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희생자를 낸 길버트제도 상륙작전 때문에 태평양함대 사령부는 여론의 빗발치는 비난에 시달렸다.
태평양함대의 고위 지휘관들도 예상 밖의 너무나 큰 피해 때문에 마셜제도 상륙작전인 부싯돌 작전(Operation Flintlock)준비를 하면서 대단히 신중하게 모든 문제를 다루었다.

우선 타라와에서 보았던 콘크리트와 통나무로 강력하게 축조한 일본군의 토치카를 하와이 제도의 카훌라웨 섬에 만들어놓고 실험을 실시하여 고폭탄을 이용한 전함의 주포탄 사격은 이 토치카를 거의 파괴할 수 없다는 사실과 이 토치카를 파괴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전함의 대형 철갑탄을 사용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내었다.

부싯돌 작전에 동원될 수륙양용장갑차인 앰트랙의 숫자는 397대로 타라와 환초에서의 125대에 비하여 3배 이상 늘었으며 타라와에서 적의 공격에 100 대 이상의 앰트랙이 파괴당하고 결국 20 여대만이 살아남았던 경험에서 앰트랙에 추가장갑을 장착하여 6.4mm 두께의 장갑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병력수송용 앰트랙과는 별도로 37mm 포 1문과 7.62mm 기관총 3정을 장비한 화력지원용 앰트랙 97대를 준비했다.

마셜제도에서 중요한 환초는 콰잘레인, 웟제, 말로에라프 등 3개로서 원래 태평양함대는 이 3개를 동시에 공격하여 점령할 예정이었으나, 정찰 결과 마셜제도의 방어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신중을 기하여 3개의 환초를 동시에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제5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중장과 제5상륙작전부대 사령관 터너 소장,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 등 태평양함대 전투부대의 지휘관들은 우선 마셜제도 외곽에 있는 웟제와 말로에라프를 점령하고 다음에 콰잘레인을 점령하는 2단계 작전이 최선이라는 데에 의견이 일치했으나 정작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니미츠 대장의 생각은 달랐다.

니미츠 제독은 마셜제도 중앙의 콰잘레인 제도를 점령하여 그곳의 비행장을 활용하면 마셜제도 외곽에 있는 웟제와 말로에라프 환초를 점령하지 않고도 콰잘레인의 항공력을 이용하여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1943년 초부터 미국의 암호해독반이 해독에 성공한 울트라 암호를 통하여 일본군이 콰잘레인의 방어를 희생하면서까지 웟제와 말로에라프의 방어를 강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니미츠 제독의 결심은 확고해졌다.
일본군은 바깥쪽의 환초가 공격목표라고 믿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스프루언스 제독을 비롯한 사령관들은 니미츠 제독의 계획을 알고는 대경실색하여 즉각 강력한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1943년 12월 14일의 회의에서 스프루언스 제독, 터너 제독, 스미스 장군은 웟제와 말로에라프를 먼저 공격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의가 끝난 후에도 남아서 어떻게든 니미츠 제독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이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계획에 끝내 반대한다면 모두 해임하겠다고 말하자 그만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이미 태평양함대 내에서 니미츠 제독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리하여 부싯돌 작전은 콰잘레인에 상륙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며 나중에 방어가 미약한 마주로 환초가 점령목표에 추가되었다.

한편 부싯돌 작전을 앞두고 충격작전 기간을 전후한 파우널 제독의 항공모함 작전이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는 불만이 진주만의 항공관계자들 사이에서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12월 23일에 니미츠 제독이 회의실로 타워즈 중장과 참모장 맥모리스 소장, 셔먼 소장을 불러 이 문제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태평양함대 항공관계자들의 대변인 격인 타워즈 중장은 니미츠 제독에게 파우널 제독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미본토 서해안 해군항공대 사령관인 미처 소장을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제5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은 파우널 제독의 교체에 반대했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호넷을 지휘하면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던 미처 제독을 무능한 장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또한 제독 자신이 결코 무리한 짓을 하지 않는 신중한 성격인지라 역시 무리하지 않고 안전하게 작전을 펴는 파우널 제독의 방식을 지지했다.
하지만 미처 제독의 전반적인 경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을 감안한 니미츠 제독은 스프루언스 제독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처 제독을 파우널 제독의 후임으로 고속항공모함 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44년 1월 6일에 미처 소장은 제5함대의 고속항공모함 부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미처 소장의 취임과 함께 제50기동부대는 제58기동부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은 미처 소장을 거부하는 스프루언스 제독을 무마하기 위하여 마셜 제도 작전에서 실패할 경우 미처 소장을 항모기동부대 사령관 자리에서 해임한다는 조건을 내걸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처 제독이 1척 이상의 항공모함을 지휘해 본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전임 사령관이었던 파우널 제독이 제5함대 사령관의 항공관계 고문이란 직함을 가지고 부싯돌 작전에 스프루언스 제독과 동행했다.
미처 제독으로서는 실로 치욕스러운 조치였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심혈을 기울여 제58기동부대를 지휘했다.
그가 부싯돌 작전에서 보여준 지휘 능력이 얼마나 훌륭했던지 작전이 끝나자 그를 강력하게 반대했던 스프루언스 제독마저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다루는 그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미처 제독. 자세한 설명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52832412 )

