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전 9시 30분경에 북쪽으로 멀어져가는 일본중순양함들을 보며 스프라그 제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태피3의 고난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최초의 가미까제 공격대가 태피3을 습격한 것이었다.

10시 51분, 폭탄을 장착한 5대의 제로기가 호위항공모함들의 우현 뒤쪽으로부터 돌입해 왔다.
선두의 1기는 호위항모 키트쿤베이의 함교를 겨냥하여 기총소사를 가하면서 돌입해 왔는데 함교에 충돌하는데 실패하고 좌현 비행갑판의 끝에 추락하여 폭발하면서 화재를 일으켰다.
2대의 가미까제는 태피3의 치열한 대공포화에 걸려서 격추되었다.
남은 2대는 호위항공모함 화이트플레인즈를 노리고 돌입해왔는데 앞장선 1대는 화이트플레인즈의 갑판을 가로지르면서 돌진하다가 집중적인 대공포화에 걸려서 공중에서 폭발, 그 잔해가 비행갑판에 떨어지면서 11명의 수병이 부상당했다.

마지막 1대는 대공포화가 집중된 화이트플레인즈를 피하여 센트 로에 돌진, 후방 비행갑판의 중앙선에서 좌측으로 4.5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충돌했다.
곧이어 격납고 갑판에서 요란한 폭발과 함께 화재가 발생했다.
사실 가미까제가 보유한 폭탄의 폭발 자체는 그리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센트 로의 격납고 갑판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폭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폭탄들이 유폭하기 시작하자 화재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가미까제가 충돌한지 채 10분이 지나지 않은 11시에 센트 로에는 퇴함명령이 내려졌고, 몇 번의 폭발을 거듭하던 센트 로는 11시 25분에 고물부터 침몰하고 말았다.
센트 로가 사경을 헤매고 있던 오전 11시 10분에 또다른 가미까제 4대가 호위항공모함 칼리닌베이를 향하여 달려들었다.
이중 2대는 충돌하기 전에 격추되었으나 나머지 2대 중 1대는 좌현 비행갑판에 또 한 대는 상부구조물에 충돌하여 칼리닌베이는 대파되었다.
다음날인 26일에는 3대의 가미까제가 태피1을 공격하여 호위항공모함 생가몬, 샌티, 스와니에 각각 피해를 입혔다.
이 공격을 마지막으로 사상 최대의 해전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레이테 해전이 끝났다.

이 해전에서 미해군은 경항공모함 1척(프린스턴), 호위항공모함 2척(갬비어베이, 센트 로), 구축함 2척(존스턴, 호엘), 호위구축함 1척(새뮤얼 로버츠) 등 총 6척 37,000 톤의 함정이 침몰했고, 3,000 명 가량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일본해군은 정규항공모함 1척(즈이가꾸), 경항공모함 3척(즈이호, 지요다, 지또세), 전함 3척(무사시, 후소, 야마시로), 중순양함 6척(아타고, 마야, 스즈야, 모가미, 죠까이, 치꾸마), 경순양함 4척(노시로, 아부꾸마, 다마, 기누), 구축함 9척 등 총 26척 306,000 톤의 함정이 침몰했고 10,000 명 가량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엔터프라이즈는 레이테 해전에서 항공기 승무원 20명과 함정 승무원 1명 등 총 21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일본연합함대가 레이테 해전에서 참패한 이유는 역시 압도적인 전력의 열세, 그 중에서도 항공력의 열세였다.
게다가 쇼1호 작전계획 자체에도 문제가 많았다.
가장 중요한 것이 모자라는 항공력마저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시부얀 해에서 제1유격부대 주대가 제38기동부대의 공습으로 계속 타격을 받으면서도 전혀 일본군 항공부대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항공력이 아무리 모자라도 최소한 항공정찰만은 실시해서 그 내용을 구리따 함대에 전달해 주어야 했는데 이마저도 실패함으로써 구리따 함대가 사마르 해전에서 시종 비효율적인 전투를 지속하도록 만드는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해전에 참가한 함대 사이의 연락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충분하여 오자와 제독은 귀중한 항공모함들을 모두 소모하면서 제38기동부대를 북쪽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자와 제독의 무전을 수신하지 못한 구리따 제독은 사마르 해전에서 자신들이 핼시 제독의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상대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결국 레이테 만을 눈앞에 두고 북쪽으로 철수하는 어처구니없는 판단착오를 일으키는 이유가 되었다.
레이테 해전에 참가한 11척의 일본잠수함 또한 오자와 함대가 출동한 이후에야 출발함으로써 전개가 늦어져서 이렇다할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미함대도 레이테 해전에서 제38기동부대가 오자와 제독에게 유인당해 북상하면서 샌배너디노 해협을 비워줌으로써 구리따 함대에게 레이테 만으로의 길을 열어주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는데 그건 일차적으로 핼시 제독의 판단 미스이며 그 바탕에는 니미츠 제독과 맥아더 장군으로 양분된 지휘권의 이원화 문제가 깔려 있다.
이 실수로 말미암아 하마터면 엉성한 일본해군의 계획이 그대로 들어맞을 뻔 했다.  

