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함 후소와 야마시로, 중순양함 모가미,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진 제1유격주대 지대가 니시무라 쇼지 중장의 지휘 하에 브루네이를 떠난 시각은 제1유격부대 주대가 출발한 지 7시간 후인 22일 오후 3시였다.
제1유격부대를 2개로 나누는 것은 원래 계획에는 없던 일로 함대가 브루네이로 옮겨온 뒤에 구리따 중장이 결정한 사항이었다.
당초 계획에 따르면 남쪽의 수리가오 해협을 통과하여 남쪽에서 레이테 만에 돌입하는 역할은 시마 기요히데 중장이 지휘하는 제2유격부대의 몫이었다.
구리따 중장이 제1유격부대를 둘로 나눈 이유는 불분명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같은 시각에 같은 해역에서 같은 작전목적을 가지고 활동했던 제1유격부대 지대와 제2유격부대가 협동작전을 전혀 실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일본군 지휘체계의 문제이기도 했다.
즉 니시무라 제독이 연합함대 직속의 제1유격부대 사령관인 구리따 중장의 지휘를 받는 반면 시마 제독은 남방함대 사령관인 미까와 제독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지휘계통이 달랐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니시무라 제독과 시마 제독간의 불화였다.
해상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잔뼈가 굵은 야전형 사령관이었던 니시무라 제독은 경력상 책상 업무를 많이 한 참모형이었던 시마 제독을 싫어했다.
따라서 만일 공동작전을 펼 경우 선임자인 시마 제독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것이 싫었던 니시무라 제독은 고의적으로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제1유격부대 지대는 24일 오전에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들에게 발견되었고 곧 제38.4전단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의 공습을 받았으나 큰 피해는 입지 않았고, 오히려 대공포화로 반격을 가하여 헬캣 1대를  격추했다.
오후 4시 쯤에 레이테 만 남쪽의 수리가오 해협을 향하여 항진 중인 제1유격부대 지대에게 구리따 제독으로부터 제38기동부대의 공습으로 인하여 제1유격주대 주대의 레이테 만 돌입이 늦어질 것이란 전문이 도착했다.

하지만, 이 전문에는 제1유격부대 지대에게 후퇴하거나 전진을 늦추라는 별도 지시가 없었으므로 니시무라 제독은 계속 수리가오 해협을 향하여 나아갔다.

 

한편, 제38.4전단이 제1유격부대 지대에게 한번의 공습을 가한 후 북쪽으로 가버리자 제7함대 사령관 킨케이드 중장은 포격지원부대를 이끌고 있던 Jesse B. Oldendorf 소장에게 명령하여 남쪽의 수리가오 해협으로 나아가 일본함대를 저지하도록 명령했다.
올덴도프 소장의 포격지원부대는 구식전함 6척(Mississippi , Maryland , West Virginia, Tennessee, California, Pennsylvania), 중순양함 4척(Louisville, Portland, Minneapolis, HMAS Shropshire) , 경순양함 4척(Denver, Columbia , Phoenix, Boise), 구축함 27척, 어뢰정 39척으로 이루어져 제1유격부대 지대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올덴도프 제독은 일본함대를 격멸하기 위하여 수리가오 해협에 3단계로 이루어진 치명적인 덫을 설치했다.
제1단계는 13개의 전대로 나누어진 39척의 어뢰정으로 이들은 수리가오 해협의 입구인 파나온 섬에 매복했다.
제2단계는 수리가오 해협의 출구 쪽에 매복한 27척의 구축함이었다.
제3단계는 수리가오 해협을 빠져나오는 제1유격부대 지대에 대하여 T-자형 대형을 이룬 6척의 구형전함과 8척의 순양함군이었다.

수리가오 해협에 접근한 니시무라 제독의 제1유격부대 지대는 오후 9시에 중순양함 모가미와 3척의 구축함을 파나온 섬 인근으로 정찰을 내보내고 후소와 야마시로는 구축함 시구레를 앞세우고 계속 항진했다.
오후 10시 50분, 선두에 섰던 시구레가 3척의 어뢰정을 발견하고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어뢰정들은 즉시 후소와 야마시로에게 달려들었으나 단 한발의 어뢰도 명중시키지 못한 채 일본함대의 반격을 받아 PT-493 호가 격침되고 나머지 2척도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모가미와 3척의 구축함은 25일 새벽 0시경에 4척의 어뢰정에게 공격을 받았으나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후퇴하여 25일 오전 1시 30분에 수리가오 해협 입구에서 전함들과 합류했다.
2시에 수리가오 해협에 진입한 제1유격부대 지대는 그 직후 30여척의 어뢰정들에게 공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해군의 어뢰정들은 비록 제1유격부대 지대에게 피해를 입히지는 못하였으나 해협 출구 쪽에 있던 올덴도프 제독에게 일본함대의 구성과 위치,침로 및 속력 등을 보고했다.

오전 3시, 제1유격부대 지대가 수리가오 해협의 출구로 나서자 미국의 구축함들 중 최초로 공격할 임무를 띠고 있던 제54구축전대의 구축함 5척이 어뢰공격을 가했다.
수리가오 해협 출구 양쪽으로 나뉘어 있던 제54구축전대 소속 구축함 중에서 동쪽에 배치되어 있던 3척의 구축함들은 제54구축전대장인 Jesse Coward 대령이 직접 이끌고 있었는데 오전 2시 40분에 레이더로 일본함대와 접촉했다.
즉시 해협 중앙으로 나와서 남쪽으로 변침, 일본함대의 우현 전방에서 접근해 간 3척의 구축함 중 Melvin 의 견시가 일본함정들을 육안으로 식별한 것은 오전 2시 58분, 거리는 12,000 m 였다.
카워드 대령은 즉시 어뢰발사명령을 내렸다.
오전 3시 정각부터 2분간 3척의 구축함들은 1척당 9발씩 총 27발의 어뢰를 발사하고 연막을 치면서 반전했다.
일본함대에서는 3시5분부터 멀어져가는 구축함들을 향하여 6인치 포로 반격을 가했으나 1발도 명중하지 않았다.
오전 3시 8분, 후소에 1발의 어뢰가 명중했다.
함의 중앙부를 직격한 이 어뢰로 인하여 기관실이 침수되고 화재가 발생한 후소는 속력이 10노트로 떨어지면서 함열에서 이탈했고, 결국 30분 후인 3시 35분에 탄약고의 폭발로 인하여 두 동강이 나서 침몰했다.
후소의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 

 

(일본전함 후소.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5635761 )

 

Richard Phillips 중령이 지휘하는 서쪽그룹의 구축함 2척은 2시 54분에 레이더로 일본함대를 접촉했다.
즉시 남하를 시작한 서쪽 그룹은 3시 10분에 일본함대를 향하여 각각 10발씩의 어뢰를 발사했다.
니시무라 제독의 기함 야마시로, 구축함 야마구모, 미치시오, 아사구모가 각각 1발씩의 어뢰에 맞아서 야마구모는 즉시 침몰하고 미치시오와 아사구모는 대파되었다.

제54구축전대가 공격하는 동안 순양함열의 우측 그룹에 포함되어있던 제24구축전대도 공격에 가담하기 위하여 오전 3시 2분부터 남하했다.
플레처 급 구축함 5척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구축함 1척으로 이루어진 제24구축전대의 공격은 3시 17분부터 시작되었는데 총 35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야마시로에 1발을 명중시켜 속력을 5노트로 떨어뜨렸고, 이미 어뢰에 맞아 대파된 일본구축함 아사구모에 1발을 추가로 명중시켜 격침했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이때 야마시로의 속력이 5노트로 떨어진 이유가 어뢰에 맞아서가 아니라 후소가 이미 전열을 이탈한 사실을 모르고 있던 니시무라 제독이 후소가 뒤따라 올 수 있도록 야마시로의 속력을 늦추고 기다렸던 것이라고 한다.

순양함열의 좌측 그룹에 포함되어 있던 제56구축전대는 제24구축전대의 공격이 진행 중이던 오전 3시 35분에 공격명령을 받았다.
9척의 구축함을 보유한 제56구축전대는 일본함대 전방 6,000m 지점까지 접근하여 어뢰를 발사, 야마시로에 1발을 명중시켰다.
이때 구축함 Albert W. Grant 가 일본함대의 반격을 받아서 7발의 포탄을 얻어맞았고, 게다가 아군 경순양함에서 발사한 포탄 11발 등 총 18발의 포탄을 뒤집어쓰고 대파되었다.

미국의 구축함들에게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제1유격부대 지대가 계속 전진해오자 드디어 전함과 순양함들의 주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순양함들은 오전 3시 51분에 14,000 m 의 거리에서, 그리고 전함들은 3시53분에 웨스트버지니아를 필두로 20,000 m 의 거리에서 포격을 시작했다.
곧이어 3시55분에 테네시와 캘리포니아가 포격을 시작했다.
미국의 전함과 순양함들은 수리가오 해협을 빠져나오는 일본함대의 머리를 정확하게 누르는 T-자 대형을 형성하고 있었다.
해전사상 마지막으로 벌어졌던 전함대 전함의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올덴도프 제독의 전함 6척 중 3척(West Virginia, Tennessee, California)은 신형의 Mk8 사격통제레이더를 장비하고 있어서 비교적 정확한 사격이 가능했던 반면 나머지 3척(Maryland, Missippi, Pensylvania)은 구형의 Mk3 사격통제레이더를 장비했기 때문에 효율적인 사격을 하지 못했다.
즉 매릴랜드는 가장 먼저 포격을 시작한 웨스트버지니아의 포탄이 떨어지는 탄착군을 보고 포격을 시작했고, 미시시피는 사격중지 명령이 내리기 직전 단 한번의 일제포격을 실시했으며 전함열의 가장 뒤쪽에 있던 펜실베니아는 단 1발도 발사해 보지 못했다.
이날 미국의 전함들은 오전 3시 53분부터 4시 8분까지 15분간 벌어진 일방적인 포격전에서 웨스트버지니아가 16인치 철갑탄 93발, 테네시가 14인치 철갑탄 69발, 캘리포니아가 14인치 철갑탄 63발, 매릴랜드가 16인치 철갑탄 48발, 미시시피가 14인치 철갑탄 12발을 발사하여 합계 16인치 철갑탄 141발, 14인치 철갑탄 144발 등 합계 285발의 16인치 및 14인치 철갑탄을 발사했다.
이에 더하여 순양함들이 8인치와 6인치 주포 및 5인치 부포에서 4,000 여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구축함 그랜트가 피아간의 포격전 사이에 끼어 대파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올덴도프 제독은 아군의 구축함들이 일본함대에게서 떨어질 여유를 주기 위하여 오전 4시 9분에 포격중지명령을 내렸다.

야마시로는 가공할 포탄의 비를 얻어맞으면서도 다시 속력을 15노트로 올려서 14인치 주포로 반격을 가하면서 동쪽으로 항진하다가 다시 남쪽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오전 4시 19분에 전복하여 침몰했다.
니시무라 제독을 비롯한 수많은 승무원들이 함과 운명을 함께 했다.

중순양함 모가미는 3시53분에 포격이 시작되자 동쪽으로 변침해서는 우박같이 쏟아지는 포탄에 의하여 피해를 입으면서도 3시56분부터 남서쪽에 있던 제24구축전대에게 포격을 가하여 이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린 제24구축전대가 5인치 포로 반격하기 시작하자, 4시 1분에는 어뢰를 발사한 뒤 남쪽으로 변침하고 연막을 피우면서 속력을 올려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순간 미함대의 중순양함열에서 발사된 일제사격이 모가미의 사령탑에 명중하면서 함장 이하 지휘부가 몰살당했고, 속력은 8노트로 떨어졌으며 기관실에서 직접 함을 제어하여 겨우 항해가 가능한 실정이 되었다.
구축함 시구레만이 다행히 이 지옥같은 전장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있었다.

제1유격부대 지대의 60km 후방에서 항진하고 있던 시마 제독의 제2유격부대가 수리가오 해협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25일 오전 3시였다.
수리가오 해협 입구를 지키고 있던 미국의 어뢰정들이 공격을 가하여 그중 PT-137 호가 경순양함 아부꾸마에 어뢰 1발을 명중시켰다.
기관실에 어뢰를 맞은 아부꾸마는 속력이 떨어지며 전열에서 이탈했다.

제2유격부대는 아부꾸마를 남겨두고 해협 안으로 진입하여 두 동강난 채 불타고 있는 후소의 잔해를 발견했다.
오후 4시 20분, 해협의 출구에 도착한 시마 제독의 기함 나치의 레이더가 8,000m 떨어진 거리에서  2척의 적함을 발견했다.
중순양함 나치와 아시가라는 동쪽으로 변침한 후에 4시 24분에 각각 8발씩 합계 16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이 어뢰들은 1발도 명중하지 않았으며 그중의 2발은 나중에 인근의 히부손 섬의 해안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이 제2유격부대가 실시한 유일한 공격이었다.
제1유격부대 지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직감적으로 엄청난 비극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한 시마 제독은 현명하게도 남쪽으로부터 레이테 만에 진입한다는 목표를 포기하고 빨리 그 해역을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나치는 남쪽으로 변침한 직후 대파된 모가미의 진로를 가로지르게 되었다.
나치의 가누까 함장은 모가미가 완전히 동력을 상실하고 떠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모가미는 8노트의 속도로 천천히 항진하고 있었다.
오후 4시 30분, 모가미의 함수가 나치의 고물을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나치는 속력이 18노트로 떨어졌으나 모가미는 거의 피해가 없었고, 게다가 손상 부위의 응급처치에 성공하여 18노트의 속도로 제2유격부대의 뒤를 따라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시마 제독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구축함 시구레에게도 합류를 명한 다음 서둘러서 남하했다.

오전 4시 32분, 올덴도프 제독은 기함인 중순양함 루이즈빌과 포틀랜드, 미네아폴리스, 경순양함 덴버, 컬럼비아를 이끌고 제56구축전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추적을 개시했다.
오전 5시 20분, 루이즈빌, 포틀랜드, 덴버는 모가미를 따라잡고 포격을 퍼부어서 10 - 20 발의 명중탄을 기록했으나 모가미가 기를 쓰고 계속 도망가자 올덴도프 제독은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북상했다.
대파된 채로 계속 도망가던 모가미는 오전 8시 30분에 엔진이 멎으면서 해상을 표류하게 되었고 그 상태에서 9시 2분에 제7함대의 호위항모군인 태피1에서 날아온 17대의 아벤저 뇌격기들에게 공격을 받아서 2발의 225kg 짜리 폭탄을 얻어맞았다.
결국 10시 47분에 퇴함명령이 내려졌고, 12시 40분에 동료 구축함 아께보노로부터 산소어뢰 1발을 얻어맞은 모가미는 오후 1시 7분에 192명의 전사자와 함께 침몰했다.

 

(일본중순양함 모가미.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6052003 )

 

수리가오 해협 남쪽에서는 어뢰정들이 도망가는 제2유격부대를 발견하고 5시 55분부터 6시 50분까지 공격을 가했으나 피해를 입히는데 실패했다.
올덴도프 제독은 오전 6시 43분에 경순양함 덴버와 컬럼비아를 3척의 구축함과 함께 다시 남쪽으로 파견하여 낙오된 일본함정들을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이들은 어뢰를 맞고 대파된 채 표류하고 있던 구축함 아사구모에 포격을 가하여 7시 21분에 격침했다.
수리가오 해협의 남쪽 입구에서 PT-137 에게 어뢰를 맞았던 아부꾸마는 임시 수리를 끝내고 일단 사지를 벗어나는데 성공했으나 다음 날인 26일에 일본군 기지에 돌아가기 위하여 술루 해를 건너다가 미육군제5항공대 소속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의 공습을 받아 폭탄 3발을 얻어맞고 오전 11시 42분에 격침되었다.  

이로서 해전 사상 최후의 전함대 전함의 포격전인 수리가오 해전이 끝났다.
이 해전에서 제7함대의 올덴도프 제독은 니시무라 제독의 제1유격부대 지대를 잘 준비된 덫 속으로 끌어들여 구축함 시구레 1척을 제외한 전 함대를 전멸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올덴도프 제독은 제2유격부대의 경순양함 아부꾸마까지 합하여 합계 전함 2척,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3척을 격침하면서 자신은 어뢰정 1척 격침, 구축함 1척 대파라는 가벼운 피해만을 입음으로써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완승을 거두었다.
수리가오 해전에서 미함대는 전력 자체가 일본함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고, 또한 정보력을 비롯한 여러 조건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하지만 그러한 유리한 면을 잘 살려서 실효성있는 작전을 구상하고, 또한 제대로 실시하여 실제 전과로 연결시키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로서 그런 측면에서 올덴도프 제독의 뛰어난 작전지도가 매우 돋보이는 해전이었다.
이로써 수리가오 해협을 통하여 남쪽으로부터 레이테 만에 진입하려던 일본군의 기도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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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얀 해를 항진하던 제1유격부대 주대가 인트레피드에서 발진한 제18항공단 소속의 정찰기에게 발견된 것은 24일 오전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잠시 후 남쪽의 술루 해를 항진하던 제1유격부대 지대도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제20항공단 소속의 정찰기에게 발견되었다.
기함인 고속전함 뉴저지에 타고 보간 소장의 제38.2전단과 함께 행동하던 핼시 제독은 오전 8시 37분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번 공격명령은 산타크루즈 해전 때보다는 약간 길었다.

