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지마는 보닌 제도에 포함된 면적 22제곱킬로미터의 조그마한 화산섬으로서 도꾜에서 남쪽으로 1,050 km, 그리고 사이판에서 북쪽으로 1,000 km 떨어진 해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위치는 마리애나 제도에서 출격하는 B-29의 항로상 거의 정중간에 해당한다.
일본은 이러한 이오지마의 위치를 십분 활용하여 이곳에 레이더 기지를 건설하여 B-29의 폭격을 미리 예보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섬에 3개의 비행장을 건설하고 전투기들을 배치하여 일본까지의 긴 항정을 날아가고 다시 돌아와야 하는 B-29들을 괴롭힐 수 있었다.
게다가 1944년 11월에는 이오지마에 기지를 둔 일본의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사이판의 비행장을 급습하여 값비싼 B-29폭격기 11대를 파괴하고, 19 대에 피해를 입힌 적도 있었다.
반대로 미군이 이오지마를 탈취할 경우 이 섬은 B-29 가 불시착할 수 있는 비상 기지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또한 구조대 및 호위 전투기 부대를 위한 이상적인 전진기지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미육군항공대는 보다 효과적인 일본폭격을 위하여 이오지마의 탈취를 강력하게 희망했고, 미해군 또한 오끼나와로 향하는 항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이오지마의 점령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1944년 6월에 미군이 사이판에 상륙하자 일본은 머지않아 미군이 이오지마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 섬의 방어태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곧 많은 병력들이 이오지마에 배치되기 시작했고, 이오지마 수비대장인 구리바야시 다다미찌 중장은 1944년 여름부터 심혈을 기울여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갱도를 파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5년 초에는 보병 9개 대대, 해군부대 7347 명, 전차 1개 연대, 포병 2개 연대, 고사포 5개대대 및 박격포 5개대대 총 23,000 여명의 수비대가 이오지마에 집결했다.
이들이 보유한 장비는 57mm 포를 장비한 중형전차 12대, 37mm 포를 장비한 경전차 12대, 320mm 박격포 12문, 160mm 및 81mm 박격포 65문, 80mm 이상의 해군포 33문, 75mm 이상의 대구경대공포 94문, 20mm 및 25mm 짜리 대공포 200 문 이상, 37mm 및 47mm 짜리 대전차포 69문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육군은 탄두가 250kg에 달하고 사정거리가 7,000m 인 대형 로켓탄과 63kg 짜리 탄두를 달고 1,800m 의 사정거리를 가지는 로켓탄을 보유하고 있었고, 해군은 200mm 포탄을 개량한 탄두를 장착하고 2,700m 의 사정거리를 가지는 8인치 로켓탄도 보유하고 있었다.(당시 일본군은 로켓탄을 분진포라고 불렸다.)
(4식 200mm 분진포.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1854775 )
일본군의 장비 중에서 독특한 것은 320mm짜리 초대형 박격포였다.
이 박격포는 통상의 박격포처럼 포탄을 원통형의 포신에 넣고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받침대 위에 고정된 쇠막대기 위에 포탄을 덮어서 외부에 포탄이 노출된 상태에서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구조상 당연히 사정거리도 1,300 m 정도로 비교적 짧고, 잘못하면 아군의 머리 위에 떨어질 정도로 정확도 또한 형편없었으나 무게가 무려 300kg 이나 나가는 박격포탄의 위력은 대단해서 이오지마 상륙 초기에 미해병대는 이 박격포에 의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320mm 98형 박격포)
하지만 이오지마 방어시설의 정수는 정교한 지하진지 시스템이었다.
일본군의 지하진지는 엄폐호, 전투지휘소, 창고, 숙소 등을 포함하고, 그 사이가 평균 700m 길이의 갱도로 연결되어 보통 14개의 출입구를 가졌으며 전기와 진지 내부용 전화선이 가설되어 있었다.
