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기동부대가 트럭 환초를 공습하는 동안 Hill 제독이 이끄는 해병제22연대와 육군제106연대의 2개 대대는 제58.4전단의 엄호 하에 마셜제도의 에니웨톡 환초를 점령하는 집달리 작전(Operation Catchpole)을 실시했다.
‘집달리’란 법원의 판결에 따라 채무자의 물품 등을 압류하는 관리를 가리킨다.
에니웨톡을 방어하는 일본군은 1944년 1월 4일에 상륙한 일본제1상륙여단으로 애니웨톡 섬, 엔게비 섬, 페리 섬에 합쳐서 2,759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하여 미군의 상륙부대는 해병대 5,820명, 육군 4,556 명 등 총 10,376 명이었다.
상륙부대 사령관 힐 제독은 수비군과의 병력비율이 6:1 이상이었던 콰잘레인 환초와 달리 병력비율이 3:1 정도 밖에 안 되므로(미군은 에니웨톡 환초의 일본군을 3,000-3,500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었다.) 목표지점인 엔게비 섬, 에니웨톡 섬, 페리 섬을 차례차례로 점령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2월 17일 새벽 5시부터 구식전함 콜로라도와 중순양함들이 엔게비 섬, 에니웨톡 섬, 페리 섬을 포격하면서 시작된 집달리 작전은 그날 안으로 해병대가 엔게비 섬에 인접한 CANNA 섬와 CAMELLIA 섬을 점령한 후 포병대가 상륙하여 엔게비 섬을 포격하였고, 18일 오전 8시 44분에 736명의 일본군이 지키고 있던 엔게비 섬에 상륙한 해병제22연대의 2개 대대가 오후 6시 30분에 섬을 사실상 장악하면서 반나절만에 제1단계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제2단계인 에니웨톡 섬에는 육군제106연대의 2개 대대가 19일 오전 9시 18분에 상륙하였는데 앞서 엔게비 섬의 경우와는 딴판으로 908 명의 병력을 가진 일본군 수비대에게 전진이 가로막혀 예비대인 해병제22연대의 제3대대를 투입하고서도 실로 53시간 만인 21일 오후 2시 30분에야 섬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점령이 이렇게 늦어지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엔게비 섬에서 잡은 포로를 심문한 결과 에니웨톡의 수비대 숫자가 500 명 정도라는 그릇된 정보를 얻은 힐 제독이 당초 계획과 달리 에니웨톡 섬에 대한 준비포격을 충분하게 실시하지 않았다.
사실 엔게비 섬에 대해서는 1179.7 톤의 포격을 퍼부었고, 제3단계인 페리 섬에도 944.4 톤의 포탄을 쏟아부은 것과는 달리 에니웨톡 섬에는 불과 204.6 톤의 포격만이 가해졌고 게다가 8인치 이상의 대구경 포탄은 단 1발도 없었다.
그리고 엔게비 섬과 페리 섬과는 달리 에니웨톡 섬의 주변에는 포병대가 상륙하여 포격지원을 할 만한 작은 섬이 없었기 때문에 포병대의 지속적이고 효율적인 지원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소부대의 가벼운 반격에도 전 중대가 완전히 얼어붙어서 꼼짝도 못하는 등 에니웨톡 섬에 상륙한 육군제106연대전투단의 전투력이 한심한 수준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증원부대로 참가한 해병대원들이 절실히 느낀 점이었다.
실제로 제106연대전투단이 소속된 육군제27사단의 메이킨 환초 상륙전에서는 전진이 너무나 느린 바람에 제27사단장 랄프 스미스 소장에게 ‘소리를 지르기’ 위하여 상륙했던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이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총질을 해대는 한 중대를 발견하고 그 중대장을 불러
“한번 더 자네 중대의 작전구역에서 총소리가 나면 자네 중대의 모든 무기와 탄약을 몰수하겠다.”
고 호통을 친 적도 있었다.
게다가 메이킨 환초에서 제27사단이 섬을 빨리 점령하지못하고 우물거리는 바람에 호위항모 리스컴베이가 일본잠수함의 어뢰에 맞아 침몰하면서 전단 사령관을 비롯하여 육군 전사자의 10배 가까운 전사자를 기록하는 참극을 겪었던 해군의 반감이 더해지면서 대번에 제27사단은 훈련도 형편없고 지도력도 엉망이라는 평판이 태평양함대 내에 쫙 퍼졌다.