“공격하라, 반복한다, 공격하라. 행운을 빈다.”
(“Strike, Repeat, Strike. Good Luck.”)  

즉시 38.2 전단의 함재기들이 제1유격부대 주대를 향하여, 그리고 38.4 전단의 함재기들이 제1유격부대 지대를 향하여 출격했다.

하지만 셔먼 제독의 제38.3전단은 제1파 공격에 참가하지 못했다.
오니시 다께지로 중장이 이끄는 제1항공함대가 제38.3전단을 공격해 온 것이었다.
오전 10시 15분경 일본의 베티공격기 한대가 제38.3전단의 상공에 나타났다가 함대의 대공포화에 의하여 격추되었다.
10시 35분에 또다른 베티공격기 5대가 나타났으나 역시 벌떼같이 달려드는 CAP 세력과 대공포화에 의하여 단 한발의 어뢰나 폭탄도 투하해보지 못한 채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다.
일본군의 항공력은 제38.3전단을 위협하기엔 너무나 미약해 보였다.
그러나 오전 11시에 80대가 넘는 대편대가 제38.3전단을 덮쳤다.
즉각 정규항공모함 에섹스와 렉싱턴, 경항공모함 랭글리와 프린스턴의 헬캣들이 요격을 위하여 날아올랐고 막강한 대공포화가 작렬하기 시작하여 공격해 온 일본기들 중 70여대를 격추했다.

오전 11시 38분,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일본기들의 공격이 끝났다고 한숨을 돌리는 순간, 함대 상공에 낮게 깔려있던 구름 속에서 갑자기 한대의 주디 급강하폭격기가 튀어나와서 경항공모함 프린스턴의 비행갑판에 한 발의 250kg 짜리 철갑탄을 명중시켰다.
이 철갑탄은 비행갑판을 뜷고 들어가 격납고 갑판에서 제1유격부대 주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무장과 연료를 만재하고 있던 아벤저 뇌격기 6대의 한가운데에서 폭발했다.
곧 아벤저 뇌격기들의 무장과 연료가 유폭하면서 프린스턴에서는 일대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프린스턴의 함장 Buracker 대령은 필수요원들을 제외한 인원들은 퇴함시킨 후 손상관리요원들과 함께 함에 남아서 소화작업을 지휘했다.
셔먼 제독은 핼시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프린스턴의 참사로 인하여 제1유격부대 주대에 대한 공격에 참가하지 못하겠다는 뜻을 전했지만 핼시 제독은 프린스턴은 따로 처리하도록 하고 나머지 제38.3전단은 즉시 제38.2전단 쪽으로 항진하여 공격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제38.3전단은 경순양함 버밍햄과 구축함 3척을 남겨 프린스턴을 돕도록 하고 나머지 함정들은 공격에 참가하기 위하여 서둘러 제38.2전단 쪽으로 항진해 갔다.

그동안 프린스턴에서는 필사적인 소화작업을 실시하여 오후가 되자 불길을 어느 정도 잡았다.
그러자 경순양함 버밍햄이 프린스턴을 예인하기 위하여 접근했다.
오후 3시 23분, 갑자기 프린스턴의 후방 탄약고가 엄청난 폭음과 함께 폭발했다.
이 폭발로 프린스턴의 후방 구조물들이 통째로 날아가버렸고 함에 남아서 소화작업을 하던 승무원의 대다수가 즉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하필이면 이때 프린스턴에 바짝 접근해있던 경순양함 버밍햄에서는 더 큰 참사가 발생하여 승무원 229명이 사망하고 420명이 부상했다.
불타는 함에 남아서 손상관리반의 소화작업을 지휘하다가 이 폭발을 당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버래커 함장은 이 시점에서 함을 포기할 것을 결심했고, 오후 4시 30분까지 프린스턴의 생존자 전원이 퇴함했다.
프린스턴은 전방 탄약고와 연료탱크에 동료 함정의 어뢰 3발을 맞고 폭발을 일으키면서 108명의 전사자와 함께 침몰했다.
프린스턴은 전쟁 중에 격침된 유일한 인디펜던스 급 경항공모함이었으며 태평양전쟁에서 마지막으로 격침된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 소속의 항공모함이었다.
 
데이비슨 제독의 제38.4전단은 샌배너디노 해협 앞바다에 있는 제38.2전단에 합류하기 전에 제1유격부대 지대에 대한 공습을 실시했다.
이 함재기들은 후소와 야마시로에 각 1발의 지근탄을 기록하고, 모가미에 몇 발의 HVAR(High Velocity Air-launched Rocket) 을 명중시켰으며 구축함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했으나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그동안 제38.2전단은 제1유격부대 주대에 대한 공습을 실시했다.
레이테 해전을 이루는 4대 해전의 제1라운드인 시부얀 해전이 시작되었다.
정규항공모함 인트레피드와 경항공모함 캐봇에서 발진한 헬캣 21대, 헬다이버 12대, 아벤저 12대로 이루어진 제1차 공격대는 10시 30분에 제1유격부대 주대를 발견하고 공격에 들어갔다.
이 공격대는 전함 야마또, 무사시, 나가또, 중순양함 묘꼬를 공격하여 무사시에 어뢰 1발과 폭탄 1발, 묘꼬에 어뢰 1발을 명중시켰다.
자매함 야마또와 함께 세계 최대의 전함인 무사시는 이정도 타격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묘꼬는 속력이 12노트로 떨어져서 전열을 이탈했다.

이어서 인트레피드에서 출격한 31대로 이루어진 제2차 공격대가 오후 12시 6분에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의 공격은 주로 야마또와 무사시에 집중되어 야마또가 1발의 폭탄을 맞고 무사시에 3발의 어뢰와 2발의 폭탄이 명중하여 속력이 22노트로 저하되었다.

오후 1시 30분, 제38.3전단의 정규항공모함 렉싱턴과 에섹스를 떠난 44대의 함재기로 이루어진 제3차 공격대가 역시 야마또와 무사시에 집중공격을 가하여 야마또에 1발의 폭탄을 명중시키고 무사시에 어뢰5발과 폭탄 4발을 명중시켰다.
무사시는 기울기 복원을 위하여 주수를 시작하여 함수가 거의 해면에 닿을 정도가 되었고 속력은 16노트로 떨어졌다.
제1유격부대 주대의 사령관 구리따 제독은 기지 항공대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이미 제38.3 전단을 공격하기 위하여 거의 전 병력을 소진한 기지 항공대는 제1유격부대 주대에 항공지원을 제공할 여력이 없었다.
함대와의 공동 작전이 불가능해진 무사시는 타이완으로 회항하기 시작했다.

정규항공모함 프랭클린을 떠난 32대의 함재기로 이루어진 제4차 공격대는 야마또와 나가또를 집중공격하여 야마또에 1발의 폭탄을 명중시켰다.

오후 2시 59분, 제38.2전단과 제38.4전단에서 출격한 67대의 함재기로 이루어져 시부얀 해전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규모가 큰 제5차 공격대가 일본함대의 상공에 도착하여 공습에 들어갔다.
먼저 도착한 것은 제38.4전단의 정규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프랭클린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이었다.
프랭클린의 함재기가 나가또를 공격하는 동안 엔터프라이즈에서 출격한 16대의 헬캣과 9대의 헬다이버, 그리고 8대의 아벤저는 무사시를 집중공격했다.
오후 3시 10분에는 제38.2전단의 정규항공모함 인트레피드와 경항공모함 캐봇과 인디펜던스를 떠난 함재기들이 도착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앞선 공격에서 이미 큰 피해를 입고 있던 무사시는 제5차 공격에서만 어뢰 11발과 폭탄 10발을 추가로 얻어맞아 결국 숨통이 완전히 끊어졌다.
이때 한발의 어뢰는 이미 어뢰에 피격되어 뚫린 구멍으로 들어가서 함의 내부에서 폭발하기도 했다.
5회에 걸친 제38기동부대의 공습에서 합계 어뢰 20발과 폭탄 17발을 얻어맞고 사실상 모든 기능을 상실한 상태로 시부얀 해를 표류하던 무사시는 오후 7시 35분에 1,023 명의 전사자와 함께 함수부터 침몰했다.

 

(시부얀 해전에서 미국 함재기들의 집중공격을 받고 있는 무사시)


제5차 공격에서 나가또는 폭탄 1발을 맞아 속력이 21노트로 떨어졌고, 중순양함 도네가 2발의 폭탄을 맞아 소파되었다.
구축함 2척도 명중탄과 지근탄을 1발씩 얻어맞고 피해를 입었다.
오후 3시 30분, 거듭되는 제38기동부대의 공습을 견디다 못한 구리따 제독은 휘하 함대에게 반전을 명했다.

제1유격부대 주대가 거듭되는 제38기동부대의 공습을 견디지 못하고 뱃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하자 핼시 제독의 머릿속은 이제 필리핀 해전에서 살아남은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부대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찼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일본해군 수뇌부가 미국의 강력한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버티고 있는 해역에 수상함들만 들여보낼 리가 없다고 생각한 핼시 제독은 일본 내해에 있다고 알려진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사실은 일본함대의 주력일 것이며 그들이 조만간 반드시 남하해 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24일 오후부터 정찰기들을 내보내어 필리핀 북부해상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오후 4시 40분, 헬다이버 급강하폭격기가 오자와 제독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본대)를 발견했다.
적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은 핼시 제독은
 
 “그럼, 그렇지..”
 
하며 전 함대를 이끌고 본대를 공격하러 북상했다.

한편 거듭되는 제38기동부대의 공격을 견디다 못하여 일시 후퇴했던 제1유격부대 주대는 오후 5시 15분에 재차 반전하여 샌배너디노 해협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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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해전이 끝난 후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도요다 소에무 제독은 일본의 영역을 4개로 나누어서 결전을 감행할 것을 목표로 하는 ‘쇼’ 호 작전을 수립했다.
쇼1호작전은 필리핀, 쇼2호 작전은 규슈, 오끼나와, 대만, 쇼3호 작전은 혼슈 및 시코쿠, 쇼4호 작전은 홋카이도가 공격받을 때 발령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제38기동부대가 오끼나와와 대만을 공격해오자 쇼2호 작전을 발령하여 공격하였으나 막강한 전력을 지닌 미함대의 반격에 직면하여 600 여대를 상실했다.
필리핀 지역의 방어를 책임진 것은 야마시따 도모유끼 대장의 제14방면군으로서 그 중에서 스즈끼 쇼사꾸 중장이 지휘하는 제35군이 민다나오 섬을 중심으로 한 남부 필리핀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레이테 섬에는 마끼노 시로 중장이 지휘하는 제16사단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10월 현재 제14방면군의 총 병력은 항공부대와 건설대를 합쳐 432,000 명이었으며 레이테 섬에는 약 20,000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한편 제38기동부대를 제외한 제3함대의 거의 모든 함정을 넘겨받아 전투함 157척을 포함하여 738척의 대세력을 형성한 제7함대는 레이테에 상륙할 부대를 싣고 10월 11일부터 15일에 걸쳐 마누스 섬과 홀랜디어를 떠났다. 
레이테 섬에 상륙할 부대는 발터 크루거 중장이 지휘하는 제6군이었다.
제6군은 다시 프랭클린 시버트 소장의 제10군단과 존 하지 소장의 제24군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0군단은 제1기병사단과 제24보병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제24군단은 제7보병사단과 제96보병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제32보병사단과 제77보병사단, 그리고 제96보병사단 소속의 제381연대전투단이 예비대로 대기했다.
제6군은 총6개 사단에 병력은 202,500 명에 달했다.

제7함대는 10월 17일에 목적지에 도달하여 레인저 대대가 레이테 만 입구에 있는 3개의 작은 섬들에 상륙하여 레이테 만의 입구를 열었고, 곧이어 소해정들이 레이테 만으로 들어가 항로를 개척했다.
소해정의 뒤를 따라서 구형전함 6척(캘리포니아, 메릴랜드, 미시시피, 펜실베니아, 테네시, 웨스트버지니아),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4척 및 구축함 26척으로 이루어진 제시 올덴도프 소장의 포격지원함대가 레이테 만 안으로 진입하여 함포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레이테 만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제38기동부대도 18일부터 루존 섬과 부근 도서에 맹폭을 가하여 22일까지 루존 섬의 비행장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소형함정 6척과 함대급유선 2척, 수송선 13척을 격침했다.

 

(마닐라 만에 모여있는 일본 상선들. 1944년 10월 18일에 엔터프라이즈의 제20비행전대가 찍은 사진이다. 뒷쪽으로 넬슨 비행장에서 발생한 연기가 보인다. 이 사진에 보이는 선박들 중 6척이 이날 제20비행전대에 의하여 격침되거나 피해를 입었다.)


레이테 섬에 대한 상륙은 20일에 실시되어 제10군단은 대니얼 바비 소장의 지휘 하에 타클로반에, 제24군단은 테오도르 윌킨슨 중장의 지휘 하에 타클로반 남쪽의 둘락에 상륙했다.
해안선에서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도요다 소에무 대장은 레이테 만 입구의 섬들이 공격을 받자 즉시 쇼1호 작전을 발령했다.
당시 쇼1호 작전에 의하면 일본함대는 크게 3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선 싱가포르 남서쪽의 링가 정박지에 있던 구리따 다께오 중장의 제2함대가 주력이 되고 일본내해에 있던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의 제3함대가 제38기동부대를 북쪽으로 끌어내는 미끼 역할을 하기로 했다.
또한 대만항공전 기간인 10월 15일에 항공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미국함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일본 내해에서 출항했다가 아직도 멀쩡한 제38기동부대를 보고 놀라서 대만으로 도망와 있던 시마 기요히데 소장의 제5함대가 수리가오 해협을 통하여 남쪽에서 레이테 만에 돌입하기로 했다.
쇼1호 작전이 발동됨에 따라 구리따 제독의 제2함대는 제1유격부대, 오자와 제독의 제3함대는 본대, 시마 제독의 제5함대는 제2유격부대가 되었다.

구리따 제독이 도요다 제독으로부터 쇼1호 작전의 발동명령을 받은 것은 10월 17일 오전 9시 28분이었다.
18일에 영국의 극동함대가 링가 정박지 인근의 니코발 섬을 공격하자 보르네오 방면으로 옮겨간 제1유격부대는 그곳에서 함대를 2개로 나누었다.
즉 제2전함전단장 니시무라 쇼지 소장의 지휘 하에 전함 야마시로와 후소, 중순양함 모가미, 구축함 4척으로 지대를 형성하여 남쪽의 수리가오 해협을 통하여 남쪽에서부터 레이테만에 돌입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제1유격부대 본대는 전함 5척(야마또, 무사시, 나가또, 공고, 하루나), 중순양함 10척(아타고, 다까오, 죠까이, 마야, 묘고, 하구로, 구마노, 스즈야, 치꾸마, 도네), 경순양함 2척(노시로, 야하기) 구축함 15척으로 이루어져 시부얀 해를 통과하여 샌 배너디노 해협을 지나 사마르 섬을 돌아서 북쪽에서부터 레이테 만에 돌입하기로 했다.
보르네오 근해에서 최종적으로 급유를 마친 제1유격부대의 본대와 지대는 22일 오전 8시에 각각의 목표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한편 핼시 제독은 레이테 섬에 미군이 상륙한 20일이 되어도 일본함대의 움직임이 눈에 띄지 않자 연합함대가 전투를 포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레이테 만의 교두보를 버려두고 일본함대가 있다고 알려진 남지나 해로 쳐들어가려고 하다가 니미츠 제독에게 제지를 당했다.
일본함대가 이미 저항을 포기했다고 판단한 핼시 제독은 일본함대를 쫓아서 남지나해로 가지 못하게 되자 마셜제도 상륙작전 이래 10개월 이상 상륙 한번 못해보고 쉴새없이 전투를 지속해온 제38기동부대 장병들에게 울리시로 가서 보급과 급유를 하면서 잠시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할 생각으로 22일 오후 10시 30분에 맥케인 제독의 제38.1전단에게 울리시로 가라고 명령했다.
23일에는 데이비슨 제독의 38.4전단이 뒤따를 예정이었으며 이 두 전단이 돌아오면 제38.2전단과 제38.3전단이 교대해서 울리시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정규항공모함 3척과 경항공모함 2척으로 이루어져 가장 강력한 전력을 지닌 제38.1전단이 가장 앞장선 것이 문제였다.
347대의 함재기를 보유한 제38.1전단이 빠짐으로서 제38기동부대는 전체 함재기 1047대 중 1/3이 없는 상태로 레이테 해전을 치러야만 했다.

