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링가옌 상륙(2) - 상륙
링가옌 부대의 항해에 특별한 일은 없었다. 선단은 인도차이나로 가는 것처럼 속이기 위하여 처음에는 남서쪽으로 항진하다가 침로를 바꾸어 평균 8노트의 느린 속력으로 링가옌 만으로 향했다. 도중에 태풍을 만나 고생했으나 연합군의 항공기나 함정은 만나지 않았다.
원래 선단에는 항공엄호가 없었으나 21일부터 라오아그에 진출한 비행제24및 제50전대의 전투기 20대가 엄호를 시작했다. 동시에 6대의 경폭격기들이 포트 윈트가 있는 수빅만 입구의 그란데섬을 폭격하여 이곳이 상륙장소인 양 호도하려고 했다. 1941년 12월 22일 새벽 1시 40분에 선단은 정박지에 진입했다. 날씨는 으슬으슬하고 하늘은 어두웠으며 간간이 비가 뿌렸다.
일본군은 상륙 과정에서 착오를 겪었다. 선두로 진입한 우익대(제1수송선대, 보병제47연대 기간)의 선도함이 어둠 속에서 아린게이 강 하구를 놓치는 바람에 우익대는 상륙지점인 아구를 지나쳐 6km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 산토토마스 앞바다에 정박했다. 그러자 뒤따르던 선단들도 줄줄이 남쪽으로 더 내려와 정박했다. 그리하여 상륙주정의 항해거리가 길어졌다.
일본순양함과 구축함이 해안을 포격하는 동안 병사들은 새벽 2시부터 상륙주정에 옮겨타기 시작했다. 오전 4시에 우익대인 보병제47연대(1개 대대 감편), 전차제4연대(1개 중대 감편), 수색제48연대, 산포병제48연대제2대대, 야전중포병제8연대제1대대(1개 중대 감편)를 실은 주정이 수송선을 떠났으며 오전 4시 47분에 최초의 주정이 아구 해안에 도달했다. 13분 후인 5시에 좌익대(제2수송선대, 대만보병제1연대 기간)의 주정이 처음으로 카바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아린게이 해안에 도착했으며 이어서 제48보병단사령부, 대만보병제1연대, 산포제48연대제1대대, 그리고 공병제48연대주력이 상륙했다. 오전 7시에는 우에지마 지대(보병제9연대제1대대)가 바우앙에 상륙했다. 좌측지대(보병제9연대제3대대)는 오전 8시에 바우앙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산티아고에 상륙했다. 군예비대(보병제9연대제2대대)는 오전 9시에 바우앙에 상륙했다.
병사들은 상륙과정에서 크게 고생했다. 바다가 거칠어서 수송선에서 상륙주정으로 옮겨타기가 어려웠다. 주정은 해안으로 향하면서 정신없이 흔들렸으며 들이치는 파도에 몸이 흠뻑 젖었다. 바닷물을 머금은 무전기는 먹통이 되어 상륙한 부대와 연락이 끊어졌으며 심지어 선박 사이의 통신도 시원찮았다. 높은 파도는 주정을 해안에 내동댕이쳤으며 일부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끌어낼 수 있었다. 북쪽에 상륙한 보병제9연대는 가미지마 지대를 상륙시킨 후 바람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서 군예비대를 상륙시켰다.
제14군의 보병과 산포, 일부 전차는 계획대로 당일 상륙했으나 중포, 자동차, 그리고 보급품은 양륙하지 못했다.
미국잠수함 S-38 이 잠입하여 22일 오전 7시에 수송선 하요마루를 격침했으나 일본선단이 얕은 해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잠수함의 전반적인 전과는 실망스러웠다. 일본전투기가 항공엄호를 펴기 직전인 22일 아침에 호주에서 날아온 B-17 폭격기 4대가 선단 상공에 도달하여 폭탄을 떨어뜨리고 함정에게 기총소사를 가하여 약간의 피해를 입혔다. 링가옌 만에서 북서쪽으로 160km 떨어진 해상에서 연합군 함대의 출현에 대비하던 다카하시 제독의 함대도 카탈리나 정찰비행정과 미육군항공기의 공격을 받았으나 가벼운 피해만 입은 채 스콜 속으로 달아났다.
