필리핀군단은 서해안에서 판틴간강까지 12,000m 를 맡았으며 방어선은 7번 오솔길(Trail 7)을 기준으로 좌측 및 우측의 2개 구역으로 나뉘었다.

우측 구역은 7번 오솔길을 포함한 동쪽 5,000m 를 담당했으며 제11사단(PA)과 제2필리핀경찰연대(1개 대대 감편)이 배치되었다. 사령관은 제11사단장 윌리엄 브라우어 준장이었다.

좌측 구역은 서해안부터 7번 오솔길까지 7,000m 를 담당했으며 루터 스티븐스 준장의 제91사단(PA)과 제1사단(PA)의 잔존병이 배치되었다. 사령관은 남부루손군사령관이었던 앨버트 존스 준장이었다.

남측 구역은 해안방어를 담당하던 기존의 서부지구사령부 구역으로 배치 병력도 동일했으며 사령관 또한 서부지구사령관이었던 피어스 장군이 유임되었다. 

군단예비대는 제26기병연대(PS)였다. 여기에 추가하여 극동미육군사령부 직할인 제45보병연대(PS)가 바각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서부도로 부근에 주둔하고 있어서 제1필리핀군단장이 요청하면 배속될 것이었다.

극동미육군사령부의 마지막 예비연대인 제57보병연대(PS)는 남쪽의 마리벨스에 주둔하고 있다가 어느 군단이든 필요한 곳에 배속될 것이었다.


제1필리핀군단은 철수 과정에서 많은 야포를 잃어 야포세력이 빈약했다. 좌측 구역의 화력지원을 위하여 제91야포연대와 제71연대의 잔존병이 배치되었으나 이들은 75mm 야포를 거의 다 잃은 상태였다. 우측 구역의 화력지원을 위하여 제11사단의 사단포병과 스카우트 1개 포대가 배치되었다. 해안방어를 지원할 야포 세력도 빈약했으나 일본군의 상륙 이후 155mm 곡사포 2문을 포함하여 약간의 야포가 증원되었다. 군단포병은 75mm 야포를 장비한 스카우트 1개 포병대대(1개 포대 감편)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리온-바각 방어선을 공격할 일본군은 기무라지대와 제65혼성여단이었다. 제1필리핀군단을 상대한 기무라 지대는 약 5,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2필리핀군단을 상대한 제65여단은 아부케이 방어선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어 여단 소속인 보병제141 및 제142연대의 병력이 각각 1,200명 정도로 줄어든 상태였다.


제14군사령관 혼마 중장은 오리온-바각 방어선의 성격에 대해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미-필리핀군의 주방어선은 남쪽의 리마이-마리벨스산-비누안간강을 잇는 선이라고 생각했으며 지금 일본군이 만난 방어선은 단순한 전초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전초선을 단번에 돌파한 다음 적의 주방어선에 최대한 빨리 도달하여 마지막 결전을 펼치고자 했다.

혼마 장군은 적이 주방어선을 강화하기 전에 빨리 공격하기 위하여 야포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1월 26일 오후 4시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제65여단은 동쪽에서 전초선을 돌파하여 최대한 빨리 리마이-마리벨스산 선에 도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쪽의 기무라지대 역시 적의 전초선을 돌파한 후 최대한 빨리 비누안간강에 도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본군의 공격은 잘못된 판단에 기초한 것이었으나 우연히 타이밍을 맞추었다.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스카우트 연대가 후방으로 빠지고 다른 부대가 경비구역을 인계받으면서 혼란이 일어나 제1필리핀군단의 전선이 가장 취약한 순간에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제2필리핀군단은 일본군이 꾸물거리는 바람에 병력 교체에 따른 가장 취약한 순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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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기무라대대 전멸


(일본군의 바탄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1 P.297)

 


1942년 2월 1일에 아냐산-실라임 지역의 지휘권을 장악한 제57보병연대장 릴리 중령은 1일 하루동안 정찰을 통하여 지형을 익혔다. 그날 저녁 릴리 중령은 다음날 공세에 스카우트 대대 3개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우익인 실리암강 북쪽은 로스 스미스 중령의 제45보병연대제2대대, 중앙인 실리암강과 아냐산강 사이는 제57보병연대제3대대, 그리고 아냐산강 남쪽은 제57보병연대제1대대(퀴나완곶에 파견된 B중대 감편)를 배치했다. 제45보병연대제2대대의 북쪽은 제12보병연대제1대대가 지켰고, 제17추격비행대대는 보급로를 방어했다. 예비대는 경찰대대와 롱고스카와얀곶 전투를 마치고 방금 도착한 제57보병연대제2대대였다.


(아나샨-실라임 지역.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3)


2월 2일 일출과 동시에 공격을 시작하자 우익과 중앙은 예상치 못한 강력한 저항을 만났다. 밤새 기무라대대의 주력이 상륙하여 고바야시중대에 합류했던 것이다. 스카우트 병사들은 무리하지 않고 일찌감치 참호를 팠다. 남쪽인 좌익은 6일까지 저항을 받지 않았으나 지형때문에 진격이 늦어졌다.


3일 전투에는 제192전차대대C중대(퀴나완곶에  파견된 1개 소대 감편) 소속 9대의 경전차가 투입되었다.  아직 보전합동전술이 확립되기 이전이라 전차는 보병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전차는 정글을 일렬종대로 전진했으며 보병은 약 100m 뒤에서 따라갔다. 일본군은 보병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전차를 손쉽게 공격했다. 선두전차가 공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이고 승무원은 모두 불타 죽었다. 그러자 릴리 중령은 전차 1대당 4명의 보병을 지명하여 바로 뒤를 따르면서 전차를 보호하도록 조치했다. 보병들은 전차가 모르고 지나가도록 개인호에 틀어박힌 일본군을 사살했다.


야포 사용도 어려웠다. 해안을 향하여 완만하게 떨어지는 지형 때문에 포탄을 최전선에 착탄시키기가 어려웠으며 낮은 각도로 날아든 포탄이 나무에 부딪혀 폭발하면서 비산하는 나무파편이 아군에게 피해를 주었다. 서부지구의 화력지원을 맡은 제88야포연대제2대대(PS)는 75mm 야포 4문을 가진 포대 2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75mm 야포 8문은 해발 240m 지점에서 3,700m 떨어진 해발 30m 지점의 일본군을 포격했는데 포탄이 날아가는 탄도 상에는 높이 20m 정도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나무를 피해 적에게 포탄을 날리기는 어려웠다. 대대는 퀴나완곶과 아냐산-실라임 전투에서 5,000발의 포탄을 발사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당시 아냐산-실라임 지역에는 155mm 야포 1개 포대도 있었으나 조준기가 없어서 보병지원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또한 관측병이 없어서 보병중대장이 관측병 역할을 겸해야 했다.


기관총 사용은 시계불량과 함께 보급때문에 제약을 받았다. 도보로 보급해야 하는 상황에서 소총수들의 보급을 지탱하기도 버거웠다. 실제로 기관총 요원들은 소총탄을 보급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스카우트 대대는 60mm 및 81mm박격포를 가지고 있었으나 포탄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불발탄이 너무 많았다. 결국 보병은 거의 소총에만 의지해야 했다.


3일과 4일에 걸쳐 우익과 중앙의 스카우트 대대는 보전합동작전으로 서서히 전진했으나 이후로는 7일까지 교착상태에 빠졌다.


남쪽으로 전진했던 제57보병연대제1대대가 7일에 아냐산곶에서 강력한 방어선을 만나 전진을 멈추자 경찰대대와 비행대대가 증원되었다. 경찰대대는 북쪽의 제3대대와 연결을 확보했고 비행대대는 남쪽의 퀴나완곶에 있던 스카우트와 연결했다. 이로써 북쪽 실라임만에서 남쪽 퀴나완곶에 이르는 3,700m 길이의 연속된 전선이 완성되었다.


8일이 되자 퀴나완 전투에서 풀려난 37mm 대전차포 1개 소대가 전선에 투입되었다. 아냐산곶의 돌출부에 배치된 37mm 대전차포는 일본군의 보급품 더미를 발견하고 포격을 가하여 불태워 버렸다. 퀴나완 전투에 파견되었던 제57보병연대 B중대도 이날 친정인 제1대대로 돌아왔다.


아냐산-실라임 전투가 시작된지 5일이 지나자 식사량을 정량의 절반으로 줄여 1달간 급식한 여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쉽게 지쳤고 전의도 떨어졌다. 매일 공격할 수가 없어서 대대마다 번갈아가며 이틀에 한번씩 공격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맥아더 사령부는 한시적으로 아냐산-실라임 지역에서 전투 중인 부대의 식사량을 정량으로 늘렸다. 이제 병사들은 공격 직전의 일출시, 공격을 마치고 참호를 파기 직전인 일몰시, 그리고 방어준비를 마친 밤, 이렇게 3끼의 식사를 먹을 수 있게 됨으로써 사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로써 급한 불은 껐으나 아냐산-실라임 전투에 참가했던 지휘관들은 식량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바탄반도를 지켜내지 못하리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2월 9일에 중앙을 담당하던 제57보병연대제3대대가 예비대였던 제2대대로 교체되었다. 원기왕성한 제2대대는 일본군을 밀어붙이면서 착실하게 전진하여 11일 저녁에 아냐산강 하구에서 해안에 도달했다. 이로써 제2대대는 실라임강과 아냐산강 사이에 있던 일본군을 북쪽의 제45보병연대제2대대 정면으로 몰아내었다. 이제 기무라대대의 패배는 피할 길이 없었다.