한편 22일 오전 8시에 보르네오를 출발한 제1유격부대 주대는 23일 아침에 미국잠수함 다터와 데이스에게 공격을 받았다.
일본연합함대의 출동에 대비하여 이 해역에 배치된 12척의 미국잠수함 중 팔라완 수로의 경비를 맡은 두 척의 잠수함은 23일 새벽 1시 16분에 일본함대를 레이더로 탐지했다.
즉시 상부에 접촉보고를 발한 두 척의 잠수함은 유리한 위치를 잡기 위하여 밤새 기동했다.
당시 일본함대는 대잠작전에는 불리한 5열 종진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터와 데이스는 어렵지 않게 유리한 공격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맥클린톡 중령이 지휘하는 다터는 아침 6시 9분에 잠항하여 6시 30분에 전방 어뢰발사관에서 6발을 발사했고, 곧 선회하여 후방 어뢰발사관에서 4발을 발사했다.
다터가 발사한 어뢰 중 4발이 구리따 제독의 기함인 중순양함 아타고에 명중했고, 2발은 중순양함 다까오에 맞았다.
아타고는 피격 23분만에 침몰했는데 구리따 제독은 얼마나 급했는지 구명정에 옮겨탈 시간도 없이 바다에 뛰어들어서 구명정까지 헤엄쳐가야 했다.
구리따 제독은 사령기를 전함 야마또에 옮겨 달았다.

 

(일본중순양함 아타고.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6046434 )


어뢰 2발에 명중당한 다까오는 다행히 침몰은 면했으나 동력이 끊어져서 해상을 표류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6시 57분에 다시 중순양함 마야에 거대한 물기둥이 연속적으로 솟아오르면서 엄청난 폭음이 해상을 뒤흔들었다.
미잠수함 데이스가 발사한 어뢰 중 4발이 마야에 명중한 것어었다.
탄약고를 명중당한 마야는 함체가 반으로 꺾이면서 불과 8분 만에 침몰했다.
다터와 데이스는 동력을 잃고 해상을 떠도는 다까오를 격침시키려고 23일 하루 동안 내내 그 해역을 떠나지 않고 기회를 엿보았으나 일본구축함들의 효과적인 방어로 공격기회를 잡는데 실패했고 그동안 응급수리를 마친 다까오는 오후 늦게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며 6노트의 느릿느릿한 속력으로 회항하기 시작했다.
다터와 데이스는 밤에 공격을 가할 예정으로 다까오를 뒤쫓기 시작했으나 24일 새벽 0시 5분에 다터가 모래톱에 좌초하고 말았다.
맥클린톡 함장은 함을 포기하기로 하고 비밀서류를 소각한 뒤 데이스를 불러 승무원들을 모두 옮겨싣고 포격을 가하여 다터를 처분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데이스는 더 이상의 추격을 단념하고 다터의 승무원들을 싣고 오스트레일리아의 프레맨틀 항으로 귀환했다.
아침이 되자 일본구축함이 다터를 발견하고 내부를 수색하여 레이더와 엔진 시스템의 청사진 등 몇 가지의 도면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물품들을 챙겼다.
비록 암호책 등 중요기밀서류나 중요한 물품들은 소각하거나 파기했지만 원래 이런 도면들이나 물품들도 소각하든지 아니면 파기했어야 할 것들이었다.

10월 23일 저녁에 필리핀 동쪽에서 급유를 마친 제38기동부대의 3개 전단은 밤새 동진하여 필리핀 근해에 도달했다.
제38.3전단은  루존 앞바다에, 제38.2전단은 동남쪽으로 샌배너디노 앞바다에, 제38.4전단은 다시 동남쪽의 레이테 앞바다에 자리잡았다.
다터가 보고한 일본함대를 찾기 위하여 24일 새벽부터 정찰기를 내보낸 제38기동부대는 곧 레이테 만을 향하여 달려오는 2개의 일본함대를 발견했다.
핼시 제독은 그 중에서 전함 5척을 보유하고 샌배너디노 해협을 향하여 시부얀 해를 항진 중인 제1유격부대 주대를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루존 앞바다에 있던 셔먼 소장의 제38.3전단과 레이테 만에 있던 데이비슨 소장의 제38.4전단에게 샌배너디노 해협에 있던 보간 소장의 제38.2전단에게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울리시를 향해 필리핀 동방 1,100km 해상을 항진하고 있던 맥케인 제독의 제38.1전단에게 울리시 행을 중단하고 현재 위치 주변에서 급유를 받은 후에 다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제38.4전단의 함재기들이 제1유격부대 지대에게 한번의 공격을 가한 다음에 보간 소장의 제38.2전단에 합류하기 위하여 북상하면서 제1유격부대 지대가 제38.4전단의 공격권에서 벗어나게 되자 제7함대 사령관 킨케이드 중장은 구식전함 중심의 포격지원함대를 이끌고 있던 올덴도프 소장에게 수리가오 해협에 나아가 제1유격부대 지대를 저지하도록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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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마리애나 제도를 점령하기까지의 과정에서 강력한 일본군 기지였던 트럭 환초와 팔라우 제도를 공격하여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하자 통합참모본부에서는 전쟁을 더 빨리 진행시키기 위하여 전략을 재검토했다.
통합참모본부가 내놓은 안 중 가장 대담한 계획은 마리애나 제도에서 항공모함의 엄호 하에 이오지마가 있는 보닌제도로 북상한 후 그곳을 발판으로 삼아 바로 일본본토를 침공한다는 것이었다.

니미츠 제독과 맥아더 장군은 둘 다 이러한 위험천만한 계획에 반대했다.
맥아더 장군은 보겔캅 반도와 모로타이를 경유하여 민다나오 섬과 레이테 섬에 상륙한 후 루존 섬에 상륙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니미츠 제독의 계획은 레이테 섬까지는 진공하되 루존 섬은 우회하여 대만과 중국 연안 또는 오끼나와를 거쳐 규슈와 혼슈 방향으로 북진한다는 것이었다.

통합참모본부는 또다시 조정에 실패하여 일단 1944년 12월 20일에 레이테 섬에 상륙한다는 것까지만 정해놓고 다음에 루존에 상륙할 것인지, 대만으로 갈 것인지는 나중에 결정하기로 했다.
레이테 상륙 이전까지 태평양 함대는 팔라우 제도의 펠렐류 섬과 앙가우르 섬, 야프 환초와 울리시 환초를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남서태평양해역군은 뉴기니아와 민다나오 중간에 있는 모로타이, 탈라우드 섬을 거쳐 민다나오 섬에 상륙한 후 태평양함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중부 필리핀의 레이테 섬에 상륙하기로 되어 있었다.

1944년 8월 26일에 제58기동부대에서 제38기동부대로 이름이 바뀐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는 29일에 보닌 제도와 팔라우 제도, 야프 섬을 폭격하기 위하여 에니웨톡 환초를 떠났다.
제5함대의 사령관이 스프루언스 제독에서 핼시 제독으로 바뀌면서 제3함대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제58기동부대는 제38기동부대로, 제5상륙작전 부대는 제3상륙작전 부대로, 제5상륙군단은 제3상륙군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투함대의 사령관을 해임조치가 아닌 사유로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태평양함대의 이러한 독특한 방식은 1944년 5월 5일과 6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니미츠와 킹의 회담에서 해군본부의 작전참모인 쿠크 소장이 제안한 것으로 이제 수비군의 위치로 전락한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핼시 제독의 능력을 활용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실제로 이 방식은 훌륭하게 작동했다.
태평양함대가 이러한 방식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대규모의 전투함대를 훌륭하게 지휘할 수 있는 스프루언스 제독과 핼시 제독이라는 걸출한 제독을 2명씩이나 가지는 행운을 누렸기 때문이었다.

1944년 7월 10일에 제8대 함장인 가드너 함장의 뒤를 이은 Thomas J. Hamilton대령을 제9대 함장으로 맞아들인 엔터프라이즈는 진주만에 돌아가서 7월 29일까지 수리를 받고 그 기간동안 새로이 제20비행전대를 받아들였다.
7월 29일에 수리를 마친 엔터프라이즈는 제10대 함장인 Cato D. Glover 대령의 지휘 하에 진주만을 떠나 에니웨톡으로 돌아왔다.
엔터프라이즈는 정규항공모함 프랭클린, 경항공모함 샌야신토, 벨로우드와 함께 Ralph E. Davison 소장의 지휘 하에 제38.4전단을 형성한 후 다른 전단들과 헤어져 북상, 보닌제도를 폭격했다.
제38.4전단은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 매일 보닌제도의 이오지마와 치치지마를 폭격하여 비행장을 비롯한 지상시설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2척의 수송선을 격침했다.
9월4일에 남하하여 사이판 근해에서 급유를 받은 제38.4전단은 9월 5일에 사이판을 떠나 제38기동부대에 합류했다.

제38기동부대는 9월 6일부터 8일까지 팔라우 제도를 폭격했다.
9월6일에 핼시 제독의 기함인 고속전함 뉴저지가 제38.2전단에 합류했다.
제38기동부대는 9월8일에 민다나오 섬을 폭격하기 위하여 팔라우 제도를 떠났다.
제38.4전단은 9월 15일에 실시되는 펠렐류 섬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이 지역에 남았다.

제38기동부대는 9월 9일과 10일 양일간에 걸쳐 민다나오 섬과 다바오 섬을 폭격하여 이 지역의 비행장에 피해를 입히고 6척의 수송선을 격침했다.
9월 11일에 해상에서 연료보급을 받은 제38기동부대는 9월 12일부터 14일까지 중부 필리핀의 비사얀, 세부, 네그로스 섬 등지를 맹폭하여 지상의 비행장에 큰 피해를 입히고 20척의 수송선을 격침했다.
이 공격에 대한 일본군의 저항은 미약했으며 또한 해상에 추락했다가 부근의 어민에게 구조된 조종사가 레이테 만에는 일본군이 없다는 말을 어민에게 듣고서 핼시 제독에게 보고해왔다.

핼시 제독은 이 지역의 일본군이 완전 무방비 상태라는 결론을 내리고 니미츠 제독에게 전보를 보내어 이미 결정된 상륙작전들을 미루고 대신 12월 20일로 예정된 레이테 섬 상륙을 앞당기자고 제안했다.
니미츠 제독은 이미 결정된 상륙작전 중 팔라우 제도와 울리시에 대한 작전은 취소하지 않았다.

그러나, 야프 상륙작전에 쓰일 제3상륙작전부대와 육군제2군단을 제38기동부대를 제외한 제3함대의 모든 함정들과 함께 남서태평양해역군에 넘겨서 레이테 상륙을 앞당겨 실시하면 어떻겠느냐 하는 제안을 9월 11일부터 퀘벡에서 미영 정상회담을 하고 있던 통합참모본부로 보냈다.
자체적으로 필리핀에 대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던 남서태평양해역군에서는 레이테에 일본군이 없다는 핼시 제독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제3함대가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다면 레이테 상륙을 조기에 실시하는데 찬성했다.
그리하여 레이테 상륙은 원래 예정되었던 12월 20일에서 두달 앞당겨진 10월 20일에 실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원래 제5함대가 제3함대로 바뀌면서 제5함대 사령관 뿐 아니라 제58기동부대 사령관, 제5상륙부대 사령관, 제5상륙군단장 등도 모두 교체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1943년 8월부터 사령관을 맡아온 다른 지휘관들과 달리 미처 제독만은 1944년 1월부터 제58기동부대의 지휘를 맡았다는 이유로 레이테 상륙이 끝난 후인 10월 30일에 맥케인 제독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랬지만 진짜 이유는 남서태평양해역군의 레이테 상륙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제38기동부대가 만에 하나 커다란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맥아더 장군 앞에서 태평양함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규모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다루는 능력이 아직 검증되지 않은 맥케인 제독에게 맡기는 모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지난 8개월 동안 이미 실력이 충분히 검증된 미처 제독에게 이 중요한 일을 맡기는 것이 좋겠다는 공감대가 태평양함대의 수뇌부 사이에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불과 8개월 전 마셜 작전에 실패하면 사령관 자리에서 쫓겨난다는 조건 하에 전임 사령관인 파우널 제독이 제5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의 항공관계 고문이라는 직함을 달고 해상까지 따라나와서 버티고 있는 굴욕적인 상황에서 제58기동부대의 지휘를 시작했던 미처 제독으로서는 실로 감개가 무량한 일이었다.  
맥케인 제독은 이번 작전에서 5척의 항공모함으로 구성되어 제38기동부대의 4개 전단 중에서 단연 가장 강력한 전력을 가진 제38.1전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제38.1전단은 9월 13일 오후에 남서태평양해역군의 모로타이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제38기동부대를 떠났고, 14일에는 남하하는 도중 다바오를 폭격하여 비행장 시설에 피해를 입히고 소형함정 1척을 격침한 후 모로타이에 도착하여 15일에 실시된 모로타이 상륙작전을 지원했다.
15일에는 동쪽의 팔라우에서도 상륙작전이 실시되어 이 지역에 남아있던 제38.4전단의 지원 하에 앙가우르에 육군제81사단의 2개 연대가 상륙하여 1,600 명 정도의 일본군을 간단히 제압했다.
곧 해군건설대대가 비행장을 만들기 시작하여 10월 17일까지 1,800m 짜리 활주로를 가진 비행장을 건설했다.
간단히 점령된 앙가우르와 달리 펠렐류 섬에 상륙한 해병제1사단은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힘든 전투 중의 하나를 치루어야 했다.
굴 속에 숨은 1만여명의 일본군을 전멸시키기 위하여 해병제1사단과 앙가우르에서 증원되어 온 육군제81사단이 꼬박 2달 이상 걸려 11월 25일에야 섬을 완전히 점령했다.
미군은 펠렐류 작전에서 약 2,000 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많은 전사자를 내었어도 대부분 그 필요성을 인정받았던 다른 작전들과 달리 이 펠렐류 작전은 그만한 희생을 무릅쓸 가치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펠렐류에서 항공지원을 담당하던 제38.4전단은 18일에 펠렐류를 떠나 21일에 마누스 섬의 시들러 항에 도착했다.

한편 모로타이 상륙작전을 지원했던 제38.1전단이 제38기동부대에 합류하자 19일에 해상에서 급유를 마친 제38기동부대는 20일부터 24일까지 루존 섬을 맹폭하여 니콜스 비행장과 클라크 비행장에 큰 피해를 입히고 마닐라 항과 수빅 만, 그리고 루존 섬 근해에서 구축함 1척, 소형함정 11척, 유조선 12척, 수송선 29척을 격침했다.  

23일에는 육군의 1개 연대가 무방비 상태의 울리시 환초에 상륙하여 30 x 15 km 이상의 크기를 가지고 700 척 이상이 정박할 수 있는 세계에서 4번째로 거대한 초호를 가진 이곳을 접수했다.
곧 해군건설대대와 지원함대가 몰려와서 이곳을 태평양 함대의 훌륭한 전진기지로 바꾸었다.

24일까지 루존을 공격한 제38기동부대는 보급과 급유를 위하여 제38.1전단은 시들러 항으로, 제38.2전단과 제38.3전단은 울리시 환초로 각각 철수했다.
21일에 시들러 항에 들어왔던 제38.4전단은 25일에 시들러 항을 떠나 펠렐류 섬의 전투를 지원했다.

보급과 급유를 마친 제38기동부대는 정박지를 떠나 10월 8일에 보닌 제도의 남서쪽에서 집결하여 해상급유를 마친 후 일로 오끼나와를 향하여 항진했다.
제38기동부대는 10월10일에 오끼나와를 공습하여 비행장에 피해를 입히고 나하 항과 오끼나와 근해에서 소형함정 13척과 수송선 16척을 격침했다.
11일 오전에 재급유를 실시한 제38기동부대의 제38.1전단과 제38.4전단은 오후에 제38.2전단과 제38.3 전단이 재급유를 받는 동안 북부 루존을 공격하여 비행장에 피해를 입히고 호위함 1척과 수송선 1척을 격침했다.

제38기동부대는 이어서 12일부터 14일까지 대만을 공격했다.
일본측에서 말하는 대만항공전의 시작이었다.
전투의 양상은 완전히 제38기동부대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극에 가까웠다.
제 38기동부대는 12일 하루만에 일본기 230여 대를 파괴하고, 함대급유함 6척과 수송선 12척을 격침했다.
13일에는 일본기도 반격을 가하여 중순양함 캔베라가 어뢰에 맞아서 대파되었다.
제38기동부대는 14일에도 계속하여 대만을 맹타했고 일본기들도 결사적인 반격을 가하여 경순양함 휴스턴이 어뢰 1발에 기관실을 직격당하여 수리를 위하여 울리시로 끌려갔다.
또한 정규항공모함 핸콕과 경순양함 레노가 피격된 상태에서 충돌공격을 감행한 일본기들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대만항공전에서 공습을 마치고 착함하는 함재기를 바라보는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 착함 방향의 바로 전면에 많은 항공기와 인원들이 몰려있는 이 사진은 비행갑판의 본질적인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1944년 10월 12일)


제38기동부대는 15일에는 루존을 공격했다.
일본기들은 또다시 결사적인 반격을 가하였으나 정규항공모함 프랭클린에 약간의 피해를 입히는데 그쳤다.
제38기동부대는 16일에는 지상공격은 그만두고 해상의 일본함정들을 수색하여 1척을 격침시켰다.
이로써 일본이 대만앞바다의 항공전이라고 부르는 전투가 끝났다.
도꾜방송은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하여 항공모함 11척, 전함 2척, 순양함 1척, 기타 13척을 격침하고, 일본기는 312대를 상실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기간동안 격침된 미국함정은 한 척도 없었으며 다만 중순양함 캔베라와 경순양함 휴스턴이 어뢰에 맞아 대파되고, 정규항공모함 프랭클린과 핸콕, 경순양함 레노, 구축함 2척이 소파되었으며 79대의 항공기가 격추당했다.
일본기의 피해는 다수의 항공모함 함재기를 포함하여 600 여대였다.