 

1944년 1월 초부터 후버 소장이 지휘하는 기지항공대(TF57) 소속의 B-24 72대, B-25 64대, 돈틀레스 54대, A-24(돈틀레스의 육군형) 24대, P-39 및 P-40 전투기 75대, 카탈리나 정찰기 90 대등 총 379대에 이르는 항공기들이 마셜제도의 밀리, 콰잘레인, 잴루잇, 말로에라프, 웟제 등지를 폭격하고 주변 해역에 기뢰를 투하했다.
이들 중 B-24는 앨리스 제도의 푸나푸티에서 출격했고, 전투기 및 B-25와 돈틀레스들은 11월에 확보한 메이킨과 타라와, 아베마마 환초에서 출격했다.
상륙예정지점인 콰잘레인 환초의 로이-나무르 섬과 콰잘레인 섬은 타라와 환초의 베티오 섬보다 방어가 허술했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심한 폭격을 받았다.

터너 소장이 지휘하는 상륙작전부대는 크게 2개의 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콰잘레인 환초 북부의 로이-나무르 섬을 점령할 임무를 가진 북부공격부대는 새로 건조된 상륙지휘함인 AGC-1 Appalachian 호에 승좌한 Richard L. Conoly 소장이 지휘하며 상륙할 부대는 해병제4사단으로 사단장은 Harry Schmidt 해병소장이었다.
콰잘레인 환초 남부의 콰잘레인 섬을 점령할 남부공격부대는 터너 제독 자신이 상륙작전용 지휘함인 AGC-3 Rocky Mount 에 타고서 지휘할 예정이었으며 상륙할 부대는 육군제7사단으로서 사단장은 Charles H. Corlett 소장이었다.
이들과는 별도로 수송선 Cambria 호에 승좌한 Harry W. Hill 소장이 지휘 하에  육군제106연대의 제2대대와 해병제1방어대대 및 제5상륙군단의 정찰중대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지상군이 마주로를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상륙군의 지휘관은 Frederic B. Sheldon 중령이었다.
그밖에 해병제22연대와 육군제106연대의 제1 및 제3대대 등 총 5개 대대가 예비대로서 해상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상륙할 지상군의 규모는 공격부대 5만 3천명에 기지방어부대 3만 5천명에 달했다.

한편 상륙부대를 엄호할 임무를 가진 제58기동부대는 정규항공모함 6척, 경항공모함 6척, 고속전함 8척, 중순양함 3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35척, 함재기 700 여대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4개의 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John V. Reeves 소장이 지휘하는 제58.1전단은 정규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 경항모 벨로우드, 고속전함 워싱턴, 인디애나, 메사츄세츠, 경순양함 오클랜드와 구축함 9척으로 이루어져 말로에라프 환초의 타로아 섬을 폭격한 후 콰잘레인 섬의 상륙을 지원하기로 되어 있었다.
Albert E. Montgomery  소장이 지휘하는 제58.2전단은 정규항공모함 에섹스, 인트레피드, 경항공모함 캐봇, 고속전함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다코타, 앨리배마, 경순양함 1척, 구축함 9척으로 이루어져 콰잘레인 환초의 로이-나무르 섬을 폭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Frederic C. Sherman 소장이 지휘하는 제58.3전단은 정규항공모함 벙커힐, 경항공모함 몬터레이, 카우펜스, 고속전함 아이오와, 뉴저지, 중순양함 위치타, 구축함 9척으로 이루어져 콰잘레인 환초의 콰잘레인 섬을 폭격한 후 에니웨톡 환초를 폭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엔터프라이즈의 제7대 함장을 지냈던 Samuel P. Ginder 소장이 지휘하는 제58.4전단은 정규항공모함 새러토가, 경항공모함 프린스턴, CVL-32 Langley, 중순양함 보스턴, 볼티모어, 경순양함 산후앙,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져 웟제 환초를 폭격하기로 했다.

1944년 1월 22일, 스프루언스 중장이 지휘하는 제5함대의 함정 353척은 마셜제도 공격작전을 위하여 진주만을 출항했다.
이들 중 제5함대의 고속항모기동부대인 제58기동부대는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진주만에 돌아오지 않았다.
대대적인 수리를 요하는 함정들만이 개별적으로 진주만으로 돌아왔을 뿐 기동부대는 해상에서 급유와 보급을 받으면서 필요할 때에는 마주로 환초와 울리시 환초의 전전기지에 들러 정박했다.