일본군은 7일부터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이날 기무라 소좌는 모리오카 중장에게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무전을 통하여 전차 및 야포의 지원을 받는 압도적인 수자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으며 자신과 부하들은 모두 최후의 한명까지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겠노라고 보고했다. (기무라대대의 무전기가 고장나서 발신만 가능했고 수신은 불가능했다.) 보고를 받은 모리오카 중장은 공병제21연대에게 기무라대대를 구출하라고 명령했다. 7일 밤에 장갑정 1척, 특대발 1척, 대발 2척, 소발 5척, 절첩주 21척으로 이루어진 주정군이 올롱가포를 출항했다. 하지만 남하중에 미군에게 들켜서 야포와 기관총, 그리고 P-40 전투기 2대의 공격을 받았다. 주정군은 구원을 포기하고 북상했다. 다음날 저녁에 다시 남하한 주정군은 미군의 방해를 뚫고 접안에 성공했으나 통신이 단절된 상황에서 미-필리핀군과 교전중이던 기무라대대를 철수시킬 방법이 없었다. 결국 주정군이 환자 34명만 싣고 돌아오는 것으로 구원작전은 끝났다.


구원작전이 실패하자 모리오카 중장은 기무라대대에게 주어진 마리벨스 점령 임무를 철회하면서 자력으로 해상탈출하라고 지시하는 명령문을 대나무통에 넣어 떨어뜨렸다. 명령문에는 물때표, 해류, 일출 및 일몰 시간, 달이 뜨고 지는 시간, 그리고 뗏목을 만드는 법등 해상탈출에 유용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기무라대대에게는 불행하게도 미-필리핀군이 명령문의 사본을 입수했다. 미-필리핀군은 밝은 달빛 아래 해면을 주시하다가 헤엄쳐 탈출하는 일본군을 저격했고 기관총은 뗏목을 공격했다. 결국 해상탈출을 시도한 일본군 대부분이 사살되거나 익사했다. 11일 저녁까지 남쪽 아냐산곶에서 저항하던 일본군은 전멸했으며 기무라 소좌가 지휘하던 주력의 전멸도 시간문제였다.


해상탈출이 불가능해지자 기무라 소좌는 앉아서 죽느니 저지선을 강행돌파한 후 북상하여 일본군 전선으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돌파 시간은 2월 12일 새벽으로 정했다. 11일 저녁에 기무라 소좌는 다음날 새벽을 기하여 미-필리핀군의 저지선을 강행돌파한 후 북상하여 일본군 전선에 도달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 자살했다.

당시 기무라대대를 상대하던 제45보병연대제2대대의 E 및 F중대 사이에는 90m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대대장은 간격에 2정의 기관총을 배치했는데 개활지라면 몰라도 사계가 불량한 정글에서는 부족했다.


12일 새벽, 기무라대대의 잔존 병력 약 200명이 갑자기 뛰쳐나왔다. 이들은 하필이면 저지선의 빈틈으로 돌격하여 이들을 가로막은 것은 기관총 2정 밖에 없었다. 기관총 1정의 운용요원은 총알을 다 쏘아버린 다음 기관총을 버리고 탈출했으나 나머지 1정의 운용요원은 탈출에 실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2정의 기관총은 제압당할 때까지 약 30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 보고를 받은 릴리 중령은 예비대인 제57보병연대제3대대를 급파했다.


저지선을 뚫은 일본군은 북상하다가 오전 10시에 실라임강 하구에 있던 제17추격비행대대본부와 제45보병연대 F중대본부를 습격했다. 이 공격으로 제17추격비행대대장 레이먼드 슬론 대위가 전사했다. 


오전 10시경 일본군이 제17추격비행대대본부를 공격할 때 토벌대인 제57보병연대제3대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제3대대는 도망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정오 경에 따라잡은 다음 해안으로 몰아붙였다. 물샐틈없이 포위한 상태로 밤을 지낸 제3대대는 13일 아침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오후 3시에 해안에 도달했다. 포위망 내의 일본군은 전멸했다. 포로는 없었다.


포로는 정보를 얻고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하여 중요하다.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포로를 얻기 위하여 스피커를 단 심리전 트럭과 니세이 장교 2명을 제57보병연대로 보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우선 일본군은 여간해선 항복하지 않았다. 롱고스카와얀곶과 퀴나완곶에서 일본군은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사살당할 때까지 싸우거나 아니면 자살했다. 게다가 미-필리핀군 장병 또한 일본군을 포로로 잡으려 하지 않았다. 미-필리핀군은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손을 뒤로 묶인 채 총검에 찔리거나 심하게 훼손된 전우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치를 떨었다. 일본군을 포로로 잡는 것은 위험하기도 했다. 실제로 포로가 되어 대대본부로 끌려온 일본병사가 숨겨둔 수류탄을 터뜨려 함께 자폭하려다 사살당한 적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장지휘관 릴리 중령이 일본군의 투항을 권유하는 작업에 열의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실제로 릴리 중령이 병력부족을 이유로 심리전 트럭과 니세이 장교에 대한 호위를 거부하자 이들은 전선에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제57보병대대제3대대는 탈출한 일본군을 전멸시켰다고 믿었으나 아니었다. 제45연대제2대대의 저지선을 뚫고 탈출에 성공한 일본군 중 약 80명은 추격을 피하여 정글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16일 아침에 실라임곶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11km, 제1필리핀군단의 방어선에서 남쪽으로 불과 1.6km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될 때까지 4일 동안 미-필리핀군의 눈을 피하여 이동했다. 80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미-필리핀군이 득실거리는 제1군단 후방에서 4일 동안이나 들키지 않고 이동했다는 것은 일본군의 뛰어난 정글전투 기술을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군이 발견되자 제26기병연대에서 1개 대대가 급파되었다. 이들은 제72 및 제92보병연대에서 파견된 병력의 도움을 받아 이틀만에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이로써 3주에 걸친 아냐산-실라임 지역 전투가 끝났다. 미-필리핀군은 약 70명의 전사자와 약 100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1월 29일부터 전투에 계속 참가했던 제45보병연대제2대대가 26명의 전사자와 42명의 부상자를 기록하여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다. 제57보병연대제2대대가 그 다음으로 많은 희생을 치렀으며 다른 부대의 희생은 비교적 가벼웠다.


롱고스카와얀곶과 퀴나완곶에 상륙했던 츠네이로대대 900명은 전멸했다. 퀴나완곶의 츠네이로대대를 증원하려던 기무라대대는 아냐산-길라임 지역에 상륙하여 전멸했다. 기무라대대원 중 약 280명은 12일의 강행돌파 이전에 해안에서 죽었으며 약 30명은 강행돌파 과정에서 죽었고 약 90명은 제57보병연대제3대대의 추격을 받아 해안에서 죽었다. 약 80명은 추격을 피하여 정글에 숨어 4일간 북상한 끝에 제1필리핀군단 방어선에서 남쪽으로 불과 1.6km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되어 전멸했다. 기무라대대의 나머지 병력은 대부분 2월 1일 밤에 퀴나완곶에 상륙하려다 죽었으며 일부는 포위된 상황에서 해상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었다. 철수에 성공한 것은 환자 34명 뿐이었다.


1월 23일에 기무라 소장이 츠네이로대대를 상륙시킨 이래 2월 중순까지 일본보병제20연대는 2개 대대를 상륙작전에 투입하여 모두 잃었다. 일본군의 상륙에 맞선 미-필리핀군의 초기 대응은 서툴렀다. 그러나 해결사로 투입된 필리핀 스카우트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결국 그들의 활약으로 초기의 실수를 만회하고 상륙한 일본군을 섬멸할 수 있었다. 2월 중순이 되자 바탄반도 서해안에 대한 위협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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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기무라대대 상륙


1942년 1월 25일에 제14군 사령관 혼마 중장은 전황을 평가했다. 미-필리핀군은 바탄반도에 주력을 집결시켜 마지막까지 버틸 태세였다. 따라서 필리핀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려고 병력을 분산하는 것보다 바탄반도에 전력을 집중하여 미-필리핀군 주력을 빨리 분쇄하는 것이 필리핀 전역을 일찍 끝내는 길이었다.

바탄반도 공략은 제65혼성여단과 기무라지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바탄반도 동쪽을 담당한 제65여단의 성과는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서쪽을 맡은 기무라지대는 성공적이었으므로 여기에 병력을 추가하여 전과를 확대하는 것이 바탄반도 전투를 빨리 끝내는 길이었다.