이러한 지하진지가 가장 집중적으로 건설된 곳은 섬의 남쪽 끝에 있는 스리바찌 산과 섬 북쪽의 구릉지대였으며 평지에서도 지하 10m 정도에 일부 구축되어 있었다.
스리바찌 산에는 이러한 지하진지가 무려 7층으로 층층이 만들어져 약 1,000 개의 방을 연결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하진지는 출입구가 여러 개였기 때문에 일본군들은 해병대가 전진한 후에 지하갱도를 들키지 않고 이동하여 후방에서 갑자기 나타나 이들을 덮칠 수도 있었다.
섬 전체에 통틀어 수백개가 넘는 이러한 지하진지를 형성하는 갱도의 총 연장은 무려 25km 에 달했다.
이오지마에 상륙하려는 미해병대는 해리 슈미트 소장이 지휘하는 해병제3, 제4, 제5사단의 3개 해병사단으로 이루어진 제5상륙군단으로 총 병력은 70,000 여명이었다.
이들을 호송하고 상륙작전을 엄호할 켈리 터너 소장 휘하의 제5상륙부대는 구형전함, 호위항공모함, 수송선 등을 포함하여 총 485 척의 함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LVT는 482 대가 준비되었고, 이오지마에는 산호초가 없었으므로 해안에 직접 접안할 수 있는 LST 가 유용하여 총 63척이 요구되었으나 남서태평양해역군에 빌려주었던 LST 의 도착이 늦어져서 이오지마 상륙작전에 실제로 참가한 LST 의 수는 28 척이었다.
LST의 숫자가 예정보다 절반 이하로 줄어듬에 따라서 원래 LST에 실려서 상륙하려던 셔먼 전차의 많은 수가 LCT 에 실려 상륙해야 했으며, 해병제3사단은 예비대로 돌려져서 상륙 첫날에는 해상에 대기하다가 나중에 상륙하게 되었다.
B. J. Rodgers 소장이 지휘하는 포격지원부대는 7척의 구형전함(웨스트버지니아, 테네시, 뉴욕, 텍사스, 아칸소, 네바다, 아이다호)을 주축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블랜디 소장의 화력지원부대는 11척의 호위항공모함(나토마베이, 웨이크아일랜드, 페트로프베이, 서전트베이, 스티머베이, 메이킨아일랜드, 룽가포인트, 비스마르크시, 사지노베이, 루디어드베이, 툴라기)과 40mm 기관포와 로켓탄을 장비한 LCI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원래 LCI(=Landing Craft, Infantry) 는 보병상륙용의 대형상륙정으로 길이 48미터, 배수량 385톤으로 병력 188명이나 75톤의 화물을 운반할 수 있었고, 4문의 20mm 기관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LCI(G)는 LCI에다가 40mm 기관포 3문, 12.7mm 중기관총 6정을 증설하여 화력지원을 담당하게 한 형식이며, LCI(R)은 LCI 에다가 6연장의 5인치 로켓발사기 1문과 40mm 기관포 한 문을 증설하여 곡사화기에 의한 화력지원을 담당하게 한 형식이다.
이렇듯 LCI(G) 나 LCI(R) 을 운용하게 된 까닭은 LCI 에 실려 상륙하는 부대가 해안에 닿는 마지막 순간까지 밀착하여 화력지원을 해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우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룬 영화에서 흔히 보는 소형의 상륙주정은 히긴즈 보트라고 불리는 LCVP(Landing Craft, Vehicle, Personell)로서 길이 11m, 배수량 8톤으로 병력 36명이나 소형 트럭 1대 또는 3.6톤 가량의 화물을 운반할 수 있으며 7.62mm 기총 2정을 장비하고 있었다.
(LCVP.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51137172 )
상륙군의 포병 화력은 24문의 155mm 야포, 96문의 105mm 야포, 48문의 75mm 야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항공지원은 호위항공모함 이외에도 마리애나 제도에 기지를 둔 육군제7항공대와 미처 중장의 제58기동부대가 가세했다.