제27사단에 대한 해병대와 해군의 이러한 극심한 반감은 6개월 후에 벌어진 사이판 상륙작전에서 결국 폭발하여 그 급한 성질 때문에 ‘울부짖는 미치광이(Howling Mad)’라는 별명을 가진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이 제27사단장인 랄프 스미스 소장을 해임함으로써 육군 사단장이 해병대 장군에 의하여 해임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
에니웨톡 섬에서 고전하면서 일본군 포로의 진술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힐 제독은 제3단계인 페리 섬 공략 때에는 당초 예정대로 충분한 준비포격을 실시한 후에 2월22일 오전 9시 8분부터 상륙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일본군 제1상륙여단의 사령부가 있고 1,115명의 병력이 주둔하여 에니웨톡 환초에서 가장 강력한 방어력을 가진 페리 섬에 상륙한 해병제22연대는 질풍같이 섬을 휩쓸어서 상륙한지 10시간 만인 오후 7시 30분에 섬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에니웨톡 환초도 미국의 손에 들어왔다.
집달리 작전 기간을 통하여 미국은 339명의 전사자를 기록했고 일본군은 2,000 명 이상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집달리 작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imkcs0425/60071563718 이하의 연재를 참조)
대단히 성공적이라고 평가된 마셜제도 공략이 끝나자 태평양함대 지휘관들의 어깨에는 그야말로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우선 제5함대 사령관인 스프루언스 중장이 1944년 2월 6일자로 대장으로 진급하여 니미츠 제독과 핼시 제독의 뒤를 이어 태평양함대에서 3번째로 대장계급장을 달았고, 제5상륙부대 사령관인 터너 소장도 사보 해전에서의 참패가 잠시 논란이 되기는 했으나 3월 7일에 중장으로 승진했다.
3월 14일에는 제5상륙군단장인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이 중장 계급장을 달았고, 다시 1주일 후인 3월 21일에는 잠정적으로 제58기동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미처 소장이 중장으로 승진하면서 정식으로 제58기동부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엔터프라이즈가 포함된 제58.1전단은 트럭 대공습을 마친 후 마리애나 제도를 폭격하러 간 나머지 전단들과 헤어져 2월 20일에 마셜 제도의 잴루잇 환초를 폭격한 후 마주로로 향했다.
마리애나 제도에 접근하던 제58.2전단과 제58.3전단은 사이판 섬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의 기지항공대에 발견되어 2월 21일 밤에 4차례에 걸친 공격을 받았으나 레이더와 VT신관을 채용한 함대의 대공포화로 반격하여 자신들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채 일본기 42대를 격추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2월 22일과 23일에 사이판, 괌, 티니안을 공격한 제58기동부대는 일본기 126대를 추가로 격추하거나 지상에서 파괴하고 수송선 4척을 격침했으며 침공에 대비하여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제58기동부대의 공격으로 인하여 합계 168대의 항공기를 상실한 마리애나 제도의 일본군 기지항공대는 공격이 끝난 후에 불과 10여대가 남았을 뿐으로 사실상 전멸하고 말았다.
한편 잴루잇 폭격을 마치고 마주로 환초에서 휴식과 재정비를 마친 제58.1전단은 3월 7일에 제36.1전단으로 이름이 바뀌어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에서 실시하는 에미라우 섬 상륙작전을 엄호하기 위하여 에스피리투산토로 떠났다.
제36.1전단은 해병제4사단의 에미라우 상륙을 엄호하기 위하여 3월 15일에 에스피리투산토를 떠나서 상륙일인 3월20일부터 25일까지 에미라우 앞바다에서 항공엄호를 맡았다.
라바울에 대한 포위망의 일환으로 실시된 에미라우 상륙은 일본군의 방해가 없었기 때문에 평화롭게 실시되었다.
에미라우 섬에 비행장을 건설한 남태평양해역군은 여기서 항공기들을 내보내어 라바울 인근의 캐비엥을 무력화시킴으로써 라바울에 대한 포위망을 한층 더 강화시킬 수 있었다.
(에미라우 상륙작전에서 항공기를 이함시키는 엔터프라이즈. 1944년 3월 20일)
3월25일에 에미라우 섬을 떠난 제36.1전단은 3월27일에 다시 58.1전단이 되어 팔라우 제도를 공격하러 가는 제58기동부대에 합류했다.