대만항공전에서 엔터프라이즈의 제20항공대에서는 3명이 전사하고 4명이 포로가 되었는데 그 중의 2명은 1945년 6월 19일에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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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4월 초에 팔라우에서 싱가포르로 이동해 온 일본연합함대의 주력은 분초를 아껴가며 훈련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평균 훈련기간이 1-2개월 밖에 안되는 파일럿이 대부분인 일본함대 입장에서는 파일럿의 훈련이야말로 그 어떤 일보다도 시급한 일이었으나 일본군에게는 불행하게도 시간이 없었다.
5월 11일에 제1기동함대는 미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하여 타위타위로 이동했는데 그곳에는 지상비행장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항공훈련을 항공모함에서 실시해야만 했다.

그런데, 부근 해역에 미국의 잠수함들이 모여들어서 구축함 몇 척을 격침시켜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항공모함이 훈련을 위하여 바다에 나가지 못하게 막았으므로, 제1기동함대의 파일럿들은 더 이상 훈련을 할 수 없었다.
5월 15일에는 일본 내해에서 출발한 항모 준요, 히요와 대형전함 무사시가 타위타위에 도착했다.
5월27일에 남서태평양해역군이 남쪽의 비악 섬에 상륙하자 수비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6월 10일에 대형전함 야마또, 무사시를 포함한 우가끼 마또메 소장의 제1전함전단을 할마헤라 섬으로 파견했다.

 

6월 11일부터 미국함대가 마리애나 제도를 폭격하고 13일에 전함들이 사이판을 포격하자 미국이 사이판에 상륙할 예정임을 알아차린 제1기동함대는 타위타위를 떠나 14일 오후 4시에 필리핀의 귀마라에 도착하여 급유를 실시했다.
당시 일본함정들은 보르네오의 타라칸 유전에서 채굴된 원유를 사용했는데 이 원유는 품질이 상당히 좋아서 불순물만 제거하면 별도의 정유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함정의 보일러 내에서 별 문제없이 잘 연소되었다.
하지만 정유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니만큼 대량의 휘발성 물질을 함유하여 대단히 불안정한 상태인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제1기동함대는 도꾜의 연합함대사령부로부터 정식으로 ‘아’ 호 작전이 발령되자 15일 10시에 귀마라를 출발하여 필리핀 동쪽 해상에서 할마헤라 섬에서 급히 되돌아 온 제1전함전단과 합류한 다음 마리애나 제도로 향했다.

17일 저녁에 오자와 중장은 제1기동함대에 전투대형으로 전개하도록 명령했다.
제1기동함대는 크게 A, B, C 3개의 부대로 나누어졌는데 A 부대는 정규항모 다이호, 쇼가꾸, 즈이가꾸로 이루어져 오자와 중장이 직접 지휘하고 있었고, B 부대는 정규항모 준요, 히요와 경항공모함 류호로 이루어져서 조시마 다까지 소장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C 부대는 구리따 다께오 중장의 지휘 하에 경항공모함 3척과 4척의 전함을 포함한 강력한 수상함정을 포함하였으며 항공작전은 오바야시 수에오 소장이 맡았다.
제1기동함대의 전투대형은 A 부대와 B 부대가 불과 8km 떨어져 사실상 하나의 함대와 비슷한 형태로 주력을 형성하고 경항공모함 1척씩을 중심으로 3개의 소부대로 편성된 C 부대가 주력의 160km 앞에 진출하여 미함재기에 대한 방벽을 형성했다.

제58기동부대는 크게 5개의 전단으로 나뉘어져 뒤집어진 'F' 형태로 진형을 형성했다.

 

제1기동함대는 정규항공모함 5척, 경항공모함 4척, 전함 5척, 중순양함 11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27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제로기 221대, 급강하폭격기 113대, 뇌격기 96대 등 총 430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58기동부대는 정규항공모함 7척, 경항공모함 8척, 전함 7척, 중순양함 8척, 경순양함 13척, 구축함 69척등 총 112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함재기의 숫자는 전투기 465대, 급강하폭격기 233대, 아벤저 193대 등 총 891대였다.
제58기동부대는 6월6일에 마주로를 출발할 때에는 902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마리애나 제도 공격 중에 11대의 헬캣을 상실하여 891대가 되었다.
일본의 파일럿들은 C 부대의 파일럿들이 평균 3개월, A 부대와 B 부대는 평균 2개월 정도의 비행경력을 가졌고 실전경험은 거의 없는 풋내기들인데 비하여 미군의 파일럿들은 대부분 2년 이상의 비행경력과 300 시간 이상의 전투비행시간을 기록한 베테랑들이었다.

18일 오후에 미국함대의 위치를 확인한 제1기동함대의 오자와 제독은 19일 아침에 미함대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오자와 제독은 일본기들의 긴 항속거리를 활용하여 미함재기의 행동반경 밖에서 공격하는 아웃 레인지 작전을 구상했다.

결전의 날인 19일 오전 5시 50분, 제58기동부대의 동방으로 20km 떨어져서 레이더 경계를 맡고 있던 구축함 Yarnall 과 Stockham이 폭탄을 장비한 5-6대의 제로기에게 공격을 당했다.
6시에는 함대의 대공포화가 1대의 발 급강하폭격기를 격추했다.
6시 30분에 괌 섬의 상공에 몇 대의 항공기가 떠 있는 것이 레이더에 잡히자 벨로우드의 CAP 세력에게 조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7시 20분에 괌 섬에 도착한 벨로우드의 CAP 세력은 수많은 일본기들이 이륙하는 것을 보고는 지원을 요청하여 캐봇, 요크타운, 호넷의 헬캣들이 몰려들었지만 일본기들은 도망가버리거나 오로테 비행장에 재빨리 착륙하여 위장된 격납고에 숨어 버렸다.
그때 야프 섬에서 괌으로 증원되어 오던 일본기들이 괌 섬의 130km 남쪽에서 포착되었다.
33대의 헬캣이 즉각 공격을 가하여 제로기 33대와 폭격기 5대를 격추했다.
전투 소식을 들은 제58기동부대의 각 전단은 각각 12대씩의 헬캣을 추가로 파견했다.
제58기동부대는 460대가 넘는 헬캣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80여대의 헬캣을 파견하고도 아직 380대 이상의 헬캣이 남아 있었다.

한편 새벽에 정찰기를 내보내어 제58기동부대의 위치를 확인한 제1기동함대에서는 오전 8시 30분에 C 부대에서 71대로 편성된 제1차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제58기동부대의 레이더가 240km 거리에서 제1차 공격대를 발견한 시간은 오전 9시 59분이었다.
즉시 괌 섬의 오로테 비행장 상공에서 전투중이던 헬캣에게는 ‘Hey, Rube’(미국의 서커스단이 손님을 모으는 소리라고 한다.)라는 소환명령이 떨어졌으며 항공모함들은 즉시 함재기들을 출격시키기 위하여 방향이 불어오는 동쪽으로 변침하여 최대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10시 19분에 갑판에서 대기 중이던 헬캣에게 이륙명령이 떨어졌고 10시 23분부터 갑판에서 대기 중이던 헬캣이 이륙하기 시작하여 이후 8분 이내에 항공모함 1척마다 평균 12대씩 총 180여대의 헬캣이 60여대의 기존 CAP 세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이함했다.
여기에다가 괌 섬에서 돌아온 헬캣들이 합세하자 71대인 일본기를 요격하는 헬캣의 숫자는 무려 320여대에 달했다.
이어서 급강하폭격기들과 아벤저들이 항공모함 피탄시 유폭을 막기 위하여 항공모함을 떠나서 동쪽으로 가서 큰 원을 그리며 다음 명령을 기다리면서 대기했다.

10시 25분부터 훗날 ‘마리애나의 칠면조 사냥’('The Great Marianas Turkey Shoot')이라고 불리게 되는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졌다.
10시 57분에 끝난 제1차 공격에서 71대의 일본기 중에서 44대가 격추되었고 그중에 25대가 전투기에 의하여 격추되었으며 미군은 헬캣 1대가 격추되었다.
일본기들은 10시 49분에 제58.7전단의 사우스다코타에게 1발의 폭탄을 명중시켜 27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이 폭탄은 이날 일본기들이 기록한 유일한 명중탄이었다.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제10전투비행대는 제1차 전투에서는 단 1대의 격추도 기록하지 못했다.

일본의 제2차 공격대는 다이호와 즈이가꾸의 함재기들로 총 129대가 출격했으나 제로기 1대는 다이호로 달려오는 어뢰를 막기 위하여 자폭했다.

게다가, 이 공격대는 C 함대 상공을 지나다가 오인사격을 받아서 2대가 격추되었고, 8대가 큰 피해를 입어서 돌아갔으며 또다른 9대가 엔진고장으로 귀함하는 바람에 실제로 공격에 참가한 것은 109대였다.
제2차 공격대가 제58기동부대의 레이더에 잡힌 것은 제1차 공격이 끝난 10분 후인 11시 7분, 거리는 180km 였다.
다시 기존의 CAP 세력에 더하여 약 180대의 헬캣이 급발진하여 일본기와 교전했다.
오전 11시 39분에 기동부대 전방 100km 지점에서 에섹스 소속의 헬캣들이 일본기와 교전하면서 시작되어 오후 12시 15분에 끝난 제2차 공격에서 일본기들은 제58.7전단의 고속전함 인디애나와 제58.2전단의 항모 벙커힐과 와스프에  1발씩의 지근탄을 가하여 2명의 전사자를 기록한 것이 전부였다.
그 댓가로 일본기들은 78대가 격추되고 31대가 귀함하는데 성공했다.
16대의 헬캣이 출격했던 엔터프라이즈의 제10전투비행대는 제2차 공격에서 2대의 질 뇌격기와 1대의 케이트 뇌격기를 격추시키는데 그쳤다.
사실 제52.3전단의 항공관제를 담당하는 엔터프라이즈의 항공관제장교가 헬캣들을 지나치게 전단 가까이에 배치하는 바람에 제10전투비행대 뿐만 아니라 전단 전체의 성적이 영 좋지 않았다.

오전 10시 23분에 47대로 이루어진 제3차 공격대가 B 부대를 출발했다.
이 공격대는 중간에 방향을 잃어서 제58기동부대의 전방을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가로지르다가 제58.4전단을 발견하고 공격하려고 남동쪽으로 변침한 직후 40여대의 헬캣에 공격당하여 7대가 격추되자 공격을 포기하고 즉시 모함으로 도주했다.

오전 11시 30분에서는 A 부대의 쇼가꾸와 B 부대에서 출격한 82대로 편성된 마지막 공격대인 제4공격대가 출격했다.
이 제4차 공격대는 중간에 3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18대로 형성된 한 그룹은 항공모함으로 돌아가다가 헬캣의 요격에 걸려 9대가 격추되고 9대가 살아 돌아갔다.
15대로 이루어진 작은 그룹 하나는 로타를 향해 가다가 제58.2전단을 발견하고 오후2시 21분에 공격을 가했으나 헬캣의 방어망에 걸쳐 9대가 격추되고 6대가 헬캣의 방어망을 뚫고 겨우 폭탄을 투하하여 항공모함 와스프와 벙커힐, 경순양함 모빌에 각 1발의 지근탄을 기록했다.
이 6대도 이탈 도중에 격추되어 이 그룹의 15대는 전멸했다.
49대로 이루어진 큰 그룹은 괌 섬으로 향했는데 엔터프라이즈의 2개 편대 8대를 비롯하여 항공모함 요크타운, 카우펜스, 에섹스, 호넷의 헬캣들이 괌 섬까지 쫓아왔다.
오후 3시 10분에 시작된 이날의 마지막 공중전에서 일본기들 중 30대가 착륙하기 전에 격추되었고 19대가 겨우 착륙하였으나 지상에서 공격을 받아 모두 파괴되었다.
괌의 오로테 비행장 상공에서 벌어진 이 공중전에서 엔터프라이즈의 항공대는 15대의 일본기들을 격추하거나 지상에서 파괴했다.
엔터프라이즈의 항공대는 이날 18대의 일본기를 격추하고 자신들은 1대의 헬캣이 격추되었다.

4차에 걸친 일본함재기의 공격을 막아낸 제58기동부대는 괌섬의 오로테 비행장을 공격하여 기지의 기능을 완전히 정지시켰다.
그리하여 마리애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불리는 공중전이 끝났다.

이날 제1기동함대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미국의 잠수함 중 알바코어가 다이호에 1발의 어뢰를, 그리고 카발라가 쇼가꾸에 4발의 어뢰를 명중시켜 각각 격침한 것이었다.
이중에서 다이호는 어뢰로 인하여 벌어진 함정용 연료 파이프의 균열에서 새어나온 휘발성 가스가 인화하여 2차례의 대폭발을 일으킨 후 침몰했다.
함재기 22대가 2척의 항모와 함께 상실되었다.

이 날의 전투에서 제1기동함대는 제1차 71대, 제2차 129대, 제3차 47대, 제4차 82대 등 총 329대를 출격시켜 제1차에서 44대, 제2차에서 98대, 제3차에서 7대, 제4차에서 73대등 총 222대를 상실했다.
또한 수상비행기 45대 중 23대를 상실하였고, 육상기 60여대도 파괴되었다.
그리고 잠수함에 의하여 격침된 2척의 항공모함에 실려있다가 상실된 22대의 함재기를 합치면 이날 일본기의 손실은 합계 330 여대에 달했다.
그리하여 이날의 전투가 끝났을 때 제1기동함대에서 작전 가능한 항공기는 130대에 불과했다.   
제58기동부대의 손실은 헬캣 30대에 지나지 않았고 함정의 피해는 사우스다코타가 1발의 직격탄을 맞아서 소파되었고 항공모함 와스프와 벙커힐이 각 2발씩, 전함 인디애나와 경순양함 모빌이 각 1발씩의 지근탄을 맞아서 전체적으로 장교 4명, 수병 27명이 전사했다.

오자와 제독은 저녁이 되자 패배를 인정하고 서쪽으로 퇴각했다.

제58기동부대는 구축함의 연료가 부족하다고 보고해 온 제58.4전단에게 사이판 교두보 엄호 임무를 맡겨서 남겨두고 3개의 항공모함 전단이 1개의 전함 전단을 앞세우고 일본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다음날인 20일 오후 3시 42분에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가 제58기동부대에서 430km 떨어진 위치에서 급유 중이던 일본제1기동함대를 발견했다.
오후 4시 21분부터 85대의 헬캣, 51대의 헬다이버, 26대의 돈틀레스, 54대의 아벤저 등 총 216대로 이루어진 공격대가 제58기동부대를 떠났다.
엔터프라이즈에서는 12대의 헬캣, 12대의 돈틀레스, 그리고 5대의 아벤저가 공격대에 참가했다.
이번에도 불과 15분 만에 이함을 모두 마친 공격대는 연료를 한방울이라도 아끼기 위하여 비행 중 정렬방식으로 목적지로 향했다.
그런데 오자와 제독은 미군기에게 발견되는 순간 휘하 함대를 A 부대, B 부대, C 부대의 3개 소부대와 유조대 등 6개의 부대로 나누어진 상태로 북쪽에서 서쪽에 걸쳐 반원형으로 펼쳐진 채 최고속력으로 달아나도록 명령했다.

 

따라서, 막상 미군기가 오후 7시경에 일본함대 상공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530km 이상을 비행한 후였다.
80대쯤 되는 제로기가 도전해왔으나 헬캣에 의하여 65대가 격추되면서 간단히 제압되었다.
헬캣들은 수상정찰기 15대도 격추했다.
급강하폭격기와 아벤저들이 제1항공함대를 공격하여 정규항공모함 히요와 함대급유선 겐요마루, 세이요마루를 격침하고, 정규항공모함 준요, 경항공모함 지요다, 유조선 하야시를 대파하고 정규항공모함 즈이가꾸, 경항공모함 류호와 전함 하루나를 소파했다.
정규항공모함 히요는 이날 출격한 아벤저 중 유일하게 어뢰로 장비한 벨로우드의 제24뇌격비행대 소속 9대의 아벤저에게 공격받아 1발의 항공어뢰를 함미에 맞은 후 화재가 발생했는데 다이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안정한 함정용 연료의 휘발성분이 대폭발을 일으켜 침몰했다.
미군의 공격대는 공습과정에서 20대가 격추되었고, 80대가 귀환과정에서 연료부족으로 해상에 불시착했다.
이 공격에서 엔터프라이즈 항공대는 1대의 헬캣과 1대의 돈틀레스를 상실했다.