이런 상황판단에 따라 혼마 중장은 1월 25일 오후 6시에 마닐라에 머물고 있던 제16사단장 모리오카 스스무 중장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1. 제16사단장은 보병 약 2개 대대와 독립공병제21연대본부 기간의 부대를 이끌고 마닐라를 떠나 디날루피한에 출두하라. 특히 보병제20연대의 1개 대대와 독립공병제21연대본부는 즉시 올롱가포로 파견하라.

보병제33연대장이 지휘하는 보병 약 1개 대대 기간의 부대는 남부루손에 남아 차후 군직할로 돌려질 것이다.


2. 전차제7연대, 수색제16연대주력, 야포병제22연대주력, 야전중포병제8연대의 1개 대대(1개 중대 감편)를 기간으로 한 부대는 전차제7연대장의 지휘 아래 마닐라와 주변 지역을 방어하라.


(일본군의 바탄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1 P.297)


제16사단장 모리오카 중장은 퀴나완곶 상륙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우선 보병제20연대제1대대제1중대(고바야시중대)를 퀴나완곶에 증원하기로 결정했다. 200명으로 이루어진 고바야시중대는 즉시 마닐라를 떠나 전속력으로 북상하여 26일 저녁에 올롱가포에 도착한 후 숨돌릴 틈도 없이 주정 3척을 타고 퀴나완곶으로 향했다. 하지만 부실한 지도를 가지고 운항한 주정승조원이 다시 이들을 엉뚱한 곳에 내려주었다. 이번에는 퀴나완곶에서 북쪽으로 1,800m 정도 떨어진 아냐산-실라임 지역이었다.


아냐산-실라임 지역은 북쪽에서 실라임강이 실라임만으로, 900m 남쪽에서는 아냐산강이 아냐산만으로 흘러가고 중간에 실라임곶이 있었으며 남쪽에 아냐산곶이 아냐산만의 남쪽해안을 이루고 있었다. 즉 북쪽으로부터 실라임만, 실라임강, 실라임곶, 아냐산만, 아냐산강, 아냐산곶으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복잡한 지형은 미-필리핀군에게도 구별이 쉽지 않았다. 실제로 2월 3일에 이 지역에 전신주를 세우던 필리핀 통신병들은 본부로부터 위치가 어디냐는 질문을 받자 북쪽 카노스곶과 남쪽 퀴나완곶 사이의 어딘가라고 대답할 뿐 정확한 위치를 답하지 못했다.


아냐산-실라임 지역 또한 롱고스카와얀곶이나 퀴나완곶처럼 울창한 정글로 덮여 있었으며 지형은 더 험한 편이었다. 서부도로로 연결된 진입로라고는 실라임곶에서 시작되는 차량통행이 불가능한 오솔길 하나가 전부여서 보급이 힘들었다. 


(아나샨-실라임 지역.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3)


1월 27일 새벽에 엉뚱한 곳에 상륙한 고바야시중대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내륙으로 진출했다. 아냐산-실라임 지역을 맡은 것은 제1경찰연대제1대대였는데 병사들은 일본군의 모습을 보자마자 도망쳐서 대대 전체가 흩어져 버렸다. 달아난 병사들은 다음날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27일 동틀녘이 되어서야 상륙보고를 받은 서부지구사령관 피어스 준장은 흩어져버린 경찰대대를 대신하여 예비대인 제17추격비행대대를 파견했다. 일출 직후 제17추격비행대대가 경찰대대본부에 도착해 보니 아침식사로 끓이던 스프가 아직도 끓고 있었다. 병사들은 경찰대대가 조리하다가 남겨둔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는 다시 일본군을 찾아 출발했다. 먹을 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수색 도중 갑자기 식사를 즐긴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제17추격비행대대 또한 훈련이 부족했다. 몇몇 병사들은 소총 쏘는 법도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서부도로에서 360m 정도 서쪽으로 진출했을 때 제17추격비행대대는 일본군 정찰대와 조우했는데 일본군은 교전을 회피하고 도망쳤다. 제17추격비행대대는 해안에서 900m 떨어진 지점에서 일본군 방어선을 만나자 진격을 멈추고 참호를 팠다. 저녁에 제2경찰연대제2대대가 증원되었다.


28일 아침이 되자 비행대대와 경찰대대는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이 별다른 저항없이 후퇴함에 따라 28일 저녁이 되자 비행대대와 경찰대대는 아냐산만이 보이는 곳까지 진출했다. 

미군은 아냐산-실라임 지역에 상륙한 일본군의 규모를 과대평가하여 서부도로에 대한 주요 위협으로 생각했다. 서부지구사령관 피어스 준장은 정예보병의 투입을 결정했다. 27일 아침에 일본군을 보자마자 와해되어 버렸던 제1경찰연대제1대대는 28일 저녁까지 달아났던 병사들이 돌아오면서 복구되었다.


29일 아침에 부대대장 아서 비덴슈타인 대위가 지휘하는 제45보병연대제2대대(PS)가 현장에 도착했다. 피어스 준장은 비덴슈타인 대위에게 제1경찰연대제1대대와 제12보병연대제1대대(PA)를 배속해 주었다. 제57보병연대A중대(PS)도 서부도로와 아냐산-실라임 지역 사이의 보급로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다. 비덴슈타인 대위는 당장 적을 공격하는 대신 하루 동안 적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하여 사방으로 정찰대를 보냈다. 그 결과 적이 실라임강 하구에 방어선을 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30일 아침이 되자 제45보병연대제2대대가 실라임강 하구의 일본군 방어선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적의 저항은 강력했다. 그때 치명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공격을 지원하던 제88포병연대 D포대의 75mm 야포 4문이 스카우트의 머리 위로 포탄을 쏟아부어 4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을 입었다. 정글이 울창하여 관측이 힘든 상태에서 보병과 포병 사이의 연락이 불충분하여 생긴 일이었다. 이 사태로 공세가 탄력을 잃자 비덴슈타인 대위는 공격을 중단하고 참호를 파라고 명령했다. 

당시 비덴슈타인 대위는 제45보병연대제2대대, 제1경찰연대제1대대, 제12보병연대제1대대, 제17추격비행대대, 그리고 제57보병연대 A중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지휘하기에는 계급이 너무 낮았다. 따라서 서부지구사령관 피어스 준장은 30일 밤에 제57보병연대(PS)의 작전참모인 해럴드 존슨 소령을 제45보병연대제2대대장으로 임명하면서 아냐산-실라임지역에 배치된 모든 병력의 지휘를 맡겼다.

당시 병력배치 상황을 보면 실라임강 북쪽에 제12보병연대제1대대(PA), 실라임강 남쪽에서 오솔길까지는 제45보병연대제2대대(PS), 오솔길 남쪽에서 아냐산강까지 제1경찰연대제1대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아냐산강 남쪽은 비어 있었다. 제17추격비행대대는 예비대로서 보급로인 오솔길을 따라 주둔하고 있었고, 제57보병연대A중대(PS)는 오솔길과 서부도로가 만나는 지역을 지키고 있었다.

존슨 소령은 제57연대A중대를 서부도로에서 빼내어 아냐산강 남쪽에 배치했다.


31일 아침에 존슨 소령은 휘하 부대에게 현재 위치에서 일제히 서진하라고 명령했다. 하루동안 적이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정확한 적의 위치를 다시 확인함과 동시에 적이 없는 지역을 정리하려는 계획이었다. 북쪽의 제12보병연대제1대대는 오전 중에 실라임강 이북을 점령함으로써 전선의 1/3을 정리했다. 실라임강과 오솔길 사이를 맡은 스카우트 대대는 전날 적의 방어선을 공격했지만 이날은 적과 만나지 않고 오전 중에 해안에 도달했다. 대신 오솔길 남쪽에서 아냐산강 사이를 담당한 경찰대대가 90m 전진하다가 일본군의 방어선을 만나 전진을 멈추었다. 아냐산강 남쪽에서 아냐산곶으로 전진하던 제57보병연대A중대는 저항을 받지 않았다. 이로써 실라임강 하구에 있던 일본군이 남하하여 경찰대대 정면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으나 규모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존슨 소령은 일본군의 규모를 과대평가하여 자신이 이끄는 병력만으로는 소탕이 불가능하며 제57보병연대(PS)가 투입되어야 한다고 보고했다. 피어스 준장은 건의를 받아들였다.


2월 1일 아침에 제57보병연대가 아냐산-실리암 지역으로 파견되었으며 연대장 에드먼드 릴리 중령이 존슨 소령으로부터 지역에 전개한 병력 전체의 지휘권을 인수했다. 존슨 소령은 제45보병연대제2대대장직도 원래 대대장이었던 로스 스미스 소령에게 돌려주고 자신의 원래 자리인 제57보병연대 작전참모 직위로 돌아갔다.

이제 200명의 일본군을 상대로 미-필리핀군이 압도적인 전력을 집중함으로써 아냐산-실라임 지역의 전투는 쉽게 끝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추가 상륙 시도가 상황을 바꾸었다.