악천후를 피해 해안에 접근하던 우익대의 수송선들은 샌 페이비언과 다구판에 각각 2문씩 배치된 제86야포대대(PS)의 155mm 평사포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이 포격은 혼마 장군을 불안하게 만들었으나 명중탄은 없었다.
(다구판 인근에 배치된 미군의 155mm 평사포.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8.html#8-1)
미군은 링가옌 부대의 접근을 알고 있었다. 12월 18일에 극동미육군항공대의 정보참모는 약 80척의 수송선으로 이루어진 선단이 북쪽으로부터 접근 중이라고 보고했다. 20일 새벽 2시에는 제16해군관구가 링가옌 만 북쪽 60km 해상에서 커다란 호송선단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20일 밤에는 극동미육군항공대가 100척에서 120척으로 이루어진 일본군 원정부대가 링가옌 만으로 접근 중이며 21일 밤에 도착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22일 새벽에는 링가옌 만을 초계 중이던 미국잠수함 스팅레이가 일본선단의 도착을 보고했다.
필리핀 수비대는 적이 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링가옌 만을 지키던 병력은 필리핀군 2개 사단이었는데 남쪽 연안을 지키던 제21사단(PA)에게만 사단포병이 있었고 일본군이 상륙한 동쪽 연안을 지키던 윌리엄 브라우어 준장의 제11사단(PA)에는 포병이 없었다.
(링가옌 만 상륙상황도.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PI/USA-P-PI-8.html#8-1 .P.124)
가미지마 지대가 상륙한 바우앙-아길리안 지역을 지키던 것은 도널드 보넷 중령의 제71보병연대였다. 동원된 이후 13주의 훈련 밖에 받지 않은 제71보병연대는 원래 제71사단 소속이었으나 임시로 제11사단에 배속된 상태였다. 로사리오에 주둔하고 있던 북부루손군 예비대인 클린턴 피어스 대령의 제26기병연대(PS)는 남쪽으로 19km 떨어진 포조루비오로 이동한 상태였다.
바우앙 시가지에 주둔하고 있던 제71보병연대장 보넷 중령은 21일에 북쪽으로부터 접근하고 있는 다나카 대좌의 대만보병제2연대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보넷 연대장은 1개 대대에 75mm 자주포대를 붙여 라 유니언 주의 산 페르난도로 급파하고 다른 대대를 동쪽으로 우회시켰다. 75mm 자주포를 가진 대대가 정면에서 일본군의 남하를 막는 동안 우회한 대대가 동쪽으로부터 일본군의 옆구리를 친다는 계획이었다. 제71연대가 기동을 마치기 전에 일본군이 상륙했다.
가미지마 지대(보병제9연제1대대)가 상륙한 바우앙 해안은 1정의 50구경 기관총과 몇 정의 30구경 기관총으로 무장한 제12보병연대(PA)의 본부대대가 지키고 있었다. 30구경 기관총은 대부분 탄약불량 때문에 사격하지 못했으나 50구경 기관총은 해안에 접근하는 가미지마 지대에게 무시무시한 화력을 퍼부어 링가옌 상륙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혔다. 일본군이 피해를 무릅쓰고 상륙을 감행하자 필리핀군은 탄약을 모래에 파묻고 달아났다.
가미지마 지대의 정찰대는 상륙 즉시 북상하여 오전 10시 30분에 산 페르난도에서 대만보병제2연대의 정찰대와 만났으며 오후 1시 30분에는 대대 주력끼리 만났다. 군직할예비대(보병제9연대제2대대)는 바우앙을 공격하여 오후 4시 30분에 점령했으며 제3대대는 바우앙을 넘어 나길리안 비행장을 목표로 동진했다. 보넷 중령은 공격 명령을 취소하고 후퇴 명령을 내렸다. 제71보병연대의 1개 대대는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철수했고 연대 주력은 그날 저녁까지 필리핀의 여름 수도인 바기오로 철수했다.
