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오리온-바각 방어선
바탄반도 서해안에 상륙한 일본군에 대한 소탕전이 벌어지는 동안 제1 및 제2필리핀군단의 방어선에서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1942년 1월 26일 아침까지 제1및 제2필리핀군단의 병사들은 동해안의 오리온에서 서해안의 바각을 잇는 최종방어선에 배치되었다. 이 방어선은 바탄을 동서로 연결하는 필러-바각도로를 따라 설정했으나 일치하지는 않았다.
오리온-바각 방어선은 나티브산이 중간에 박혀 있어 제1 및 제2필리핀군단이 분리되었던 아부케이-마우반 방어선과 달리 두 군단이 접촉하여 연속적인 방어선을 이루었다. 또한 아부케이-마우반 선을 지킬 때보다 방어해야 할 해안선이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해안선의 방어도 충실해졌다.
이제 미-필리핀군이 장악한 지역은 약 520㎢ 로 줄어들었으며 여기에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90,000명의 인원이 들어 있었다. 가장 높은 산은 마리벨스산으로 지역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동해안의 좁은 평야 지역을 제외하면 모두 산지로서 짙은 정글에 덮여 있었다. 평균기온은 섭씨 35도로 햇볕이 들지 않는 정글 속에서도 한낮의 열기는 대단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었으며 갈증에 시달렸다. 이 시기는 건기라 더위를 식혀줄 스콜도 거의 내리지 않았다. 반면 해가 지면 기온은 급격히 떨어져서 낮에 폭염으로 고통받던 병사들을 추위로 떨게 만들었다.
제1 및 제2필리핀군단의 경계는 마리벨스산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판틴간강이었다. 판틴간강의 동쪽인 제2필리핀군단 지역에는 545m 높이의 사맛산이 있어서 전장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사맛산의 동쪽은 늪지, 덤불, 사탕수수밭, 평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몇개의 강이 마닐라만으로 흘러들어 갔다. 건기인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강이 말라 있었지만 그래도 군대의 이동에 방해가 되었다.
판틴간강의 서쪽인 제1필리핀군단 지역에는 사탕수수밭이나 평지가 없었다. 마리벨스산에서 급격하게 떨어지는 사면이 바로 바다로 이어지고 있었으며 정글은 동쪽보다 더욱 울창했다.
미-필리핀군은 최종방어선으로 철수하면서 바탄반도를 동서로 관통하면서 차량 통행이 가능한 유일한 도로인 필러-바각도로를 잃었다. 그러나 도로의 대부분 구간을 야포의 사정거리 내에 두고 도로 중간 부분을 점유함으로써 일본군의 사용 또한 거부했다. 공병대가 방어선 후방에서 동서의 오솔길을 연결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2월 중순에 완성함으로써 사람과 보급품을 짊어진 가축은 동서를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차량은 여전히 해안을 따라 달리는 동부도로와 서부도로를 통하여 동서를 오가야 했다.
오리온-바각 방어선은 아부케이-마우반 방어선과 달리 단위부대가 아닌 구역(sector)으로 나누고 구역사령관이 직접 군단장의 지휘를 받는 구조로 바꾸었다. 전투를 거치면서 같은 급의 단위부대끼리 전력 격차가 크게 벌어진 상황에서 이는 합리적인 방안이었다. 제2필리핀군단의 방어선은 A, B, C, D 구역으로 나누었으며 해안방어를 담당한 동부지구사령부를 E 구역으로 삼았다. 제1필리핀군단의 방어선은 우측 및 좌측구역으로 나누었으며 해안방어를 담당한 서부지구사령부를 남측구역으로 삼았다.
처음에 군단장들은 중요한 구역에 정예보병인 필리핀사단 소속의 스카우트 연대를 배치했으나 맥아더 사령부는 필리핀사단 전체를 직할 예비대로 삼기를 원했다. 따라서 스카우트 연대는 1월 26일에 후방으로 이동했으며 이후 군단의 지휘에서 벗어나 극동미육군사령부의 직접 지휘 아래 있다가 군단장의 요청에 따라 지원해 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조치로 방어선에 배치된 스카우트 연대가 후방으로 빠지면서 제1필리핀군단의 방어선에 혼란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오리온-바각 방어선.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18.html#18-1 P.325)
1942년 1월 27일 현재 오리온-바각 방어선의 배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제2필리핀군단은 동해안에서 판틴간강까지 14,000m 를 맡았으며 방어선은 동쪽으로부터 A, B, C, D 4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다.
A 구역은 리마이 북쪽 해안으로부터 오리온 남서쪽까지 2,300m 에 걸쳐 있었으며 제31보병연대(PA)가 담당했다.
B구역은 약 1,800m 에 걸쳐 있었는데 육군항공대 요원 1,400명으로 이루어진 임시항공연대가 담당했으며 사령관은 제31보병연대(US)에서 파견된 노련한 보병 지휘관인 어빈 도안 대령이었다.
C 구역은 4,100m 에 걸쳐 있었으며 제32보병연대(PA)와 제51전투단(PA, 제51사단의 잔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령관은 제31사단장 클리포드 블루멜 준장이었다.