모리오카 중장은 퀴나완곶에서 전투 중인 츠네이로대대를 돕기 위하여 병력 파견과 별도로  보급품을 낙하산으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일본기들은 울창한 정글 속에서 일본군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결국 투하한 보급품의 절반 가량이 미-필리핀군의 손에 들어갔다. 어느날 제45보병연대는 12개의 낙하산 꾸러미를 주웠는데 거기에는 식량, 의약품, 탄약, 지도 등이 들어 있었다. 식량 꾸러미를 열자 쌀떡, 콩떡, 설탕, 그리고 매우 짠맛이 나는 분홍색 열매를 비롯하여 어떻게 먹거나 조리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식료품들이 들어 있었다.


(우메보시. https://en.wikipedia.org/wiki/Umeboshi)


하지만 보급만으로 퀴나완곶의 일본군을 구할 수는 없었으며 증원병력 투입이 필요했다. 모리오카 중장은 보병대대 하나를 통째로 퀴나완곶에 투입하기로 했다. 1월 31일에 보병제20연대제1대대장 기무라 미츠오 소좌는 이미 아냐산-실라임 지역에 상륙한 고바야시중대를 제외한 대대 전체를 이끌고 퀴나완곶에 상륙하여 그곳에서 전투 중이던 츠네이로대대와 함께 마리벨스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무라대대는 2월 1일 밤에 모론 북서쪽의 마가오곶에서 발동정을 타고 남쪽으로 떠났다.


당시 기무라대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보병제20연대제1대대(제1중대 감편)

보병제20연대제7중대의 1개 소대

사단무선, 보병단무선 각 1개 분대

제16사단위생대의 1/6

제16사단제1야전병원전투구호반

독립공병제1연대의 1개 중대(기무라대대상륙 후 올롱가포로 귀환)


미-필리핀군은 모리오카 중장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1월 28일에 필리핀 병사들이 전사한 일본군 장교에게서 1장의 서류를 노획했다. 이를 해독한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군이 바탄반도 서해안에 추가로 상륙할 계획임을 알아차리고 31일에 경고를 발했다. 맥아더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전차단장 위버 준장은 2개 전차대대(1개 중대 감편)로 이루어진 전차연대를 서부지구사령관 피어스 준장에게 배속시켰으며 4대 밖에 남지 않은 P-40 전투기는 100파운드(45kg)짜리 폭탄을 달고 출격명령을 기다렸다.


2월 1일은 보름달이었다. 바짝 긴장하여 해안을 감시하던 미-필리핀군 병사들이 곧 10여척의 발동정으로 이루어진 일본주정군이 남하하는 것을 발견하고 보고했다. 제26기병연대가 상륙예정지로 알고 있던 카이보보곶으로 직행했으며 극동미육군항공대가 보유한 가용 전투기의 전부인 P-40 전투기 4대가 캅카벤 부근의 활주로에서 이륙했다. 전투기들은 일본주정군 상공에 도착하여 100파운드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주정군이 퀴나완곶에 접근하자 제88야포연대 D포대의 75mm 야포와 제301야포연대 E포대의 105mm 야포가 포격을 시작했다. 야포들은 1,000발을 발사하여 주정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주정군이 더욱 접근하자 곶의 밑둥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미-필리핀군 병사들이 소화기 사격을 시작했다. 주정군을 호위하던 일본의 기뢰부설함 1척과 포정 1척이 퀴나완곶의 북안에서 소화기 사격을 가하는 미-필리핀군에게 포격을 가했으나 사격을 중단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PT32정은 아군에게 포격을 가하는 일본군 기뢰부설함에게 접근했다. 부설함이 탐조등으로 PT32정을 비추면서 포격을 가했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다. 탐조등을 목표로 기관총을 난사하며 접근한 PT32정은 어뢰 2발을 발사하고 돌아섰다. 어뢰는 빗나갔으나 해안포에 맞아 피해를 입은 데다가 추가로 어뢰의 위협을 받은 부설함은 북쪽으로 후퇴했다.


자정이 되자 절반 가량의 발동정과 1개 중대가 넘는 병력을 상실한 일본주정군이 상륙을 포기하고 북상했다. 미-필리핀군은 일본군이 모론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으나 기무라 소좌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기무라대대는 북상 도중 이미 고바야시중대가 상륙해 있던 아냐산-실라임 지역에 상륙했다. 이로써 아냐산-실라임 전투가 일찍 끝날 가능성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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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츠네이로대대 전멸


롱고스카와얀곶에서 소탕전이 벌어지는 사이 북쪽으로 11km 떨어진 퀴나완곶에서도 츠네이로 중좌가 지휘하는 보병제20연대제2대대 주력에 대한 소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본군의 바탄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1 P.297)


1월 27일까지 퀴나완곶의 소탕전은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일본군의 숫자는 600명인데 비하여 소탕에 나선 피어스 준장이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은 제5추격사령부, 제21 및 제34추격비행대대, 제71사단사령부(PA), 제1필리핀경찰연대제3대대, 그리고 제803공병연대A중대(US) 소속의 잡동사니 병력 55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을 소탕하려면 정예보병이 필요했으므로 27일 저녁에 웨인라이트 장군은 제45보병연대제3대대(PS)의 투입을 결정했다.

 

(퀴나완곶.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2 P. 303)


28일 오전 8시 30분에 더들리 스트리클러 소령이 지휘하는 완편된 스카우트 대대인 제45보병연대제3대대의 병력 500명이 전선에 도착했다. 이들의 도착에 따라 150명의 병력을 가진 제5추격사령부를 제외한 기존 병력들은 철수했다.

스트리클러 소령은 820m 에 걸친 전선에 3개 중대를 모두 배치했다. 각 중대에는 1개 기관총소대가 배속되어 있었으며 스카우트 대대의 측면에는 제5추격사령부 병력이 배치되었다.

28일 공격은 실패였다. 시야가 막힌 정글에서는 미리 진지를 만들고 병력을 배치한 일본군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정글 속으로 진격한 스카우트 병사들은 사격을 받으면서도 적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28일 오후 5시에 전진을 멈추었을 때 스카우트 대대는 해안에서만 약 90m 를 전진했을 뿐 중앙에서는 불과 10m 정도 전진하는데 그쳤다. 스트리클러 소령이 증원을 요청하자 제57보병연대 B중대(PS)가 배속되었다. B중대의 2개 소대는 대대 우익에 투입되었고 1개 소대는 예비대가 되었다.


29일 공격에는 B중대도 투입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스카우트들은 특히 중앙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30일과 31일 공격도 지지부진했다. 이틀 동안 스카우트 대대는 큰 희생을 치르면서 일본군 방어선을 약간 밀어내는데 그쳤다.


정글은 방어자에게 유리했다. 밀생한 관목이 진격하는 병사의 다리에 걸렸다. 병사들은 쉴새없이 정글도로 얼굴과 다리를 가로막는 덩굴들을 자르며 전진해야 했는데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잘린 덩굴이 뒤따르던 병사의 얼굴이나 몸통을 채찍처럼 후려쳤다. 사방이 벌레 천지였으며 숨막힐 듯이 더웠다. 이런 상황에서는 적의 저항이 없어도 전진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또한 정글은 시야가 제한되어 적의 기관총 진지를 3m 앞에서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모두가 공격자에게는 악몽이었다.


2월 1일에는 맹렬한 박격포 사격을 가한 후 공격을 실시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이날 대대장 스트리클러 소령은 전선을 시찰하다가 실종되었고 대대부관(battalion adjutant) 클리프턴 크룸 대위가 뒤를 이었다. 이 시점에서 스카우트 대대에는 절반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나머지 병사들도 수면부족과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2일에 크룸 대위는 공세를 실시하지 않고 병사들을 휴식시키면서 전차지원을 요청했다. 1월 31일에 내려진 맥아더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서부지구사령관 피어스 준장은 전차단장 위버 준장으로부터 전차대대 2개로 이루어진 전차연대를 넘겨받아 보유하고 있었다. 2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경전차 3대로 이루어진 제192전차대대C중대의 1개 소대가 스카우트 대대에 도착했다. 2일 오후 늦게 제45보병연대의 부연대장인 도널드 힐튼 대령이 전선에 도착하여 크룸 대위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3일 공격은 전차의 지원을 받아 실시되었으나 역시 실패했다. 쓰러진 나무와 그루터기가 전차의 전진을 막았으며 통신불량과 통제의 결여로 보병과 전차의 협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후 5시에 공격을 중단했을 때 전선은 거의 변동이 없었다. 저녁에 다이에스 대위가 제21추격비행대대의 병력 70명을 이끌고 전선에 도착했다. 다이에스 대위는 1주일 동안 스카우트 대대가 절반 이상의 사상자를 기록했는데도 자신이 떠날 때보다 전선이 불과 50m 정도 전진한 것을 보고 놀랐다.


4일 공격을 앞두고 힐튼 대령은 꼼꼼하게 준비했다. 우선 전차 2대와 무선지휘차를 추가로 배속받았으며 전차마다 워키토키를 지급했다.

