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0월 14일, 핼시 제독은 플레처 제독의 뒤를 이어 남태평양 해역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브라우닝 대령을 위시한 참모들과 함께 진주만을 떠났다.

10월 15일 오후, 니미츠 제독이 남태평양해역군사령부 시찰에 동행했던 참모들을 모아서 회의를 열어서,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곰리 중장의 해임을 결정했다.
문제는 후임 인선이었는데 후보가 될만한 사람은 남태평양해역군의 해상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켈리 터너 소장과 핼시 중장이었다.

터너 소장은 ‘무시무시한 터너(Terrible Turner)’ 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곰리 제독의 문제점인 패배주의와 우유부단함 등과는 거리가 먼 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그에게는 아직도 사보해전 참패의 그림자가 따라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어느 한 사람의 잘못으로 보기 어렵다는 잠정적인 결론이 내려진 상태라고는 해도 미해군 사상 최악의 참패인 사보해전으로부터 불과 2달 정도 지난 시점에서 사보해전 당시 현장지휘관이었던 터너 소장을 중장으로 승진시켜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을 맡긴다는 것은 대외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따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터너 소장은 과달카날의 제1해병사단이 헨더슨 비행장을 중심으로 하는 좁은 방어진지에서 벗어나 과달카날 섬의 전체 해안선을 따라 동시다발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충분한 병력 증강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헨더슨 비행장의 확보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제1해병사단장 밴디그리프트 소장과 심각한 마찰을 빚고 있었다.
따라서 헨더슨 비행장의 확보 여부가 과달카날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관건이며 일본군을 압도할만한 충분한 전력증강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헨더슨 비행장의 안전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는 병력의 분산을 절대로 피해야 한다는 밴디그리프트 소장의 의견에 완전히 공감하는 니미츠 제독이 자신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터너 제독을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자리에 앉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핼시 제독밖에 없는데 그는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사령관으로써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일 뿐만 아니라 관리면의 경험이 거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의 경력이나 성향으로 볼 때 기본적으로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일에 속하는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으로서는 부적격한 인물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결국 15일의 회의에서는 곰리 중장의 후임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회의를 마쳤는데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일부 참모들이 밤에 사령관저에 찾아와 니미츠 제독에게 핼시 제독이 곰리 중장의 후임으로 적격이라고 주장했다.
안 그래도 곰리 중장의 후임으로 핼시 제독에게 마음이 기울어있던 니미츠 제독은 16일 새벽에 결단을 내려서 곰리 중장의 후임으로 핼시 제독을 결정하고 즉시 워싱턴의 킹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동의를 받았다.

핼시 제독은남태평양 지역의 항공모함 기동부대 사령관으로 취임하기 전에 과달카날의 상황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아두려고 과달카날로 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예정되었던 과달카날 시찰을 취소하고, 즉시 누메아에 있는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로 직행하라는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긴급명령이 떨어졌다.
이 명령에 따라 급히 행선지를 바꾼 핼시 제독이 누메아에 도착한 10월 18일, 니미츠 제독은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곰리 중장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핼시 제독을 임명했다.
적극적인 성격의 핼시 제독이 소극적인 곰리 중장의 뒤를 이어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 되었다는 소식은 과달카날을 포함한 전 남태평양해역군의 장병들을 열광시켰다.
핼시 제독은 남태평양해역군사령관이 되자마자 밴디그리프트 소장에게 무전을 쳐서 상황이 허락하는 한 빨리 누메아에 와서 과달카날의 상황을 설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10월 23일에 누메아에서 열린 회의에서 밴디그리프트 소장에게서 과달카날의 상황에 대하여 보고를 들은 핼시 제독은 밴디그리프트 소장에게 과달카날을 지킬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밴디그리프트 소장이 지킬 수는 있지만 지금보다 훨씬 많은 지원이 요구된다고 대답하자 핼시 제독은 말했다.

“그곳으로 돌아가시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지원해 주겠소.”

그리고, 핼시 제독은 그 약속을 지켰다.

1942년 10월 16일,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가 남태평양을 향하여 진주만을 떠났다.
고속전함인 BB-57 South Dakota 를 비롯하여 중순양함 포틀랜드, 대공경순양함 산 후앙, 그리고 8척의 구축함이 엔터프라이즈를 호위하고 있었다.
해체된 엔터프라이즈 항공단 대신 제10항공단이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 세력을 형성했다.

10월 17일, 과달카날의 일본군에게 치명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이틀 전에 칵터스 항공대의 맹폭으로 수송선 3척이 침몰당하면서까지 겨우 양륙해놓은 대량의 보급품을 미처 정글로 옮기기도 전에 미구축함 Aaron Ward와 McCulloch 가 호넷의 함재기와 함께 기습했다.
애런 워드와 맥컬러는 해안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일본군의 보급품에 5인치 소이탄 2,000 여 발을 쏘아대어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혼비백산한 일본군이 겨우 불을 껐을 때 포탄은 6,000 여발, 그리고 식량은 2주일치 밖에 남지 않았다.
원래 일본군은 충분한 포병의 화력지원 하에 교두보의 서쪽에서 헨더슨 비행장에 이르는 단일 축선상에 공격력을 집중하여 해병대의 방어망을 정면으로 돌파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포탄의 부족으로 인하여 일본군은 원래 예정했던 정면공격을 단념하고, 주공과 조공을 분리하여 조공이 교두보의 서쪽에서 공격을 가하여 해병대의 주의를 끄는 동안 주공이 교두보의 남쪽으로부터 헨더슨 비행장에 돌입하는 작전으로 바꾸어야 했다.

따라서 주공부대가 정글을 헤치고 공격지점까지 나아가는 것이 늦어져서 애당초 10월 21일로 예정했던 공격날짜가 계속 연기되었다.

제17군 포병사령관 스미요시 다다시 소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조공은 10월 20일부터 마타니코 강의 미군 방어선에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2,900 여명의 보병과 소규모의 전차부대, 포병대 등으로 이루어진 스미요시 부대는 10월 23일에 총공격을 실시했으나 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고 24일에 살아남은 병력들을 규합하여 재차 공격했으나 이 역시 간단하게 격퇴되었다.
일본군은 이 마타니코 강 하구에 대한 공격에서 전차 10 여대를 상실하고 600 여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5,600 여명의 보병과 포병, 공병으로 이루어진 일본군의 주공은 정글을 돌파하는 동안 진격이 늦어져서 10월 25일 새벽에야 공격을 시작했는데, 도보로 정글을 돌파하는 도중에 화포 등 중장비를 모두 망실했다.

게다가 공격 직전에 현지 지휘관인 야마구찌 소장을 해임하는 등 작전 수행에 혼란을 빚어 공격의 집중성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25일과 26일에 걸친 일본군 주공의 공격도 2,500 여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실패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10월 25일 새벽의 공격 도중에 일본군이 헨더슨 비행장을 점령했다는 잘못된 보고가 올라가서 라바울의 제17군 사령부와 트럭 섬의 연합함대 사령부는 물론 도꾜의 대본영까지 환호성을 올리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10월 29일, 햐꾸다께 중장이 헨더슨 비행장 부근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결국 일본군의 제3차 공격은 3,100 여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실패했다.
가와구찌 지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정글 속을 지나 퇴각하면서 부상과 기아, 말라리아로 인하여 수많은 병력을 추가로 상실했다.
라바울의 제11항공함대도 10월 동안에만 100 여대의 항공기를 상실했다.
미군은  이 기간 동안 90 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한편 트럭 섬에 있던 일본연합함대는 제17군의 비행장 공격과 호응하여 과달카날 해역에 진출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지원하고 이를 저지하러 나올 미국의 항공모함 기동부대와 사상 4번째의 함대항공전을 벌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구모 제독의 제3함대와 곤도 제독의 제2함대를 과달카날 북방해상으로 파견했다.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핼시 제독도 16일에 진주만을 떠나 남태평양에 막 도착한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와 남태평양에서 활동하던 호넷 중심의 제17기동부대에게 과달카날의 동북방 해상인 산타크루즈 제도 부근으로 나아가서 일본함대를 요격하도록 했다.

 

1942년 10월 21일, 엔터프라이즈의 제4대 함장이었던 아더 데이비스 대령이 소장으로 승진, 제5항공모함 전단(호위항공모함) 사령관이 되어 대서양으로 영전해 가고, 제5대 함장으로 Osborne B. Hardison 대령이 취임했다. 

 

(엔터프라이즈의 제5대 함장 오스본 하디슨 대령. 재임기간 : 1942.10.21 - 1943.4.7)

 

10월 24일, 제16기동부대와 제17기동부대는  과달카날 북쪽 1,600km 지점에서 만나서 제16기동부대 사령관인 킨케이드 소장의 지휘 하에 제61기동부대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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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솔로몬 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엔터프라이즈는 우선 통가에 들러 탄약을 내려놓고 급유를 받은 다음 진주만을 향하여 출발했다.
중순양함 포틀랜드와 4척의 구축함이 엔터프라이즈를 호위했다.  
엔터프라이즈 비행전대는 해체되어 자위를 위한 와일드 캣 6대와 돈틀레스 6대를 제외한 함재기들은 와스프와 호넷, 그리고 뉴헤브리디즈 제도와 헨더슨 비행장에 분산배치되었다.  
1942년 9월10일, 엔터프라이즈가 진주만에 도착하여 즉각 24시간 내내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갔다.  
엔터프라이즈는 구형의 1.1인치 대공포 4개 포대를 보다 신형인 4연장 40mm Bofos 대공포로 교체하고, 20mm 대공포도 대폭 증설했다.  

엔터프라이즈가 진주만에서 수리를 받고 있는 중에도 과달카날을 둘러싼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가 아직 통가에 있을 때인 1942년 8월 31일, 일본잠수함 I-26 호가 과달카날 동남쪽인 산크리스토발 앞바다에서 새러토가의 우현에 1발의 어뢰를 명중시켰다.  
비록 새러토가에서는 1명의 사망자도 없었고, 격실 하나가 침수된 것 뿐이었지만 이 어뢰는 1월 11일에도 뇌격을 받아 망가졌던 새러토가의 취약한 전기추진기관(turbo-electric propulsion)을 다시 망가뜨려 버렸다.   
결국 새러토가도 함재기들을 헨더슨 비행장을 비롯한 주변 기지에 날려보내고, 통가에 잠시 들렀다가 9월 21일에 엔터프라이즈를 뒤따라 진주만에 입항하여 수리에 들어갔다.  
이때 경상을 입었던 플레처 중장도 미본토에 휴가를 가는 형식으로 전투임무에서 물러났다.
그리하여 남태평양의 항공모함들은 제16기동부대 사령관이었던 킨캐이드 소장이 임시로 지휘하게 되었다.

헨더슨 비행장의 완성 이후 과달카날의 항공기 세력은 차츰 증강되기 시작했다.

1942년 8월20일 활주로의 완성과 동시에 도착한 제223해병전투비행대대와 제232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에 더하여 8월 30일에는 제224해병전투비행대대와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가 도착했다.

다음날인 8월 31일에는 어뢰에 피격당한 새러토가로부터 와일드캣 20대와 돈틀레스 9대가 도착했고, 다시 에파테 기지에 있던 제212해병전투비행대대까지 가세했다.
육군항공대 소속의 P-400 기 5대도 들어와 있었다.  
9월3일에는 해병대 제1비행단장인 Roy geiger 해병준장이 과달카날에 도착하여 소속 군을 가리지 않고 헨더슨 비행장을 기지로 삼아 활동하는 모든 항공기에 대한 지휘권을 장악함으로써 일명 칵터스 비행단라고 부르는 과달카날 비행단의 명령계통이 정식으로 확립되었다.   

한편 일본군은 동부솔로몬 해전 이후에도 과달카날로 일본군 제124연대를 주축으로 하는 가와구찌 소장의 제35여단과 제28연대의 제2진을 과달카날에 상륙시키기 위하여 계속 시도했다.  
그리하여 8월 28일에 제35여단을 수송하던 구축함 아사기리가 침몰되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8월29일 자정에 제35여단의 1개 대대를 포함하여 1,000 여명의 육군병력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했다.  
제35여단의 주력은 8월31일에 가와구찌 소장을 비롯한 1,200 명이 8척의 구축함에 분승하여 타이부 곶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타심보코 해안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9월초에 날씨가 나쁜 시기를 이용하여 하루에 수백명씩 구축함과 바지선을 이용하여 상륙했다.   
제65여단의 병력 중 보병 제124연대장 오까 아끼노스께 대좌가 지휘하는 1개 대대는 산타이사벨 섬에서 60척의 주정에 나누어타고 남하하다가 칵터스 비행단의 P400기(P-39의 수출형)편대의 공습을 받아 350명을 상실하고 650명이 9월 10일에 해병대 교두보 서쪽의 카밈보 해안에 상륙했다.  
그리하여 9월 10일경에는 가와구찌 지대(제35여단 + 제28연대 제2진)이 6,000 여명이 상륙을 마쳤고, 기존에 있던 병력과 합쳐서 과달카날의 일본군 병력은 약 8,000 명이 되었으나 상대방인 미해병대의 병력은 과달카날 섬에만 11,000 명이었다.  

미해병대는 교두보의 동쪽에 대규모의 일분군이 상륙했다는 원주민 정찰대원의 보고에 따라 에드슨 대령의 기습대대를 9월8일에 타심보코로 파견했는데, 이틀 전인 9월6일에 가와구찌 여단의 주력은 이미 남쪽의 정글지대로 떠난 후였다.
기습대대는 타심보코를 지키고 있던 소규모의 일본수비대를 제압한 다음 그곳에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50만발의 탄약과 식량, 의약품등을 모두 불태우고 지도와 서류들을 가지고 그날 저녁에 교두보로 돌아왔다.
이 지도와 서류들을 검토한 미해병대는 대규모의 일본군이 남쪽으로부터 헨더슨 비행장을 탈취하러 공격할 예정임을 알았다.  
이에 따라 해병대는 에드슨 대대를 주력으로 하는 정예병력을 비행장의 남쪽에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남쪽의 방어선을 강화했다.   

 

가와구찌 지대는 미해병대의 예상대로 9월 12일 밤부터 14일 새벽에 걸쳐 남쪽으로부터 공격해 왔다.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 라고 불리는 몹시도 처절했던 이 전투에서 가와구찌 지대는 장교 28명을 포함하여 633명의 전사자를 기록하면서 공격에 실패했다.
정글로 후퇴한 가와구찌 지대는 부상을 입거나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식량과 의약품도 없이 집결장소를 향하여 1주일씩 정글 속을 행군하는 도중에 주로 말라리아로 인하여 전사자보다 더 많은 병력을 상실했다.   
이 전투에서 미해병대는 59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1942년 9월 15일,일본잠수함 I-19호가 대박을 터뜨렸다.
기나시 다까이찌 소좌가 지휘하던 이 잠수함은 에파테에서 과달카날로 제7해병연대와 보급품들을 가득 실은 수송선단을 호위하던 항모 호넷과 와스프를 발견했다.
와스프의 좌현 900m 전방까지 접근한 I-19호는 와스프와 나란히 항진하고 있던 BB-55 North Carolina 가 겹치는 각도로 어뢰 6발을 발사했다.
이중 3발이 와스프의 좌현에 명중했는데 1발은 유류탱크에, 또 1발은 탄약고에 명중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와스프는 그때 막 함재기를 발진시킨 직후라 항공유파이프에는 휘발성이 높은 항공유가 가득 들어있었다.
순식간에 화재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면서 함은 좌현으로 크게 기울었다.
어뢰에 맞은지 1시간도 채 안되어 와스프의 함장 셔먼 대령은 함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와스프는 동료구축함 Lansdowne 의 어뢰 3발을 맞고 침몰했다.
와스프의 승무원 2,250 명중 200 명이 전사했다.

와스프와 나란히 달리던 고속전함 노스캐롤라이나에도 어뢰 1발이 명중하여 전방 좌현 수선하 6m 지점에 직경 1.8m 짜리 구멍이 뻥 뚫렸다.

그러나, 원래 수선하방어력이 강화된 신형전함인 데다가 손상관리반이 기민하게 대처하여, 곧 시속 25노트로 항진할 수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도 수리를 위하여 진주만으로 향했다.
구축함 O'Brien 도 선수에 어뢰를 1발 맞았는데 회항하던 도중에 침몰했다.

호위하던 구축함들이 I-19 에 몰려들어 폭뢰를 투하했으나 격침하는데 실패했고, 수면에 떠있던 와스프의 승무원들만 희생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잠수함이 단 한번의 어뢰발사로 정규항공모함 1척, 구축함 1척을 격침하고, 전함 1척을 대파한 경우는 해전사상 유일한 기록이었다.

야마구찌 지대의 공격이 실패한 이후 라바울의 제17군 사령부에서는 도꾜의 대본영에 과달카날을  포기하자는 의사를 슬쩍 타진해 보았으나, 전보를 보냈던 후다미 아끼사부로 소장의 모가지만 날아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제17군사령관 햐꾸다께 중장은 뉴기니아에 중점을 두던 종래의 방침을 바꾸어 과달카날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햐꾸다께 중장은 대본영을 움직여서 자바에 있던 제16군 휘하의 제2사단과 제38사단을 과달카날에 파견하도록 만들었다.
도꾜의 대본영에서는 제2사단과 제38사단을 합친 3만명 이상의 병력과 80문 이상의 야포를 동원하여 과달카날의 미해병대를 단번에 제압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햐꾸다께 중장은 7,000 - 8,000 명선으로 추정하고 있던 미해병대를 제압하는 데에는 제2사단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제38사단은 1개 연대만 과달카날로 데려가기로 했다.

제38사단의 주력은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 다음 뉴기니아 작전에 활용하려고 라바울에 잔류시켰다.
햐꾸다께 중장은 총공격 예정일을 1942년 10월 20일로 잡았다.  

