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전쟁의 충격


필리핀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방공호는 만들어져 있지 않았으며 필리핀군은 동원 중이었다. 당황한 필리핀에는 온갖 헛소문이 퍼졌다.


일본폭격기의 일부에 백인 조종사가 타고 있다는 소문이 그럴싸하게 퍼져서 맥아더가 전쟁부에 보낸 보고서에도 언급되었다. 제27폭격비행전대의 누군가는 방금 도착한 A-20 쌍발폭격기가 듀이 대로에 늘어서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며 또다른 누군가는 A-24 경폭격기가 마닐라 항에 도착하여 하역을 기다린다는 전화를 받았다. 비행전대에서는 인부를 모아 부두로 파견했으나 헛물만 켰다. 제27폭격비행전대는 일본 스파이가 비행전대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더글러스 A-20 하복 쌍발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Douglas_A-20_Havoc)


극동미육군사령부에도 온갖 헛소문이 들어왔다. 하루는 미함대가 필리핀을 구하기 위하여 태평양을 항해중이라는 소문이 들어왔다. 다음날에는 누군가 마닐라의 식수에 독을 풀었으며 항구 지역에는 독가스가 퍼지는 중이라는 소문이 들어왔고 어떤 날에는 일본군 1,000명이 마닐라 만으로 들어와 마닐라를 관통해 흐르는 파시그 강 하구에 상륙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마닐라에는 하루종일 잘못된 공습경보가 울렸다. 공습경보가 하도 자주 울리자 서덜랜드 장군은  경보를 울리기 전에 육군사령부의 허락을 받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등화관제가 엄격하게 실시되면서 마닐라의 우범지대에는 범죄가 들끓었다. 경찰, 경비병, 그리고 무장한 공습감시원이 혼란을 부채질했다. 제5열이 혼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여 흥분한 그들은 아무데나 불쑥 나타나 검문을 했고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바로 사살했다. 경찰, 경비병 및 공습감시원이 무분별한 불시검문 및 사살로 혼란을 부채질하자 극동미육군사령부가 무기를 회수했다.


마닐라는 공습에 직면한 현대 도시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상접 입구는 모래주머니로 보호되었고 상점과 빌딩에는 임시변통의 대피호가 만들어졌다. 집에 지하실이 있는 사람은 밤에 그곳에서 잤다. 교통수단은 육군에 징발되었고 휘발유는 배급제로 바뀌었다. 차량은 야간에 하늘에서 보이지 않도록 전조등에 뚜껑을 달아야 했다. 교통체계는 붕괴했으며 트럭, 구급차, 그리고 관용차는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렸다.


마닐라는 혼란에 빠졌다. 도심 거주자는 안전을 위하여 교외로 탈출했고 교외 거주자는 같은 이유로 도심으로 들어왔다. 중심 도로는 양쪽으로 오가는 트럭, 승용차, 그리고 손수레로 들어찼다. 가재도구와 가축을 실은 차들이 빵빵거리고 닭과 돼지 울음소리까지 합쳐 하루종일 시끄러웠다. 사람들은 식량을 찾아 몰려다녔으며 무선 및 유선 통신소는 사용대기자로 미어터질 지경이어서 외부에 소식을 전하기가 불가능했다.


사람들이 예금을 인출하기 위하여 은행으로 몰리자 인출한도가 1주일에 200페소로 제한되었다. 필리핀인들은 은화를 선호했으나 인출은 지폐로만 가능했다. 모든 거래가 현금으로만 이루어져 경제가 위축되었다.


필리핀 자치령은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자치령 정부는 방공호 건설을 시작했고 의회는 임시 회의를 열어 케손 대통령에게 국방비 20,000,000페소를 집행할 권한을 부여했다. 미국 정부가 민간 부문에 사용하도록 같은 금액을 원조해 주었다. 자치령 정부는 원조받은 돈으로 공무원에게 3달치 월급을 미리 지급했다. 따라서 공무원은 이 돈으로 가족을 안전한 마닐라 외곽으로 옮겨놓고 자신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마닐라 시는 계엄령 선포 없이도 개전 1주일이 지나자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군대도 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극동미육군사령부의 보급장교였던 프랭크 카펜터 소령은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24km 떨어진 지역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그곳의 병사가 미국 수송선단의 회항, 탄약 부족, 아파리 상륙 등 기밀을 알고 있었다. 사령부로 돌아온 카펜터 소령은 독일군이 미군 복장을 하고 병사들에게 부정적인 소식을 퍼뜨리고 있으며 일본군 1,500명이 적절한 때에 행동하기 위하여 민간인 복장을 하고 마닐라 시에 들어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정보참모에게 조사를 요청했다.


