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영국의 극동방어정책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일동맹에 따라 연합국 측으로 참전했다. 독일에 선전포고한 후 일본군은 독일이 지배하던 산둥반도를 공격하고 태평양의 독일령 섬들을 점령했다. 일본은 산둥반도를 점령한 후 독일의 권익을 일본에 승계하고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 지역을 일본에 조차한다는 내용의 21개조를 중국에 강요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종전 이후 일본은 케롤라인, 마셜 제도 및 괌을 제외한 마리애나 제도에 대한 대한 신탁통치를 인정받았다. 호주는 뉴기니 섬의 동부와 비스마르크 제도, 뉴질랜드는 독일령 사모아를 신탁통치했다. 나우루는 영국, 호주 및 뉴질랜드가 공동으로 신탁통치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해군력이 강화되고 서태평양에서 일본과 이해가 충돌하기 시작한 미국의 요구로 인해 영일동맹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 되자 극동 지역에 함대를 상주시킬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쇠퇴한 영국의 국력으로는 본국 해역, 지중해 그리고 극동에 모두 강력한 함대를 상주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따라서 극동에는 강력한 해군기지를 건설해 두고 전쟁이 임박하면 함대를 파견하는 방식을 택했다. 해군기지 후보지는 홍콩, 실론, 시드니 및 싱가포르였다. 홍콩에는 후보지 중에서 유일하게 근대적인 해군기지가 있었으나 일본과 가까워서 전쟁이 벌어질 경우 방어가 불가능했다. 실론은 태평양 지역의 사태에 대응하기에는 멀었다. 남은 후보지는 시드니와 싱가포르였는데 영국은 인도양과 호주 사이의 해상 교통로를 방어하기에 좋은 싱가포르를 골랐다. 1921년 6월 19일에 영국 내각은 싱가포르에 근대적인 해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해군성은 싱가포르 해군기지를 남해안에 자리하여 방어에 불리한 기존의 케펠 항 대신 싱가포르 섬의 북쪽에 건설하자고 건의했고 1923년 2월에 내각이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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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당시 싱가포르. 북쪽에 해군기지가 보인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ingapore_map_1942.jpg)
1921년 11월부터 워싱턴에서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의 대표단이 모여 해군군축에 대해 논의했다. 다음해인 1922년 2월 6일에 조인된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으로 인하여 각국의 주력함 보유량은 영국 및 미국 525,000톤, 일본 315,000톤, 프랑스 및 이탈리아 175,000톤으로 제한되었다. 주력함의 척당 배수량은 35,000톤, 주포 구경은 16인치로 제한되었으며 항공모함의 척당 배수량도 27,000톤으로 제한되었다. 보조함의 척당 배수량도 10,000톤, 주포 구경은 8인치로 제한되었으나 보유량은 제한하지 못했다. 보조함의 보유량 제한은 1930년의 런던 해군군축조약에서 이루어진다.
워싱턴 조약에는 미국, 영국 및 일본 사이에 태평양 지역의 무장을 제한하기 위한 협정도 포함되었다. 그 결과 각국이 무장을 하지 못하게 된 지역은 다음과 같다.
영국 : 홍콩을 포함하여 동경 110도 동쪽 지역. 단 캐나다, 호주 및 뉴질랜드는 제외
미국 : 미국 연안, 알래스카, 파나마 및 하와이를 제외한 태평양 지역
일본 : 쿠릴 제도, 보닌 제도, 류큐 제도, 타이완, 펑후 제도(마리애나, 캐롤라인 및 마셜 제도는 국제연맹의 신탁통치 조건에 따라 무장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워싱턴 조약에서는 포함하지 않음)
동경 103도에 위치한 싱가포르는 무장이 가능했으나 해군기지 건설은 시작도 하기 전에 좌초될 운명에 처했다. 1923년에 사상 최초로 집권한 노동당 정부가 해군기지 건설계획을 취소했다. 정책 변경에 대한 영연방의 반응은 다양했다.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호주와 뉴질랜드는 반발했다. 캐나다는 중립을 지켰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세계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찬성했다. 다행히 노동당 정부는 단명했으며 이어 들어선 보수당 정부가 건설을 시작했다. 제국방어위원회(Committee of Imperial Defence) 산하의 커즌 위원회는 싱가포르 해군기지의 위치를 케펠 항이 아닌 싱가포르 섬의 북해안으로 확정하고 부근의 셀레타에 비행장을 닦을 것을 권고했다. 또한 싱가포르에 대한 위협은 배후의 말레이 반도가 아닌 바다로부터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해군기지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공사가 진행되어 1938년에 완성되었다.