한편 니미츠 제독은 1942년 9월25일에 진주만을 떠나 남태평양해역에 대한 시찰에 나섰다.
니미츠 제독은 9월 7일에서 9일까지 샌프란시스코의 페더럴 호텔에서 열린 킹 제독과의 회담을 마치고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핼시 제독과 함께 진주만으로 돌아왔었는데, 9월 20일에 미육군항공대 사령관인 아놀드 장군이 진주만을 방문했다.
방금 남태평양을 다녀온 진주만의 육군항공대사령관인 에몬스 장군이 니미츠 제독과 함께 그를 맞았는데 그 자리에서 에몬스 장군은 아놀드 장군에게 해병대가 과달카날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병대가 과달카날을 지킬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니미츠 제독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아 남태평양의 상황을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위하여 참모들을 대동하고 시찰여행에 나선 것이었다.
여기에는 아놀드 장군도 동행했다.

니미츠 제독은 남태평양으로 가던 도중에 칸톤 섬에서 남태평양해역군항공사령관이었던 맥케인 제독을 만났다.
킹이 총애하는 몇 안되는 제독 중의 한 사람인 맥케인 제독은 킹 제독의 부름을 받아 남태평양해역군항공사령관 자리를 진주만의 항공사령관이었던 피치 소장에게 물려주고, 해군본부의 항공국장이 되어 워싱턴으로 부임해 가는 도중이었다.
맥케인 제독은 과달카날에 시찰을 갔다가 하필이면 그날 저녁에 일본군들이 공격해오는 바람에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 기간 중이던 9월12일과 13일을 과달카날에서 지냈다.

그는 니미츠 제독에게 해병대가 과달카날을 분명히 지켜낼 수 있으나, 그러려면 더 많은 병력과 특히 매일 폭격을 가해오는 일본기들을 물리칠 전투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9월28일에 누메아에 도착한 니미츠 제독은 곧 곰리 중장과 회의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는 맥아더 장군의 남서태평양해역군에서 온 서덜랜드 소장과 니미츠 제독과 동행했던 미육군항공대 사령관인 아놀드 장군도  참가했다.
이 회의에서 니미츠 제독은 과달카날을 지킬 수 없다고 확신하는 듯한 곰리 제독과 그 참모들의 비관적이고 소극적인 태도에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다.

회의 도중 아놀드 장군이 남태평양해역군에는 아직도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있는 예비항공기가 많다고 비판하면서 이런 예비항공기들이 전투에 투입되기 전까지는 더 이상 남태평양 지역에 육군항공기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니미츠 제독의 불쾌감은 극에 달했다.

다음날 에스피리투산토를 시찰한 니미츠 제독은 30일에는 B-17을 타고 과달카날을 시찰했다.
그곳에서 니미츠 제독은 밴디그래프트 소장을 비롯한 해병대의 모든 장병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과달카날을 꼭 지키겠다는 굳은 각오를 가지고 있고 또한 반드시 지킬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는 것을 보고는 큰 감명을 받았다.
누메아에 돌아온 니미츠 제독은 곰리 중장에게 누메아를 방어하는 육군부대 중에서 1개 연대를 빼내어 즉시 과달카날로 파견하라고 명령했다.
진주만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니미츠 제독은 비관론자인 곰리 중장을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자리에 앉혀놓은 채로 과달카날 전투를 이기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한편 일본제17군사령관 햐꾸다께 중장의 작전계획에 따라 일본군은 부지런히 도꾜 익스프레스를 왕복시켜 9월말부터 병력과 장비를 속속 과달카날에 양륙하기 시작했다.
10월 3일에는 제2사단장 마루야마 중장의 사령부가 교두보 서쪽의 타사파롱가에 상륙하였고, 10월 9일에는 공격을 직접 지휘하기 위하여 제17군사령관 햐꾸다께 중장이 상륙했다.

한편 일본군이 150mm 야포를 상륙시켰다는 정보를 접한 해병제1사단은 교두보의 서쪽을 흐르는 마타니코 강 서안에 주둔하여 헨더슨 비행장을 위협하던 일본육군제4연대를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10월7일 오전 7시부터 제5 및 제7해병연대가 마타니코 강을 건너 공격을 시작했다.
10월9일까지 계속된 미해병대의 공격으로 일본육군제4연대는 700 명이 전사하고, 보유하고 있던 150mm 야포도 몽땅 파괴당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서쪽으로 밀려났다.
미해병대는 이 공격에서 65명이 전사했다.  

10월 9일, 니미츠 제독의 명령에 따라 미육군 아메리칼 사단의 제164연대가 누메아를 떠났다.
당시로서는 최신무기였던 M1 개런드 반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3,000 명 규모의 제164연대는 항모 호넷과 고속전함 BB-56 Washington 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전방에서 Norman Scott 소장이 지휘하는 제64기동부대가 수송선단의 항로를 보호하고, 도꾜 익스프레스를 저지하기 위하여 과달카날 서방해상을 경계했다.
제64기동부대는 중순양함 2척(샌프란시스코, 솔트레이크시티), 경순양함 2척(보이스, 헬레나) 그리고 구축함 5척을 보유했다.

10월 11일 밤, 고또 아리또모 제독이 지휘하는 함대가 병력과 장비를 수송하는 수상기모함 지또세와 닛싱을 호위하고,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기 위하여 슬롯을 따라 남하했다.
중순양함 3척(아오바, 기누가사, 후루다까)과 구축함 2척으로 편성된 고또 제독의 함대는 오후 11시 46분, 에스퍼란스 곶 부근에서 레이더로 이들의 접근을 미리 알고있던 제64기동부대에게 기습을 당했다.
후일 에스퍼란스 해전으로 알려진 34분간의 이 일방적인 전투에서 열세한 세력에다가 불리한 진형으로, 게다가 불의의 선제일격을 얻어맞은 일본함대는 제64기동부대가 발사한 초탄에 기함인 아오바가 대파되면서 사령관인 고또 제독이 전사하는 등 순식간에 전멸의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전투 초반 스코트 제독의 판단착오 덕분에 가까스로 전멸은 면했다.
일본함대는 사령관이 전사하고, 중순양함 후루다까와 구축함 후부끼가 격침되었으며, 기함이던 중순양함 아오바가 대파되는 참패를 당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 북쪽으로 황망히 도주했다.
제64기동부대는 구축함 덩컨이 침몰하고, 경순양함 보이스가 대파되었다.
다만 일본군의 병력과 150mm 야포 등의 중화기를 싣고 왔던 수상기모함 지또세와 닛싱은 과달카날에 무사히 도착하여 양륙에 성공하였는데, 양륙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칵터스 비행단의 공격을 받아 호위하던 구축함 무라구모와 나쓰구모가 격침되었다.

 

10월 13일에는 미육군 제164연대가 과달카날에 무사히 상륙했다.
이로써 과달카날 부근의 미군병력은 총 28,000 여명이 되었고, 과달카날 섬에만 23,000 여명이 주둔하게 되었다.
게다가 수송선단이 제164연대와 함께 싣고 온 식량을 비롯한 대량의 보급품으로 인하여 미군의 보급상태가 크게 개선되어 전투력이 더욱 높아졌다.

10월 14일 새벽 1시에 6척의 구축함을 거느린 일본전함 공고와 하루나가 아이언바텀사운드에 들어와서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했다.
80분간 지속된 이 포격에서 각 8문씩의 14인치 주포를 장비한 2척의 일본전함은 강력한 소이유산탄인 14인치 삼식탄 918발을 발사하여 비행장을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차근차근 조직적으로 파괴했다.
전함의 포격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순식간에 기지에 저장 중이던 항공유와 탄약에 불이 붙어 화염이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고, 90 여대에 달하는 항공기 중 42 대만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활주로에는 달표면처럼 구멍이 숭숭 뚫렸고, 해병대원 41명이 전사했다.
해병대의 지상포대는 포격이 지속되는 동안 탐조등으로 일본함대를 찾으며 대응사격을 가했으나 효과가 없었고, 툴라기에서 출격한 미군 어뢰정 4척이 일본구축함들의 호위를 뚫고 용감하게 육박하여 어뢰를 발사했으나 1발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공고급 전함 공고. 표준배수량 : 31,720톤, 길이 : 222m, 폭 : 31m, 속력 : 30노트, 항속거리 : 14노트로 19,000km, 승무원 : 1,360명, 무장 : 14인치 주포 8문, 155mm 부포 16문, 5인치 양용포 8문, 25mm 대공포 118문)

 

14일 아침이 밝아오자 이번에는 코컴보나에서 일본군들이 지난 11일 밤에 새로 양륙한 150mm 포로 헨더슨 비행장에 포격을 가해왔고 곧이어 일본폭격기들이 대규모로 몰려와 폭격을 가했다.

10월 15일 새벽 2시에는 중순양함 죠까이와 기누가사가 다시 아이언바텀사운드에 들어와 8인치 주포로 포격을 가했다.
중순양함의 8인치 주포사격은 전날에 있었던 전함의 14인치 주포사격보다는 위력이 덜했지만 이번에도 헨더슨 비행장은 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함의 포격으로 인하여 안 그래도 달랑거리던 항공유의 재고가 거의 바닥으로 떨어졌고, 전함의 포격에서 겨우 살아남았던 항공기들이 뒤이은 150mm 포의 포격과 폭격기의 폭격, 이어진 일본순양함의 포격에 의하여 만 하루만에 돈틀레스 1대만 남기고 다 파괴되었다.

일본군은 이제 헨더슨 비행장이 무력화되었다고 판단하고, 6척의 수송선을 보내어 코컴보나 부근 해안에서 15일 새벽 2시부터  병력 4,000 명과 야포, 탱크, 탄약, 식량 등의 양륙을 시작했다.
그런데 날이 밝자 홀연히 헨더슨  비행장에서 1대의 돈틀레스가 날아와서 수송선 사사고 마루에 폭탄을 명중시켜 격침했다.
Patterson 중위가 조종하던 이 돈틀레스는 그날 아침 칵터스 비행단에서 출격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체였다.
곧이어 15일 아침에 에스피리투산토에서 급히 증원된 돈틀레스 7대가 날아와 수송선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맥케인 제독의 뒤를 이어 남태평양해역군항공사령관이 된 피치 제독은 칵터스 비행단을 강화하는데 대단히 적극적이어서, 여건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많은 항공기들을 헨더슨 비행장으로 보냈다.

헨더슨 비행장에서는 항공 정비병들이 파괴된 비행기들에게서 여러가지 부품을 빼내어 좀 덜 망가진 비행기의 부품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항공기 몇 대를 '재생' 했다.
또한 하역할 때 바빠서 기지 안 아무데나 쌓아두었던 항공유들을 온 기지를 샅샅이 뒤져서 400 드럼이나 찾아내고, 파괴된 항공기에 들어있던 항공유까지 몽땅 빼내어 사용했다.
이러한 항공 정비병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힘입어 그날 칵터스 비행단의 항공기들은 1대당 평균 7번씩 출격할 수 있었다.
그들은 15일 하루종일 일본수송선들을 반복적으로 공격하여 사사고 마루에 이어 아즈마산 마루와 규슈 마루를 추가로 격침했다.
칵터스 비행단의 치열한 공습에도 불구하고 일본수송선들은 4,000 명의 병력과 탱크 등은 거의 손상없이 양륙했으나, 야포는 80문 중 50문을 상실하여 30문만 양륙하는데 성공했고, 탄약과 식량도 20% 정도 상실했다.
그날밤, 일본의 중순양함 마야와 묘꼬가 다시 아이언바텀사운드에 들어와 헨더슨 비행장을 향하여 8인치 포탄 1,500 발을 쏟아부었다.
과달카날의 상황은 이제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하고 혼란스런 양상으로 치달았다.

과달카날의 해병대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한 니미츠 제독은 엔터프라이즈의 수리를 서둘러 마치도록 하고, 9월 16일에 암초에 부딪혀서 엔터프라이즈와 나란히 수리를 받고 있던 고속전함 BB-57 South Dakota 와 함께 남태평양으로 가도록 명령했다.
1942년 10월 16일,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는 남태평양을 향하여 진주만을 출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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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8월 24일 새벽 2시, 일본제3함대의 제7전대장인 하라 쥬이찌 소장이 나구모 중장의 명에 따라 경항공모함 류조, 중순양함 도네, 구축함 2척으로 이루어진 견제부대를 형성하여 공격부대 전방으로 나섰다.
견제부대의 임무는 곤도 제독의 호위부대 전방 100km 지점까지 나아가서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한 다음 다나까 제독의 침공부대를 엄호하는 것이었다.

24일 아침에 새러토가가 헨더슨 비행장에서 돌아온 자신의 공격대를 받아들이는 동안 엔터프라이즈에서는 23대의 돈틀레스들을 북방으로 날려보내어 320km 지역을 수색하였으나 일본함대를 찾는데 실패했다.
24일 오전 10시, 산타크루즈 섬을 출발한 카탈리나 기가 엔터프라이즈의 북서쪽 320km 지점에서 류조 중심의 견제부대를 발견했다.
예상보다 빨리 일본함대와 조우한 플레처 제독은 어제 급유를 위하여 와스프 중심의  제18기동부대를 남하시킨 결정을 후회했으나 물러서지 않고 2척의 항공모함만을 가지고 일본함대와 대결하기로 결심했다.

한편 류조는 작전계획에 따라 오전 11시에 전체 함재기의 70%에 해당하는 15대의 제로기와 6대의 케이트 뇌격기를 발진시켜서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했다.

플레처 제독은 류조가 발견된 이후 계속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적의 항공모함이 발견된 이상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는 적에게 최소한 1척 이상의 항공모함이 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류조에 공격력을 집중하다가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일본항모에게 기습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제16기동부대사령관 킨캐이드 소장에게 명령을 내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일본항공모함을 찾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오후 1시 15분, 16대의 돈틀레스와 7대의 아벤저가 450km 전방까지 정찰할 임무를 띄고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을 떠났다.

30분 후인 오후 1시 45분, 플레처 제독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돈틀레스 30대와 아벤저 8대로 이루어진 새러토가의 공격대가 비행단장 Harry D. Felt 소령의 인솔 하에 류조를 노리고 출격했다.

새러토가의 공격대는 오후 3시 36분에 류조를 발견하고 공격에 들어갔다.
류조에 남아있던 9대의 제로기가 기를 쓰고 이들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류조의 함장 타데오 가또 대령은 교묘한 조함 실력을 발휘하여 처음 몇 발의 폭탄은 무사히 피했다.

그러나, 새러토가 비행단장 펠트 소령이 투하한 폭탄이 명중한 것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4발의 450kg 짜리 대형폭탄이 명중했다.
게다가 신형 아벤저 뇌격기 8대가 2개 편대로 나뉘어서 류조의 양쪽에서 동시에 어뢰를 발사, 그중의 한발을 방어가 취약한 수선하구역에 명중시켰다.
전투 개시 10분만에 450kg 짜리 대형폭탄 4개와 어뢰1발에 명중당한 류조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면서 모든 기능을 상실했고, 그날 오후 8시경, 과달카날 북방 320km 해역에서 침몰했다.
새러토가의 공격대는 이 전투에서 단 한대도 상실하지 않고 전원 무사히 귀환했다.

펠트 소령의 공격대가 새러토가의 갑판을 떠난 지 45분 후인 오후 2시 30분, 치꾸마에서 발진한 일본의 수상정찰기가 엔터프라이즈를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거리까지 침투했다가 CAP 세력에 의하여 격추되었다.
그와 동시에 미국의 카탈리나 기도 미국함대의 북쪽 320km 지점에서 일본항공모함 쇼가꾸와 즈이가꾸를 발견했다.
이미 류조 공격을 위하여 새러토가의 공격대를 모두 내보낸 플레처 제독은 류조를 공격하러 간 2개의 돈틀레스 비행대대 중 하나를 새로 발견된 쇼가꾸와 즈이가꾸에게 보내려고 연락을 취했으나 통신불량으로 실패했다.

한편 미국함대의 위치를 알아낸 나구모 제독은 오후 2시 55분에 쇼가꾸에서 발 급강하폭격기 27대와 제로기 10대로 구성된 제1차 공격대를, 오후 3시에는 즈이가꾸에서 발 급강하폭격기 27대와 제로기 9대로 구성된 제2차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24일 오후 4시 32분,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가 거리 160km 방위 320도에서 일본기의 편대를 포착했다.
당시 제11기동부대와 제16기동부대는 서로 15km 정도의 사이를 두고 각각 지름 3km 정도의 대공원형진을 구성하고 있었다.
동부솔로몬 해전은 함대의 상공에 침투하는 적기의 위협을 각 함의 개별적인 회피운동을 통하여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함대 전체의 진형을 유지하면서 대공포화를 집중하여 사전에 격추시켜 버린다는 보다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개념의 대공원형진을 미해군이 처음으로 실전에서 적용한 해전이다.

즉각 항공모함에 남아있던 와일드캣들이 발진하기 시작했고, 엔터프라이즈에 남아있던 11대의 돈틀레스와 6대의 아벤저도 일본함대를 향하여 모두 출격했다.
이 공격대는 대부분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고 돈틀레스 2대만이 쇼가꾸에 폭격을 가했으나 지근탄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이때 새러토가에서도 남아있던 돈틀레스 2대와 아벤저 뇌격기 5대를 일본함대를 향하여 출격시켰다.

이들은 오후 5시35분에 곤도 제독의 호위함대를 만나자, 수상기 모함 지또세에 어뢰 한발을 명중시켜, 좌측 엔진을 날려 버렸다.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가 일본의 제1차공격대를 포착한지 6분 후인 4시 38분에 일본기들도 엔터프라이즈를 발견하고 급속히 거리를 좁혀 왔다.
그런데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는 일본기들을 포착한 직후 무려 20분 이상 접촉을 놓쳐버렸다.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가 4시 55분에 다시 일본기들을 포착했을 때에는 이미 40km 전방까지 접근해 있었다.
엔터프라이즈의 와일드캣들이 즉시 방어에 나섰으나 이들을 저지하는데 실패했다.
오후 5시 12분, 엔터프라이즈의 4번 20mm 대공포대장인 Joseph R. Schinka 해병상사는 고도 6,000m 상공에서 접근하고 있는 일본기들이 와일드캣에 피격당하여 내뿜는 연기를 발견했다.
곧이어 신카 해병상사는 발 급강하폭격기의 은회색 기체를 구별할 수 있었다.
엔터프라이즈의 함정 승무원들이 큰 날개와 고정식 랜딩기어를 가진 일본해군의 발 급강하폭격기를 직접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곧 제16기동부대의 전 함정에 으스스한 방송이 울려 퍼졌다.

