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남방작전

 

일본의 전략적 아킬레스 건은 석유였다. 군국주의자들은 석유의 자급자족을 이루지 못하는 한 일본은 영원히 미국이나 영국과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태평양에서 석유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하려는 열망은 대동아공영권이란 형태로 나타났으며 남방작전은 이런 열망을 현실화시키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남방작전의 최종 목표는 석유가 산출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였으며 원정시 측면의 위협을 제거하고 석유의 안전한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진주만의 미태평양함대를 공격하고 말레이 반도의 영국군과 필리핀의 미군을 쫓아내야 했다. 이는 추가로 고무, 주석같은 중요한 전략물자의 공급도 보장할 것이었다.

대본영은 1941년 초부터 남방작전 계획을 짜기 시작했으며 7월 말에 미국이 석유금수조치를 취하자 계획에 가속도가 붙었다. 일본은 미태평양함대를 격멸하거나 최소한 심대한 타격을 주기 위하여 모항인 진주만을 기습하고 말레이 반도 및 버마 작전의 디딤돌로 삼기 위하여 태국을 초반에 점령하기로 했다. 계절풍의 영향으로 작전은 늦어도 12월에는 시작해야만 했다.

 

남방작전에 투입될 병력의 규모는 작전의 중요성이나 전선의 광대함에 비하면 작았다. 중일전쟁이 진행중이고 소련이 비록 독일과 싸우고 있지만 극동군의 상당수가 여전히 주둔 중이었으므로 만주를 비울 수 없었다. 따라서 남방작전에 투입된 사단은 일본이 보유한 51개 사단 중 11개 사단이었으며 1,500대의 육군항공기 중에서 700대와 제11항공함대에 소속된 480대의 지상발진 해군기가 작전을 지원했다. 함대는 대부분 동원되었다.

 

공격순서에는 4가지 방안이 있었다.

 

1.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먼저 침공하고 말레이와 필리핀을 침공하는 방안

2. 시계방향으로 필리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말레이 순서로 침공하는 방안

3. 반시계방향으로 말레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필리핀 순서로 침공하는 방안

4. 말레이와 필리핀을 동시에 침공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동서 양면에서 협공하는 방안

 

버마 침공은 말레이 반도 장악이 끝난 이후에 가능했다.

 

1번 안은 침공부대의 보급선이 양측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커서 위험했다.

2번 안은 말레이의 영국군에게 방어를 위한 시간을 준다는 단점이 있었다.

3번 안은 반대로 필리핀의 미군에게 방어를 위한 시간을 준다는 단점이 있었다.

 

해군은 병력 집중이 용이한 2번안을 선호했다. 반면 육군은 3번안을 선호했다. 육군은 필리핀을 나중에 공격하면 미국의 참전을 늦출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진주만 기습을 기획하고 있던 해군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1941년 8월 중순에 육군과 해군은 4번안으로 합의했다. 병력 분산이라는 약점이 있지만 기습을 가하면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해군은 개전과 동시에 항공모함을 사용하여 진주만을 기습하기로 했다.

 

1941년 10월 20일에 영국,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및 미국과의 전쟁에 관한 육해군 사이의 최종 합의가 이루어졌다.

여기에 따르면 전쟁은 3단계로 진행될 것이었다.

 

1단계 : 해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진주만을 기습하고 육군 병력들이 말레이, 필리핀, 그리고 태평양 상의 영국 및 미국령 섬들을 점령한다. 이어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와 버마를 점령한다. 이로써 웨이크 섬, 마셜 제도, 길버트 제도, 비스마르크 제도, 뉴기니, 티모르, 자바, 수마트라, 말레이, 버마를 잇는 영역을 확보한다. 

2단계 : 1단계에서 확보한 영역의 가장자리를 강화한다.

3단계 : 방어망을 뚫으려는 적의 노력을 저지함으로써 전의를 상실케 한다.

 

1단계는 동시에 6개의 공격을 가하면서 시작될 것이었다.(진주만 기습, 태국 점령, 말레이 상륙, 루손 공습 , 괌, 웨이크 및 길버트 제도 상륙, 홍콩 공격) 일본군은 철저한 계획에 따라 기습 효과를 살려 6개 공격 모두를 성공시켰다.

대본영의 시간표에 따르면 필리핀은 50일, 말레이는 100일,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는 150일 만에 점령하도록 되어 있었다.

 

(1937년부터 1942년 중반까지 일본군의 진격 상황. https://en.wikipedia.org/wiki/Pacific_War)

 

1941년 11월 5일에 확정된 계획에 따르면 남방작전에 투입될 전력은 다음과 같다

 

제14군(필리핀 방면) : 제16사단, 제48사단, 전차연대 2개, 고사포 44문, 군직할포병 5개 대대

제15군(버마 방면) : 제33사단, 제55사단(1개 연대 제외)

제16군(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방면) : 제2사단, 제38사단(추후 제23군에서 배속), 제48사단(추후 제14군에서 배속), 혼성제56보병단(남해지대), 전차연대 3개, 고사포 88문, 군직할포병 5개 대대

제25군(말레이 방면) : 근위사단, 제5사단, 제18사단, 전차단 1개(4개 연대), 고사포 60문, 군직할 포병 11개 대대

남방군 직속 : 제21사단, 독립혼성제21여단, 제3비행집단, 제5비행집단, 제21독립비행대, 고사포 48문

제23군(홍콩 방면) : 제38사단, 경폭격기 1개 전대 

남해지대(태평양제도): 혼성제55보병단

(일본 전차연대는 영연방군과 마찬가지로 중대의 집합체로서 미군의 대대와 같다.)

 

11월 7일에 남방작전에 참가하는 모든 부대에 대하여 전쟁 개시가 12월 8일이 될 것이라는 예고가 떨어졌다. 15일에 남방군 총사령부는 공격 준비 명령을 내렸고 1주일 후에 각 군사령부가 작전 명령을 내렸다. 21일부터 해군 함정들은 집결지로 출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2월 1일에 전 부대에 개전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이 통보되었고 다음날에 개전일이 12월 8일로 확정되었다.

 

개전 날짜는 진주만 기습을 위주로 정했다. 새벽에 비행기를 발진시킬 진주만 북쪽 해상에 도달할 때까지 항공모함기동부대를 숨겨줄 어둠이 필요했다. 달의 상태까지 고려하면 이상적인 날짜는 12월 10일이었으나 미태평양함대의 전함이 모두 진주만에 모이는 일요일이 8일이라 12월 8일로 결정했다. 진주만 기습 시간은 현지 시간 7일 오전 7시 55분으로 도쿄시간 8일 오전 3시 25분이었다. 제25군의 코타바루 상륙은 현지시간 8일 오전 0시 45분, 도쿄시간 8일 오전 2시 15분으로 진주만 기습보다 70분이 빨랐는데 물때를 고려한 결정이었다. 싱고라 상륙은 현지시간 8일 오전 2시 30분으로 도쿄 시간 8일 오전 4시였고, 제23군의 홍콩 침공은 대략 8일 오전 8시로 도쿄시간으로 8일 오전 8시 3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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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전 결정

 

1941년 6월 22일에 독일이 소련을 공격함으로써 만주에 대한 위협이 사라지자 일본은 본격적으로 남방진출을 서둘렀다. 7월 12일에 비시 주재 일본대사가 비시 프랑스 수상인 페탱 원수에게 7월 20일까지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의 진주를 허가하지 않으면 실력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일본 외무성의 암호를 도청하여 이 사실을 알아낸 미국은 영국에 통보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미국은 일본군의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럴 경우 일본은 필리핀의 코 앞까지 다가올 뿐 아니라 서태평양에서 미국과 영국의 해상교통로를 위협할 수 있었다. 영국은 미국을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독일의 압력을 받은 비시 프랑스는 7월 21일에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용인한다는 의사를 일본에 전달했다. 이 사실을 알아낸 루스벨트 대통령은 24일에 성명을 발표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중립국으로 간주한다면서 일본군의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용인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일본은 루스벨트의 경고를 무시했다. 바로 그날 일본은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발표하고 다음날 주일대사를 통하여 미국에 통보했다.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무시당한 미국의 반응은 재빨랐으며 내용은 일본이 기겁할만큼 거칠고 단호했다. 7월 26일에 미국은 석유를 포함하여 일본과의 모든 교역을 중단하고 미국 내의 일본 자산을 동결한다고 발표했다. 영국은 영연방의 동의를 얻어 같은날 영연방과 일본과의 교역 중단 및 자산 동결을 발표했다. 다음날인 27일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가 같은 조치를 취했다. 영국과 미국 정부로부터 안전보장을 받지 못한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네덜란령 동인도 제도의 행동은 용감한 것이었다.

 

일본 정부와 경제계는 경악했다. 미국, 영연방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와의 교역이 끊긴다는 것은 사실상 일본의 대외교역 자체가 끊긴다는 뜻이었다. 당장 창고에 쌓아놓은 물건들의 수출이 막혀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으며 비축한 원료들이 떨어지면 생산도 중단될 것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석유였다. 당시 일본은 석유 사용량의 10% 정도만 자체적으로 조달하고 나머지 90% 를 수입했다. 수입 물량의 80% 는 미국으로부터, 10% 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로부터, 나머지 10% 는 기타 지역에서 조달했다. 1940년에 일본이 비축하고 있던 석유는 4960만 배럴이었는데 이는 일본이 평화시에 최대한 아껴쓸 경우 3년간 사용할 수 있는 양이었다. 물론 전쟁 시에는 훨씬 빨리 떨어질 것이었다.(제2차 세계대전 미해군 공식전사를 집필한 새뮤얼 모리슨 제독에 의하면 원유의 경우 배럴 수를 7, 중유는 6.7, 경유는 8, 휘발유는 8.5로 나누면 대략의 톤수가 나온다.) 일본은 미국이나 영연방은 몰라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자신들의 말을 들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7월 29일에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계약 연장을 원하는 일본의 다급한 요청에 대해 앞으로 일본에 대한 자원 수출은 허가가 있어야만 가능하며 허가는 상황이 호전되어야만 내줄 것이라고 대답했다. 다만 이미 계약된 물량의 경우 현금 지급을 조건으로 선적을 허용했다.