이 모든 병력들은 모두 제5함대 사령관인 스프루언스 대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이오지마에 대한 사전공습은 1944년 8월부터 시작되었다.
육군제7항공대 소속의 B-24 리버레이터들이 8월부터 상륙당일까지 거의 매일같이 이오지마에 출격하여 6개월간 총 6,000 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 폭탄들은 비행장에 피해를 입혀서 이오지마 주둔 항공부대의 활동을 약간 제약한 것 이외에는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1944년 12월 초부터는 해병제612폭격비행대의 B-25들도 작전을 개시했는데 이들은 주로 밤에 이오지마에 인원, 장비 및 보급품들을 수송하던 일본수송선들을 집중공격하여 1945년 1월말까지 23척을 격침함으로써 괄목할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구형전함에 의한 포격은 제58기동부대의 도꾜 공습과 때를 맞추어 2월16일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상륙군 사령관인 슈미트 해병소장은 구형전함들이 상륙 전에 10일간 포격을 해주길 원했으나 전함들이 그만한 양의 주포탄을 실을 수가 없었으므로 3일간 포격할 수 밖에 없었다.
호위항공모함의 함재기들도 2월16일부터 본격적으로 이오지마에 공습을 가하기 시작했다.
상륙일인 2월 19일에는 아침 6시 40분부터 7척의 구형전함이 포격을 시작했다.
동시에 수송선들은 상륙용주정을 내리고 병력과 전차, 장비들을 옮겨 싣기 시작했다.
7시 45분부터는 8개 대대를 실은 482대의 LVT들이 발진지점을 향했다.
8시 5분, 구형전함들이 잠시 포격을 멈추고 제58기동부대에서 발진한 함재기 120대가 저공비행을 하면서 상륙예정해안과 그 배후지역, 스리바찌 산의 동쪽과 북쪽 능선을 네이팜탄, 로켓탄, 폭탄 등으로 공격하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사이판에서 날아온 육군제7항공대의 B-24 들도 가세하여 19톤의 폭탄을 쏟아부었다.
그동안 포정들과 로켓포정들은 상륙예정 해안에 바짝 접근하여 포격을 시작했다.
이들은 최초의 LVT 가 해안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8시 30분, 공격 제1파를 실은 68대의 LVT가 공격개시선을 통과했다.
최초의 LVT 가 해안에 도달한 것은 오전 9시 2분, 예정보다 2분 늦은 시각이었다.
(이오지마의 해안선으로 쇄도하는 제4 및 제5해병사단의 LVT들. 1945년 2월 19일)
그런데 이오지마의 해안은 부드러운 화산재로 이루어져 있고, 해안 바로 뒤에 4.5미터 높이의 언덕이 있어서 LVT 가 기어오르지 못했다.
따라서 해병들은 무거운 군장을 멘 채로 하차하여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화산재로 이루어진 언덕을 힘겹게 올라가서 내륙으로 전진해야만 했다.
곧이어 3분후에 LVT 제2파가 도달했다.
일본군들은 해안 방어를 포기하고 잘 엄폐된 동굴 진지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9시 20분부터 320mm짜리 대구경박격포와 대형로켓탄을 비롯한 각종 화기를 동원하여 해병대의 교두보에 집중적인 포격을 가해 왔다.
10시 20분까지 LVT 에 탑승한 8개 대대 전부가 상륙을 마쳤고, 그날 저녁까지는 30,000 명이 상륙을 마쳤으며, 그날 오후에 해병제27연대는 섬의 가장 짧은 부분을 통하여 서해안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하여 섬의 남단에 있는 스리바찌 산을 북쪽의 일본군 주력부대로부터 분리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효율적이고도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상륙 첫날의 사망자는 566명에 이르렀고, 대부분의 부대가 원래 계획에 훨씬 못미치는 지점까지 진격했을 뿐이었다.