“적기는 바로 함대 상공에 있다.”

이어서 함대 전체의 대공포화가 작렬했다.

쇼가꾸를 출격한 27대의 발 급강하폭격기 중에서 25대가 살아서 엔터프라이즈의 상공에 도달했다.
공격위치를 잡은 발 급강하폭격기들은 평균 7초에 한대의 비율로 엔터프라이즈를 향하여 연속적으로 급강하폭격을 실시했다.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인 데이비스 대령은 교묘한 조함술로 처음의 몇 발은 무사히 피했으나 공격하는 적기의 수가 너무 많았다.
신형전함 노스캐롤라이나를 비롯한 제16기동부대에서 쏘아올리는 치열한 대공포화가 하늘을 뒤덮었고, 와일드캣들이 아군의 대공포화에 맞을 위험을 각오하고, 급강하하는 발 폭격기의 꽁무니를 따라 급강하하면서까지 요격했으나 엔터프라이즈를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본기들의 공격이 시작된 지 2분 후인 오후 5시 14분, 450m 높이에서 70도 각도로 투하된 250kg짜리 폭탄 한 발이 제3번 엘리베이터 전방에 명중하여 12m를 뚫고 내려가 제2갑판과 제3갑판 사이에서 폭발했다.
이 폭발로 하사관 거주 구역에 있던 엘리베이터 운용팀, 탄약관리요원들, 손상관리반 요원들이 폭발에 휘말려 35명이 즉사했다.
폭발의 충격으로 우현쪽 수선 하에 직경 1.8m 짜리 구멍이 뚫렸고 그 곳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와 배가 우현으로 3도나 기울었다.
격납고 갑판에는 직경 5m짜리 구멍이 뻥 뚫렸고 그 가장자리는 최고 높이가 60cm나 될만큼 크게 우그러졌으며, 제3번 엘리베이터는 작동불능이 되었다.
폭발의 충격이 20,000만톤짜리 항공모함의 함체를 크게 흔들어 잠시동안 사람이 서있지 못할 정도였다.

불과 30초 뒤, 첫 번째 폭탄이 떨어진 자리에서 4.5m 정도 후방 오른쪽에 2번째 폭탄이 명중하여 2.4m 깊이에서 폭발했다.
이 폭발로 우현고물 쪽의 제5번과 제7번 127mm 포대가 폭발에 휩쓸리면서 5번 포대의 127mm 포의 장약 40세트가 유폭을 일으켜서 치명적인 화재를 발생시켰다.

이 폭발은 38명의 희생자를 내었는데 그 중의 10명은 도저히 신원확인이 불가능했다.

 

(엔터프라이즈의 함미에 폭탄이 명중하는 순간. CA-33 포틀랜드에서 찍은 사진)

 

첫 번째 명중탄으로부터 불과 2분후인 5시 16분에 3번째 폭탄이 제2번 엘리베이터 전방의 비행갑판에 명중했다.
450m 높이에서 60도 각도로 투하된 이 폭탄은 신관에 문제가 있었는지 천만다행으로 갑판에 격돌하자마자 폭발해 버렸다.
그리하여 이 폭탄은 비행갑판에 직경 3m짜리 구멍을 내고 제2번 엘리베이터와 어레스팅 기어를 망가뜨리면서 1명의 사망자를 기록했으나, 앞의 폭탄들에 비하면 피해는 가벼운 편이었다.

 

(세번째 폭탄의 폭발 장면. 뒷쪽으로 1분 30초 전에 명중한 두번째 폭탄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된 함미 우현의 127mm 포대에서 발생한 연기가 보인다. 이 폭발 장면은 오랫동안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전사한 로버트 프레드릭 리드 하사가 전사하는 순간에 찍은 마지막 사진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사실은 마리온 릴리 하사가 찍은 사진이다. 리드 하사는 1분 30초 전에 명중한 두 번째 폭탄에 의하여 전사했다.)

 

5시 17분에는 우현고물에서 불과 4m 거리의 수면에 지근탄이 떨어져서 폭발로 인하여 발생한 강력한 수압 때문에 우현 고물쪽 함체와 몇 개 갑판이 심하게 우그러졌다.
그 외에 3개의 지근탄이 더 떨어졌으나 그 피해는 비교적 가벼웠다.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일본 급강하 폭격기의 겨냥을 피하기 위하여 오른쪽으로 급회전을 하고 있는 엔터프라이즈. 함미 우현 쪽으로 127mm 포대에서 발생한 화염이 보인다. 이 포대에서는 2번째 명중탄에 의하여 포대의 장약이 유폭되면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38명의 사망자를 기록했다.)

엔터프라이즈를 공격한 일본공격대도 큰 피해를 입어서 총 37대 중 발 급강하폭격기 18대와 제로기 6대등 총 24대가 격추되었다.

엔터프라이즈가 3발의 폭탄에 직격당한 일은 취역 이후 처음으로 당한 큰 피해였으나, 평소에 철저한 훈련으로 단련된 엔터프라이즈의 손상관리반은 이런 위기상황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그들은 신속하게 화재를 진압하고, 생존자를 구조하며, 피해구역의 전력을 복구하고, 폭발위험이 있는 가스들을 제거했다.
나아가 좌현쪽에 역침수를 통해 우현쪽으로 기울어진 함체를 복원시키고, 목재와 매트리스를 사용하여 우현쪽의 수선하 구멍을 막았다.
그리하여 엔터프라이즈는 피폭당한 지 1시간이 채 못 되어 이미 화재를 진압하고, 24노트의 속도를 회복했다.

엔터프라이즈는 즉시 자신의 함재기들을 수용하여 급유한 다음 헨더슨 비행장으로 날려보냈다.

하지만 진짜 위험은 엔터프라이즈의 조타기계실이 침수되어 버린 오후 6시 21분에 찾아왔다.
처음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조타기계실 주변에도 화재가 번져서 환기가 중단되고, 조타기계실 내의 온도가 섭씨 80도 가까이 올라가자 내부의 인원이 모두 탈출했다.
그런데 조타기계실 주변의 화재를 진압하자 환기장치가 다시 작동되면서 부서진 환기통로를 통해 갑자기 바닷물이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조타기계실 전체가 침수되면서 키를 움직이는 전기모터가 작동을 중단했다.
그러자 그 거대한 키가 제멋대로 좌우로 흔들거리더니 오후 6시 50분에 오른쪽으로 최대한 꺾인 채로 고정되어 버렸다.
그 과정에서 엔터프라이즈는 구축함 Balch 와 2번씩이나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면서 겨우 충돌을 모면했다.
할수 없이 엔터프라이즈의 스크류를 전속력으로 후진시켜 속력을 10노트로 낮추었다.
키가 얼마나 오른쪽으로 딱 붙어버렸는지 오른쪽 스크류는 전진으로, 왼쪽 스크류는 최대한 후진시켜도 엔터프라이즈를 직진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엔터프라이즈는 10노트의 저속으로 그 자리에서 맴돌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만일 이런 상태에서 제2차 공습이라도 받는 날에는 함재기의 이함 뿐만 아니라 회피기동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때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에 즈이가꾸를 떠난 일본군의 제2차 공격대가 포착되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에 이어 이번에도 행운의 여신은 엔터프라이즈에게 미소를 보냈다.
오후 3시에 즈이가꾸를 떠난 제2차공격대는 침로를 40도 가량 잘못 잡아서 제16기동부대의 남쪽 90km 지점까지 접근한 후 북서쪽으로 변침한 후 엔터프라이즈를 발견하지 못한 채 즈이가꾸로 귀함했다.

오후 7시 30분에 천신만고 끝에 조타기계실의 제2번 전기모터를 구동하는데 성공하여 키를 다시 작동시킨 엔터프라이즈는 자신의 함재기를 모두 헨더슨 비행장에 날려 보내고 전장을 이탈했다.

일본제3함대사령관 나구모 중장은 제3차공격을 검토했으나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고 제1차 공격대의 피해가 예상 외로 너무 큰 데 놀라서 공격을 단념하고 트럭 섬으로 회항했다.
제2함대사령관 곤도 제독이 호위부대를 이끌고 야전을 기도하며 또한 야간에 헨더슨 비행장에 포격을 가하기 위하여 남하하다가 다음날인 25일 밤늦게 반전,북상했다.

한편 플레처 제독은 24일 저녁이 되자 구축함 1척을 현장에 남겨 조종사들을 구조하도록 하고 남하하여 전장을 이탈했다.
그리하여 동부솔로몬 해전은 끝났다.

다음날인 25일이 되자 일본제3함대가 철수함으로써 하늘로부터의 엄호가 없어진 다나까 제독의 침공부대는 미군기의 공습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다나까 제독의 함대는 이미 밤 사이에 카탈리나 기에 의하여 발견되어 있었으므로 날이 밝자마자 헨더슨 비행장에서 8대의 돈틀레스를 보내왔다.
오전 9시 35분에 다나까 함대의 상공에 도착한 이 돈틀레스들은 다나까 제독의 기함인 경순양함 진쑤의 통신실에 폭탄을 명중시켜서 다나까 제독은 이때의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24일에 엔터프라이즈에서 헨더슨 비행장으로 옮겨온 돈틀레스 4대가 수송선단에 폭격을 가하여 일본군이 사용할 탄약을 수송하던 수송선 긴류 마루에 폭탄을 명중시켜 긴류 마루는 탄약의 유폭과 함께 침몰했다.
오전 10시 25분에는 에스피리투산토를 떠난 B-17기 8대가 폭탄을 퍼부어서 구축함 무쓰기에 225kg 짜리 폭탄 한 발을 명중시켰다.
이 폭탄은 무쓰기의 기관실에 명중하여 40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무쓰기를 격침해 버렸다.
다나까 제독은 항공엄호가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의 전진은 무리라고 판단, 회항하여 쇼틀랜드로 돌아가 버렸다.

동부솔로몬 해전은 전술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미국함대의 판정승이었다.
일본함대는 경항공모함 류조와 수송선 긴류마루, 구축함 무쓰기를 잃었고 수상기모함 지또세와 경순양함 진쑤가 중파되었으며, 항공기 59대를 상실했다.
또한 다나까 제독의 침공부대가 일본군 증원부대의 상륙을 단념하고 회항하여 버림으로써 ‘과’호 작전이 실패했다.

미국함대는 엔터프라이즈가 명중탄 3발에 의하여 중파되면서, 장교 2명과 사병 72명이 전사했다.
엔터프라이즈의 함정승무원이 전사한 것은 엔터프라이즈의 취역 이래 마셜 제도 공격에서 죠지 스미스 상병의 전사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엔터프라이즈 비행단은 와일드캣 4대, 돈틀레스 2대, 아벤저 4대등 총 10대의 항공기를 상실하고 11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1942년 8월 25일, 엔터프라이즈는 남태평양을 떠나 진주만으로 향했다.
진주만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도 함내에서는 교대로 하루 24시간 연속하여 수리작업이 이루어졌다.

 

미해군은 1907년부터 2년간 실시된 전함 함대의 세계일주 항해 이후 함정의 수리를 가능한 한 자체 승무원들에게 맡기는 정책을 실시했다.

조선소의 일감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노동조합과 일부 정치인들이 이러한 정책을 극렬하게 반대했으나, 미해군은 끝까지 이 정책을 고수했다.

그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함정의 승무원들은 웬만한 손상은 항해 중이거나 심지어는 격렬한 전투를 수행하는 와중에서도 스스로 수리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함정은 상대방인 일본함정과 비교하여 전투 중에 같은 정도의 손상을 입어도 생존확률이 훨씬 높았다.

 

1942년 9월 10일에 진주만에 도착한 엔터프라이즈는 즉각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갔다.
엔터프라이즈가 남태평양에 돌아온 것은 10월 2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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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해병대가 과달카날 섬을 점령하자 일본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또 제독은 과달카날 섬의 탈취를 목적으로 하는 ‘과’호 작전 (‘과’는 과달카날이란 뜻)을 발령했다.
이에 따라 8월 11일에 곤도 노부다께 중장의 제2함대를, 16일에는 정규항공모함 쇼가꾸, 즈이가꾸 및 경항공모함 류조를 보유한 나구모 중장 지휘 하의 제3함대를 히로시마에서 남방의 일본해군기지인 트럭 섬으로 파견했다.
그 전날인 8월 14일에는 다나까 라이조 소장의 제2수뢰전대가 호위하는 수송선 3척(긴류 마루, 보스톤 마루, 다이후꾸 마루)이 일본육군 제28연대를 싣고 과달카날을 향하여 트럭 섬을 떠났다.
하지만 2,500여 명에 달하는 제28연대를 전부 수송하기에는 수송선이 모자랐으므로 제28연대장 이찌기 기요노 대좌를 비롯한 916명의 병력은 각자 150발의 총탄과 7일 간의 식량만을 휴대한 채 따로 구축함 6척(하마까제, 가게로, 하기까제, 다니까제, 우라까제, 아라시)에 분승하여 트럭 섬을 출발, 본대보다 4일 앞선 8월 18일 밤에 해병대의 교두보에서 동쪽으로 약 35km 떨어져 있는 타이부 곶에 상륙했다.
제3함대가 떠난 다음날인 8월 17일에는 야마모또 제독의 기함인 대형전함 야마또를 위시한 연합함대의 나머지 세력이 히로시마를 떠나 트럭 섬으로 향했다.

8월 17일, 과달카날의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감에 따라 태평양함대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하와이를 지키고 있던 호넷 중심의 제17기동부대를 남태평양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제17기동부대는 간발의 차로 동부솔로몬 해전에 참가하지 못한다.

1942년 8월 20일, 마침내 헨더슨 비행장이 완성되었다.
과달카날에 배치될 항공기를 싣고 8월 2일에 진주만을 출항하여 8월 13일에 피지에 도착하여 있던 미해군 최초의 호위항모 CVE-1 Long Island가 즉시 과달카날 남동쪽 320km 지점까지 접근하여 Richard C. Mangrum 해병소령이 지휘하는 해병제232정찰/폭격비행대대(VMSB 232) 소속 돈틀레스 12대와 John L. Smith 해병대령이 지휘하는 해병제223전투비행대대(VMF223) 소속 와일드캣 19대를 파견했다.
최초의 돈틀레스가 헨더슨 비행장에 착륙한 시간은 8월 20일 오후 5시였다.

 

(호위항공모함 롱아일랜드. 표준배수량: 13,500톤, 길이 : 150m, 폭 : 21.2m,속력 : 16.5노트, 승무원 : 970명, 무장 : 5인치 포 1문, 76mm 대공포 2문, 함재기 : 21대)

다음날인 8월21일 새벽 3시, 이찌기 대좌가 지휘하는 일본육군 제28연대의 선발대 916명이 22일로 예정된 본대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미해병대의 4개 대대가 지키고 있는 일루 강 하구의 방어선에 공격을 가해왔다.
하지만 미리 정찰대를 보내어 자신들의 동쪽에 새로운 일본군 부대가 상륙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미해병대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하여 거의 전멸에 가까운 혹독한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다.

같은 날인 8월 21일,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은 10일전인 8월 11일까지의 암호해독상황을 종합하여 일본 내해에 있던 항공모함 쇼가꾸와 즈이가꾸, 야마모또 제독의 기함인 대형전함 야마또 등을 포함한 대함대가 남쪽에 있는 일본해군의 대기지인 트럭 섬을 향하여 남하할 것이며 이들은 8월 22일 쯤 트럭 섬에 도착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니미츠 제독은 이 보고를 받자마자 남태평양해역군사령관인 곰리 중장에게 즉각 과달카날 방어를 위하여 병력을 집중시킬 것을 지시했다.
다음날인 22일, 곰리 중장은 플레처 중장에게 제61기동부대를 이끌고 과달카날로 출동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제3함대사령관 나구모 중장은 트럭 섬에 도착하면 먼저 와있던 제2함대사령관 곤도 중장과 작전을 협의할 예정이었으나 트럭 섬으로 남하 중이던 21일, 이찌기 지대의 공격실패 소식을 들은 야마모또 제독으로부터 트럭 섬에 기항하지 말고 즉시 과달카날 해역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같은 날인 8월 21일에 트럭 섬에 있던 제2함대도 제3함대와 작전을 조율할 시간도 없이 서둘러서 과달카날을 향하여 출동했다.

당시 일본함대의 진형은 제2함대와 제3함대의 조율이 제대로 되지 않은 관계도 있고 해서 꽤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4개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공격력의 중심은 역시 항공모함 중심으로 새로 편성된 제3함대였다.
그 중 항모 쇼가꾸와 즈이가꾸로 이루어진 제1항공함대와 그들을 호위하는 구축함 6척이 공격부대를 이루었고, 나구모 중장이 직접 지휘했다.

전함 히예이와 기리시마를 포함한 제3함대의 호위함들은 차석 지휘관인 아베 히로아끼 소장의 지휘 하에 공격부대의 전방으로 나서서 적 함재기에 대하여 일종의 방벽을 형성했다.
이건 공격력이 강한 대신 방어력이 약한 항공모함들이 전면으로 나섰다가 일순간에 전멸해버린 미드웨이 해전의 전훈을 살린 것이었다.
그런데 이 호위함들은 제2함대의 함정들과 함께 호위부대를 형성하여 아베 소장은 전투 중에는 제2함대사령관 곤도 중장의 전술적 지휘를 받았다.
원래 계획 상으로는 공격부대와 전방에 나가있는 호위함대와의 거리는 320km 이상 떨어지게 되어 있었으나 동부솔로몬 해전에서는 그만한 거리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24일 새벽 2시에  제3함대 소속의 경항모 류조를 중심으로 한 견제부대가 하라 쥬이찌 소장의 지휘 하에 공격부대에서 분리되어 호위함대 앞쪽 100km 전방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들과는 별도로 제28연대의 잔여병력 1,500여명을 태운 세 척의 수송선과 8척의 구축함을 보유한 일본제8함대가 동쪽에서 내려오고 있었는데 이 부대는 수송선단을 포함한 다나까 라이조 소장의 제2수뢰전대와 이들을 호위하는 제8함대사령관 미까와 구니찌 중장의 중순양함 4척으로서 침공부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8함대는 연합함대 직속이 아니라 라바울에 기지를 둔 남방함대 소속이었다.