 

7 월 말에 열린 연락회의에서 일본은 일단 미국과 협상을 벌여 석유 수입을 재개하되 여의치 못할 경우 미국 및 영국과 전쟁도 불사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외무성은 8월 8일에 일본의 제안이 담긴 각서를 미국무성에 제출했다. 신임 도요다 외상의 첫 각서는 강경했다. 일본은 미국에게 교역 재개, 필리핀 방어 준비 중단, 중국, 영국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 대한 군사장비 공급 중단과 함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일본의 군사, 정치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영구적으로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반대급부로 일본은 인도차이나 이남으로는 진출하지 않으며 태평양의 평화가 확립되면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겠다는 것이었다.

 

1941년 8월 9일에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이 캐나다 뉴펀들랜드에서 만나 회담하고 대서양 헌장을 발표했다. 처칠은 루스벨트에게 일본의 남진을 막기 위하여 영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가 일본의 공격을 받을 경우 무력으로 지원하겠다는 보증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보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루스벨트는 처칠의 부탁을 거절하는 대신 일본에게 강력하게 경고하겠다고 약속했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루스벨트는 노무라 대사를 불러 일본의 8월 8일자 제안을 거부하면서 더 이상 일본이 남진을 계속하면 미국은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처칠은 8월 24일에 성명을 발표하여 영국은 극동에서 미국의 입장에 찬성하며 만일 미국이 일본과 전쟁에 돌입하면 미국 편으로 참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영국 정부는 미국 입장에 무조건 따른다는 원칙을 세우고 일본을 상대하는 문제는 미국에 맡긴 다음 발을 뺐다. 대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방어 준비에 매달렸다.

 

고노에 수상은 파국을 막기 위하여 8월 28일에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제의했으나 일본의 진의를 의심한 미국은 9월 3일에 거부했다. 9월 6일의 대본영-정부 연락회의에서 일본은 10월 말까지 전쟁 준비를 완료하고 미국 및 영국과 협상을 지속하되 10월 상순까지 만족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개전하기로 결정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영국에게는 극동에 함대를 보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극동에 파견될 함대의 규모와 성격을 둘러싸고 구형전함 다수를 파견하려는 해군성과 신예전함 1척을 포함한 소수를 파견하려는 처칠 수상 사이에 논쟁이 일었다. 결국 처칠의 의견대로 신예 킹조지5세급 전함과 순양전함, 그리고 항공모함 각 1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파견하기로 결정났다.

 

1941년 8월 초에 극동총사령관 브룩포팸 대장은 유사시 4개 폭격비행대대와 2개 전투비행대대의 지원을 받는 3개 보병여단을 태국령 크라 지협으로 진격시키는 내용의 투우사(Matador) 작전을 수립했다. 작전의 목적은 싱고라-파타니 지역을 장악하여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고 주변 비행장을 점령하며 방콕과 싱가포르를 잇는 철도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투우사 작전은 명령이 떨어지면 36시간 이내로 실시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방어에 필요한 병력을 크게 늘려잡아 48개 보병대대, 2개 전차연대, 2개 중대공포 연대, 그리고 야포, 대전차포, 공병 및 기타 지원대가 필요하다고 영국참모본부에 보고했다. 이와는 별도로 말레이 반도의 비행장과 싱가포르의 대공방어를 위하여 중대공포 212문과 경대공포 124문을 요구했다.

9월 17일에 참모본부는 일본의 태국 침공 시에 발동한다는 조건으로 투우사 작전을 받아들였다. 또한 방어 병력에 대한 퍼시발 중장의 평가도 받아들이고 병력 파견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으나 가까운 장래에 요구한 병력 모두를 보낼 가능성은 희박했다.

 

(더프 쿠퍼. https://en.wikipedia.org/wiki/Duff_Cooper#Political_career)

 

9월 9일에 싱가포르 지역상(Resident Cabinet Minister in Singapore) 더프 쿠퍼가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싱가포르 지역상이란 극동 방어에 있어서 각 지역 및 부처 그리고 민간과 군사 분야의 조율을 위하여 만든 직책으로 쉽게 말해 극동에서 전쟁 내각을 대리하는 자리였다.

 

말레이 수비대는 증강되었다. 8월 15일에는 던칸 맥스웰 준장의 제15호주여단이 도착했고 9월 3일에는 윌리엄 카펜데일 준장의 제28인도보병여단이 도착했다. 11월에는 제5, 제88, 제137 야포연대와 제80대전차연대가 도착했다.(영연방군의 포병연대는 포대의 집합체로 미군의 대대와 같은 급이다.)

 

미국과 일본의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일본은 9월 24일에 새로운 제안을 했으나 진전된 내용이 없었으므로 미국은 10월 2일에 다시금 거부했다. 협상에 돌파구를 찾지 못한 고노에 내각은 10월 16일에 붕괴했고 18일에 도조를 수상으로 하는 내각이 출범했다. 도요다 외상도 도고 시게노리로 교체되었다. 강경파 도조 수상도 미국과의 개전 결정은 부담스러웠다. 11월 5일의 어전회의에서 11월 25일까지 미국과의 협상을 진행하고 그때까지 결말이 나지 않으면 즉시 미국 및 영국과 개전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또한 구루스 사부로를 특사로 미국에 파견해 노무라 대사를 돕도록 했다.

 

고노에 내각의 붕괴와 도조 내각의 성립은 영국에 긴박감을 주었다. 10월 20일에 전쟁 내각은 전함프린스오브웨일스와 순양전함 리펄스, 그리고 항공모함 인도미터블을 싱가포르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0월 26일에 프린스오브웨일스가 영국을 떠났다. 인도미터블은 11월 3일 자메이카의 킹스턴 항구 외곽에서 좌초하여 극동 파견 함대에서 빠졌다.

 

미국과 일본의 협상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일본은 11월 7일에 A 안을 제안했으나 이전과 비슷한 내용이었으므로 미국은 15일에 거부했다. 18일에 노무라 대사와 구루스 특사는 석유 수출을 재개함과 동시에 일본군이 남부 인도차이나에서 철군한다는 안을 제안했다. 미국은 솔깃해했으나 일본외무성은 20일에 주미일본대사관에 훈령을 내려 최종안인 B 안을 제시하고 수정없이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일본의 최종안인 B 안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인도차이나 철군 기한을 중국과의 평화가 확립된 후로 설정했고 삼국동맹조약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파국을 막기 위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현재 상태를 동결시키는 조건 하에 3개월 기한으로 일본의 민간 소요량에 한하여 석유 수출을 허용하는 유화안을 만들었다. 유화안에 반대하는 헐 국무장관의 요청에 따라 11월 24일 밤과 25일 새벽에 걸쳐 이 제안을 영국, 중국, 호주 및 뉴질랜드에 보내 의견을 물었다. 처칠 수상은 유화안이 굴욕적이라고 생각했으나 루스벨트의 체면을 생각하여 신중하게 답변했다. 그는 답신에서 유화안이 중국에게 너무 가혹하다면서 중국을 핑계삼아 우회적으로 반대했다. 중국은 유화안에 격노했으며 호주와 뉴질랜드도 반대했다. 결국 루스벨트는 유화안을 포기하고 국무성에서 준비한 강경한 각서를 승인했다.

1941년 11월 26일에 헐 국무장관은 노무라 주미대사에게 훗날 헐 노트로 알려진 각서를 전달했다. 총 10조로 이루어진 각서는 만주를 포함한 중국에서 일본군이 철수하고 삼국동맹조약을 탈퇴한 이후에야 석유 수출 재개를 위한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고 명시한 강경한 내용이었다. 일본은 거부했다.

 

1941년 12월 1일의 어전회의에서 일본은 12월 8일을 기하여 미국 및 영국과 개전한다고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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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짙어가는 전운

 

1939년 9월에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자 기세등등하게 중국에서 활동 중이던 연합군의 강상포함과 중국 주둔 수비대의 철수를 요구했던 일본은 일단 폴란드가 붕괴하고 겨울로 접어들면서 가짜 전쟁이 이어지자 관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940년 5월 10일에 독일이 프랑스와 네덜란드,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영국의 주의가 온통 유럽에 붙잡히게 되자 행동을 재개했다. 5월 15일에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대해 앞으로 어떤 상황 변화가 있더라도 석유, 고무, 주석, 보크사이트, 그리고 여러 광물들을 자신이 요구하는 양만큼 수출하라고 강요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6월 6일에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고 기존 규모의 거래를 유지했다.

 

1940년 6월에 일어난 프랑스의 붕괴는 일본 내부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가 몰락하고 영국도 뒤를 따를 것으로 보이자 연합국과의 충돌을 두려워하던 신중파들은 설 곳을 잃었다. 일본이 전체주의로 줄달음치면서 대외 정책은 강경해졌다. 1940년 6월 20일에 일본은 영국에게 버마 로드를 폐쇄하고 텐진과 상하이의 영국수비대를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7월 16일에는 육군에 의하여 요나이 내각이 붕괴하고 22일에 제2차 고노에 내각이 들어섰다. 서방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지닌 마츠오카요스케가 외상이 되었고 도조 히데키 중장이 육상이 되었다. 고노에 내각은 국내의 모든 정당을 합쳐 대정익찬회로 통합함으로써 이미 군부에 눌려 숨만 붙어있던 일본의 정당 정치를 끝장내었다. 외부적으로는 유럽의 정세가 독일에게 기운 틈을 타서 중일전쟁을 마무리하고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에 걸쳐 소위 대동아 공영권을 만들고자 했다. 고노에 자신은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위하여 미국 및 영국과 전쟁까지 치를 생각은 없었으나 삼국동맹을 체결하고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강행하여 미국의 석유금수조치를 불러옴으로써 미국 및 영국과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1940년 8월 6일에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북부 지역에 일본군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독일의 압박을 받은 비시 정부가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일본군은 1940년 9월 23일에 북부 인도차이나에 진주했다.