해군기지 건설이 결정되는 순간부터 싱가포르 방어의 핵심 개념은 전쟁이 벌어지면 70일 이내에 강력한 함대가 달려와서 침략자를 물리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싱가포르에 건설될 방어 시설의 역할은 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해군기지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싱가포르의 방어를 대구경 해안포가 맡을 것이냐 아니면 뇌격기가 맡을 것이냐를 두고 1920년대 초부터 해군성 및 전쟁성과 항공성 사이에 기나긴 논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논쟁은 싱가포르 방어태세의 완성을 늦추고 3군 사이에 알력을 만들었다.
항공성은 전투기의 보호를 받고 정찰기의 지원을 받는 뇌격기들이 접근하는 적의 군함과 수송선단을 대구경 해안포보다 수백 km 먼거리에서 격파할 수 있으며 살아남아 접근한 적은 중형포 및 경포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항공기는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으므로 뇌격기들이 싱가포르에 상주할 필요없이 상황이 급박해지면 며칠 내로 날아오면 되기 때문에 경제적이라고 주장했다.
해군성과 전쟁성은 대구경 해안포가 바다에서 접근하는 적을 물리치는데 효과적임을 역사 속에서 증명해 왔고 사격통제기술의 발달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항공기가 대규모 함대를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지 검증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또한 항공기가 다른 곳에 있다가 위기에 임박해서 날아오는 경우 시간을 맞추지 못할 수 있으므로 항상 그 자리에 있어서 위기가 발생하면 즉시 대응이 가능한 대구경 해안포가 방어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6년, 지리한 논쟁 끝에 제국방어위원회는 싱가포르 방어를 위하여 일단 15인치 해안포 3문을 설치하고 15인치 해안포를 추가로 설치할지 아니면 뇌격기에게 맡길지는 나중에 결정하기로 했다. 방어위원회는 또한 항공성의 요구에 따라 캘커타에 항공기 중계용 비행장을 만들었다.
1927년에 웹 길먼 중장이 이끄는 위원회가 해안포대의 위치를 정하기 위하여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그런데 위원회 내부에서 해군기지 방어를 중시하는 파와 싱가포르 시의 방어를 중시하는 파 사이에 포대 위치에 대한 의견이 나뉘었다. 여기에 더하여 해협 식민지 당국은 포대 건설에 해협 식민지의 자금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본국 정부의 약속이 없는 한 포대를 건설할 땅을 내놓을 수 없다고 버텼다. 어영부영 시간을 끄는 동안 1929년에 노동당 정부가 두번째로 집권했고 이어서 대공황이 찾아와 방어 시설 건설은 다시 미루어졌다.
