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테 해전이 끝난 이후에도 제38기동부대는 계속하여 필리핀 근해에 머물면서 레이테 섬에 상륙한 지상군을 지원했다.
그런데 레이테 섬 점령은 일본군 수뇌부가 착각을 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훨씬 늦어지게 되었다.
즉 일본연합함대는 사실상 레이테 해전에서 전멸했는데도 일본해군은 어이없게도 자신들이 미해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고 착각하여 엉뚱한 보고를 올렸고, 이 보고를 받고 고무된 일본군 수뇌부는 원래 루존 섬에서 결전을 벌이려던 생각을 바꾸어서 레이테 섬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게다가 레이테 섬의 지반이 연약하고 비가 엄청나게 와서 미군이 점령한 타클로반 비행장의 확장이나 새로운 비행장의 건설이 지연되어 케니 장군의 육군제5항공대가 제대로 전개하지 못했는데 그동안 일본은 오끼나와와 대만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항공기들을 필리핀에 투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38기동부대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필리핀 상공의 제공권을 확립하는데 실패했다.
또한 섬의 중앙부를 높은 산맥이 지나가는 레이테 섬의 특성상 일본군의 사령부가 있고 증원부대를 실은 함선들이 계속 도착하고 있던 레이테 서부의 요충지 오르목을 장악하려면 섬의 남쪽이나 북쪽을 돌아서 다시 상륙작전을 펴야했는데 새로 등장한 강적인 가미까제 특공대의 공격으로 미함대는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사람의 판단력으로 장애물을 피하여 목표물에 돌입할 수 있는 가미까제는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의 순항미사일보다도 더 뛰어난 인공지능을 가진 순항미사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사실은 전과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서 태평양전쟁 전체를 통하여 가미까제 특공대는 14% 의 명중률을 기록했는데 필리핀 해전에서는 그래도 2-3달의 비행경력을 가진 조종사들이 모는 일본기들이 미함대를 공격하여 222대가 격추되고 400 명 가까운 전사자를 내면서 겨우 1발을 명중시키는데 성공했었다.
거기에 비교해 보면 대부분 1주일 간의 비행경력이 전부인 완전초보 비행사들이 모는 가미까제 특공대가 필리핀 해전 당시보다도 숫자가 훨씬 늘어난 미함대의 전투기들과 강화된 대공포화를 뚫고서 기록한 14%라는 명중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레이테 섬의 확보가 늦어지자 원래 1944년 12월 20일에 예정되었던 루존 상륙도 1945년 1월 9일로 미루어졌고, 덩달아서 이오지마 상륙일도 1월 20일에서 2월 19일로, 오끼나와 상륙일도 3월 1일에서 4월 1일로 연기되었다.
제38기동부대는 레이테 해전 이후 1944년 11월 25일에 울리시로 철수할 때까지 한 달간 700 대 이상의 일본기를 격추하고, 중순양함 2척(나치, 구마노), 구축함 10 척과 40 여척의 수송선, 유조선 및 기타함정들을 격침했다.
1944년 12월 11일, 미상원은 영국의 원수들을 상대할 수 있도록 해군대장 4명과 육군대장 4명을 원수로 승진시키도록 승인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즉시 킹 제독과 니미츠 제독, 그리고 대통령의 해군보좌관인 리히 제독을 해군원수로, 마셜 장군과 맥아더 장군, 아놀드 장군과 아이젠하워 장군을 육군원수로 임명하여 12월 15일에 상원의 승인을 받았다.
원래대로라면 미해군의 서열 4위인 핼시 대장도 이때 원수로 승진했어야 했으나 핼시 대장과 같은 격의 전투함대 사령관인 스프루언스 대장의 입장을 고려한 킹 제독이 핼시 제독에 대한 추천을 보류함으로써 핼시 대장은 1년 후인 1945년 12월 11일에 원수로 승진하게 되었다.