 

일본연합함대는 레이테 해전 이후로 사실상 함대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이제 미해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일은 가미까제 공격대가 맡게 되었다.

가미까제 공격대가 정식으로 편성된 것은 1944년 10월 20일이었다.
미군이나 일본군이나 공격에 나섰다가 자신의 항공기가 피탄되면 적을 향하여 돌격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게 있었으나 처음부터 자폭을 목적으로 출격하는 가미까제 전법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일본군의 항공모함 함재기 조종사들이었다.
기초비행훈련이 부실한 상태로 고난이도의 항모 이착함 훈련을 하다가 거의 매일같이 항공모함 갑판에 추락하여 사망하는 조종사가 발생하자 함재기 조종사들 중에서는 이런 식으로 아군 항공모함의 갑판에서 동료들에게 피해를 끼치며 개죽음하느니 차라리 폭탄을 껴안고 적 항공모함 갑판에 들이받는 것이 더 남자다운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싹텄고 오래잖아 그들은 상관들에게 그러한 자살전법의 가능성에 대하여 진언하기 시작했다.
일본제독들의 생각에도 미해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자살전법 밖에는 없다는 것은 누구나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곧 이런 아이디어가 연합함대 사령관 도요다 제독에게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나마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있던 일본해군 수뇌부는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어도 차마 그러한 비인간적이고 엽기적인 전법을 공식적으로 허가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대만항공전이 한창이던 10월 15일에 제26항공전대 사령관인 아리마 마사부미 소장이 직접 공격대를 이끌고 필리핀의 니콜스 비행장을 이륙하여 공격대의 선두에서 무전으로 비장한 유언을 남기고는 미항공모함 프랭클린에 육탄돌격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필리핀의 해군조종사들 사이에 자살전법에 대한 공감대가 급격히 높아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0월 17일에 제1항공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오니시 다끼지로 중장이 총대를 메고 나서자 자살전법은 드디어 공식전법으로 인정을 받아서 1944년 10월 20일 아침에 필리핀의 마발라카트 비행장에서 세끼 유끼오 대위를 지휘관으로 하여 24명의 자원자로 이루어진 최초의 가미까제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세키 유키오 대위.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5540449 )


이들은 20일부터 매일같이 목표를 찾아서 출격했으나 그때마다 목표를 찾는데 실패했고, 21일에는 가미까제 중의 1대가 귀환 중 실종되는 사태까지 일어났으나 마침내 25일에 태피3을 발견하고 돌진하여 호위항공모함 센트 로를 격침했던 것이었다.
이 전과에 고무된  일본군은 드디어 가미까제 전법을 전면적으로 확대실시하게 된다.