이외에 12척의 일본잠수함들이 작전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 세력을 보면 나구모 중장이 직접 지휘하는 공격부대는 정규항모 2척(쇼가꾸, 즈이가꾸),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져 144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곤도 중장 휘하의 호위부대는 전함 2척(히에이, 기리시마), 중순양함 8척(구마노, 스즈야, 치꾸마, 아타고, 마야, 다까오, 묘고, 하구로), 경순양함 2척(나가라, 유라), 수상기모함 1척(지또세),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져 22대의 수상정찰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라 소장 휘하의 견제부대는 경항공모함 1척(류조), 중순양함 1척(도네), 구축함 2척을 보유하여 30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침공부대는 미까와 중장이 지휘하는 중순양함 4척(죠까이, 기누가사, 아오바, 후루다까)과 다나까 소장이 지휘하는 경순양함 1척(진쑤), 구축함 8척(수송임무), 수송선 3척(긴류 마루, 보스톤 마루, 다이후꾸 마루) 및 경비정 4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함대의 세력은 합계 정규항공모함 2척, 경항공모함 1척, 수상기 모함 1척, 전함 2척, 중순양함 13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22척(8척은 수송임무), 수송선 3척, 경비정 4척, 함재기 174대, 수상정찰기 22대였다.

여기에 맞서는 미국함대는 새러토가 중심의 제11기동부대,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 그리고 와스프 중심의 제18기동부대가 모여서 플레처 중장의 지휘 하에 제61기동부대를 이루고 있었다.
플레처 중장이 직접 지휘하는 제11기동부대는 정규항공모함 1척(새러토가), 중순양함 2척(미네아폴리스, 뉴올리언스), 구축함 5척으로 이루어져 74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킨케이드 소장의 제16기동부대는 정규항공모함 1척(엔터프라이즈), 전함 1척(노스캐롤라이나), 중순양함 1척(포틀랜드), 경순양함 1척(애틀란타),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져 80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노예스 소장의 제18기동부대는 정규항공모함 1척(와스프), 중순양함 2척(샌프란시스코, 솔트레이크시티), 경순양함 1척(산후앙), 구축함 7척으로 이루어져 63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61기동부대 전체로는 정규항공모함 3척, 전함 1척,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8척으로 이루어져 있어 수상함 세력은 일본함대에 비하여 확실히 조금 열세였지만 가장 중요한 함재기 수에서는 217대로서 174대를 보유한 일본보다 우세했다.
하지만 정작 실제 전투에서는 와스프 중심의 제18기동부대가 불참함으로써 제61기동부대의 실전 참가 함재기 수는 154대로 오히려 일본함대보다 열세였다.
하지만 미국함대는 지상발진 항공기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즉 남태평양해역군항공사령관(COMAIRSOPAC)인 John Sidney McCain 소장의 제63기지비행대(TF63)가 제61기동부대를 지원했는데, 이들의 세력은 우선 헨더슨 비행장의 해병제23비행전대(MAG23) 휘하의 와일드캣 13대, 돈틀레스 11대, 육군 제67추격기편대 소속의 P-39기 5대, 에스피리투산토에 있는 제11중폭격비행전대 소속의 B-17기 25대와 카탈리나기 33대, 산타크루즈 섬에 있는 카탈리나 기 5대 등이다.
이로써 동부솔로몬 해전에 참가한 미일양국 해군의 전력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맥케인 제독은 1945년 5월에 미처 중장의 후임으로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 사령관이 되어 결국 대장까지 승진하는데 같은 이름의 자기 아들도 해군대장까지 승진했다.

미해군 역사상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대장까지 승진한 기록은 이 맥케인 부자의 경우가 유일하다.
그리고 이 사람의 손자인 John Sidney McCain 3세 역시 A-4 공격기를 몰던 해군조종사로서 베트남 전쟁에서 격추되어 하노이에서 포로생활을 했다.

이후 정치에 투신하여 애리조나 주의 상원의원을 지냈고, 2008년 미국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섰다가 민주당 후보였던 버락 오바마 현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8월 22일 오전 11시,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가 남서쪽 90km 지점에서 접근하는 일본군의 가와니시 비행정을 포착하자, 4대의 와일드캣이 즉시 달려가서 격추했다.

8월 23일 아침, 엔터프라이즈의 정찰기가 남쪽으로 급행하는 2척의 일본잠수함을 발견했다.
통상 일본해군은 대규모 함대작전을 앞두고 잠수함을 파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일본군의 잠수함을 발견했다는 것은 곧 대규모 수상함대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고나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오전 9시 50분, 카탈리나 기가 부갠빌 섬의 동쪽에서 다나까 제독의 침공부대를 발견했다.
오후 2시 45분, 새러토가에서 31대의 돈틀레스와 6대의 아벤저 뇌격기가 침공부대를 향하여 출격했다.
헨더슨 비행장에서도 11대의 돈틀레스와 그들을 호위하는 와일드캣이 침공부대를 노리고 떠났다.

오후 3시 30분,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들이 또다른 일본잠수함을 발견하고 공격하였으나 격침하는데는 실패했다.

한편 다나까 제독은 카탈리나 기에 발견되는 즉시 반전하여 북상했으므로 새러토가의 공격대는 헛물만 켜고 말았다.
새러토가의 공격대는 모함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병대기들을 따라 헨더슨 비행장으로 갔다.
침공부대는 23일 밤늦게 다시 남쪽으로 변침했다.

23일 오후,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이 일본함대가 아직 트럭 섬의 북쪽에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보내왔다.
플레처 제독은 이 정보에 의거하여 일본함대와의 전투는 아무리 빨라도 25일까지는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여 23일 오후, 와스프 중심의 제18기동부대를 급유를 위하여 남하시켰다.
플레처 제독이 진주만 기습 직후 새러토가를 지휘하여 웨이크 섬 구조작전에 나섰을 때 중간에 급유하느라고 웨이크 섬 도착이 늦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손도 한번 못 써보고 웨이크 섬이 함락되었다.
그때 웨이크 섬의 구조에 실패하여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던 플레처 제독은 그 이후로 틈만나면 항공모함의 연료탱크를 가득 채워두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23일 밤에 일본구축함 가게로가 과달카날에 접근하여 함포사격을 가했으나 5인치 포의 위력부족으로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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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3월, 필리핀을 방어하던 맥아더 장군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탈출하여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하자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 장군과 니미츠 제독의 작전관할지역을 분리하기로 하여 1942년 3월 24일, 태평양지역에 맥아더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남서태평양해역군과 니미츠 제독을 사령관으로 하는 태평양해역군을 설치했다.
남서태평양해역군의 관할지역은 오스트레일리아, 솔로몬제도, 비스마르크제도, 뉴기니아, 필리핀을 포함하는 동경 160도까지였고 태평양의 나머지 지역은 태평양해역군의 관할지역이었다.

그런데 태평양해역군의 관할지역이 너무 넓으므로 이것을 다시 3개로 나누어 적도 이남의 남태평양해역군, 적도에서 북위42도까지를 관할하는 중부태평양해역군, 그리고 북위 42도 이북을 책임지는 북태평양해역군으로 분리했다.
이중에서 하와이를 포함하는 중부태평양해역군사령관은 니미츠 제독이 겸임하기로 했다.
재미있는 것은 태평양해역군사령부가 설치됨으로써 태평양함대사령관은 중부태평양해역군사령관과 동격이면서 동시에 태평양해역군사령관의 직접 지휘를 받는 직할전투부대의 사령관이 되었으므로 니미츠 제독은 태평양해역군사령관 겸 중부태평양해역군사령관 겸 태평양함대사령관의 3가지 감투를 동시에 쓰게 되었다.
북태평양해역군 관할지역에서는 당분간 대규모 작전이 실시될 예정이 없었으므로 제8함대사령관인 테오발드 소장을 그대로 해역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문제는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남태평양해역군사령관의 인선이었다.
니미츠 제독은 이 자리에 진주만기습 당시 태평양함대의 전투부대사령관이었던 파이 중장을 추천했다.
그러나 미국함대사령관 킹 제독은 파이 중장을 거부하고 1942년 6월 19일, 이 자리에 해군참모차장이었던 Robert L. Ghormley 중장을 임명했다.
하지만 이 인사는 곧 킹 제독 최악의 인사실패로 기록된다.
까다로운 킹 제독의 눈에 들었던 인물이니만큼 당연히 곰리 중장도 영민하고 경험이 많은 장교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는 전형적인 참모형장교로서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엄청난 스트레스 하에서 불충분한 정보를 가지고도 때를 놓치지 않고 중대한 결정을 과감하게 내리고 불안해하는 부하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어 일을 추진해 나가야 하는 대부대의 지휘관으로서는 실격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남태평양해역군사령관 자리는 바로 그런 강인한 정신력과 엄청난 스트레스 하에서도 때를 놓치지 않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1942년 7월 6일, 진주만의 암호해독반이 일본군의 한 부대가 툴라기 대안에 있는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부대에 아마도 토목공사를 위한 인원들로 추정되는 다수의 비전투원들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진주만의 암호해독반은 일본군이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려는 의도라고 판단했다.
이 정보에 따라 미태평양함대는 비행장이 완성되기 전에 과달카날 섬을 탈취하여 향후 반격의 초석으로 삼기 위한 망루작전을 계획한다.  
한편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후일의 공식발표에서는 당시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정찰기가 비행장을 발견했다고 둘러대었다.

그런데 문제는 과달카날 섬이 남서태평양해역군의 관할지역에 속해있었다는 점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니미츠 제독의 부하들이 자기 관할지역 내에서 제 마음대로 설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니미츠 제독 역시 지도라고는 해안선이 나오면 끝나는 지도만 가지고, 바다를 통로가 아니라 장애물로만 간주하며, 해군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수심이나 수로, 조류 등의 개념도 모르고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 맥아더 장군 휘하의 '무식한' 육군에게 과달카날 침공작전을 맡기고 금쪽같은 항공모함을 내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의 직속 상관들인 마셜 장군과 킹 제독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져서,
남서태평양해역군과 남태평양해역군의 경계를 동경 160도에서 1도만큼 서쪽으로 이동시켜 동경 159도선으로 변경했다.

그리하여, 과달카날 섬이 포함된 남부 솔로몬 제도를 남서태평양해역군의 관할지역에서 빼내어 남태평양해역군의 관할지역 안으로 편입시켰다.

미드웨이 해전에 대승하고 1942년 6월 13일에 진주만에 개선한 엔터프라이즈는 7월 15일까지 함의 오버홀을 위하여 진주만에 머물렀고 장병들에게는 휴가가 주어졌다.
엔터프라이즈의 장병들 입장에서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래 실로 6개월 만에 맛보는 꿀맛같은 휴가였다.
1942년 6월30일, 태평양함대에서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는데,
그때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1년 3월 21일부터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을 맡아왔던 머레이 대령이 소장으로 승진하여 호넷 중심의 제17기동부대 사령관으로 영전했다.

 

(엔터프라이즈에서 열린 머레이 함장 환송 만찬의 한 장면. 엔터프라이즈의 부함장 월터 분 중령이 머레이 대령에게 미드웨이 해전에서 침몰 직전의 미꾸마를 찍은 사진이 담긴 액자를 기념품으로 전달하고 있다. 사진 중앙 왼쪽의 키 작은 장교가 머레이 대령)

 

머레이 대령의 후임인 제4대 함장으로는 Arthur C. Davis 대령이 취임했다.

 

(제4대 함장 아더 데이비스 대령. 재임기간 : 1942년 6월 30일 - 10월 21일)


그리고 니미츠 제독에게 스카우트되어 태평양함대의 참모장으로 영전해 간 제16기동부대사령관 스프루언스 소장의 후임으로 태평양함대의 순양전단장이던 Thomas Cassin Kinkaid 소장이 제16기동부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그 동안에도 망루작전의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들도 남태평양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1942년 7월 1일, 그동안 대서양에 있던 CV-8 Wasp 중심의 제18기동부대가 제2해병연대를 실은 수송선단을 호위하여 통가에 도착했다.
Leigh Noyes 소장이 지휘하는 제18기동부대에는 미해군 최초의 고속전함인 BB-55 North Carolina 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핼시 제독이 아직 함대의 지휘를 맡을만큼 회복되지 못했으므로 중장으로 승진한 플레처 제독이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계속 지휘하게 되었다.
7월7일, 미드웨이 해전 직후인 6월6일에 진주만에 도착했던 동료항공모함 새러토가가 플레처 중장의 지휘 하에 진주만을 출발했다

7월 15일, 1달간의 오버홀을 마친 엔터프라이즈가 망루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남태평양의 통가를 향하여 진주만을 출발했다.
이 3척의 항공모함은 통가 부근에서 합류하여 플레처 중장의 지휘 하에 제61기동부대를 형성, 제1해병사단의 과달카날 상륙을 엄호할 예정이었다.
엔터프라이즈는 진주만을 떠나 통가로 가는 도중에 엔터프라이즈항공단에 새로 편입된 조종사들에 대하여 집중적인 훈련을 실시했다.
목적지인 통가에는 7월24일에 도착하였으며 이틀 후인 7월 26일에는 새러토가 및 와스프와 만나 플레처 중장의 지휘 하에 제61기동부대를 편성한 후 코로 섬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제61기동부대는 제1해병사단의 인원 및 장비를 실은 35척의 수송선과 그 호위함들로 이루어진 Richmond Kelly Turner 소장 지휘 하의 제62기동부대와 함께 80 여척의 대함대를 형성하여 7월 30일에 과달카날 상륙작전의 리허설을 실시했다.
이 리허설 결과는 사령관들의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으나 이 과정을 통하여 대규모의 상륙작전시 예상되는 몇 가지의 문제점들을 발견하고 그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16,000 명의 해병대원과 그들의 장비와 보급품을 실은 35척의 수송선 및 순양함 8척, 구축함 12척으로 이루어진 제62기동부대와 항공모함 3척, 전함 1척,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3척 및 구축함 12척으로 편성된 제61기동부대는 코로 섬을 떠나 마치 오스트레일리아가 목표인 것처럼 서남쪽으로 항진해갔다.

8월 3일, 마지막 급유를 마친 과달카날 침공함대는 서쪽으로 변침했다가 곧 북쪽으로 변침하여 과달카날을 향하여 접근해갔다.

8월 5일과 6일은 날씨가 나빠서 일본군의 정찰기가 활동하는 데 큰 장애를 받았다.
실제로 상륙 전날인 8월 6일에는 일본군의 정찰기 1대가 침공함대 바로 상공까지 날아와서 미군측에서는 들켰다고 생각했으나 악천후로 인하여 이 정찰기는 침공함대를 발견하지 못했다.

1942년 8월 7일 오전 5시 35분, 제61기동부대에서 과달카날을 향하여 44대, 툴라기를 향하여 41대 등 총 85대의 함재기가 출격했다.
이들은 툴라기와 가부투에 정박해있던 일본군 비행정 및 수상비행기 18대를 격파하고 연료저장고와 많은 시설물들에 피해를 입혔다.

오전 6시 14분에는 과달카날 상륙부대를 엄호하는 순양함 3척과 구축함 4척이 과달카날 상륙예정지를 향하여 함포사격을 시작하였고, 2분 후인 6시 16분부터는 툴라기 상륙부대를 엄호하는 순양함 1척과 구축함 3척이 역시 함포사격을 시작하였다.
미해병대의 상륙은 완전히 기습을 달성한 것으로 솔로몬 제도의 방어를 담당하는 라바울의 일본제17군사령부가 과달카날 상륙작전의 보고를 들은 것은 이미 폭격이 진행되고 있던 오전 6시 12분이었다.
오전 6시 51분에는 상륙주정이 해상에 내려졌고, 툴라기에 대한 상륙은 오전 8시, 과달카날에 대한 상륙은 오전 9시 10분에 예정대로 실시되었다.

오전 11시 30분, 제61기동부대에 부겐빌 섬 남쪽에 숨어있던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연안감시대원인 Paul Mason 으로부터 일본기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경보가 들어왔다.
오전 8시 30분에 라바울 기지를 떠난 다이난항공대 소속 27대의 96식 넬 육상공격기와 18대의 제로기가 공격해 온 것이다.
다이난항공대는 제1항공함대 소속의 제1급 제로기 조종사들이 전멸해 버린 당시 상황에서는 단연 일본해군에서 최고의 기량을 가진 제로기 조종사들이 모여있는 항공대였다.
제61기동부대에서는 즉각 기존의 CAP세력에 추가하여 와일드캣들이 발진하기 시작했다.
엔터프라이즈에서도 오후 12시12분부터 연속적으로 와일드캣을 발진시켰다.

오후 1시 15분에 일본공격대가 과달카날 상공에 도달했다.
고공에서 대기하던  60대 이상의 와일드캣들이 내려꽂히면서 이들을 덮쳤다.
다이난 항공대 소속 제로기 조종사들의 기량이 상당히 뛰어났다고는 하지만 그들에게도 1,000km 이상을 비행한 후에 체공가능시간이 불과 15분 밖에 안되는 상황에서 고공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덮치는 3배가 넘는 숫자의 와일드캣을 제압할 재주는 없었다.
이날 다이난 항공대는 11대의 와일드캣을 격추하는데 성공했으나 자신들도 큰 피해를 입어서 출격한 45대 중에서 무려 32대를 잃었는데 이건 다이난 항공대 창설 이래 최대의 손실이었다.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 로 유명한 일본해군의 에이스 사까이 사부로 상사도 이날 편대비행중인 8대의 아벤저 뇌격기들을 와일드캣으로 착각하여 후방에서 접근하다가 7.62mm 후방기관총의 집중사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다음날인 8월8일에는 뉴아일랜드 섬의 캐비엥 기지에서 출격한 45대의 99식 발 급강하폭격기가 공격해 왔다.
이번에는 부겐빌 북부에 있던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연안감시대원 Jack Read 중위가 오전 8시 40분에 이들을 발견하여 침공함대에게 경보를 발했다.
또다시 제61기동부대에서 와일드캣들이 날아올라 이들을 기다렸으나 일본기들은 예상을 깨고 부겐빌 섬을 지나 북상한 후 반전하여 북쪽으로부터 침공함대에 돌입해왔다.
즉각 제62기동부대의 대공포화가 불을 뿜었고 곧이어 전투기들도 가세하여 13대의 일본기가 격추되었다.
그들은 구축함 1척과 수송선 George Elliot을 격침했다.