 

(제58기동부대에서 출격한 공격대를 맞이하여 필사적으로 회피운동 중인 일본함대. 1944년 6월 20일)

 

이틀간의 필리핀 해전에서 일본군은 제1기동함대의 함재기 395대를 비롯하여 총 467대의 항공기를 상실했고 445명의 조종사를 잃었다.
430대에 달하던 함재기들 중 20일 저녁에도 작전 가능한 항공기는 35대에 지나지 않았다.
함정의 피해는 정규항공모함 3척과 함대급유선 2척이 격침되었다.
제58기동부대는 이틀간의 전투에서 130대의 항공기를 상실했고 36명의 조종사와 40명의 항공기 승무원이 전사했다.
함정 피해는 고속전함 사우스다코타가 소파되었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사상최대의 함대항공전이자 태평양 전쟁의 승부를 사실상 확정지은 전투인 필리핀 해전이 끝났다.
엔터프라이즈는 필리핀 해전을 포함한 약탈작전 기간 동안 함정승무원 1명과 항공기 승무원 7명 등 총 8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6월 15일에 사이판 섬에 상륙한 북부공격부대는 작전 중간에 홀랜드 스미스 해병중장이 육군제27사단장 랄프 스미스 소장을 해임하는 파란을 겪으면서도 차근차근 전진하여 7월 9일에 이 섬을 완전히 장악했다.
사이판 함락의 여파로 일본에서는 7월 18일에 전쟁을 일으켰던 도조 내각이 붕괴하고 고이소 내각이 출범했다.
남부공격부대는 7월 21일에 괌 섬에 상륙하여 1주일 만에 점령했고, 사이판을 점령한 북부공격부대는 7월 24일에 티니안 섬에 상륙하여 8월 1일에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사이판, 티니안, 괌 섬에는 대규모의 B-29 기지가 건설되어 그해 11월 24일에 111 대의 B-29 기가 도꾜 폭격을 실시한 것을 시작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 전역에 무시무시한 불의 재앙을 내렸고, 1945년 8월 6일에는 티니안 섬을 출격한 에놀라게이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된다.

제58기동부대는 제1기동함대를 물리친 후에 6월 22일에 에니웨톡에 가서 급유와 재정비를 한 다음 8월 5일까지 마리애나 제도와 보닌 제도를 오가면서 폭격과 항공지원임무에 임했다.
8월 15일에 정식으로 괌 섬의 항공엄호 임무에서 해제된 제58기동부대는 8월 26일에 핼시 제독에게 지휘권이 넘어가면서 제38기동부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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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5월 25일부터 31일까지 마리애나 제도 침공작전인 약탈자 작전에 참가하는 통합원정부대(Joint Expeditionary Force, TF 51)가 제5상륙작전부대 사령관인 켈리 터너 중장의 지휘 하에 진주만을 출항했다.
통합원정부대는 상륙부대인 해병제2사단, 제3사단, 제4사단과 해병제1임시여단 및 육군제27사단과 제77사단등 5개 사단과 1개 여단, 육군제24군단의 포병대 등 총 127,571 명의 병력과 이들을 수송하는  110 척의 수송선, 337 척의 상륙함 및 소해함을 비롯한 각종 보조함정들, 그리고 소형의 로켓포함으로부터 호위항공모함과 구형전함에 이르기까지 88척에 달하는 화력지원함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2개의 부대로 나뉘어졌는데 해병 제2사단, 제4사단과 육군제27사단 및 제24군단 포병대로 구성된 북부공격부대는 터너 제독의 직접 지휘 하에 사이판 섬과 티니안 섬에 상륙할 예정이이었으며, 해병 제3군단(해병제3사단 + 제1임시여단)과 육군제77사단으로 이루어진 남부공격부대는 코놀리 소장의 지휘 하에 괌 섬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상륙작전시 예상되는 일본연합함대의 공격으로부터 통합원정부대를 보호하고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미처 중장의 제58기동부대가 6월6일에 마주로를 떠나서 통합원정부대보다 한발앞서 마리애나 제도로 향했다.
이러한 통합원정부대와 제58기동부대는 모두 제5함대 사령관인 스프루언스 대장의 지휘를 받았다.

 

(북부공격부대의 편성표. http://www.ibiblio.org/hyperwar/USA/USA-P-Marianas/img/USA-P-Marianas-p34.jpg )



한편 팔라우 공습 기간 중에 다바오로 비행하다가 순직한 고가 제독의 후임으로 연합함대 사령관이 된 도요다 소에무 대장은 예상되는 미국의 공격에 대비하여 ‘아’ 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전임 고가 사령관의 Z 계획을 약간 수정한 이 계획에 따르면 캐롤라인 제도, 마리애나 제도, 보닌 제도를 연결하는 소위 ‘절대 방어선’을 설정하고, 이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미군의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새로 정비한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투입한 ‘결전’을 감행하여 단번에 전세를 만회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항공모함 기동부대에 의한 소위 ‘결전’에 앞서 기지항공대와 잠수함이 미리 미국함대에 타격을 가하여 그 세력을 약화시키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이러한 작전 개념에 따라 일본연합함대는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하여 연합함대의 거의 모든 수상함전력을 집중시킨 제1기동함대를 새로이 편성하여 그 사령관에 당시 일본해군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받고 있던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을 임명했다.
특기할만한 점은 본질적으로 항공모함 기동부대인 제1기동함대에 대형전함 야마또, 무사시를 비롯한 일본의 주력전함들이 대부분 포함된 사실이다.
이것은 드디어 일본연합함대가 시대착오적인 개념인 전함에 의한 함대결전을 포기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제1기동함대의 전면에서 미국함대를 공격하여 결전을 앞두고 미국함대를 약화시킬 임무를 띄고 있던 일본잠수함들은 참으로 허망하게 무력화되었다.
일본연합함대는 원래 미군의 다음 목표가 팔라우 방면일 것으로 오판하여 그 지역에 25척의 잠수함을 풀어놓았다.

그런데 일본해군은 초계시 잠수함들을 일정한 패턴에 따라 전개시키는 매우 나쁜 버릇이 있었다.

일본해군 잠수함대의 실무자들이 이러한 전개 방식의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미해군은 결국 일본해군의 이런 버릇을 파악하여 대잠작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는데, 그 중에서 호위구축함인 DE-635 England 가 올린 전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즉 1944년 5월 18일에 일본잠수함을 잡으러 푸비스 항을 출항한 잉글랜드는 다음날인 5월 19일에 I-16 호를 격침한 것을 시작으로 22일에 RO-106호, 23일에 RO-104 호, 24일에 RO-116 호, 26일에 RO-108 호를 격침함으로써 1주일만에 5척의 잠수함을 격침했다.

이후 폭뢰가 떨어져 마누스 섬에 돌아와서 폭뢰를 싣고 다시 출격한 잉글랜드는 31일에 RO-105 호를 격침함으로써 단 1척의 함정이 불과 12일만에 6척의 잠수함을 격침하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다.(잉글랜드는 6척 모두 단독격침으로 인정받았다.)
12일만에 잠수함 6척을 단독격침한 이 기록은 대잠작전 사상 최고의 기록으로서 잉글랜드는 이때의 공로로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는데 이 표창은 엔터프라이즈도 미드웨이 해전, 동부솔로몬 해전, 산타크루즈 해전 같은 굵직굵직한 해전들을 치르고 난 이후인 1943년에야 겨우 받았던 것이었다.
잉글랜드의 선전이 보여주듯 미해군의 대잠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 이때 일본잠수함 25척 중 17척이 격침당함으로써 필리핀 해전을 앞두고 일본의 잠수함 부대는 사실상 무력화되고 말았다.

 

(일본잠수함 6척을 격침한 기록이 새겨진 DE-635 England 의 득점판. 원래 함교의 좌현 벽에 그려져 있던 것을 1949년에 떼어내어 미해군사관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결전을 담당할 연합함대의 또다른 한 축인 기지항공대로 말하자면 일본군은 고가 사령관 시절의 Z 계획에 따라 1943년 6월부터 태평양방면의 기지 항공대를 제1항공함대로 통합하여 가꾸다 가꾸지 소장의 지휘 하에 두어 조직을 정비하고 ‘결전’에 대비하여 1,500 대의 세력을 갖출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항공기들이 지속적인 미군의 공격에 의하여 소모되는 반면 보충이 예정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막상 미군이 마리애나 제도에 쳐들어 왔을 때 제1항공함대의 총 세력은 560대 정도에 불과하여 목표대수의 1/3 을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 항공기들 중 마리애나 제도에는 136대 밖에 없었다.(미군이 쳐들어 오자 다른 지역의 항공기 100여대를 급거 불러모아서 필리핀 해전에 참가한 기지항공대는 약 250대이다.)

1944년 6월 10일, 일본항공기의 초계권 바로 바깥에서 최종 급유를 마친 제58기동부대는 급유선들을 떼어버리고 마리애나 제도로 접근했다.

11일 정오 경에 미처 중장의 기함인 항공모함 벙커힐 함상에서 열린 작전회의에서 12일 새벽부터 공습을 시작한다는 원래 계획에 대하여 일부 참모들이 새벽부터 공습하는 제58기동부대의 공습패턴이 잘 알려져 있으므로 이번엔 오후에 기습을 실시하자고 건의했다.

미처 제독이 이 건의를 수용함으로써 오후 1시에 폭탄을 장착한 213대의 헬캣이 구조용 고무보트를 실은 10대의 헬다이버 급강하폭격기를 대동하고 제58기동부대의 비행갑판을 떠났다.
이때 총 223대에 달하는 공격대가 불과 10분만에 15 척의 항공모함에서 이함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항공모함  1척당 평균 40초에 한대꼴로 함재기를 이함시키는데 성공했다.
미처제독의 뛰어난 지휘 하에서 제58기동부대의 사기와 숙련도는 절정에 달해 있었다.
제1차 공격대가 오후 4시30분에 귀환하자 다시 비슷한 숫자로 이루어진 제2차 공격대가 출격하여 일본군에게 연속하여 맹타를 가했다.
58.1전단과 58.2전단은 괌을 두드렸으며 엔터프라이즈가 소속된 제58.3전단과 제58.4 전단은 사이판과 티니안을 공습했다.

 

미처 제독은 2차례에 걸친 이날 공습으로 일본기 86대를 격추하고 33대를 지상에서 파괴했으며 미군은 전투기 11대를 잃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날 일본기의 피해를 미처 제독에 의해 보고된 119 대보다 더 많은 150 대 정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첫날의 기습으로 기선을 제압한 제58기동부대는 12일에는 총 1,400 소티에 달하는 공습을 실시했다.

제58.1전단과 제58.2 전단은 계속 괌을 공격했다.

제58.3전단과 제58.4 전단도 역시 전날에 이어서 사이판과 티니안을 두드렸을 뿐만 아니라 사이판을 떠나는 수송선단을 발견하고 공격을 가하여 13척을 격침했다.
일본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사이판에서 북서쪽으로 25km 떨어진 해상에서 엔터프라이즈 소속인 제10비행전대 섀넌 맥크러리 중위의 공격을 받아 격침되고 있는 일본군의 유조선. 몇몇 승무원들이 가라앉는 배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하고 있고, 바다로 쏟아진 드럼통 가운데 작은 원형 구명대가 보인다. 생존한 승무원들은 나중에 미해군의 구축함에 구조되어 포로가 되었다. 1944년 6월 12일 공습 당시의 광경이다.)

 

13일에도 여전히 공습은 지속되었고 제58.2전단 소속의 구축함 히칵스는 괌 부근에서 소형 경비정 1척을 격침했다.
제58.4전단은 사이판 근해에서 또다시 11척의 일본수송선을 격침했다.
또한 7척의 고속전함을 보유한 리 제독의 제58.7전단이 사이판을 포격했으나 지상포격이라고는 포나페에서 딱 1번 밖에 해 본 적이 없는 미숙한 사관들 때문에 포격의 효과는 형편없었다.

14일에는 제58.1전단과 제58.4전단이 사이판 부근에서 급유를 받은 뒤 보닌 제도를 폭격하기 위하여 북상했다.
이들은 보닌 제도의 이오지마, 하하지마, 치치지마를 공격하여 일본군이 이들 섬을 통하여 항공기를 증원할 통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날부터 화력지원함대의 구형전함들이 제58.7전단으로부터 해안포격임무를 이어받았다.

사이판 상륙일인 15일에도 공습을 계속한 제58기동부대는 로타 부근에서 일본군의 경비정 한척을 격침했고, 제58.1전단과 제58.4전단은 보닌 제도를 공습했다.
제58.1전단 소속의 구축함 Boyd 와 Charrette 는 일본군 수송선 1척을 격침했다.

16일에 제58기동부대는 로타 부근에서 경비정 1척을, 사이판 부근에서 수송선 1척을 격침했다.
제58.1전단과 58.4전단은 다시 보닌 제도를 폭격한 후 제58기동부대에 합류하기 위하여 남하했다.

17일에는 화력지원함대 소속의 중순양함 위치타와 구축함 11척이 제58기동부대의 대공화력을 보강하기 위하여 제58기동부대에 합류하면서 제58기동부대의 구축함 수가 58척에서 69척으로 늘었다.
이들은 대부분 고속전함 전단인 제58.7전단에 집중배치되었다.

18일에는 보닌 제도에서 남하한 제58.1전단과 제58.4전단이 제58기동부대에 합류했다.
바야흐로 태평양 패권의 향방을 확정지을 대해전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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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기동부대가 트럭 환초를 공습하는 동안 Hill 제독이 이끄는 해병제22연대와 육군제106연대의 2개 대대는 제58.4전단의 엄호 하에 마셜제도의 에니웨톡 환초를 점령하는 집달리 작전(Operation Catchpole)을 실시했다.
‘집달리’란 법원의 판결에 따라 채무자의 물품 등을 압류하는 관리를 가리킨다.

에니웨톡을 방어하는 일본군은 1944년 1월 4일에 상륙한 일본제1상륙여단으로 애니웨톡 섬, 엔게비 섬, 페리 섬에 합쳐서 2,759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하여 미군의 상륙부대는 해병대 5,820명, 육군 4,556 명 등 총 10,376 명이었다.
상륙부대 사령관 힐 제독은 수비군과의 병력비율이 6:1 이상이었던 콰잘레인 환초와 달리 병력비율이 3:1 정도 밖에 안 되므로(미군은 에니웨톡 환초의 일본군을 3,000-3,500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었다.) 목표지점인 엔게비 섬, 에니웨톡 섬, 페리 섬을 차례차례로 점령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2월 17일 새벽 5시부터 구식전함 콜로라도와 중순양함들이 엔게비 섬, 에니웨톡 섬, 페리 섬을 포격하면서 시작된 집달리 작전은 그날 안으로 해병대가 엔게비 섬에 인접한 CANNA 섬와 CAMELLIA 섬을 점령한 후 포병대가 상륙하여 엔게비 섬을 포격하였고,  18일 오전 8시 44분에 736명의 일본군이 지키고 있던 엔게비 섬에 상륙한 해병제22연대의 2개 대대가 오후 6시 30분에 섬을 사실상 장악하면서 반나절만에 제1단계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제2단계인 에니웨톡 섬에는 육군제106연대의 2개 대대가 19일 오전 9시 18분에 상륙하였는데 앞서 엔게비 섬의 경우와는 딴판으로 908 명의 병력을 가진 일본군 수비대에게 전진이 가로막혀 예비대인 해병제22연대의 제3대대를 투입하고서도 실로 53시간 만인 21일 오후 2시 30분에야 섬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점령이 이렇게 늦어지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엔게비 섬에서 잡은 포로를 심문한 결과 에니웨톡의 수비대 숫자가 500 명 정도라는 그릇된 정보를 얻은 힐 제독이 당초 계획과 달리 에니웨톡 섬에 대한 준비포격을 충분하게 실시하지 않았다.
사실 엔게비 섬에 대해서는 1179.7 톤의 포격을 퍼부었고, 제3단계인 페리 섬에도 944.4 톤의 포탄을 쏟아부은 것과는 달리 에니웨톡 섬에는 불과 204.6 톤의 포격만이 가해졌고 게다가 8인치 이상의 대구경 포탄은 단 1발도 없었다.
그리고 엔게비 섬과 페리 섬과는 달리 에니웨톡 섬의 주변에는 포병대가 상륙하여 포격지원을 할 만한 작은 섬이 없었기 때문에 포병대의 지속적이고 효율적인 지원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소부대의 가벼운 반격에도 전 중대가 완전히 얼어붙어서 꼼짝도 못하는 등 에니웨톡 섬에 상륙한 육군제106연대전투단의 전투력이 한심한 수준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증원부대로 참가한 해병대원들이 절실히 느낀 점이었다.
실제로 제106연대전투단이 소속된 육군제27사단의 메이킨 환초 상륙전에서는 전진이 너무나 느린 바람에 제27사단장 랄프 스미스 소장에게 ‘소리를 지르기’ 위하여 상륙했던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이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총질을 해대는 한 중대를 발견하고 그 중대장을 불러

“한번 더 자네 중대의 작전구역에서 총소리가 나면 자네 중대의 모든 무기와 탄약을 몰수하겠다.”