제58기동부대는 1944년 1월27일부터 마셜제도의 목표들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엔터프라이즈가 포함된 제58.1 전단은 말로에라프 환초의 타로아 섬을 폭격한 후 콰잘레인 환초로 와서 1월 30일부터 콰잘레인 섬을 폭격했으며 한편 콰잘레인 섬을 폭격하고 있던 제58.3 전단은 에니웨톡 환초로 가서 폭격과 함포사격을 가했다.
제58.1전단 소속의 고속전함 워싱턴, 인디애나, 메사츄세츠는 4척의 구축함과 함께 콰잘레인 섬에 대하여 16인치 철갑탄을 사용하여 함포사격을 가했다.  
1월 31일에 힐 제독이 지휘하는 상륙부대가 마주로에 상륙하여 간단히 점령했다.

같은 날인 31일 새벽 3시 30분, 남부공격부대의 제7보병사단 기병정찰중대와 제111연대의 B 중대가 고무보트를 타고 Cecil 섬과 Carter 섬에 상륙하여 21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섬을 점령하여 콰잘레인 초호로 들어가는 세실 통로를 확보했다.
해가 떠오르자 제17보병연대가 콰잘레인 섬에 인접한 Carlos 섬과 Carlson 섬에 상륙하여 3시간만에 점령했다.
오전 11시 25분부터 105mm 야포 4개 대대와 155mm 야포 1개 대대가 상륙하기 시작하여 오후 3시부터 콰잘레인 섬에 대하여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2월1일 아침이 되자 구형전함 펜실베니아, 아이다호, 뉴멕시코, 미시시피와 중순양함 미네아폴리스, 뉴올리언즈, 샌프란시스코가 상륙준비 사격을 시작하여 총 7,000 여발의 14인치, 8인치, 5인치 포탄을 콰잘레인 섬에 퍼부었고, 전날 점령한 칼로스 섬과 칼슨 섬의 포병대는 상륙준비 포격으로 총 29,000 발의 105mm 및 155mm 포탄을 콰잘레인 섬에 퍼부었다.
제58.1전단과 호위항공모함 마닐라베이, 코랄시, 코레히돌에서 발진한 함재기에 더하여 아베마마 섬에서 발진한 B-24 리버레이터 6대도 폭격에 참가하여 15발의 450kg 및 900kg 짜리 폭탄을 투하했다.
콰잘레인 섬에 가해진 폭탄과 포탄의 양은 베티오 섬의 4배나 되었다.
UDT 대원들이 수로를 확보하고, 수중장애물과 기뢰를 제거하기 위하여 투입되었으나, 하나도 없었다.
웟제나 말로에라프 같은 마셜제도 외곽의 환초가 먼저 공격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던 일본군들에게 미군의 콰잘레인 상륙은 완전한 기습이었다.

오전 9시 30분에 제7보병사단이 콰잘레인 섬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대량의 앰트랙과 DUKW(수륙양용트럭)에 실려 신속하게 해안에 도착한 미군에게 상륙준비포격에서 겨우 살아남은 일본군의 기관총과 박격포가 반격을 가해 왔으나 그리 위력적이지 못했다.
상륙준비포격의 위력은 대단하여 해안에 도착했을 때 공병대가 폭파시킨 토치카는 단 하나뿐이었으며 나머지는 이미 준비포격으로 인하여 파괴된 상태였다.
그날 저녁까지 제7보병사단의 6개 보병대대와 4개 전차중대가 상륙을 마쳤다.
상륙한 미군은 곧 일본군을 소탕하기 시작하여 2월 4일까지 완전히 섬을 장악했다.