애당초 미해군 정보부는 이오지마의 일본군 수를 13,000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빠르면 4일, 늦어도 10일 안에는 완전히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 일본군의 수는 23,000 여명이었고, 방어준비가 철저했다.
또한 구리바야시 중장의 현실적이고 교묘한 작전지도 때문에 실제로 해병대가 이오지마를 완전히 점령한 것은 3월 26일의 일로써 실로 상륙한지 37일째 되던 날이었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예비포격에 의하여 상륙군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전멸할 것이 뻔한 해안방어를 포기하고 일단 상륙을 허용한 후에 전투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휘하 장병들에게 각자가 미군 10명씩을 사살하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목숨을 보존해야만 하며 마지막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위치를 사수하며 최대한 저항해야지 만세돌격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제58.5전단에 소속된 엔터프라이즈는 2월 19일 오후에 이오지마에 도착하여 오후 4시 30분에 6대의 헬캣으로 이루어진 CAP 세력을 발진시킴으로써 작전을 시작했다.
이오지마에서 엔터프라이즈의 1차적인 임무는 상륙함대를 공습에서 보호하는 일이었다.
오후 7시30분에 CAP 임무를 수행 중이던 James Wood 대위의 헬캣이 레이더로 일본육군의 쌍발 중폭격기 Ki-49 Helen 을 발견하고 추격하여 오후 8시에 격추했다.
2월21일 오전 9시에 제58.5전단은 해체되어 새러토가는 3척의 구축함과 함께 호위항공모함 전단인 제52.2 전단에 합류하였고, 엔터프라이즈는 58.5 전단의 나머지 호위함들과 함께 제58.2전단에 합류했다.
오후 4시 30분에 새러토가의 레이더가 120km 떨어진 거리에서 25대의 일본기들을 발견했다.
4시 50분부터 새러토가의 CAP 세력들이 교전에 들어갔으나 6대의 일본기가 살아남아서 새러토가에 돌입했다.
4시 59분, 선두에서 돌입하던 2대의 일본기는 거의 동시에 새러토가의 대공포에 피탄되었으나 그대로 돌진하면서 새러토가의 흘수선 부근에 격돌하였고, 이들이 장착했던 폭탄은 함체를 뚫고 들어가서 폭발했다.
뒤따라오던 일본기가 투하한 폭탄이 비행갑판 앞부분에 명중했고, 4번째의 일본기는 우현 쪽으로 빗나갔으나 이어서 2대의 일본기가 비행갑판에 충돌했다.
불과 3분만에 5발의 폭탄에 피탄당한 새러토가는 화재가 발생하면서 일시적으로 기능을 상실했으나 90분간의 사투 끝에 화재를 진압하고 25노트의 속력을 회복했다.
그러나 오후6시 경에 또다시 공격해 온 가미까제 공격대 중 5대가 6시 46분에 새러토가에 돌진해 왔다.
앞장선 4대는 대공포화에 맞아서 격추되었고 마지막 1대가 새러토가의 비행갑판에 낮은 각도로 충돌하여 기체는 함 밖으로 떨어져 나갔으나 폭탄은 기체에서 분리되어 격납고 갑판에서 폭발하면서 또다시 화재를 일으켰다.
새러토가의 승무원들이 다시 화재를 진압하는데 성공하여 새러토가는 오후 8시부터 자신의 함재기들을 불러모았으나 더 이상의 작전은 불가능했으므로 수리를 위하여 전투현장을 이탈했다.
123 명의 전사자를 기록한 이날의 전투를 끝으로 새러토가는 태평양 전쟁에서 물러났다.
새러토가는 에니웨톡 환초에 들렀다가 3월 16일에 미본토 서해안의 브레머튼 항에 입항하여 수리를 받고 5월 22일에 출항, 6월 3일에 진주만에 도착하여 함재기 파일럿들의 훈련을 실시하던 중에 종전을 맞았다.
새러토가가 전열에서 탈락함으로써 이제 엔터프라이즈는 미해군의 항공모함 중에서 태평양 전쟁 개전 이래 계속하여 싸우고 있는 유일한 항공모함이 되었다.