이때 제7함대 사령관인 토머스 킨케이드 중장도 같은 등급이었던 미처 중장이나 맥케인 중장보다 한발 먼저 대장 계급장을 달아서 핼시 제독이나 스프루언스 제독과 같은 대장의 반열에 올랐다.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8685432 )
12월 15일에 실시된 남서태평양해역군의 민도로 섬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12월 10일에 울리시를 떠난 제38기동부대는 12월 16일까지 루존을 맹타하여 일본기들의 활동을 제약했다.
12월 17일 오후부터 필리핀에서 동쪽으로 800km 떨어진 해상에서 해상급유를 받던 제38기동부대는 18일 새벽부터 최고풍속이 무려 시속 200km에 달하는 태풍 코브라에게 직격당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즉 구축함 3척(모내헌, 헐, 스펜서)이 침몰하고 9척이 전열에서 탈락할 정도로 심한 손상을 입었으며, 경항공모함 몬터레이와 카우펜스, 호위항공모함 알타마하와 케이프 에스퍼란스 등지에 실려있던 함재기의 고정밧줄이 끊어지면서 186 대의 항공기가 바다에 쓸려 들어거나 서로 부딪혀서 파손되었다.
실종된 승무원의 수만도 800 명에 달했다.
필리핀 해전에서 상실한 항공기의 숫자가 130 대, 전사자 숫자가 107 명인 것에 비하면 이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큰 것이었나를 알 수 있다.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나 커서 제38기동부대는 예정되었던 나머지 작전을 취소하고 일단 울리시로 철수했다.
이 태풍피해는 태평양함대 내에서도 큰 문제가 되어 즉각 울리시에 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위원장 존 후버 제독은 조사를 마친 후 핼시 제독을 군법회의에 회부하려고 했으나 킹 제독과 니미츠 제독이 적극 나서서 말렸다.
따라서 핼시 제독은 비난을 받고 명성에 흠이 가기는 했지만 계속하여 해군 대장의 계급과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지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2월 24일에 울리시에 도착하자마자 태풍피해 때문에 조사위원회에 불려 다니면서 거센 비난을 받은 핼시 제독은 잠시 의기소침했었으나, 킹 제독과 니미츠 제독이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줌으로써 자신이 이들에게 얼마나 큰 신뢰를 받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되자 금방 자신감을 회복하여 12월 30일에 제38기동부대를 이끌고 남서태평양해역군의 루존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울리시를 출발했다.
제38기동부대는 1월 3일과 4일에는 대만을 공습했고, 1월 6일부터는 루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월 3일부터 8일까지 제38기동부대는 대만과 루존의 비행장들을 타격하고, 17척의 수송선과 소형함정들을 격침했다.
1945년 1월 9일 오전 8시, 제7함대의 화력지원 하에서 월터 크루거 중장이 지휘하는 제6군 175,000 명의 병력이 링가옌 만에 상륙했다.
일단 루존에 상륙만 하면 친미 성향 필리핀 게릴라의 도움으로 간단하게 필리핀을 탈환할 수 있다던 맥아더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제6군은 260,000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필리핀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야마시따 도모유끼 대장의 효과적인 지연작전에 휘말려서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루존에 발이 묶여 있어야 했다.
이미 12월 30일에 울리시를 떠나 루존을 맹타하고 있던 제38기동부대는 루존 상륙작전이 있던 1월 9일에 필리핀과 대만 사이의 바시 해협을 통과하여 남지나해로 들어서면서 대만을 공습하여 3척의 수송선, 2척의 유조선, 3척의 소형함정을 격침했다.
1월 12일, 제38기동부대의 함재기들은 항공전함 이세와 히우가를 노리고 캄란 만을 공습했으나 이미 싱가포르로 도망간 뒤여서 격침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제38기동부대는 이날의 공습에서 연습순양함 기시와 수송선 13척, 유조선 10척, 소형함정 11척을 격침하여 합계 126,000 톤의 격침 톤수를 기록함으로써 트럭 공습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격침톤수를 기록했다.
13일과 14일 양일간 해상급유를 실시한 제38기동부대는 15일과 16일 이틀동안 대만, 홍콩, 꽝뚱, 루존 등지를 맹폭하여 구축함 쓰가와 하타가제, 수송선 5척, 유조선 3척, 소형함정 4척을 격침했다.