 

영국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접근하여 일본에게 저항하도록 부추기려 했다. 중국 총사령관(Commander-in-Chief, China) 퍼시 노블 해군대장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민간행정기구와 접촉하여 홍콩과 싱가포르에 대한 쌀 수출을 계속하도록 합의했다. 또한 군정장관 드쿠 제독과 접촉하여 휘하 함정들을 싱가포르로 보내도록 권고했으나 거절당했다. 비시 정부는 드쿠 제독 후임으로 카트로 장군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군정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비시 정부의 통제가 심해지면서 영국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자유 프랑스 세력을 심거나 반일 세력을 키우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1941년 1월에 중국 총사령관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협약을 맺어 홍콩과 싱가포르에 대한 쌀 수출을 보장받는 대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목표로 한 반일 선전을 중단하기로 약속했다.

 

영국본토가 독일의 침공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일본이 요구한 버마로드 폐쇄와 중국 주둔 영국군의 철수를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버마로드 폐쇄 요구를 거절하려면 영국을 지지한다는 미국의 명확한 입장 표명이 필요했으나 루스벨트 행정부는 그런 보증을 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영국 정부는 영연방 국가들과의 회의를 거쳐 7월 18일에 3개월간 버마로드를 폐쇄하기로 결정했으며 8월 초에는 중국 주둔 영국군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일본군이 북부 인도차이나에 진주한 4일 후인 1940년 9월 27일에 일본은 독일 및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조약(Tripartite Pact)을 체결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우월한 지위를 서로에게 인정받았다. 또한 세나라 중 어느 나라든지 유럽 전쟁이나 중일전쟁에 참가하고 있지 않은 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정치, 경제, 군사적 방법으로 돕기로 했다. 이는 명백히 미국을 겨냥한 것으로 일본은 미국에게 양면 전쟁의 위협을 가하여 자신들의 앞길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눌러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삼국동맹조약을 일본이 추축국에 합류한 증거로 간주하고 이때부터 일본을 확실하게 적으로 인식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10월 16일에 모든 철강 제품과 고철의 수출을 통제하여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영국에 대한 물자 지원을 늘렸다.

 

일본은 1940년 9월 초에 각료인 고바야시가 이끄는 대규모 구매 사절단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파견하여 매년 300만톤의 석유를 향후 5년간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수출하라고 강요했다. 이는 일본에 대한 기존 수출량의 5배에 달하는 물량이며 일본의 평시 석유 소비량의 60% 에 해당하는 물량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석유 수입에서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자 했다.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는 굴복하지 않았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가 끝까지 버티자 아직 무력을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일본은 11월 12일에 이를 갈면서 계약서에 서명했다. 석유 수출에 할인은 없었으며 물량 또한 평소보다 조금 늘어난 정도였고 5년 계약이 아닌 6개월 계약이었다. 수출 물량은 원유 형태였고 항공유를 비롯한 정제유는 없었다. 일본은 고무, 주석, 보크사이트의 수입량이 조금 늘어난 것으로 위안을 삼는 수 밖에 없었다.

 

1940년 10월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영국에게 유리해졌다. 공군이 영국본토 항공전에서 승리하면서 적어도 1940년 내에 본토침공의 위협은 사라졌다. 말레이의 상황도 호전되었다. 9월에 상하이에서 철수한 영국군 2개 대대가 싱가포르에 도착했으며 10월 12일부터는 인도로부터 제11인도사단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삼국동맹조약에 대해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으며 미해군성은 유사시 싱가포르가 어느 정도로 미국 함대를 지원해 줄 수 있는지 문의했다. 용기를 얻은 영국은 폐쇄한 지 3달 만인 10월 18일에 버마 로드를 재개통했다.

 

1940년 10월 16일에 극동 지역의 해군, 육군 및 공군을 대표하는 제프리 레이튼 해군중장, 본드 중장 그리고 바빙턴 공군소장이 싱가포르에서 회의를 열었다.(레이튼 중장은 1940년 9월 12일에 퍼시 노블 대장을 이어 중국총사령관이 되었다. 말레이 사령관 본드 장군은 1940년 10월 1일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일본이 태국의 비행장을 사용하면 싱가포르 폭격이 가능하므로 일본군의 태국 진입을 전쟁으로 간주해야 하며 그럴 경우 태국 남부 지역에 진입하여 비행장을 선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함대가 없는 상황에서 일본의 침공을 막으려면 공군이 전면에 나서야 하며 이를 위하여 31개 비행대대, 총 566대의 일선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럴 경우 육군의 임무는 비행장 및 해군기지의 보호이며 이를 위하여 26개 보병대대, 야포 14개 대대, 1개 차량화 기관총 대대, 3개 경전차 중대, 그리고 1개 장갑차 중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보병대대 26개 중 23개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에 배치하고 3개는 영령 보르네오, 브루네이 및 사라왁에 배치할 것이었다. 일본의 공습에 대비하여 중대공포 176문, 경대공포 100문, 탐조등 186개도 요청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소규모로 말레이 해안에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해군에 어뢰정 3개 전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40년 10월 말에 중국 총사령관 레이턴 중장은 영국 참모본부의 권고에 따라 본드 중장, 바빙턴 소장 뿐 아니라 호주, 뉴질랜드, 인도, 버마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대표들을 모아 극동 방어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미국은 방콕 주재 무관을 옵저버로 파견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강력한 함대가 빠진 상황에서 극동 지역의 군사력이 일본의 위협에 대처하기에는 미흡하다는 사실에 의견을 같이했으나 미국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는 한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결국 회의는 랭군에 주둔시킬 항공기를 포함하여 극동 방어에 필요한 항공기의 숫자를 566대에서 다소 늘어난 일선기 582대로 결정하고 호주, 뉴질랜드 및 인도가 극동 방어에 좀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도록 노력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폐회했다.

 

영국 참모본부는 극동 지역의 방어에서 3군 사이의 협력 및 버마, 말레이 그리고 벵골 등 지역 간의 유기적인 통합 방어 계획이 미흡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참모본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0년 10월 13일에 처칠 수상의 재가를 얻어 극동 총사령관(Commander-in-Chief, Far East)직을 새로 만들고 나흘 후에 케냐 총독을 지냈던 로버트 브룩포팸 공군대장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브룩포팸이 이끄는 극동 총사령부(General  Headquarter, Far Eat)는 1940년 11월 18일에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극동 총사령관은 말레이, 버마, 영령 보르네오 및 홍콩의 육군 및 공군 병력을 지휘했으나 해군은 공군의 지휘를 받기 싫어했다. 따라서 극동 지역의 해군에 대한 지휘권은 여전히 해군인 중국 총사령관이 행사했다.

 

(극동 총사령관 로버트 브룩포팸 장군.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rigadier-General_H_R_M_Brooke-Popham.jpg)

 

이렇듯 극동 총사령관의 권한은 제한적이었다. 극동 지역의 영국해군은 극동총사령관이 아니라 해군인 중국 총사령관의 지휘를 받았고 민간인인 해협 식민지, 버마 및 홍콩 총독은 식민성의 지휘를 받았다. 극동 총사령관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말레이, 버마 및 홍콩 사령관이나 극동 공군 사령관도 막상 재정 지원은 전쟁성이나 항공성에서 받았다. 결론적으로 극동 총사령관의 임명은 실패작이었으며 당초 목적인 3군 사이의 협력을 촉진하고 극동에서 지역 간의 방어 태세를 효과적으로 조율하는 효과는 내지 못하고 가뜩이나 복잡한 극동 방어 체계에 사령부를 하나 추가시킨 결과만 낳았다.

 

영국 정부와 네덜란드 망명 정부는 1940년 12월에 런던에서 극동 방어에 대한 협정을 맺었다. 양국은 서로 연락장교를 파견하고 공동 암호를 사용하며 비행장을 상호 개방하고 필요시 영국이 네덜란드 군에게 탄약을 공급하기로 했다. 또한 극동의 영국령과 네덜란드령에 대한 일본의 위협에 공동 대처하기로 했으나 일본의 특정한 행동을 전쟁 행위로 볼 것인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영국 정부가 판단하기로 했다. 영국으로서는 미국의 참전 보장도 없이 네덜란드의 요청에 따라 일본과의 전쟁에 끌려들어가는 사태를 원하지 않았다.

 

1941년 1월 8일에 영국 참모본부는 1940년 10월의 회의에서 요청한 항공기 및 병력의 배치에 대해 극동 총사령부에 회답했다. 참모본부는 일선기 582대가 있으면 이상적이지만 실제 임무 수행에는 336대로 가능할 것이라고 밝히고 1941년 말까지 배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육군 병력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않았으며 26개 대대를 1941년 중반까지 배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참모본부의 계획은 처칠 수상에 의하여 제동이 걸렸다. 처칠은 1월 13일 참모본부에 각서를 보내어 극동 정세는 수비대를 그만큼 증강해야 할 정도로 급박하지 않다면서 재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참모본부는 극동 방어를 위하여 그 정도 병력은 꼭 필요하다며 맞섰다.

 

그동안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압박했다. 1941년 1월에 일본은 각료인 요시자와가 이끄는 사절단을 파견했다. 사절단은 일본인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내에서 석유와 광물을 탐사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해안에 어업 기지를 건설할 자유를 인정하고 연안 항로에 일본 회사가 운영하는 여객선을 취항시키라고 요구했다. 또한 앞으로 석유를 비롯한 전략 물자들을 일본이 원하는 양만큼 판매하라고 강요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거부했고 일본은 2월에 석유의 추가 수입을 위한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다시금 만족해야 했다.

 

1941년 2월 22일에 극동 총사령관은 호주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대표와 함께 극동 방어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의 결론은 ADA 협약(Anglo-Dutch-Australian Agreement)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ADA 협약은 유사시 3국 사이의 공군 협조에 대하여 상당 수준의 합의를 담고 있었으며 일본의 어떤 행동을 전쟁 행위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도 합의했다.

ADA 협약에서 합의한 일본의 전쟁 행위는 다음과 같다.