노동당 정부는 런던 해군군축조약을 성공시켜 일본의 주력함 비율을 다시 영국 및 미국의 60% 로 묶었고 보조함 세력마저도 통제에 성공함으로써 싱가포르 방어시설의 건설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1930년대에 들어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제1차 대전 종전과 함께 빼앗겼던 세력을 회복했다. 1931년에 남만주 철도의 경비를 위하여 파견되어 있던 관동군이 독단적으로 만주를 침공하여 만주국을 건설했으며 동시에 남쪽 상하이에서는 일본군과 중국군이 교전을 벌였다. 국제연맹이 만주국의 승인을 거부하고 만주로부터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자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해 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1931년에 영국참모본부는 제1차 세계대전 이래 매년 정부에 보고하던 향후 10년간 대규모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보증을 포기했다. 이에 따라 1931년 12월에 제국방어위원회 산하에 스탠리 볼드윈이 이끄는 위원회가 만들어져 극동 방어를 논의했다. 여기서 뇌격기와 해안포를 둘러싼 항공성과 해군성 및 전쟁성 사이의 해묵은 논쟁이 재발했다. 양측의 논리는 이전과 같았으며 결론도 비슷했다. 즉 해안포가 방어의 중핵을 맡되 뇌격기도 보조전력으로 중시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볼드윈 위원회의 결론을 받아들여 방어시설 건설을 서두르고 뇌격기 세력을 확충하며 비행장을 하나 더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공사가 진행되어 1935년 말에 3문의 15인치 해안포가 거치되었다. 동시에 영국정부는 15인치 해안포 2문을 추가하고 비행장 2개를 더 만드는 내용의 2차 계획을시작하여 1939년 말에 완성했다.
1936년으로 정해진 런던해군군축조약의 마감 기한이 다가오자 영국정부는 제2차 런던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해군력을 억제하려 했다. 영국은 이를 위하여 독일에게 자국 대비 35%의 함정 보유를 허락하는 내용의 영독해군협정을 체결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프랑스는 이 협정에 반발하며 영국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영국으로서는 훗날 독일이 협정에 허용된 함대 건설에 성공할 경우 극동으로 파견할 함대의 규모를 줄이는 결과가 되었다. 이렇게 공을 들였음에도 제2차 런던조약은 실패했다. 일본은 조약 참여의 전제 조건으로 주력함 보유량을 미국 및 영국과 동등하게 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요구가 거절당하자 일본은 조약 불참을 통보하고 함정 건조에 매달렸다. 이로써 1936년부터 무조약 시대가 열렸다.
1936년 봄에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방어에 대해 평가했다. 그들은 영국의 극동 방어와 연계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영국 정부에 회담을 제의했다. 영국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방어 강화와 양국 사이의 협조에는 찬성하면서도 통합 사령부를 구성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방어 문제에까지 끌려 들어가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결국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항공기들이 영국의 극동 방어에 적극적으로 협력한다는 수준에서 논의를 마쳤다.
당시 말레이 반도의 비행장은 캘커타에서 싱가포르로 가는 상업 비행기를 위한 중간 기착지로서 서해안에 몇 개가 있을 뿐이었다. 말레이 반도의 중앙에는 티티왕사 산맥이 달리고 있어 고온다습한 기류가 산맥에 걸려 커다란 비구름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항공기술로 항공기가 매일 이 비구름을 뚫고 비행하기에는 무리였다. 따라서 항공성은 말레이 반도의 동해안에 3개의 비행장을 새로 닦아 일본 함대를 발견하기 위한 정찰기를 운용하고 함대에 타격을 가할 항공기들의 전진기지로 사용하기로 했다. 비행장의 위치는 케란탄 주 코타바루 인근의 공케다, 중부의 쿠안탄, 그리고 조호르 동부의 카항이었다. 항공성은 비행장의 위치를 고르면서 방어 문제는 고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비행장들은 해안에 인접하여 적이 부근에 상륙하면 위협에 바로 노출되고 방어 종심이 얕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 일본군이 말레이 반도에 상륙할 가능성이 없다고 믿는 시기였기 때문에 육군은 싱가포르를 지키기에도 빠듯한 소규모 수비대를 쪼개어 비행장을 지켜달라는 항공성의 요구를 거절했다.