4일 아침에 전투가 시작되자 힐튼 대령의 준비가 효과를 나타내면서 승부를 결정지었다. 보병의 요구사항을 전달받은 무선지휘차의 명령에 따라 전차들은 보병의 진격을 가로막는 일본군 방어거점을 때려부수고 기관총탄을 흩뿌려 일본군이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전차의 지원을 받은 스카우트 대대는 착실하게 전진하여 오후가 되자 퀴나완곶의 끝에서 불과 50m 떨어진 지점까지 일본군을 몰아 붙였다. 곶의 끝에서 180m 떨어진 지점에는 언덕이 있어서 이제 스카우트 대대는 처음으로 일본군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전멸의 위기에 처하자 일본군 일부는 절망하여 울부짖으면서 옷을 찢은 다음 절벽에서 뛰어내렸으나 대부분은 포기하지 않고 쏟아지는 기관총탄에 큰 피해를 입으면서 절벽을 기어 내려가 해안동굴에 숨었다.  


5일 아침에 스카우트 대대는 퀴나완곶의 끝에 도달했으나 아직 절벽 아래의 해안동굴에 숨어있는 일본군을 처리해야 하는 위험하고 까다로운 임무가 남아 있었다. 몇몇 병사가 멋모르고 항복을 권유하러 절벽을 내려가 해안동굴에 접근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저항하는 일본군을 혐오하면서 전멸시키기로 결심했다.


6일 아침부터 북부루손군 공병대장 스케리 대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71공병대대(PA)가 해안동굴 소탕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한신관을 장착한 50파운드(23kg)짜리 다이너마이트 통을 밧줄로 동굴 입구에 내려 폭발시키는 방법을 썼으나 절벽 끝에서 밧줄을 내리던 스카우트 공병하사가 일본군의 사격으로 전사하자 다이너마이트 4개를 묶어 수류탄을 만든 다음 30초 시한신관을 달아 좀 더 안전한 곳에서 던지는 방법으로 바꾸었다. 공병대는 이 방법으로 살아남은 일본군의 대부분인 약 50명을 커다란 동굴로 몰아넣은 다음 다이너마이트로 무너뜨렸다. 이로써 끝난 것처럼 보였다.


7일 하루 동안 마음놓고 돌아다니던 몇몇 병사가 사격을 당하는 일이 생기면서 아직 소수의 일본군이 절벽 아래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8일 아침부터 미-필리핀군은 마지막 소탕을 실시했다. 해군에서 37mm 포와 기관총을 장비한 무장모터런치 2척과 구명정(whaleboat) 2척을 보내주었다. 굿올 해군소령이 지휘하는 이 소함대가 오전 8시에 퀴나완곶에 도착하자 다이에스 대위가 지휘하는 제21추격비행대대 병력 20명이 2척의 구명정에 분승했다. 무장런치가 해안에 사격을 가하는 동안 구명정 1척은 곶의 북쪽에, 나머지 1척은 남쪽에 접안하여 병력을 상륙시켰다. 제21추격비행대대 병사들은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곶의 끝을 향하여 진격했으며 절벽 위에서는 스카우트 대대가 엄호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몇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면서 서로를 향하여 전진한 제21추격비행대대 병사들이 곶의 끝에서 만나면서 소탕전이 끝났다.

일본군은 이날 3대의 급강하폭격기를 보내어 굿올 소령의 소함대를 공습했다. 다행히 폭탄은 피했으나 기총소사로 굿올 소령이 중상을 입는 등 몇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로써 보병제20연대제2대대 기간의 츠네이로대대 900명은 전멸했다. 300명은 롱고스카와얀곶에서, 그리고 600명은 퀴나완곶에서 최후를 맞았다.

댓가는 컸다. 롱고스카와얀곶 소탕전에서 발생한 전사 22명, 부상 66명의 피해는 퀴나완곶 소탕전의 1/5도 되지 않았다. 28일부터 소탕전의 주역이었던 제45보병연대제3대대는 정원 500명 중에서 전사 74명, 부상 234명으로 60% 가 넘는 사상자를 기록했다. 29일에 증원된 또다른 스카우트 부대인 제57보병연대 B중대는 4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다른 부대의 사상자를 포함하면 퀴나완곶 소탕전의 사상자는 500명 가까이 된다.


하지만 일본군의 상륙작전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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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롱고스카와얀곶 소탕


(일본군의 바탄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1 P.297)


해군대대장 브리젯 중령은 롱고스카와얀 및 라피아이곶에 상륙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해군대대 병력을 증파함과 동시에 코레히도르에 요청하여 제4해병연대의 81mm 박격포 2문과 기관총소대 1개를 빌려왔다. 25일 아침에 푸콧산의 북쪽 능선에 자리잡은 81mm 박격포가  라피아이곶을 포격하자 일본군은 진지를 포기하고 롱고스카와얀곶으로 물러나 그곳의 동료와 합류했다.


박격포 및 기관총의 지원을 받는 롱고스카와얀곶의 일본군 방어선을 해군대대의 전력으로 뚫기는 무리였다. 해군대대장 브리젯 중령은 25일 오전 10시에 코레히도르의 기어리 포대에 화력지원을 요청했다. 기어리 포대는 12인치(305mm) 박격포 12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극동미육군포병사령관 에드워드 킹 소장이 요청을 받아들여 기어리 포대장 폴 벙커 대령에게 포격명령을 내렸다. 26일 0시를 기하여 코레히도르의 12인치 박격포 12문이 11,000m 떨어진 롱고스카와얀곶의 일본군 진지에 순발신관을 장착한 304kg 짜리 고폭탄을 사용하여 16회의 일제사격을 가했다.


(12인치 박격포. https://en.wikipedia.org/wiki/12-inch_coast_defense_mortar)


12인치 박격포의 위력은 굉장했다. 4번째 일제사격 후에 일본군 진지 부근에 큰 화재가 일어나 미군관측병이 표적을 확인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두운 밤에 어디서 떨어지는지도 모르는 거포의 사격을 받은 일본군은 크게 놀랐으며 일부는 공포에 질려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일본군은 공습인지 포격인지도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대로 훈련받은 일본군은 포격이 끝나자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따라서 26일 아침에 실시한 해군대대의 공격은 실패했다. 26일 저녁이 되자 웨인라이트 장군이 제88야포연대 소속의 75mm 야포 1개 포대를 보내주었다.


27일 오전 7시부터 가용한 모든 화력(제88야포연대의 75mm 야포 1개 포대, 제4해병연대의 81mm 박격포 2문, 제71야포연대의 2.95인치 산포 1문, 그리고 기어리 포대)이 롱고스카와얀곶의 일본군 진지를 때리기 시작했다. 1시간에 걸친 준비포격이 끝나고 해군대대가 공격을 시작했으나 다시 일본군에게 막혔다. 오히려 오후가 되자 일본군 일부가 해군대대 전열의 빈틈을 통해 후방으로 진출하여 포위하려는 것을 81mm 박격포와 2.95인치 산포가 겨우 저지하기도 했다. 정예보병의 대규모 투입없이 일본군 소탕은 불가능했다.

 

(롱고스카와얀 곶.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1 P.301)


27일 저녁에 할 그랜베리 중령이 지휘하는 제57보병연대제2대대(PS) 병력 500명이 롱고스카와얀 전선에 도착하여 브리젯 중령의 지휘 아래 들어왔다. 

28일 아침에 해군대대와 교대하여 공격을 실시한 스카우트 병사들은 일본군을 거세게 밀어붙이면서 저녁까지 롱고스카와얀곶의 끝에서 1/3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다.

29일에 결정적 전투가 벌어졌다. 미군은 오전 7시부터 기어리 포대를 동원하여 30분간 준비포격을 실시했다. 해군에서는 소해함 퀘일을 파견했다. 퀘일은 공습의 위험을 무릅쓰고 롱고스카와얀곶에 접근하여 3인치 주포 2문으로 오전 8시 30분까지 화력지원을 해주었다.


(AM-15 퀘일. https://en.wikipedia.org/wiki/USS_Quail_(AM-15)


제57보병연대제2대대는 기어리 포대의 준비포격이 끝난 오전 7시 30분에 공격을 시작했다. 전방에서 E 및 G중대가 공격을 담당했고 F중대는 예비대였다. 일본군의 저항은 거세어 정오 경에 일시 공격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오후에 그랜베리 중령이 예비대인 F 중대를 투입하자 승부는 결정났다. 29일 저녁까지 스카우트 병사들은 롱고스카와얀곶의 끝에 도달했다. 잔적소탕은 해군대대의 몫이었다.


30일 아침에 스카우트 제2대대가 서부도로에 도착하여 본대인 제57보병연대에 복귀했을 때 해군대대장 브리젯 중령이 감사의 의미로 보낸 연어통조림과 쌀이 도착했다. 식량배급이 삭감된 상황에서 귀한 선물이었다.


