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끼나와 함락 이후 일본의 처지는 급전직하로 추락해 갔다.
마리애나에서 출격한 B-29는 일본의 대도시들뿐만 아니라 중소도시까지 대부분 불태워 버렸고, 일본 연안에 투하된 기뢰와 미잠수함들 때문에 섬나라인 일본의 해상교통이 사실상 마비되었다.
5월 28일에 제38기동부대로 바뀐 미국의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는 1945년 7월 10일부터 일본 본토 공습에 나서서 도꾜를 공습했고, 14일에는 홋까이도까지 진출하여 폭격을 가했다.
7월 15일에는 고속전함 사우스다코타, 인디애나, 메사추세츠가 도꾜에서 북동쪽으로 440km 거리에 위치한 데이코쿠 제철소에 포격을 가했다.
이제 미국의 전함이 일본 본토에 직접 포격을 가하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혼슈 북부와 홋까이도 공격을 마치고 남하한 제38기동부대는 7월 24일부터 28일까지 구레 군항을 비롯한 일본 남부 해안에 맹공을 가하여 겨우 살아남아있던 전함 이세, 히우가, 하루나, 중순양함 도네, 아오바 등을 위시한 수많은 함정들을 격침했다.
7월 31일부터 해상에서 연료보급을 실시한 제38기동부대는 다시 북상하여 8월 9일부터 홋까이도와 한반도, 혼슈 북부를 강타한 다음 8월 10일부터 도꾜 인근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처한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일본의 전쟁 지도부는 미군의 본토상륙에 대비하여 10,000 대의 가미까제 특공기를 준비하고, 1억 옥쇄의 구호 아래 민간인들에게 죽창까지 들려서 군사훈련을 시키는 등 본토결전 준비에 광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지도부의 이런 미친 짓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이 일본과의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만주를 침공하자 드디어 끝났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단 한 발로 B-29 2,000 대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는 원자폭탄을 보유한 미국에 맞서서 더 이상 저항한다는 것은 일본민족의 멸절을 가져올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일본의 전쟁지도부는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1945년 8월 15일에 연합국측에 무조건 항복했다.
이로써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3년 8개월 만에 끝났다.
항복조인식은 1945년 9월 2일에 도꾜만 내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 함상에서 열렸다.

 

 

(1945년 9월 2일에 도쿄 만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 함상에서 열린 항복조인식의 한 장면. 연합군 대표인 맥아더 장군이 지켜보는 가운에 우메즈 장군이 일본군을 대표하여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엔터프라이즈는 진주만 기습 당일부터 태평양 전쟁에 참가하여 1945년 5월 16일에 전쟁에서 물러날 때까지 3년 6개월 동안 미해군이 실시한 22회의 항공모함 작전 중에서 20회의 작전에 참가했다.
이 기간 동안 엔터프라이즈의 항공대는 71척의 적함을 격침하고, 최소한 192척의 적함에게 크고 작은 피해를 입혔으며, 엔터프라이즈의 대공포와 협력하여 911대의 적기를 격추했다.
그 대가로 엔터프라이즈는 함정 승무원 147명, 항공기 승무원 238명 등 총 385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퓨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에서 수리를 마친 엔터프라이즈는 1945년 9월에 진주만에 가서 새로이 제55야간항공단을 적재했다.
1945년 9월 25일, 엔터프라이즈는 진주만을 떠나 파나마 운하를 경유하여 뉴욕을 향했다.
엔터프라이즈 최후의 임무인 4번의 마법 양탄자 항해(Magic Carpet voyage)중 첫번째 항해였다.
마법 양탄자 항해는 해외에 나가있던 미군들을 귀국시키는 임무였다.
엔터프라이즈는 환자들과 일본군에게 잡혀있다가 석방된 포로들을 포함한 1,141명의 장병을 싣고, 10월 17일에 뉴욕에 도착하여 27일에 열리는 ‘해군의 날’(Navy Day) 행사 때까지 그곳에서 머물렀다.

 

(뉴욕 항에 계류한 엔터프라이즈를 보려고 몰려든 인파들. 1945년 10월 17일) 


태평양 전쟁에서 엔터프라이즈의 활약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연일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면서 관심의 초점이 되어 이 기간 동안 허드슨 강 26번 부두에 정박해 있던 엔터프라이즈를 찾은 관람객의 수는 25만 명을 넘었다.
엔터프라이즈는 27일 오전에는 트루먼 대통령을 태우고 정박한 함선들이 전방을 통과하며 해상 열병식을 치렀고, 그날 오후에는 엔터프라이즈의 군악대가 수천명의 해군 및 해병대의 선두에 서서 수백만 시민의 열화 같은 환호를 받으며 뉴욕 한복판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 승전 퍼레이드(World War 2 Victory Parade)를 이끌었다.
저녁이 되자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제55야간 항공단이 등화를 환하게 켜고 뉴욕시 상공에서 편대비행을 실시했다.
 
엔터프라이즈의 영광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45년 11월에 2번째 마법양탄자 항해를 위하여 영국의 사우댐턴 항에 들렀을 때 엔터프라이즈는  영국 해군 최고의 명예인 해군성 깃발(Admiralty Pennant)을 받은 최초의 –그리고 오늘날까지 유일한- 외국 함정이 되었다.

 

(British Admiralty Pennant)


이 항해에서 엔터프라이즈는 4,668명의 장병들을 유럽에서 귀국시켰고, 3번째 항해에서 다시 사우댐턴 항에 가서 4,413 명의 장병들을 싣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뉴욕 항에 입항했다.
마지막 마법양탄자 항해에서 엔터프라이즈는 아조레스 제도에서 3,557 명의 장병을 싣고 1946년 1월 17일에 뉴욕 항에 입항했다.
다음날인 1946년 1월 18일, 엔터프라이즈는 뉴저지 주의 베이욘에 정박하여 12년 6개월간의 긴 휴식에 들어갔다.
이후 엔터프라이즈는 해체될 때까지 결코 자력으로 항해를 하지 않았다.

 

바다에 나가지 않으면서도 현역 함정의 지위를 유지하던 엔터프라이즈는 1947년 2월 17일에야 비로소 퇴역하여 대서양예비함대에 편입되었다.
예비함으로서 1952년에는 CVA-6 가 되었다가, 1953년 8월 8일부터는 CVS-6가 되었다.
엔터프라이즈가 다시 현역에 복귀할 가능성은 없었다.
1945년 9월 10일에 에섹스 급의 후계함인 CVB-41 Midway가 취역했고, 이미 예정되었던 에섹스 급의 건조가 줄줄이 취소되는 상황에서 에섹스 급보다 더 낡은 함정인 엔터프라이즈를 개조하여 현역에 복귀시킨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엔터프라이즈가 모스볼 상태로 지내는 동안 이 배를 해상박물관으로 만들어 영구보존하고자 하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그 첫번째 시도로서 1946년에 뉴욕 주 의회가 엔터프라이즈를 뉴욕 주에 기증해 줄 것을 해군 측에 요청했으나, 예산의 뒷받침이 되지 않아서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3년 후인 1949년에 샌프란시스코 과학 및 산업 박물관(San Francisco Museum of Science & Industry) 측에서 샌프란시스코 만에 있는 Treasure Island Naval Air Station 에 엔터프라이즈를 영구 전시하자는 안을 내었으나 역시 예산 문제 때문에 해군에서 거절했다.
1954년, 엔터프라이즈에서 근무했던 장병들이 모여 시카고에서 엔터프라이즈 협회(USS Enterprise CV-6 Asoociation)를 만들었다.

1956년에 해군이 더 이상 모스볼 상태로 두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함선들의 리스트를 발표했는데 그 중에 전함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다코타, 워싱턴의 이름과 함께 엔터프라이즈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엔터프라이즈가 당장 해체될 위기에 처하자 엔터프라이즈 협회는 어떻게든 엔터프라이즈를 살리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다.
자비로 신문에 광고를 내고, 엔터프라이즈 기동부대의 사령관을 지냈던 핼시 원수의 지원을 받아서 엔터프라이즈 협회는 엔터프라이즈를 국가 기념물로 지정하여 해상 박물관으로 만들라고 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엔터프라이즈 협회 제3차 총회. 350 명 이상이 참석한 가운데 1956년 9월 1일 뉴욕의 쉐라톤 애스터 호텔에서 열린 이 총회에서 해체 위기에 처한 엔터프라이즈 구명운동을 벌이자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미의회는 일단 엔터프라이즈를 영구보존하자는 취지에는 동의했으나 이번에도 문제는 돈이었다.
엔터프라이즈를 해상박물관으로 만들고 유지하려면, 소요금액의 거의 전부를 국고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는데 모스볼 상태의 엔터프라이즈를 적당한 지역으로 옮겨서 해상 박물관으로 만들고 유지하려면 최초의 6개월 동안에만도 최소한 20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의회는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
당시 미국 국내의 분위기는 가급적 빨리 제2차 대전으로 마무리된 암울한 20세기의 전반기를 잊어버리고, 미국이 명실상부한 주역을 맡게 된 20세기 후반기의 희망을 주로 이야기하며 특히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 관심을 쏟는 분위기였다.
세계의 운명을 결정지은 거대한 전쟁에서 미국의 역할을 상징하는 위대한 군함을 보존해야만 할 역사적인 필요성을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깨달으려면 아직도 세월이 더 흘러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엔터프라이즈의 영구 보존을 위하여 납세자들의 세금인 국고를 매년 수백만 달러씩 지출하자고 주장할만큼 투철한 역사의식과 용기를 가진 의원은 거의 없었다.
이후 세월이 좀 더 흐르자 대다수의 미국인들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함정들을 영구보존해야만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어, 1974년에 퇴역한 에섹스 급 항공모함인 인트레피드나 몇 번씩이나 퇴역과 재취역을 반복하다가 1992년에 최종적으로 퇴역한 아이오와급 전함인 미주리 등은 해상박물관으로 살아남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어떻게든 엔터프라이즈를 구하기 위하여 대중적인 압력을 지속적으로 가해오는 엔터프라이즈 협회와 말만 그럴싸하게 하면서 엔터프라이즈의 영구 보존을 위한 예산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정치적 위험을 무릅쓸 생각은 전혀 없는 의회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지속적으로 엔터프라이즈의 모스볼 비용만 지출하고 있던 해군은 결국 엔터프라이즈 협회 측과 협상을 시도했다.
엔터프라이즈 협회 측도 이미 말과 행동이 다른 의회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엔터프라이즈를 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순순히 해군과의 협상에 임했다.
이 협상에서 협회 측은 엔터프라이즈를 구하자는 대중운동을 중단, 해군으로 하여금 엔터프라이즈를 고철로 매각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 줌으로써 모스볼 유지에 들어가는 예산을 절감할 수 있도록 해 주기로 합의했다.
대신 해군 측은 곧 건조에 들어갈 예정이던 세계 최초의 원자력 항공모함인 CVN-65 에 ‘엔터프라이즈’ 의 함명을 쓰기로 하고, 또한 엔터프라이즈의 어느 부분이든지 협회가 이 위대한 항공모함을 기념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부분은 자유롭게 떼어가서 적당한 기관에 기증하거나 적합한 장소에 옮겨 전시하는 것을 허용했다.
또한 엔터프라이즈의 사령탑 부분을 애나폴리스 해군-해병 사관학교의 스터디움에 옮겨서 사관학교 풋볼팀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로 했으나, 예산문제로 취소되고 대신 풋볼 팀을 위한 건물을 ‘엔터프라이즈 타워’로 명명했다.
엔터프라이즈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을 위시한 많은 사람들이 새러토가가 해중원폭실험에 동원되어 사라진 지금, 태평양 전쟁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전했고, 세계 해전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린 함정으로서 역사적 가치로 따져볼 때 콘스티튜션, 빅토리, 콘스텔레이션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 엔터프라이즈를 예산 몇 푼 아끼려고 한낱 고철로 처분하려는 의회와 해군에 대하여 분통을 터뜨렸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1958년 7월 1일 , 엔터프라이즈는 해체되기 위하여 매각되었다.

 

(뉴저지 주의 커니에서 해체작업을 기다리는 엔터프라이즈. 1958년 가을에 찍은 사진이다.)


엔터프라이즈의 해체 작업은 1960년 6월에 끝났다.
1984년에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 해군항공기지의 해군항공박물관에 영구적인 엔터프라이즈 전시실이 마련되어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헌, 사진 및 기타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엔터프라이즈의 종은 미해군사관학교에 있는데 전통적으로 웨스트포인트와의 시합에서 이겼을 때에만 울린다고 한다.

 

(애너폴리스에 있는 미해군사관학교의 밴크로프트 홀 앞에 있는 엔터프라이즈의 종)


엔터프라이즈의 고물에 붙어있던 길이 4.8m, 무게 1톤짜리 이름판은 뉴저지주 리버베일의 참전용사 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뉴저지 주 리버베일에 있는 엔터프라이즈의 함미 이름판)


워싱턴 D.C. 의 Washington Navy Yard 에는 엔터프라이즈의 닻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이외에도 엔터프라이즈의 물품들 몇 가지가 CVN-65 엔터프라이즈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 참고자료

(1)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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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미츠 전기> 김주식 역, 신서원, 1997년
<승리와 패배- 제8권 과달카날, 제12권 B-29, 제14권 오끼나와, 제16권 가미까제 특공대> 동도문화사, 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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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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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orldatwar.net/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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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꾸스이 2호 작전은 4월 12일과 13일에 걸쳐 실시되었다.
가미까제 특공기 200 대와 호위기 및 공격기 192대가 출격했다.
2호 작전에서는 일본의 신형특공기인 사꾸라바나 8기가 출동하여 구축함 에이벨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사꾸라바나는 전장 6.1m, 전폭 5.1m 인 일종의 유익 목제 미사일로서 기수 부분에 1,200kg의 폭약을 적재하고 추력 800kg 짜리 로켓 엔진 3개를 달아서 900km/hr의 고속으로 37km 를 비행할 수 있었다.
사꾸라바나는 베티 육상공격기에 매달려서 목표 근처에 도달하면 모기에서 분리하여 돌입하는 방식이었는데, 빠른 속력과 강력한 파괴력에 더하여 생산의 용이성 때문에 궁극의 특공병기로서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실제 전과는 상당히 부진하여 이날 격침한 에이벨이 유일한 격침 전과이다.
사꾸라바나의 전과가 부진했던 이유는

첫째로 모기인 베티 육상공격기가 목표에 접근하기 전에 대부분 격추되어 버렸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사꾸라바나가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고속인데다가 조종하기가 꽤 까다로운 편이었는데 기체의 용도상 조종사들이 한번도 실제로 몰아볼 기회를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미숙한 가미까제 조종사가 다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쿠라바나.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3747583 )

 

기꾸스이 2호 작전에서 가미까제 특공기들은 에이벨을 격침하고, 구형전함 테네시를 비롯한 18척에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2호 작전에 참가한 일본기들을 거의 다 격추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제21폭격사령부의 사령관인 르메이 소장은 기꾸스이 2호 작전이 끝나자 다시 한번 니미츠 제독을 찾아가 자신의 B-29 들을 비행장 공격에서 빼달라고 요청했으나 또 거절당했다.
그러자 르메이 소장은 워싱턴의 아놀드 원수에게 직접 호소했다.
아놀드 원수가 이 문제에 대하여 킹 제독에게 불평하자 킹 제독은
 
“지금 육군항공대가 해군을 돕지 않겠다면 해군은 오끼나와에서 철수할 테니까 앞으로 그 섬의 보급 문제는 육군이 알아서 처리해야 할 것”
 
이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킹 제독이 이런 식으로 나오자 아놀드 원수는 이후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르메이 소장은 워싱턴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작 날아온 것은
 
“제21폭격사령부의 최우선 과제는 해군을 도와서 일본군의 비행장을 무력화시키는 일” 
 

이라고 명시한 통합참모본부의 4월 18일자 명령서였다.
르메이 소장은 5월 5일에 같은 내용의 명령서를 한번 더 받아야 했다.
이제 제21폭격사령부로서는 일본군 비행장에 대한 폭격을 계속할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기꾸스이 3호 작전은 4월 16일과 17일에 실시되었는데 특공기 192대와 호위기 및 공격기 306대가 참가했으며, 기꾸스이 4호 작전은 4월 26일과 27일에 걸쳐 실시되어 115대의 특공기를 포함한 150여대의 일본기가 참가하여 10척의 함정에게 피해를 입혔으나 격침된 함정은 없었다.
 
기꾸스이 5호 작전은 제32군의 역습에 발맞추어 5월 4일과 5일에 실시되었는데 159대의 가미까제 특공기가 참가하여 구축함 3척과 LSM 1척을 격침하고, 호위항모 생가몬과 경순양함 버밍햄을 비롯한 10척의 함정에 피해를 입혀서 450 여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이날 슈리 방어선 전면에서 실시된 제32군의 역습은 일본군에게 남아있던 포병화력의 절반인 59문의 화포를 상실하고, 병력의 15% 에 해당하는 6,000 여명의 전사자를 기록하면서 이틀 만에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기꾸스이 6호 작전은 5월 11일에 실시되었는데 이 작전에서 일본의 가미까제 특공기들은 미처 제독의 기함 벙커힐을 대파했다.
11일 오전 10시 5분에 제로기 1대가 벙커힐의 비행갑판에 격돌했고, 30초 뒤에 주디 급강하폭격기 1대가 사령탑 기부에 격돌했다.
비행갑판에 30대, 격납고 갑판에 48대의 함재기가 무장과 연료를 만재한 상태로 대기 중이던 벙커힐에서는 즉각 엄청난 유폭이 이어지면서 치명적인 화재가 발생했다.
우수한 손상관리시스템과 손상관리요원들의 6시간에 걸친 사투 덕분에 벙커힐은 겨우 화재를 진압할 수 있었으나, 396명의 승무원이 전사하는 치명적 피해를 입고 태평양 전쟁에서 물러나야 했다.
미처 제독은 사령기를 엔터프라이즈로 옮겨 달았다. 

 

(가미카제 기에 피격당한 직후 벙커힐의 모습)

 

같은 날 니미츠 제독은 르메이 장군에 대하여 따뜻한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B-29들을 비행장 공격임무에서 풀어주었다.
르메이 장군은 일본의 비행기 엔진 공장을 전부 박살낼 수 있을 시간에 효과도 미미한 비행장 공격에 붙잡혀 있었다면서 왜 니미츠 제독이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툴툴대었지만 사실 제21폭격사령부는 해군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즉 제58기동부대는 3월 19일 이후 비행장 제압 작전은 중지했고, 3월 23일부터는 오끼나와 폭격에 전념했으며 일단 4월 6일부터 일본군의 대규모 가미까제 공격인 기꾸스이 작전이 시작되자 제5함대의 상공을 지키는 임무만으로도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어서 기꾸스이 작전의 기세가 어느 정도 수그러진 5월 초까지 비행장 제압 같은 것은 꿈도 못 꿀 형편이었다.

 

따라서 가미까제 특공기들이 출격하는 비행장을 공격하는 일은 거의 제21폭격사령부 소속의 B-29들이 담당해야 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규슈 남부의 주요 비행장 17개를 목표로 했었으나 기꾸스이 1호 작전이 실시된 4월 6일 이후에는 니미츠 제독의 요청에 의하여 규슈와 시코쿠의 45개 주요 비행장 전부를 목표로 삼아서 공격을 가했다.
그리하여 제21폭격사령부의 B-29들은 3월26일부터 5월 11까지 이들 일본군 비행장에 6,000톤 이 넘는 폭탄을 퍼부어서 400 여대의 일본 항공기들을 파괴하고 비행장의 활주로와 항공기 정비 및 수리시설 등에 커다란 피해를 입혀서 결과적으로 일본의 특공작전인 기꾸스이 작전에 투입된 가미까제 특공기의 숫자를 상당히 줄였다.