제61기동부대는 8월7일과 8일 이틀에 걸친 일본기들의 공격을 무사히 물리쳤으나 자신들도 99대의 와일드캣 중 21대를 상실했다.
플레처 제독은 이대로 가다가는 제61기동부대가 큰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8일 오후 6시, 남태평양해역군사령관인 곰리 중장에게 원래 9일 오후에 철수하기로 되어있던 시간표를 하루 앞당겨서 즉시 과달카날에서 철수하겠다고 타전했으나 곰리 중장으로부터는 아무런 답신이 없었다.
8일 밤에 제61기동부대는 과달카날을 떠나 뉴칼레도니아로 향했다.
8월 24일에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인 데이비스 대령이 작성한 전투보고서(Action Report)에 따르면 엔터프라이즈는 2일간의 과달카날 상륙작전 기간 중 8월 7일에 237 소티, 8일에 135 소티, 합계 372 소티를 출격하여 일본군의 발 급강하폭격기 5대, 넬 육상공격기 6대, 제로기 3대를 격추하고 자신은 6대의 와일드캣을 잃었으며 3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과달카날에 상륙한 제1해병사단의 주력인 제5연대는 무혈상륙에 성공했으나, 제1 기습대대가 상륙한 툴라기와 제1공수대대가 상륙한 가부투에서는 일본군의 격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나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미해병대는 8일밤까지는 툴라기와 가부투의 일본군 수비대를 완전히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8일 저녁에 작전해역인 과달카날의 남쪽 해상을 떠난 제61기동부대가 산크리스토발 섬 앞바다를 지나가고 있던 9일 새벽 3시, 플레처 중장에게 과달카날 앞바다에서 순양함끼리의 야간해전이 있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훗날 사보섬 해전으로 불리게 될 이 처절한 전투에서 일본제8함대사령관 미까와 구니찌 제독이 이끄는 중순양함 5척(죠까이, 아오바, 기누가사, 카고, 후루다까), 경순양함 2척(덴류, 유바리) 구축함 1척(유나기)으로 이루어진 일본함대가 과달카날 앞바다에서 경계망을 펴고 있던 제62기동부대의 중순양함들을 9일 새벽 1시 37분부터 산소어뢰와 함포로 공격했다.

일본함대는 전투개시 불과 40분만에 미국중순양함 3척(아스토리아, 퀸시, 빈센스)과 오스트레일리아 중순양함 1척(캔버라)를 격침하고 중순양함 1척(시카고)과 구축함 1척(랄프 탈봇)을 대파하여 연합군에게 전사 1,024명과 부상 709명의 대손실을 입힌 반면 자신들의 피해는 중순양함 죠까이와 아오바가 소파되고, 전사 35명, 부상 51명으로 그쳐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사보섬 해전은 미해군이 경험한 최악의 패배였다.

한편 플레처 제독은 곰리 중장의 허가도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제61기동부대를 철수시켰다가 9일 새벽 3시에 과달카날 앞바다에서 해전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자 상당히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30분 후인 새벽 3시 30분에 철수를 허가하는 곰리 중장의 전문이 도착했다.
원래 곰리 중장은 플레처 제독의 철수허가요청을 받고 8일 오후 10시 41분에 철수를 허가하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으나 어쩐 일인지 그 전문이 5시간 가까이 지연되어 9일 새벽 3시 30분에야 플레처 제독에게 전달된 것이었다.
플레처 제독은 이 전문을 받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뉴칼레도니아로 발길을 재촉했다.
한편 사보섬 해전의 소식이 들려왔을 때 항모 와스프의 함장이었던 Forrest Percival Sherman 대령은 제18기동부대 사령관인 노예스 소장에게 즉각 북상하여 함재기로 퇴각하는 일본함대를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항모 와스프에는 야간공격 훈련을 받은 조종사들이 있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이는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플레처 중장의 마음을 읽고 있던 노예스 소장은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를 들어 거듭되는 셔먼 대령의 공격주장을 묵살했다.

제61기동부대가 떠나버리고 자체의 해상경계부대도 간밤의 해전으로 사실상 전멸해버리자 제62기동부대 사령관 터너 소장은 휘하의 수송선들에게 9일 하루동안 하역작업을 초스피드로 실시하도록 명령하고 그날 오후에 미처 하역하지 못한 절반 가량의 보급품들을 실은 채로 뉴칼레도니아를 향하여 철수했다.
그리하여 Alexander Archer Vandegrift 해병소장이 지휘하는 제1해병사단은 처음에 계획되었던 양의 1/3 수준인 약 30일치의 보급품과 함께 과달카날에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다.
과달카날 주변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완전히 확립한 일본군은 매일 폭격기를 보내어 해병대의 교두보를 폭격했고, 벌건 대낮에 순양함이나 구축함을 한척씩 보내어 해병대가 보유한 105mm 포의 사정거리 바로 바깥에서 포격을 가하곤 했다.
해병대는 아침에 라바울 기지에서 이륙한 일본폭격기가 과달카날 상공에 도착하는 시간인 정오 경을 ‘도죠타임’ 이라고 불렀다.
보급품이 다 떨어져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기 싫으면 해병대에게 남은 길은 오직 하나, 그들이 탈취한 완성 직전의 일본군 비행장을 빨리 완성하여 과달카날 주변의 제공권을 확보하고 해상보급로를 다시 여는 길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제1해병사단은 딱 한대가 양륙된 불도저와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장비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한시라도 빨리 비행장을 완성하기 위하여 공사에 박차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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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일 저녁이 되자 진주만에 있는 태평양함대사령부의 분위기는 낙관적으로 변해갔다.
사실 4일 저녁까지만 해도 미국함대가 일본제1항공함대에게 치명타를 먹인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지략이 풍부하고 아직도 막강한 수상함 세력을 잔뜩 보유한 야마모또 제독이 밤새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진주만의 사령부에서는 상당히 긴장된 분위기였다.

게다가 5일 새벽 130분경 미드웨이가 포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긴장은 최고도에 달했다.
전날에는 밤새 깜박깜박 선잠을 잤던 니미츠 제독도 이날은 꼬박 밤을 새웠다.
하지만 5일 낮동안의 경과로 보아 일본함대가 전투를 포기하고 퇴각 중인 사실이 확실해지자 태평양함대사령부의 분위기는 축제 분위기로 변해갔다.
그와 동시에 스프루언스 제독이 밤새 도망가지 않고 일본함대를 추격했더라면 더 많은 전과를 올렸을 것이라며, 역시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항공관계자가 지휘해야 한다는 불평불만이 진주만의 항공관계자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일본측 기록을 들여다본 결과는 미드웨이 해전 당시 스프루언스 제독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일본측이나 미국측이나 전반적으로 이제 전투는 끝났다는 분위기였지만 정작 요크타운의 숨통이 끊어지고 미드웨이 해전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가 벌어진 것은 다음날인 66일이었다.

일본잠수함 I-168 호는 상처입은 요크타운을 찾아 미드웨이 북방 해상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I-168 호에게도 이번 미드웨이 작전은 참으로 재수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원래 I-168 호는 미드웨이 해전을 앞두고 진주만을 정찰하려는 일본의 장거리 비행정에 급유를 해주기 위하여 접선장소인 프렌치 프리게이트 숄에 갔으나 미국구축함 DD-361 Clark 가 죽치고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정찰비행이 취소되어 버렸다.
이후 진주만과 미드웨이 사이에 포진하여 미국항공모함들의 동정을 살폈으나, 이미 미국항공모함들이 빠져나간 뒤라 헛물만 켰다.
일본제1항공함대의 항공모함들이 박살난 후에 야마모또 제독의 명에 따라 5일 새벽 130분에 미드웨이에다가 100mm 포의 포탄 8발을 퍼부어 진주만의 태평양함대사령부를 깜짝 놀라게 하였으나, 곧 미드웨이 작전이 중지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I-168 호의 함장인 다나베 야하찌 소좌는 상처입은 채로 미드웨이 부근 어디에선가 떠돌고 있을 미국항공모함을 반드시 격침하겠다고 결심하고 미드웨이 북방해상을 계속 돌아다녔다.

 

(I-168 과 같은 해대6급의 잠수함인 I-68 의 사진. I-168 의 사진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표준배수량 : 1,400 , 길이 : 104.7m, : 8.2m, 속력 : 수상 23노트, 수중 .2노트, 항속거리 : 수상 - 10노트로 26,000km, 수중 - 3노트로 120km, 승무원 : 68, 무장 : 533mm, 어뢰발사관 6, 전방 4, 후방 2, 어뢰 14, 100mm 대공포 1, 13mm 대공기관총 1, 7.7mm 기관총 1)

 

6일 오전에 I-168은 상처입은 채로 예인되고 있는 요크타운을 발견했다.
요크타운 주변에서 주변에 6척의 구축함들이 엄중한 대잠경계망을 펴고 있었지만 I-168 이 침투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오후 1237, 요크타운 좌현 불과 400m 지점까지 접근한 I-168 4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처음의 1발은 빗나갔지만 2번째 어뢰가 요크타운에 바짝 붙어서 동력과 전력을 공급하고 있던 구축함 해먼에게 정통으로 명중하여 동체를 반으로 꺾어버렸다.

 

(I-168 에게 뇌격을 당한 DD-412 해먼이 격침되는 순간. 요크타운에서 찍은 사진)

 

이어서 2발의 어뢰가 이틀 전에 어뢰에 피격되었던 요크타운의 좌현에 다시 명중했다.
폭포같은 거대한 물기둥이 연속적으로 솟아오르면서 선체가 부르르 떨었다.
주변에 있던 미국구축함들이 I -168 에 달려들어 폭뢰공격을 가하여 I-168 은 상당히 위험한 처지에 몰렸으나 결국 살아남아 무사히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요크타운에 승함해 있던 벅매스터 함장 이하 손상관리반은 다행히 이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었으나 수선하구역을 중어뢰 2발에 직격당한 피해는 그들의 수리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들은 급히 주변의 구축함으로 옮겨 탔다.

그런데도 요크타운은 가라앉지 않고 해가 질 때까지 해상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러자 벅매스터 함장은 다시 한 번 요크타운을 예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어두운 밤에 언제 가라앉을지도 모르는 항공모함에 승선하거나 예인 로프를 연결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잘 알고 있던 그는 날이 밝으면 다시 한 번 예인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날인 7일 새벽 458, 요크타운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침몰하고 말았다. 벅매스터 함장은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오후에 날이 밝을 때 승선하여 침수를 막기위한 응급처치라도 해 둘 걸..

하고 후회했으나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한편 5일 새벽에 탬버 호를 보고 놀라서 서로 충돌한 후에 14 노트의 저속으로 도망가고 있던 모가미와 미꾸마는 비록 5일 실시된 미드웨이 항공대의 공격에서는 겨우 살아남았으나 대공포화에 피탄된 빈디케이터 한대가 미꾸마의 후방포탑에 돌입하여 자폭해버리는 바람에 속력이 더욱 떨어져서 느릿느릿하게 도망가고 있었다.
오후 245분에 이들의 상공에 450kg 짜리 대형폭탄을 장착한 24대의 돈틀레스가 나타났다.
미드웨이 해전의 마지막 전투를 장식하기 위하여 호넷과 엔터프라이즈가 마지막 공격대를 보내온 것이었다.
이미 대파되어 간신히 물에 떠 있던 미꾸마는 450kg 짜리 폭탄이 한 발 명중하자, 순식간에 모든 기능을 잃었고 곧 뒤집혀서 침몰했다.
이때 미꾸마에서는 1,000 여명의 장병들이 사망하여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한 일본함정 중 가장 많은 전사자를 기록했다.
모가미는 천신만고 끝에 격침을 면하고 대파된 채로 트럭섬으로 귀환했으나 향후 1년간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마지막 공격대가 발진한 직후에 2대의 돈틀레스가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을 떠났다.
그들 중 한대가 침몰하기 직전의 미꾸마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일본수상정찰기가 찍은 불타는 히류의 모습과 함께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해군의 참패를 상징하는 사진이 되었다

(침몰 직전의 미꾸마. 엔터프라이즈의 수석사진사 J. A. Mihalovic 이 찍은 사진. 미꾸마는 이 사진이 촬영된 후 2시간 정도 지나서 침몰했다.)

 

일본제1항공함대의 항공모함 3척을 일시에 요절낸 운명의 5을 찍은 사진은 유감스럽게도 한 장도 없다.
공격하는 측이나 당하는 측이나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사진을 찍을 정신이 없었다.

미꾸마에 대한 공격을 끝으로 미국함대는 일본함대에 대한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했다.
어느덧 미국함대는 웨이크 섬의 항공기공격권에 접근하고 있었다.

194266일 오후 7, 스프루언스 제독의 명령에 따라 미국함대는 동쪽으로 변침했다.

이로써 미드웨이 해전은 끝났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연합함대는 정규항모 4(아까기, 카가, 소류, 히류)와 중순양함 1(미꾸마) 격침, 항공기손실 332, 전사 3,500 여명의 피해를 입었다.
미태평양함대는 정규항모 1(요크타운), 구축함 1(해먼) 격침, 항공기손실 147, 전사 307 명의 피해를 입었다.
일본연합함대의 전사자 중에서 특히 제1항공함대소속의 제1급 제로기 조종사 100 여 명의 희생이 특히 뼈아픈 일이었다.

엔터프라이즈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45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는데 전원 항공기 승무원들이었다. 또한 요크타운 비행단 소속이지만 엔터프라이즈에서 작전했던 제3폭격비행대와 제5정찰비행대에서도 6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미드웨이 해전은 확실히 태평양전쟁의 분수령을 이루는 전투였다.

비록 미드웨이 해전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연합함대는 쇼가꾸와 즈이가꾸를 위시하여 8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엔터프라이즈, 호넷, 새러토가의 3척을 보유한 미태평양함대에 비하여 함대항공력에서 여전히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함을 비롯한 수상함세력은 말할 것도 없었고..
하지만 일본연합함대는 이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공격의 주도권을 미태평양함대에 빼앗겨 버렸다.
이젠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시기는 끝나고, 이미 확보한 광대한 영역을 어떻게든 지켜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다.

반면 미태평양함대는 비록 열세한 세력이지만 이제야말로 작전의 주도권을 잡고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을 공격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미본토의 어마어마한 공업력이 제 궤도에 올라서 엄청난 양의 전쟁물자를 쏟아낼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되는 처지의 미태평양함대로서는 이제 태평양전쟁의 승리는 이미 따놓은 당상인 셈이었다.
반대로 일본연합함대로서는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로 인하여 미국을 조기에 회담테이블로 끌어내어 전쟁을 종결한다는 사실상 유일한 승리의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미육군이 해군보다 미드웨이 해전의 대승을 더 기뻐했다.

해군 입장에서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도 자신보다 더 강력한 함대항공력을 보유한 일본을 상대로 앞으로도 1년 이상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육군은 적어도 미드웨이 해전으로 일본의 팽창은 끝났다는 걸 알았고, 따라서 미본토에서 새로 편성 중인 사단들을 마음놓고 영국으로 보낼 수 있었다.

 

사실 미국은 제2차 대전에 뛰어들기 이전에 이미 일본보다 독일을 먼저 처치하기로 영국과 약속했었다.

따라서, 진주만 기습 이후 실제로 미국을 공격한 나라는 일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마셜 장군이 제출한 육군의 유럽 우선 전략을 승인했다.

육군 측에서는 유럽과 태평양에 파견되는 사단의 비율을 2:1 로 맞추려고 했으나, 초기에는 일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태평양함대의 주력이 진주만에서 얻어맞아 거의 마비된 틈을 타서 일본군이 태평양에서 파죽지세로 전진하자, 육군은 훈련이 끝난 사단들을 허겁지겁 태평양 상의 요지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배치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육군의 유럽 우선 전략에도 불구하고, 진주만 기습 이후 미드웨이 해전 이전까지 미본토를 떠난 8개의 육군 사단 중 5개가 태평양으로 보내졌다

게다가 진주만 기습 이전에 해외에 배치되어 있던 3개 사단 모두가 태평양에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사실 미드웨이 해전 이전까지 육군의 유럽 우선 전략은 말뿐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제 미드웨이 해전으로 육군 입장에서는 태평양의 급한 불은 끈 셈이 되었고, 따라서 이후로는 영국으로 육군 병력을 수송하는 볼레로 작전이 급속도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태평양함대가 그토록 열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요인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연합함대의 세력이 널리 분산되었고 각 부대간의 거리가 멀어 일단 유사시 상호지원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비하여 태평양함대의 타격력은 효율적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2. 태평양함대는 연합함대가 가지지 못한 레이더를 가지고 있었다.
3. 태평양함대는 연합함대의 공격력(특히 항공력)을 상당부분 흡수할 수 있는 (몸빵용?) 항공기지인 미드웨이를 가지고 있었다.
4. 가장 중요한 점으로서 태평양함대는 상대방인 연합함대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는데 성공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의도는 해전 당일까지도 완벽하게 숨기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한가지 덧붙인다면 역시..행운이다.
미태평양함대는 일본제1항공함대의 나구모 제독이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착오를 일으키는 바람에 물위에 뜬 화약고나 다름없는 상태의 일본항공모함들을 기습할 수 있었다.
솔직히 제16기동부대도 공격대 출격과정에서 큰 실수가 있었으나, 마침 타이밍이 딱 맞아 떨어져서 단 5분만에 전체 전투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만일 맥클러스키 소령의 공격이 단 10분만 늦어졌어도 이후의 전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승리한 미국함대는 해상에서 급유함을 만나서 급유를 받은 후 1942613일 오후 늦게 진주만에 당당하게 입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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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함대가 동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할 때쯤, 오전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던 일본제1항공함대의 항공모함들이 침몰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침몰한 것은 소류였다.
오후 7시 13분, 소류는 함장 야나기모또 류사꾸 대좌와 718명의 전사자와 함께 침몰했다.
7시28분에는 카가가 800 여명의 전사자와 함께 침몰했다.
아까기는 밤새 가라앉지 않고 있었으나, 야마모또 제독의 처분명령을 받은 동료 구축함의 어뢰 4발을 맞고 5일 새벽 4시 55분에 263명의 전사자와 함께 침몰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히류도 5일 새벽 2시 30분에 퇴함명령이 내려졌고, 이어서 5시 10분에 동료 구축함의 어뢰 2발을 맞았으나 3시간을 더 가라앉지 않고 버티다가 오전 8시 20분에 침몰했다. 제2항공전대장 야마구찌 다몬 소장과 함장인 가꾸 도메오 대좌가 416명의 전사자와 운명을 같이 했다.