 

1. 세 국가의 영역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공격

2. 일본군이 동경 100도 이서 또는 북위 10도 이남의 태국 영역에 진입하는 경우

3. 일본함정 다수 또는 전투함에 호위받는 일본선단이 명백하게 크라 지협이나 말레이 동해안으로 향하는 것이 확인되거나 남중국해에서 북위 6도 이남으로 내려오는 경우

4. 필리핀을 공격하는 경우

 

영국 참모본부는 ADA 협약을 대체로 받아들였으나 일본의 어떠한 행동을 전쟁 행위로 판단할 것인가는 영국 정부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했다. 반면 호주는 ADA 협약에서 해군 협조에 대한 내용이 빠졌다면서 빠른 시일 내에 미국도 참여시켜 회의를 다시 열자고 요구했다.

 

(제8호주사단장 고든 베넷 소장. https://en.wikipedia.org/wiki/Gordon_Bennett_(general)

 

그동안 말레이에는 병력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1941년 2월에 고든 베넷 소장의 제8호주사단 사령부와 제22여단(해럴드 테일러 준장)이 도착했고, 3월에는 제15인도보병여단( 케네스 가렛 준장)과 제22인도보병여단(조지 페인터 준장)으로 이루어진 아서 바스토우 소장의 제9인도사단이 도착했다.

4월 말에 콘웨이 펄포드 공군소장이 바빙턴 소장을 이어 극동 공군사령관이 되었도 5월 중순에는 말레이 사령관 도비 소장 아래에서 참모장을 지냈던 아서 퍼시발 중장이 본드 중장을 이어 말레이 사령관이 되었다. 

 

(말레이 사령관 아서 퍼시발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s://en.wikipedia.org/wiki/Arthur_Percival)

 

동시에 루이스 히스 중장이 지휘하는 제3인도군단이 만들어져 말라카 및 조호르 이북의 방어를 담당했다.

 

(제3인도군단장 루이스 히스 중장. http://www.unithistories.com/officers/indianarmy_officers_h01.html)

 

1941년 3월에 미국과 영국의 참모본부는 독일우선 원칙에 합의했다. 극동 방어는 미해군이 대서양과 지중해에 진출하여 영국 해군의 짐을 덜어주면 여유가 생긴  영국해군이 함대를 극동에 파견하기로 했다. 함대가 파견되어도 영국은 극동 지역에서는 수세적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반면 미태평양 함대는 동쪽에서 일본을 공격하여 일본해군을 끌어냄으로써 영국의 극동 방어를 돕기로 했다. 이 합의에 따라 미해군은 1941년 봄부터 서부 대서양에서 중립 초계(Neutrality Patrol)를 시작했다.

 

일본도 남방 진출을 위하여 정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선 미국과 협상을 통하여 자신들을 방해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희망을 품고 1941년 2월 11일에 노무라 기치사부로를 주미대사로 임명하여 미국과 협상을 벌이게 했으며 4월 13일에는 소련과 5년 기한의 일소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여 만주 국경에서의 위협을 줄였다. 

 

일소불가침 조약의 체결을 본 영국은 극동방어를 위한 회담을 제의했다. 1941년 4월 22일부터 26일까지 싱가포르에서 미국, 영국,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호주, 뉴질랜드 및 인도 자치정부 사이에 회담이 열렸다. 회담의 결과는 ADB 협약(America-Dutch-British Agreement)으로 불렸다. ADB 협약은 주로 해군의 공조에 초점을 맞추어 상당 수준의 합의를 이끌어 내었고 ADA 협약에서 정했던 일본의 전쟁 행위를 재확인했다. 불행하게도 영국과 미국 정부 모두 ADB 협약을 거부했다. 영국은 ADA 협약 때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특정한 행동을 전쟁 행위로 볼 것인가의 판단은 영국 정부의 고유 권한이라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미국은 아시아 함대가 영국 해군인 극동함대 사령관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ADB 협약도 실효성있는 공동 계획을 만드는데 실패했다.

 

일본은 다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 사절단을 보냈다. 사절단은 앞으로 무제한의 기간 동안 일본이 원하는 양의 석유를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라고 강요했다.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가 다시 일본의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6월 17일에 협상이 결렬되었다.

 

1941년 6월 22일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북방의 위협이 사라지자 일본은 노골적으로 남방 진출을 꾀했다. 6월 25일의 정부-대본영 연락회의에서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가 결정되었고 7월 2일의 어전회의에서 확정되었다. 남방으로 내려가 미국과 충돌하는 대신 독일을 도와 소련을 공격하자고 주장하던 외상 마츠오카는 7월 18일 제3차 고노에 내각의 성립과 함께 도요다 데이지로로 교체되었다. 고노에 수상은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에 대해 미국이 반발하리라는 사실 자체는 예상했으나 강도를 과소평가했다. 반발의 강도는 예상을 뛰어넘어 일본을 전쟁이냐 굴복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만들었고 굴복의 치욕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결정한 7월 2일의 어전회의는 결국 5개월 후의 대미 개전을 결정한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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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럽 전쟁의 영향 

 

1939년 9월 1일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의 극동방어 정책도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영국이 유럽에서 전쟁에 휩싸이자 보다 대담하게 나왔으며 영국은 위축되었다.

일본은 1939년 9월 5일에 중국에서 활동 중인 영국, 프랑스 및 미국의 강상포함들과 수비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0월 말까지 영국은 양쯔 강과 서강에서 활동 중이던 20여척의 강상포함들을 철수시켰다. 이 배들은 대부분 싱가포르로 가서 소해함으로 개조되었다. 상하이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 2개 대대는 유지했지만 텐진에 주둔 중이던 1개 대대는 12월에 철수하고 대신 상하이에서 1개 중대를 파견했다. 중국 연안에서 활동하던 중국 전대(China Squadron)는 개전과 동시에 소속 구축함이 대부분 인도양과 지중해로 빠져 나가면서 약화되었는데 남아있던 순양함들도 본국에서 예비로 보관하던 낡은 순양함으로 대체되어 전력이 더욱 약해졌다.

1939년 11월에 런던에서 열린 제국회의에서 호주는 유럽에서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공격하면 극동에 함대를 파견한다는 방침을 유지한다는 확답을 요구했다. 처칠 해상은 지중해를 희생해서라도 싱가포르를 유지하고 호주 및 뉴질랜드에 대한 공격을 막는다는 영국 정부의 방침은 변함없다고 답변했다.

 

말레이에서는 적절한 방어태세를 갖추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해협 식민지에서는 1939년 말에 공습경계사령부(Air Raid Precaution Headquarter)를 만들고 싱가포르와 페낭에 공습감시대, 보조 소방대 및 의료대, 소규모 의용 방위대를 만들었는데 이들 조직은 중국인과 말레이인 자원자들이 주력이었으며 지휘부는 백인이었다.

도비 소장의 뒤를 이어 1939년 8월에 말레이 사령관이 된 라이어널 본드 소장은 의용대를 확장하려다 장애에 부딪혔다. 병력을 대부분 현지인으로 충당하더라도 장교를 비롯한 핵심 인력은 백인이 맡아야 했는데 숫자가 모자랐다. 평소에도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서는 수요에 비하여 백인이 모자랐는데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자 젊은 백인 남성 다수가 입대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귀국해 버렸다. 이는 말레이 반도 및 싱가포르가 가진 취약점의 하나로 현지의 백인 중에서 말레이 반도나 싱가포르에서 태어나고 자라 그곳이 자기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는사람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전쟁이 터지자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백인 남자들은 말레이의 방어를 위하여 의용대에 들어가지 않고 귀국하여 영국군에 입대했다.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서는 정규군의 징병이나 모병을 실시하지 않아 현지에서 정규군 입대는 불가능했다.) 이 여파로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에서는 공무원이 모자랐고 고무나무 농장이나 주석 광산도 인력난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해협 식민지 당국은 의용대를 확장하려는 하는 본드 소장의 계획에 반대했다. 해협 식민지 총독 셴튼 토머스 경은 1940년 1월 27일에 열린 본드 소장과의 회의에서 의용대 확장이나 징병은 일본과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야 가능하며 그때가 되어도 인력 동원은 경제에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말레이 사령관에게는 인력 동원에 관하여 해협 식민지 총독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었으므로 본드 소장은 의용대 확장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해협 식민지 총독 셴튼 토머스 경. https://en.wikipedia.org/wiki/Shenton_Thomas)

 

말레이 방어에 대한 해협 식민지 당국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군사적인 견지에서 어리석었으며 훗날 싱가포르를 상실하게 만든 원인의 하나로 지목되어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해협 식민지 당국 입장에서도 사정이 있었다.

말레이 반도는 영국의 전시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38년에 말레이 반도는 전 세계 고무의 38%, 주석의 58% 를 생산하여 대부분 수출했다. 1938년에 말레이 반도의 수출액은 1억 3400만 파운드로 그 중에서 영연방을 제외한 외국으로의 수출은 9300만 파운드였는데 대부분 미국으로 수출했다. 전쟁으로 달러 한 푼이 아쉬운 영국 정부 입장에서 말레이 반도는 뚜껑을 열고 달러를 꺼내면 저절로 달러가 채워지는 요술상자나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터지자 영국 정부는 해협 식민지 당국의 가장 중요한 임무를 주석 및 고무 수출을 늘리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수출을 늘리라고 압력을 가했다. 실제로 영국 정부는 1941년까지 주석 수출을 3배, 고무 수출은 2배로 늘리라고 해협 식민지를 몰아붙였다. 따라서 해협 식민지 당국은 말레이 반도 전역에 걸쳐 고무 농장을 확대하고 주석 광산에서 채굴량을 늘리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자연히 인력 수요가 급증하여 말레이 반도의 고무 농장과 주석 광산은 인력난을 겪고 있었으며 특히 관리를 맡은 백인 인력의 부족은 심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협 식민지 총독이 인력난을 심화시킬 의용대 확장이나 징병에 반대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토머스 총독은 의용대 확장에 반대하는 서한을 본국에 보냈다. 이 서한에서 총독은 말레이 반도 및 싱가포르의 방어력 강화는 인력이 많이 필요한 의용대나 육군이 아니라 공군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극동 공군 사령관(Air Officer Commanding, Far East) 존 바빙턴 공군소장은 토머스 총독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는 항공성에 보낸 각서에서 싱가포르에 파견될 함대의 규모가 줄어든 이상 말레이 방어는 공군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하여 말레이의 공군력을 확충함은 물론 육군도 싱가포르 방어에서 벗어나 말레이 반도 동해안에 건설한 비행장을 보호함으로써 공군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0년 3월에 런던에서 열린 제국방어위원회 산하의 해외방어위원회(Oversea Defence Committee)는 토머스 총독의 견해를 지지했다. 위원회는 말레이 반도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경제적인 것이며 의용대 확장이나 징병은 일본과 개전한 이후에, 그것도 고무 농장이나 주석 광산의 운영에 차질을 빚지 않을 정도의 규모로만 실시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반면 토머스 총독과 바빙턴 소장이 주장한 말레이의 공군력 강화는 외면했다. 오히려 1940년 6월 프랑스의 패배로 전황이 악화되자 지중해, 중동 및 인도 공군력 강화의 일환으로 1940년 가을에 말레이에서 2개 폭격비행대대를 인도로 불러들였다.