고 호통을 친 적도 있었다.  
게다가 메이킨 환초에서 제27사단이 섬을 빨리 점령하지못하고 우물거리는 바람에 호위항모 리스컴베이가 일본잠수함의 어뢰에 맞아 침몰하면서 전단 사령관을 비롯하여 육군 전사자의 10배 가까운 전사자를 기록하는 참극을 겪었던 해군의 반감이 더해지면서 대번에 제27사단은 훈련도 형편없고 지도력도 엉망이라는 평판이 태평양함대 내에 쫙 퍼졌다.
제27사단에 대한 해병대와 해군의 이러한 극심한 반감은 6개월 후에 벌어진 사이판 상륙작전에서 결국 폭발하여 그 급한 성질 때문에 ‘울부짖는 미치광이(Howling Mad)’라는 별명을 가진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이 제27사단장인 랄프 스미스 소장을 해임함으로써 육군 사단장이 해병대 장군에 의하여 해임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

에니웨톡 섬에서 고전하면서 일본군 포로의 진술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힐 제독은 제3단계인 페리 섬 공략 때에는 당초 예정대로 충분한 준비포격을 실시한 후에 2월22일 오전 9시 8분부터 상륙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일본군 제1상륙여단의 사령부가 있고 1,115명의 병력이 주둔하여 에니웨톡 환초에서 가장 강력한 방어력을 가진 페리 섬에 상륙한 해병제22연대는 질풍같이 섬을 휩쓸어서 상륙한지 10시간 만인 오후 7시 30분에 섬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에니웨톡 환초도 미국의 손에 들어왔다.
집달리 작전 기간을 통하여 미국은 339명의 전사자를 기록했고 일본군은 2,000 명 이상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집달리 작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imkcs0425/60071563718 이하의 연재를 참조)

대단히 성공적이라고 평가된 마셜제도 공략이 끝나자 태평양함대 지휘관들의 어깨에는 그야말로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우선 제5함대 사령관인 스프루언스 중장이 1944년 2월 6일자로 대장으로 진급하여 니미츠 제독과 핼시 제독의 뒤를 이어 태평양함대에서 3번째로 대장계급장을 달았고, 제5상륙부대 사령관인 터너 소장도 사보 해전에서의 참패가 잠시 논란이 되기는 했으나 3월 7일에 중장으로 승진했다.
3월 14일에는 제5상륙군단장인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이 중장 계급장을 달았고, 다시 1주일 후인 3월 21일에는 잠정적으로 제58기동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미처 소장이 중장으로 승진하면서 정식으로 제58기동부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엔터프라이즈가 포함된 제58.1전단은 트럭 대공습을 마친 후 마리애나 제도를 폭격하러 간 나머지 전단들과 헤어져 2월 20일에 마셜 제도의 잴루잇 환초를 폭격한 후 마주로로 향했다.

마리애나 제도에 접근하던 제58.2전단과 제58.3전단은 사이판 섬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의 기지항공대에 발견되어  2월 21일 밤에 4차례에 걸친 공격을 받았으나 레이더와 VT신관을 채용한 함대의 대공포화로 반격하여 자신들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채 일본기 42대를 격추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2월 22일과 23일에 사이판, 괌, 티니안을 공격한 제58기동부대는 일본기 126대를 추가로 격추하거나 지상에서 파괴하고 수송선 4척을 격침했으며 침공에 대비하여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제58기동부대의 공격으로 인하여 합계 168대의 항공기를 상실한 마리애나 제도의 일본군 기지항공대는 공격이 끝난 후에 불과 10여대가 남았을 뿐으로 사실상 전멸하고 말았다.

한편 잴루잇 폭격을 마치고 마주로 환초에서 휴식과 재정비를 마친 제58.1전단은 3월 7일에 제36.1전단으로 이름이 바뀌어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에서 실시하는 에미라우 섬 상륙작전을 엄호하기 위하여 에스피리투산토로 떠났다.
제36.1전단은 해병제4사단의 에미라우 상륙을 엄호하기 위하여 3월 15일에 에스피리투산토를 떠나서 상륙일인 3월20일부터 25일까지 에미라우 앞바다에서 항공엄호를 맡았다.
라바울에 대한 포위망의 일환으로 실시된 에미라우 상륙은 일본군의 방해가 없었기 때문에 평화롭게 실시되었다.
에미라우 섬에 비행장을 건설한 남태평양해역군은 여기서 항공기들을 내보내어 라바울 인근의 캐비엥을 무력화시킴으로써 라바울에 대한 포위망을 한층 더 강화시킬 수 있었다.

 

(에미라우 상륙작전에서 항공기를 이함시키는 엔터프라이즈. 1944년 3월 20일)

3월25일에 에미라우 섬을 떠난 제36.1전단은 3월27일에 다시 58.1전단이 되어 팔라우 제도를 공격하러 가는 제58기동부대에 합류했다.
3월 27일, 팔라우의 남동쪽 900km 해상에서 접근 중인 제58기동부대를 발견한 일본연합함대는 즉시 휘하 함정들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이때 팔라우 주변에 매복하고 있던 미국잠수함 중 1척인 Turney 가 출항하는 대형전함 무사시에 3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그 중 1발을 좌현선수에 명중시켰다.
무사시는 수리를 위하여 구레 군항으로 향했다.
제58기동부대는 3월28일 새벽부터 3월 30일까지 팔라우에 격렬한 공습을 가하여 189대의 일본기를 격추하거나 지상에서 파괴하고 아직까지 항내에 남아있다가 허겁지겁 탈출하던 구축함 와카다께와 함대급유선, 수송선 및 소형함정 등 합계 30척을 격침했다.

 

(팔라우 제도 공습 도중 엔터프라이즈 소속 제10항공전대의 공격으로 폭발하는 일본구축함 와카다케. 1944년 3월 30일)

30일에는 인근의 앙가우르 섬도 공격하여 소형함정 9척을 추가로 격침했다.
제58기동부대는 팔라우 공습에서 27대의 함재기를 잃었다.

그리고 팔라우 폭격의 와중에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고가 제독이 대형비행정에 타고 필리핀의 다바오로 비행하던 중 민다나오 섬 부근에서 악천후로 실종되었고, 다른 비행정에 탔던 참모장 후꾸도메 제독은 해상에 불시착하여 필리핀의 연합군 계열 게릴라들에게 일본연합함대의 방어작전계획이 담긴 극비서류를 뺏겼다.
그리하여 미군은 일본의 방어계획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후꾸도메 참모장은 며칠 후에 일본군 수색대에 의하여 구조되어 상부에 극비서류를 뺏긴 사실을 보고했으나 상부에서는 게릴라들이 그 서류의 가치를 알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는 팔라우 공습에서 제10폭격비행대 소속 1대의 돈틀레스가 격추되어 2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팔라우 제도를 떠난 제58기동부대는 3월 31일에는 캐롤라인 제도의 야프 섬과 그 곳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울리시 환초를 폭격하여 비행장과 지상 시설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경비정 한 척을 격침했다.
4월 1일에는 같은 캐롤라인 제도의 Woleai 환초를 공습하여 지상 시설에 큰 피해를 입히고 제50.2전단 소속의 구축함 Hickox와 Hunt가 두 척의 일본경비정을 격침했다.

 

(제58기동부대의 공습을 받고 있는 월레아이. 1944년 4월 1일)

 

제58기동부대는 4월6일에 마주로 환초에 돌아왔다.

4월 13일, 제58기동부대는 남서태평양해역군의 홀랜디어 상륙을 엄호하기 위하여 마주로를 떠났다.
엔터프라이즈는 정규항공모함 렉싱턴, 경항공모함 프링스턴, 랭글리와 함께 리브스 제독의 지휘하에 제58.3전단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전단에는 고속전함 중 뉴저지를 제외한 6척도 포함되어 있었다.
4월 19일에 에스피리투산토 북방에서 급유를 마친 제58기동부대는 뉴기니아의 홀랜디어로 향했다.
4월 21일에 홀랜디어 부근 해상에 도착한 제58기동부대는 24일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22일에 실시된 남서태평양해역군의 홀랜디어 상륙을 엄호하면서 홀랜디어, 와크데 섬, 사와르 등지를 폭격했다.
일본기들의 반격은 거의 없었다.

 

(제58기동부대의 공습을 받고 있는 홀랜디어 부근의 일본군 비행장. 탄공과 함께 불타는 비행기 및 망가진 비행기들이 보인다. 1944년 4월 21일)


3월 말까지만 해도 홀랜디어에는 350 대 가까운 일본기들이 모여 있었고 또한 서부 뉴기니아의 보겔캅 반도에도 대규모의 일본군 항공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3월 26일에 홀랜디어 상륙작전 지원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맥아더 장군의 사령부에서 열렸던 회의에서 니미츠 제독은 제58기동부대의 안전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었다.
그러자 남서태평양해역군에서는 다윈에서 출격하는 장거리 폭격기들을 활용하여 보겔캅 반도의 일본기들을 통제하여 제58기동부대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홀랜디어의 일본기들은 제5항공대 사령관인 케니 소장이 제5항공대의 항공기들을 동원하여 상륙작전 당일까지 전멸시켜 버리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니미츠 제독을 비롯한 태평양함대의 제독들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이 동네는 모두들 맥아더를 닮아서 큰소리 하나는 잘 치는구만..’  

하는 정도로 치부하고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케니 소장은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제5항공대는 3월 30일에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 60대에 항속거리가 연장된 신형 P-38 라이트닝을 호위로 붙여서 홀랜디어 부근의 일본군 비행장을 폭격했다.
자신들의 위치가 미군전투기 항속거리 밖이라고 믿고 있던 일본군들은 완전히 기습을 당했다.
이 폭격으로 기선을 제압한 제5항공대는 이후 지속적인 공습을 통하여 홀랜디어 상륙일인 4월 22일까지에는 말 그대로 홀랜디어 부근 일본기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홀랜디어 앞바다를 떠나기 전에 제58기동부대는 새터완 폭격을 위하여 중순양함 9척과 구축함 8척을 따로 편성하고, 리 제독에게 7척의 고속전함을 전부 몰아주어서 제58.7전단을 형성, 포나페를 포격하도록 했다.
새터완 포격부대는 4월 30일에 새터완을 포격했고, 제58.7전단은 5월 1일에 포나페를 포격했다.

제58기동부대는 홀랜디어 앞바다를 떠나 마주로로 돌아오는 도중 4월 29일과 30일에 재차 트럭 환초를 폭격했다.
2월의 대공습 때와 마찬가지로 전투기들의 제공권 장악으로 시작되어 하루 종일 지속된 이틀 간의 폭격에서 제58기동부대는 일본군들이 라바울에서 끌어와서 겨우 보충해 놓은 항공기들을 중 59대를 격추하고, 34대를 지상에서 파괴함으로써 싹쓸이했다.
실제로 공습 다음날인 5월 1일에 트럭 환초에서 작전 가능한 항공기는 불과 12대에 지나지 않았다.
트럭 환초 내에 이미 함선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격이 지상 건물에 집중되어 공습이 끝나자 트럭 환초는 흡사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만 2월의 대공습 이후 지상의 대공포가 많이 증강되었기 때문에 미함재기의 상실댓수는 26대로서 대공습 때와 비슷했다.
제58기동부대는 대공습 때의 경험을 교훈삼아 이번에는 상당히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탈출 조종사들의 구조작업을 펼쳤다.
트럭 환초 주변의 잠수함들은 순전히 조종사의 구조임무만 맡고 있었고, 공격대에게는 구조작업에 임하는 아군잠수함을 공격하지 않도록 엄중한 경고가 몇 번씩이나 거듭하여 주어졌다.
또한 폭격 중인 트럭 환초 부근 해상에는 중순양함들에게서 발진한 수상정찰기들이 아예 해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이들 수상 정찰기들은 가끔씩 초호 내로 들어가서 그곳에 떨어진 조종사들을 구해와서는 환초 바깥의 잠수함에 인계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제58기동부대는 2일에 걸친 폭격 기간 동안 잠수함 Tang 이 22명을 구한 것을 비롯하여 격추된 조종사 중 거의 대부분인 46명을 구조했다.
엔터프라이즈에서는 다행히 이번 공습에서는 단 1명의 전사자도 내지 않았다.
2월의 대공습으로 정박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남방으로 전개하는 일본항공기들의 중계기지로서만 기능하던 트럭 환초는 이번 공습으로 중계기지로서의 기능마저 상실하여 완전히 쓸모없는 기지로 전락했다.

제58기동부대는 5월 14일에 마주로에 돌아왔다.

 

(마주로 환초에 정박 중인 제58기동부대의 함정들을 배경으로 해군수병들이 해수욕을 하면서 모처럼의 휴식을 즐기고 있다.

사진에서 가장 왼쪽에 보이는 항공모함이 엔터프라이즈. 마리애나 제도 상륙작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944년 5월에 찍은 사진이다.)


1944년 6월 6일, 3주 동안의 휴식과 보급, 재정비를 마친 제58기동부대에 다시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일본군이 설정한 절대방어선의 가장 중요한 고리인 마리애나 제도를 탈취하려는 약탈자 작전(Operation Forager)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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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연합함대의 주력이 과달카날 전투 기간 중에 캐롤라인 제도의 트럭 환초에 배치된 이후 트럭 환초는 ‘태평양의 지브롤터’, ‘일본의 진주만’ 등으로 불리면서 연합함대의 근거지 역할을 했다.
제1차 대전 이후 독일로부터 캐롤라인 제도를 넘겨받은 일본은 트럭 환초를 이루는 4개의 섬(Moen, Dublon, Eten, Param) 에 각각 1개씩 4개의 비행장을 건설했고, 초호에는 일본연합함대의 주력이 정박하고 있었다.

1944년 2월 4일, 마셜 제도를 떠난 2대의 카탈리나 비행정이 트럭 환초 상공에 나타났다.
즉각 요격을 위하여 일본기들이 날아올랐으나 이 카탈리나 기들은 정찰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다.
마셜 제도가 점령되면서 드디어 트럭 환초가 카탈리나 기의 행동반경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당시 이들이 찍어온 사진에는 일본연합함대의 기함 무사시를 비롯한 전함들과 항공모함들, 순양함과 구축함들, 기타 수많은 함정들이 초호에 가득 정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의 암호해독 결과는 일본연합함대의 주력이 2월 10일부터 팔라우 제도와 일본본토 방면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트럭 환초에서 불과 1,000km 정도 떨어진 마셜제도가 미군에게 점령되자 심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고가 미네이찌 대장은 태평양전쟁 개전이래 처음으로 미국의 정찰기가 트럭 환초 상공에 나타나자 미국항모기동부대에 의한 공습이 임박했다고 판단하고 서둘러 연합함대의 주력을 피신시켰다.
하지만 트럭 환초에는 아직도 일부 전투함정들과 수많은 수송선들이 남아 있었다.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고가 미네이치 대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에니웨톡 상륙작전을 엄호할 임무를 맡은 58.4 전단을 제외한 제58기동부대의 3개 전단은 2월 3일부터 방금 확보한 마주로 환초에서 휴식과 재정비, 보급을 실시한 후 2월 13일에 트럭 환초 공격을 위하여 출발했다.
이 공격부대는 정규항공모함 5척(엔터프라이즈, 요크타운, 에섹스, 인트레피드, 벙커힐), 경항공모함 4척(벨로우드, 캐봇, 몬터레이, 카우펜스), 고속전함 6척(아이오와, 뉴저지, 메사추세츠,앨리배마, 사우스다코타, 노스캐롤라이나),중순양함 3척(미네아폴리스, 뉴올리언즈, 볼티모어), 경순양함 5척(산타페, 모빌, 빌록시, 오클랜드, 샌디에고), 구축함27척으로 이루어졌으며, 핼캣 275대, 야간형 콜세어 8대, 야간형 헬캣 8대, 돈틀레스 133대, 헬다이버 31대, 아벤저 127 대등 총 582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트럭환초에 있던 일본군 항공기는 4개의 비행장에 합계 365 대가 있었는데 그 중의 180대는 파일럿이 없거나 수리 중이었으므로 실제로 운용가능한 항공기 수는 185대였다.
제58기동부대가 마주로를 떠날 때에는 3개의 항공모함 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공격 당일인 2월 16일에 고속전함 6척이 경항공모함 카우펜스, 중순양함 미네아폴리스와 뉴올리언즈, 그리고 구축함 4척과 함께 Willis August Lee 소장 지휘 하에 제50.9전단을 형성하여 공습을 피하여 달아나는 일본함정을 포착 격멸하기 위하여 항공모함 전단들의 전방으로 나섰다.