 

사실 10회에 걸친 기꾸스이 작전기간 동안 출격한 가미까제 특공기의 숫자는 1,465 대로서 당초 계획인 4,500 대의 1/3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으며 기꾸스이 작전 기간 중에 우가끼 중장이 실제로 확보하는데 성공한 3,000 여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였다.
이들 중의 일부는 3월 18일부터 22일까지 제58기동부대에 의하여 격추되거나 지상에서 파괴되었겠지만 대부분은 B-29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거나 손상되거나 또는 활주로와 정비시설의 피해로 인하여 기꾸스이 작전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제21폭격사령부의 B-29들은 1945년 3월 26일부터 5월 11일까지의 7주 동안 규슈의 일본군 비행장에 6,000 톤 이상의 폭탄을 퍼부어서 가미까제 특공기들의 행동을 제약, 기꾸스이 작전에 실제로 참가한 기체의 수량을 절반 이하로 떨어뜨림으로써 최소한 100 척 이상되는 함정들의 피해를 막아주어, 해군장병들의 목숨을 1,000 명 이상 구해주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B-29 슈퍼 포트레스 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rectek2/10046607334 )
 
5월 12일과 13일에 엔터프라이즈는 규슈의 일본군 비행장과 항만 시설에 대하여 야간공격을 실시했다.
제58기동부대로서는 3월 19일의 구레군항 폭격 이래 실로 8주만에 재개되는 규슈 공격이었다.
5월 14일 오전 3시 57분, 반격을 위하여 접근하던 일본기 편대가 제58기동부대의 레이더에 잡혔다.
3시간 후인 오전 6시 57분, 엔터프라이즈의 대공포화들이 함의 뒤쪽에서 접근하는 1대의 가미까제 특공기를 겨냥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가미까제 특공기는 교묘한 기동으로 대공화망을 피하면서 후방으로 접근하여 450m 상공에서 30도의 각도로 강하를 시작, 엔터프라이즈의 후방 180m 지점에 이르자 45도로 급강하하여 전방 엘리베이터의 바로 뒤쪽 약간 좌현 쪽에 충돌했다.
이 가미까제 특공기는 비행갑판에 3.6m x 6m 크기의 구멍을 만들면서 돌입하여 격납고 갑판에서 폭탄과 분리되면서 폭발하였고, 폭탄은 격납고 갑판 바닥을 통과하면서 폭발했다.
이 폭발로 무게가 15톤이나 나가는 전방 엘리베이터가 120m 상공까지 솟구쳤고, 격납고 갑판을 지나가는 청수 파이프가 터져서 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으며, 대량의 전기 케이블이 폭발 당시의 충격에 의하여 끊어지거나 파손된 파이프에서 흘러나온 물에 의하여 침수되어 함의 전기 계통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엔터프라이즈의 손상관리반이 재빨리 대응하여 피해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데 성공함으로써 전사자 12명이라는 비교적 적은 피해로 상황을 마무리지었지만 이것으로 엔터프라이즈의 전쟁은 끝났다.
2일 뒤인 5월 16일, 엔터프라이즈는 수리를 위하여 미본토로 출발하여 6월 7일에 퓨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에 도착했다.

 

(엔터프라이즈가 가미카제 기에 피격당하는 순간. 엔터프라이즈의 제1번 엘리베이터가 120m 높이에 이르는 불기둥의 끝에 마치 올라앉은듯이 보인다. 1945년 5월 14일)
 
엔터프라이즈가 떠난 이후에도 오끼나와 전투는 계속되었으며 일본군의 기꾸스이 작전도 계속되어 7호가 24,25일에, 8호가 27,28 일에 실시되었으며 마지막 10호는 6월 22일에 실시되었다.
그동안 오끼나와에 상륙한 육군과 해병대도 사령관인 버크너 중장이 전사하는 등의 악전고투를 겪은 끝에 6월 23일에 섬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오끼나와 전투에서 미군이 입은 피해는 상당했다.
육군제77사단이 게라마 열도에 상륙한 3월 26일부터 6월 30일까지 제10군은 7,374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동안 해군은  4,907명의 장병이 전사했는데, 전사자의 절반 가량이 가미까제 특공기의 격돌에 의한 것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오끼나와에서 전사한 미군의 숫자는 합계 12,281 명에 달했다.
함정 피해도 상당하여 36척의 함선이 침몰하고, 368척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 중에서 가미까제 특공에 의하여 침몰한 함선은 26척, 피해를 입은 함선은 164척이다.
항공기 손실은 영국해군의 98대를 포함하여 763대이다.
 
같은 기간동안 일본군의 손실은 미군보다 훨씬 컸다.
1945년 3월 26일에서 6월 30일까지의 기간 동안 일본군의 전사자 숫자는 110,071 명이며, 포로는 10,755 명인데, 전사자 숫자에는 미군의 포격과 폭격에 희생되거나, 일본군과 미군과의 전투에 휘말려서 희생된 20,000 명 정도의 오끼나와 민간인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끼나와 전투에서는 민간인의 피해도 적지 않았는데 최소한 52,000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일본해군은 대형전함 야마또를 비롯한 16척의 함선이 격침되고, 4척이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의 항공기 손실은 총 7,830 대로서, 육군기 3,605대와 해군기 4,225 대이다.
이들 중 가미까제 특공기는 총 1,900 대로서 육군기 850대, 해군기 1,050 대이다.
가미까제 특공기 중에서 기꾸스이 작전에 참가한 항공기는 1,465 대이며, 185대는 기꾸스이 작전 기간의 중간중간에 개별적으로 출격했고, 250대는 대만에서 출격했다.
가미까제 특공기가 격돌한 함정은 총 190 척이지만 1척에 2대 이상의 특공기가 격돌한 경우도 많기 때문에 실제로 공격에 성공한 특공기의 숫자는 약 280 대 정도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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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6일에 일본군의 기꾸스이 1호 작전이 시작되었다.
총 10회에 걸친 기꾸스이 작전 중에 최초이자 최대 규모인 1호 작전에는 총 800 대 이상의 일본기들이 참가했으며 주력 공격대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견제 공격도 포함되었다.
최초로 공격해 온 것은 4월 6일 새벽에 오끼나와의 욘탄 비행장과 가데나 비행장을 습격한 14대의 일본기였다.
이들은 활주로에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했으나 미군의 비행기가 아직 배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 1대의 비행기도 파괴하거나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이어서 100 여대의 전투기와 공격기로 이루어진 공격대가 제58기동부대를 공격하여 CAP 세력을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고, 이어서 주력 공격대가 제58기동부대와 하구시 앞바다에 정박 중인 미군 선단을 공격해 왔다.
주력 공격대는 355 대의 가미까제 특공기와 344 대의 호위 전투기 및 약간의 공격기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6일 오후 3시경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총 36시간에 걸쳐 출격했다.

미군도 전력을 다해서 요격에 나섰다.
제58기동부대의 전투기들 뿐만 아니라 호위항공모함의 전투기들도 총동원되었고, 호위항공모함 시트코베이와 브레톤에서 욘탄 비행장으로 이동중이던 해병제31비행대의 전투기들까지 요격에 가담했다.
니미츠 제독의 긴급 명령을 받은 류큐전술항공군 사령관인 멀카니 해병소장은 상륙한 해병대에 대한 근접공중지원(CAS) 임무를 띄고 4척의 호위항공모함에 실려와서 4월 7일에 욘탄 비행장에 전개한 해병제31비행대와 9일에 가데나 비행장에 전개한 해병제32비행대 소속인 192대의 콜세어와 30대의 헬캣에게 당분간 제58기동부대와 협력하여 전투공중초계(CAP) 임무에 전념할 것을 지시했다.
대신 지상의 해병대에 대한 근접공중지원임무는 제58기동부대의 아벤저와 헬다이버가 맡게 되었다.
그런데 제58기동부대의 조종사들은 근접공중지원임무를 수행한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지상의 해병대로서는 이러한 사실이 상당한 불만이었으나 때가 때이니만큼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러한 혼신의 노력을 다한 요격전의 결과 미군은 4월6일과 7일에 총 380 대의 일본기를 격추했다.
하지만 가미까제 특공기 33대가 23척의 함선에 격돌하여 구축함 2척과 수송선 2척 등 6척의 함정이 격침되고, 피해를 입은 17척 중 7척은 피해가 너무 심하여 전열에서 탈락했으며 해군장병 367명이 전사했다.
격침된 함선 중 수송선 2척에는 제10군이 사용할 81mm 박격포탄이 모두 실려있었는데 하구시 해안 근처에서 가미까제 특공기에게 당하여 엄청난 폭발과 함께 침몰해 버림으로써 수많은 81mm 박격포들이 순식간에 무용지물로 변했다.
할 수 없이 육군항공대의 수송기들이 81mm 박격포탄들을 급히 공수해 와야만 했다.

원래 가미까제 특공기들은 공격함정의 우선순위에 대하여 철저하게 교육받고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목표는 정규항공모함의 비행갑판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1주일 간의 기초비행훈련 밖에 받지못한 미숙한 가미까제 조종사들은 최초로 눈에 들어오는 표적을 보면 그만 흥분하여 우선순위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바로 돌진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함대의 최전방에서 레이더를 이용하여 조기경보임무를 맡고있던 레이더 피켓함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실제로 이날 침몰한 구축함인 부시와 콜헌도 레이더 피켓함이었다.
제58기동부대에서는 정규항공모함 베닝턴과 경항공모함 벨로우드가 가벼운 피해를 입었으나 작전에는 지장이 없었다.

기꾸스이 1호 작전의 항공작전과는 별도로 대형전함 야마또를 중심으로 한 해상특공부대도 오끼나와를 향하고 있었다.
일본연합함대 사령부는 야마또를 공중지원도 없이 오끼나와 해역에 돌입시켜 미군수송선단을 공격한 다음 주변의 해안에 좌초시켜 육상포대로 활용한다는 정신나간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야마또와 경순양함 야하기,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진 제1유격부대에게 편도분 연료만 실은 채 오끼나와로 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사지로 떠나는 이들을 안타깝게 여긴 도꾸야마 연료보급기지의 관계자들이 연료탱크의 밑부분을 닥닥 긁어서 왕복연료를 맞추어 주었다.

 

(일본해군의 대형전함 야마토.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5541824 )

 

야마또를 비롯한 해상특공부대는 6일 오후 3시 20분에 도꾸야마 기지를 출발하여 오끼나와를 향했다.
오후 6시 30분, 해상특공부대는 미잠수함 스레드핀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스레드핀은 즉시 상부에 보고했고, 3월 24일부터 제58기동부대를 떠나 데요 소장의 포격부대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던 스프루언스 대장은 즉시 10척의 구형전함을 가진 포격부대에게 야마또를 요격할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밤새 남하중이던 해상특공부대는 7일 오전 8시 32분에 정규항공모함 에섹스의 헬캣에 의하여 재차 발견되었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이 보고를 받고서도 제58기동부대에 공습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어제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대규모 가미까제 공격 때문에 제58기동부대는 물론 호위항공모함의 전투기들과 해병대의 류큐전술항공군 소속 전투기들까지 모두 긁어모아서 요격임무에 투입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일본의 수상함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다수의 제58기동부대 소속 함재기들을 동원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남하 중인 일본함대는 포격부대의 구형전함 10척으로 간단하게 저지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일본함대가 중간에 되돌아가 버리는 사태였다.
일본해군의 함정 중에서 단연 최고의 상징성을 가진 대형전함 야마또가 스스로 호랑이 입에 머리를 들이밀었는데 즉시 함재기들을 내보내어 공격하지 않고 주저하다가 만일 이대로 놓쳐버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사방에서 쏟아질 엄청난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반면 제58기동부대 사령관인 미처 제독은 자신의 부대가 야마또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일본기들의 가미까제 공격을 막아낼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참모장인 알레이 버크 준장에게 명하여 정오까지 별도의 중지명령이 없으면 남하 중인 일본함대를 공격하겠다는 뜻을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타전하도록 했다.
그러던 중 오전 10시 22분에 일본함대가 반전했다는 연락이 들어오자 알레이 버크 준장은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재차 공습허가를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일본함대가 반전했다는 보고를 받은 스프루언스 제독은 망설임을 떨쳐버리고 공습을 허가했다.

곧 제58.1전단과 제58.3전단 소속 8척의 항공모함에서 전투기 132대, 아벤저 98대, 헬다이버 50대로 이루어진 제1차 공격대가 출격했다.
11시 29분에 해상특공부대는 재반전하여 오끼나와 쪽으로 침로를 돌렸다.
오후 12시 32분, 야마또의 레이더가 접근하는 미함재기의 대군을 발견하여 2분 후부터 18.1인치의 주포에서 발사하는 삼식탄을 비롯하여 일본함대의 각종 대공화기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12시 35분부터 폭격이 시작되어 40분에 베닝턴과 호넷의 헬다이버들이 야마또의 사령탑 부근 좌현에 2발의 450kg 철갑탄을 명중시켰으며, 43분에는 호넷의 아벤저가 야마또의 좌현 선수 부근에 1발의 어뢰를 명중시켰다.
이후 미함재기들은 야마또의 좌현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미함재기 조종사들은 시부얀 해전에서 무사시를 격침할 때 양현을 동시에 공격하는 전통적인 뇌격방식을 사용함으로써 무사시가 오히려 더 오래 버텼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마또에 대한 공격에서는 어느 한쪽으로 공격력을 집중시키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아벤저의 뇌격을 도와주기 위하여 벙커힐에서 출격한 콜세어 14대가 야마또의 좌현에 100 발 이상의 HVAR 을 퍼부어서 좌현에 위치한 대공포좌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34대의 헬캣과 1대의 콜세어, 그리고 22대의 헬다이버와 소수의 아벤저들은 호위함들을 공격했다.
12시 46분에 경순양함 야하기가 1발의 어뢰를 얻어맞고 행동불능상태에 빠졌다.
구축함 하마까제도 어뢰 1발을 얻어맞고 두 동강이 나서 격침되었으며, 후유쓰키도 HVAR 2발을 맞았다.
구축함 아사시모는 기관고장을 일으켜 전열에서 낙오했다.
구축함 스즈쓰키는 함수에 225kg짜리 일반폭탄 1발을 얻어맞고 함수가 날아가 버렸으나 필사적인 응급조치로 침몰만은 면했다.

 

미함재기 조종사들은 시부얀 해전의 경험을 통하여 450kg 짜리 대형철갑탄으로도 야마또의 장갑을 뚫고 들어가 큰 피해를 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상당수의 미함재기들이 대형함 공격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지연신관을 장착한 철갑탄 대신 야마또의 대공포좌를 공격할 목적으로 접촉신관을 장비한 일반폭탄을 달고 출격했다.
일반폭탄은 같은 무게의 철갑탄보다 관통력이 약한 대신 장약의 양이 많았기 때문에 대공포좌 같이 노출된 목표나 구축함급 이하의 소형함을 공격할 경우에는 오히려 철갑탄보다 유리했다.
12시 50분에 제1차 공격대가 물러갔다.
야마또는 1차 공격에서 2발의 폭탄과 1발의 어뢰를 맞아서 속력이 22노트로 떨어지고 좌현 쪽의 대공포좌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오후 1시 22분에 167대로 이루어진 제2차 공격대가 공습을 시작했다.
1시 23분, 12대의 아벤저가 야마또의 좌현 쪽에서 달려들면서 거의 동시에 12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야마또는 즉시 좌현쪽으로 최대각도로 선회했으나 3발이 좌현 중앙부에 명중했다.
3,000 톤이 넘는 해수가 함내에 쏟아져 들어와서 야마또는 좌현으로 7도나 기울었으며 보조 키가 어뢰 폭발의 충격 때문에 좌현으로 잔뜩 꺾인 채로 고정되어 버렸다.
손상관리반이 우현에 역침수를 실시하여 겨우 균형을 잡았다.
1시 44분, 4대의 아벤저가 야마또에게 달려들어 추가로 2발의 어뢰를 좌현 중앙에 명중시켰다.  
야마또는 다시 좌현으로 기울어지면서 속력이 18노트로 떨어졌다.
구축함 카스미도 2발의 폭탄을 얻어맞고 격침되었다.

오후 2시 2분, 제58.4전단의 정규항공모함 인트레피드와 요크타운, 경항공모함 랭글리를 떠난 이날의 마지막 공격대인 제3차 공격대 106대가 공격을 시작하여 3발의 폭탄을 야마또의 좌현 중앙에 명중시켰다.
2시 7분, 요크타운의 아벤저가 1발의 어뢰를 야마또의 우현 중앙부에 명중시켰다.
이 어뢰는 야마또에 명중한 10발의 어뢰 중에서 유일하게 우현에 명중한 어뢰였다.
2시 12분, 요크타운의 아벤저가 발사한 2발의 어뢰가 야마또의 좌현에 명중했다.
야마또는 이제 좌현으로 15도나 기울었고, 속력은 12노트로 떨어졌다.
해상특공부대 사령관 이또 중장은 특공작전의 실패를 인정하고 야마또에 대한 퇴함명령과 함께 호위함정들에게 생존자를 구조하여 일본으로 철수하라는 최후명령을 내렸다.  
2시 17분, 요크타운의 아벤저가 야마또의 좌현에 1발의 어뢰를 추가로 명중시켰다.
2시 23분, 야마또가 좌현으로 전복되어 침몰했다.
동시에 제1번 탄약고에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폭발이 일어났는데 이때 발생한 연기는 160km 이상 떨어진 규슈 남부에서도 보였다.
야마또가 침몰하는 중에 해중에서 다시 폭발이 일어나서 그 충격파로 해상에 떠있던 생존자들 중 많은 수가 사망했다.
2,700 명이 넘는 야마또의 승무원 중에서 269명만이 생존했다.

 

(야마토가 격침되면서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주변에 살아남은 3척의 일본구축함이 생존자들을 구출하고 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야마또의 호위함정들도 차례차례 격침되었다.
우선 제1차 공습에서 어뢰 1발을 맞아 빌빌거리며 겨우 해상에 떠있던 경순양함 야하기가 어뢰6발과 폭탄 12발을 추가로 얻어맞고 2시 5분에 격침되었다.
구축함 이소까제도 격침되었고, 기관고장을 일으켰던 아사시모도 결국 그날 밤에 자침했다.
공습현장에서 살아남은 3척의 구축함은 생존자를 구출하여 사세보로 귀항했다.
제1차 공습에서 폭탄에 맞아 함수가 날아가버린 상태로 실종되었던 스즈쓰키는 당초 격침된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필사적인 응급조치로 침몰을 면하고 미함재기들이 득실거리는 해역에서 무려 300km가 넘는 거리를 후진으로 돌파하여 8일 오후에 기적적으로 사세보 항에 무사히 귀환했다.
해상특공부대는 총 10척 중에서 대형전함 야마또와 경순양함 야하기, 구축함 4척이 격침되고, 사령관 이또 세이찌 중장을 비롯하여 3,721명의 전사자를 기록하면서 오끼나와 돌입에 실패했다.

제58기동부대에서는 헬캣 3대, 아벤저 3대, 헬다이버 4대가 격추되어 12명이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야마또는 합계 10발의 어뢰와 5발의 폭탄을 얻어맞고 전투시작 1시간 40분만에 왼쪽으로 전복되면서 침몰했다.
자매함 무사시가 시부얀 해전에서 20발의 어뢰와 17발의 폭탄을 얻어맞고도 무려 9시간을 버티다가 침몰한 것에 비하면 야마또의 좌현에 공격을 집중시킨 미함재기 조종사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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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끼나와는 규슈 남부에서 대만 쪽으로 뻗어있는 류큐 열도의 주도로서 규슈에서 650km, 대만에서 610km, 그리고 상하이에서 830km 떨어진 태평양 상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섬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뻗은 모양으로 전체 길이가 96km, 폭은 가장 넓은 곳이 26km 정도로 면적은 1,230 제곱킬로미터 정도이다.
농업이 주요 산업인 오끼나와는 변변한 산업도 없고 일본에게는 그리 귀중한 섬은 아니었으나 만일 미군에게 이 섬이 넘어갈 경우 문제는 심각했다.
미군이 이곳에 B-29기지를 건설할 경우 10톤의 폭탄을 가득 싣고도 충분히 규슈를 폭격할 수 있었다.
도꾜에서 2,000km 이상 떨어진 마리애나 기지의 B-29들이 도꾜를 폭격할 때 초기에는 3톤의 폭탄밖에 싣지 못했고, 르메이 소장이 제21폭격사령부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에 고고도에 올라가지 않고, 방어 기총을 다 제거하고, 승무원도 3명을 줄인 이후에야 폭탄적재량을 6톤으로 늘릴 수 있었다.