D구역은 사맛산에서 판틴간강에 이르는 5,500m 구간으로 제21 및 제41사단(PA)과 제33보병연대(PA, 제1대대 감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령관은 필리핀 사단장인 맥슨 로우 준장이었다.
E 구역은 해안방어를 담당하던 기존의 동부지구사령부 구역으로 배치된 병력도 동일했으며 사령관 또한 동부지구사령관이었던 프란치스코 장군이 유임되었다.
군단예비대는 제33보병연대제1대대(PA), 그리고 필리핀육군 전투공병대였다. 여기에 추가하여 극동미육군사령부 직할인 제31보병연대(US)가 리마이에 주둔하고 있어서 제2필리핀군단장이 요청하면 배속될 것이었다.
방어정면이 가장 넓은 D 구역의 화력지원을 위하여 75mm 야포 16문과 2.95인치 산포 8문을 가진 제41야포연대(PA)가 사맛산 능선에 포진했다. 나머지 구역의 화력지원을 위하여 40문의 75mm 야포를 갖춘 제21, 제31 및 제51(PA) 사단포병과 75mm 야포와 2.95인치 산포를 가진 스카우트 야포대대 2개가 전개했다. 해안방어를 맡은 E 구역은 제21야포연대의 지원을 받았으며 추가로 10문 정도의 해군포가 가세했다. 구형 155mm 평사포를 가진 제301야포연대(PA)와 제86야포대대(PS)로 이루어진 군단포병은 리마이 부근에 주둔했다.
제1필리핀군단은 서해안에서 판틴간강까지 12,000m 를 맡았으며 방어선은 7번 오솔길(Trail 7)을 기준으로 좌측 및 우측의 2개 구역으로 나뉘었다.
우측 구역은 7번 오솔길을 포함한 동쪽 5,000m 를 담당했으며 제11사단(PA)과 제2필리핀경찰연대(1개 대대 감편)이 배치되었다. 사령관은 제11사단장 윌리엄 브라우어 준장이었다.
좌측 구역은 서해안부터 7번 오솔길까지 7,000m 를 담당했으며 루터 스티븐스 준장의 제91사단(PA)과 제1사단(PA)의 잔존병이 배치되었다. 사령관은 남부루손군사령관이었던 앨버트 존스 준장이었다.
남측 구역은 해안방어를 담당하던 기존의 서부지구사령부 구역으로 배치 병력도 동일했으며 사령관 또한 서부지구사령관이었던 피어스 장군이 유임되었다.
군단예비대는 제26기병연대(PS)였다. 여기에 추가하여 극동미육군사령부 직할인 제45보병연대(PS)가 바각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서부도로 부근에 주둔하고 있어서 제1필리핀군단장이 요청하면 배속될 것이었다.
극동미육군사령부의 마지막 예비연대인 제57보병연대(PS)는 남쪽의 마리벨스에 주둔하고 있다가 어느 군단이든 필요한 곳에 배속될 것이었다.
제1필리핀군단은 철수 과정에서 많은 야포를 잃어 야포세력이 빈약했다. 좌측 구역의 화력지원을 위하여 제91야포연대와 제71연대의 잔존병이 배치되었으나 이들은 75mm 야포를 거의 다 잃은 상태였다. 우측 구역의 화력지원을 위하여 제11사단의 사단포병과 스카우트 1개 포대가 배치되었다. 해안방어를 지원할 야포 세력도 빈약했으나 일본군의 상륙 이후 155mm 곡사포 2문을 포함하여 약간의 야포가 증원되었다. 군단포병은 75mm 야포를 장비한 스카우트 1개 포병대대(1개 포대 감편)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리온-바각 방어선을 공격할 일본군은 기무라지대와 제65혼성여단이었다. 제1필리핀군단을 상대한 기무라 지대는 약 5,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2필리핀군단을 상대한 제65여단은 아부케이 방어선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어 여단 소속인 보병제141 및 제142연대의 병력이 각각 1,200명 정도로 줄어든 상태였다.
제14군사령관 혼마 중장은 오리온-바각 방어선의 성격에 대해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미-필리핀군의 주방어선은 남쪽의 리마이-마리벨스산-비누안간강을 잇는 선이라고 생각했으며 지금 일본군이 만난 방어선은 단순한 전초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전초선을 단번에 돌파한 다음 적의 주방어선에 최대한 빨리 도달하여 마지막 결전을 펼치고자 했다.
혼마 장군은 적이 주방어선을 강화하기 전에 빨리 공격하기 위하여 야포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1월 26일 오후 4시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제65여단은 동쪽에서 전초선을 돌파하여 최대한 빨리 리마이-마리벨스산 선에 도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쪽의 기무라지대 역시 적의 전초선을 돌파한 후 최대한 빨리 비누안간강에 도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본군의 공격은 잘못된 판단에 기초한 것이었으나 우연히 타이밍을 맞추었다.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스카우트 연대가 후방으로 빠지고 다른 부대가 경비구역을 인계받으면서 혼란이 일어나 제1필리핀군단의 전선이 가장 취약한 순간에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제2필리핀군단은 일본군이 꾸물거리는 바람에 병력 교체에 따른 가장 취약한 순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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