(USS Saratoga CV-3.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67754173 )
새러토가를 전열에서 탈락시킨 일본의 가미까제 공격대는 이때 제52.2전단의 호위항공모함 룽가포인트 와 비스마르크시 에도 돌입했다.
오후 6시 35분에 가미까제 특공기 1대가 룽가포인트 에 격돌하여 화재를 일으켰고, 10분 후인 6시 45분에는 비스마르크시 에 2대의 특공기가 격돌했다.
비스마르크시 에서는 즉각 치명적인 화재가 발생했고, 피격 20분만에 퇴함명령이 내려졌으며 피격 3시간 만에 318명의 전사자와 함께 침몰했다.
이외에도 수송선 1척과 LST 한척도 피해를 입었으나 침몰은 면했다.
22일 오후에 엔터프라이즈는 전날의 가미까제 공격 때 실종된 새러토가의 조종사 8명을 찾으러 이오지마 남쪽으로 8대의 아벤저를 파견했다.
뿔뿔이 흩어져서 이오지마 남쪽으로 250km까지 수색했던 이들은 나쁜 날씨 때문에 실종된 조종사들을 찾는데 실패하고 이오지마의 동쪽 10km 지점에서 합류했는데 이곳에서 아군함대로부터 오인사격을 받아서 2대의 아벤저가 격추되었다.
그 중의 1대에 타고 있던 조종사와 승무원은 무사히 구출되었으나 편대장이었던 C. B. Collins 대위와 승무원들은 실종되고 말았다.
23일 오전에 이오지마의 해병대가 스리바찌 산을 점령하고 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았다.
제5해병사단 제28연대 제2대대 E 중대 소속의 5명의 해병과 1명의 해군위생병이 파이프에 대형 성조기를 매달아서 스리바찌 산의 정상에 꽂는 순간인 이 성조기 게양장면을 AP 기자인 조 로젠탈이 사진으로 남겼는데 ’Raising the Flag on Iwo Jima’ 라는 제목의 이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이 되었다.
(Raising the Flag on Iwo Jima)
23일 오후에 급유를 받은 엔터프라이즈는 제58.2전단에서 분리되어 다시 제58.5전단을 형성했다.
오후 6시 50분, 제58.5전단을 제외한 제58기동부대는 이오지마에서 활동하는 가미까제 특공기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재차 일본공습에 나섰다.
제58기동부대는 24일과 25일에 도꾜를 공습했고, 26일에는 도꾜와 나고야를 공습했지만 날씨가 나빠서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27일과 28일에 걸쳐 해상급유를 받은 제58기동부대는 3월 1일에는 오끼나와를 공습하여 수송선 9척과 소형함정 2척을 격침하고, 1달 뒤에 실시될 오끼나와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수많은 사진을 찍고는 3월 2일에 울리시로 향하여 3월 4일에 도착했다.
제58기동부대가 일본공습을 위하여 떠나버리자 이제 엔터프라이즈는 이오지마 해역에서 유일한 정규항공모함이 되었다.
엔터프라이즈에게는 기존의 야간 CAP 임무에 더하여 주간 CAP 임무와 함께 240km 정도 북쪽에 떨어져 있는 가미까제의 발진기지 치치지마에 대한 폭격도 겸해야 했다.
사실 주야간 지속되는 CAP 임무만 해도 상당한 중노동으로 오전 6시 30분에 4대의 헬캣이 출격하기 시작하여 3시간 간격으로 계속 진행되다가 오후 4시 45분에는 12대의 헬캣이 출격하여 6시 15분까지 CAP 임무를 맡았고(이 시간대가 석양이 질 때라서 가미까제 특공기가 기습을 하기 가장 좋은 시간대이다.), 6시 15분부터는 2대의 헬캣이 2시간 간격으로 야간 CAP 임무에 돌입하여 새벽 4시 15분까지 계속되었다.