롱고스카와얀곶에 상륙했던 일본군 300명은 기어리 포대의 포격으로 부상을 입은 포로 1명을 제외하고 전멸했다. 미-필리핀군의 피해는 전사 22명, 부상 66명이었는데 전투의 주역인 제57보병연대제2대대(PS)가 11명의 전사자와 40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롱고스카와얀 전투는 제대로 훈련된 정예보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해군대대의 업적이라면 푸콧산 정상을 지켜낸 것이었다. 만일 주변지역을 감제할 수 있는 푸콧산 정상을 초기에 점령당했다면 소탕은 훨씬 어렵고 희생 또한 컸을 것이다.


사실 일본군은 롱고스카와얀곶 전투에 대해 몰랐다. 기무라 소장은 물론이고 퀴나완곶에 상륙한 츠네이로 중좌조차 자신의 부하 중 일부가 따로 롱고스카와얀곶에 상륙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실제로 일본군에게 잡힌 포로가 롱고스카와얀곶 전투에 대해 진술하자 심문했던 일본장교는 믿지 않았다. 일본군은 바탄반도를 점령한 후 롱고스카와얀곶에 매장된 일본군 묘지를 보고나서야 롱고스카와얀곶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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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츠네이로대대의 상륙


미-필리핀군 방어선 뒤의 바탄반도 서해안에 병력을 상륙시킨다는 발상은 제14군 사령관 혼마 중장에게서 나왔다. 혼마 중장은 1942년 1월 14일에 기무라 소장을 불러 바탄반도의 전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혼마 장군은 기무라 소장에게 적의 방어선 뒤에 상륙하는 작전의 효용에 대해 강조하면서 그러한 상륙작전에 쓸 수 있도록 발동정을 링가옌만에서 올롱가포로 보내도록 조치했다고 말했다.


발동정이 올롱가포에 오려면 먼저 수빅만의 기뢰를 청소해야 했다. 일본군은 18일부터 20일까지 수빅만 소해작업을 실시했는데 그 과정에서 기뢰에 접촉하여 소해정 1척이 침몰하고 1척이 좌초했다. 20일 오후에 1주일치 연료를 보유한 제52정박장사령부 소속의 대발동정 5척과 소발동정 5척이 보급품을 실은 5천톤급 수송선 다미시마마루와 함께 올롱가포에 도착했다.


기무라 소장은 1개 대대를 모론에서 승선시켜 바각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카이보보곶에 상륙시키기로 했다. 상륙한 일본군은 바각으로 진격함으로써 남하하는 일본군 주력에 호응하여 바각 이북의 미-필리핀군을 포위격멸할 계획이었다.


상륙작전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낯선 지형에서 적당한 지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월 22일 밤에 모론에서 보병제20연대제2대대를 태운 바지선의 승조원들이 가진 지도라고는 1:200,000 지도가 유일했다. 상세하고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토박이가 아니면 바탄반도 서해안처럼 수많은 만과 곶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해안에서 특정한 곶을 찾는다는 것은 낮에도 힘든 일이었으며 밤에는 불가능했다. 하물며 지도까지 부실하다면 말할  나위가 없었다.


호위도 문제였다. 애당초 기무라 소장은 실행일을 21일로 잡았으나 호위문제로 하루를 연기했다. 당시 올롱가포 부근에서 발동정을 호위할만한 함정은 포함 1척 뿐이었는데 이 포함은 양륙을 마친 다미시마마루를 호위하면서 링가옌만으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마닐라의 해군사령부에서 22일에도 호위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들어오자 기무라 소장은 호위없이 22일 밤에 상륙작전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보병제20연대제2대대장 츠네이로 나리요시 중좌가 지휘하는 츠네이로대대는 22일 오후 4시에 모론 북서쪽 해안에서 발동정에 올랐다. 900명의 병력을 가진 츠네이로대대의 구성은 아래와 같다.


보병제20연대제2대대(2개소대감편)

보병제33연대속사포중대

보병제20연대무선 1개 분대

공병제16연대제2중대의 1개 소대(2개 분대 감편) 

제16사단제1야전병원의 전투구호반 1개

육상근무제124중대 일부

독립공병제10연대의 1개 소대


호위없는 항해의 위험성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발동정이 바다에 나섰을 때 존 벌클리 중위가 지휘하는 미해군의 PT-34정이 나타나 낙오한 발동정 1척을 발견하고 격침했다. 일본군에게는 천만다행으로 PT-34정은 주력의 항해방향과는 다른 방향을 수색했다. 1시간 후 PT-34정은 다시 낙오한 1척의 발동정을 발견했다.  PT-34정이 사격을 가한 후 발동정이 가라앉기 전에 벌클리 중위가 승선하여 2명의 포로를 잡고 일본군의 서류가 들어있는 상자를 노획했다. 그리하여 미군은 일본군의 카이보보곶 상륙계획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츠네이로대대를 태운 선단은 항로를 잃은 것도 모자라 2개로 갈라졌다. 병력의 1/3가량이 탄 작은 선단은 목표인 카이보보곶에서 남동쪽으로 16km 떨어진 롱고스카와얀곶에 상륙했다. 주력이 탄 선단은 목표인 카이보보곶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퀴나완곶에 상륙했다. 일본군의 상륙은 완전한 기습으로 미-필리핀군을 놀라게 만들었으나 엉뚱한 곳에 상륙한 일본군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의 바탄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1 P.297)


롱고스카와얀곶은 바탄의 최대항구인 마리벨스에서 서쪽으로 1,80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북쪽의 라피아이곶과 함께 작은 만을 이루고 있다. 끝의 폭은 약 400m, 기저부의 폭은 2배 정도이며, 길이는 600m 정도이다. 좁은 해안을 벗어나면 높이 약 30m 의 해안절벽이 있고 전반적인 지형은 수많은 계곡과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울창한 정글이라 가시거리는 수미터에 불과하며 통로라고는 걸어서만 갈 수 있는 작은 오솔길이 전부이다.


(롱고스카와얀 곶.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1 P.301)


롱고스카와얀곶의 북쪽인 라피아이곶 내륙에는 해발 188m 의 푸콧산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마리벨스를 포함하여 바탄반도의 남서해안을 감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마리벨스를 지키던 해군대대장 브리젯 해군중령은 푸콧산 꼭대기에 24시간 내내 감시하는 초소를 만들어 두었다.


23일 오전 8시 40분에 해군초병이 남쪽으로부터 푸콧산에 접근하는 300여명의 적을 발견하고 보고했다. 해군대대의 총 병력은 600명 정도였으나 당장 가용한 예비대는 해병과 수병으로 편성된 1개 소대에 지나지 않았다. 브리젯 중령은 예비소대를 급파하고 서부지구 사령관 셀렉 준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셀렉 준장은 제301화학중대(US)와 2.95인치 산포 1문을 보내 주었다. 브리젯 중령은 이후 해군대대에서 지속적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전투가 끝날 때까지 약 200명을 투입했다.


해군소대가 푸콧산 정상에 도착했을 때 약간 먼저 도착한 일본군 선두가 참호를 파고 있었다. 제대로 훈련받은 해병대원이 미숙한 수병을 이끌면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정상에서 몰아내고 기관총을 설치했다. 23일 저녁이 되자 제301화학중대가 도착하여 북쪽의 제3추격대대와 연결을 확보했다. 2.95인치 산포는 푸콧산의 북쪽 능선에 방열했다.


24일 아침이 되자 미군은 일본군이 푸콧산 남쪽 사면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밤새 해군대대로부터 병력이 증원되었으므로 해병과 수병은 다수의 정찰대를 구성하여 반복적인 교전으로 일본군을 밀어내었다. 당시 정찰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군이 미군수병의 정체에 대해 착각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자신을 압박하는 미군이 두가지 부류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첫번째 부류는 제대로 훈련받은 정예병력이었는데 소수여서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 일본군을 당혹하게 만든 두번째 부류는 적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처음보는 노란색 군복을 입은 정체불명의 병사들이었다. 당시 미군 수병들은 흰색 군복을 물들여 위장복을 만들려고 했는데 염료와 시간이 부족하여 마치 겨자소스처럼 옅고 어두운 노란색이 되었다. 


노란색 군복을 입은 병사들은 공터에만 나오면 주저앉아 큰소리로 떠들면서 담배를 피워댔다. 일본군은 마치 사격을 유도하는 듯한 행동을 보고 노란색 군복을 입은 병사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미군이 미끼로 투입한 자살분대라고 판단했다. 자살분대를 여러개 투입할 정도로 미군이 공을 들이는 것으로 보아 곧 대규모 소탕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일본군은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24일 저녁에 푸콧산을 떠나 라피아이곶과 롱고스카와얀곶으로 물러났다.