콰잘레인 섬의 점령과 동시에 콰잘레인 주변의 작은 섬들에 대한 공격도 실시되어 2월 2일부터 Chauncey 섬,Burton 섬,Buster 섬, Byron 섬, Burnet섬, Blakenship 섬, Bennet 섬 등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4일까지 전부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콰잘레인 섬 상륙작전에서 제7사단은 총 177 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콰잘레인 섬의 수비대는 총 5,144명의 병력을 가졌으며 그 중 절반 가량이 전투부대였는데 206명의 포로를 제외한 4,938 명이 전사했다.
미군은 전사한 일본군 중 50-75% 정도가 상륙준비포격에 의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콰잘레인 섬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로이-나무르 섬에서는 해병제4사단이 터너 제독 지휘 하에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해병제4사단도 콰잘레인 섬과 마찬가지로 주력의 상륙을 하루 앞둔 1월 31일 오전에 2개 섬(Ivan, Jacob)에 상륙을 실시하여 콰잘레인 초호로 진입하는 통로를 확보했고 이어서 로이 섬의 남쪽에 있는 3개의 섬 (Albert, Allen, Abraham)에 상륙을 실시, 그날 안으로 모두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135명의 일본군을 사살했으며 자신들은 26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곧 해병대의 포병대가 상륙하여 로이-나무르 상륙에 대비하여 상륙준비포격을 시작했다.
2월1일 새벽이 되자 구형전함 테네시, 콜로라도, 메릴랜드와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 루이스빌이 구축함들과 함께 로이 섬의 상륙예정지점에 대하여 포격을 시작했다.
제58.2전단에 더하여 호위항모 생가몬, 스와니, 체난고의 함재기들도 로이 섬을 폭격했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된 해병제4사단의 상륙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해병대는 일본의 어뢰저장고를 폭파하는 바람에 주변을 진군하던 해병대 20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하는 참사를 겪으면서도 착실히 진격하여 그날 밤 안으로 로이 섬과 방죽길로 연결된 나무르 섬까지 진입했다.
밤사이 나무르 섬의 일본군은 몇 차례의 야습을 결행했으며 한번은 100명 가량의 일본군이 해병대의 방어선에 돌입하여 해병대와 백병전까지 치르는 격전 끝에 전멸했다.
하지만 이런 공격은 일본군의 전력을 급속하게 소진시켜서 해병대는 상륙한 지 27시간 만인 2일 낮 12시 15분에 로이-나무르 섬의 점령을 선언했고, 곧이어 로이-나무르 섬에 인접한 작은 섬들을 점령했다.
해병대는 이 로이-나무르 섬의 점령과정에서 190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로이-나무르를 수비하던 일본군은 3,563 명의 병력 중에서 포로 91명을 제외한 3,472 명이 전사했다.

곧 새로 점령한 콰잘레인 섬과 로이-나무르 섬에 해군건설대대가 도착하여 탈취한 일본군의 비행장을 정비했고 미군의 항공기들이 진출하여 작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콰잘레인 환초와 동시에 점령한 마주로 환초는 제58기동부대의 전진기지로 사용되었다.
마주로 환초가 함락되자마자 제10지원전대가 이곳에 와서 활동을 개시했다.
실제로 2월 1일에 콰잘레인 섬을 포격하던 고속전함 워싱턴과 인디애나가 서로 충돌한 일이 있었는데 두 전함 다 마주로가 점령된지 만 3일밖에 안 된 2월2일에 마주로 환초에 와서 임시로 수리를 받은 후에 진주만으로 회항했다.  

 

(전함 인디애나와의 충돌로 파괴된 전함 워싱턴의 함수)

아직도 북부 마셜제도에는 웟제와 말로에라프 등의 환초가 일본군의 수중에 남아 있었으나 부싯돌 작전 기간 동안에 제58기동부대에 의하여 철저하게 얻어맞은데다가 제대로 피해를 추스르기도 전에 콰잘레인 환초에서 작전하는 미군항공기들에 의하여 지속적인 공습을 당하면서 완전히 무력화되어 이 지역에서 작전하는 미군에게 아무런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사실 웟제와 말로에라프 환초가 일본군의 수중에 남아 있었어도 제58기동부대는 남부 마셜제도의 마주로 환초를 전진기지로 사용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위협이나 불편도 느끼지 않았다.
일본군이 태평양 초기의 남방작전에서 했듯이 마셜제도의 강력한 중점인 콰잘레인을 점령하면 항공력을 활용하여 주변의 환초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본 니미츠 제독의 판단은 정확했다.

콰잘레인 환초의 점령이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적은 피해만을 내고 이루어져서 예비부대로서 해상에 대기하고  있던 해병제22연대와 육군제106연대의 2개 대대를 중심으로 편성된 8,000 여명의 병력이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니미츠 제독은 함대를 재편성할 필요없이 이 예비병력을 활용하여 에니웨톡 환초에 상륙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니미츠 제독은 에니웨톡 환초 점령작전인 집달리 작전(Operation Catchpole)의 개시일을 원래 예정되었던 5월 1일에서 앞당겨 2월 17일에 실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에니웨톡 환초를 고립시키고 일본해군의 구원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하여 제58기동부대 중에서 제58.4전단을 제외한 3개 전단을 동원하여 에니웨톡 환초에서 불과 1,070km 거리에 있는 일본연합함대의 근거지인 트럭 섬을 공습하기로 했다.
제58.4전단은 에니웨톡 상륙부대에 대한 직접 엄호를 담당하기로 했다.

엔터프라이즈는 부싯돌 작전 기간 중에 제10비행단에서 3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