8일 오후의 클라크 비행장 피습에 관해서 믿기 힘든 이야기가 돌아다녔다. 제26기병연대의 필리핀인 장교 1명이 강력한 단파통신기를 가지고 클라크 비행장 바로 옆의 공터에서 일본군에게 B-17이 땅에 있는 시간을 알려주었으며 비행장 피습 직후 이 사실을 알아차린 제26기병연대의 부사관 1명이 톰슨 기관단총으로 이 장교를 사살했다는 것이다. 또한 클라크 비행장의 조종사 막사 밖에 있는 나무에 누군가 거울을 매달아 놓았는데 이 거울이 일본기가 날아온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9일 아침의 니콜스 비행장 피습에 대해서는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날 아침에 어선 12척이 니콜스 비행장을 향하여 마닐라 만에 일직선으로 떠 있었으며  니콜스 비행장 부근에서는 공습 직전에 낡은 자동차가 폭발하여 화염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닐라 만에 들어선 일본기가 일직선으로 늘어선 어선을 따라 날아와 불타는 자동차의  화염을 발견하면 그곳이 바로 니콜스 비행장이었다는 것이다.


카비테 항 폭격에서도 클라크 비행장처럼 단파 통신기를 사용한 스파이 이야기가 나온다. 이번에는 일본인 아내를 둔 미국인이었으며 폭격 직후 아내와 함께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또다른 이야기에는 스파이가 카비테 기지에서 근무하던 젊고 아름다운 일본계 여성이었다고 나온다. 이 스파이는 통신을 보내던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나 그녀를 사랑하던 해군장교가 몰래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많은 장병들이 일본군의 공격을 앞두고 목표를 알려주기 위하여 불꽃놀이를 하거나 목표 방향으로 축제용 로켓을 쏘아올리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물론 공식기록에 따르면 비밀 단파통신기, 일직선으로 늘어선 어선, 그리고 아리따운 스파이 이야기는 모두 근거가 없으며 전후에 일본측 기록을 들여다보고 일본군 장교를 심문한 결과 당시 필리핀에서 조직적인 제5열의 활동은 없었다.


공수부대에 대한 보고도 잇따랐다. 12월 10일에 클라크 기지에서 동쪽으로 16km 떨어진 곳에 20,000명의 공수부대가 낙하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극동미육군사령부는 필리핀 사단(US)에게 진압명령을 내렸다. 사단은 득달같이 달려갔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필리핀 수비대와 자치령은 전쟁 이전부터 제5열의 활동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필리핀 군관구의 정보부서와 자치령의 정보기관은 요주의 인물의 목록을 만들어 감시했는데 여기에는 일본인 뿐만 아니라 일본과 관련되거나 일본에 우호적인 많은 미국인 사업가, 기술자, 그리고 농장주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와이에서 파견된 일본계 FBI 요원들이 필리핀의 일본인 사회에 침투했으며 경찰대 또한 별도의 정보기관을 운용했다.


전쟁이 터지자 목록에 올라있던 인물은 즉시 체포되었다. 마닐라의 일본인 구역에는 헌병이 배치되었으며 일본인은 집안에 머무르라는 경고를 받았다. 경찰은 경고를 무시하고 마닐라 시내를 돌아다니는 일본인을 길거리, 식당, 사무실, 클럽 등 모든 곳에서 눈에 띄는 족족 잡아들였다. 전쟁 첫날 맥아더 장군은 마닐라의 일본인 중 40%, 그리고 필리핀 내 다른 지역의 일본인 중 10% 가 구금 상태라고 전쟁부에 보고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하자 13일부터 독일인과 이탈리아인도 구금되었다. 연행된 사람은 마닐라의 빌리비드 교도소에서 심사를 받았으며 혐의를 벗은 사람은 즉시 석방되었다. 만족스럽게 해명하지 못한 사람은 마닐라 남쪽의 막사로 보내져 고등판무관 대리와 육군장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의 조사를 기다렸다.


개전 초반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필리핀군의 동원은 진행되었다. 필리핀군 사단 대부분은 개전 당시 3번째 연대의 동원이 완료되지 않았으나 15일까지 완료했다.