1942년 6월 4일은 야마모또 제독에게 몹시도 가혹한 날이었다.
제1항공함대에서 약 600km 떨어진 본대에 있던 그에게 오전 11시경에 경순양함 나가라에서 나구모 제독이 3척의 항공모함을 잃었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해왔고 오후 늦게는 마지막으로 남은 항모 히류마저 불타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야마모또 제독은 상당히 당황했으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전투를 속행하기로 결심했다.
오후 8시 30분, 그는 일련의 명령을 내려 우선 본대를 최대속력으로 미드웨이 쪽으로 항진시키고, 항모 2척을 보유한 북방부대에게 즉시 남하하여 자신과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제1항공함대의 호위함들에게는 즉시 미국함대를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미드웨이 침공부대 지원함대를 이끌던 구리따 다께오 중장에게 휘하의 중순양함 4척(구마노, 스즈야, 미꾸마, 모가미) 과 구축함 2척을 이끌고 미드웨이를 포격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미드웨이 근해의 잠수함들에게도 밤에 미드웨이를 포격하고, 날이 밝으면 상처를 입은 미국 항공모함들을 찾아서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구리따 제독 휘하의 4척의 중순양함들은 미드웨이를 향하여 최대속력으로 접근했다.
오후 9시 30분에는 항공모함을 상실한 후 의기소침해 있던 나구모 중장의 지휘권을 박탈하여, 제1항공함대에 대한 지휘권을 미드웨이 침공부대 주력을 이끌고 있던 곤도 노부다께 중장에게 맡겼다.

하지만 야마모또 제독의 이러한 반격계획은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다.
우선 야마모또 자신이 이끄는 본대부터가 제1항공함대에서 500km 이상 떨어져 있었고, 북방부대 또한 마찬가지로 전투해역에 도착하려면 이틀이나 걸릴 예정이었다.
만일 제1항공함대와 미드웨이 침공부대 소속 수상함들이 미국함대를 쫓다가 밤새 그들을 포착하는데 실패할 경우 날이 새면 아직 항모를 2척이나 보유한 미국함대로부터 반격을 받아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실제로 순양함에서 발진한 정찰기의 보고에 따르면 미국함대는 일본함대로부터 200km의 간격을 유지하면서 동쪽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함대의 지휘관이 야전을 벌이려는 야마모또 제독의 속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자정을 막 넘긴 5일 새벽 0시 15분, 야마모또 제독은 곤도 중장에게  미국함대의 추격을 중단하고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새벽 2시 55분, 야마모또 제독은 마침내 미드웨이 작전의 중단을 공식선언하고, 휘하 함대에게 서쪽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북방부대에게는 남하 명령을 취소하고, 미드웨이 탈취에 실패함으로써 이미 소용이 없어진 애투와 키스카 섬 상륙을 강행하도록 명령했다.
이미 미드웨이 작전이 실패한 마당에 작은 전과라도 거두어야 한다는 계산이었다.
실제로 나중에 대본영 군령부는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를 철저히 은폐하고, 알류샨 열도의 애투와 키스카 섬 점령 사실만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야마모또 제독의 명령을 받고 미드웨이를 포격하기 위하여 고속으로 접근하던 구리따 제독의 미드웨이 침공부대 지원함대는 작전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황급히 철수했다.
6월 5일 새벽 3시 42분, 미국잠수함 SS-198 Tambor 가 미드웨이 서쪽 140km 지점에서 서쪽으로 급히 퇴각하는 구리따 함대의 함정들을 발견했다.
구리따 함대에서도 탬버 호의 잠망경을 발견했고 탬버 호는 일본구축함들이 폭뢰공격을 가하기 위하여 몰려오자 황급히 잠항하여 탈출했다.

 

(미국잠수함 탬버. 표준배수량 : 1,475톤, 길이 : 93.6m, 폭 : 8.3m,속력 : 수상 - 20.4노트, 수중 - 8.8노트, 항속거리 : 10노트로 20,000km, 잠항심도 : 76m, 승무원 : 60명, 무장 : 533mm 어뢰 발사관 - 전방에 6개 , 후방에 4개, 어뢰 24발, 76mm 함포 1문, 12.7mm 기관총 2정, 7.62mm 기관총 2정)

 

그런데 그 순간 탬버 호가 어뢰를 발사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중순양함 모가미가 회피운동을 하다가 자매함 미꾸마의 옆구리를 들이받고 말았다.
그리하여 미꾸마는 연료탱크가 터졌고, 모가미의 함수도 크게 부서졌다.
구리따의 중순양함 중 구마노와 스즈야는 먼저 대피했고, 상처를 입은 미꾸마와 모가미는 기름을 줄줄 흘리면서 2척의 구축함과 함께 14노트의 속력으로 뒤에 처졌다.

오전 7시 45분, 미드웨이를 떠난 돈틀레스들과 빈디케이터들이 모가미과 미꾸마를 공격했다.
이들은 또다시 한발의 폭탄도 명중시키지 못했으나, 대공포화에 피탄된 빈디케이터 한대가 미꾸마의 후방포탑에 자살공격을 감행하여 미꾸마를 대파하고, 안 그래도 느린 속력을 더 떨어뜨렸다.

 

(SB2U 빈디케이터 급강하폭격기. 승무원 : 2명, 길이 : 10.4m, 폭 : 12.8m, 최고속력 : 404km/hr, 항속거리 : 1,014km, 무장 : 7.62mm 기관총 2정, 1정은 동체, 1정은 오른쪽 날개, 454kg 짜리 폭탄 1발)

 

이어서 B-17 기들이 이들을 공격했으나 역시 모두 빗나갔다.

다나베 야하찌 소좌가 지휘하는 제30잠수전대 소속의 잠수함 I-168 호는 야마모또 제독의 명령에 따라 5일 새벽 1시30분에 해면에 부상하여 미드웨이를 향하여 100mm 포로 8발을 사격했다.
이 포탄 8발이 대공포화를 제외하고, 일본함대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실시한 유일한 포격이다.
그 이후 I-168 은 미드웨이 작전이 중지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상처입은 미국항공모함을 찾아서 격침하기 위하여 미드웨이 북쪽 해상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6월5일 새벽, 요크타운이 일본군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격침하라는 명령을 받고 요크타운에 접근했던 미국구축함 DD-410 Hughes 는 아직까지 요크타운이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보고했다.
오후 2시 26분에 예인선 Vireo 가 도착하여 3노트의 속력으로 요크타운을 예인하기 시작했다.
곧 벅매스터 함장이 이끄는 손상관리반이 승선하여 물이 새는 곳을 막고, 망가져 버린 기기들을 바다에 버림으로써 함의 중량을 줄여 침몰위험을 줄이고 예인하기 쉽도록 응급처치를 했다.

곧 구축함 DD-412 Hamman을 비롯한 여섯 척의 구축함이 더 도착했다.

해먼은 요크타운 옆에 바짝 붙어서 응급처치에 필요한 전력과 동력을 공급하고 ,나머지 6척은 주변에서 대잠경계망을 펼쳤다.

 

한편 밤새 일본함대를 피해서 미드웨이의 북동쪽 해상으로 물러났던 미국함대는 새벽이 가까워오자 15노트의 속력으로 서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정찰을 내보내기에는 돈틀레스의 숫자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스프루언스 제독은 정찰기를 발진시키지 않고 미드웨이의 정찰기에서 보고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8시 30분, 미드웨이의 카탈리나 기가 상처입은 항공모함 1척이 전함 2척 및 순양함 3척과 함께 북서쪽으로 도주 중이라고 보고했다.
이들은 일본제1항공함대의 호위함들 중 일부로서 전함 2척은 틀림없이 있었으나, 상처입은 항공모함 1척은 정찰기가 잘못 본 것이었다.
그러나 이 보고를 들은 스프루언스 제독은 즉시 미국함대를 북서쪽으로 변침시키고, 시속 25노트의 속도로 추격하기 시작했다.

오후 2시, 공격대의 출격을 앞둔 엔터프라이즈의 함교에서 제16기동부대의 참모장인 브라우닝 대령과 엔터프라이즈 항공단장 맥클러스키 소령 사이에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브라우닝 대령이 380km 떨어진 적을 공격하는데 450kg 짜리 대형폭탄을 달고 출격하라고 명령하자, 맥클러스키 소령이 그런 무거운 폭탄을 달고 그 먼거리를 폭격하러 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며 사령관 스프루언스 소장의 면전에서 브라우닝 대령에게 마구 대들었다.
제6정찰비행대장 갈라허 대위와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인 Georgr D. Murray 대령도 맥클러스키 소령의 주장에 동조했다.
보다못한 스프루언스 소장이 나서서 분노로 길길이 날뛰는 브라우닝 대령을 제지하고, 맥클러스키 소령에게

"자네들 조종사들이 원하는대로 해 주겠네."

라고 하면서 논쟁을 종식시켰다.

이런 것을 보면 미국의 항공모함에서 함재기 조종사들의 지위가 꽤 높고, 계급에 비하여 발언권이 상당히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4년 6월의 필리핀 해전 때도 오후 늦게 상당한 장거리 폭격을 감행하는 바람에 무려 80대의 함재기가 귀환 도중에 연료부족으로 캄캄한 밤바다에 불시착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구사일생으로 귀함한 제58기동부대의 기함 CV-10 Yorktown 비행단 소속 조종사들이 사령관 미처 중장에게 따지겠다며 전투지휘소에 들어가려고 하는 바람에 그것을 뜯어 말리느라고 제58기동부대 참모들이 진땀을 뺀 적도 있었다.
하긴 함정의 존재가치 자체를 순전히 함재기의 활동에 의존하고 있는 항공모함에서 함재기 조종사들이 누리는 권위와 특혜는 상당한 것이었다.

미해군의 어느 장교는 이를 빗대어

“항공모함이란 3,400 명의 하인들이 100 명의 도련님들을 모시고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함정”

이라고 빈정대기도 했다.  

오후 3시 12분, 32대의 돈틀레스들이 225kg 짜리 폭탄을 달고 엔터프라이즈를 떠났다.
호넷은 이번에도 연락을 늦게 받아서 3시 43분에야 공격대를 발진시킬 수 있었다.

폭격결과는 한심했다.
목표지점에서 항공모함은 커녕 일본구축함 다니까제 한 척밖에 발견하지 못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의 공격대는 다니까제에게 달려들어 폭탄을 퍼부었다.
그러나 모또이 가쓰미 중좌가 지휘하는 다니까제는 지그재그로 재빠르게 회피동작을 취하여 그 수많은 폭탄을 다 피했을 뿐 아니라 빈약한 대공화기로 반격을 가하여 제5정찰비행대 소속의 Samuel Adams 대위를 격추했다.

공격대가 귀환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일본잠수함의 위협을 무릅쓰고 귀환하는 비행사들을 위하여 전 함대의 등화를 환하게 밝혔다.
그 덕분에 대부분의 조종사들이 야간착함훈련이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대의 사고도 없이 무사히 착함을 마쳤다.
다만 호넷에서 발진한 돈틀레스 5대가 엔터프라이즈에 잘못 착륙하고, 제6정찰비행대의 돈틀레스 한 대가 호넷에 잘못 착륙하여 양함의 갑판요원들을 잠시 당황하게 만든 정도였다.

그렇게 6월 5일은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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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1항공함대 사령관인 나구모 쥬이찌 중장은 아까기가 공격을 당하여 기함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자 경순양함 나가라에 자신의 사령기를 옮겨 달았다.
나구모 중장과 참모들은 아까기의 함교에서 걸어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함교의 유리창을 깨고 밧줄을 타고 겨우 함교 밖으로 나와 구명보트를 타고 나가라로 옮겨갔다.
미드웨이 해전 이전까지 자신이 지휘하는 함을 단 한 척도 잃어본 적이 없던 나구모 중장은 불과 5분만에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정규항공모함 3척이 자기 눈앞에서 치명적인 피해를 당하자 그만 망연자실하여 나가라의 의무실에 드러누워 버렸다.
따라서 제1항공함대의 지휘권은 차석 지휘관인 아베 히로아끼 소장에게 넘어갔다.

아베 소장은 10시 50분에 지휘권을 받자마자 제2항공전대 사령관인 야마구찌 다몬 소장에게 미국항공모함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동시에 자신이 승좌한 나가라를 포함하여 제1항공함대의 모든 호위함정들에게 히류 주위로 모여서 진형을 형성하라고 명령함으로써 사실상 전투의 지휘권을 야마구찌 소장에게 넘겼다.
돈틀레스들의 공격 당시 현장에서 50km 정도 북쪽에 떨어져 있었던 관계로 참화를 피한 히류 함상에서 야마구찌 소장은 전투 지휘권을 받는 즉시 남아있던 히류의 비행대에 발진명령을 내렸다.

 

(일본항공모함 히류. 표준배수량 : 17,300톤, 길이 : 222m, 폭 : 22.3m, 속력 : 34.5노트, 항속거리 : 18노트로 14,200km/hr, 승무원 : 1,126명, 무장 : 5인치 포 12문, 25mm 대공포 31문, 함재기 : 예비기 16대 포함하여 73대)

 

오전 10시 58분, 발 급강하 폭격기 18대와 제로기 6대로 이루어진 공격대가 고바야시 미치오 대위의 인솔 하에 요크타운을 공격하기 위하여 항모 히류의 갑판을 떠났다.
고바야시 공격대는 요크타운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채 일단 2시간 전에 도네의 정찰기가 보고했던 지점을 향하여 출격했으나, 출격 직후 항모 소류를 공격하고 요크타운으로 돌아가던 제3폭격비행대를 발견했다.
고바야시 공격대는 이 돈틀레스들을 공격하는 대신 몰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오전 11시 33분, 제17기동부대의 플레처 소장은 돈틀레스들에게 공격받지 않은 일본항공모함이 최소한 1-2척 더 있다고 판단하고, 제5정찰비행대의 돈틀레스 10대에게 360km 에 걸친 적 항공모함 수색임무를 주어 발진시켰다.

11시 50분, 요크타운의 레이더가 남서쪽 50km 거리에서 접근하는 일본기들을 발견했다.
요크타운 함상에서 급유를 받고 있던 와일드캣들을 포함하여 요크타운의 가용한 와일드캣 12대가 즉각 출격했다.
제17기동부대의 연락을 받은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에서도 각각 4대씩의 와일드캣을 보내왔다.
또한 중순양함 펜사콜라와 구축함 3대가 제16기동부대로부터 파견되어 왔다.
꼬리에 고바야시 공격대를 달고 제17기동함대 상공에 도달한 제3폭격비행대는 요크타운에 착함을 거부당하고, 동남쪽으로 45km 떨어진 해상에 있던 제16기동부대로 날아갔다.

11시 56분, 미해군의 와일드캣들이 고바야시 공격대와 교전에 들어갔다.

일분 후인 11시 57분, 고바야시 공격대가 항모 요크타운의 항적을 발견했다.

미해군의 와일드캣 20대는 고바야시 공격대에 집요한 공격을 퍼부어 18대의 발 급강하폭격기 중 11대를 격추했다.

따라서, 요크타운 상공에 도달한 발 급강하폭격기는 7대였다.
당시 요크타운의 대공포화는 1.1인치 대공포의 시원찮은 성능을 고려할 때 상당히 정확한 편이어서, 선두에서 급강하폭격에 들어간 고바야시 대위 탑승기를 포함한 2대가 대공포화에 맞아 격추되었다.
고바야시 기는 폭탄을 분리한 직후 격추되었으나 250kg 짜리 폭탄은 제2번 엘리베이터 바로 뒤쪽을 뚫고 격납고 갑판에서 폭발했다.
몇 대의 함재기가 폭발을 일으켰으나 격납고의 스프링클러가 재빨리 작동하여 큰 화재로 번지지는 않았다.

당시 일본해군의 급강하폭격기 조종사들 또한 돈틀레스의 조종사 못지않은 베테랑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폭격은 상당히 정확했다.
고바야시 기에 이어 2번째 폭탄이 갑판을 직격했다.
그러나 요크타운은 일본항모들과는 달리 비행갑판에 연료와 무장을 만재한 함재기도, 격납고에 널려있던 폭탄도 없는 상황이었으며, 심지어 항공유 탱크와 파이프에는 폭발에 대비하여 이산화탄소가 채워져 있었으므로 폭탄 자체의 폭발 이외에 추가적인 유폭은 거의 없었다.

이어진 폭탄들은 지근탄을 기록하며 요크타운에 화재를 일으켰고 마지막 폭탄이 굴뚝으로 들어와서 기관실을 직격했다.
이 폭탄은 요크타운의 6개의 보일러 중 5개의 불을 꺼버려서 단 하나의 보일러에 의존하게 된 요크타운은 속력이 5노트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고바야시 공격대는 요크타운이 불길에 휩싸였다고 히류에 보고했다.

 

(고바야시 공격대에 폭격당한 직후의 요크타운 함상. 시커먼 연기는 기관실을 직격한 마지막 폭탄이 일으킨 화재로 인한 것이다. 화면 우측에 망치를 들고 있는 수병은 이전에 떨어진 폭탄으로 인하여 생긴 구멍을 수리하는 중이다. 화면 왼쪽으로 5인치 포와 1.1인치 대공포에 인원이 배치된 것이 보인다.앞에 보이는 와이어는 함재기 착함용 와이어. 윌리엄 로이 2등 사진사가 찍은 사진)

 

플레처 소장은 오후 1시 23분에 상처입은 요크타운을 떠나 순양함 아스토리아로 사령기를 옮겨 달았다.
그리고 니미츠 제독에게 무전을 보내어 전투의 지휘권을 제16기동부대의 스프루언스 소장에게 넘기겠다고 보고했고, 니미츠 제독도 승인했다.