1944년 2월 15일 오후에 트럭 환초 부근에 배치되어 있던 10척의 잠수함 중 1척인 SS-305 Skate 가 트럭 환초를 빠져나가는 일본 경순양함 아가노에 4발의 어뢰를 쏘아 그중의 3발을 명중시켜서 격침했다.

 

(일본해군의 경순양함 아가노.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6283461 ) 

2월 16일 새벽 6시 45분, 아직 해도 떠오르지 않은 어둠 속에서 헬캣 72대가 트럭 환초를 향하여 항공모함들의 갑판을 떠났다.
미처 제독은 ‘마술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작전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전법을 개발했는데 그것은 폭격에 앞서 우선 전투기만으로 구성된 항공대를 내보내어 적 기지 상공의 제공권을 장악한 다음 전 함대의 공격력을 3등분하여 각 제파를 약 2시간 간격으로 지속적으로 내보내어 하루종일 폭격하는 방식이었다.

 

(F6F 헬캣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rectek2/12226726 )


이때 폭격을 끝낸 부대의 상황보고에 따라 현장 상황에 맞추어 다음 공격대의 무장, 폭격우선순위 및 폭격방식을 유연하게 대응해 가는 방식이었으며 특징적으로 연기가 시야를 가려서 폭격에 방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적의 유류저장고나 탄약창은 폭격의 마지막 단계에서 공격하도록 했다.
조종사들 사이에서 ”Mitscher Shampoo” 라고 불리는 이 방식은 이미 부싯돌 작전에서 시도되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트럭 대공습 당시 제58기동함대의 정규항공모함들은 주로 공격대를 내보냈고, 함대의 CAP 세력은 주로 3척의 경항공모함들이 맡았다.
그리고 경항공모함 카우펜스는 리 제독의 지휘 하에 고속전함 6척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트럭 환초에서 탈출하는 적함들을 포착 격멸하기 위하여 편성된 제50.9 전단에 편입되어 항공엄호를 담당했다.
제58기동부대는 제공권 장악을 위한 전투기대와 야간폭격대를 제외하고 16일에 6번, 17일에 2번등 총 8번에 걸쳐 공격대를 출격시켰는데 이 공격대들은 평균적으로 150대 정도의 헬캣, 급강하폭격기 및 아벤저로 이루어져 있었다.

16일의 제1파 공격대는 오전 7시에 출격했다.
이 공격대는 초호에 정박한 함선과 비행장 및 항공기들을 주목표로 삼아서 돈틀레스와 아벤저들은 함선공격용 철갑탄과 비행장 공격용의 소이탄 및 집속탄을 장비하고 있었다.
헬캣들은 엄호를 담당했다.

제2파 공격대는 오전 9시에 출격했다.
이 공격대의 주목표 및 무장은 제1파와 거의 동일했다.

제3파 공격대는 오전 11시에 출격했다.
제2파 공격대로부터 일본함정 중의 일부가 북쪽으로 탈출하고 있다는 보고에 따라 제3파 공격대의 급강하 폭격기와 아벤저들은 이 함선들을 격침하기 위하여 전부 함선폭격용 철갑탄을 장비하고 도주 중이던 순양함 가토리, 구축함 노와끼와 마이까제, 그리고 소형구잠함 쇼난마루를 향하여 출격하여 가토리와 쇼난마루에 피해를 입혔으나 폭격 도중에 미처 제독으로부터 그 함선들의 처리는 전함 중심의 제50.9전단에게 맡기고 트럭 환초로 향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폭격을 중단하고 트럭 환초로 가서 그곳의 함선들을 폭격했다.

 

오후 1시에 출격한 제4파 공격대는 오전에 출격했다가 돌아온 전투기와 제1파 공격대를 중심으로 재출격했다.
이미 트럭 환초에 대형전투함은 거의 없었으므로 이번 공격대는 함선공격용 철갑탄보다 관통력은 떨어지지만 대신 작약량이 훨씬 많아서 지상시설과 소형함정의 공격에 보다 유리한 지상공격용 일반폭탄을 싣고 출격했다.
이 4파 공격대의 주요 목표는 트럭 환초의 지상 시설이었다.

오후 3시에 출격한 제5파 공격대는 트럭 환초의 일본기들이 밤새 제58기동부대에 반격을 가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고 집속탄을 지상에 남아있는 일본항공기들에게 투하하고 활주로에 수시간 씩의 지연 신관이 장착된 지상공격용 일반폭탄을 투하했다.
밤새도록 활주로에서 무작위로 폭발하는 폭탄들 때문에 일본군은 밤새 감히 활주로를 수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오후 5시에 출격한 제6파 공격대도 제5파 공격대에 이어 일본항공기의 야간반격능력을 제거하는데 중점을 두고 비행장 시설과 활주로를 집중공격했다.
이들의 공격이 어찌나 철저했는지 트럭 환초에 있는 4개의 일본군비행장에서는 밤새 단 1대의 비행기도 출격시키지 못했다.

트럭 환초 부근에서는 고속전함 중심의 제50.9전단이 항공기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는 경순양함 가토리, 구축함 노와끼와 마이까제, 소형구잠함 쇼난마루를 공격하여 가토리와 마이까제, 쇼난마루는 격침하였고, 노와끼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서 서쪽으로 도주했다.

17일 자정이 막 넘었을 무렵, 사이판을 출격한 일본기 7대가 제58기동부대를 공격했다.
즉각 엔터프라이즈의 콜세어 야간전투기가 출격하여 요격했으나 일본기들은 정규항공모함 인트레피드의 우현 고물 쪽에 1발의 어뢰를 명중시키는데 성공했다.
수선하 4.5m 지점에 명중한 이 어뢰로 인하여 인트레피드에서는 몇 개의 구역이 침수되고 11명이 전사했으며 키가 왼쪽으로 잔뜩 꺾인채 고정되고 말았다.
인트레피드는 오른쪽 엔진은 공회전시키고 왼쪽 스크류만으로 수리차 진주만을 향했으나 항해 2일째 되던 날에 세찬 바람이 몰아쳐서 함수가 도꾜 방향을 향한 채 아무리 해도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없게 되자 승무원들이 함내 출입문의 가죽 커버를 모아다가 이어 붙인 임시변통의 돛을 만들어서 겨우 방향을 잡았다.
그리하여 인트레피드는 2월 24일에 누덕누덕 기워붙인 돛을 매단 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진주만에 입항했다.
진주만에서 대충 수리를 마친 인트레피드는 3월 16일에 진주만을 출발하여 22일에 캘리포니아의 Hunter's Point에 들어가서 6월까지 수리를 받아야만 했다.

17일 새벽 4시 10분에 1대당 4개의 225kg짜리 폭탄을 장비한 12대의 아벤저가 제10뇌격비행대장인 Van Eason 대위의 지휘 하에 야간폭격을 위하여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을 떠났다.
이들은 어둠 속에서 개별적으로 행동하면서 레이더로 적 함선의 위치를 확인한 후 75m 높이의 초저공까지 내려가 육안을 사용하여 목표물을 확인하고 파일럿의 판단으로 폭탄을 투하했다.
레이더를 이용한 이러한 종류의 야간폭격은 세계에서 최초로 시도된 것이었다.
지상의 대공포는 아벤저들의 접근을 알아채고 대공포를 쏘아댔으나 정확하지 못했고, 정작 목표가 된 함선들은 아벤저들이 350m 전방까지 다가가도록 모르고 있다가 기습을 당했다.
투하된 48발의 폭탄 중 13발이 명중하여 작전은 완전히 성공했다.
폭격에 나섰던 아벤저 중 J. Nicholas 중위 탑승기를 제외한 11대가 무사히 귀함했다.

17일 아침이 되자 제58기동부대의 헬캣들이 다시 제공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트럭 환초로 향했다.
하지만 어제의 폭격으로 인하여 트럭 환초의 비행장들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하여 헬캣에게 도전하는 일본기는 거의 없었다.
지상의 대공포들도 상당수가 무력화되었고, 강력한 대공화기를 장착한 함선들도 거의 침몰해 버렸기 때문에 헬캣들은 제공권 장악보다 주로 지상에 대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CAP 세력들도 트럭 환초의 반격능력이 사실상 제거된 상태였기 때문에 적기의 내습에 대비하는 본연의 임무보다는 대부분의 헬캣들이 혹시 살아남아 도주중인 일본함정들이 있으면 찾아내려고 기동부대 주변의 해면을 수색하는데 더 열을 올렸다.

17일의 제1파 공격대는 대부분 육상공격용 폭탄과 소이탄을 장비했으며 벙커힐에서 출격한 아벤저만이 어뢰를 장비했다.
이들의 주목표는 아직 살아남은 소수의 함정들과 비행장 및 잠수함 기지의 건물들이었다.

트럭 대공습의 마지막 공격대인 제2파 공격대는 트럭 환초의 일본군 기지가 제 기능을 회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최대한 연장시키려는 목표 하에 일본군의 유류저장고와 탄약창을 포함한 목표들을 타격했다.
이런 유류저장고나 탄약창을 폭격하면 대량의 연기가 발생하여 폭격 전과 확인 및 후속 공격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므로 미처 제독은 이런 시설은 폭격의 마지막 단계에서 폭격하도록 했다.

벙커힐의 함재기들이 제3파 공습을 위하여 이함한 직후 미처 제독의 공격중지명령이 떨어졌다.
이 함재기들은 무장을 바다에 떨어뜨리고 항공모함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2일간에 걸친 트럭 대공습이 끝났다.

이틀에 걸친 트럭 대공습으로 일본군은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비록 연합함대의 주력이 공습 불과 1주일 전에 팔라우 제도로 도망감으로써 미함재기의 공습에 의하여 함대 주력이 정박지 내에서 전멸하는 미증유의 대참사만은 피했다고 하나 그래도 피해는 극심했다.
경순양함 2척(나까, 아가노), 구축함 4척(마이까제, 다니까제, 오이테, 후미즈끼), 보조순양함 3척, 잠수모함 2척, 구잠함 2척, 무장트롤선 1척, 수상기 모함 1척, 함대급유선 5척 및 19척의 수송선이 격침되어 격침 톤수는 합계 220,000 톤에 달했으며 항공기 피해도 275대에 달했다.
격침 톤수 20만 톤이 넘는 전과는 단일 작전으로서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이래 최고 기록이었다.
단 이틀 간의 공습에 의해 트럭 환초의 일본군들이 입은 피해는 1943년 11월부터 미군기의 지속적인 공습에 노출되어 있던 라바울의 피해보다도 훨씬 심했다.
트럭 환초가 이렇게 무력하게 당하자 연합함대 사령부는 라바울에 파견했던 항공기들을 트럭 환초 방어를 위하여 다시 불러들였다.
그나마 라바울의 상공을 지켜주던 항공기들이 대거 빠져나가자 라바울은 다시 미군기들의 공습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트럭 대공습은 남쪽의 라바울을 무력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수레바퀴 작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이런 노력도 부질없이 사실상 이날 이후 트럭 환초는 정박지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고, 오직 라바울 방면으로 비행기를 투입하는 항공중계기지로서의 역할만 수행했다.


트럭 대공습 기간 중 미국 함대의 피해는 정규항공모함 인트레피드가 항공어뢰에 맞아 중파되었고, 헬캣 12대, 급강하폭격기 6대, 아벤저 7대등 총 25대가 격추되었다.
격추된 조종사들 중 일부는 Tang 을 비롯한 미국잠수함들에게 구조되었으며 초호 내에 착수한 조종사들은 중순양함 볼티모어에서 발진한 킹피셔 정찰기가 구조하기도 했다.

엔터프라이즈는 트럭대공습 기간 중에 헬캣, 돈틀레스, 아벤저 각 1대씩 3대의 함재기가 격추되어 제10전투비행대에서 1명, 제10폭격비행대에서 2명, 제10뇌격비행대에서 3명 등 총 6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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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희생자를 낸 길버트제도 상륙작전 때문에 태평양함대 사령부는 여론의 빗발치는 비난에 시달렸다.
태평양함대의 고위 지휘관들도 예상 밖의 너무나 큰 피해 때문에 마셜제도 상륙작전인 부싯돌 작전(Operation Flintlock)준비를 하면서 대단히 신중하게 모든 문제를 다루었다.

우선 타라와에서 보았던 콘크리트와 통나무로 강력하게 축조한 일본군의 토치카를 하와이 제도의 카훌라웨 섬에 만들어놓고 실험을 실시하여 고폭탄을 이용한 전함의 주포탄 사격은 이 토치카를 거의 파괴할 수 없다는 사실과 이 토치카를 파괴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전함의 대형 철갑탄을 사용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내었다.

부싯돌 작전에 동원될 수륙양용장갑차인 앰트랙의 숫자는 397대로 타라와 환초에서의 125대에 비하여 3배 이상 늘었으며 타라와에서 적의 공격에 100 대 이상의 앰트랙이 파괴당하고 결국 20 여대만이 살아남았던 경험에서 앰트랙에 추가장갑을 장착하여 6.4mm 두께의 장갑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병력수송용 앰트랙과는 별도로 37mm 포 1문과 7.62mm 기관총 3정을 장비한 화력지원용 앰트랙 97대를 준비했다.

마셜제도에서 중요한 환초는 콰잘레인, 웟제, 말로에라프 등 3개로서 원래 태평양함대는 이 3개를 동시에 공격하여 점령할 예정이었으나, 정찰 결과 마셜제도의 방어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신중을 기하여 3개의 환초를 동시에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제5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중장과 제5상륙작전부대 사령관 터너 소장,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 등 태평양함대 전투부대의 지휘관들은 우선 마셜제도 외곽에 있는 웟제와 말로에라프를 점령하고 다음에 콰잘레인을 점령하는 2단계 작전이 최선이라는 데에 의견이 일치했으나 정작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니미츠 대장의 생각은 달랐다.

니미츠 제독은 마셜제도 중앙의 콰잘레인 제도를 점령하여 그곳의 비행장을 활용하면 마셜제도 외곽에 있는 웟제와 말로에라프 환초를 점령하지 않고도 콰잘레인의 항공력을 이용하여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1943년 초부터 미국의 암호해독반이 해독에 성공한 울트라 암호를 통하여 일본군이 콰잘레인의 방어를 희생하면서까지 웟제와 말로에라프의 방어를 강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니미츠 제독의 결심은 확고해졌다.
일본군은 바깥쪽의 환초가 공격목표라고 믿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스프루언스 제독을 비롯한 사령관들은 니미츠 제독의 계획을 알고는 대경실색하여 즉각 강력한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1943년 12월 14일의 회의에서 스프루언스 제독, 터너 제독, 스미스 장군은 웟제와 말로에라프를 먼저 공격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의가 끝난 후에도 남아서 어떻게든 니미츠 제독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이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계획에 끝내 반대한다면 모두 해임하겠다고 말하자 그만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이미 태평양함대 내에서 니미츠 제독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리하여 부싯돌 작전은 콰잘레인에 상륙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며 나중에 방어가 미약한 마주로 환초가 점령목표에 추가되었다.

한편 부싯돌 작전을 앞두고 충격작전 기간을 전후한 파우널 제독의 항공모함 작전이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는 불만이 진주만의 항공관계자들 사이에서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12월 23일에 니미츠 제독이 회의실로 타워즈 중장과 참모장 맥모리스 소장, 셔먼 소장을 불러 이 문제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태평양함대 항공관계자들의 대변인 격인 타워즈 중장은 니미츠 제독에게 파우널 제독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미본토 서해안 해군항공대 사령관인 미처 소장을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제5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은 파우널 제독의 교체에 반대했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호넷을 지휘하면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던 미처 제독을 무능한 장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또한 제독 자신이 결코 무리한 짓을 하지 않는 신중한 성격인지라 역시 무리하지 않고 안전하게 작전을 펴는 파우널 제독의 방식을 지지했다.
하지만 미처 제독의 전반적인 경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을 감안한 니미츠 제독은 스프루언스 제독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처 제독을 파우널 제독의 후임으로 고속항공모함 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44년 1월 6일에 미처 소장은 제5함대의 고속항공모함 부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미처 소장의 취임과 함께 제50기동부대는 제58기동부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은 미처 소장을 거부하는 스프루언스 제독을 무마하기 위하여 마셜 제도 작전에서 실패할 경우 미처 소장을 항모기동부대 사령관 자리에서 해임한다는 조건을 내걸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처 제독이 1척 이상의 항공모함을 지휘해 본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전임 사령관이었던 파우널 제독이 제5함대 사령관의 항공관계 고문이란 직함을 가지고 부싯돌 작전에 스프루언스 제독과 동행했다.
미처 제독으로서는 실로 치욕스러운 조치였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심혈을 기울여 제58기동부대를 지휘했다.
그가 부싯돌 작전에서 보여준 지휘 능력이 얼마나 훌륭했던지 작전이 끝나자 그를 강력하게 반대했던 스프루언스 제독마저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다루는 그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미처 제독. 자세한 설명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52832412 )

 

1944년 1월 초부터 후버 소장이 지휘하는 기지항공대(TF57) 소속의 B-24 72대, B-25 64대, 돈틀레스 54대, A-24(돈틀레스의 육군형) 24대, P-39 및 P-40 전투기 75대, 카탈리나 정찰기 90 대등 총 379대에 이르는 항공기들이 마셜제도의 밀리, 콰잘레인, 잴루잇, 말로에라프, 웟제 등지를 폭격하고 주변 해역에 기뢰를 투하했다.
이들 중 B-24는 앨리스 제도의 푸나푸티에서 출격했고, 전투기 및 B-25와 돈틀레스들은 11월에 확보한 메이킨과 타라와, 아베마마 환초에서 출격했다.
상륙예정지점인 콰잘레인 환초의 로이-나무르 섬과 콰잘레인 섬은 타라와 환초의 베티오 섬보다 방어가 허술했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심한 폭격을 받았다.