홍콩에서는 일본기가 효율적인 반격을 감행하여 미함재기 61대가 격추된 반면 일본기는 47대가 격추되었다.
헬캣이 실전에 배치된 이래 미해군이 공중전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일은 극히 드문 일로서 이 사건은 제38기동부대 사령관인 맥케인 제독이 함재기 중에서 전투기의 비율을 급속하게 늘리면서 전투기 조종사가 부족하여 기존의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나 뇌격기 조종사 중 전투기 조종사로 기종전환한 조종사들의 기량이 아직 미숙하다는 증거였다.
미해군은 전투기 조종사의 숫자가 부족하자 콜세어를 가진 해병대의 전투비행대를 항공모함에 싣는 고육지책까지 동원했으나, 새로 충원된 전투기 조종사의 경험 부족은 어쩔 수 없었다.
1월17일부터 19일까지 필리핀 서부해안에서 해상급유를 마친 제38기동부대는 1월20일에 발린탕 해협을 통하여 남지나해를 빠져나왔다.
다음날인 1월 21일에 제38기동부대는 대만, 오끼나와, 루존을 공격하여 일본기 100 대를 지상에서 파괴하고, 수송선 7척, 유조선 7척, 소형함정 1척을 격침했다.
이제까지 제38기동부대의 함정들은 일본의 항공기로부터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이날 대만을 출격한 대규모의 일본기들이 제38기동부대를 공격해 왔다.
경항공모함 랭글리가 1발의 250kg 폭탄에 명중되어 3명이 전사했고, 구축함 매덕스에 1대의 가미까제 특공기가 격돌하여 7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정규항공모함 타이콘데로가에 2대의 가미까제 특공기가 격돌하여 함장인 키퍼 대령을 포함하여 143명의 전사자를 기록하면서 대파되어 본토로 수리하러 가야만 했다.
1월 23일에 해상급유를 실시한 제38기동부대는 울리시로 향하여 1월 26일에 도착했다.
그날 핼시 제독은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한편 루존 상륙전이 끝난 이후에 니미츠 원수는 제7함대에 빌려주었던 함정들을 다시 돌려받기 위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오지마 상륙작전과 오끼나와 상륙작전을 위하여 이 함정들이 꼭 필요했던 니미츠 제독은 몇 번씩이나 남서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에게 전보를 보내어 빌려주었던 함정들을 돌려달라고 재촉하였으나 제7함대 사령관인 킨케이드 대장은 맥아더 원수에게 필리핀 작전을 제대로 지원하려면 이 함정들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차일피일 시간을 끌고 있었다.
특히 전함 1척도 없이 중순양함만으로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수많은 상륙작전을 지원하면서 일본함대가 나타날 때마다 그 안에 혹시 1척의 전함이라도 포함되어 있을까봐 늘 가슴을 졸이고 전전긍긍하면서 전함에 아주 한이 맺힌 킨케이드 제독은 특히 전함에 대단한 집착을 보이면서 4척의 구형전함(뉴멕시코, 캘리포니아, 펜실베니아, 미시시피)을 꽉 움켜쥐고 절대로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킨케이드 제독이 대장의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니미츠 제독의 바짓가랑이를 끝까지 붙잡고 늘어지자 니미츠 제독은 할 수 없이 4척의 구형전함을 2척의 중순양함 및 22척의 구축함들과 함께 제7함대에 넘겨주었다.
니미츠 제독이 이러한 결심을 한데에는 당시 대서양에서 필요가 없어진 구형전함 5척(아이다호, 네바다, 텍사스, 뉴욕, 아칸사스)을 위시한 더 많은 함정이 태평양 함대에 도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킨케이드 제독은 비록 구형전함이라고는 하지만 꿈에도 그리던 전함을 4척이나 보유하게 되었으나 그 중에서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는 1월 6일에 가미까제 특공기에 의하여 피해를 입어 1월 23일에 할수없이 수리를 위하여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펜실베니아와 미시시피는 필리핀의 일본군 지상기지 공격에 나름대로 위력을 발휘하면서 킨케이드 제독을 기쁘게 해주었으나 2척 다 역시 2월 10일에 가미까제 특공기에 의하여 피해를 입어서 수리를 위하여 내놓아야만 했다.