 

해외방어위원회의 결정은 1940년 4월 초에 싱가포르에 전해졌다. 말레이 사령관 본드 소장은 극동 공군사령관 및 해군과 상의한 후 4월 13일에 전쟁성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본드 소장은 함대의 도착 기한이 180일로 늦어진 상황에서 말레이의 방어를 위해서는 최소한 3개 사단, 3개 기관총 대대, 2개 전차대대와 정원의 20% 에 해당하는 훈련된 예비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만일 공군이 크게 강화되어 적의 상륙을 저지하거나 최소한 상륙한 적의 보급로를 끊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는 육군 병력을 4개 여단, 5개 독립대대, 그리고 1개 전차중대로 줄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5월 16일에 런던에서 열린 해외방어위원회는 본드 장군의 보고서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아마 증원군을 보내줄 능력이 안되는 상황에서 논의해봤자 의미가 없다고 보았을 것이다. 대신 의용대의 확장에 대해 약간 숨통을 터 주어 6월 말부터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서 의용대 확장과 훈련이 시작되었다.

 

1940년 6월에 접어들어 본국에서 적절한 증원을 받기 어렵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한정된 수비대를 어떻게 배치해야 할 지를 두고 말레이 사령관 본드 소장과 극동 공군 사령관 바빙턴 소장 사이에 의견차이가 심해졌다. 본드 소장은 싱가포르 방어의 핵심은 해군기지 방어이니만큼 수비대는 싱가포르 섬과 남부 조호르를 지키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수비대 주력인 8개 정규보병대대와 대공포 부대는 모두 싱가포르와 남부 조호르 방어에 투입해야 하며 알로스타 비행장에 1개 정규보병대대를 투입하는 것 이외에 말레이 반도의 비행장 방어는 의용대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바빙턴 소장은 싱가포르를 방어하려면 말레이 반도 전체를 방어해야 하며 그 임무는 공군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의 임무는 말레이 반도의 비행장을 보호함으로써 공군 작전을 지원하는 것이며 따라서 최소한 알로스타, 코타바루, 그리고 쿠안탄 비행장에 정규보병대대 하나씩을 투입하여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머스 총독은 말레이 반도의 고무 농장과 주석 광산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대체로 바빙턴 소장의 의견에 동조했다.

 

(말레이 반도.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airports_in_Malaysia)

 

1940년 6월에 연합군에게 일어난 재앙이 말레이 방어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에 파견되었던  영국원정군은 독일군에게 참패하여 6월 초에 됭케르크에서 모든 장비를 잃고 몸만 빠져 나왔다. 6월 10일에 눈치를 보던 이탈리아가 추축국 측으로 참전했고 6월 22일에는 프랑스가 독일에게 무릎을 꿇었다. 영국 본토는 독일의 침공 위협에 노출되었다.

말레이에 있어 심각한 문제는 유럽 해군력의 균형이 바뀌었다는 사실이었다. 싱가포르에 대한 함대 파견은 유사시 프랑스 해군이 지중해에서 이탈리아 해군을 견제해 준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일이었다. 프랑스 해군이 사라지자 영국 해군은 본국 해역과 지중해, 그리고 유보트의 위협으로부터 대서양의 해상 교통로를 지키는 데만도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이 상태에서는 일본이 공격한다고 해도 싱가포르에 함대를 파견할 여유는 없었다.

 

상황 변화를 감안하여 영국 참모본부는 1940년 7월에 극동 정세를 평가했다. 참모본부는 유럽의 정세가 명확해지기 전에는 일본이 영국 및 미국과의 전쟁 가능성을 무릅쓰고 극동의 영국령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았다. 대신 일단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태국에 진출할 것으로 보았으며 그럴 경우 영국은 경제적 제재 이상의 행동은 취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만일 일본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공격한다면 일본과 싸워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주둔 의미가 없어진 상하이와 텐진의 영국 수비대는 위신 추락을 감수하고 철수해야 하며 홍콩은 유사시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말레이의 방어에 대해서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해군력을 크게 약화시키지 못하는 한 함대 파견이 어려워진만큼 공군과 육군의 강화 필요성을 인정했다.

영국참모본부는 말레이 방어를 위하여 22개 비행대대, 336대의 일선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당시 말레이에는 8개 비행대대, 88대의 일선기가 있을 뿐이었으며 대부분 구식 비행기였다. 협력을 약속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144대의 항공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말레이 방어에 몇 대나 할애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참모본부는 1940년 말까지 2개 전투비행대대와 2개 정찰비행대대를 말레이에 파견하고 말레이의 구형기들을 신형기로 교체하라고 전쟁 내각에 권고했다. 일선기 336대의 배치를 1941년 말까지 끝낸다는 것이 참모본부의 권고였으나 실제로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참모본부는 공군의 정비가 이루어져도 말레이 방어를 위해서는 6개 보병여단, 즉 2개 사단이 추가로 파견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2개 사단은 말레이의 방어에도 빠듯한 수준이기 때문에 영국령 북부 보르네오는 포기해야만 했다. 2개 사단을 빼낼 곳이 마땅치 않았으므로 영국 정부는 호주 정부에 1개 사단을 말레이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했다. 나머지 1개 사단은 인도에서 파견되었다. 1940년 11월에 보병여단 2개를 가진 제11인도사단이 말레이에 도착했다.

참모본부는 또한 뉴질랜드에게 1개 보병여단을 피지에 파견하도록 요청했다.

 

당시 참모본부나 말레이 사령부에서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다. 유사시 함대가 오지 않는다면 싱가포르 해군기지 방어는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말레이 수비대의 목표는 가능하면 말레이 반도 전체를 방어하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싱가포르를 방어함으로써 최대한 오랫동안 적의 해군기지 사용을 거부하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남부 조호르의 조호르 강이 아니라 커다란 자연 장애물로 방어가 쉬운 싱가포르 해협을 최종 방어선으로 삼아야 했고 그러려면 싱가포르 북해안에 방어시설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일본군이 말레이 반도에 상륙하여 질풍처럼 남하하고 있을 때 처칠 수상은 싱가포르 북해안에 방어시설이 건설되어 있지 않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놀랐다. 그는 회고록에서 싱가포르 북해안에 방어시설이 없다는 것은 배의 밑바닥을 만들지 않고 전함을 진수시킨다는 소리처럼 상식 밖의 일이라 상상도 못했다고 술회했는데 이는 처칠이 도비 소장으로부터 시작된 말레이 및 싱가포르 방어의 기본 개념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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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국의 극동방어정책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일동맹에 따라 연합국 측으로 참전했다. 독일에 선전포고한 후 일본군은 독일이 지배하던 산둥반도를 공격하고 태평양의 독일령 섬들을 점령했다. 일본은 산둥반도를 점령한 후 독일의 권익을 일본에 승계하고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 지역을 일본에 조차한다는 내용의 21개조를 중국에 강요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종전 이후 일본은 케롤라인, 마셜 제도 및 괌을 제외한 마리애나 제도에 대한 대한 신탁통치를 인정받았다. 호주는 뉴기니 섬의 동부와 비스마르크 제도, 뉴질랜드는 독일령 사모아를 신탁통치했다. 나우루는 영국, 호주 및 뉴질랜드가 공동으로 신탁통치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해군력이 강화되고 서태평양에서 일본과 이해가 충돌하기 시작한 미국의 요구로 인해 영일동맹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 되자 극동 지역에 함대를 상주시킬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쇠퇴한 영국의 국력으로는 본국 해역, 지중해 그리고 극동에 모두 강력한 함대를 상주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따라서 극동에는 강력한 해군기지를 건설해 두고 전쟁이 임박하면 함대를 파견하는 방식을 택했다. 해군기지 후보지는 홍콩, 실론, 시드니 및 싱가포르였다. 홍콩에는 후보지 중에서 유일하게 근대적인 해군기지가 있었으나 일본과 가까워서 전쟁이 벌어질 경우 방어가 불가능했다. 실론은 태평양 지역의 사태에 대응하기에는 멀었다. 남은 후보지는 시드니와 싱가포르였는데 영국은 인도양과 호주 사이의 해상 교통로를 방어하기에 좋은 싱가포르를 골랐다. 1921년 6월 19일에 영국 내각은 싱가포르에 근대적인 해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해군성은 싱가포르 해군기지를 남해안에 자리하여 방어에 불리한 기존의 케펠 항 대신 싱가포르 섬의 북쪽에 건설하자고 건의했고 1923년 2월에 내각이 승인했다.

 

(1942년 당시 싱가포르. 북쪽에 해군기지가 보인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ingapore_map_1942.jpg)

 

1921년 11월부터 워싱턴에서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의 대표단이 모여 해군군축에 대해 논의했다. 다음해인 1922년 2월 6일에 조인된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으로 인하여 각국의 주력함 보유량은 영국 및 미국 525,000톤, 일본 315,000톤, 프랑스 및 이탈리아 175,000톤으로 제한되었다. 주력함의 척당 배수량은 35,000톤, 주포 구경은 16인치로 제한되었으며 항공모함의 척당 배수량도 27,000톤으로 제한되었다. 보조함의 척당 배수량도 10,000톤, 주포 구경은 8인치로 제한되었으나 보유량은 제한하지 못했다. 보조함의 보유량 제한은 1930년의 런던 해군군축조약에서 이루어진다.