엔터프라이즈의 아벤저들은 낮 동안에는 대잠경계를 담당하거나 또는 함대의 대공사격 연습을 위하여 꼬리에 표적을 끌고 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오후 2시가 넘어가면 헬캣 2-4대, 아벤저 4-6대 정도로 이루어진 공격대가 석양에 치치지마를 공격하기 위하여 엔터프라이즈를 떠났다.
오후 6시 15분에는 1대의 헬캣이나 아벤저가 치치지마에 가서 밤새 활주로를 보수하지 못하도록 일본군을 방해했다.
이런 방해작전(Heckler Mission)은 다음날 새벽 3시 15분까지 3시간 간격으로 4번 실시되었다.
이러한 빡빡한 일과는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에게 상당한 중노동을 강요하여 조종사부터 함재기 정비병에 이르기까지 함내의 거의 모든 인원은 주간반과 야간반으로 나누어졌다.
따라서 항공기 정비같은 경우 보통 7명이 한대의 함재기를 담당하는데 비하여 엔터프라이즈는 주간에는 3명, 야간에는 4명이 담당해야 했다.
장교들의 경우에는 더 심하여 착함 통제관의 경우 통상적인 근무시간의 2배가 넘는 13시간 교대 근무를 해야 했고, 캐터펄트 담당사관은 무려 18시간 연속 근무를 해야만 했다.
함재기의 이함은 짧은 전방갑판에서 캐터펄트를 사용하여 실시해야 했고, 후방갑판은 항상 착륙하는 함재기들을 위하여 비워놓아야 했다.
함장에서 말단 승무원까지 이러한 중노동을 강요당하면서도 이 기간동안 엔터프라이즈에서는 다른 항공모함에 비하여 특별히 사고가 많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엔터프라이즈가 태평양 전쟁 개전이래 계속 전투에 참가해 왔기 때문에 승무원들의 숙련도가 대단히 높은 편이었으며 승무원들의 사기 또한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2월24일 오후 2시 16분, 4대의 헬캣과 6대의 아벤저가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을 떠났다.
목표는 치치지마와 하하지마였다.
Charles Gerbron 중위와 George McLaughlin 중위는 치치지마의 슈사끼 비행장에 로켓탄과 집속폭탄을 퍼붓고 기총소사를 가하여 1대의 베티를 비롯하여 4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Bill Balden 중위와 Robert Heid 중위는 정박한 수송선에 로켓탄 공격과 기총소사를 가했고, Charles Henderson 대위는 오무라 마을을 폭격했다.
공격대는 치치지마의 통신시설과 하하지마의 오끼무라 마을도 폭격했다.
헬캣 1대가 대공포에 피탄되었으나 조종사는 치치지마 남쪽 70km 해상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나중에 구축함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공격대가 물러가자 K.D.Smith 중위의 헬캣 1대가 방해작전을 시작했다.
스미스 중위는 오무라 마을에 로켓탄 공격을 가하고 슈사끼 비행장과 수상기 기지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2시간에 걸친 방해작전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스미스 중위는 그때 마침 슈사끼 비행장에 착륙하려고 북쪽에서부터 진입하던 1대의 헬렌 폭격기를 발견하고 격추했다.
이틀후인 26일 새벽 5시 10분에는 4대의 헬캣과 6대의 아벤저로 이루어진 공격대가 새벽공격을 위하여 엔터프라이즈를 출격했다.
이들은 슈사끼 비행장을 주표적으로 삼아서 폭탄을 투하하고 로켓탄을 발사하며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또한 후타미 항을 공격하여 수송선 3척에 로켓탄 공격과 기총소사를 가하여 피해를 입히고, 석유탱크에 로켓탄 6발을 명중시켜 엄청난 폭발과 함께 날려버렸다.
이 과정에서 James Moore 대위의 아벤저가 대공포화에 맞았으나 무어 대위와 2명의 승무원들은 치치지마의 북쪽해상에서 무사히 탈출에 성공하여 구명보트에 타고 구조를 기다렸다.