이 전함들은 수리를 마치고 오끼나와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킨케이드 제독은 천신만고 끝에 손에 넣은 구형전함 4척을 1달 만에 전부 다 내놓아야했지만 어쨌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필리핀 근해에서 중순양함만으로는 대적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일본함대를 만날 일은 없었다.
(BB-38 펜실베니아.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8683540 )
제58기동부대는 2월 10일에 울리시를 떠났다.
1945년 2월 19일로 예정된 이오지마 상륙작전을 앞두고 도꾜 부근의 비행장 및 항공기 생산 공장을 공습하여 일본의 항공력이 상륙작전을 간섭하지 못하도록 미리 그 세력을 꺾어두는 것이 목표였다.
제58기동부대는 5개의 전단으로 이루어져 총 11척의 정규항공모함(베닝턴, 와스프, 호넷, 렉싱턴, 핸콕, 에섹스, 벙커힐, 요크타운, 랜돌프, 엔터프라이즈, 새러토가), 5척의 경항공모함(벨로우드, 샌야신토, 카우펜스, 랭글리, 캐벗), 8척의 고속전함(메사추세츠, 인디애나, 위스컨신, 미주리, 사우스다코타, 뉴저지, 워싱턴, 노스캐롤라이나), 1척의 대형순양함(알래스카), 6척의 중순양함(솔트레이크시티, 샌프란시스코, 보스턴, 피츠버그, 인디애나폴리스, 볼티모어), 11척의 경순양함(빈센스, 마이애미, 산후앙, 플린트, 파사데나, 윌크스베어, 아스토리아, 빌록시, 산타페, 샌디에고), 구축함 85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엔터프라이즈는 이 공격에서 새러토가와 함께 엔터프라이즈의 제8대 함장을 지냈던 가드너 소장의 지휘 하에 대형순양함 알래스카, 중순양함 볼티모어, 경순양함 플린트와 구축함 9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제58.5전단을 형성했다.
대형순양함(CB)으로 분류되는 알래스카 급은 상당히 독특한 급이다.
표준배수량이 29,800 톤인 크기와 33노트라는 고속에다가 장갑 등으로 보면 순양전함이라고 볼 수 있으나 주포가 12인치 포 9문으로서 일반적으로 전함과 같은 구경의 주포를 사용하는 순양전함치고는 너무 작은 편이어서 설계 개념이 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함종은 원래 일본이 기존의 중순양함과 순양전함의 중간에 해당하는 강력한 함정(일명 초갑형 순양함)을 건조할 예정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이 가상의 대형 중순양함에 대항하기 위하여 건조된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항공모함이 해전의 중심으로 급속하게 떠올랐으며 또한 일본이 초갑형 순양함을 건조하지 않았으므로 알래스카 급이 실제로 완성되자 이 함정에게 주어진 임무는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호위를 맡는 것이었다.
다만 알래스카 급은 함체가 대형이었으므로 강력한 대공무장을 장비하는 것이 가능했고, 또한 주포도 12인치 포로서 적어도 적의 중순양함 정도는 확실히 제압할 수 있으므로 제한적으로나마 고속전함이 제공할 수 있는 수상전투 능력을 제공할 수 있어서 상대적으로 항공모함의 숫자가 적고 함재기의 숫자도 적은 제58.5전단같은 작은 규모의 전단을 호위하는 데에는 다른 중순양함들보다 확실히 유리했다.
(CB-1 알래스카. 표준 배수량 : 29,779톤, 길이 : 246.4m, 폭 : 27.8m, 속력 : 31.4노트, 항속거리 : 15노트로 22,000km, 승무원 : 2,251명, 무장 : 12인치 3연장포 9문, 5인치 양용포 12문, 40mm 보포스 대공포 56문, 20mm 기관포 34문, 장갑 : 최고 330mm, 항공기 : 킹피셔 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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