츠네이로대대의 주력 600명이 상륙한 퀴나완곶은 마리벨스와 바각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롱고스카와얀곶과 마찬가지로 20m 가까운 나무와 덤불이 무성한 정글지대였으나 전자와는 달리 차량 통행이 가능한 도로가 1.6km 떨어진 서부도로까지 이어져 있었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재빨리 기동하여 서부도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퀴나완곶.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2 P. 303)


퀴나완곶은 제34추격비행대대가 담당했다. 해안을 굽어보는 곳에 몇정의 50구경 기관총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요원들은 일본군이 상륙할 때 졸고 있었다. 그들이 인기척에 놀라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일본군 상당수가 기관총좌 후방까지 진출한 후였다. 이 상태에서 발사하여 위치를 노출했다가 사방에서 공격당할 것을 두려워한 기관총 요원들은 숨을 죽이고 일본군이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기만을 바랬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상륙 및 그 직후의 가장 취약한 순간을 무사히 넘겼다. 일본군이 내륙으로 한참 진출한 이후인 23일 오전 2시 30분에야 상륙보고가 서부지구 사령관 셀렉 준장에게 도달했다. 그는 최근에 제1경찰연대장으로 임명한 알렉산더 대령에게 제3경찰대대를 이끌고 퀴나완 곶으로 가서 일본군을 도로 바다에 밀어 넣으라고 명령했다. 보다 남쪽인 롱고스카와얀곶에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은 6시간이 지난 오전 8시 30분에야 들어왔다.


제3경찰대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일본군은 전체 길이가 900m 인 퀴나완곶의 끝에서 500m 정도 내려온 지점에 참호를 파고 기다리고 있었다. 23일 오전 10시부터 공격이 시작되었으나 일본군의 방어선을 뚫을 수 없었다. 오후가 되자 알렉산더 대령은 일본군의 방어선을 우회하려 했으나 일본군은 곶 전체를 관통하는 두터운 방어선을 펴고 있었다. 23일 저녁이 되자 알렉산더 대령은 일본군이 약 7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차, 야포, 그리고 미군 또는 필리핀 스카우트로 이루어진 정예보병의 증원을 요청했다.


23일 아침에 서부지구사령부에는 일본군 상륙소식을 들은 지원사령관 맥브라이드 장군과 바탄에서 맥아더를 대리하는 전진사령관 마셜 장군이 찾아왔다. 맥브라이드 장군은 마셜 장군에게 전차 및 정예보병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주전투진지에서 후퇴가 예정되어 있어 당장은 차출할 수 없었다. 대신 알렉산더 대령에게는 브렌건캐리어 2대, 제21추격비행대대의 일부, 1개 경찰중대, 제71사단본부중대가 주어졌다.


알렉산더 대령은 새로 주어진 부대를 포함한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24일 아침부터 공격을 실시했으나 일본군의 방어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급기야 오후 4시에 알렉산더 대령이 팔에 부상을 입어 후송되자 전투를 참관하던 맥아더의 정보참모 찰스 윌러비 대령이 얼떨결에 지휘를 맡아야 했다. 


그동안 서부지구사령관 셀렉 준장이 해임되었다. 퀴나완곶에 상륙한 일본군이 소수라고 믿고 있던 마셜 장군은 소탕이 지지부진한 이유가 공격정신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여 셀렉 장군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었다. 23일 밤에 마셜 장군은 맥아더의 참모장 서덜랜드 장군에게 셀렉 장군의 교체를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맥아더는 24일 오후에 서부지구사령관 셀렉 준장을 해임하고 후임으로 제26기병연대장(PS) 클린턴 피어스 대령을 준장으로 승진시켜 임명했다. 

서부지구사령관의 교체는 전면적인 지휘구조 개편과 맞물려 있었다. 제1 및 제2필리핀군단이 지원사령부지역으로 남하하면서 1월 25일을 기하여 서부지구사령관은 제1필리핀군단장, 동부지구사령관은 제2필리핀군단장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로써 휘하 부대를 잃은 지원사령부는 유명무실해졌다.


25일에 퀴나완곶에는 제21추격비행대대의 병력 전부가 증원되었고 26일에는 제88야포연대(PS)제2대대의 1개 포대가 퀴나완곶에, 나머지 1개 포대가 롱고스카와얀곶에 배치되었으나 일본군의 방어선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예보병의 대규모 투입없이는 소탕이 불가능했다.


26일 밤에 일본군이 퀴나완곶의 일본군을 증원하기 위하여 추가로 선단을 파견하자 제1필리핀군단장 웨인라이트 장군은 정예보병 500명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스카우트 대대를 투입하기로 결심했다. 제57보병연대제2대대는 롱고스카와얀곶으로, 제45보병연대제3대대는 퀴나완곶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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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지원사령부지역(Service Command Area)


맥아더 장군이 주전투진지의 포기를 결정한 1942년 1월 22일에 서해안의 일본군은 바탄반도의 남쪽에 대담한 상륙작전을 시도했다. 일본군은 2개 대대를 동원하여 3번에 걸쳐 3곳에 상륙했는데 일본군의 상륙지역은 지원사령부가 방어하고 있었다.


미-필리핀군이 바탄반도로 들어온 1942년 1월 7일에 설정된 지원사령부지역은 필리핀군관구 부사령관인 앨런 맥브라이드 준장이 지휘했다. 지원사령부 담당 구역의 북쪽 경계는 마말라강-마리벨스산-페이사완강을 잇는 선이었다. 지원사령부 지역은 패니귀안강을 경계로 동부지구와 서부지구로 나뉘었다. (패니귀안강은 마리벨스산으로부터 남쪽으로 흘러 마리벨스 시가지 동쪽에서 마리벨스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남쪽 끝에 있는 마리벨스 시가지는 해군 담당으로 맥브라이드 준장의 지휘를 받지 않았다.


(일본군의 바탄상륙.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7.html#17-1 P.297)


지원사령부가 담당한 면적은 260㎢가 넘었으며 동해안의 마말라강 하구로부터 서해안의 페이사완강 하구에 이르는 해안선의 길이는 60km 가 넘었다. 내륙은 기복이 심하고 험준했으며 많은 강이 깊은 계곡을 따라 빠른 속력으로 흘렀다. 마닐라만에 면한 동해안은 단조로운 편이었으나 일본군이 상륙한 서해안은 수많은 만과 곶으로 이루어져 들쭉날쭉했다. 서부지구는 대부분 정글로 덮여 있었고 해안에서 조금 들어오면 포장되지 않은 단선도로인 서부도로가 마리벨스로부터 북쪽으로 뻗어 있었다.


동부지구 사령관은 제2사단장(PA) 길레르모 프란치스코 소장이었다. 그가 보유한 병력은 제2 및 제4경찰연대와 그외 잡다한 부대였으며 75mm 자주포 1개 포대의 지원을 받았다.


일본군이 상륙한 서부지구 사령관은 제71사단장(PA) 클라이드 셀렉 준장으로 서해안의 카이보보곶에서 마리벨스까지 16km 길이의 해안선을 맡았다. 그가 보유한 병력은 제71사단 잔존병(사단사령부, 지원부대, 2.95인치 산포 1개 대대와 75mm 야포 2문), 제1경찰연대, 그리고 5개 추격비행대대의 지상요원이었다. 그리고 임시로 프랜시스 브리젯 해군중령이 지휘하는 대대 규모의 마리벨스 수비대를 배속받았다.


셀렉 준장이 지휘하는 병력은 소속이 제각각이었고 제복도 달랐다. 많은 병력이 보병훈련을 받지 않았으며 일부 병력은 한번도 소총을 쏘아보지 못했다. 이런 잡동사니 병력을 지휘하는 일은 평시에도 어려웠다.


비행기를 잃은 육군항공대 병사들은 바탄반도에 들어와서 2주간 보병 훈련을 받았으나 시간이 모자랐다. 무장이 통일되지 않아 화기숙달훈련에 어려움을 더했다. 30구경 기관총이 제1차 세계대전형 멀린 기관총, 루이스 기관총, 그리고 브라우닝 자동소총의 3가지였으며 추가로 50구경 기관총의 사용법도 익혀야 했다. 220명으로 이루어진 중대에 총검이 3자루 밖에 없었으나 중대장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중대에서 총검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3명 밖에 없었다.

필리핀 경찰대는 주로 치안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보병훈련을 거의 받지 않았다.

마리벨스를 지키던 해군대대는 남쪽으로 철수한 제10초계비행대대의 잔여인원, 폭격을 받아 손상을 입은 채 마리벨스에 정박 중이던 잠수모함 카노푸스의 승조원, 그리고 포병 출신의 해병 4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 중 해병만이 보병훈련을 받았다.


(잠수모함 AS-9 카노푸스. https://en.wikipedia.org/wiki/USS_Canopus_(AS-9)


셀렉 준장은 상륙한 일본군이 내륙으로 진출하는 오솔길을 차단하는 형태로 진지를 만들었다. 진지 전방에는 전초를 세웠으며 진지에는 철조망을 두르고 기관총을 거치하고 통신망을 연결했다. 해군 소속의 6인치 포 4문이 있었으나 담당 구역의 북쪽 끝과 남쪽에 1문씩 2문만 배치할 수 있었다. 퀴나완곶에 설치하려던 3번째 포는 포좌의 시멘트가 굳기를 기다리는 동안 일본군이 상륙했으며 4번째 포는 포좌의 위치조차 정하지 못했다. 셀렉 준장은 야간상륙을 막기 위하여 탐조등을 요청했으나 지급받지 못했다.