훈련소 관리요원으로 이루어진 제1정규사단(PA)은 부족한 병력을 보충받아 포병대없이 12월 19일에 편성되었다. 제1정규사단은 남부루손군에 소속되었으며 편성 즉시 제1보병연대(PA)를 라몬 만의 마우반 지역으로 파견했다. 1942년 1월에는 필리핀 경찰대로 이루어진 제2정규사단(PA)이 편성되었다.

비사야와 민다나오에서는 개전 당시 절반 정도 동원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제72 및 제92사단(PA)은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 12월 9일에 루손으로 파견되었다.

많은 임시부대가 현지에서 편성되었다. 전쟁이 터지자 맥아더 장군은 동원령이 떨어진 10개 사단 소속이 아닌 예비군도 가까운 부대에 입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많은 부대가 정원외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학생군사훈련단 및 자원자를 합쳐 임시부대를 만들었다.


필리핀 수비대는 화력을 보완하고자 창고를 뒤졌다. 700명으로 이루어진 제301야포연대(PA)가 새로 만들어져 창고에서 찾아낸 나무바퀴 달린 제1차 세계대전형 155mm 평사포 24문과 155mm 곡사포 2문으로 무장하고 민다나오에서 불려온 알렉산더 퀸타드 대령의 지휘를 받았다. 제301야포연대(PA)는 코레히도르 밖에서 155mm 야포를 보유한 유일한 부대였다.

동시에 75mm 야포 4문으로 구성된 포대 4개를 가진 임시포병대대 3개도 만들었다. 75mm 야포는 10월에 도착한 것이었으며 병력은 필리핀 스카우트, 예비군, 그리고 제200대공해안포연대에서 차출했다. 2개 대대는 북부루손군에 1개 대대는 남부루손군에 배속했다.


극동미육군사령부는 전쟁이 터지자 휘하 부대에게 시중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라고 명령했다. 병참장교는 눈에 띄는 모든 자동차와 트럭, 대량의 피복과 식량을 사들였으며 운수회사는 육군에 징발되었다. 통신대는 모든 사진기, 라디오, 그리고 전화기를 사들였다. 마닐라장거리전화회사의 회장 조셉 스티브놋은 육군중령 계급장을 달고 통신대의 지휘를 받았다. 의무대는 의약품, 붕대, 수술기구를 사들였다. 자이알라이 클럽은 병원이 되었고 리잘 체육관은 의약품 창고가 되었다.


마닐라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 병참장교가 석유회사로부터 마닐라 인근에 저장 중인 대량의 석유를 사들였다. 맥아더 장군은 식량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중국상인들로부터 쌀을 담은 125파운드(57kg)짜리 가마니 수천개를 사들였고 병참장교는 마닐라 만에 떠있던 상선을 돌아다니며 선적하고 있던 식량을 대량으로 구입했다. 또한 통조림회사와 식품회사로부터도 통조림을 비롯한 식량을 대량으로 확보했다.


(브렌건캐리어. http://en.wikipedia.org/wiki/Universal_Carrier)

 


일본이 홍콩을 공격하면서 홍콩에 전개한 캐나다 자동차대대에 보급할 물자와 장비를 싣고 있던 캐나다 수송선 돈 호세가 마닐라에서 발이 묶였다. 맥아더 장군은 돈 호세가 싣고 있던 물자와 장비를 필리핀에 양륙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전쟁부가 캐나다 정부에 현지판매를 요청했다. 돈 호세가 싣고 있던 장비 중에 브렌건캐리어 57대가 있었는데 맥아더 장군은 이중 40대를 제임스 위버 대령의 임시 전차단에 배정했다. 애석하게도 이 브렌건캐리어에는 기관총이 없었으므로 전투임무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결국 브렌건캐리어는 전량 마닐라 병기창에서 사용했다.


일본군이 아파리, 비간 및 레가스피에 상륙하자 맥아더 사령부는 비행장을 얻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 대령은 일본군 주력은 아직 상륙하지 않았으며 일본군이 루손의 제공권을 장악한 다음에 상륙할 것이라고 예견했으나 날짜를 28일로 실제보다 늦게 추정했다.


아파리 및 비간 상륙으로 북부루손군은 작전을 바꾸었다. 원래 북부루손군은 북부루손 전역을 방어하게 되어 있었으나 제공권이 없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임무였다. 12월 16일에 북부루손군 사령관 조너선 웨인라이트 소장은 북부루손 전체를 지킨다는 목표를 포기하고 방어 구역을 라 유니온 주의 산 페르난도 이남으로 축소하여 일본군 주력의 상륙이 예상되는 링가옌 만 방어에 치중하기로 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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