따라서 마리애나 기지와 비교하면 같은 숫자의 B-29라도 오끼나와에 기지를 둔 B-29들은 그 위력이 훨씬 강화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오끼나와는 대군을 수용할만한 충분한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규슈 상륙을 위한 진공군의 발진기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오끼나와의 이러한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던 일본은 1944년 4월 1일에 제32군을 오끼나와로 파견하여 방어준비를 시작했고, 그 해 8월에 우시지마 미쯔루 중장이 제32군 사령관이 되면서 방어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1945년 3월 말까지 제32군 휘하의 제24사단과 제62사단, 제44독립혼성여단, 제27전차연대 등 총 67,000 여명의 육군이 오끼나와에 집결했다.
여기에 해군부대 9,000 명을 더하여 정규군의 숫자는 76,000 여명이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오끼나와 주민들로 이루어진 방위대가 있었는데 이들의 병력은 약 20,000 명 정도였고, 그 외에도 4,000 명 정도의 섬 주민이 행정이나 보급 등 일본군의 지원업무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제32군의 총병력은 약 100,000 명을 헤아렸다.

제32군은 장비도 상당히 충실한 편에 속했는데 그 이유는 필리핀 방면으로의 해상교통이 두절됨에 따라서 많은 장비가 오끼나와에 돌려졌기 때문으로 그 덕분에 제32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싸운 일본군 부대 중에서 가장 강력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제32군은 해군 소속의 해안포 53문 이외에도 150mm 야포 52문, 150mm 직사포 12문, 70mm 및 75mm 야포 170문 등 70mm 이상 구경의 포를 287문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320mm 대형 박격포 24문, 81mm 박격포 96문과 흔히 Knee-Mortar라고 불리던 50mm 유탄발사기 1,100 문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75mm 대공포 72문, 20mm 대공포 54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32군의 포병대는 장비만 충실했던 것이 아니라 장병들의 훈련도 면에서도 당시 일본군 중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제32군은 대전차 무기로서 47mm 대전차포 52문, 37mm 대전차포 27문을 보유하고 있었고, 전차는 57mm 주포를 장착한 중형전차 14대와 경전차 13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더하여 333정의 중기관총과 1,208정의 경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포탄이나 기관총탄 또한 충분한 양이 비축되어 있었다.
 
일본군의 오끼나와 방어작전을 천호 작전이라고 불렀다.

우시지마 중장은 이오지마에서와 마찬가지로 해안방어를 포기하고 섬의 남쪽에 있는 오끼나와 제2의 도시인 슈리를 중심으로 수많은 토치카를 건설하고 강력한 포병화력을 집중시킨 견고한 방어선을 형성하여 최대한 시간을 끄는 지연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천호 작전에는 제32군이 주축이 된 오끼나와의 지상작전 이외에도 기꾸스이 작전이라고 부르는 육해군 공동의 가미까제 특공작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규슈와 남서제도를 관장하는 제5항공함대 사령관인 우가끼 마또메 중장의 지휘 하에 실시될 이 작전은 일본 남부와 대만 등지에서 가미까제 특공기들이 출격하여 오끼나와 앞바다의 미군선단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총 10회의 기꾸스이 작전이 계획되어 있었으며 작전 기간을 통하여 규슈와 시코쿠에서만 4,500 대의 가미까제 특공기를 출격시킬 예정이었다.
기꾸스이 작전의 개시일은 1945년 4월 1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일본군이 이렇듯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던 오끼나와를 점령하려는 미군의 전력 또한 태평양 전쟁 사상 최대의 병력이었다.
오끼나와 상륙작전(빙산작전)을 현장에서 총지휘하는 인물은 제5함대 사령관인 스프루언스 대장이었다.

그는 제58기동부대와 영국의 항공모함 기동부대인 제57기동부대, 그리고 통합원정군(제51기동부대, 켈리 터너 중장)을 이끌고 있었다.

통합원정군에는 구형전함 중심의 포격부대(제54기동부대, 데요 소장)와 호위항공모함 중심의 상륙지원부대(제52기동부대, 블랜디 소장)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158척의 수송선과 184척의 LST 및 89척의 LSM이 상륙부대를 태우고 있었다.
상륙부대는 버크너 중장이 지휘하는 제10군이었는데 예하에는 육군제24군단(하지 소장)과 해병제3상륙군단(가이거 해병소장)이 있었다.
제24군단은 육군제7사단(아놀드 소장)과 제96사단(브래들리 소장)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해병제3상륙군단은 제1해병사단(벨 해병소장)과 제6해병사단(셰퍼드 해병소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0군에는 이 밖에도 3개의 사단이 더 있었는데 오끼나와 상륙에 앞서 주변의 게라마 열도에 상륙할 임무를 가진 제77보병사단(브루스 소장)과 예비대인 제27사단(그리너 소장)과 제2해병사단(왓슨 해병소장)이었다.
이 중에서 2개의 예비사단을 제외한 5개 사단은 모두 전차대와 포병대 등이 증강된 사단으로 이 5개 사단의 병력만으로도 116,000 명에 달했다.         
7개 사단과 각종 직할부대를 포함한 제10군의 총 병력은 183,000 여명이었으며 이들을 위한 보급품은 750,000 톤에 달했다.

통합원정군 중에서 포격부대는 구형전함 10척(텍사스, 메릴랜드, 아칸소, 콜로라도, 테네시, 네바다, 아이다호, 웨스트버지니아, 뉴멕시코, 뉴욕), 중순양함 8척(투스칼루사, 미니애폴리스, 샌프란시스코, 위치타, 펜사콜라, 포틀랜드, 인디애나폴리스, 솔트레이크시티), 경순양함 4척(모빌, 버밍햄, 센트루이스, 빌록시), 구축함 24척 및 호위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상륙지원부대는 호위항공모함 25척(시플리베이, 메이킨아일랜드, 팬쇼베이, 룽가포인트, 나토마베이, 사보아일랜드, 스티머베이, 안지오, 샴록베이, 마르쿠스아일랜드, 사지노베이, 사전트베이, 페트로프베이, 르디어드베이, 웨이크아일랜드, 툴라기, 마카사르스트레이트, 스와니, 체난고, 생가몬, 산티, 시트코베이, 브레톤, 홀랜디어, 화이트플레인즈), 구축함 16척 및 호위구축함 23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호위항공모함 중에서 시트코베이와 브레톤은 해병제31비행단, 홀랜디어와 화이트플레인즈는 해병제33비행단의 항공기를 싣고 있어서 합계 콜세어 192대와 헬캣 30대를 운반하고 있었다.

제57기동부대는 버나드 롤링스 중장이 지휘하는 영국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로서 항공모함 4척(인도미터블, 빅토리어스, 인디퍼티거블, 일러스트리어스), 전함 2척(King George V, Howe), 경순양함 7척(Gambia, Uganda, Swiftsure, Black Prince, Euryalus, Argonaut, Quebec ), 구축함 15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경순양함 중 우간다와 퀘벡은 캐나다 해군 소속이고, 갬비어는 뉴질랜드 해군 소속이었다.
오끼나와 작전 기간 동안 제57기동부대는 대만과 오끼나와 사이에 있는 사끼지마 제도와 대만의 비행장들을 공격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대만에서 출격한 250 대의 가미까제 특공기들은 제57기동부대를 상대하느라고 오끼나와에는 거의 도달하지 못했다.

1945년 3월 14일, 제58기동부대는 오끼나와 상륙작전을 앞두고 일본의 항공전력을 꺾기 위한 임무를 띄고 울리시를 출항했다.
미처 제독이 지휘하는 제58기동부대는 정규항공모함 11척(호넷, 베닝턴, 와스프, 벙커힐, 에섹스, 핸콕, 엔터프라이즈, 인트레피드, 요크타운, 프랭클린), 경항공모함 6척(샌야신토, 벨로우드, 바탄, 캐봇, 랭글리, 인디펜던스), 고속전함 8척(노스캐롤라이나, 워싱턴, 사우스다코타, 인디애나, 메사추세츠, 뉴저지, 미주리, 위스컨신), 대형순양함 2척(알래스카, 괌), 중순양함 2척(볼티모어, 피츠버그), 경순양함 13척(빅스버그, 빈센스, 산후앙, 마이애미, 산타페, 아스토리아, 플린트, 샌디에고, 오클랜드, 파사데나, 윌크스베리, 스프링필드), 구축함 73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3월 16일에 해상에서 최종 급유를 마친 제58기동부대는 18일에 규슈와 시코쿠의 중요 비행장 45개에 대하여 공습을 실시했다.
이날의 공습으로 제58기동부대는 102대의 일본기를 격추하고 275대의 일본기를 지상에서 파괴하였으며 수송선 1척, 유조선 1척, 소형함정 4척을 격침했다.
일본군도 가미까제 특공기로 반격을 가하여 정규항공모함 인트레피드와 요크타운이 함체 바로 부근에서 폭발한 특공기로 인하여 약간의 피해를 입었으나 작전에는 지장이 없었다.

3월 19일에는 전함 야마또, 히우가, 하루나, 항공모함 아마기, 류호, 가쓰라기, 호쇼 등 그때까지 살아남은 일본연합함대의 주력함정들이 정박해 있던 구레 군항을 폭격하여 대형전함 야마또와 정규항공모함 아마기를 비롯하여 17척의 함정에게 피해를 입혔으나, 1척도 격침하지 못했다.

일본군도 제58기동부대에 대하여 과감한 반격을 시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3월 19일 오전 7시 10분, 정규항공모함 프랭클린은 비행갑판과 격납고 갑판에 무장과 연료를 만재한 함재기들이 꽉 들어찬 상태에서 1대의 일본기가 투하한 2발의 250kg 폭탄을 얻어 맞았다.
즉시 엄청난 유폭과 함께 치명적인 화재가 발생했다.
프랭클린은 우수한 손상관리 시스템과 손상관리요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겨우 침몰은 면했으나 724명이 전사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태평양 전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일본기의 폭격을 받아 기울어진 프랭클린. 자세한 설명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69348303 )


정규항공모함 와스프도 가미까제 특공기에 의하여 화재가 발생, 101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곧 화재를 진압하고 작전을 계속했다.
와스프는 이후 3주일동안 더 작전을 계속한 후 4월 13일에 수리를 위하여 미본토로 향했다.

 

엔터프라이즈는 3대의 특공기를 무사히 피했으나 호위함이 쏜 5인치 대공포 2발이 함교 앞쪽의 40mm 대공포좌에 떨어지면서 포좌에 쌓여있던 40mm 포탄에 유폭되어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7명이 전사했고, 엔터프라이즈는 20분만에 화재를 진압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울리시로 물러가서 10일간 수리를 해야만 했다.
엔터프라이즈가 오끼나와 앞바다에 돌아온 것은 4월 5일의 일이었다.  
 

강력한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하루 만에 3척의 정규항공모함이 전열에서 탈락하게 되자 미처 제독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제58기동부대는 4월 1일로 예정된 오끼나와 상륙을 앞두고 가미까제 특공기를 발진시킬 가능성이 높은 규슈와 시코쿠의 비행장 45개를 제압할 임무를 띄고 있었다.
단 한번의 압도적인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할 수 없는 지상 비행장의 특성상 지속적인 제압이 중요했다.

그런데, 45개나 되는 비행장을 지속적으로 제압 하에 둔다는 것은 상당한 노력을 요하는 일로서 제58기동부대가 전력을 기울여서 그 일에만 매달려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오끼나와 상륙이 시작되어 제58기동부대가 선단 보호의 임무까지 맡게 되면 비행장 제압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니미츠 제독은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마리애나에 기지를 둔 제21폭격사령부(XXI Bomber Command)에 제58기동부대를 대신하여 규슈 지역의 비행장들을 폭격해주도록 요청했다.
마리애나에 기지를 두고 B-29를 사용하여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을 담당하고 있던 제21폭격사령부는 태평양 해역에서 작전 중인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니미츠 제독의 지휘를 받지 않는 부대로서 통합참모본부의 직속통제 하에 있는 부대였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에게는 유사시 이 부대에 지원을 요청할 권한이 있었다.
니미츠 제독은 이제까지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이 권한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 도시에 대한 소이탄 폭격에 한참 재미를 들인 제21폭격사령관인 르메이 소장은 전략폭격기인 B-29를 엉뚱하게 비행장 폭격에 사용하려는 니미츠 제독의 방침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나 어쨌든 정당한 권리행사였으니만큼 니미츠 제독의 지원요청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사실 2주 전인 3월 7일에 니미츠 제독의 요청으로 괌 섬의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 태평양함대와 제21폭격사령부 간에 회의가 열렸었다.

이 자리에서 니미츠 제독은 유사시에 제21폭격사령부에게 해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B-29를 출격시키도록 요청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다만 이때 르메이 장군은 만일 B-29가 해군을 도와 출격하더라도 그 우선순위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비행기용 엔진공장 같은 전략목표이며 비행장 폭격은 가급적이면 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주장하여 니미츠 제독의 동의를 받았다.
르메이 장군은 이로써 전략무기인 자신의 B-29 들이 비행장 폭격 같은 쩨쩨한 일을 해야할 가능성은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56230596 )

 

니미츠 제독 또한 내심 막강한 제58기동부대가 건재한 이상 마리애나의 B-29가 해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출동할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58기동부대가 예상 외로 강력한 일본군의 반격을 받자 니미츠 제독의 생각이 바뀐 것이었다.
제21폭격사령부는 즉시 태평양함대 사령부와 협의하여 규슈 지역의 비행장 중에서 입지조건이나 비행장의 규모 등을 종합하여 가미까제 특공기를 발진시키기에 가장 유리한 비행장 17개를 골라서 무력화시키기로 했다.

 

한편 제58기동부대는 3월 19일 이후로 비행장 공격은 중단하고, 22일까지 해상급유를 받으면서 요격에만 전념하여 공격해오는 일본기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3월 18일부터 22일까지 일본기 528대를 격추하거나 지상에서 파괴하여 일본기들의 세력을 한풀 꺾는데 성공한 제58기동부대는 3월 23일부터는 오끼나와에 대한 폭격에 전념했다.

3월 26일, 제77사단의 게라마 열도 상륙에 발맞추어 가미까제 특공기의 출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마리애나 기지를 출발한 151대의 B-29가 규슈의 비행장들을 폭격한 것을 시작으로 28일에 137대의 B-29가 규슈의 또다른 비행장들을 폭격했다.
B-29의 폭격은 3월 31일에도 반복되었다.
기꾸스이 작전 발동에 임박해서 행해진 이러한 B-29의 가공할 폭격으로 중요한 비행장들이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되자 우가끼 중장은 할 수 없이 기꾸스이 작전 개시일을 4월1일에서 6일로 연기했다.   

3월 26일, 제77사단이 오끼나와 서쪽 24km 지점에 위치한 게라마 열도에 상륙했다.
제77사단은 이곳에서 350척의 자살공격용 주정을 노획했다.
길이 5.4m, 폭 1.8m에 85마력의 출력을 가진 6기통 자동차용 엔진을 장착한 일종의 모터 보트인 이 자살공격용 주정은 120kg짜리 폭탄 2발을 싣고 20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일본군의 자살공격용 주정 신요.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1190184 )


3월 31일에는 게라마 열도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게이세이 섬에 24문의 155mm 직사포를 장비한 제420포병대가 상륙하여 다음날 실시될 오끼나와 상륙작전을 엄호할 태세를 갖추었다.

오끼나와 상륙작전을 앞둔 사전포격은 3월 25일부터 실시되고 있었다.
데요 소장이 지휘하는 10척의 구형전함을 중심으로 한 포격부대는 3월25일부터 4월1일까지 1주일 동안 6인치 이상의 대구경탄 13,000 발을 포함하여 총 5,162 톤의 포탄을 오끼나와에 쏟아부었다.
제58기동부대와 블랜디 소장의 상륙지원부대는 4월1일까지 오끼나와에 총 3,905 소티의 폭격을 실시했는데 주목표는 오끼나와의 비행장이었고, 두번째 목표는 자살용 주정들, 세번째 목표는 해안의 방어시설이었다.

오끼나와 상륙일인 4월 1일에는 오전 5시 30분부터 포격부대 소속의 구형전함 10척, 순양함 9척, 구축함 23척, 포정, 로켓포정 및 박격포정 177 척이 상륙 예정 지역인 하구시 해안에 대하여 5인치 이상의 포탄 44,825발, 로켓탄 33,000 발, 박격포탄 22,500 발을 퍼부었는데 이는 태평양 전쟁의 상륙 준비 포격 중 최대 규모였다.
7시45분부터는 제58기동부대와 호위항공모함을 떠난 함재기들이 네이팜탄을 이용하여 하구시 해안을 맹폭했다.
제1파로 상륙하게 되어있는 LVT 들이 해안에 다가서자 LCI(G), LCI(R) 및 LCI(M=Mortar) 등이 해안에 바짝 다가서서 40mm 포탄, 4.5인치 로켓탄 및 4.2인치 박격포탄을 하구시 해안의 사방 9m x 9m 넓이마다 평균 25발씩 쏟아부었다.
전날 게이세이 섬에 상륙했던 24문의 155mm 평사포도 포격에 가세했다.

오전 8시 30분에 최초의 LVT 가 하구시 해안에 도착했고, 이어서 후속 제파가 속속 해안에 도착하여 1시간 이내에 다수의 셔먼 전차를 비롯하여 16,000 여명의 병력이 상륙했다.
예상과 달리 일본군에게서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상륙군은 곧 전진하기 시작하여 오전 10시 30분에는 가데나 비행장을, 11시 30분에는 욘탄 비행장을 점령했다.
그날 자정까지 4개 사단 60,000 여명의 병력이 무사히 상륙을 마쳤다.
이후 4월 5일에 제96사단이 최초로 본격적인 일본군의 방어선에 도달할 때까지 일본군의 저항은 미약했다.     