1937년에 싱가포르 방어의 기본 전제를 흔드는 일이 일어났다. 말레이 사령관(General Officer Commanding, Malaya) 윌리엄 도비 소장은 커즌 위원회가 주장한 이래 의심없이 받아들여져 온 말레이 반도 상륙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의문을 품고 실제로 시험 상륙을 실시하는 등 다각도로 조사했다. 도비 소장은 10월에 전쟁성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북동계절풍이 부는 10월에서 3월 사이에 말레이 동해안에 상륙이 가능하며 이 시기에는 날씨가 흐려서 정찰기가 적 선단의 접근을 알아차리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도비 소장은 상륙 예상 지점으로 태국의 싱고라와 파타니, 그리고 말레이 북부의 코타바루를 꼽았다. 또한 싱가포르 방어는 곧 해군기지 방어이므로 말레이 반도를 남하하는 적에 대항하는 싱가포르의 북쪽 방어선은 적이 해군기지에 야포사격을 가하지 못하도록 해군기지로부터 34km 이상 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상정한 최후 방어선은 남부 조호르의 조호르 강이었다. 전쟁성은 1939년에 말레이 반도 방어 시설을 건설하기 위한 예산으로 60,000 파운드를 책정했는데 도비 장군은 그 중 23,000 파운드를 들여 남부 조호르에 기관총 벙커를 비롯한 방어시설을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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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 사령관 윌리엄 도비 장군. https://en.wikipedia.org/wiki/William_Dobbie)
도비 소장이 최후 방어선을 싱가포르 해협이 아닌 남부 조호르에 설정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으로 싱가포르 방어의 목적이 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해군기지를 방어하는 것이었으므로 싱가포르 해협을 최후 방어선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싱가포르 해협을 최후 방어선으로 삼을 경우 해협에 바짝 다가온 적의 야포 사격으로 해군기지 사용이 불가능하다.
남부 조호르를 최후 방어선으로 삼는다는 도비 소장의 구상은 후임 사령관들에게 계속 이어졌으므로 싱가포르 해협에 접한 싱가포르 섬의 북해안에는 방어시설을 건설하지 않았다. 남부 조호르를 강화하기에도 부족한 예산으로 최후 방어선 안에 있는 싱가포르 북해안에 방어 시설을 건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싱가포르의 조기 상실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
국제정세는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35년 10월에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 1936년 3월에는 독일이 라인란트를 점령했다. 11월에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방공협정(Anti-Comintern Pact)을 체결했다.
1937년 봄에 영국참모본부는 극동방위에 대한 평가를 실시했다. 독일, 이탈리아와 전쟁이 벌어진 가운데 일본이 극동 지역을 공격한다면 프랑스가 지중해의 이탈리아 해군력을 견제해 줄 것이기 때문에 영국은 강력한 함대를 70일 내에 싱가포르에 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홍콩에 함대가 도달하려면 90일이 걸리는데 4개 대대에 불과한 홍콩 수비대가 그때까지 버티기는 불가능하며 설사 수비대를 증강한다 해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따라서 홍콩은 최대한 오래 방어하되 최종적으로는 포기할 수 있는 전초기지로 분류되었다.
1937년 여름에 열린 제국회의(Imperial Conference)에서 뉴질랜드는 영국함대가 평화시에도 싱가포르에 상주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영국은 이 요청을 거절하면서 영국이 유럽에서 전쟁에 휩싸이지 않는 한 일본은 감히 태평양의 영연방 지역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유럽에서 영국이 강력한 해군력을 갖추어 전쟁을 억제하는 것이 뉴질랜드의 안보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미국과 영국은 11월에 브뤼셀에서 회의를 열어 1922년의 9개국 조약 정신에 따라 중국으로부터 일본군의 철병을 요청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 오히려 일본은 중일전쟁을 계기로 중국에 들어와 있던 미국인과 영국인을 몰아내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연장선상에서 1937년 12월에 일본해군의 함재기들이 양쯔 강에서 미해군의 포함 파나이를 격침했다. 일본정부는 실수라고 변명했다. 미국은 일본이 파나이를 고의로 격침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으나 마땅히 응징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는 선에서 물러섰다. 1938년 5월에는 일본이 중국 남부로 진격했고 10월에는 홍콩 바로 서쪽에 있는 광둥이 점령당했다. 1939년 2월에 일본군이 홍콩에서 남쪽으로 480km 떨어진 하이난 섬에 상륙하면서 홍콩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유럽 정세도 숨가쁘게 돌아갔다. 히틀러는 1938년 9월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독일에 할양하라고 요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0일의 뮌헨 회담에서 히틀러의 전쟁 협박에 굴복하여 체코슬로바카아에게 수데텐 지역을 포기하라고 강요했다.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의 중요한 방어선인 수데텐 지방은 독일 손에 떨어졌다. 그러나 히틀러는 수데텐이 마지막이이라던 약속을 어기고 다음해인 1939년 3월에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했다. 4월에는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침공했으며 히틀러는 영독해군협정의 소멸을 선언하고 폴란드에 단치히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5월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강철조약을 맺었다.