사실 가미까제 전법의 비인간적이고 엽기적인 면을 떼어내고 엄밀하게 전술적인 견지에서만 따진다면 가미까제 전법의 효율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당시 일본기 조종사의 평균 비행경력이 대부분 3달 미만인 반면 미국의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의 함재기 조종사들은 대부분 2년 이상의 비행경력과 300시간 이상의 전투비행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미해군의 주력 전투기인 헬캣의 성능은 일본해군의 주력전투기인 개량형 제로기의 성능을 압도하고 있었으며, 항공기의 숫자마저 딸리는 상황에서 일본항공기들이 통상적인 공격방식으로 미국의 고속항공모함 부대에 피해를 입힌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리고 일본으로서는 미국의 고속항공모함 부대를 타격하지 못하는 한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이 전쟁을 계속하고자 한다면 불과 1주일 간의 비행훈련밖에 마치지 못한 미숙한 조종사도 운만 좋으면 미국의 고속항공모함 부대를 타격할 수 있는 가미까제 전법이 사실상 유일한 방안이었다.
만일 일본이 가미까제 전법을 채택하지 않았다면 1944년 안으로 미국의 고속항공모함 부대가 도꾜 앞바다에 눌러앉아서 함재기들이 매일 도꾜를 공습하고 미국전함들이 밤낮없이 도꾜에 포격을 가했을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가미까제를 제외하면 미해군의 고속항공모함 부대가 이런 행동으로 나왔을 경우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그런 상황에까지 몰리면 항복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일본은 어차피 이기지 못할 전쟁을 10개월 더 끌고 가려고 자살공격을 군대의 정식전술로 채택하여 자기나라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조직적으로 죽음이 길로 내모는 동서고금에 전례가 드문 비인간적이고 엽기적인 행동으로 나왔다.

일본연합함대의 수상함 세력이 레이테 해전에서 사실상 무력화되고 새로이 가미까제라는 강적이 등장하면서 일본의 항공기들이 미국의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에 대한 유일한 위협으로 떠오르자 미국의 항공모함들은 함재기 중에서 전투기의 비율을 다시 늘리기 시작했다.
사실 미국 항공모함의 전투기 탑재 비율은 태평양 전쟁 개전 이래 꾸준히 늘어왔다.
엔터프라이즈의 경우 진주만 기습 당시 전체 함재기 72대 중에서 전투기의 숫자는 와일드캣 3개 편대 12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6개월 후인 1942년 5월에 벌어진 산호해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와 같은 급의 요크타운은 와일드캣 18대를 보유했고, 1개월 후인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 공히 27대의 와일드캣을 보유하고 해전에 임했다.
다시 4개월 후인 1942년 10월의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는 36대의 와일드캣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1944년 10월의 레이테 해전까지 전체 함재기의 40% 정도를 차지하는 전투기 비율은 2년 정도 계속 유지되어 오다가 레이테 해전 이후에 일본의 수상함을 타격할 경우가 줄어들고 일본군 항공기가 사실상 유일한 위협으로 떠오르면서 전체 함재기 중의 전투기 비율은 다시 수직상승하여 1945년이 되면 전투기의 비율이 전체 함재기의 70%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비록 엔터프라이즈의 전투기 숫자는 전쟁에서 물러날 때까지 36대 정수를 지키지만 이것은 엔터프라이즈가 레이테 해전 이후 야간항공모함으로 전환되면서 전체 함재기의 정수가 57대로 줄었기 때문으로 전체 함재기에 대한 전투기의 비율로 따지면 60%가 넘었다.
1945년이 되면 에섹스 급 정규항공모함이 보유한 전투기의 정수는 보통 72대(전부 다 헬캣이거나 또는 헬켓과 콜세어가 각 36대씩)로서 전체 함재기 정수인  102대의 70%가 넘게 된다.