한편 제21폭격사령관인 르메이 소장은 3월 말의 반복적인 폭격에 의하여 일본군의 비행장들을 거의 못쓰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으나 곧 일본군들이 이들 비행장의 활주로를 빠른 속도로 복구한다는 사실을 알고 지속적인 공격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지속적으로 비행장들을 폭격했으나 이윽고 아무리 철저하게 폭격을 해도 일본군들은 활주로를 대충이라도 복구한 다음 소수의 항공기들을 이륙시키는데 이것을 완전히 근절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미까제 특공기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비행장 공격보다는 일본의 비행기 엔진 공장을 폭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르메이 소장은 4월 1일에 오끼나와 상륙이 실시되자 니미츠 제독을 찾아가 이제 자신의 B-29 들을 비행장 폭격 임무에서 빼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대규모 가미까제 공격이 4월 6일이나 7일쯤에 있으리라고 예상하고 있던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는 이 요청을 거부했다.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예측은 정확했다.
우가끼 마또메 중장이 원래 4월 1일로 예정되었던 제1차 기꾸스이 작전을 4월 6일과 7일 양일간에 걸쳐 실시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 작전에는 합계 800 대 이상의 일본기들이 참가할 예정이었는데 애초 계획에는 없었던 해상부대도 참가하기로 결정되었다.
즉 대형전함 야마또와 경순양함 야하기 및 8척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진 제1유격부대가 해상특공부대로 참가한 것이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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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는 보닌 제도에 포함된 면적 22제곱킬로미터의 조그마한 화산섬으로서 도꾜에서 남쪽으로 1,050 km, 그리고 사이판에서 북쪽으로 1,000 km 떨어진 해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위치는 마리애나 제도에서 출격하는 B-29의 항로상 거의 정중간에 해당한다.
일본은 이러한 이오지마의 위치를 십분 활용하여 이곳에 레이더 기지를 건설하여 B-29의 폭격을 미리 예보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섬에 3개의 비행장을 건설하고 전투기들을 배치하여 일본까지의 긴 항정을 날아가고 다시 돌아와야 하는 B-29들을 괴롭힐 수 있었다.
게다가 1944년 11월에는 이오지마에 기지를 둔 일본의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사이판의 비행장을 급습하여 값비싼 B-29폭격기 11대를 파괴하고, 19 대에 피해를 입힌 적도 있었다.
반대로 미군이 이오지마를 탈취할 경우 이 섬은 B-29 가 불시착할 수 있는 비상 기지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또한 구조대 및 호위 전투기 부대를 위한 이상적인 전진기지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미육군항공대는 보다 효과적인 일본폭격을 위하여 이오지마의 탈취를 강력하게 희망했고, 미해군 또한 오끼나와로 향하는 항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이오지마의 점령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1944년 6월에 미군이 사이판에 상륙하자 일본은 머지않아 미군이 이오지마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 섬의 방어태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곧 많은 병력들이 이오지마에 배치되기 시작했고, 이오지마 수비대장인 구리바야시 다다미찌 중장은 1944년 여름부터 심혈을 기울여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갱도를 파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5년 초에는 보병 9개 대대, 해군부대 7347 명, 전차 1개 연대, 포병 2개 연대, 고사포 5개대대 및 박격포 5개대대 총 23,000 여명의 수비대가 이오지마에 집결했다.
이들이 보유한 장비는 57mm 포를 장비한 중형전차 12대, 37mm 포를 장비한 경전차 12대, 320mm 박격포 12문, 160mm 및 81mm 박격포 65문, 80mm 이상의 해군포 33문, 75mm 이상의 대구경대공포 94문, 20mm 및 25mm 짜리 대공포 200 문 이상, 37mm 및 47mm 짜리 대전차포 69문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육군은 탄두가 250kg에 달하고 사정거리가 7,000m 인 대형 로켓탄과 63kg 짜리 탄두를 달고 1,800m 의 사정거리를 가지는 로켓탄을 보유하고 있었고, 해군은 200mm 포탄을 개량한 탄두를 장착하고 2,700m 의 사정거리를 가지는 8인치 로켓탄도 보유하고 있었다.(당시 일본군은 로켓탄을 분진포라고 불렸다.)

 

(4식 200mm 분진포.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1854775 )

일본군의 장비 중에서 독특한 것은 320mm짜리 초대형 박격포였다.
이 박격포는 통상의 박격포처럼 포탄을 원통형의 포신에 넣고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받침대 위에 고정된 쇠막대기 위에 포탄을 덮어서 외부에 포탄이 노출된 상태에서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구조상 당연히 사정거리도 1,300 m 정도로 비교적 짧고, 잘못하면 아군의 머리 위에 떨어질 정도로 정확도 또한 형편없었으나 무게가 무려 300kg 이나 나가는 박격포탄의 위력은 대단해서 이오지마 상륙 초기에 미해병대는 이 박격포에 의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320mm 98형 박격포)

 

하지만 이오지마 방어시설의 정수는 정교한 지하진지 시스템이었다.
일본군의 지하진지는 엄폐호, 전투지휘소, 창고, 숙소 등을 포함하고, 그 사이가 평균 700m 길이의 갱도로 연결되어 보통 14개의 출입구를 가졌으며 전기와 진지 내부용 전화선이 가설되어 있었다.
이러한 지하진지가 가장 집중적으로 건설된 곳은 섬의 남쪽 끝에 있는 스리바찌 산과 섬 북쪽의 구릉지대였으며 평지에서도 지하 10m 정도에 일부 구축되어 있었다.
스리바찌 산에는 이러한 지하진지가 무려 7층으로 층층이 만들어져 약 1,000 개의 방을 연결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하진지는 출입구가 여러 개였기 때문에 일본군들은 해병대가 전진한 후에 지하갱도를 들키지 않고 이동하여 후방에서 갑자기 나타나 이들을 덮칠 수도 있었다.

섬 전체에 통틀어 수백개가 넘는 이러한 지하진지를 형성하는 갱도의 총 연장은 무려 25km 에 달했다.

이오지마에 상륙하려는 미해병대는 해리 슈미트 소장이 지휘하는 해병제3, 제4, 제5사단의 3개 해병사단으로 이루어진 제5상륙군단으로 총 병력은 70,000 여명이었다.
이들을 호송하고 상륙작전을 엄호할 켈리 터너 소장 휘하의 제5상륙부대는 구형전함, 호위항공모함, 수송선 등을 포함하여 총 485 척의 함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LVT는 482 대가 준비되었고, 이오지마에는 산호초가 없었으므로 해안에 직접 접안할 수 있는 LST 가 유용하여 총 63척이 요구되었으나 남서태평양해역군에 빌려주었던 LST 의 도착이 늦어져서 이오지마 상륙작전에 실제로 참가한 LST 의 수는 28 척이었다.
LST의 숫자가 예정보다 절반 이하로 줄어듬에 따라서 원래 LST에 실려서 상륙하려던 셔먼 전차의 많은 수가 LCT 에 실려 상륙해야 했으며, 해병제3사단은 예비대로 돌려져서 상륙 첫날에는 해상에 대기하다가 나중에 상륙하게 되었다.

B. J. Rodgers 소장이 지휘하는 포격지원부대는 7척의 구형전함(웨스트버지니아, 테네시, 뉴욕, 텍사스, 아칸소, 네바다, 아이다호)을 주축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블랜디 소장의 화력지원부대는 11척의 호위항공모함(나토마베이, 웨이크아일랜드, 페트로프베이, 서전트베이, 스티머베이, 메이킨아일랜드, 룽가포인트, 비스마르크시, 사지노베이, 루디어드베이, 툴라기)과 40mm 기관포와 로켓탄을 장비한 LCI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원래 LCI(=Landing Craft, Infantry) 는 보병상륙용의 대형상륙정으로 길이 48미터, 배수량 385톤으로 병력 188명이나 75톤의 화물을 운반할 수 있었고, 4문의 20mm 기관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LCI(G)는 LCI에다가 40mm 기관포 3문, 12.7mm 중기관총 6정을 증설하여 화력지원을 담당하게 한 형식이며, LCI(R)은 LCI 에다가 6연장의 5인치 로켓발사기 1문과 40mm 기관포 한 문을 증설하여 곡사화기에 의한 화력지원을 담당하게 한 형식이다.
이렇듯 LCI(G) 나 LCI(R) 을 운용하게 된 까닭은 LCI 에 실려 상륙하는 부대가 해안에 닿는 마지막 순간까지 밀착하여 화력지원을 해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우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룬 영화에서 흔히 보는 소형의 상륙주정은 히긴즈 보트라고 불리는 LCVP(Landing Craft, Vehicle, Personell)로서 길이 11m, 배수량 8톤으로 병력 36명이나 소형 트럭 1대 또는 3.6톤 가량의 화물을 운반할 수 있으며 7.62mm 기총 2정을 장비하고 있었다.   

 

(LCVP.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51137172 )

 

상륙군의 포병 화력은 24문의 155mm 야포, 96문의 105mm 야포, 48문의 75mm 야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항공지원은 호위항공모함 이외에도 마리애나 제도에 기지를 둔 육군제7항공대와 미처 중장의 제58기동부대가 가세했다.
이 모든 병력들은 모두 제5함대 사령관인 스프루언스 대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이오지마에 대한 사전공습은 1944년 8월부터 시작되었다.
육군제7항공대 소속의 B-24 리버레이터들이 8월부터 상륙당일까지 거의 매일같이 이오지마에 출격하여 6개월간 총 6,000 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 폭탄들은 비행장에 피해를 입혀서 이오지마 주둔 항공부대의 활동을 약간 제약한 것 이외에는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1944년 12월 초부터는 해병제612폭격비행대의 B-25들도 작전을 개시했는데 이들은 주로 밤에 이오지마에 인원, 장비 및 보급품들을 수송하던 일본수송선들을 집중공격하여 1945년 1월말까지 23척을 격침함으로써 괄목할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구형전함에 의한 포격은 제58기동부대의 도꾜 공습과 때를 맞추어 2월16일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상륙군 사령관인 슈미트 해병소장은 구형전함들이 상륙 전에 10일간 포격을 해주길 원했으나 전함들이 그만한 양의 주포탄을 실을 수가 없었으므로 3일간 포격할 수 밖에 없었다.
호위항공모함의 함재기들도 2월16일부터 본격적으로 이오지마에 공습을 가하기 시작했다.

상륙일인 2월 19일에는 아침 6시 40분부터 7척의 구형전함이 포격을 시작했다.
동시에 수송선들은 상륙용주정을 내리고 병력과 전차, 장비들을 옮겨 싣기 시작했다.
7시 45분부터는 8개 대대를 실은 482대의 LVT들이 발진지점을 향했다.
8시 5분, 구형전함들이 잠시 포격을 멈추고 제58기동부대에서 발진한 함재기 120대가 저공비행을 하면서 상륙예정해안과 그 배후지역, 스리바찌 산의 동쪽과 북쪽 능선을 네이팜탄, 로켓탄, 폭탄 등으로 공격하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사이판에서 날아온 육군제7항공대의 B-24 들도 가세하여 19톤의 폭탄을 쏟아부었다.
그동안 포정들과 로켓포정들은 상륙예정 해안에 바짝 접근하여 포격을 시작했다.
이들은 최초의 LVT 가 해안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8시 30분, 공격 제1파를 실은 68대의 LVT가 공격개시선을 통과했다.
최초의 LVT 가 해안에 도달한 것은 오전 9시 2분, 예정보다 2분 늦은 시각이었다.

 

(이오지마의 해안선으로 쇄도하는 제4 및 제5해병사단의 LVT들. 1945년 2월 19일)


그런데 이오지마의 해안은 부드러운 화산재로 이루어져 있고, 해안 바로 뒤에 4.5미터 높이의 언덕이 있어서 LVT 가 기어오르지 못했다.
따라서 해병들은 무거운 군장을 멘 채로 하차하여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화산재로 이루어진 언덕을 힘겹게 올라가서 내륙으로 전진해야만 했다.
곧이어 3분후에 LVT 제2파가 도달했다.
일본군들은 해안 방어를 포기하고 잘 엄폐된 동굴 진지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9시 20분부터 320mm짜리 대구경박격포와 대형로켓탄을 비롯한 각종 화기를 동원하여 해병대의 교두보에 집중적인 포격을 가해 왔다.
10시 20분까지 LVT 에 탑승한 8개 대대 전부가 상륙을 마쳤고, 그날 저녁까지는 30,000 명이 상륙을 마쳤으며, 그날 오후에 해병제27연대는 섬의 가장 짧은 부분을 통하여 서해안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하여 섬의 남단에 있는 스리바찌 산을 북쪽의 일본군 주력부대로부터 분리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효율적이고도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상륙 첫날의 사망자는 566명에 이르렀고, 대부분의 부대가 원래 계획에 훨씬 못미치는 지점까지 진격했을 뿐이었다.

애당초 미해군 정보부는 이오지마의 일본군 수를 13,000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빠르면 4일, 늦어도 10일 안에는 완전히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 일본군의 수는 23,000 여명이었고, 방어준비가 철저했다.

또한 구리바야시 중장의 현실적이고 교묘한 작전지도 때문에 실제로 해병대가 이오지마를 완전히 점령한 것은 3월 26일의 일로써 실로 상륙한지 37일째 되던 날이었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예비포격에 의하여 상륙군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전멸할 것이 뻔한 해안방어를 포기하고 일단 상륙을 허용한 후에 전투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휘하 장병들에게 각자가 미군 10명씩을 사살하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목숨을 보존해야만 하며 마지막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위치를 사수하며 최대한 저항해야지 만세돌격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제58.5전단에 소속된 엔터프라이즈는 2월 19일 오후에 이오지마에 도착하여 오후 4시 30분에 6대의 헬캣으로 이루어진 CAP 세력을 발진시킴으로써 작전을 시작했다.
이오지마에서 엔터프라이즈의 1차적인 임무는 상륙함대를 공습에서 보호하는 일이었다.
오후 7시30분에 CAP 임무를 수행 중이던 James Wood 대위의 헬캣이 레이더로 일본육군의 쌍발 중폭격기 Ki-49 Helen 을 발견하고 추격하여 오후 8시에 격추했다.

2월21일 오전 9시에 제58.5전단은 해체되어 새러토가는 3척의 구축함과 함께 호위항공모함 전단인 제52.2 전단에 합류하였고, 엔터프라이즈는 58.5 전단의 나머지 호위함들과 함께 제58.2전단에 합류했다.
오후 4시 30분에 새러토가의 레이더가 120km 떨어진 거리에서 25대의 일본기들을 발견했다.
4시 50분부터 새러토가의 CAP 세력들이 교전에 들어갔으나 6대의 일본기가 살아남아서 새러토가에 돌입했다.
4시 59분, 선두에서 돌입하던 2대의 일본기는 거의 동시에 새러토가의 대공포에 피탄되었으나 그대로 돌진하면서 새러토가의 흘수선 부근에 격돌하였고, 이들이 장착했던 폭탄은 함체를 뚫고 들어가서 폭발했다.
뒤따라오던 일본기가 투하한 폭탄이 비행갑판 앞부분에 명중했고, 4번째의 일본기는 우현 쪽으로 빗나갔으나 이어서 2대의 일본기가 비행갑판에 충돌했다.
불과 3분만에 5발의 폭탄에 피탄당한 새러토가는 화재가 발생하면서 일시적으로 기능을 상실했으나 90분간의 사투 끝에 화재를 진압하고 25노트의 속력을 회복했다.
그러나 오후6시 경에 또다시 공격해 온 가미까제 공격대 중 5대가 6시 46분에 새러토가에 돌진해 왔다.
앞장선 4대는 대공포화에 맞아서 격추되었고 마지막 1대가 새러토가의 비행갑판에 낮은 각도로 충돌하여 기체는 함 밖으로 떨어져 나갔으나 폭탄은 기체에서 분리되어 격납고 갑판에서 폭발하면서 또다시 화재를 일으켰다.
새러토가의 승무원들이 다시 화재를 진압하는데 성공하여 새러토가는 오후 8시부터 자신의 함재기들을 불러모았으나 더 이상의 작전은 불가능했으므로 수리를 위하여 전투현장을 이탈했다.
123 명의 전사자를 기록한 이날의 전투를 끝으로 새러토가는 태평양 전쟁에서 물러났다.
새러토가는 에니웨톡 환초에 들렀다가 3월 16일에 미본토 서해안의 브레머튼 항에 입항하여 수리를 받고 5월 22일에 출항, 6월 3일에 진주만에 도착하여 함재기 파일럿들의 훈련을 실시하던 중에 종전을 맞았다.
새러토가가 전열에서 탈락함으로써 이제 엔터프라이즈는 미해군의 항공모함 중에서 태평양 전쟁 개전 이래 계속하여 싸우고 있는 유일한 항공모함이 되었다.

 

(USS Saratoga CV-3.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67754173 )



새러토가를 전열에서 탈락시킨 일본의 가미까제 공격대는 이때 제52.2전단의 호위항공모함 룽가포인트 와 비스마르크시 에도 돌입했다.
오후 6시 35분에 가미까제 특공기 1대가 룽가포인트 에 격돌하여 화재를 일으켰고, 10분 후인 6시 45분에는 비스마르크시 에 2대의 특공기가 격돌했다.
비스마르크시 에서는 즉각 치명적인 화재가 발생했고, 피격 20분만에 퇴함명령이 내려졌으며 피격 3시간 만에 318명의 전사자와 함께 침몰했다.
이외에도 수송선 1척과 LST 한척도 피해를 입었으나 침몰은 면했다.

22일 오후에 엔터프라이즈는 전날의 가미까제 공격 때 실종된 새러토가의 조종사 8명을 찾으러 이오지마 남쪽으로 8대의 아벤저를 파견했다.
뿔뿔이 흩어져서 이오지마 남쪽으로 250km까지 수색했던 이들은 나쁜 날씨 때문에 실종된 조종사들을 찾는데 실패하고 이오지마의 동쪽 10km 지점에서 합류했는데 이곳에서 아군함대로부터 오인사격을 받아서 2대의 아벤저가 격추되었다.
그 중의 1대에 타고 있던 조종사와 승무원은 무사히 구출되었으나 편대장이었던 C. B. Collins 대위와 승무원들은 실종되고 말았다.

23일 오전에 이오지마의 해병대가 스리바찌 산을 점령하고 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았다.
제5해병사단 제28연대 제2대대 E 중대 소속의 5명의 해병과 1명의 해군위생병이 파이프에 대형 성조기를 매달아서 스리바찌 산의 정상에 꽂는 순간인 이 성조기 게양장면을 AP 기자인 조 로젠탈이 사진으로 남겼는데 ’Raising the Flag on Iwo Jima’ 라는 제목의 이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이 되었다.

(Raising the Flag on Iwo Jima)

23일 오후에 급유를 받은 엔터프라이즈는 제58.2전단에서 분리되어 다시 제58.5전단을 형성했다.
오후 6시 50분, 제58.5전단을 제외한 제58기동부대는 이오지마에서 활동하는 가미까제 특공기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재차 일본공습에 나섰다.
제58기동부대는 24일과 25일에 도꾜를 공습했고, 26일에는 도꾜와 나고야를 공습했지만 날씨가 나빠서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27일과 28일에 걸쳐 해상급유를 받은 제58기동부대는 3월 1일에는 오끼나와를 공습하여 수송선 9척과 소형함정 2척을 격침하고, 1달 뒤에 실시될 오끼나와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수많은 사진을 찍고는 3월 2일에 울리시로 향하여 3월 4일에 도착했다.

제58기동부대가 일본공습을 위하여 떠나버리자 이제 엔터프라이즈는 이오지마 해역에서 유일한 정규항공모함이 되었다.
엔터프라이즈에게는 기존의 야간 CAP 임무에 더하여 주간 CAP 임무와 함께 240km 정도 북쪽에 떨어져 있는 가미까제의 발진기지 치치지마에 대한 폭격도 겸해야 했다.
사실 주야간 지속되는 CAP 임무만 해도 상당한 중노동으로 오전 6시 30분에 4대의 헬캣이 출격하기 시작하여 3시간 간격으로 계속 진행되다가 오후 4시 45분에는 12대의 헬캣이 출격하여 6시 15분까지 CAP 임무를 맡았고(이 시간대가 석양이 질 때라서 가미까제 특공기가 기습을 하기 가장 좋은 시간대이다.), 6시 15분부터는 2대의 헬캣이 2시간 간격으로 야간 CAP 임무에 돌입하여 새벽 4시 15분까지 계속되었다.
엔터프라이즈의 아벤저들은 낮 동안에는 대잠경계를 담당하거나 또는 함대의 대공사격 연습을 위하여 꼬리에 표적을 끌고 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오후 2시가 넘어가면 헬캣 2-4대, 아벤저 4-6대 정도로 이루어진 공격대가 석양에 치치지마를 공격하기 위하여 엔터프라이즈를 떠났다.
오후 6시 15분에는 1대의 헬캣이나 아벤저가 치치지마에 가서 밤새 활주로를 보수하지 못하도록 일본군을 방해했다.
이런 방해작전(Heckler Mission)은 다음날 새벽 3시 15분까지 3시간 간격으로 4번 실시되었다.

이러한 빡빡한 일과는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에게 상당한 중노동을 강요하여 조종사부터 함재기 정비병에 이르기까지 함내의 거의 모든 인원은 주간반과 야간반으로 나누어졌다.