1942년 1월 22일이 되자 불완전하나마 셀렉 준장이 담당한 바탄반도 서해안 16km의 방어태세가 갖추어졌다. 가장 북쪽은 약 200명으로 이루어진 제17추격비행대대가 맡았다. 그 아래에서 아냐산강까지는 제1경찰연대대제1대대가 맡았다. 퀴나완곶을 포함한 아냐산강 이남은 236명의 병력을 가진 제34추격비행대대가 맡았다. 그 남쪽으로는 제1경찰연대의 제2대대, 제3추격비행대대, 그리고 해군대대의 순서로 배치되었다. 예비대는 제1경찰연대제3대대, 제20 및 제21추격비행대대였다. 경험부족에다가 무장이 빈약한 병력들이기는 했으나 셀렉 준장은 이들을 믿고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하는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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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주전투진지 포기


코레히도르에 있던 맥아더 장군은 바탄에 설치한 극동미육군전진사령부를 통하여 전투 경과를 매일 보고받고 있었다. 전진사령부로부터의 보고가 점점 비관적으로 바뀌자 1942년 1월 22일에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 참모장 서덜랜드 장군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바탄반도로 파견되었다. 리메이 부근에 있던 제2필리핀군단사령부에서 파커 장군과 회담하고 이어서 제1필리핀군단사령부를 찾아 웨인라이트 장군과 회담한 서덜랜드는 주전투진지를 포기해야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맥아더는 서덜랜드의 결론을 받아들였다.


주전투진지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판단은 적절한 것이었다. 제51사단의 패주로 인하여 제2필리핀군단 방어선의 서쪽 절반이 무너졌고 방어선을 회복하려는 반격은 실패했다. 제1 및 제2필리핀군단 사이에는 커다란 돌출부가 생겼는데 안에서는 연대 규모의 일본군이 돌아다니고 있어서 제2필리핀군단을 포위할 위험이 있었다. 제1필리핀군단의 보급로인 서부도로에는 일본군이 봉쇄점을 설치하여 전선으로의 보급품 수송이 막힌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주전투진지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했으며 수만명이 철수하려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늦어도 22일 저녁에는 철수 결정을 내려야 했다. 철수는 23일 밤부터 시작하여 26일 아침에 마지막 부대가 필러-바각도로를 따라 설정한 후방전투진지(Rear Battle Position)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후방전투진지.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5.html P.246)


제2필리핀군단에서 가장 먼저 철수한 부대는 중포와 지원부대로서 23일 밤에 성공적으로 철수하여 25일 아침에 후방전투진지에 도착했다.


일본군은 24일 오전 10시부터 야포와 항공기의 지원을 등에 업고 총공격을 실시했으나 제2필리핀군단은 저녁까지 전선을 사수한 후 저녁 7시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필리핀사단장(US) 맥슨 로우 준장이 지휘하는 후위부대가  서쪽의 구이톨에서 동쪽의 발랑가에 이르는 방어선을 편성하여 후퇴를 엄호했다. 후위부대는 서쪽으로부터 제51사단의 잔존병, 제33보병연대(PA), 제31보병연대(PA)의 1개 대대, 제57보병연대(PS)의 1개 대대, 그리고 제31보병연대(US)의 1개 대대였다. 후위부대는 전차단장 위버 장군이 지휘하는 전차 및 75mm 자주포의 지원을 받았다.


24일 밤의 철수는 혼란 그 자체였다. 하루종일 일본군의 맹공에 시달린 병사들은 철수명령이 떨어지자 한꺼번에 진지에서 뛰쳐나와 무질서하게 동부도로와 후방도로(Back Road)를 따라 남쪽으로 도망쳤다. (후방도로는 공병대가 바탄반도 내륙에 동부도로와 나란히 남북으로 건설한 도로로 차량통행이 가능했다.) 차량도 길을 메운 보병과 뒤섞여 동부도로와 후방도로를 걷는 속도로 남하할 수 밖에 없었다. 보병이 도로를 비워두고 양옆으로 걸어서 철수하면 차량이 왕복하면서 훨씬 빨리 효율적으로 철수할 수 있으련만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헌병도 없었고 지휘관들도 자신의 부대를 통제할 수 없었다. 병력이 뒤섞여 부대구분이 무의미했다. 만일 24일 밤에 일본군이 도로교차점을 포격했다면 무시무시한 살육이 벌어졌을 것이다.


나라 중장은 미-필리핀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휘하 부대를 우추격대(보병제9연대), 중추격대(보병제141연대), 좌추격대(보병제142연대)로 개편하여 추격을 실시했다. 주력인 중추격대가 24일 오후 7시 30분에 미-필리핀군이 철수한 진지를 돌파하면서 일본군의 추격이 본격화되는 듯했으나 곧 로우 준장의 후위부대에 막혀 자정까지 진격을 저지당했다.


주력이 철수하는 동안 추격하려는 일본군을 막던 로우 준장의 후위부대도 자정을 넘어 25일 새벽이 되자 주력을 따라 철수하기 시작했다. 발랑가를 지키던 제31보병연대가 후위부대 중 마지막으로 25일 새벽 3시에 후방도로를 따라 철수했다. 전차들과 75mm 자주포가 남하하는 보병의 뒤를 지키면서 철수했다.


25일 날이 밝자 일본군의 항공기가 전력을 다하여 후퇴 중인 미-필리핀군을 공격했다. 일본기들은 도로를 메우며 철수하는 미-필리핀군을 발견하면 폭탄을 떨어뜨린 다음 기총소사를 가했다. 대공무기가 없는 미-필리핀군은 일본기가 나타날 때마다 도로 양옆으로 달아났으며 일본기가 사라지면 희생당한 불운한 전우의 시체를 남겨둔 채 남쪽으로 걸어갔다.


26일 아침이 되자 미-필리핀군의 주력이 후방전투진지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26일 오전 9시 30분에 일본군 중추격대(보병제141연대)가 가장 뒷쪽에서 후퇴를 엄호하던 전차단을 따라잡았다. 그러자 전차단은 기습적으로 반격했다. 일본군이 접근하자 전차단장 위버 장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후방도로에 세웠다. 구동계가 망가져 기동이 불편하던 전차 2대가 가장 북쪽에 서고 도로를 따라서 전차가 일렬로 늘어섰으며 75mm 자주포들이 가장 남쪽에 배치되었다. 준비를 갖춘 전차단은 일본군 선두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맹렬한 일제사격을 가했다. 기세등등하게 추격하다가 갑자기 엄청난 화력을 뒤집어 쓴 일본군은 움찔하여 물러섰다. 그러자 위버 장군은 기동이 곤란한 전차 2대의 승무원을 빼낸 후 재빨리 철수했다. 일본정찰기가 철수하는 전차단을 발견하고 보고했으나 적을 얕보고 추격하다가 뜨거운 맛을 본 일본군은 위버 장군이 일부러 남겨둔 2대의 전차를 보고는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중추격대를 지휘하던 보병제141연대장 이마이 대좌는 박격포와 야포의 화력지원이 가능해진 후에도 움직이지 않았고 37mm 속사포가 도착하여 전차 2대에 여러 발을 명중시킨 이후에야 정찰대를 보냈다. 전차에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살펴본 정찰대는 빈 전차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마이 대좌가 속은 것을 알았을 때 전차단은 후방전투진지에 도착한 이후였다.


동쪽의 제2필리핀군단이 철수하는 동안 서부도로가 봉쇄되면서 4일 동안 보급을 받지 못한 서쪽의 제1필리핀군단도 철수하여 26일 아침까지 후방전투진지에 배치를 마쳤다.


이로써 일본군은 미-필리핀군의 첫번째 방어선을 돌파했다. 댓가는 만만치 않았다. 1942년 1월 9일 현재 6,651명의 병력을 가지고 전투에 돌입한 제65여단은 1월 24일까지 전사 608명, 부상 863명, 합계 1,471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사상자의 대부분은 휘하의 3개 연대 소속이었다. 1월 9일 현재 각 1,919명으로 이루어진 3개 연대 중 서해안에 파견된 보병제122연대는 24일까지 전사 35명, 부상73명, 합계 108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제2필리핀군단을 상대한 2개 연대 중 보병제141연대는 전사 335명, 부상 364명으로 합계 699명의 사상자를, 제142연대는 전사 226명, 부상 387명, 합계 613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156명이 참가한 여단사령부에서는 전사 1명, 부상11명, 293명이 참가한 여단공병대에서 전사 5명, 부상9명, 142명이 참가한 여단통신대에서는 부상 7명, 303명이 참가한 야전병원에서는 전사 6명, 부상 12명의 피해를 입었다. 보병제9연대를 비롯한 배속부대는 전사 93명, 부상 288명, 합계 381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따라서 배속부대를 포함하면 제65여단의 사상자는 전사 701명, 부상 1,151명으로 합계 1,852명이다. 같은 기간 미-필리핀군의 사상자 숫자는 알 수 없다.  


후방전투진지는 미-필리핀군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1월 23일에 마셜 장군에게 보낸 전문에서 후방전투진지가 최후의 방어선이며 이곳에서 전멸할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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