미국의 항공모함들이 전투기 비율을 70%까지 높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투기의 출력이 늘어나면서 헬캣은 급강하폭격기인 돈틀레스와 같은 450kg, 콜세어는 그 2배인 900kg이나 되는 폭장량을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HVAR (High-Velocity Aircraft Rocket = Holy Moses) 이라고 부르는 항공기 발사 로켓탄의 실용화가 큰 영향을 끼쳤다.
HVAR의 모태가 된 것은 1942년 말에 영국해군이 개발한 3.5인치 로켓탄이었다.
당시 북대서양 항로에서 독일의 유보트와 사생결단을 벌이고 있던 영국해군은 부상한 상태의 유보트를 발견한 항공기가 유보트가 잠항하기 전에 원거리에서 효율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 로켓탄을 개발했는데 탄두는 9kg 짜리 쇳덩어리였다.
어차피 유보트가 고속으로 돌진하는 9kg 짜리 쇳덩어리에 맞으면 함체에 구멍이 뚫리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그러면 잠수함으로서의 생명은 사실상 끝장이니 탄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것을 보고 구미가 동한 미해군은 즉시 이 로켓탄을 가져다가 3.5인치 FFAR(Forward Firing Aircraft Rocket) 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실전에 배치했다.
그런데 영국과 달리 일본잠수함에 의한 위협을 별로 느끼지 않던 미해군은 전투기에서 구축함 급 이하의 소형 전투함을 공격하기 위한 목적으로 곧 3.5인치 로켓 엔진에 5인치 대공포탄을 개량한 탄두를 붙인 로켓탄을 1943년 6월에 개발하여 이걸 5인치 FFAR 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걸 만들어 놓고 보니 로켓 엔진의 추력이 부족하여 속력도 시속 790km 밖에 안 나오고 사정거리도 부족하고 또한 직진성이 떨어져서 정확도도 저하되자 미해군은 곧 5인치 로켓엔진의 개발에 들어가서 1943년 12월에 시제품을 만들고, 실험 결과 만족할만한 성능이 나오자 곧 대량생산에 들어가서 1944년 7월에 HVAR 이란 이름으로 실전에 배치했다.

흔히 Holy Moses 라고도 불린 HVAR 은 음속보다 빠른 시속 1530km 를 낼 수 있었고, 또한 직진성이 우수해서 당시의 기준으로는 상당한 수준의 정확도를 보여주었다.
탄두는 일반고폭탄과 반철갑탄두의 2가지였는데 5인치 포탄을 기초로 개발된 만큼 25kg짜리 탄두는 거의 5인치 포와 비슷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HVAR은 헬캣에 6발, 콜세어에 8발을 장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구축함급 이하의 소형 전투함들은 전투기 4대로 이루어진 1개 편대만 있으면 간단히 격침시킬 수 있었다.
또한 이 HVAR 은 지상방어기지, 특히 토치카를 파괴하는 데에도 굉장히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이미 돈틀레스와 동급 이상의 폭장량을 가진 항공모함의 전투기들은 HVAR 이 실용화되자 대형수상함을 타격할 일이 없어진 레이테 해전 이후에는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실시하는 거의 모든 형태의 작전에 적응할 수 있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아벤저와 헬다이버의 입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레이테 해전 이후에는 항공모함의 공습시 공격력의 주축은 전부 전투기들이고 헬다이버나 아벤저는 어뢰나 폭탄 대신 구명용 고무보트를 싣고 전투기 뒤를 따라가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가 되었다.

 

 

(F4U 커세어 전투기의 날개에 장착 중인 HVAR. 1945년 6월에 오키나와에서 찍은 사진이다.)

엔터프라이즈는 레이테 해전이 끝난 이후에 계속 필리핀 근해에 머물면서 동료 항공모함들과 함께 일본군 비행장과 함정들을 공격하면서 지상군을 지원하다가 12월 6일에 진주만에 입항했다.
1944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시 해상에 나온 엔터프라이즈는 사상 최초의 야간항공모함인 CV(N)-6 가 되었다.
엔터프라이즈의 항공단도 제20항공단에서 제90야간항공단으로 바뀌었다.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 모두가 새해에는 일본을 때려눕혀 전쟁을 끝내고 다음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맞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반만 옳았다.
그들은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으나 엔터프라이즈는 일본을 때려눕히기 직전에 가미까제 공격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전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엔터프라이즈는 1944년 한해동안 함정 승무원 8명과 항공기 승무원 67명 등 총 75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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