따라서 항공기 정비같은 경우 보통 7명이 한대의 함재기를 담당하는데 비하여 엔터프라이즈는 주간에는 3명, 야간에는 4명이 담당해야 했다.
장교들의 경우에는 더 심하여 착함 통제관의 경우 통상적인 근무시간의 2배가 넘는 13시간 교대 근무를 해야 했고, 캐터펄트 담당사관은 무려 18시간 연속 근무를 해야만 했다.
함재기의 이함은 짧은 전방갑판에서 캐터펄트를 사용하여 실시해야 했고, 후방갑판은 항상 착륙하는 함재기들을 위하여 비워놓아야 했다.
함장에서 말단 승무원까지 이러한 중노동을 강요당하면서도 이 기간동안 엔터프라이즈에서는 다른 항공모함에 비하여 특별히 사고가 많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엔터프라이즈가 태평양 전쟁 개전이래 계속 전투에 참가해 왔기 때문에 승무원들의 숙련도가 대단히 높은 편이었으며 승무원들의 사기 또한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2월24일 오후 2시 16분, 4대의 헬캣과 6대의 아벤저가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을 떠났다.
목표는 치치지마와 하하지마였다.
Charles Gerbron 중위와 George McLaughlin 중위는 치치지마의 슈사끼 비행장에 로켓탄과 집속폭탄을 퍼붓고 기총소사를 가하여 1대의 베티를 비롯하여 4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Bill Balden 중위와 Robert Heid 중위는 정박한 수송선에 로켓탄 공격과 기총소사를 가했고, Charles Henderson 대위는 오무라 마을을 폭격했다.
공격대는 치치지마의 통신시설과 하하지마의 오끼무라 마을도 폭격했다.
헬캣 1대가 대공포에 피탄되었으나 조종사는 치치지마 남쪽 70km 해상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나중에 구축함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공격대가 물러가자 K.D.Smith 중위의 헬캣 1대가 방해작전을 시작했다.
스미스 중위는 오무라 마을에 로켓탄 공격을 가하고 슈사끼 비행장과 수상기 기지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2시간에 걸친 방해작전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스미스 중위는 그때 마침 슈사끼 비행장에 착륙하려고 북쪽에서부터 진입하던 1대의 헬렌 폭격기를 발견하고 격추했다.

이틀후인 26일 새벽 5시 10분에는 4대의 헬캣과 6대의 아벤저로 이루어진 공격대가 새벽공격을 위하여 엔터프라이즈를 출격했다.
이들은 슈사끼 비행장을 주표적으로 삼아서 폭탄을 투하하고 로켓탄을 발사하며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또한 후타미 항을 공격하여 수송선 3척에 로켓탄 공격과 기총소사를 가하여 피해를 입히고, 석유탱크에 로켓탄 6발을 명중시켜 엄청난 폭발과 함께 날려버렸다.
이 과정에서 James Moore 대위의 아벤저가 대공포화에 맞았으나 무어 대위와 2명의 승무원들은 치치지마의 북쪽해상에서 무사히 탈출에 성공하여 구명보트에 타고 구조를 기다렸다.
즉시 제58.5전단에서 DD-802 Gregory 가 북상하여 치치지마의 북쪽 해안에서 3,000m 떨어진 해상까지 다가가서 일본군의 해안포를 무릅쓰고 수색을 실시, 오후 2시 2분에 3명 전원을 무사히 구조했다.

치치지마에 대한 공습은 슈사끼 비행장과 후타미의 수상기 기지와 정박한 선박을 주목표로 하여 거의 매일같이 실시되었다.
3월 2일,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심한 폭우로 인하여 연속적인 항공작전을 중단할 때까지 엔터프라이즈는 174시간 동안 406 소티의 출격을 기록했다.

이 기간 동안 치치지마, 하하지마, 이모또지마 및 아니지마에 지속적인 공습을 가하여 45kg 짜리 폭탄 261발, 3.5인치 로켓탄 194발, HVAR 94발, 그리고 수만발의 12.7mm 기총탄을 퍼부어서 치치지마의 슈사끼 비행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오지마 작전에서 엔터프라이즈는 소규모의 공격대를 지속적으로 내보내어 적의 비행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이 방식이 대규모의 공격대를 동원하여 일시적으로 비행장 기능을 마비시키는 것보다 더 경제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3월 3일에 날이 좋아지자 엔터프라이즈는 다시 24시간 항공작전을 개시했다.
3월4일에는 최초의 B-29가 이오지마의 제1번 비행장에 비상착륙했고, 6일에는 육군제7항공대의 P-51 기들이 이오지마의 비행장에서 작전을 시작하여 엔터프라이즈는 이오지마에 대한 CAP 임무에서 풀려났다.
주야간 CAP 임무의 큰 부담에서 벗어난 엔터프라이즈는 치치지마 공격에 주력하여 매일 오후와 새벽에 지속적으로 치치지마를 공습했다.
3월9일 오후 9시 20분, 치치지마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마치고 돌아온 공격대가 착함하자 엔터프라이즈는 울리시 환초를 향하여 20노트의 속력으로 남진하기 시작했다.

이오지마 전투는 그 후에도 한참을 더 끌어서 3월 15일에야 섬을 점령했다는 선언이 나왔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일본군의 저항이 종식된 것은 수비대장 구리바야시 중장이 할복자살하고,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던 300명 수준의 일본군 잔여병력이 이오지마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만세돌격을 감행한 끝에 완전히 전멸한 3월 26일에 이르러서였다.
23,000 여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던 이오지마의 일본군 수비대는 1,033명의 포로를 제외하고, 22,000 여명이 전사했다.
해병대의 피해도 극심하여 최종적으로 6821명이 전사했다.
하지만 이오지마가 미군 손에 들어옴으로써 종전때까지 2,400 여대의 B-29 기들이 이 섬에 불시착하여 27,000 여명의 승무원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사실 이오지마를 점령하기 전까지 B-29 승무원 손실의 2/3 이상이 귀환 중에 해상에 불시착하여 실종된 인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적어도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작전에서 이오지마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엔터프라이즈는 이오지마 작전 기간 중에 1대의 아벤저가 아군 대공포의 오인사격으로 격추당하여 3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이오지마를 떠난 엔터프라이즈는 3월 12일 오전 7시에 울리시 환초에 입항했다.
제58기동부대의 다른 항공모함들은 3월 4일까지 입항을 완료했기 때문에 최소한 1주일 이상의 휴식기간이 있었으나 1주일 늦게 입항한 엔터프라이즈의 기진맥진한 승무원들에게는 휴식시간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울리시에 입항한지 채 48시간도 지나지 않은 1945년 3월14일 오전 6시 10분에 엔터프라이즈는 항공모함 요크타운, 인트레피드와 함께 제58.4전단을 형성하여 울리시를 출항했다.
태평양전쟁 최후의 대규모 작전인 오끼나와 상륙작전이 임박해 있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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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 16일과 17일에 걸쳐 감행된 제58기동부대에 의한 도꾜 공습은 1942년 4월 18일에 실시되었던 둘리틀 특공대의 도꾜 공습 이래 실로 3년 만에 실시되는 항공모함에 의한 도꾜 공격이었다.
이번 공습은 사실상 정치적 제스처에 지나지 않았던 둘리틀 공습과 달리 2월 19일로 예정된 이오지마 상륙을 앞두고 도꾜 부근의 비행장과 항공기 생산 공장을 공격하여 상륙작전을 엄호한다는 중요한 전술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2월16일 새벽에 제58기동부대는 혼슈에서 100km 이내, 도꾜에서 190km 까지 바짝 접근했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이래 미해군의 수상함정이 일본 본토에 이렇게 가까이 접근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16일 오전 4시, 공격대의 제1진인 전투기들이 이륙하기 2시간 전에 엔터프라이즈에서 대레이더 임무(RCM=Radar Counter-Measure) 를 맡은 헬캣 12대가 날아올랐다.
이 공격대에는 ECM 임루를 맡은 아벤저 뇌격기 1 대가 동행하고 있었다.

오전 6시, 제58기동부대의 전투기들이 일제히 출격했다.
목표는 도꾜 근방의 일본군 비행장들이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일본군의 저항은 미약했으나 제58.2전단의 헬캣 40 여대는 도꾜 근방의 보소 반도 상공에서 100 여대의 일본기들과 교전하여 40 여대를 격추하고, 자신들은 2대의 헬캣을 잃었다.
이날 제58기동부대의 핼켓들은 나까지마의 비행기 공장도 공습했다.

악천후로 인하여 공습 일정이 일찍 끝나고 오후 4시 15분에 엔터프라이즈의 헬캣 12대가 일본군 항공기들이 밤 사이에 제58기동부대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일명 ‘잠그기 작전’(zipper mission) 을 위하여 출격했다.
출격 도중 Frank Luscombe 소위의 탑승기가 해상에 추락하여 루스컴 소위가 전사했다.
11대의 헬캣들은 도꾜 근방의 비행장들 상공에 진입하여 감시했으나 야간 작전의 징조가 보이지 않자 도꾜 근방의 비행장 중 최대 규모인 요꼬스까 기지에 돌입하여 지상에 주기해 놓은 항공기에 로켓탄 공격과 기총소사를 가했다.
이들은 돌아오면서 도꾜만에 정박한 함선들, 라디오 송신탑, 레이더 기지, 운행 중인 열차 3대 등에 기총소사를 가하고 엔터프라이즈에 귀환했다.
작전 중 격추된 기체는 없었으나 헬캣 1대는 연료가 떨어져서 엔터프라이즈 부근의 해상에 착수했고, 1대는 착륙 중에 비행갑판에 추락했다.

 

(F6F 헬캣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69351104 )

 

오후 5시 45분에는 Charles Henderson 대위가 조종하는 아벤저 1대가 헬켓 1대와 함께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을 떠났다.
이 아벤저의 임무는 도꾜 근방에 있는 일본군 레이더의 특성을 파악하고, 레이더 교란을 시도해 보는 것이었다.
이날의 임무로 도꾜 부근에 설치된 레이더 사이트 23개소의 위치와 레이더들의 파장 특성을 파악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앞으로의 작전에 큰 도움이 될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17일 오전1시 30분에는 레이더를 장비한 11대의 아벤저가 엔터프라이즈를 출격하여 도꾜 만 내의 함정들을 찾아 공격하려고 했으나 중간에 표적을 바꾸어 도꾜 근방의 비행장들에 폭탄을 투하했다.
오전 3시에는 일단의 항공기들을 혼슈 남쪽으로 내보내어 거기서 일부러 무전통신을 함으로써 일본군들로 하여금 제58기동부대가 밤사이에 혼슈 남쪽으로 내려간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17일 아침이 되자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을 뚫고 제58기동부대의 함재기들이 다시 공격에 나섰다.
이날의 공습에서 제58기동부대는 주로 다찌까와 엔진 공장과 나까지마 사의 무사시 공장을 공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전날 공습의 충격에서 어느 정도 회복된 일본군의 항공기들이 반격을 가해왔다.
오전 11시, 빗줄기가 더욱 굵어지면서 사실상 비행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자 미처 제독은 함재기를 모두 불러들이고는 이오지마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급속히 남하했다.

2일간의 도꾜 공습에서 제58기동부대는 1,000 대 이상의 함재기를 내보내어 일본기 341대를 격추하고, 190 대를 지상에서 파괴했으며, 10,600 톤 짜리 유조선 야마시로 마루 이외에도 수송선 2척과 소형함정 2척을 격침했다.
또한 도꾜 인근의 비행장들과 비행기 조립공장 및 엔진공장을 공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제58기동부대에서는 60대의 함재기가 격추되었고, 28대가 기타 사고로 손실되었다.
이런 피해는 예상보다 더 큰 것으로 아직까지 제58기동부대 전투기 조종사들의 기량이 만족할만하지 못하다는 증거였다.
엔터프라이즈는 도꾜 공습에서 헬캣과 아벤저 각 1대씩을 상실하면서 4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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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 해전이 끝난 이후에도 제38기동부대는 계속하여 필리핀 근해에 머물면서 레이테 섬에 상륙한 지상군을 지원했다.
그런데 레이테 섬 점령은 일본군 수뇌부가 착각을 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훨씬 늦어지게 되었다.
즉 일본연합함대는 사실상 레이테 해전에서 전멸했는데도 일본해군은 어이없게도 자신들이 미해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고 착각하여 엉뚱한 보고를 올렸고, 이 보고를 받고 고무된 일본군 수뇌부는 원래 루존 섬에서 결전을 벌이려던 생각을 바꾸어서 레이테 섬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게다가 레이테 섬의 지반이 연약하고 비가 엄청나게 와서 미군이 점령한 타클로반 비행장의 확장이나 새로운 비행장의 건설이 지연되어 케니 장군의 육군제5항공대가 제대로 전개하지 못했는데 그동안 일본은 오끼나와와 대만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항공기들을 필리핀에 투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38기동부대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필리핀 상공의 제공권을 확립하는데 실패했다.
또한 섬의 중앙부를 높은 산맥이 지나가는 레이테 섬의 특성상 일본군의 사령부가 있고 증원부대를 실은 함선들이 계속 도착하고 있던 레이테 서부의 요충지 오르목을 장악하려면 섬의 남쪽이나 북쪽을 돌아서 다시 상륙작전을 펴야했는데 새로 등장한 강적인 가미까제 특공대의 공격으로 미함대는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사람의 판단력으로 장애물을 피하여 목표물에 돌입할 수 있는 가미까제는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의 순항미사일보다도 더 뛰어난 인공지능을 가진 순항미사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사실은 전과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서 태평양전쟁 전체를 통하여 가미까제 특공대는 14% 의 명중률을 기록했는데 필리핀 해전에서는 그래도 2-3달의 비행경력을 가진 조종사들이 모는 일본기들이 미함대를 공격하여 222대가 격추되고 400 명 가까운 전사자를 내면서 겨우 1발을 명중시키는데 성공했었다.

거기에 비교해 보면 대부분 1주일 간의 비행경력이 전부인 완전초보 비행사들이 모는 가미까제 특공대가 필리핀 해전 당시보다도 숫자가 훨씬 늘어난 미함대의 전투기들과 강화된 대공포화를 뚫고서 기록한 14%라는 명중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레이테 섬의 확보가 늦어지자 원래 1944년 12월 20일에 예정되었던 루존 상륙도 1945년 1월 9일로 미루어졌고, 덩달아서 이오지마 상륙일도 1월 20일에서 2월 19일로, 오끼나와 상륙일도 3월 1일에서 4월 1일로 연기되었다.
제38기동부대는 레이테 해전 이후 1944년 11월 25일에 울리시로 철수할 때까지 한 달간 700 대 이상의 일본기를 격추하고, 중순양함 2척(나치, 구마노), 구축함 10 척과 40 여척의 수송선, 유조선 및 기타함정들을 격침했다.

1944년 12월 11일, 미상원은 영국의 원수들을 상대할 수 있도록 해군대장 4명과 육군대장 4명을 원수로 승진시키도록 승인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즉시 킹 제독과 니미츠 제독, 그리고 대통령의 해군보좌관인 리히 제독을 해군원수로, 마셜 장군과 맥아더 장군, 아놀드 장군과 아이젠하워 장군을 육군원수로 임명하여 12월 15일에 상원의 승인을 받았다.
원래대로라면 미해군의 서열 4위인 핼시 대장도 이때 원수로 승진했어야 했으나 핼시 대장과 같은 격의 전투함대 사령관인 스프루언스 대장의 입장을 고려한 킹 제독이 핼시 제독에 대한 추천을 보류함으로써 핼시 대장은 1년 후인 1945년 12월 11일에 원수로 승진하게 되었다.
이때 제7함대 사령관인 토머스 킨케이드 중장도 같은 등급이었던 미처 중장이나 맥케인 중장보다 한발 먼저 대장 계급장을 달아서 핼시 제독이나 스프루언스 제독과 같은 대장의 반열에 올랐다.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8685432 )

 

12월 15일에 실시된 남서태평양해역군의 민도로 섬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12월 10일에 울리시를 떠난 제38기동부대는 12월 16일까지 루존을 맹타하여 일본기들의 활동을 제약했다.

12월 17일 오후부터 필리핀에서 동쪽으로 800km 떨어진 해상에서 해상급유를 받던 제38기동부대는 18일 새벽부터 최고풍속이 무려 시속 200km에 달하는 태풍 코브라에게 직격당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즉 구축함 3척(모내헌, 헐, 스펜서)이 침몰하고 9척이 전열에서 탈락할 정도로 심한 손상을 입었으며, 경항공모함 몬터레이와 카우펜스, 호위항공모함 알타마하와 케이프 에스퍼란스 등지에 실려있던 함재기의 고정밧줄이 끊어지면서 186 대의 항공기가 바다에 쓸려 들어거나 서로 부딪혀서 파손되었다.
실종된 승무원의 수만도 800 명에 달했다.
필리핀 해전에서 상실한 항공기의 숫자가 130 대, 전사자 숫자가 107 명인 것에 비하면 이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큰 것이었나를 알 수 있다.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나 커서 제38기동부대는 예정되었던 나머지 작전을 취소하고 일단 울리시로 철수했다.
이 태풍피해는 태평양함대 내에서도 큰 문제가 되어 즉각 울리시에 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위원장 존 후버 제독은 조사를 마친 후 핼시 제독을 군법회의에 회부하려고 했으나 킹 제독과 니미츠 제독이 적극 나서서 말렸다.
따라서 핼시 제독은 비난을 받고 명성에 흠이 가기는 했지만 계속하여 해군 대장의 계급과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지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2월 24일에 울리시에 도착하자마자 태풍피해 때문에 조사위원회에 불려 다니면서 거센 비난을 받은 핼시 제독은 잠시 의기소침했었으나, 킹 제독과 니미츠 제독이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줌으로써 자신이 이들에게 얼마나 큰 신뢰를 받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되자 금방 자신감을 회복하여 12월 30일에 제38기동부대를 이끌고 남서태평양해역군의 루존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울리시를 출발했다.

제38기동부대는 1월 3일과 4일에는 대만을 공습했고, 1월 6일부터는 루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월 3일부터 8일까지 제38기동부대는 대만과 루존의 비행장들을 타격하고, 17척의 수송선과 소형함정들을 격침했다.
1945년 1월 9일 오전 8시, 제7함대의 화력지원 하에서 월터 크루거 중장이 지휘하는 제6군 175,000 명의 병력이 링가옌 만에 상륙했다.
일단 루존에 상륙만 하면 친미 성향 필리핀 게릴라의 도움으로 간단하게 필리핀을 탈환할 수 있다던 맥아더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제6군은 260,000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필리핀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야마시따 도모유끼 대장의 효과적인 지연작전에 휘말려서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루존에 발이 묶여 있어야 했다.

이미 12월 30일에 울리시를 떠나 루존을 맹타하고 있던 제38기동부대는 루존 상륙작전이 있던 1월 9일에 필리핀과 대만 사이의 바시 해협을 통과하여 남지나해로 들어서면서 대만을 공습하여 3척의 수송선, 2척의 유조선, 3척의 소형함정을 격침했다.
1월 12일, 제38기동부대의 함재기들은 항공전함 이세와 히우가를 노리고 캄란 만을 공습했으나 이미 싱가포르로 도망간 뒤여서 격침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제38기동부대는 이날의 공습에서 연습순양함 기시와 수송선 13척, 유조선 10척, 소형함정 11척을 격침하여 합계 126,000 톤의 격침 톤수를 기록함으로써 트럭 공습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격침톤수를 기록했다.  
13일과 14일 양일간 해상급유를 실시한 제38기동부대는 15일과 16일 이틀동안 대만, 홍콩, 꽝뚱, 루존 등지를 맹폭하여 구축함 쓰가와 하타가제, 수송선 5척, 유조선 3척, 소형함정 4척을 격침했다.

홍콩에서는 일본기가 효율적인 반격을 감행하여 미함재기 61대가 격추된 반면 일본기는 47대가 격추되었다.
헬캣이 실전에 배치된 이래 미해군이 공중전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일은 극히 드문 일로서 이 사건은 제38기동부대 사령관인 맥케인 제독이 함재기 중에서 전투기의 비율을 급속하게 늘리면서 전투기 조종사가 부족하여 기존의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나 뇌격기 조종사 중 전투기 조종사로 기종전환한 조종사들의 기량이 아직 미숙하다는 증거였다.
미해군은 전투기 조종사의 숫자가 부족하자 콜세어를 가진 해병대의 전투비행대를 항공모함에 싣는 고육지책까지 동원했으나, 새로 충원된 전투기 조종사의 경험 부족은 어쩔 수 없었다.
1월17일부터 19일까지 필리핀 서부해안에서 해상급유를 마친 제38기동부대는 1월20일에 발린탕 해협을 통하여 남지나해를 빠져나왔다.