3월 27일, 팔라우의 남동쪽 900km 해상에서 접근 중인 제58기동부대를 발견한 일본연합함대는 즉시 휘하 함정들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이때 팔라우 주변에 매복하고 있던 미국잠수함 중 1척인 Turney 가 출항하는 대형전함 무사시에 3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그 중 1발을 좌현선수에 명중시켰다.
무사시는 수리를 위하여 구레 군항으로 향했다.
제58기동부대는 3월28일 새벽부터 3월 30일까지 팔라우에 격렬한 공습을 가하여 189대의 일본기를 격추하거나 지상에서 파괴하고 아직까지 항내에 남아있다가 허겁지겁 탈출하던 구축함 와카다께와 함대급유선, 수송선 및 소형함정 등 합계 30척을 격침했다.
(팔라우 제도 공습 도중 엔터프라이즈 소속 제10항공전대의 공격으로 폭발하는 일본구축함 와카다케. 1944년 3월 30일)
30일에는 인근의 앙가우르 섬도 공격하여 소형함정 9척을 추가로 격침했다.
제58기동부대는 팔라우 공습에서 27대의 함재기를 잃었다.
그리고 팔라우 폭격의 와중에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고가 제독이 대형비행정에 타고 필리핀의 다바오로 비행하던 중 민다나오 섬 부근에서 악천후로 실종되었고, 다른 비행정에 탔던 참모장 후꾸도메 제독은 해상에 불시착하여 필리핀의 연합군 계열 게릴라들에게 일본연합함대의 방어작전계획이 담긴 극비서류를 뺏겼다.
그리하여 미군은 일본의 방어계획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후꾸도메 참모장은 며칠 후에 일본군 수색대에 의하여 구조되어 상부에 극비서류를 뺏긴 사실을 보고했으나 상부에서는 게릴라들이 그 서류의 가치를 알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는 팔라우 공습에서 제10폭격비행대 소속 1대의 돈틀레스가 격추되어 2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팔라우 제도를 떠난 제58기동부대는 3월 31일에는 캐롤라인 제도의 야프 섬과 그 곳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울리시 환초를 폭격하여 비행장과 지상 시설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경비정 한 척을 격침했다.
4월 1일에는 같은 캐롤라인 제도의 Woleai 환초를 공습하여 지상 시설에 큰 피해를 입히고 제50.2전단 소속의 구축함 Hickox와 Hunt가 두 척의 일본경비정을 격침했다.
(제58기동부대의 공습을 받고 있는 월레아이. 1944년 4월 1일)
제58기동부대는 4월6일에 마주로 환초에 돌아왔다.
4월 13일, 제58기동부대는 남서태평양해역군의 홀랜디어 상륙을 엄호하기 위하여 마주로를 떠났다.
엔터프라이즈는 정규항공모함 렉싱턴, 경항공모함 프링스턴, 랭글리와 함께 리브스 제독의 지휘하에 제58.3전단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전단에는 고속전함 중 뉴저지를 제외한 6척도 포함되어 있었다.
4월 19일에 에스피리투산토 북방에서 급유를 마친 제58기동부대는 뉴기니아의 홀랜디어로 향했다.
4월 21일에 홀랜디어 부근 해상에 도착한 제58기동부대는 24일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22일에 실시된 남서태평양해역군의 홀랜디어 상륙을 엄호하면서 홀랜디어, 와크데 섬, 사와르 등지를 폭격했다.
일본기들의 반격은 거의 없었다.
(제58기동부대의 공습을 받고 있는 홀랜디어 부근의 일본군 비행장. 탄공과 함께 불타는 비행기 및 망가진 비행기들이 보인다. 1944년 4월 21일)
3월 말까지만 해도 홀랜디어에는 350 대 가까운 일본기들이 모여 있었고 또한 서부 뉴기니아의 보겔캅 반도에도 대규모의 일본군 항공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3월 26일에 홀랜디어 상륙작전 지원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맥아더 장군의 사령부에서 열렸던 회의에서 니미츠 제독은 제58기동부대의 안전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었다.