즉시 제58.5전단에서 DD-802 Gregory 가 북상하여 치치지마의 북쪽 해안에서 3,000m 떨어진 해상까지 다가가서 일본군의 해안포를 무릅쓰고 수색을 실시, 오후 2시 2분에 3명 전원을 무사히 구조했다.
치치지마에 대한 공습은 슈사끼 비행장과 후타미의 수상기 기지와 정박한 선박을 주목표로 하여 거의 매일같이 실시되었다.
3월 2일,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심한 폭우로 인하여 연속적인 항공작전을 중단할 때까지 엔터프라이즈는 174시간 동안 406 소티의 출격을 기록했다.
이 기간 동안 치치지마, 하하지마, 이모또지마 및 아니지마에 지속적인 공습을 가하여 45kg 짜리 폭탄 261발, 3.5인치 로켓탄 194발, HVAR 94발, 그리고 수만발의 12.7mm 기총탄을 퍼부어서 치치지마의 슈사끼 비행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오지마 작전에서 엔터프라이즈는 소규모의 공격대를 지속적으로 내보내어 적의 비행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이 방식이 대규모의 공격대를 동원하여 일시적으로 비행장 기능을 마비시키는 것보다 더 경제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3월 3일에 날이 좋아지자 엔터프라이즈는 다시 24시간 항공작전을 개시했다.
3월4일에는 최초의 B-29가 이오지마의 제1번 비행장에 비상착륙했고, 6일에는 육군제7항공대의 P-51 기들이 이오지마의 비행장에서 작전을 시작하여 엔터프라이즈는 이오지마에 대한 CAP 임무에서 풀려났다.
주야간 CAP 임무의 큰 부담에서 벗어난 엔터프라이즈는 치치지마 공격에 주력하여 매일 오후와 새벽에 지속적으로 치치지마를 공습했다.
3월9일 오후 9시 20분, 치치지마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마치고 돌아온 공격대가 착함하자 엔터프라이즈는 울리시 환초를 향하여 20노트의 속력으로 남진하기 시작했다.
이오지마 전투는 그 후에도 한참을 더 끌어서 3월 15일에야 섬을 점령했다는 선언이 나왔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일본군의 저항이 종식된 것은 수비대장 구리바야시 중장이 할복자살하고,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던 300명 수준의 일본군 잔여병력이 이오지마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만세돌격을 감행한 끝에 완전히 전멸한 3월 26일에 이르러서였다.
23,000 여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던 이오지마의 일본군 수비대는 1,033명의 포로를 제외하고, 22,000 여명이 전사했다.
해병대의 피해도 극심하여 최종적으로 6821명이 전사했다.
하지만 이오지마가 미군 손에 들어옴으로써 종전때까지 2,400 여대의 B-29 기들이 이 섬에 불시착하여 27,000 여명의 승무원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사실 이오지마를 점령하기 전까지 B-29 승무원 손실의 2/3 이상이 귀환 중에 해상에 불시착하여 실종된 인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적어도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작전에서 이오지마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엔터프라이즈는 이오지마 작전 기간 중에 1대의 아벤저가 아군 대공포의 오인사격으로 격추당하여 3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이오지마를 떠난 엔터프라이즈는 3월 12일 오전 7시에 울리시 환초에 입항했다.
제58기동부대의 다른 항공모함들은 3월 4일까지 입항을 완료했기 때문에 최소한 1주일 이상의 휴식기간이 있었으나 1주일 늦게 입항한 엔터프라이즈의 기진맥진한 승무원들에게는 휴식시간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울리시에 입항한지 채 48시간도 지나지 않은 1945년 3월14일 오전 6시 10분에 엔터프라이즈는 항공모함 요크타운, 인트레피드와 함께 제58.4전단을 형성하여 울리시를 출항했다.
태평양전쟁 최후의 대규모 작전인 오끼나와 상륙작전이 임박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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