다음날인 1월 21일에 제38기동부대는 대만, 오끼나와, 루존을 공격하여 일본기 100 대를 지상에서 파괴하고, 수송선 7척, 유조선 7척, 소형함정 1척을 격침했다.
이제까지 제38기동부대의 함정들은 일본의 항공기로부터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이날 대만을 출격한 대규모의 일본기들이 제38기동부대를 공격해 왔다.
경항공모함 랭글리가 1발의 250kg 폭탄에 명중되어 3명이 전사했고, 구축함 매덕스에 1대의 가미까제 특공기가 격돌하여 7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정규항공모함 타이콘데로가에 2대의 가미까제 특공기가 격돌하여 함장인 키퍼 대령을 포함하여 143명의 전사자를 기록하면서 대파되어 본토로 수리하러 가야만 했다.
1월 23일에 해상급유를 실시한 제38기동부대는 울리시로 향하여 1월 26일에 도착했다.
그날 핼시 제독은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한편 루존 상륙전이 끝난 이후에 니미츠 원수는 제7함대에 빌려주었던 함정들을 다시 돌려받기 위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오지마 상륙작전과 오끼나와 상륙작전을 위하여 이 함정들이 꼭 필요했던 니미츠 제독은 몇 번씩이나 남서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에게 전보를 보내어 빌려주었던 함정들을 돌려달라고 재촉하였으나 제7함대 사령관인 킨케이드 대장은 맥아더 원수에게 필리핀 작전을 제대로 지원하려면 이 함정들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차일피일 시간을 끌고 있었다.
특히 전함 1척도 없이 중순양함만으로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수많은 상륙작전을 지원하면서 일본함대가 나타날 때마다 그 안에 혹시 1척의 전함이라도 포함되어 있을까봐 늘 가슴을 졸이고 전전긍긍하면서 전함에 아주 한이 맺힌 킨케이드 제독은 특히 전함에 대단한 집착을 보이면서 4척의 구형전함(뉴멕시코, 캘리포니아, 펜실베니아, 미시시피)을 꽉 움켜쥐고 절대로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킨케이드 제독이 대장의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니미츠 제독의 바짓가랑이를 끝까지 붙잡고 늘어지자 니미츠 제독은 할 수 없이 4척의 구형전함을 2척의 중순양함 및 22척의 구축함들과 함께 제7함대에 넘겨주었다.
니미츠 제독이 이러한 결심을 한데에는 당시 대서양에서 필요가 없어진 구형전함 5척(아이다호, 네바다, 텍사스, 뉴욕, 아칸사스)을 위시한 더 많은 함정이 태평양 함대에 도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킨케이드 제독은 비록 구형전함이라고는 하지만 꿈에도 그리던 전함을 4척이나 보유하게 되었으나 그 중에서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는 1월 6일에 가미까제 특공기에 의하여 피해를 입어 1월 23일에 할수없이 수리를 위하여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펜실베니아와 미시시피는 필리핀의 일본군 지상기지 공격에 나름대로 위력을 발휘하면서 킨케이드 제독을 기쁘게 해주었으나 2척 다 역시 2월 10일에 가미까제 특공기에 의하여 피해를 입어서 수리를 위하여 내놓아야만 했다.
이 전함들은 수리를 마치고 오끼나와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킨케이드 제독은 천신만고 끝에 손에 넣은 구형전함 4척을 1달 만에 전부 다 내놓아야했지만 어쨌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필리핀 근해에서 중순양함만으로는 대적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일본함대를 만날 일은 없었다.

 

(BB-38 펜실베니아.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8683540 )



제58기동부대는 2월 10일에 울리시를 떠났다.
1945년 2월 19일로 예정된 이오지마 상륙작전을 앞두고 도꾜 부근의 비행장 및 항공기 생산 공장을 공습하여 일본의 항공력이 상륙작전을 간섭하지 못하도록 미리 그 세력을 꺾어두는 것이 목표였다.
제58기동부대는 5개의 전단으로 이루어져 총 11척의 정규항공모함(베닝턴, 와스프, 호넷, 렉싱턴, 핸콕, 에섹스, 벙커힐, 요크타운, 랜돌프, 엔터프라이즈, 새러토가), 5척의 경항공모함(벨로우드, 샌야신토, 카우펜스, 랭글리, 캐벗), 8척의 고속전함(메사추세츠, 인디애나, 위스컨신, 미주리, 사우스다코타, 뉴저지, 워싱턴, 노스캐롤라이나), 1척의 대형순양함(알래스카), 6척의 중순양함(솔트레이크시티, 샌프란시스코, 보스턴, 피츠버그, 인디애나폴리스, 볼티모어), 11척의 경순양함(빈센스, 마이애미, 산후앙, 플린트, 파사데나, 윌크스베어, 아스토리아, 빌록시, 산타페, 샌디에고), 구축함 85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엔터프라이즈는 이 공격에서 새러토가와 함께 엔터프라이즈의 제8대 함장을 지냈던 가드너 소장의 지휘 하에 대형순양함 알래스카, 중순양함 볼티모어, 경순양함 플린트와 구축함 9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제58.5전단을 형성했다.

대형순양함(CB)으로 분류되는 알래스카 급은 상당히 독특한 급이다.
표준배수량이 29,800 톤인 크기와 33노트라는 고속에다가 장갑 등으로 보면 순양전함이라고 볼 수 있으나 주포가 12인치 포 9문으로서 일반적으로 전함과 같은 구경의 주포를 사용하는 순양전함치고는 너무 작은 편이어서 설계 개념이 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함종은 원래 일본이 기존의 중순양함과 순양전함의 중간에 해당하는 강력한 함정(일명 초갑형 순양함)을 건조할 예정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이 가상의 대형 중순양함에 대항하기 위하여 건조된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항공모함이 해전의 중심으로 급속하게 떠올랐으며 또한 일본이 초갑형 순양함을 건조하지 않았으므로 알래스카 급이 실제로 완성되자 이 함정에게 주어진 임무는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호위를 맡는 것이었다.
다만 알래스카 급은 함체가 대형이었으므로 강력한 대공무장을 장비하는 것이 가능했고, 또한 주포도 12인치 포로서 적어도 적의 중순양함 정도는 확실히 제압할 수 있으므로 제한적으로나마 고속전함이 제공할 수 있는 수상전투 능력을 제공할 수 있어서 상대적으로 항공모함의 숫자가 적고 함재기의 숫자도 적은 제58.5전단같은 작은 규모의 전단을 호위하는 데에는 다른 중순양함들보다 확실히 유리했다.

 

(CB-1 알래스카. 표준 배수량 : 29,779톤, 길이 : 246.4m, 폭 : 27.8m, 속력 : 31.4노트, 항속거리 : 15노트로 22,000km, 승무원 : 2,251명, 무장 : 12인치 3연장포 9문, 5인치 양용포 12문, 40mm 보포스 대공포 56문, 20mm 기관포 34문, 장갑 : 최고 330mm, 항공기 : 킹피셔 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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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전 9시 30분경에 북쪽으로 멀어져가는 일본중순양함들을 보며 스프라그 제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태피3의 고난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최초의 가미까제 공격대가 태피3을 습격한 것이었다.

10시 51분, 폭탄을 장착한 5대의 제로기가 호위항공모함들의 우현 뒤쪽으로부터 돌입해 왔다.
선두의 1기는 호위항모 키트쿤베이의 함교를 겨냥하여 기총소사를 가하면서 돌입해 왔는데 함교에 충돌하는데 실패하고 좌현 비행갑판의 끝에 추락하여 폭발하면서 화재를 일으켰다.
2대의 가미까제는 태피3의 치열한 대공포화에 걸려서 격추되었다.
남은 2대는 호위항공모함 화이트플레인즈를 노리고 돌입해왔는데 앞장선 1대는 화이트플레인즈의 갑판을 가로지르면서 돌진하다가 집중적인 대공포화에 걸려서 공중에서 폭발, 그 잔해가 비행갑판에 떨어지면서 11명의 수병이 부상당했다.

마지막 1대는 대공포화가 집중된 화이트플레인즈를 피하여 센트 로에 돌진, 후방 비행갑판의 중앙선에서 좌측으로 4.5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충돌했다.
곧이어 격납고 갑판에서 요란한 폭발과 함께 화재가 발생했다.
사실 가미까제가 보유한 폭탄의 폭발 자체는 그리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센트 로의 격납고 갑판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폭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폭탄들이 유폭하기 시작하자 화재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가미까제가 충돌한지 채 10분이 지나지 않은 11시에 센트 로에는 퇴함명령이 내려졌고, 몇 번의 폭발을 거듭하던 센트 로는 11시 25분에 고물부터 침몰하고 말았다.
센트 로가 사경을 헤매고 있던 오전 11시 10분에 또다른 가미까제 4대가 호위항공모함 칼리닌베이를 향하여 달려들었다.
이중 2대는 충돌하기 전에 격추되었으나 나머지 2대 중 1대는 좌현 비행갑판에 또 한 대는 상부구조물에 충돌하여 칼리닌베이는 대파되었다.
다음날인 26일에는 3대의 가미까제가 태피1을 공격하여 호위항공모함 생가몬, 샌티, 스와니에 각각 피해를 입혔다.
이 공격을 마지막으로 사상 최대의 해전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레이테 해전이 끝났다.

이 해전에서 미해군은 경항공모함 1척(프린스턴), 호위항공모함 2척(갬비어베이, 센트 로), 구축함 2척(존스턴, 호엘), 호위구축함 1척(새뮤얼 로버츠) 등 총 6척 37,000 톤의 함정이 침몰했고, 3,000 명 가량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일본해군은 정규항공모함 1척(즈이가꾸), 경항공모함 3척(즈이호, 지요다, 지또세), 전함 3척(무사시, 후소, 야마시로), 중순양함 6척(아타고, 마야, 스즈야, 모가미, 죠까이, 치꾸마), 경순양함 4척(노시로, 아부꾸마, 다마, 기누), 구축함 9척 등 총 26척 306,000 톤의 함정이 침몰했고 10,000 명 가량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엔터프라이즈는 레이테 해전에서 항공기 승무원 20명과 함정 승무원 1명 등 총 21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일본연합함대가 레이테 해전에서 참패한 이유는 역시 압도적인 전력의 열세, 그 중에서도 항공력의 열세였다.
게다가 쇼1호 작전계획 자체에도 문제가 많았다.
가장 중요한 것이 모자라는 항공력마저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시부얀 해에서 제1유격부대 주대가 제38기동부대의 공습으로 계속 타격을 받으면서도 전혀 일본군 항공부대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항공력이 아무리 모자라도 최소한 항공정찰만은 실시해서 그 내용을 구리따 함대에 전달해 주어야 했는데 이마저도 실패함으로써 구리따 함대가 사마르 해전에서 시종 비효율적인 전투를 지속하도록 만드는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해전에 참가한 함대 사이의 연락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충분하여 오자와 제독은 귀중한 항공모함들을 모두 소모하면서 제38기동부대를 북쪽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자와 제독의 무전을 수신하지 못한 구리따 제독은 사마르 해전에서 자신들이 핼시 제독의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상대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결국 레이테 만을 눈앞에 두고 북쪽으로 철수하는 어처구니없는 판단착오를 일으키는 이유가 되었다.
레이테 해전에 참가한 11척의 일본잠수함 또한 오자와 함대가 출동한 이후에야 출발함으로써 전개가 늦어져서 이렇다할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미함대도 레이테 해전에서 제38기동부대가 오자와 제독에게 유인당해 북상하면서 샌배너디노 해협을 비워줌으로써 구리따 함대에게 레이테 만으로의 길을 열어주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는데 그건 일차적으로 핼시 제독의 판단 미스이며 그 바탕에는 니미츠 제독과 맥아더 장군으로 양분된 지휘권의 이원화 문제가 깔려 있다.
이 실수로 말미암아 하마터면 엉성한 일본해군의 계획이 그대로 들어맞을 뻔 했다.  

 

일본연합함대는 레이테 해전 이후로 사실상 함대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이제 미해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일은 가미까제 공격대가 맡게 되었다.

가미까제 공격대가 정식으로 편성된 것은 1944년 10월 20일이었다.
미군이나 일본군이나 공격에 나섰다가 자신의 항공기가 피탄되면 적을 향하여 돌격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게 있었으나 처음부터 자폭을 목적으로 출격하는 가미까제 전법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일본군의 항공모함 함재기 조종사들이었다.
기초비행훈련이 부실한 상태로 고난이도의 항모 이착함 훈련을 하다가 거의 매일같이 항공모함 갑판에 추락하여 사망하는 조종사가 발생하자 함재기 조종사들 중에서는 이런 식으로 아군 항공모함의 갑판에서 동료들에게 피해를 끼치며 개죽음하느니 차라리 폭탄을 껴안고 적 항공모함 갑판에 들이받는 것이 더 남자다운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싹텄고 오래잖아 그들은 상관들에게 그러한 자살전법의 가능성에 대하여 진언하기 시작했다.
일본제독들의 생각에도 미해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자살전법 밖에는 없다는 것은 누구나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곧 이런 아이디어가 연합함대 사령관 도요다 제독에게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나마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있던 일본해군 수뇌부는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어도 차마 그러한 비인간적이고 엽기적인 전법을 공식적으로 허가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대만항공전이 한창이던 10월 15일에 제26항공전대 사령관인 아리마 마사부미 소장이 직접 공격대를 이끌고 필리핀의 니콜스 비행장을 이륙하여 공격대의 선두에서 무전으로 비장한 유언을 남기고는 미항공모함 프랭클린에 육탄돌격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필리핀의 해군조종사들 사이에 자살전법에 대한 공감대가 급격히 높아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0월 17일에 제1항공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오니시 다끼지로 중장이 총대를 메고 나서자 자살전법은 드디어 공식전법으로 인정을 받아서 1944년 10월 20일 아침에 필리핀의 마발라카트 비행장에서 세끼 유끼오 대위를 지휘관으로 하여 24명의 자원자로 이루어진 최초의 가미까제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세키 유키오 대위.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5540449 )


이들은 20일부터 매일같이 목표를 찾아서 출격했으나 그때마다 목표를 찾는데 실패했고, 21일에는 가미까제 중의 1대가 귀환 중 실종되는 사태까지 일어났으나 마침내 25일에 태피3을 발견하고 돌진하여 호위항공모함 센트 로를 격침했던 것이었다.
이 전과에 고무된  일본군은 드디어 가미까제 전법을 전면적으로 확대실시하게 된다.

사실 가미까제 전법의 비인간적이고 엽기적인 면을 떼어내고 엄밀하게 전술적인 견지에서만 따진다면 가미까제 전법의 효율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당시 일본기 조종사의 평균 비행경력이 대부분 3달 미만인 반면 미국의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의 함재기 조종사들은 대부분 2년 이상의 비행경력과 300시간 이상의 전투비행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미해군의 주력 전투기인 헬캣의 성능은 일본해군의 주력전투기인 개량형 제로기의 성능을 압도하고 있었으며, 항공기의 숫자마저 딸리는 상황에서 일본항공기들이 통상적인 공격방식으로 미국의 고속항공모함 부대에 피해를 입힌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리고 일본으로서는 미국의 고속항공모함 부대를 타격하지 못하는 한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이 전쟁을 계속하고자 한다면 불과 1주일 간의 비행훈련밖에 마치지 못한 미숙한 조종사도 운만 좋으면 미국의 고속항공모함 부대를 타격할 수 있는 가미까제 전법이 사실상 유일한 방안이었다.
만일 일본이 가미까제 전법을 채택하지 않았다면 1944년 안으로 미국의 고속항공모함 부대가 도꾜 앞바다에 눌러앉아서 함재기들이 매일 도꾜를 공습하고 미국전함들이 밤낮없이 도꾜에 포격을 가했을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가미까제를 제외하면 미해군의 고속항공모함 부대가 이런 행동으로 나왔을 경우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그런 상황에까지 몰리면 항복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일본은 어차피 이기지 못할 전쟁을 10개월 더 끌고 가려고 자살공격을 군대의 정식전술로 채택하여 자기나라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조직적으로 죽음이 길로 내모는 동서고금에 전례가 드문 비인간적이고 엽기적인 행동으로 나왔다.

일본연합함대의 수상함 세력이 레이테 해전에서 사실상 무력화되고 새로이 가미까제라는 강적이 등장하면서 일본의 항공기들이 미국의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에 대한 유일한 위협으로 떠오르자 미국의 항공모함들은 함재기 중에서 전투기의 비율을 다시 늘리기 시작했다.
사실 미국 항공모함의 전투기 탑재 비율은 태평양 전쟁 개전 이래 꾸준히 늘어왔다.
엔터프라이즈의 경우 진주만 기습 당시 전체 함재기 72대 중에서 전투기의 숫자는 와일드캣 3개 편대 12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6개월 후인 1942년 5월에 벌어진 산호해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와 같은 급의 요크타운은 와일드캣 18대를 보유했고, 1개월 후인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 공히 27대의 와일드캣을 보유하고 해전에 임했다.
다시 4개월 후인 1942년 10월의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는 36대의 와일드캣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1944년 10월의 레이테 해전까지 전체 함재기의 40% 정도를 차지하는 전투기 비율은 2년 정도 계속 유지되어 오다가 레이테 해전 이후에 일본의 수상함을 타격할 경우가 줄어들고 일본군 항공기가 사실상 유일한 위협으로 떠오르면서 전체 함재기 중의 전투기 비율은 다시 수직상승하여 1945년이 되면 전투기의 비율이 전체 함재기의 70%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비록 엔터프라이즈의 전투기 숫자는 전쟁에서 물러날 때까지 36대 정수를 지키지만 이것은 엔터프라이즈가 레이테 해전 이후 야간항공모함으로 전환되면서 전체 함재기의 정수가 57대로 줄었기 때문으로 전체 함재기에 대한 전투기의 비율로 따지면 60%가 넘었다.
1945년이 되면 에섹스 급 정규항공모함이 보유한 전투기의 정수는 보통 72대(전부 다 헬캣이거나 또는 헬켓과 콜세어가 각 36대씩)로서 전체 함재기 정수인  102대의 70%가 넘게 된다.

미국의 항공모함들이 전투기 비율을 70%까지 높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투기의 출력이 늘어나면서 헬캣은 급강하폭격기인 돈틀레스와 같은 450kg, 콜세어는 그 2배인 900kg이나 되는 폭장량을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HVAR (High-Velocity Aircraft Rocket = Holy Moses) 이라고 부르는 항공기 발사 로켓탄의 실용화가 큰 영향을 끼쳤다.
HVAR의 모태가 된 것은 1942년 말에 영국해군이 개발한 3.5인치 로켓탄이었다.
당시 북대서양 항로에서 독일의 유보트와 사생결단을 벌이고 있던 영국해군은 부상한 상태의 유보트를 발견한 항공기가 유보트가 잠항하기 전에 원거리에서 효율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 로켓탄을 개발했는데 탄두는 9kg 짜리 쇳덩어리였다.
어차피 유보트가 고속으로 돌진하는 9kg 짜리 쇳덩어리에 맞으면 함체에 구멍이 뚫리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그러면 잠수함으로서의 생명은 사실상 끝장이니 탄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것을 보고 구미가 동한 미해군은 즉시 이 로켓탄을 가져다가 3.5인치 FFAR(Forward Firing Aircraft Rocket) 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실전에 배치했다.
그런데 영국과 달리 일본잠수함에 의한 위협을 별로 느끼지 않던 미해군은 전투기에서 구축함 급 이하의 소형 전투함을 공격하기 위한 목적으로 곧 3.5인치 로켓 엔진에 5인치 대공포탄을 개량한 탄두를 붙인 로켓탄을 1943년 6월에 개발하여 이걸 5인치 FFAR 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걸 만들어 놓고 보니 로켓 엔진의 추력이 부족하여 속력도 시속 790km 밖에 안 나오고 사정거리도 부족하고 또한 직진성이 떨어져서 정확도도 저하되자 미해군은 곧 5인치 로켓엔진의 개발에 들어가서 1943년 12월에 시제품을 만들고, 실험 결과 만족할만한 성능이 나오자 곧 대량생산에 들어가서 1944년 7월에 HVAR 이란 이름으로 실전에 배치했다.