그러자 남서태평양해역군에서는 다윈에서 출격하는 장거리 폭격기들을 활용하여 보겔캅 반도의 일본기들을 통제하여 제58기동부대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홀랜디어의 일본기들은 제5항공대 사령관인 케니 소장이 제5항공대의 항공기들을 동원하여 상륙작전 당일까지 전멸시켜 버리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니미츠 제독을 비롯한 태평양함대의 제독들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이 동네는 모두들 맥아더를 닮아서 큰소리 하나는 잘 치는구만..’
하는 정도로 치부하고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케니 소장은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제5항공대는 3월 30일에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 60대에 항속거리가 연장된 신형 P-38 라이트닝을 호위로 붙여서 홀랜디어 부근의 일본군 비행장을 폭격했다.
자신들의 위치가 미군전투기 항속거리 밖이라고 믿고 있던 일본군들은 완전히 기습을 당했다.
이 폭격으로 기선을 제압한 제5항공대는 이후 지속적인 공습을 통하여 홀랜디어 상륙일인 4월 22일까지에는 말 그대로 홀랜디어 부근 일본기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홀랜디어 앞바다를 떠나기 전에 제58기동부대는 새터완 폭격을 위하여 중순양함 9척과 구축함 8척을 따로 편성하고, 리 제독에게 7척의 고속전함을 전부 몰아주어서 제58.7전단을 형성, 포나페를 포격하도록 했다.
새터완 포격부대는 4월 30일에 새터완을 포격했고, 제58.7전단은 5월 1일에 포나페를 포격했다.
제58기동부대는 홀랜디어 앞바다를 떠나 마주로로 돌아오는 도중 4월 29일과 30일에 재차 트럭 환초를 폭격했다.
2월의 대공습 때와 마찬가지로 전투기들의 제공권 장악으로 시작되어 하루 종일 지속된 이틀 간의 폭격에서 제58기동부대는 일본군들이 라바울에서 끌어와서 겨우 보충해 놓은 항공기들을 중 59대를 격추하고, 34대를 지상에서 파괴함으로써 싹쓸이했다.
실제로 공습 다음날인 5월 1일에 트럭 환초에서 작전 가능한 항공기는 불과 12대에 지나지 않았다.
트럭 환초 내에 이미 함선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격이 지상 건물에 집중되어 공습이 끝나자 트럭 환초는 흡사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만 2월의 대공습 이후 지상의 대공포가 많이 증강되었기 때문에 미함재기의 상실댓수는 26대로서 대공습 때와 비슷했다.
제58기동부대는 대공습 때의 경험을 교훈삼아 이번에는 상당히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탈출 조종사들의 구조작업을 펼쳤다.
트럭 환초 주변의 잠수함들은 순전히 조종사의 구조임무만 맡고 있었고, 공격대에게는 구조작업에 임하는 아군잠수함을 공격하지 않도록 엄중한 경고가 몇 번씩이나 거듭하여 주어졌다.
또한 폭격 중인 트럭 환초 부근 해상에는 중순양함들에게서 발진한 수상정찰기들이 아예 해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이들 수상 정찰기들은 가끔씩 초호 내로 들어가서 그곳에 떨어진 조종사들을 구해와서는 환초 바깥의 잠수함에 인계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제58기동부대는 2일에 걸친 폭격 기간 동안 잠수함 Tang 이 22명을 구한 것을 비롯하여 격추된 조종사 중 거의 대부분인 46명을 구조했다.
엔터프라이즈에서는 다행히 이번 공습에서는 단 1명의 전사자도 내지 않았다.
2월의 대공습으로 정박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남방으로 전개하는 일본항공기들의 중계기지로서만 기능하던 트럭 환초는 이번 공습으로 중계기지로서의 기능마저 상실하여 완전히 쓸모없는 기지로 전락했다.
제58기동부대는 5월 14일에 마주로에 돌아왔다.
(마주로 환초에 정박 중인 제58기동부대의 함정들을 배경으로 해군수병들이 해수욕을 하면서 모처럼의 휴식을 즐기고 있다.
사진에서 가장 왼쪽에 보이는 항공모함이 엔터프라이즈. 마리애나 제도 상륙작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944년 5월에 찍은 사진이다.)
1944년 6월 6일, 3주 동안의 휴식과 보급, 재정비를 마친 제58기동부대에 다시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일본군이 설정한 절대방어선의 가장 중요한 고리인 마리애나 제도를 탈취하려는 약탈자 작전(Operation Forager)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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