터너 소장이 지휘하는 상륙작전부대는 크게 2개의 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콰잘레인 환초 북부의 로이-나무르 섬을 점령할 임무를 가진 북부공격부대는 새로 건조된 상륙지휘함인 AGC-1 Appalachian 호에 승좌한 Richard L. Conoly 소장이 지휘하며 상륙할 부대는 해병제4사단으로 사단장은 Harry Schmidt 해병소장이었다.
콰잘레인 환초 남부의 콰잘레인 섬을 점령할 남부공격부대는 터너 제독 자신이 상륙작전용 지휘함인 AGC-3 Rocky Mount 에 타고서 지휘할 예정이었으며 상륙할 부대는 육군제7사단으로서 사단장은 Charles H. Corlett 소장이었다.
이들과는 별도로 수송선 Cambria 호에 승좌한 Harry W. Hill 소장이 지휘 하에  육군제106연대의 제2대대와 해병제1방어대대 및 제5상륙군단의 정찰중대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지상군이 마주로를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상륙군의 지휘관은 Frederic B. Sheldon 중령이었다.
그밖에 해병제22연대와 육군제106연대의 제1 및 제3대대 등 총 5개 대대가 예비대로서 해상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상륙할 지상군의 규모는 공격부대 5만 3천명에 기지방어부대 3만 5천명에 달했다.

한편 상륙부대를 엄호할 임무를 가진 제58기동부대는 정규항공모함 6척, 경항공모함 6척, 고속전함 8척, 중순양함 3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35척, 함재기 700 여대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4개의 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John V. Reeves 소장이 지휘하는 제58.1전단은 정규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 경항모 벨로우드, 고속전함 워싱턴, 인디애나, 메사츄세츠, 경순양함 오클랜드와 구축함 9척으로 이루어져 말로에라프 환초의 타로아 섬을 폭격한 후 콰잘레인 섬의 상륙을 지원하기로 되어 있었다.
Albert E. Montgomery  소장이 지휘하는 제58.2전단은 정규항공모함 에섹스, 인트레피드, 경항공모함 캐봇, 고속전함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다코타, 앨리배마, 경순양함 1척, 구축함 9척으로 이루어져 콰잘레인 환초의 로이-나무르 섬을 폭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Frederic C. Sherman 소장이 지휘하는 제58.3전단은 정규항공모함 벙커힐, 경항공모함 몬터레이, 카우펜스, 고속전함 아이오와, 뉴저지, 중순양함 위치타, 구축함 9척으로 이루어져 콰잘레인 환초의 콰잘레인 섬을 폭격한 후 에니웨톡 환초를 폭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엔터프라이즈의 제7대 함장을 지냈던 Samuel P. Ginder 소장이 지휘하는 제58.4전단은 정규항공모함 새러토가, 경항공모함 프린스턴, CVL-32 Langley, 중순양함 보스턴, 볼티모어, 경순양함 산후앙,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져 웟제 환초를 폭격하기로 했다.

1944년 1월 22일, 스프루언스 중장이 지휘하는 제5함대의 함정 353척은 마셜제도 공격작전을 위하여 진주만을 출항했다.
이들 중 제5함대의 고속항모기동부대인 제58기동부대는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진주만에 돌아오지 않았다.
대대적인 수리를 요하는 함정들만이 개별적으로 진주만으로 돌아왔을 뿐 기동부대는 해상에서 급유와 보급을 받으면서 필요할 때에는 마주로 환초와 울리시 환초의 전전기지에 들러 정박했다.

제58기동부대는 1944년 1월27일부터 마셜제도의 목표들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엔터프라이즈가 포함된 제58.1 전단은 말로에라프 환초의 타로아 섬을 폭격한 후 콰잘레인 환초로 와서 1월 30일부터 콰잘레인 섬을 폭격했으며 한편 콰잘레인 섬을 폭격하고 있던 제58.3 전단은 에니웨톡 환초로 가서 폭격과 함포사격을 가했다.
제58.1전단 소속의 고속전함 워싱턴, 인디애나, 메사츄세츠는 4척의 구축함과 함께 콰잘레인 섬에 대하여 16인치 철갑탄을 사용하여 함포사격을 가했다.  
1월 31일에 힐 제독이 지휘하는 상륙부대가 마주로에 상륙하여 간단히 점령했다.

같은 날인 31일 새벽 3시 30분, 남부공격부대의 제7보병사단 기병정찰중대와 제111연대의 B 중대가 고무보트를 타고 Cecil 섬과 Carter 섬에 상륙하여 21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섬을 점령하여 콰잘레인 초호로 들어가는 세실 통로를 확보했다.
해가 떠오르자 제17보병연대가 콰잘레인 섬에 인접한 Carlos 섬과 Carlson 섬에 상륙하여 3시간만에 점령했다.
오전 11시 25분부터 105mm 야포 4개 대대와 155mm 야포 1개 대대가 상륙하기 시작하여 오후 3시부터 콰잘레인 섬에 대하여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2월1일 아침이 되자 구형전함 펜실베니아, 아이다호, 뉴멕시코, 미시시피와 중순양함 미네아폴리스, 뉴올리언즈, 샌프란시스코가 상륙준비 사격을 시작하여 총 7,000 여발의 14인치, 8인치, 5인치 포탄을 콰잘레인 섬에 퍼부었고, 전날 점령한 칼로스 섬과 칼슨 섬의 포병대는 상륙준비 포격으로 총 29,000 발의 105mm 및 155mm 포탄을 콰잘레인 섬에 퍼부었다.
제58.1전단과 호위항공모함 마닐라베이, 코랄시, 코레히돌에서 발진한 함재기에 더하여 아베마마 섬에서 발진한 B-24 리버레이터 6대도 폭격에 참가하여 15발의 450kg 및 900kg 짜리 폭탄을 투하했다.
콰잘레인 섬에 가해진 폭탄과 포탄의 양은 베티오 섬의 4배나 되었다.
UDT 대원들이 수로를 확보하고, 수중장애물과 기뢰를 제거하기 위하여 투입되었으나, 하나도 없었다.
웟제나 말로에라프 같은 마셜제도 외곽의 환초가 먼저 공격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던 일본군들에게 미군의 콰잘레인 상륙은 완전한 기습이었다.

오전 9시 30분에 제7보병사단이 콰잘레인 섬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대량의 앰트랙과 DUKW(수륙양용트럭)에 실려 신속하게 해안에 도착한 미군에게 상륙준비포격에서 겨우 살아남은 일본군의 기관총과 박격포가 반격을 가해 왔으나 그리 위력적이지 못했다.
상륙준비포격의 위력은 대단하여 해안에 도착했을 때 공병대가 폭파시킨 토치카는 단 하나뿐이었으며 나머지는 이미 준비포격으로 인하여 파괴된 상태였다.
그날 저녁까지 제7보병사단의 6개 보병대대와 4개 전차중대가 상륙을 마쳤다.
상륙한 미군은 곧 일본군을 소탕하기 시작하여 2월 4일까지 완전히 섬을 장악했다.

콰잘레인 섬의 점령과 동시에 콰잘레인 주변의 작은 섬들에 대한 공격도 실시되어 2월 2일부터 Chauncey 섬,Burton 섬,Buster 섬, Byron 섬, Burnet섬, Blakenship 섬, Bennet 섬 등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4일까지 전부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콰잘레인 섬 상륙작전에서 제7사단은 총 177 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콰잘레인 섬의 수비대는 총 5,144명의 병력을 가졌으며 그 중 절반 가량이 전투부대였는데 206명의 포로를 제외한 4,938 명이 전사했다.
미군은 전사한 일본군 중 50-75% 정도가 상륙준비포격에 의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콰잘레인 섬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로이-나무르 섬에서는 해병제4사단이 터너 제독 지휘 하에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해병제4사단도 콰잘레인 섬과 마찬가지로 주력의 상륙을 하루 앞둔 1월 31일 오전에 2개 섬(Ivan, Jacob)에 상륙을 실시하여 콰잘레인 초호로 진입하는 통로를 확보했고 이어서 로이 섬의 남쪽에 있는 3개의 섬 (Albert, Allen, Abraham)에 상륙을 실시, 그날 안으로 모두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135명의 일본군을 사살했으며 자신들은 26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곧 해병대의 포병대가 상륙하여 로이-나무르 상륙에 대비하여 상륙준비포격을 시작했다.
2월1일 새벽이 되자 구형전함 테네시, 콜로라도, 메릴랜드와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 루이스빌이 구축함들과 함께 로이 섬의 상륙예정지점에 대하여 포격을 시작했다.
제58.2전단에 더하여 호위항모 생가몬, 스와니, 체난고의 함재기들도 로이 섬을 폭격했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된 해병제4사단의 상륙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해병대는 일본의 어뢰저장고를 폭파하는 바람에 주변을 진군하던 해병대 20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하는 참사를 겪으면서도 착실히 진격하여 그날 밤 안으로 로이 섬과 방죽길로 연결된 나무르 섬까지 진입했다.
밤사이 나무르 섬의 일본군은 몇 차례의 야습을 결행했으며 한번은 100명 가량의 일본군이 해병대의 방어선에 돌입하여 해병대와 백병전까지 치르는 격전 끝에 전멸했다.
하지만 이런 공격은 일본군의 전력을 급속하게 소진시켜서 해병대는 상륙한 지 27시간 만인 2일 낮 12시 15분에 로이-나무르 섬의 점령을 선언했고, 곧이어 로이-나무르 섬에 인접한 작은 섬들을 점령했다.
해병대는 이 로이-나무르 섬의 점령과정에서 190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로이-나무르를 수비하던 일본군은 3,563 명의 병력 중에서 포로 91명을 제외한 3,472 명이 전사했다.

곧 새로 점령한 콰잘레인 섬과 로이-나무르 섬에 해군건설대대가 도착하여 탈취한 일본군의 비행장을 정비했고 미군의 항공기들이 진출하여 작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콰잘레인 환초와 동시에 점령한 마주로 환초는 제58기동부대의 전진기지로 사용되었다.
마주로 환초가 함락되자마자 제10지원전대가 이곳에 와서 활동을 개시했다.
실제로 2월 1일에 콰잘레인 섬을 포격하던 고속전함 워싱턴과 인디애나가 서로 충돌한 일이 있었는데 두 전함 다 마주로가 점령된지 만 3일밖에 안 된 2월2일에 마주로 환초에 와서 임시로 수리를 받은 후에 진주만으로 회항했다.  

 

(전함 인디애나와의 충돌로 파괴된 전함 워싱턴의 함수)

아직도 북부 마셜제도에는 웟제와 말로에라프 등의 환초가 일본군의 수중에 남아 있었으나 부싯돌 작전 기간 동안에 제58기동부대에 의하여 철저하게 얻어맞은데다가 제대로 피해를 추스르기도 전에 콰잘레인 환초에서 작전하는 미군항공기들에 의하여 지속적인 공습을 당하면서 완전히 무력화되어 이 지역에서 작전하는 미군에게 아무런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사실 웟제와 말로에라프 환초가 일본군의 수중에 남아 있었어도 제58기동부대는 남부 마셜제도의 마주로 환초를 전진기지로 사용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위협이나 불편도 느끼지 않았다.
일본군이 태평양 초기의 남방작전에서 했듯이 마셜제도의 강력한 중점인 콰잘레인을 점령하면 항공력을 활용하여 주변의 환초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본 니미츠 제독의 판단은 정확했다.

콰잘레인 환초의 점령이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적은 피해만을 내고 이루어져서 예비부대로서 해상에 대기하고  있던 해병제22연대와 육군제106연대의 2개 대대를 중심으로 편성된 8,000 여명의 병력이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니미츠 제독은 함대를 재편성할 필요없이 이 예비병력을 활용하여 에니웨톡 환초에 상륙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니미츠 제독은 에니웨톡 환초 점령작전인 집달리 작전(Operation Catchpole)의 개시일을 원래 예정되었던 5월 1일에서 앞당겨 2월 17일에 실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에니웨톡 환초를 고립시키고 일본해군의 구원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하여 제58기동부대 중에서 제58.4전단을 제외한 3개 전단을 동원하여 에니웨톡 환초에서 불과 1,070km 거리에 있는 일본연합함대의 근거지인 트럭 섬을 공습하기로 했다.
제58.4전단은 에니웨톡 상륙부대에 대한 직접 엄호를 담당하기로 했다.

엔터프라이즈는 부싯돌 작전 기간 중에 제10비행단에서 3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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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은 태평양전쟁의 승리자와 패배자가 확실하게 확인된 한해였다.
비록 후대에 사는 우리들의 눈에는 미드웨이 해전, 적어도 과달카날 전투의 종식과 함께 미국의 우세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보이지만 우리와는 달리 바로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던 그 당시의 사람들 눈에도 미국의 승리가 명확해진 때가 바로 1944년이었다.  
1944년은 태평양함대의 마셜제도 상륙전으로 시작하여 트럭섬 공습, 필리핀 해전, 대만항공전, 레이테 해전 등 1943년까지의 전투와는 규모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대규모의 전투들이 잇달아 벌어졌고 이러한 중요한 전투들은 항상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하여 1944년 말이 되자 미군은 일본본토 가까이까지 바짝 다가섰다.

1943년에 근대화 개장을 받은 엔터프라이즈도 이러한 미해군의 작전에 발맞추어 한참 물이 오른 운동선수처럼 1년 내내 온 태평양을 돌아다니며 전투임무에 참가했다.
1월에는 마셜제도 공략에 참가하여 타로아 섬과 콰잘레인 환초를 공격했으며, 2월에는 동양의 지브롤터라고 불리던 일본연합함대의 근거지 트럭 환초에 대한 공습에 참가하여  태평양전쟁 중에 하루동안의 공격에 의한 전과로는 최대의 격침톤수를 기록하는데 일조했다.
3월에는 에미라우 상륙을 엄호한 후 1,800km 를 항진하여 팔라우 제도를 폭격했고, 4월에는 월레아이를 폭격하고 마주로에서 잠시 쉰 후에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남서태평양해역군의 홀랜디아 상륙을 엄호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트럭 환초를 폭격했다.
5월을 마주로 환초에서 지낸 엔터프라이즈는 6월 6일에 마리애나 제도 상륙작전을 엄호하기 위하여 출동하여 6월 19일에 벌어진 사상 최대의 함대항공전인 필리핀 해전에 참가, 일본의 함대항공력을 사실상 괴멸시킴으로써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확정짓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7월 5일까지 마리애나 제도 근해에서 엄호활동을 하던 엔터프라이즈는 진주만으로 돌아와 수리를 받고 새로운 항공단인 제20항공단을 맞아들였다.
8월 말에 진주만을 떠난 엔터프라이즈는 31일에 이오지마가 있는 보닌제도를 공습하고 9월에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팔라우 제도 상륙전을 엄호했다.
10월 초에는 핼시 제독이 지휘하는 제38기동부대의 일원으로서 대만항공전에 참가하여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기들의 씨를 말려버렸고, 10월 말에는 사상최대규모의 해전인 레이테 해전에 참가하여 일본연합함대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이후 12월 초까지 필리핀 근해에서 루존 섬의 일본군 비행장과 선박들을 공격하는 임무에 종사하다가 12월 6일에 진주만으로 돌아갔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에 다시 해상에 나왔을 때 엔터프라이즈는 CV(N)-6 로 분류되고 있었다.
N 은 Night 란 뜻으로 이로써 엔터프라이즈는 세계 최초로 24시간 내내 작전이 가능한 항공모함이 되었다.
이후 엔터프라이즈는 주로 야간에 항공모함기동부대의 CAP 세력을 제공하고 적에게 야간 공습을 가하는 일을 주로 맡게 되었고, 주간에는 CAP 임무 외에는 주로 큰 피해를 입어 모함에 돌아가기 힘든 함재기들이 비상착륙할 수 있도록 비행갑판을 비워두는 식으로 운용되었다.

1944년이 저물어 갈 때쯤에는 엔터프라이즈와 그 승무원들은 일본의 현관까지 도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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