 

워싱턴 조약에는 미국, 영국 및 일본 사이에 태평양 지역의 무장을 제한하기 위한 협정도 포함되었다. 그 결과 각국이 무장을 하지 못하게 된 지역은 다음과 같다.

 

영국 : 홍콩을 포함하여 동경 110도 동쪽 지역. 단 캐나다, 호주 및 뉴질랜드는 제외

미국 : 미국 연안, 알래스카, 파나마 및 하와이를 제외한 태평양 지역

일본 : 쿠릴 제도, 보닌 제도, 류큐 제도, 타이완, 펑후 제도(마리애나, 캐롤라인 및 마셜 제도는 국제연맹의 신탁통치 조건에 따라 무장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워싱턴 조약에서는 포함하지 않음)

 

동경 103도에 위치한 싱가포르는 무장이 가능했으나 해군기지 건설은 시작도 하기 전에 좌초될 운명에 처했다. 1923년에 사상 최초로 집권한 노동당 정부가 해군기지 건설계획을 취소했다. 정책 변경에 대한 영연방의 반응은 다양했다.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호주와 뉴질랜드는 반발했다. 캐나다는 중립을 지켰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세계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찬성했다. 다행히 노동당 정부는 단명했으며 이어 들어선 보수당 정부가 건설을 시작했다. 제국방어위원회(Committee of Imperial Defence) 산하의 커즌 위원회는 싱가포르 해군기지의 위치를 케펠 항이 아닌 싱가포르 섬의 북해안으로 확정하고 부근의 셀레타에 비행장을 닦을 것을 권고했다. 또한 싱가포르에 대한 위협은 배후의 말레이 반도가 아닌 바다로부터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해군기지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공사가 진행되어 1938년에 완성되었다.

해군기지 건설이 결정되는 순간부터 싱가포르 방어의 핵심 개념은 전쟁이 벌어지면 70일 이내에 강력한 함대가 달려와서 침략자를 물리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싱가포르에 건설될 방어 시설의 역할은 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해군기지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싱가포르의 방어를 대구경 해안포가 맡을 것이냐 아니면 뇌격기가 맡을 것이냐를 두고 1920년대 초부터 해군성 및 전쟁성과 항공성 사이에 기나긴 논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논쟁은 싱가포르 방어태세의 완성을 늦추고 3군 사이에 알력을 만들었다.

항공성은 전투기의 보호를 받고 정찰기의 지원을 받는 뇌격기들이 접근하는 적의 군함과 수송선단을 대구경 해안포보다 수백 km 먼거리에서 격파할 수 있으며 살아남아 접근한 적은 중형포 및 경포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항공기는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으므로 뇌격기들이 싱가포르에 상주할 필요없이 상황이 급박해지면 며칠 내로 날아오면 되기 때문에 경제적이라고 주장했다.

해군성과 전쟁성은 대구경 해안포가 바다에서 접근하는 적을 물리치는데 효과적임을 역사 속에서 증명해 왔고 사격통제기술의 발달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항공기가 대규모 함대를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지 검증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또한 항공기가 다른 곳에 있다가 위기에 임박해서 날아오는 경우 시간을 맞추지 못할 수 있으므로 항상 그 자리에 있어서 위기가 발생하면 즉시 대응이 가능한 대구경 해안포가 방어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6년, 지리한 논쟁 끝에 제국방어위원회는 싱가포르 방어를 위하여 일단 15인치 해안포 3문을 설치하고 15인치 해안포를 추가로 설치할지 아니면 뇌격기에게 맡길지는 나중에 결정하기로 했다. 방어위원회는 또한 항공성의 요구에 따라 캘커타에 항공기 중계용 비행장을 만들었다.

1927년에 웹 길먼 중장이 이끄는 위원회가 해안포대의 위치를 정하기 위하여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그런데 위원회 내부에서 해군기지 방어를 중시하는 파와 싱가포르 시의 방어를 중시하는 파 사이에 포대 위치에 대한 의견이 나뉘었다. 여기에 더하여 해협 식민지 당국은 포대 건설에 해협 식민지의 자금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본국 정부의 약속이 없는 한 포대를 건설할 땅을 내놓을 수 없다고 버텼다. 어영부영 시간을 끄는 동안 1929년에 노동당 정부가 두번째로 집권했고 이어서 대공황이 찾아와 방어 시설 건설은 다시 미루어졌다. 

 

노동당 정부는 런던 해군군축조약을 성공시켜 일본의 주력함 비율을 다시 영국 및 미국의 60% 로 묶었고 보조함 세력마저도 통제에 성공함으로써 싱가포르 방어시설의 건설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1930년대에 들어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제1차 대전 종전과 함께 빼앗겼던 세력을 회복했다. 1931년에 남만주 철도의 경비를 위하여 파견되어 있던 관동군이 독단적으로 만주를 침공하여 만주국을 건설했으며 동시에 남쪽 상하이에서는 일본군과 중국군이 교전을 벌였다. 국제연맹이 만주국의 승인을 거부하고 만주로부터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자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해 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1931년에 영국참모본부는 제1차 세계대전 이래 매년 정부에 보고하던 향후 10년간 대규모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보증을 포기했다. 이에 따라 1931년 12월에 제국방어위원회 산하에 스탠리 볼드윈이 이끄는 위원회가 만들어져 극동 방어를 논의했다. 여기서 뇌격기와 해안포를 둘러싼 항공성과 해군성 및 전쟁성 사이의 해묵은 논쟁이 재발했다. 양측의 논리는 이전과 같았으며 결론도 비슷했다. 즉 해안포가 방어의 중핵을 맡되 뇌격기도 보조전력으로 중시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볼드윈 위원회의 결론을 받아들여 방어시설 건설을 서두르고 뇌격기 세력을 확충하며 비행장을 하나 더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공사가 진행되어 1935년 말에 3문의 15인치 해안포가 거치되었다. 동시에 영국정부는 15인치 해안포 2문을 추가하고 비행장 2개를 더 만드는 내용의 2차 계획을시작하여 1939년 말에 완성했다.

 

1936년으로 정해진 런던해군군축조약의 마감 기한이 다가오자 영국정부는 제2차 런던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해군력을 억제하려 했다. 영국은 이를 위하여 독일에게 자국 대비 35%의 함정 보유를 허락하는 내용의 영독해군협정을 체결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프랑스는 이 협정에 반발하며 영국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영국으로서는 훗날 독일이 협정에 허용된 함대 건설에 성공할 경우 극동으로  파견할 함대의 규모를 줄이는 결과가 되었다. 이렇게 공을 들였음에도 제2차 런던조약은 실패했다. 일본은 조약 참여의 전제 조건으로 주력함 보유량을 미국 및 영국과 동등하게 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요구가 거절당하자 일본은 조약 불참을 통보하고 함정 건조에 매달렸다. 이로써 1936년부터 무조약 시대가 열렸다.

 

1936년 봄에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방어에 대해 평가했다. 그들은 영국의 극동 방어와 연계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영국 정부에 회담을 제의했다. 영국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방어 강화와 양국 사이의 협조에는 찬성하면서도 통합 사령부를 구성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방어 문제에까지 끌려 들어가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결국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항공기들이 영국의 극동 방어에 적극적으로 협력한다는 수준에서 논의를 마쳤다.

 

당시 말레이 반도의 비행장은 캘커타에서 싱가포르로 가는 상업 비행기를 위한 중간 기착지로서 서해안에 몇 개가 있을 뿐이었다. 말레이 반도의 중앙에는 티티왕사 산맥이 달리고 있어 고온다습한 기류가 산맥에 걸려 커다란 비구름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항공기술로 항공기가 매일 이 비구름을 뚫고 비행하기에는 무리였다. 따라서 항공성은 말레이 반도의 동해안에 3개의 비행장을 새로 닦아 일본 함대를 발견하기 위한 정찰기를 운용하고 함대에 타격을 가할 항공기들의 전진기지로 사용하기로 했다. 비행장의 위치는 케란탄 주 코타바루 인근의 공케다, 중부의 쿠안탄, 그리고 조호르 동부의 카항이었다. 항공성은 비행장의 위치를 고르면서 방어 문제는 고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비행장들은 해안에 인접하여 적이 부근에 상륙하면 위협에 바로 노출되고 방어 종심이 얕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 일본군이 말레이 반도에 상륙할 가능성이 없다고 믿는 시기였기 때문에 육군은 싱가포르를 지키기에도 빠듯한 소규모 수비대를 쪼개어 비행장을 지켜달라는 항공성의 요구를 거절했다.

 

1937년에 싱가포르 방어의 기본 전제를 흔드는 일이 일어났다. 말레이 사령관(General Officer Commanding, Malaya) 윌리엄 도비 소장은 커즌 위원회가 주장한 이래 의심없이 받아들여져 온 말레이 반도 상륙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의문을 품고 실제로 시험 상륙을 실시하는 등 다각도로 조사했다. 도비 소장은 10월에 전쟁성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북동계절풍이 부는 10월에서 3월 사이에 말레이 동해안에 상륙이 가능하며 이 시기에는 날씨가 흐려서 정찰기가 적 선단의 접근을 알아차리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도비 소장은 상륙 예상 지점으로 태국의 싱고라와 파타니, 그리고 말레이 북부의 코타바루를 꼽았다. 또한 싱가포르 방어는 곧 해군기지 방어이므로 말레이 반도를 남하하는 적에 대항하는 싱가포르의 북쪽 방어선은 적이 해군기지에 야포사격을 가하지 못하도록 해군기지로부터 34km 이상 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상정한 최후 방어선은 남부 조호르의 조호르 강이었다. 전쟁성은 1939년에 말레이 반도 방어 시설을 건설하기 위한 예산으로 60,000 파운드를 책정했는데 도비 장군은 그 중 23,000 파운드를 들여 남부 조호르에 기관총 벙커를 비롯한 방어시설을 건설했다.