유럽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과연 영국이 독일, 이탈리아와 전쟁하는 도중에 일본마저 전쟁에 뛰어들었을 때 극동에 충분한 규모의 함대를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이 일었다. 영국 참모본부는 1939년 2월의 평가에서 1937년과 비슷한 결론을 내렸지만 이번에는 호주와 뉴질랜드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5월 2일에 개최된 제국회의에서 호주와 뉴질랜드는 유사시 극동에 파견될 함대의 규모에 대해 캐물었다. 해군성은 원론적인 답변으로 어물쩍 넘어갔다. 그러나 계속하여 함대 규모를 밝히라는 요구에 직면하자 결국 6월에 극동에 파견될 함대에 주력함 2척 이상은 포함하기 어렵다고 답변했다. 이것도 3월에 있었던 프랑스 해군과의 협의에서 일본 참전시 지중해에서 영국함대가 극동으로 빠져나간다는데 프랑스의 양해를 얻은 결과였다.
유사시 파견될 영국함대의 규모가 예상보다 작다는 사실에 극동 지역은 동요했다. 말레이 사령부는 유사시 파견될 함대의 규모가 작다면 말레이 방어를 위하여 육군 2개 여단과 대량의 항공기가 추가로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7월에 제국방어위원회는 유사시 싱가포르에 함대가 도착하는 기간을 기존의 70일에서 90일로 늘리면서 수비대와 시민이 먹을 6개월치 식량을 비축하라고 권고했다. 참모본부는 9월에 함대 도착 기간을 180일로 연장했다. 함대의 도착 기간이 연장되면서 말레이에 증원병력이 파견되었다. 8월에 2개 보병대대로 이루어진 제12인도보병여단과 제22산포연대, 그리고 2개 폭격비행대대가 인도로부터 도착했으며 9월에는 2개 폭격비행대대가 영국으로부터 추가로 증원되었다.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싱가포르 및 말레이 반도의 방어 상황은 다음과 같다.
싱가포르의 해안포는 15인치 5문, 9.2인치 6문, 6인치 14문이었다. 싱가포르 방어병력은 정규대대 5개(영국대대 3개, 인도대대 1개, 말레이대대 1개), 의용대대 2개, 대공포 연대 3개, 요새공병중대 4개였다. 페낭 수비대의 병력은 인도대대 1개, 의용대대 1개, 중해안포대 1개, 그리고 요새공병중대 1개였다. 북부 말레이의 방어는 현지 부대인 말레이 연방 의용군이, 조호르의 방어는 역시 현지부대인 조호르군이 담당했다. 제12보병여단과 제22산포연대는 조호르 방어에서 기동예비대 역할을 했다.
공군은 2개 뇌격비행대대와 4개 폭격비행대대로 이루어져 24대의 빌데비스트 뇌격기와 56대의 블레님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일선기는 58대였다. 이외에도 싱가포르 비행정 6대와 선덜랜드 비행정 4대를 보유한 2개 비행정대대가 있었다.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의 민간인들은 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말레이인, 중국인, 그리고 타밀인들은 국제정세에 무심했다. 백인들은 긴박한 국제 정세를 알고는 있었으나 그들은 일본이 감히 영국과 미국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에서는 민방위 체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