흔히 Holy Moses 라고도 불린 HVAR 은 음속보다 빠른 시속 1530km 를 낼 수 있었고, 또한 직진성이 우수해서 당시의 기준으로는 상당한 수준의 정확도를 보여주었다.
탄두는 일반고폭탄과 반철갑탄두의 2가지였는데 5인치 포탄을 기초로 개발된 만큼 25kg짜리 탄두는 거의 5인치 포와 비슷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HVAR은 헬캣에 6발, 콜세어에 8발을 장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구축함급 이하의 소형 전투함들은 전투기 4대로 이루어진 1개 편대만 있으면 간단히 격침시킬 수 있었다.
또한 이 HVAR 은 지상방어기지, 특히 토치카를 파괴하는 데에도 굉장히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이미 돈틀레스와 동급 이상의 폭장량을 가진 항공모함의 전투기들은 HVAR 이 실용화되자 대형수상함을 타격할 일이 없어진 레이테 해전 이후에는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실시하는 거의 모든 형태의 작전에 적응할 수 있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아벤저와 헬다이버의 입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레이테 해전 이후에는 항공모함의 공습시 공격력의 주축은 전부 전투기들이고 헬다이버나 아벤저는 어뢰나 폭탄 대신 구명용 고무보트를 싣고 전투기 뒤를 따라가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가 되었다.

 

 

(F4U 커세어 전투기의 날개에 장착 중인 HVAR. 1945년 6월에 오키나와에서 찍은 사진이다.)

엔터프라이즈는 레이테 해전이 끝난 이후에 계속 필리핀 근해에 머물면서 동료 항공모함들과 함께 일본군 비행장과 함정들을 공격하면서 지상군을 지원하다가 12월 6일에 진주만에 입항했다.
1944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시 해상에 나온 엔터프라이즈는 사상 최초의 야간항공모함인 CV(N)-6 가 되었다.
엔터프라이즈의 항공단도 제20항공단에서 제90야간항공단으로 바뀌었다.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 모두가 새해에는 일본을 때려눕혀 전쟁을 끝내고 다음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맞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반만 옳았다.
그들은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으나 엔터프라이즈는 일본을 때려눕히기 직전에 가미까제 공격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전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엔터프라이즈는 1944년 한해동안 함정 승무원 8명과 항공기 승무원 67명 등 총 75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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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기동부대의 공습을 견디다 못하여 24일 오후 3시 30분에 일시 서쪽으로 반전했던 제1유격부대는 오후 5시 15분에 재차 반전하여 샌배너디노 해협을 향했다.
미군의 정찰기가 이것을 보고 제38기동부대에 보고했으나 핼시 제독은 무시하고 오자와 함대를 쫓아서 북쪽으로 가버렸다.
따라서 제1유격부대는 25일 새벽 0시 35분에 샌배너디노 해협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구리따 제독은 샌배너디노 해협에 진입하면서 함대 전멸을 각오했었다고 한다.
만일 스프루언스 제독의 주장대로 제38기동부대가 해협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면 아마 제1유격부대를 전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협 출구는 기분나쁠 정도로 고요했다.
제1유격부대는 사마르 섬의 북쪽을 돌아서 동쪽 연안을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다.

25일 오전 6시 23분, 야마또의 레이더에 미군항공기가 잡혔다.
구리따 제독은 휘하 함대에게 명령을 내려서 진형을 대공윤형진으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오전 6시 30분, 제77.4.2전대(Taffy 2) 소속의 호위항공모함 Kadashan Bay 를 출격하여 대잠경계를 맡고있던 Hans Jensen 소위의 아벤저가 레이더로 북쪽에서 고속으로 남하하는 여러 척의 함선을 발견하고 77.4.3전대(태피3)에 보고한 다음 조사해보기 위하여 접근했다.
태피3은 레이테 만의 가장 북쪽에 있었고, 태피2는 100km 남동쪽에, 태피1은 태피2로부터 다시 100km 남동쪽에 있었다.

태피3은 6척의 호위항공모함(Fanshaw Bay, St. Lo, White Plains, Kalinin Bay, Kitkun Bay, Gambier Bay), 3척의 구축함(Hoel, Heermann, Johnston), 4척의 호위구축함(Dennis, John C. Butler, Raymond, Samuel B. Roberts) 등 총 13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함재기는 와일드캣 95대와 아벤저 72대였다.
호위항공모함은 모두 Casablanca 급이었으며, 구축함들은 모두 Fletcher 급으로서 한척당 5문의 5인치(127mm) 포와 10발의 어뢰를 보유하고 있었다.
호위구축함은 모두 John C. Butler 급으로서 한 척당 5인치 포 2문과 3발의 어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구리따 제독이 지휘하는 제1유격부대는 전함 4척(야마또, 나가또, 공고, 하루나), 중순양함 6척(구마노, 스즈야, 치꾸마, 하구로, 죠까이, 도네), 경순양함 2척(노시로, 야하기), 구축함 11척으로 이루어져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순양함들은 모두 35노트 가까운 고속을 낼 수 있어서, 태피3의 호위항공모함들보다 2배 가까이 빠른 속력을 지니고 있었다.

6시 43분, 젠센 소위는 제1유격부대에 접근하여 일본함정들의 파고다형 마스트와 함종을 확인하여 태피2에 보고했고, 태피3도 그 내용을 동시에 수신했다.
6시 44분, 제1유격부대가 태피3를 육안으로 확인했다.
제1유격부대는 대공윤형진을 형성하려 기동하다가 그 진형 그대로 태피3을 향하여 돌격하기 시작했다.
6시 45분, 태피3의 기함 팬쇼베이와 갬비어베이의 레이더가 북서쪽으로 40km 떨어진 지점에서 일본함대를 접촉했다.
6시 48분, 팬쇼베이 함상에서도 일본함정 특유의 파고다형 마스트를 확인했다.
6시 50분, 태피3의 사령관 스프라그 소장은 즉시 모든 함정에게 연막을 치면서 바람이 불어오는 동쪽을 향하여 전속으로 항진하도록 명령했다.
6시 58분, 야마또를 비롯한 제1유격부대의 함정들이 32,000m 거리에서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본함정들은 어느 함이 쏜 일제사격인지 구별하기 위하여 포탄에 함정마다 서로 다른 색깔의 염료를 넣어서 다른 함정의 탄착군과 구별했다.
이때 야마또의 색깔은 분홍색이었고, 공고는 노란색이었다.

7시 1분, 스프라그 제독은 태피1과 태피2에 구조요청을 했는데, 어찌나 급했던지 암호문으로 고치지도 않고 평이한 영어로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7시4분, 태피3의 가장 후미에 있던 구축함 존스턴의 함장 Ernest Evans 중령은 스프라그 제독의 명령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판단으로 함의 침로를 되돌려 구리따 함대의 선두였던 제7순양전단(중순양함 구마노,스즈야,도네,치꾸마)를 향하여 전속력으로 돌진해 갔다.
7시 6분, 태피3은 스콜 속에 진입했다.

 

7시 8분부터 태피 3에 실려있던 함재기들이 이륙하기 시작했다.
이때 태피3에서는 총 65대의 와일드캣과 44대의 아벤저가 출격했다.
당시 태피3의 함재기들은 상륙군에 대한 근접항공지원과 대잠경계를 주로 맡고 있었기 때문에 무장이 주로 45kg 짜리와 225kg 짜리 일반폭탄 및 450kg짜리 폭뢰였으며 어뢰의 재고량은 상당히 적었다.
함재기들은 항공모함에 실려있던 상태 그대로 이륙했기 때문에 무장이나 연료상태도 가지각색이었다.
어뢰를 장비한 아벤저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대부분이 일반폭탄과 폭뢰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일부 와일드캣은 45kg짜리 일반폭탄을 달고 출격했다.
어떤 함재기는 아무런 무장도 없이 이함했고, 일부 함재기는 연료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이함한 경우도 있었다.
태피3의 조종사들 중 함정공격훈련을 받은 조종사는 거의 없었으나 그들은 정말 용감하게 싸웠다.
폭탄이 없는 전투기는 일본함정의 대공포좌에 기총소사를 가하여 대공포의 조준을 방해하거나 함교에 기총소사를 가하여 조함과 전투지휘를 방해했고, 기관총탄마저도 떨어지면 마치 폭격을 가하는 것처럼 일본함정의 상공에 접근하여 회피운동을 강요함으로써 일본함정들이 주목표인 태피3의 호위항모들을 효과적으로 추격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7시 10분, 구축함 존스턴이 구리따 함대의 가장 선두에서 추격해오던 중순양함 구마노의 전방 16,000 m 지점에서 5인치 포로 200발 이상 사격을 가하여 몇 발을 명중시켰다.
일본의 중순양함들은 8인치 포로 존스턴에게 반격을 가했으나 1발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같은 시각, 호위항공모함 화이트플레인즈에 일본전함의 철갑탄 1발이 명중했으나 함체를 그대로 관통하는 바람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7시 16분, 스프라그 제독은 3척의 구축함들에게 일본함대에 반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7시 20분, 구마노 전방 9,000m 지점까지 접근한 존스턴은 구마노에게 10발의 어뢰 전부를 발사하고 반전하여 연막을 뿌리면서 전속력으로 후퇴했다.
이 어뢰 중 1발이 구마노에게 명중하여 속력이 16노트로 줄었고, 바로 뒤를 따라오던 스즈야는 구마노와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전속후진하면서 방향을 틀었다.
이때 속력이 떨어진 스즈야를 노리고 태피3의 함재기들이 달려들어 폭탄 2발을 명중시킴으로써 스즈야는 우측으로 기울어지고 속력이 23노트로 떨어지면서 구마노와 함께 전열에서 탈락했다.
또한 이들을 바짝 뒤따르던 중순양함 도네와 치꾸마는 존스턴이 발사한 어뢰를 피하고 선두의 양 함과의 충돌을 피하려고 속력을 늦추면서 일시 추격을 중단해야 했다.
도네와 치꾸마는 자신들의 뒤를 이어서 추격해오던 제5순양전단(죠까이, 하구로)와 합세하여 다시 추격을 시작했다.
존스턴은 과감한 기동과 공격으로 35노트의 고속을 낼 수 있어서 사실상 태피3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구리따 함대의 중순양함 중 가장 선두에 섰던 구마노와 스즈야를 전투 초반에 전열에서 탈락시키고 제7순양전단의 전열을 흩어버려서 추격속도를 늦춤으로서 태피3가 살아남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일본군 중순양함 구마노.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6078889 )

 

7시 23분, 스콜 속에서 스프라그 제독은 휘하함대에게 남쪽으로 변침하도록 명령했다.
7시 25분, 전함 중의 선두인 공고 전방 8,000 m 지점까지 육박한 구축함 호엘은 5인치 포를 사격하면서 5발의 어뢰를 발사한 직후, 공고의 반격을 받아 14인치 철갑탄 3발을 맞고 대파되었다.
호엘이 발사한 어뢰는 모두 빗나갔다.
7시 30분, 전속력으로 후퇴하던 존스턴이 공고가 발사한 14인치 철갑탄 3발과 경순양함에서 발사한 6인치 포탄 3발에 맞아 속력이 17노트로 줄었다.
이후 추격 중인 일본함대의 중간에 끼이게 된 존스턴은 전투의 최종단계에서 일본구축함들의 집중포격을 맞아 격침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5인치 포를 발사하면서 전투를 계속했다.
연막과 스콜이 난무하고 해상에서는 어뢰가 돌아다니며 공중에서는 포탄과 미해군의 함재기들이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혼란한 전투현장에서 일본함대의 중간에서 시도때도 없이 5인치 포로 자신들을 공격하는 존스턴 때문에 일본함대는 전투 내내 상당한 혼란을 겪었고 존스턴을 상대하느라 호위항공모함군에 공격력을 집중하는데 꽤나 방해를 받았다.

이때 스프라그 제독은 킨케이드 제독에게 무전을 보내어 레이테 만으로 후퇴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으나 킨케이드 제독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시 구리따 함대가 레이테 만의 교두보에 들이닥칠 경우 이들과 대적할만한 세력은 올덴도프 제독의 포격지원함대 뿐이었는데 밤새 제1유격부대 지대를 격멸하느라 치열한 전투를 치른 이 함대의 전함들이 보유한 철갑탄의 수효는 1,348 발로서 강력한 세력을 가진 구리따 함대를 상대로 싸우기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고, 순양함들의 철갑탄도 한 척당 평균 50 – 70 발 정도로서 전투를 치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구축함들 또한 간밤의 전투에서 어뢰를 거의 소모해 버린 상황이었다.
킨케이드 제독이 레이테 만으로의 후퇴를 불허하자 태피3은 가까이 있던 태피2를 향하여 도망갈 수 밖에 없었다.

7시 37분, 구리따 함대의 선두 그룹을 형성한 제5순양전단이 12,000 m 거리까지 접근하자 호위항공모함 세인트로가 선두의 순양함을 향하여 딱 1문 있는 5인치 단장포를 사격하기 시작했다.
태피3의 호위구축함들은 북쪽에서 접근하는 구리따 함대에 어뢰공격을 가하기 위하여 북쪽으로 변침했다.
7시 50분, 호위항공모함 칼리닌베이가 몇 발의 8인치 포를 얻어맞았다.
당시 구리따 함대가 태피3을 핼시 제독 휘하의 고속항공모함 전투단으로 착각하여 지연신관을 장착한 철갑탄을 사용한 것이 태피3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구리따 함대가 발사한 대구경 철갑탄은 장갑이라고는 사실상 없는 호위항공모함들에 맞고는 그대로 함체를 관통해버리기 일쑤였다.
만일 구리따 함대가 철갑탄 대신 순발신관을 장착한 고폭탄을 사용했다면 태피3의 피해는 훨씬 더 컸을 것이다.

이때쯤 태피2에서 날아온 함재기들이 태피3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남쪽으로 기동하고 있던 경순양함 노시로와 구축함 7척으로 이루어진 제2구축전대를 공격하여 그 진로를 방해했다.
태피2의 함재기들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마르 해전 당시 태피2의 사령관 F.B.Stump 소장은 태피3가 자신들에게 다가오면서 구리따 함대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구리따 함대가 쫓아오는 반대방향인 남동쪽으로 도망가는 대신 바람이 불어오는 북동쪽으로 항진하면서 함재기를 이함시키기로 결심했다.
덕분에 태피2는 해전의 막바지에는 일본전함 하루나에게 포격을 받을 정도로 전투현장에 접근하게 되었으나 대신 제대로 무장을 갖춘 함재기들을 이함시켜 구리따 함대를 타격하고 태피3를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7시51분, 구축함 호엘이 구리따 함대의 선두에 있던 중순양함 하구로에 6,000 m 까지 접근하여 5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1발을 명중시켰다.
호엘은 그 직후 40여발의 명중탄을 얻어맞아 기관실이 침수되고 함체는 좌현으로 20도나 기울어졌다.
호엘은 결국 8시 55분에 좌현으로 넘어져 고물부터 침몰했다.
253명의 전사자와 함께 침몰한 호엘은 태피3에서 처음으로 침몰한 함정이었다.
그러나 호엘은 구마노 대신 선두에 섰던 중순양함 하구로에게 어뢰를 명중시켜 속력을 떨어뜨림으로서 존스턴에 이어 또다시 태피3에게 도망갈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어 주었다.

7시52분, 호위구축함 로버츠가 하구로, 도네, 치꾸마와 함께 구리따 함대의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있던 중순양함 죠까이에게 3,000 m 거리까지 바짝 다가가서 3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그 중 1발을 명중시켰다.

8시에 구축함 히어맨이 사마르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과를 올렸다.
앞서 7시 42분에 중순양함 하구로에 7발의 어뢰를 발사했지만 1발도 명중시키지 못했던 히어맨은 중순양함들을 지나쳐 그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전함들에게 육박했다.
그리하여 8시에 전함 하루나의 4,000 m 전방까지 접근한 히어맨은 남은 3발의 어뢰를 모두 하루나에게 발사했다.
이 어뢰들은 하루나를 빗나가서 하루나의 뒤를 따라오던 구리따 제독의 기함인 대형전함 야마또 쪽으로 돌진했다.야마또는 급히 회피운동에 들어갔는데 어뢰가 달려오는 방향이 아닌 반대쪽으로 회전하는 바람에 양옆과 뒤쪽에서 3발의 어뢰에 쫓겨서 속력을 줄이지도 못하고 좌우로 회전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어뢰의 연료가 소진될 때까지 마치 트랙을 달리는 단거리 선수처럼 태피3이 도망가는 반대방향인 북쪽을 향하여 직선코스를 전속력으로 16km나 달려야 했다.
따라서 18.1인치 포를 9문이나 장착하여 구리따 함대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함정인 야마또는 전장에서 이탈해버렸고, 더 중요한 사실은 안그래도 태피3가 피워올린 자욱한 연막과 스콜, 거기에다가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태피3와 무질서하게 쫓아가는 구리따 함대의 어지러운 기동 때문에 상황파악이 어려운 상황에서 기함인 야마또가 이렇게 후방으로 처져버리니 구리따 제독으로서는 현장의 상황을 도저히 알 길이 없어져 버렸다.
전장에서 멀어져버린 야마또는 8시 20분에 레이더 조준으로 갬비어베이를 향하여 일제사격을 실시했으나 이 일제사격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탄착 장면을 본 함정이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빗나가 버렸다.
미국보다 최소한 2년이상 떨어지는 기술로 만든 일본군의 조잡한 레이더로 레이더 조준사격을 실시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이렇게 전투현장에서 격리되어 버린 구리따 제독은 결국 1시간 후에 진형을 정비하기 위하여 휘하 함대를 야마또 주변으로 불러들임으로써 태피3가 전멸의 위기를 넘기게 된다.
사실 구리따 제독의 집결명령이 내렸을 때 일본함정의 일부는 결정적인 공격위치까지 도달해 있었다.

 

(일본해군의 대형전함 야마토.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5541824 )

이제 구리따 함대 중 가장 선두에 나선 중순양함 치꾸마는 8시 10분에는 도망가던 태피3의 호위항공모함군의 좌현 8,000 m 이내까지 접근하여 평균 2분에 한발꼴로 호위항공모함 갬비어베이에게 명중탄을 날려댔다.
하지만 지연신관을 장착한 8인치 철갑탄은 갬비어베이의 함체를 계속 관통해버려서 갬비어베이의 함체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포탄구멍이 뚫렸으나 치명적인 피해는 입지 않고 있었다.
8시 20분, 치꾸마가 발사한 8인치 철갑탄 1발이 갬비어베이의 좌현 물 속에서 폭발하여 그 압력으로 좌현의 기관실 부근인 수중 3.6m 깊이의 함체가 1.2m 가량 찢어졌다.
곧이어 그곳으로 엄청난 양의 해수가 쏟아져 들어왔고 급히 배수펌프가 작동했으나 역부족으로 8시 25분까지에는 1번 보일러가 물에 잠겼고 갬비어베이는 왼쪽으로 기울어진 채 속력이 11노트로 떨어지면서 호위항공모함의 대형에서 낙오하고 말았다.
치꾸마는 8시30분이 되자 5,000 m 거리까지 접근하여 갬비어베이에 포탄을 쏟아부었다.
8시 40분이 되자 중순양함 하구로와 죠까이, 경순양함 노시로와 구축함 1척이 치꾸마에 가세하여 갬비어베이에게 포탄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갬비어베이는 불타오르면서 좌현으로 20도나 기울었다.
갬비어베이는 결국 9시7분에 좌현으로 전복되어 9시 10분에 침몰했다.