 

(말레이 사령관 윌리엄 도비 장군. https://en.wikipedia.org/wiki/William_Dobbie)

 

도비 소장이 최후 방어선을 싱가포르 해협이 아닌 남부 조호르에 설정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으로 싱가포르 방어의 목적이 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해군기지를 방어하는 것이었으므로 싱가포르 해협을 최후 방어선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싱가포르 해협을 최후 방어선으로 삼을 경우 해협에 바짝 다가온 적의 야포 사격으로 해군기지 사용이 불가능하다. 

남부 조호르를 최후 방어선으로 삼는다는 도비 소장의 구상은 후임 사령관들에게 계속 이어졌으므로 싱가포르 해협에 접한 싱가포르 섬의 북해안에는 방어시설을 건설하지 않았다. 남부 조호르를 강화하기에도 부족한 예산으로 최후 방어선 안에 있는 싱가포르 북해안에 방어 시설을 건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싱가포르의 조기 상실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

 

국제정세는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35년 10월에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 1936년 3월에는 독일이 라인란트를 점령했다. 11월에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방공협정(Anti-Comintern Pact)을 체결했다.

1937년 봄에 영국참모본부는 극동방위에 대한 평가를 실시했다. 독일, 이탈리아와 전쟁이 벌어진 가운데 일본이 극동 지역을 공격한다면 프랑스가 지중해의 이탈리아 해군력을 견제해 줄 것이기 때문에 영국은 강력한 함대를 70일 내에 싱가포르에 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홍콩에 함대가 도달하려면 90일이 걸리는데 4개 대대에 불과한 홍콩 수비대가 그때까지 버티기는 불가능하며 설사 수비대를 증강한다 해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따라서 홍콩은 최대한 오래 방어하되 최종적으로는 포기할 수 있는 전초기지로 분류되었다.

1937년 여름에 열린 제국회의(Imperial Conference)에서 뉴질랜드는 영국함대가 평화시에도 싱가포르에 상주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영국은 이 요청을 거절하면서 영국이 유럽에서 전쟁에 휩싸이지 않는 한 일본은 감히 태평양의 영연방 지역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유럽에서 영국이 강력한 해군력을 갖추어 전쟁을 억제하는 것이 뉴질랜드의 안보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미국과 영국은 11월에 브뤼셀에서 회의를 열어 1922년의 9개국 조약 정신에 따라 중국으로부터 일본군의 철병을 요청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 오히려 일본은 중일전쟁을 계기로 중국에 들어와 있던 미국인과 영국인을 몰아내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연장선상에서 1937년 12월에 일본해군의 함재기들이 양쯔 강에서 미해군의 포함 파나이를 격침했다. 일본정부는 실수라고 변명했다. 미국은 일본이 파나이를 고의로 격침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으나 마땅히 응징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는 선에서 물러섰다. 1938년 5월에는 일본이 중국 남부로 진격했고 10월에는 홍콩 바로 서쪽에 있는 광둥이 점령당했다. 1939년 2월에 일본군이 홍콩에서  남쪽으로 480km 떨어진 하이난 섬에 상륙하면서 홍콩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유럽 정세도 숨가쁘게 돌아갔다. 히틀러는 1938년 9월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독일에 할양하라고 요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0일의 뮌헨 회담에서 히틀러의 전쟁 협박에 굴복하여 체코슬로바카아에게 수데텐 지역을 포기하라고 강요했다.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의 중요한 방어선인 수데텐 지방은 독일 손에 떨어졌다. 그러나 히틀러는 수데텐이 마지막이이라던 약속을 어기고 다음해인 1939년 3월에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했다. 4월에는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침공했으며 히틀러는 영독해군협정의 소멸을 선언하고 폴란드에 단치히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5월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강철조약을 맺었다.

 

유럽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과연 영국이 독일, 이탈리아와 전쟁하는 도중에 일본마저 전쟁에 뛰어들었을 때 극동에 충분한 규모의 함대를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이 일었다. 영국 참모본부는 1939년 2월의 평가에서 1937년과 비슷한 결론을 내렸지만 이번에는 호주와 뉴질랜드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5월 2일에 개최된 제국회의에서 호주와 뉴질랜드는 유사시 극동에 파견될 함대의 규모에 대해 캐물었다. 해군성은 원론적인 답변으로 어물쩍 넘어갔다. 그러나 계속하여 함대 규모를 밝히라는 요구에 직면하자 결국 6월에 극동에 파견될 함대에 주력함 2척 이상은 포함하기 어렵다고 답변했다. 이것도 3월에 있었던 프랑스 해군과의 협의에서 일본 참전시 지중해에서 영국함대가 극동으로 빠져나간다는데 프랑스의 양해를 얻은 결과였다.

유사시 파견될 영국함대의 규모가 예상보다 작다는 사실에 극동 지역은 동요했다. 말레이 사령부는 유사시 파견될 함대의 규모가 작다면 말레이 방어를 위하여 육군 2개 여단과 대량의 항공기가 추가로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7월에 제국방어위원회는 유사시 싱가포르에 함대가 도착하는 기간을 기존의 70일에서 90일로 늘리면서 수비대와 시민이 먹을 6개월치 식량을 비축하라고 권고했다. 참모본부는 9월에 함대 도착 기간을 180일로 연장했다. 함대의 도착 기간이 연장되면서 말레이에 증원병력이 파견되었다. 8월에 2개 보병대대로 이루어진 제12인도보병여단과 제22산포연대, 그리고 2개 폭격비행대대가 인도로부터 도착했으며 9월에는 2개 폭격비행대대가 영국으로부터 추가로 증원되었다.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싱가포르 및 말레이 반도의 방어 상황은 다음과 같다.

싱가포르의 해안포는 15인치 5문, 9.2인치 6문, 6인치 14문이었다. 싱가포르 방어병력은 정규대대 5개(영국대대 3개, 인도대대 1개, 말레이대대 1개), 의용대대 2개, 대공포 연대 3개, 요새공병중대 4개였다. 페낭 수비대의 병력은 인도대대 1개, 의용대대 1개, 중해안포대 1개, 그리고 요새공병중대 1개였다. 북부 말레이의 방어는 현지 부대인 말레이 연방 의용군이, 조호르의 방어는 역시 현지부대인 조호르군이 담당했다. 제12보병여단과 제22산포연대는 조호르 방어에서 기동예비대 역할을 했다.

공군은 2개 뇌격비행대대와 4개 폭격비행대대로 이루어져 24대의 빌데비스트 뇌격기와 56대의 블레님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일선기는 58대였다. 이외에도 싱가포르 비행정 6대와 선덜랜드 비행정 4대를 보유한 2개 비행정대대가 있었다.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의 민간인들은 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말레이인, 중국인, 그리고 타밀인들은 국제정세에 무심했다. 백인들은 긴박한 국제 정세를 알고는 있었으나 그들은 일본이 감히 영국과 미국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에서는 민방위 체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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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8일 새벽, 일본군은 진주만 기습과 동시에 영령 말레이에 상륙을 개시했다. 이후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제25군은 영국군의 저항을 격파하면서 질풍같이 말레이 반도를 남하한 후 좁은 해협을 건너 싱가포르에 상륙했다. 영국군을 지휘하던 아서 퍼시발 장군이 1942년 2월 15일에 항복함으로써 일본군은 70일 만에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홍콩에 이은 싱가포르의 상실로 영국은 태평양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1. 말레이 반도

 

말레이 반도는 동남아시아에서 남동쪽으로 길게 뻗은 반도이다. 반도의 북서부는 미얀마, 북동부과 중부는 태국, 남부는 말레이시아의 일부이고 끝에는 싱가포르 섬이 있다. 오늘말 말레이시아의 일부인 남부 지역은 태평양 전쟁 당시 영국이 지배하고 있어서 영령 말레이로 불렀다. 이번 연재에서 특별히 지칭하지 않는 한 '말레이 반도' 또는 '말레이' 라는 용어는 영령 말레이를 뜻한다. 가령 '북부 말레이' 라고 하면 크라 지협의 남쪽이면서 태국과 국경을 접한 '영령 말레이의 북부' 를 뜻한다.

 

영령 말레이의 길이는 약 800km, 폭은 100 - 320km, 면적은 약 13만 ㎢ 이며, 남쪽으로는 말라카 해협을 두고 수마트라 섬과, 동쪽으로는 남중국해를 건너 보르네오 섬과, 북쪽으로는 베트남과 마주보고 있다.

 

(말레이 반도.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airports_in_Malaysia)

 