그동안 요크타운의 손상관리반은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화재를 진압하고, 구멍난 비행갑판을 수리하고, 보일러의 기능을 정상화시켜서 오후 1시 50분경에는 속력을 20노트까지 낼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요크타운은 와일드캣들을 착함시켜 연료와 무장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한편 히류에서는 오전에 항모 소류에서 발진시켰던 2식 고속함상정찰기가 돌아와서 야마구찌 소장에게 요크타운의 제17기동부대와는 별도로 2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한 제16기동부대의 존재를 알렸다.
이 정찰기는 하필 제16기동부대를 찾았을 때 무전기가 고장나서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다.
야마구찌 소장은 고바야시 공격대가 요크타운을 격침시키거나 최소한 대파했으므로 이젠 새로 발견된 2척의 항공모함을 공격하기로 했다.

오후 1시 30분, 도모나가 죠이찌 대위가 지휘하는 히류의 제2차 공격대가 발진했다.
도모나가 공격대는 케이트 뇌격기 10대, 제로기 6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모나가 대위 탑승기는 오전의 미드웨이 공격에서 왼쪽 날개의 연료탱크가 파손된 상태였고 따라서 편도연료밖에 실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상 죽음을 각오한 공격이었다.

오후 2시 27분, 제16기동부대에서 지원나와 있던 CA-24 펜사콜라가 70km 전방에서 접근하는 도모나가 공격대를 발견했다.
요크타운에 착함하여 연료보급을 받고있던 와일드캣들이 즉시 연료보급을 중단하고 다시 날아올랐다.
CAP 임무를 맡고 있던 제3전투비행대의 와일드캣 6대는 고도 3,000m 에 있었기 때문에 1,500m 고도로 다가온 도모나가 공격대를 놓쳐 버렸다.
도모나가 대위는 화재를 진압하고 멀쩡하게 작전하고 있는 요크타운을 발견하고는 이 항공모함이 불과 3시간 전에 3발의 폭탄을 얻어맞은 항모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은 다른 미국항모라고 단정하고 공격했다.  

요크타운 전방 20km 지점에서 요크타운을 급히 이함한 와일드캣들이 도모나가 공격대를 덮쳤다.
케이트 뇌격기 4대와 제로기 3대가 격추되었다.
살아남아서 돌진해오는 케이트 뇌격기들을 향해서 제17기동부대의 호위함정들이 불을 뿜었다. 그 중에서 중순양함 아스토리아는 초저공으로 비행하는 케이트 뇌격기의 진행방향에 8인치 주포 사격을 가하여 거대한 물기둥을 연속적으로  일으키는 방식으로 1대의 케이트 뇌격기를 격추했다.

 

도모나가 대위는 살아남은 케이트 뇌격기들을 2개 편대로 나누어서 요크타운을 양쪽에서 협격했다.
그리고는 케이트 뇌격기들의 선두에서 앞장서 나가면서 어뢰를 발사하고는 그대로 돌진하여 요크타운의 비행갑판에 충돌했다.
요크타운의 함장인 Elliott Buckmaster 대령은 항공모함을 크게 좌회전시켜 가까스로 도모나가의 어뢰를 피했다.

하지만 도모나가 대위의 통찰력은 훌륭했다.
요크타운의 회전으로 인하여 절호의 사각을 확보한 나머지 4대의 케이트 뇌격기들이 2대씩 나뉘어 고도 15m 로 요크타운 전방 300m 까지 접근하여 함의 양쪽에서 동시에 어뢰를 발사했다. 벅매스터 함장은 그중 우현쪽에서 발사된 2발의 어뢰는 피할 수 있었으나 좌현 쪽에서 발사된 2발의 어뢰는 피하지 못했다.
오후 2시44분, 요크타운의 좌현 중앙부에 2발의 어뢰가 연속적으로 명중하면서 거대한 물기둥을 일으켰다.

 

(요크타운의 좌현에 일본군의 항공어뢰가 명중하는 순간. 중순양함 펜사콜라에서 찍은 사진)

 

즉각 요크타운의 모든 동력과 전기가 나갔으며 함체는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피격 직후에는 기울기가 6도였으나 5분만에 17도로 다시 5분만에 26도까지 기울었다.
피격 11분 후인 오후 2시 55분, 벅매스터 함장은 요크타운에 퇴함명령을 내렸다.

 

(어뢰에 맞은 직후 요크타운 함상의 모습. 비행갑판의 기울기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정면의 수병은 이미 구명의를 입고 있다.)

 요크타운이 어뢰를 맞은 직후인 오후 2시 50분, 오전 11시 33분에 요크타운을 떠난 제5정찰비행대의 돈틀레스 1대가 일본함대에 남은 마지막 항공모함인 히류를 발견했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즉각 공격명령을 내렸다.
제6정찰비행대에서 7대, 제6폭격비행대에서 3대, 요크타운에서 옮겨온 제3폭격비행대에서 15대등 총 25대의 돈틀레스가 제6정찰비행대장 갈라허 대위의 지휘 하에 오후 3시 30분까지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을 떠났다.

엔터프라이즈에서는 또다시 실수를 하여 히류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3시 15분에야 호넷에 전달했는데 그때 호넷은 오전의 출격에서 일본항모를 찾지 못하고 미드웨이로 갔던 제8폭격비행대를 맞아들이고 있었다.
결국 호넷의 공격대가 떠난 것은 4시가 되어서였다.

오후4시45분, 엔터프라이즈를 떠난 돈틀레스들이 히류 상공에 도달했다.

돈틀레스들은 고도 6,000m 상공까지 올라간 후 오후 5시 5분에 태양을 등지고 급강하폭격에 들어갔다.
CAP 임무를 맡고 있던 제로기 3대가 급상승하면서 공격을 가하여 웨버 소위의 탑승기를 격추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총 25대에 달하는 돈틀레스들의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국함대를 향하여 제3차 공격대를 발진시키려던 히류는 필사적인 회피운동을 하여 제6정찰비행대가 투하한 폭탄 중 첫 3발을 피하는데 성공했다.
첫 3발의 폭탄이 빗나가는 걸 본 제3폭격비행대가 전함 하루나를 폭격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제6정찰비행대를 따라 히류를 향하여 급강하폭격을 시작했다.
곧 히류의 앞갑판에 연속적으로 4발의 폭탄이 명중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하여 고속으로 항진하고 있던 히류는 앞갑판의 불이 금방 함선 전체로 번지면서 순식간에 오전에 공격당한 동료항모 3척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제3폭격비행대의 돈틀레스 2대는 전함 하루나를 폭격했으나 빗나갔다.
제로기의 반격에 의하여 2대의 돈틀레스가 더 격추되어 엔터프라이즈의 공격대는 총 3대의 돈틀레스를 상실했으나 그 대신 제1항공함대의 마지막 남은 항모 히류를 끝장내어 버렸다.

 

(불타는 히류. 일본의 수상정찰기가 찍은 사진)

16대의 돈틀레스로 편성된 호넷의 공격대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전투가 끝난지 15분이 지나서였다.
호넷의 공격대는 이미 치명타를 얻어맞고 불타고 있는 히류를 무시하고 전함 하루나와 중순양함 치꾸마를 폭격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그리하여 이 영광과 승리의 날에 호넷의 비행단은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

여담이지만 이날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무능하다고 찍힌 미처 제독은 그후로 고생을 단단히 하게 된다.
즉 그때까지만 해도 미해군의 항공관계자들 사이에서 가장 촉망받는 차기주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던 미처 제독은 미드웨이 해전이 끝나고 3주일 후인 1942년 6월 30일에 단행된 태평양함대의 인사이동에서 요직인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사령관 자리를 꿰차지 못하고 카탈리나 기를 관리하는 한직인 진주만의 정찰비행대장으로 밀려난다.
이후로도 스프루언스 제독이 니미츠 제독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태평양함대의 실세 참모장으로 버티고 있는 동안 미처 제독은 1942년 12월에 누메아의 항공대사령관, 1943년 4월에는 솔로몬군도 항공대 사령관 등을 지냈다.

스프루언스 제독이 제5함대 사령관직을 맡아 해상으로 나가게 된 1943년 8월의 인사이동에서는 다시 미본토 서해안의 해군항공대 사령관으로 밀려나는 등 1944년 1월까지 해군항공관계자들의 영원한 꿈이자 로망인 항공모함 기동부대 근처에는 얼씬도 해보지 못하고 육상근무만 전전하게 된다.
하지만 미처 제독은 그렇게 육상에서 전전하면서도 항상 맡은 일에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하여 가는 곳마다 뛰어난 성과를 올렸고, 원래가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으므로 곧 핼시 제독을 비롯한 태평양함대의 항공관계자들에게 상당한 신뢰를 얻게 된다.
그러한 태평양함대 항공관계자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바탕으로 그는 1944년 1월에 제5함대가 가진 타격력의 실체이며, 사실상 태평양함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고속항공모함부대인 제58기동부대의 사령관이 된다.

미처 제독은 길버트 제도 상륙작전에서 지나치게 소극적인 작전을 벌였다는 이유로 경질된 파우널 제독의 후임으로 앞으로 직속상관이 될 제5함대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니미츠 제독의 결정에 따라 드디어 마셜 제도 상륙작전에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이 작전에서 미처 제독은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아주 능수능란하게 지휘하여 뛰어난 성과를 거둠으로써 이후로는 스프루언스 제독도 미처 제독의 실력을 인정하게 된다.

오후 6시, 스프루언스 제독은 중순양함 아스토리아 함상의 플레처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히류에 대한 공격경과를 보고하고 나서 전문의 말미에 다른 훈령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미 오후 2시에 전투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던 스프루언스 제독이 굳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던 플레처 제독은

“훈령은 없다. 본관은 귀관의 행동을 따르겠다.”

라고 타전하여 제17기동부대를 포함한 전 함대의 전술적 지휘권이 완전히 스프루언스 소장에게 이양되었음을 명확하게 확인해 주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확실히 조심스럽고 신중한 스프루언스 제독은 스포트라이트를 즐기고 나서기 좋아하는 핼시 제독과는 대조적이다.
실제로 1943년 초에 니미츠 제독이 말라리아로 입원하게 되었을 때 만약 당시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이었던 핼시 제독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체스터가 아파서 입원했으니 그가 퇴원할 때까지는 태평양해역의 유일한 4성 제독인 내가 잠정적인 태평양함대 사령관이다."

라고 나설까 봐 두려워하여 진주만의 사령부에 계속하여 4성기를 걸어놓게 하고 입원사실 자체를 비밀로 했었다.(나의 입원을 핼시에게 알리지 말라?)

히류를 격파한 돈틀레스들은 6시 8분부터 엔터프라이즈에 착함을 시작하여 6시 34분에 착함을 마쳤고, 그날의 CAP 임무를 마친 엔터프라이즈의  마지막 와일드캣이 착함한 시간은 오후 7시 20분이었다.

플레처 제독으로부터 함대 전체의 전술적 지휘권을 확실하게 넘겨받은 스프루언스 제독은 오후 7시 15분, 제16기동부대와 제17기동부대에게 동쪽으로 변침할 것을 지시했다.
동쪽으로 물러나던 미국함대는 자정쯤 되어서 북쪽으로 변침했다.

비록 제16기동부대와 제17기동부대가 일본 제1항공함대의 항공모함 4척을 전멸시켰지만 아직도 막강한 일본의 수상함 세력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스프루언스 제독은 수상함대를 지휘하던 직감으로 일본함대가 수상함에 의한 야전을 시도하리라는 점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한척의 전함도 없는 미국함대의 약체 수상함 세력을 가지고 다수의 전함을 보유하고, 게다가 무서운 산소어뢰와 야전에 익숙한 승무원들을 가진 일본함대와 야전을 벌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앞으로 몇 시간 동안만 일본함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망다니다 보면 해가 뜰 것이고 그러면 다시 함재기들을 내보내어 전함이든 뭐든 전부 다 바다에 쓸어넣어 버릴 수 있는데 굳이 열세한 수상함 세력으로 야전의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스프루언스 제독의 판단은 정확했다.

야마모또 제독은 실제로 야전을 기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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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정찰/폭격 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 32대를 이끌고 있던 엔터프라이즈의 비행단장  Clarence Wade McClusky, Jr. 소령은 9시 20분에 일본함대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해상에 도착했으나, 눈에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뿐이었다.
일본함대가 이미 남동쪽으로 통과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한 맥클러스키 소령은 남서쪽으로  55km 정도 더 가본 다음 침로를 되돌려서 북동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변침하여 귀환하기로 했다.
이함한지 벌써 2시간이나 지나 연료 상황이 우려할만한 수준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시 맥클러스키 소령의 결심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남서쪽으로 갔다가 일본함대를 발견하지 못한 맥클러스키 소령은 북동쪽으로 변침했다.

 

(맥클러스키 소령)

 

9시 47분, 맥클러스키 소령은 북쪽 바다에서 가느다란 항적을 하나 발견했다.
일본함대에서 떨어진 함정이 본대를 찾아간 항적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한 맥클러스키 소령은 일본구축함 아라시가 남긴 그 항적을 따라갔다.

 

(일본해군의 가게로급 구축함 아라시)

 

제6뇌격비행대의 공격이 끝나고 제3뇌격비행대의 공격이 막 시작되고 있던 오전 10시 02분, 맥클러스키 소령은 3척의 일본항공모함을 발견했다.
제4의 항모인 히류는 그날 가장 일찍 변침했기 때문에 수평선 너머인 50km 정도 더 북쪽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맥클러스키 소령은 엔터프라이즈에 간단한 접촉보고를 하고나서 6,000m의 고도를 유지하면서 공격위치로 이동했다.

제6정찰/폭격비행대의 상태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제6폭격비행대 소속의 Tony Schneider 소위의 탑승기는 적 발견 직후 연료가 고갈되어서 모함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게다가 제6폭격비행대의 돈틀레스 몇 대는 호흡용 산소가 다 떨어졌다.
할수 없이 제6폭격비행대장인 Richard Best 대위는 제6폭격비행대를 이끌고 호흡용 산소가 필요없는 4,500m 고도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 외에는 맥클러스키 소령 지휘 하의 돈틀레스들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공격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적을 향하여 바로 급강하하면 되는 위치에 있었으며, 제로기는 전부 다 저공에서 제3뇌격대와 교전하느라고 폭격을 방해할 제로기도 없었고 그들을 공격하는 대공포화도 없었다.
한마디로 아무런 방해없이 기습적으로 급강하 폭격을 실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일본함대의 남서쪽에서 접근한 맥클러스키 소령은 세 척의 항모 중 남쪽에 있던 두 척의 항모 -서쪽의 카가와 동쪽의 아까기- 를 목표로 정했다.
맥클러스키 소령이 직접 이끄는 제6정찰비행대로부터 1,500m 아래에 있던 제6폭격비행대의 베스트 대위는 자신들로부터 가까이 있는 항모 카가를 공격하겠다고 맥클러스키 소령에게 전했다.
하지만 그 통신을 듣지 못했던 맥클러스키 소령은 제6정찰비행대를 모두 이끌고 카가를 향하여 급강하 폭격에 들어갔다.

베스트 대위는 자신보다 1,500m 더 윗쪽에 있던 제6정찰비행대가 갑자기 제6폭격비행대의 진로를 가로지르며 급강하폭격에 들어가자 깜짝 놀랐으며, 진형을 유지하라는 베스트 대위의 긴급명령을 듣지못한 제6폭격비행대의 돈틀레스 5대도 얼떨결에 맥클러스키 소령을 따라 카가를 향하여 급강하 폭격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카가를 향하여 급강하 폭격에 들어간 돈틀레스는 합계 22대나 되었다.
맥클러스키 소령이 급강하 폭격에 들어간 직후 일본제1항공함대에서도 이 돈틀레스들을 발견했으나 초속 140m 의 속력으로 급강하하는 돈틀레스들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고도 6,000m에서 급강하를 시작한 돈틀레스들은 고도 450m 에 이르자 맥클러스키 소령을 선두로 하여 차례로 폭격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표적이 된 카가는 필사적으로 회피기동에 들어갔다.
그 노력이 주효하여 가장 선두에서 돌입하던 맥클러스키 소령과 그 요기들인 William Pittman 소위와 Richard Jaccard 소위의 폭탄은 빗나갔다.

그 당시 돈틀레스들은 고참인 편대장과 2명의 신참인 요기를 묶어 3대가 하나의 편대를 이루고 급강하폭격시에도 편대장을 따라 같은 코스로 급강하하다가 편대장을 따라 같은 고도, 같은 위치에서 폭탄을 투하하였기 때문에 편대장의 폭탄이 빗나가면 그 편대의 폭탄은 대부분 다 빗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해군 중의 일부는 자기들의 머리 위에서 바로 떨어져 내려오는 돈틀레스들을 보면서 그 급박한 순간에도 제6정찰/폭격비행대의 폭격실력도 2시간 전의 헨더슨 공격대와 비슷하게 형편없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기대한 사람도 꽤 많았다고 하지만 완전히 착각이었다.

미해군은 복엽기 시대에 이미 함상 급강하폭격기를 정식으로 채택할만큼 함상 급강하폭격기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선구자였다. 

 

(F8C 헬다이버 함상 급강하 폭격기. 육군항공대의 공격기인 A-3 Falcon 의 함상 급강하폭격기 형이다. 승무원 : 2명, 길이 : 8.3m, 폭 : 11.6m, 최고속력 : 224km/hr, 항속거리 : 1,010km,  무장 : 7.62mm 기관총 6정, 4정은 정면, 2정은 후방석, 45kg 짜리 폭탄 2발)

 

따라서, 미해군 항공대는 특히 급강하폭격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국항공모함의 급강하폭격기 조종사들 중 많은 수가, 특히 편대장 급들은 대부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략하기 이전에 돈틀레스의 전신인 빈디케이터부터 급강하폭격기를 탔던 사람들이엇다.
한마디로 3년 이상의 기간동안 항공모함 비행대끼리 서로 경쟁해가며 밥먹고 급강하폭격만 해온 사람들로서 비행학교를 갓 졸업하여 급강하폭격방식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던 헨더슨 공격대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카가는 급격한 회피기동으로 처음 3개의 폭탄은 무사히 피했으나 10시 22분, 4번째로 돌입한 제6정찰비행대장 Gallaher 대위가 투하한 225kg 짜리 폭탄이 고물쪽 비행갑판에 몰려있던 뇌격기 한가운데 정확하게 명중했다.
순식간에 뇌격기들의 연료와 무장이 폭발하면서 전 갑판에 걸쳐 폭발이 일어났다.
갈라허 대위의 요기들이 투하한 폭탄들은 2발 모두 지근탄을 기록했다.