일본군의 중앙인 아린게이에 상륙한 이마이 히푸미 대좌의 대만보병제1연대와 산포병제48연대(제1 및 제2대대 감편)는 오전 10시에 병력을 집결시켜 3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이마이 대좌는 오후 3시 30분에 다모티스 북쪽에서 정찰제48연대 및 전차제4연대를 만났다.
일본군 남쪽에 상륙한 야나기 이사무 대좌의 우익대는 오전 6시 50분까지 아구를 점령했다. 야나기 대좌는 자동차의 상륙을 기다리지 않고 아린게이 도로를 따라 로사리오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정찰제48연대와 전차제4연대는 우익대 주력과 헤어져 3번 도로를 따라 다모티스로 남하했다.
필리핀군 제11사단장 브라우어 준장은 일본군 상륙보고를 듣자 1개 대대를 북쪽으로 급파했다. 북상하던 대대는 오전 10시 30분에 다모티스 북쪽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아구에서 남하한 정찰제48연대 및 전차제4연대가 불운한 필리핀 대대를 두드려 패서 남쪽으로 쫓아버렸다.
제48사단장 츠치바시 중장은 오후 3시 55분에 아린게이 부근에 상륙하여 아구에 사령부를 차렸다. 22일 오후가 되자 제48사단의 보병과 산포병 대부분, 그리고 전차 절반이 상륙을 마치고 교두보를 확보했다. 비록 중포, 자동차, 그리고 보급품은 양륙하지 못했지만 이제 일본군이 반격을 받아 바다로 밀려날 위험은 없었다.
상륙 당일인 22일에 혼마 장군은 링가옌 만에 떠있는 수송선에 머물렀다. 상륙한 부대가 사방으로 진격하고 있었으나 통신이 끊겨 상황을 알 수 없었고 명령을 내릴 방법도 없었다. 그는 엄습하는 불안과 싸우면서 만사가 잘 풀리기를 기대하는 수 밖에 없었다.
혼마 장군 입장에서는 불안해 할 이유가 충분했다. 상륙해안의 필리핀군이 제대로 싸운다면 상륙한 일본군 선두를 당분간 좁은 해안평야에 가두어 둘 수 있었다. 일본군이 상륙 해안 남쪽의 중부 루손 평야로 진출하면 좋은 도로를 타고 마닐라까지 바로 갈 수 있었지만 역으로 마닐라 부근의 미군 주력도 트럭을 타고 상륙해안으로 재빨리 달려올 수 있었다. 만일 일본군의 중포와 잔여 병력이 모두 상륙하여 강력한 방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상륙해안 부근의 필리핀군 4개 사단이 잘 훈련되고 제대로 장비를 갖춘 필리핀사단(US)을 앞세우고 단호하게 반격한다면 좁은 해안평야에 갇힌 일본군 선두를 분쇄할 수 있었다.
선단의 운명도 걱정거리였다. 링가옌 만의 선단이 일본군 주력임을 알아차린 미군이 가지고 있던 항공기, 함정 , 잠수함을 총동원하여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만일 이 공격을 막아내는데 실패한다면 선단은 치명상을 입고 미처 상륙하지 못한 병사들은 물고기밥이 될 것이었다. 또한 이미 상륙한 병력은 보급과 퇴로가 끊긴 상태에서 비참한 패배에 직면할 것이었다.
혼마 장군이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반격을 실시하기에는 필리핀군의 훈련상태와 장비가 불량했으며 22일 시점에서는 이미 극동미육군항공대와 아시아함대에게는 일본선단에 치명상을 입힐 능력이 없었다.
제14군의 계획은 상륙한 부대가 후속 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빨리 진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부 참모가 교두보를 강화한 다음 진격하자고 주장하여 계획대로 빠르게 진격하자는 참모와 논쟁을 벌였다. 혼마 장군은 빠르게 진격하자는 참모의 손을 들어주었다.
22일 저녁까지 바다가 잔잔해지지 않자 혼마 장군은 오후 5시 30분에 남쪽으로 내려가 다모티스 부근에 중포와 잔여 병력을 양륙하기로 결정했다. 남쪽으로부터 가해질 미군의 포격을 두려워 한 혼마 장군은 제48사단장 츠치바시 중장에게 미군의 155mm 평사포가 배치되어 있는 샌 페이비언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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