말레이 반도의 중앙에는 해발 2,183m 의 코르부 산을 정점으로 하는 티티왕사 산맥이 달리면서 반도를 동서로 나누고 있다. 산맥은 남쪽으로 내려오면 높이가 900m 정도로 낮아진다. 해안 평야지대의 폭은 최대 50km 정도이며 해안선의 길이는 1,900km 정도이다. 티티왕사 산맥에서 해안으로 수많은 강이 흐르며 강의 흐름이 막히는 곳에는 넓은 습지가 펼쳐진다. 이러한 강들은 남북으로 이동하는데 장애가 되며 습지는 통과가 거의 불가능하다. 1940년 당시 서해안은 상당히 개발이 되어 있고 도로망도 발달했으며 싱가포르와 방콕을 잇는 철도가 통과하고 있었으나 동해안은 거의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기후는 전형적인 열대우림 기후로 쿠알라룸푸르의 연평균 기온은 27도, 연중 강수량은 2,500mm 정도이다. 매년 6월에서 9월까지는 남서 계절풍, 11월에서 다음해 3월까지는 북동 계절풍이 분다. 계절은 건기와 우기로 나뉘는데 대략 남서 계절풍이 부는 시기를 건기, 북동 계절풍이 부는 시기를 우기로 보지만 지역마다 다르고 계절풍이 바뀌는 3-4월에도 많은 비가 내리므로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1940년 당시 말레이 반도의 인구는 450만을 약간 넘는 정도로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 출신 타밀인이 대부분이었다. 말레이인은 약 200만명으로 주로 작은 촌락에 살며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는데 느긋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인도 약 200만명으로 주로 도시에 모여 살며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1/3 정도는 말레이에서 태어났으며 2/3는 중국에서 들어온 사람으로 후자의 경우 대부분 언젠가는 중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여 상당한 재산을 이룬 경우가 많았다. 타밀인들은 고무농장이나 주석광산의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들어온 경우로서 대부분 3년 일한 후에 인도로 돌아갔다. 영국-인도 혼혈은 48,000 명 정도였는데 대부분 사무직으로 일했다. 백인은 약 18,000명으로 20% 는 영국인이 아니었고 42%는 여자 및 어린이였다. 백인 숫자는 1941년 12월에는 약 9,000 명으로 줄어들지만 그때까지도 상당수의 여자와 어린이들이 남아 있었다. 백인들은 주로 고무 농장 또는 주석 광산을 경영하거나 상업, 공무원, 전문직 등에 종사했는데 대부분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말레이 반도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은 적었다. 이것은 처음에는 식민지였지만 나중에 독립한 호주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물론 케냐 등지와도 다른 상황으로 백인 중에서 말레이 반도가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말레이 반도의 인종 차별은 당시 기준으로는 약한 편이었으며 따라서 인종 간의 긴장과 적개심 또한 약했다. 영국의 통치는 술탄국을 통한 간접 통치라는 영향도 있어서 온건했으므로 현지 주민들의 반감도 심하지 않았다. 다만 통치 계급인 백인부터 시작하여 경제력을 가진 중국인, 그리고 원주민인 말레이인까지 말레이 반도를 집으로 여기고 위협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 지키겠다는 생각이 부족했다.

말레이 반도에는 일본인 수천명도 살고 있었는데 주로 이발사나 사진사 등 서비스업에 종사했다. 부유한 일본인은 몇 군데의 고무 농장과 3군데의 철광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나중에 일본인이 소유한 고무 농장과 철광산을 중심으로 스파이망을 꾸렸다. 또한 말레이와 일본을 오가는 여객선을 일본회사가 운용했으므로 일본인들은 말레이 반도의 해안선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과의 긴장이 높아지면서 해협 식민지 당국은 말레이 반도의 일본인들에 대해 우려했으나 외국인에 대한 인종 차별을 금지하는 본국의 정책 때문에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싱가포르 섬은 길이가 50km인 조호르 해협으로 말레이 반도와 분리되어 있는데 해협의 가장 좁은 곳은 1km 가 채 되지 않는다. 영국은 방죽길을 만들어 섬과 말레이 반도를 연결했다. 섬의 크기는 동서로 43km, 남북으로는 21km 정도이다. 섬 중앙에는 해발 164m의 부킷티마를 비롯한 몇 개의 고지가 있다. 남동해안을 제외한 해안선으로 시내와 강이 흘러 들어가며 1940년대에는 대부분 맹그로브 습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싱가포르 시는 남해안에 있으며 1941년 당시 인구는 약 55만이었다.

 

(싱가포르 섬. https://en.wikipedia.org/wiki/Singapore#Geography)

 

말레이 반도에는 최소한 4만년 전부터 인류가 거주했는데 최초로 정착한 것은 네그리토 계열로서 말레이 인과는 다른 인종으로 추정된다. 말레이 인들은 약 2만년 전부터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네그리토 계열의 선주민들을 밀어내고 주류가 되었다. 기원을 전후하여 말라카 해협 부근은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번성하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인도의 영향으로 힌두교와 불교가 널리 퍼졌다. 말레이 반도에는 서기 2세기부터 국가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중국의 사서에는 서기 6세기부터 몇몇 국가의 이름이 나타난다. 8세기 중엽부터 수마트라 섬을 중심으로 하는 슈리비자야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갔으며 14세기에는 자바 섬을 중심으로 하는 마자파힛 제국의 영향권에 들었다.

 

말레이 반도가 세계사에 뚜렷이 등장하는 것은 말라카 술탄국의 건국부터이다. 건국자인 파라메스와르는 싱가포르의 왕이었는데 마자파힛 제국이 침공하자 말라카로 도망쳐서 1400년에 말라카 술탄국을 세웠다. 파라메스와르는 말레이 인으로 힌두교도였으나 1409년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이름을 이스칸다르 샤흐로 바꾸면서 이슬람 세력을 끌어들였다. 또한 정화 함대의 기항을 계기로 명과 외교 관계를 확립했다. 이런 바탕 아래에서 말라카 술탄국은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잇는 해상 교통의 요지로서 번영을 누렸고 15세기 후반에는 말레이 반도 전역과 수마트라 동해안에까지 세력을 떨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이때부터 말레이 반도에는 이슬람 교가 주요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향료가 산출되는 몰루카 제도를 노리던 포르투갈이 중간 기착지로서 말라카를 점령하기 위하여 1511년에 침공했다. 군함 19척과 병력 1,400 명으로 이루어진 포르투갈 군이 말라카를 점령하면서 말라카 술탄국은 멸망했다. 마지막 술탄은 도망쳐서 조호르 술탄국을 세웠다. 이후 130년간 포르투갈과 조호르 술탄국은 말라카를 두고 전투와 휴전을 거듭했는데 17세기 들어 자바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던 네덜란드가 조호르 술탄국에 가세하면서 승부가 가려졌다. 1641년에 네덜란드 및 조호르 술탄국의 연합 공격으로 말라카가 함락되면서 포르투갈은 말레이 반도에서 쫓겨났다. 말라카는 조호르 술탄국을 도운 대가로 네덜란드가 차지했다.

 

이후 조호르 술탄국은 네덜란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100년 이상 번성하였으나 18세기 후반들어 조호르 술탄국의 실세인 부기스 세력과 네덜란드 간에 상업적 이해를 둘러싸고 전쟁이 발발했다. 네덜란드는 1780년대에 들어와 부기스 세력을 격멸하고 세력이 약해진 조호르 술탄국을 대신하여 말레이 반도를 실질적으로 통제했다.

 

네덜란드의 지배는 곧 영국의 도전을 받았다. 1786년 케다의 술탄이 태국과 버마로부터 케다를 지켜달라는 조건으로 페낭 섬을 영국 동인도 회사에 양도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영국은 중국과 인도를 잇는 중계항의 필요성을 느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수마트라 벵쿨렌 지역의 부총독인 토머스 스탠포드 래플스 경에게 적당한 항구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래플스는 싱가포르를 점찍었고 동인도회사는 이 권고에 따라 조호르 술탄국으로부터 싱가포를 섬을 샀다. 1819년 2월 19일을 기하여 싱가포르에 영국기가 올라갔다.

싱가포르 때문에 중계항으로서 네덜란드령 말라카의 위치가 위협을 받게 되자 네덜란드와 영국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양국은 전쟁 대신 조약을 맺어 갈등을 해결했다. 1824년에 맺어진 조약에서 네덜란드는 말라카를 영국에 양도했다. 반면 영국은 수마트라의 벵쿨렌 지역을 네덜란드에 양도함으로써 싱가포르를 경계로 북쪽은 영국이, 남쪽인 인도네시아 지역은 네덜란드가 차지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말라카를 양도받은 영국은 1826년에 페낭, 말라카, 싱가포르로 이루어진 해협 식민지(Strait Settlement)를 만들었다. 수도는 페낭이었으나 1832년에 싱가포르로 옮겼다. 해협 식민지는 동인도회사 소속이었으나 1867년에 영국 국왕이 임명한 총독이 다스리는 직할령이 되었으며 1874년에는 딘딩 지역이 추가되었다.

 

(1922년 현재 영령 말레이. https://en.wikipedia.org/wiki/Straits_Settlements)

 

영국은 싱가포르를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잇는 해상 교통의 중계항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말레이 반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1857년에 쿠알라룸푸르 부근에서 대규모 주석 광산이 발견되자 생각이 바뀌어 말레이 반도를 장악했다. 영국은 군대를 보내어 점령하지는 않았으며 주로 조호르 술탄국과 그 지배 하에 있는 각 술탄국들 사이의 이해 관계에 끼어들어 이간질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넓혀갔다. 1895년 영국 정부의 주도 하에 말레이 중부의 4개 술탄국(셀랑고, 페락, 네게리셈빌란, 파항)이 말레이 연방(Federated Malay States)을 결성함으로써 조호르 술탄국의 권위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후 말레이 연방에 가담하지 않은 술탄국도 차례로 영국인 고문을 받아들였고 마지막으로 1914년에 조호르 술탄국이 영국인 고문을 받아들임으로써 영국의 말레이 지배가 완성되었다. 이 체제는 일본의 침공을 받을 때까지 이어졌다.

이렇듯 영국의 말레이 지배는 술탄국을 통한 간접 지배였다. 각 술탄국은 개별 조약으로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기 때문에 술탄은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해협 식민지 총독의 부하가 아니었다. 따라서 해협 식민지 총독이 중요한 일을 결정하려면 9개의 술탄국에다가 말레이 연방 및 비연방 술탄국을 대리하는 고등판무관 2명까지 총 11개 주체와 조약을 맺어야 했다.

 

말레이 반도의 주력 산물은 주석과 고무였다.

주석은 전쟁에 필요한 합금의 원료였다. 선박용 프로펠러를 만드는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다. 또한 주석은 인체에 무해했기 때문에 얇은 철판에 주석 도금을 한 양철은 통조림이나 C 레이션을 담는 깡통의 재료로 쓰였다. 1938년에 말레이 반도는 전 세계 주석의 58% 를 산출했다.

고무는 원래 말레이의 산물은 아니었다. 고무는 19세기 초부터 브라질에서 산출되고 있었으나 19세기 중엽에 수요량이 크게 늘자 헨리 위컴이 1876년에 브라질에서 고무나무 종자들을 몰래 빼내었다. 영국 왕립식물원에서 이 종자들을 재배하여 말레이의 토질과 기후에 맞는 종자를 찾아내었고 이후 말레이 반도에서 본격적으로 고무나무를 재배했다. 1938년 당시 말레이는 전 세계 고무 생산량의 38%를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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