 

8시45분, 구축함 히어맨은 몇 발의 8인치 포에 명중되어 대파되었다.
8시 46분, 태피2에서 날아온 함재기들이 일본함정들을 공격하여 이미 폭탄 2발을 맞았던 중순양함 스즈야에게 몇발의 폭탄을 추가로 명중시켜서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으며 구축함 2척에게도 피해를 입혔다.
중순양함 치꾸마는 갬비어베이의 함재기에 의하여 피해를 입었다.
이 시점부터 태피2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의 공격이 집중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태피1에서 발진한 함재기들도 현장에 도착하여 일본함정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8시 51분, 구리따 제독은 전장의 상황을 알기 위하여 기함 야마또에서 1대의 정찰기를 발진시켰다.

9시에 호위구축함 데니스는 중순양함 도네에게 3발의 8인치 포탄을 얻어맞아 대파되었고, 호위구축함 로버츠는 전함 공고에게서 14인치 철갑탄3발을 얻어맞아 함체에 12 m 나 되는 구멍이 뚫리고 기관실이 침수되어 동력을 상실했다.
9시1분, 호위항모 키트쿤베이의 바로 20 m 후방에 중순양함 죠까이가 발사한 8인치 철갑탄의 일제사격이 떨어졌다.
다음 일제사격은 명중할 것이 확실시되자 키트쿤베이는 필사적으로 오른쪽으로 급회전했다.
하지만 죠까이는 다음 일제사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키트쿤베이의 함재기들이 모함을 위협하는 죠까이에게 벌떼같이 달려들어 불과 4분만에 무려 9발의 폭탄을 명중시켰다.
이미 로버츠에게 어뢰 1발을 얻어맞고도 키트쿤베이를 향하여 정확한 일제사격을 날려대던 죠까이는 이 불의의 일격을 당하여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면서 모든 기능을 상실했다.
키트쿤베이는 간발의 차이로 갬비어베이와 같은 운명을 면했다.

 

(일본해군의 중순양함 죠카이.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6049962 )

전장은 어느덧 태피2에게도 바짝 접근하여 9시2분부터 7분까지 전함 하루나가 수평선 상에 보이는 태피2를 향하여 포격을 가했으나 명중탄을 내는데에는 실패했다.
9시 3분, 중순양함 치꾸마가 태피2의 함재기들이 발사한 항공어뢰 2발에 명중되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9시4분, 야마또에서 이함하여 전장의 상황을 무전으로 구리따 제독에게 보고하던 정찰기가 태피2의 와일드캣에 의하여 격추되었다.
그리하여 구리따 제독은 또다시 전장의 상황을 알 길이 없게 되었다.

이제 일본함대의 선두에 선 함정은 중순양함 도네와 하구로였으며 이들은 호위항모군에 9,000 m 이내로 바짝 접근하여 키트쿤베이, 팬쇼베이, 칼리닌베이에 계속하여 8인치 주포의 명중탄을 내고 있었다.
도네와 하구로의 남서쪽에서 호위항공모함군에게 접근하고 있던 경순양함 노시로는 호위항공모함 화이트플레인즈에게 계속 6인치포의 명중탄을 기록하고 있었다.

 

9시 6분, 태피2의 아벤저들이 전함 야마또와 나가또, 그리고 공고를 향하여 어뢰를 발사했다.
이 어뢰들은 1발도 명중하지 않았지만 3척의 전함들은 15분 동안 이 어뢰들을 피하여 이리저리 도망다녀야만 했다.
9시 11분, 아직도 항공어뢰를 피하여 도망다니고 있던 야마또 함상에서 구리따 제독이 결정적인 명령을 내렸다.

“행동 중지, 북상하여 기함 주변에 집결할 것, 20노트”

일본함정들은 추격을 멈추고 호위항공모함들을 향하여 일제히 어뢰를 발사한 뒤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 어뢰들은 1발도 명중하지 않았다.
구리따 제독의 이 명령 덕분에 태피3은 전멸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일본함대는 호위항공모함에 대한 추격을 포기하고 북상하면서 피해를 입고 북쪽에 남겨진 구축함 존스턴과 호위구축함 로버츠에게 집중포격을 가했다.
이미 빈사상태에서 신음하고 있던 양함은 이 포격이 결정타가 되어 로버츠는 10시 7분에, 존스턴은 10시10분에 각각 침몰했다.

한편 전투에서 피해를 입었던 일본함대의 중순양함들도 침몰하기 시작했다.
10시17분, 어뢰1발과 폭탄 9발을 맞은 죠까이와 항공어뢰2발에 맞은 치꾸마가 나란히 동료구축함의 어뢰를 얻어맞고 침몰했다.
전투 초반에 폭탄 2발을 얻어맞은 후 추가로 폭탄 몇 발을 더 얻어맞은 스즈야는 10시 14분에 포기명령이 내려졌고, 오후 1시 22분에 침몰했다.
어뢰 1발씩을 맞은 구마노와 하구로는 살아 돌아갔다.

일단 북쪽으로 물러나서 진형을 가다듬은 구리따 함대는 오전 11시에 다시 레이테 만을 향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12시 30분, 태피2의 함재기들이 다시 구리따 함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2시36분, 구리따 함대는 레이테 만을 불과 40km 앞둔 지점에서 돌연히 반전, 북상하여 샌배너디노 해협을 향했다.  
당시 구리따 제독이 레이테 만을 바로 눈 앞에 두고 반전한 이유는 아직까지도 완전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구리따 제독 자신의 술회에 의하면 태피3을 고속항모기동부대의 1개 전단으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 다른 전단이 들이닥칠 것이고, 레이테 상륙작전이 시작된 지 이미 5일이 지났으므로 만 안에는 빈 수송선만 있을 것이므로 빈 수송선을 부수고 전멸하느니 후일을 기약하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로써 사마르 해전이 끝났다.

 

 

(구리타 다케오 중장.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5540127 )

사마르 해전에서 태피3은 호위항공모함 1척, 구축함 2척, 호위구축함 1척을 잃었고, 구리따 함대는 중순양함 3척을 잃었다.
양함대의 세력과 특히 구리따 함대가 포격이 가능한 거리까지 접근하여 선제공격을 가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이런 전과는 태피3가 대단히 선전한 결과로서 사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전투개시 30분 만에 태피3가 사실상 전멸해 버렸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태피3가 이렇듯 선전할 수 있었던 원인은 여러가지로서 한마디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구리따 함대를 저지하여 태피3을 전멸의 위기에서 구해낸 세력 중 가장 중요한 세력이라면 태피2의 함재기 세력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태피3가 전멸을 면한 요인은 그 이외에도 많이 있었으며 또한 행운이라는 요소도 결코 무시못할 요인이다.
따라서 태피3의 지휘관이었던 스프라그 제독은 나중에 사마르 해전에서 자신의 함대가 전멸을 면한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공적인 연막, 어뢰를 이용한 반격, 적에 대한 함재기의 끊임없는 괴롭힘(폭격, 뇌격, 기총소사 등), 시의적절한 조함,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명백한 편애..”
(“successful smoke screen, our torpedo counter-attack, continuous harassment of the enemy by bomb, torpedo, and strafing air attacks, timely maneuver, and the definite partiality of Almighty God..”)

사마르 앞바다를 떠나 북상한 구리따 함대는 25일 오후 9시 30분에 샌배너디노 해협을 빠져나갔다.
킨케이드 제독의 구원요청을 받고 남하한 제34기동부대는 자정 경에 샌배너디노 해협에 도착하여 중순양함 치꾸마의 생존자를 구하느라 뒤에 처졌던 구축함 노와끼를 발견하고 경순양함 3척(빌록시, 마이애미, 빈센스)과 구축함 5척을 내보내어 26일 새벽 1시 3분에 격침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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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이 지휘하는 본대가 구레 군항을 출항한 것은 10월 20일이었다.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5537439 )


정규항공모함 1척(즈이가꾸), 경항공모함 3척(즈이호, 지또세, 지요다), 항공전함 2척(이세, 히우가), 경순양함 3척(오요도, 다마, 이스즈), 구축함 7척으로 이루어진 본대의 역할은 그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제1유격부대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제38기동부대를 북쪽으로 유인하여 제1유격부대가 레이테 만에 돌입할 수 있도록 미끼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보유한 함재기도 제로기 80대, 케이트 뇌격기 4대, 질 뇌격기 25대, 주디 급강하폭격기 7대 등 총 116 대에 지나지 않았다.
24일 아침에 루손 섬 북부해상에 도달한 오자와 함대는 10 대의 정찰기를 내보내어 제38.3전단을 발견했고, 11시 45분에 대규모의 공격대를 출격시켰으나 항공기의 정비 상황이 불량하여 예정된 76대 중 57 대만이 출격에 성공했다.
이들은 제38.3전단의 반격에 직면하여 40여대가 격추되고 10여대는 필리핀의 기지로 도망갔으며 목표를 찾지 못한 3대는 항모로 돌아왔다.
이들이 기록한 전과는 지근탄 1발에 불과했다.
이 공격의 목적은 제38기동부대의 주의를 끌기 위한 것이었으나 정작 공격을 당한 제38.3전단은 이 함재기들이 필리핀의 지상기지에서 날아온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제38기동부대는 일본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출현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찰기를 내보내어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24일 오후 4시 40분에 오자와 함대를 발견했다.
핼시 제독은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발견되자 즉시 제38기동부대의 3개 전단을 이끌고 북상했다.

 

 

(윌리엄 헐지 제독.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51213763 )


핼시 제독은 이때 샌배너디노 해협을 감시하기 위하여 구축함 한 척도 남겨놓지 않았다.
오후 8시에 서쪽으로 후퇴하던 제1유격부대가 다시 반전했으며 자정쯤에는 샌배너디노 해협을 통과할 것이라는 정찰기의 보고가 들어왔으나 핼시 제독은 무시했다.
사실 핼시 제독은 24일 오후 4시에 6척의 고속전함 전부와 중순양함 2척(위치타, 뉴올리언스), 경순양함 3척(빌록시, 빈센스, 마이애미), 구축함 12척으로 제34기동부대를 편성했다.
핼시 제독은 이 내용을 니미츠 제독에게 보고했는데 당시 핼시 제독은 제7함대 사령관인 킨케이드 제독에게는 이런 내용을 알리지 않았으나 킨케이드 제독은 무전감청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핼시 제독이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오자와 함대를 공격하러 3개 전단을 이끌고 북상한다는 무전을 보냈을 때 진주만의 태평양함대 사령부와 제7함대의 킨케이드 제독은 북상하는 것은 항공모함 전단들이고 새로 편성된 고속전함 중심의 제34기동부대는 당연히 샌배너디노 해협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핼시 제독은 제34기동부대를 항공모함 전단들의 앞쪽에 배치하여 공습으로 약화시킨 오자와 함대를 추격하여 전멸시키는데 사용할 생각이었다.

대신 핼시 제독은 오후 8시 24분에 킨케이드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제1유격부대의 상황과 침로, 속력 등을 알려 주었다.
핼시 제독은 킨케이드 제독이 제34기동부대에 대하여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이 전문을 받으면 당연히 제1유격부대의 처리는 제7함대에게 맡긴

 

다는 자신의 의중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34기동부대 사령관이 된 리 제독은 제1유격부대를 남겨둔 채 샌배너디노 해협을 비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2번씩이나 핼시 제독에게 제34기동부대에 공중엄호를 담당할 2척의 경항공모함을 붙여서 샌배너디노 해협에 잔류시킬 것을 건의했으나 묵살당했다.

진주만의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는 니미츠 제독 이하 대부분의 참모들이 핼시의 북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나 스프루언스 제독만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핼시 제독이 오자와 함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자 집게손가락으로 샌배너디노 해협의 출구를 가리키며 

 

“내가 저기에 있다면 나는 함대를 이곳에다 둘 거야.”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태평양함대의 대다수의 참모들, 특히 항공관계자들은 그때까지도 스프루언스 제독이 필리핀 해전에서 일본함대를 격멸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미처 제독도 필리핀 해전에 대한 전투보고서에서 요격에만 전념했던 6월 19일의 전투에 대하여 스프루언스 제독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일본 측의 기록을 들여다 본 결과는 필리핀 해전 당시 스프루언스 제독의 선택이 최선이었으며 미처 제독은 비록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사령관으로서는 흠잡을 데 없는 인물이긴 하나 전투의 전체적인 국면을 파악하는 안목과 판단력에서는 자신의 직속상관인 스프루언스 제독이나 일본 측의 맞수인 오자와 제독에 비하여 한 수 아래라는 사실을 증명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번의 레이테 해전에서도 마찬가지로 미처 제독은 직속상관인 핼시 제독이 오자와 제독의 꾐에 빠져 그만 제1유격부대에게 레이테 만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동안 샌배너디노 해협을 지켜야한다는 조언을 하지 못했다.
스프루언스 제독이었다면 그 자신의 말대로 오자와 함대는 무시하고 샌배너디노 해협을 지켰을 것이고 그랬다면 리 제독은 24일 자정쯤에 6척의 고속전함 전부를 포함하여 제38기동부대 호위함 세력의 상당부분을 포함하는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샌배너디노 해협을 빠져나오는 제1유격부대를 공격하여 아마도 거의 전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었다.
레이테 해전에서 오자와 함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제1유격부대에게 샌배너디노 해협을 비워준 일은 핼시 제독에게 있어서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로서 이로 인하여 하마터면 미군의 레이테 상륙작전 전체가 위험에 빠질 뻔 했다.

사실 핼시 제독의 경력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절은 역시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시절로서 핼시 제독에 대한 유명한 일화들은 대부분 이때의 이야기들이다.
제3함대 사령관으로서의 핼시 제독은 전투현장에서 몇 번이나 컴퓨터같이 정확한 판단력을 보여준 스프루언스 제독과 비교하여 확실히 기량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전쟁 전체의 흐름을 보는 전략적 안목이 뛰어나고 유능한 부하에게 과감하게 권한을 위임한 후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부하들의 능력과 충성심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핼시 제독의 스타일은 당시의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전투현장에서의 재빠르고 정확한 판단력이 요구되는 전투함대의 사령관보다는 오히려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처럼 넓은 지역을 관할하면서 비교적 장기적인 안목으로 전략을 수립하고 실시해야하는 지역 사령관 임무에 적합했다.
사견이지만 만일 핼시 제독이 태평양함대 사령관직을 맡았다면 니미츠 제독 못지않은 훌륭한 사령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4일 오후 4시경 구리따 제독으로부터 제1유격부대가 반전했다는 전문을 받은 오자와 제독은 즉시 반전하여 북상했으나 저녁 8시에 연합함대 사령관 도요다 제독으로부터

“쇼호 작전에 참가한 전 부대는 공격을 지속하라.”

는 명령을 받고 다시 반전하여 남하했다.
25일 새벽에 엔가노 곶 부근에 도달한 오자와 함대는 쓸데없는 희생을 피하기 위하여 호위를 위한 제로기 19대를 제외한 잔여 함재기 전부를 필리핀의 일본군 항공기지로 보냈다.

오자와 함대를 공격권 내에 포착하기 위하여 밤새도록 북상해 온 제38기동부대는 새벽부터 정찰기를 내보내어 25일 오전 7시 30분에 180km 거리에서 오자와 부대를 발견했다.
핼시 제독은 즉시 헬캣 60대, 헬다이버 65대, 아벤저 55대로 구성된 제1차 공격대를 출격시켰다.

 

(F6F 헬캣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69351104 )


그와 동시에 핼시 제독은 자신의 기함인 고속전함 뉴저지에 승좌하여 제34기동부대를 이끌고 일본함대를 타격하기 위하여 항공모함 전단의 앞쪽으로 나섰다.

8시 15분에 오자와 함대의 상공에 도달한 제1차 공격대는 19대의 제로기로 이루어진 허술한 방어막을 가볍게 일축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곧 일본함정들에 폭탄과 어뢰가 명중하기 시작했다.
우선 경항공모함 지또세가 7발의 폭탄을 맞고 격침되었으며 구축함 아키쓰키도 폭탄에 명중당해 폭발을 일으키면서 함체가 반으로 꺾여 침몰했다.
정규항공모함 즈이가꾸는 어뢰1발과 폭탄 5발을 맞고 속력이 23노트로 떨어지면서 통신장치가 파괴되어 오자와 제독은 사령기를 경순양함 오요도로 옮겨 달았다.
경항공모함 즈이호도 폭탄 1발을 맞았다.

오전 10시에는 헬캣 14대, 헬다이버 6대, 아벤저 16대로 이루어진 제2차 공격대가 도착했다.
이번 공격에서는 경항공함 지요다가 4발의 폭탄을 얻어맞았고, 경순양함 다마도 1발의 폭탄을 얻어맞고 대파되었다.
그때 남쪽의 킨케이드 제독으로부터 긴급한 구원요청이 핼시 제독에게 도달했다.
밤새 샌배너디노 해협을 돌파한 제1유격부대가 제7함대가 보유한 호위항공모함 전단 중의 하나인 태피3을 공격한 것이었다.
핼시 제독은 급유를 마치고 급히 돌아오고 있던 맥케인 제독의 제38.1전단에게 즉시 레이테로 달려가서 태피3을 도우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계속 오자와 함대에게 접근해 갔다.
하지만 킨케이드 제독의 구조요청이 거듭되고 마침내 진주만의 니미츠 제독까지 개입하게 되자 오자와 함대의 남쪽 70km 까지 접근했던 핼시 제독은 오전 11시에 할 수 없이 제34기동부대를 이끌고 남하했다.
남하하다가 아직도 북상 중인 항공모함 전단을 만난 핼시 제독은 항공엄호를 위하여 보간 제독의 제38.2전단을 차출한 후 제38.3전단과 제38.4전단은 오자와 함대를 계속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핼시 제독은 제34기동부대 대신 듀보스 소장의 지휘 하에 순양함 4척과 구축함 12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북쪽으로 파견하여 공습으로 피해를 입은 일본함정들을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미처 제독은 정오 직후에 제38.3전단과 제38.4전단에서 160 대로 이루어진 마지막 제3차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오후 1시 5분에 오자와 함대의 상공에 도달한 제3차 공격대는 항공모함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제1차 공습에서 어뢰 1발과 폭탄 5발을 맞았던 즈이가꾸는 이번 공습에서 어뢰 6발, 폭탄 4발을 추가로 얻어맞고, 오후 2시 15분에 격침되었다.
제1차 공습에서 폭탄 1발을 맞았던 경항공모함 즈이호도 어뢰 2발과 폭탄 5발을 추가로 얻어맞고 격침되었다.

 

(일본 항공모함 즈이가쿠.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5170694 )

오후 4시 20분경에 일본함대에 접근한 듀보스 제독의 함대는 제2차 공습에서 폭탄 4발을 맞고 대파되어 우현으로 13도 기울어진 채 해상을 표류하고 있던 경항공모함 지요다를 4시 24분부터 공격하여 30분 만인 4시 55분에 격침했다.
듀보스 제독의 함대는 또한 즈이가꾸와 지요다의 승무원들을 구조하던 경순양함 이스즈와 구축함 와카즈키와 하쓰즈키를 공격하여 그 중 하쓰즈키에게 1발의 어뢰를 명중시키고 집중포격을 가하여 저녁 9시에 격침했다.
한편 미잠수함 SS-368 Jallao 는 제1차 공습에서 폭탄 1발을 맞고 대파되었던 경순양함 다마를 발견하고 접근한 후 7발의 어뢰를 발사, 그 중의 3발을 명중시켜 오후 11시 5분에 격침했다.

항공모함을 모두 잃어버린 오자와 제독이 살아남은 항공전함 이세와 히우가, 경순양함 오요도와 이스즈, 구축함 5척을 이끌고 일본내해로 퇴각함으로써 엔가노 해전이 끝났다.
오자와 제독의 본대는 이 해전에서 정규항공모함 1척, 경항공모함 3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2척을 상실함으로써 참패를 당했으며,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이 엔가노 해전에서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비록 엄청난 댓가를 치렀지만, 어쨌든 오자와 제독은 작전목표였던 제38기동부대의 유인에 성공하여 제1유격부대에게 레이테로의 길을 열어주었다.
사실상 함대를 이끌고 레이테 해전에 참가한 일본 측의 제독 중에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사람은 오자와 제독뿐이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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