이들 중 한대인 John Q. Roberts 소위의 탑승기는 급강하에서 고도를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해상에 추락하여, 로버츠 소위와 후방사수인 Thurman R. Swindel 병장이 전사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서 7번째로 돌입한 Norman "Dusty" Kleiss 중위가 투하한 폭탄은 카가의 전방 엘리베이터를 뚫고 들어가 격납고 갑판에서 폭발하여 그곳에서 무장을 달고 연료보급을 받고 있던 함재기들을 순식간에 날려버렸고 그 충격으로 함교의 유리창이 다 깨졌다.
이어서 클라이스 중위의 요기가 투하한 3번째 명중탄이 함교 바로 앞에 있던 유조차에 명중하여 불타는 휘발유의 화염이 함교를 덮쳐 지사꾸 오까다 함장 이하 함교 요원들이 전원 사망했다.
마지막에 명중한 폭탄은 제6폭격비행대가 투하한 500kg 짜리 대형폭탄이었는데 역시 격납고 갑판에 명중했다.
당시 폭격에 참가했던 제6정찰/폭격비행대는 카가에 8발 이상의 명중탄을 보고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명중탄은 위의 4발이다.
카가는 전투를 시작한지 불과 30초만에 4발의 폭탄에 명중당하여 연료와 무장을 만재한 비행갑판과 격납고 갑판의 항공기들에다가 격납고 갑판 여기저기에 널려있던 폭탄들까지 한꺼번에 유폭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통제불능의 치명적 상태가 되었다.

 

(일본항공모함 카가. 표준배수량 : 38,200 톤, 길이 : 247.7m, 폭 : 32.5m, 속력 : 28.5노트 승무원 : 1,708명, 무장 : 200mm 포 10문, 120mm 포 16문, 20mm 대공포 22문, 함재기 : 에비기 18대 포함하여 90대)

 

한편, 베스트 대위가 이끄는 제6폭격비행대 소속 9대의 돈틀레스들은 북동쪽으로 나아가 아까기를 공격했다.
10시 26분, 가장 먼저 급강하한 베스트 대위가 투하한 500kg 짜리 폭탄이 아까기의 비행갑판을 뚫고 들어가 격납고 갑판에서 폭발했다.
베스트 대위의 요기들 중 Edwin J. Kroeger 중위의 폭탄은 지근탄을 기록했으나, 이어서 돌입한 Frederick T. Weber 소위가 투하한 500kg 짜리 폭탄은 고물쪽 비행갑판에 몰려있던 함재기들의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제6폭격비행대에서는 아까기에 대하여 몇 발의 명중탄을 더 보고하고 있으나,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베스트 대위와 그의 요기인 웨버 소위의 2발이다.
아까기에서도 역시 카가에서와 같이 함재기의 연료와 무장, 격납고의 폭탄유폭으로 인한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그러나, 카가에서와는 달리 나구모 중장을 비롯한 함교 요원들은 대부분 목숨을 건졌고, 나구모 중장은 그의 사령기를 경순양함 나가라로 옮겼다.

 

(나구모 제독의 기함 아까기. 표준배수량 : 36,500 톤, 길이 : 260.7m, 폭 : 31.3m, 속력 : 31노트, 항속거리 : 12노트로 15,200km, 승무원 : 1,630명 무장 : 8인치포 6문, 120mm 포 12문, 25mm 대공포 28문, 함재기 : 예비기 25대 포함하여 91대)

 

엔터프라이즈의 제6정찰/폭격비행대가 카가와 아까기를 폭격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 Max Leslie 소령이 지휘하는 요크타운의 제3폭격비행대는 소류를 공격하고 있었다.
레슬리 소령에게는 그날이 상당히 재수가 나쁜 날이었다.
제3폭격비행대는 인력이 아닌 전기로 작동하는 기계를 이용하여 무장장착을 실시했는데 아직까지 사람의 실력보다 신뢰성이 떨어졌던 그 기계 때문에 17대의 돈틀레스 중에 레슬리 소령 탑승기를 포함한 5대의 폭탄이 불완전하게 장착되었고 그들은 비행 도중에 폭탄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제3폭격비행대 소속 17대의 돈틀레스 중에 실제로 소류의 폭격에 참가한 것은 12대였다.

레슬리 소령의 제3폭격비행대는 일본함대를 발견한 후 제3뇌격비행대 및 제3전투비행대와 헤어져 6,000m 상공에 올라가서 폭격위치를 잡았다.
마침 그때 남쪽에서는 맥클러스키 소령의 제6정찰/폭격비행대가 홀연히 나타나서 카가와 아까기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광대한 대양에서 따로 행동하는 두 개의 공격대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집결하려면 몇 주간의 집중적인 훈련을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참으로 신기한 우연의 일치였다.

오전 10시 28분, 레슬리 소령은 3척의 항모들 중 북쪽에 위치하여 제3폭격비행대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카가로 보이는 항공모함 -사실은 소류- 을 향하여 급강하했다.
하지만 폭탄이 없는 레슬리 소령은 사용가능한 유일한 무기인 12.7mm 기관총을 사용하여 소류의 대공포화와 이물의 비행갑판 쪽으로 기총소사를 가했으나 잠시 후 그것마저 고장나 버렸다.
하지만 레슬리 소령의 뒤를 이어 급강하폭격을 실시한 제3폭격비행대의 돈틀레스들은 소류에 3발의 명중탄을 기록하여 소류를 카가나 아까기와 같은 아비규환의 불지옥으로 만들었다.

 

(일본항공모함 소류. 표준배수량 : 15,900톤, 길이 : 222m, 폭 : 21m, 속력 : 34.5노트, 승무원 : 1,103명, 무장 : 5인치포 12문, 25mm 대공포 26문, 13.2mm 기관총 15정, 함재기 : 예비기 16대 포함하여 73대) 

 

그리하여 제6정찰/폭격비행대와 제3폭격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들은 불과 5분 동안에 일본이 자랑하는 정예항모 3척을 그 함재기와 함께 철저히 격파했다.

 

 

(돈틀레스들의 공격 순간을 재현한 디오라마)

단 5분만에 제1항공함대의 기함 아까기와 동급함인 대형항공모함 카가를 물에 뜬 거대한 불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제6정찰/폭격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들은 눈앞에서 자신들의 모함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는 것을 보고 분노로 눈이 뒤집힌 제로기들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맥클러스키 소령은 2대의 제로기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서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후방사수인 Walter G. Chochalousek 병장은 7.7mm 기관총으로 이 2대의 제로기를 상대하여 한대를 격추시키고 나머지 한대를 쫓아버렸다.
제6정찰비행대 소속 피트맨 소위의 후방사수인 Floyd Adkins 상병은 7.7mm 기관총의 고정대가 망가지자 무게가 80kg 이나 나가는 기관총을 직접 손에 들고 사격하여 제로기 한대를 격추했다.

제6정찰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 6대는 Charles R. Ware 대위 지휘 하에 견고한 그룹을 형성하여 현장을 탈출했다.
이 그룹은 초저공으로 천천히 해면을 비행하며 서로의 사각을 보완하고 접근하는 적기에 화력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한대도 격추당하지 않고 무사히 사지를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후방사수인 Earl Howell 상병은 제로기 한대를 격추했다.

그러나 일본함대 상공에서 살아남은 돈틀레스들에게는 무사하게 항모에 귀환해야하는 또다른 과제가 놓여 있었는데, 여기에는 크게 2가지의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이함한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고 폭격과정과 탈출과정에서 많은 연료를 소비하여 연료잔량이 달랑달랑한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제6정찰/폭격비행대의 그 누구도 제16기동부대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모른다는 점이었다.
원래 함재기 조종사들은 이함할 때 ‘Point Option’ 이라고 하여 그들이 돌아왔을 때 시간별로 항공모함이 있을 장소에 대하여 미리 브리핑을 받게 되어 있었으나, 이번 출격에서는 그러한 포인트 옵션이 없었으며 다만 출격 후에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이 남서쪽으로 25노트의 속력으로 항진할 것이라는 간단한 통보를 받았을 뿐이었다.

연료를 아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6정찰/폭격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들은 하나씩 연료가 고갈되어 추락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희생자는 그룹을 형성하여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 웨어 대위의 그룹에서 나왔다.

제6정찰비행대 소속의 Frank O'Flaherty 소위와 후방사수인 Bruno P. Gaido 병장은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안전하게 탈출하여 구조용 고무보트에 무사히 올라타는 것까지 동료들에 의하여 목격되었다.
그후 오플라허티 소위와 가이도 병장은 일본구축함에 구조되었으나, 일본군들은 그들을 심문한 후에 온 몸을 포박하고, 발에 무거운 물건을 달아서 바다에 던져 버렸다.
웨어 대위의 그룹 5대 중에서 John McCarthy 소위 탑승기만이 제16기동부대를 찾아와서 부근 해상에 착수하여 무사히 귀환했고, 나머지 4대는 방향을 잘못 판단하여 실종되었다.

그 외의 돈틀레스들은 좀 더 운이 좋았다.
제6폭격비행대의 Tom Ramsay 소위와 S. L. Duncan 상병은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6월 12일에 미드웨이의 카탈리나 기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Joe Penland 대위와 후방사수인 H. F. Heard 상병도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다음날 구축함 DD-360 Phelps 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C. E. Dickinson 대위도 무사히 제16기동부대를 찾아와서 부근 해상에 불시착했다.

전체적으로 제6정찰비행대 17대중 8대, 제6폭격비행대 14대 중의 5대가 무사히 돌아왔는데 2대는 손상이 너무 심하여 다시는 비행할 수 없었다.
이들 중 마지막 기체는 정오 직후에 착함하였는데 무려 5시간을 공중에 떠 있었다.
제6뇌격비행대에서는 14대 중 4대가 돌아왔는데 1대는 손상이 너무 심하여 착함한 직후 바다에 밀어넣어 버렸다.
소류를 요절낸 제3폭격비행대의 돈틀레스들은 제17기동부대를 제대로 찾아왔으나 요크타운은 이들의 착함을 불허하고 제16기동부대로 보냈다.

일본항모 중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항모, 히류가 제17기동부대에 공격대를 보내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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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를 떠난 아벤저 뇌격기들이 일본제1항공함대에 돌입하기 직전인 오전 7시, 일본제1항공함대로부터 250km 거리에 도달한 제16기동부대의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은 공격대를 발진시키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단 몇 분간의 시간차이로 승부가 결정되는 긴박한 함대항공전의 경험이 전혀 없던 스프루언스 제독과 그 참모들은 큰 실수를 저질렀다.
즉 그들은 이함한 함재기들이 함대 상공에서 편대를 편성하여 공격지점으로 떠나는 방식을 채택했는데, 이 방식은 일단 이함한 함재기들이 함대 상공에서 편대를 편성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단 몇 분의 시간이 아쉬운 이런 상황에서는 결코 좋은 방식이 아니었다.
시간이 촉박할 때에는 가장 속력이 느린 뇌격기부터 이함하여 바로 목표지점으로 출발하고, 이어서 중간 속력인 급강하 폭격기가 그 뒤를 따르고, 마지막으로 가장 빠른 전투기들이 이함하여 그 뒤를 쫓음으로서 각 기종간의 속력 차이로 인하여 목표물을 향하여 비행하는 도중에 자연히 편대가 형성되도록 하는 '비행 중 집결(running rendezvous)' 방식을 쓴다.

이미 산호해 해전에서 피말리는 시간과의 전쟁인 함대항공전을 겪어본 요크타운에서는 편대 형성에 이 방식을 사용했다.

엔터프라이즈에서는 7시부터 CAP 임무를 맡은 8대의 와일드캣이 이함하기 시작하여 제6정찰비행대와 제6폭격비행대 소속 37대의 돈틀레스들이 엔터프라이즈 비행단장 맥클러스키 소령의 인솔 하에 차례차례 비행갑판을 떠났다.
함대 상공에서 편대를 형성할 경우에는 비행중 집결 방식과 달리 체공시간이 긴 항공기부터 발진한다.

이들 중 갑판 앞쪽에 주기되어 활주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은 제6정찰비행대 소속 6대의 돈틀레스들은 225kg 짜리 폭탄을 한발 싣고 있었고, 나머지 제6정찰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 13대는 225kg 짜리 폭탄 한 발에 45kg 짜리 폭탄 2발을, 그리고 18대의 제6폭격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들은 450kg 짜리 대형폭탄 하나를 장비하고 있었다.  
정찰비행대는 폭격비행대보다 고참인 조종사들이 집결하여 폭격임무에다가 정찰임무까지 더하여 수행하는 비행대로서 이들의 폭격실력은 전반적으로 폭격비행대보다 더 뛰어나다.

돈틀레스들의 발진이 진행중이던 오전 7시 20분, 스프루언스 제독은 일본군의 반격에 의하여 항공모함 2척이 한꺼번에 피해를 입는 일을 막기 위하여 미처 제독에게 호넷을 분리하여 따로 행동하도록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호넷은 중순양함 2척(미네아폴리스, 뉴올리언스), 경순양함 1척(애틀란타), 구축함 4척과 함께 엔터프라이즈와 떨어져서 따로 진형을 형성했다.

오전 7시 25분, 마지막 돈틀레스가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을 떠났으나 갑판 위에서는 말썽을 일으킨 4대의 돈틀레스 때문에 후속 함재기의 발진이 늦어지고 있었다.
결국 이 돈틀레스들을 발진시키기를 포기하고, 마지막 돈틀레스가 이함한지 20분이나 지난 7시 45분에 제6전투비행대 소속의 와일드캣 10대가 이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편대를 형성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스프루언스 소장은 함대 상공에서 대기 중이던 맥클러스키 소령 지휘 하의 돈틀레스 33대에게 즉시 일본함대를 찾아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엔터프라이즈의 공격대는 분산되기 시작했다.
원래는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이 각 함이 보유한 돈틀레스, 데버스테이터, 와일드캣을 가지고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하나씩 형성하려는 계획이었지만 이젠 불가능해졌다.
엔터프라이즈 공격대는 돈틀레스의 뒤를 이어 이함한 제6전투비행대가 호넷의 제8뇌격비행대를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제6뇌격비행대로 착각하여 따라가 버림으로써 기종별로 완전히 분리되어 버렸다.
따라서 제6전투비행대의 뒤를 이어 이함한 엔터프라이즈의 제6뇌격비행대는 와일드캣의 호위없이 일본항공모함을 찾아 나섰다.

 

(1942년 6월 4일 아침 엔터프라이즈에서 출격하기 직전의 제6뇌격비행대 소속 데버스테이터 뇌격기들의 모습)

 

엔터프라이즈에서 출격한 공격대는 돈틀레스 33대, 데버스테이터 14대, 와일드캣 10대 등 총 57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호넷 쪽은 사정이 좀 나아서 일단 돈틀레스 35대, 데버스테이터 15대, 그리고 와일드캣 10대로 이루어지는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형성하여 일본항모를 찾아서 출발하는데 성공했다.
호넷에서 출격한 공격대의 숫자는 합계 60대 였다.
따라서 제16기동함대로 보면 돈틀레스 68대, 데버스테이터 29대, 와일드캣 20대 등 총 117대였다.

뒤에 처져있던 제17기동부대의 요크타운에서는 오전 8시 38분에 공격대를 발진시켰는데 데버스테이터 12대, 돈틀레스 17대, 와일드캣 6대의 순서대로 발진시켜서 비행중 집결 방식으로 편대를 형성하여 일본항공모함을 공격했다.
요크타운을 출격한 공격대는 합계 35대였다.

제16기동부대와 제17기동부대를 합하여 돈틀레스 85대, 데버스테이터 41대, 와일드캣 26대로 총 152대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제17기동부대를 지휘하던 플레처 소장은 이미 발견된 2척의 일본항모 외에 추가로 적의 항모가 발견될 때를 대비하여 제3전투비행대의 와일드캣 중 6대와 제3폭격비행대, 제3뇌격비행대만으로 공격대를 편성하고 제3전투비행대의 절반과 제5정찰비행대는 예비로 보유했다.

오전 8시 20분경, William Brockman 소령이 지휘하는 미잠수함 SS-168 Nautilus 가 일본제1항공함대 진형의 한복판에서 잠망경을 올렸다.
노틸러스는 눈에 보이는 적의 대형함정을 향하여 어뢰를 발사했으나 빗나갔고 곧 주변에 있던 경순양함 나가라와 구축함 아라시가 다가와서 폭뢰공격을 가했다.
20여분간의 치열한 폭뢰공격을 견뎌내고 해상이 잠잠해지자 노틸러스는 잠망경을 올렸다가 아직까지 주변에 있던 구축함 아라시에게 다시 발각되어 또다시 폭뢰공격을 받았다.
아라시는 20여분간 폭뢰공격을 퍼붓다가 9시 18분에 변침하여 북상하기 시작한 본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현장을 떠났다.
아라시는 해상에 일본제1항공함대로 향하는 길다란 항적을 남기면서 본대와 합류했다.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이 가느다란 항적이 잠시 후에 일본해군의 머리 위에 죽음의 사자를 불러들이게 된다.  

제6정찰비행대와 제6폭격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 32대를 이끌고 있던 엔터프라이즈 항공단장 맥클러스키 소령은 오전 7시 45분에 엔터프라이즈의 상공을 떠나서 방위 231도로 향했다.
그의 계산으로는 그 방위로 가면 9시 20분쯤에 일본제1항공함대의 상공에 도달할 예정이었다.
원래 엔터프라이즈를 떠날 때는 33대였으나 Eldor Rodenburg 소위가 조종하는 한 대는 엔진 고장으로 모함으로 돌아갔다.

 

(SBD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 승무원 : 2명, 길이 : 10.1m, 폭 : 12.7m, 최고속력 : 410km/hr, 항속거리 : 1,240km, 무장 : 동체 전면에 12.7mm 기관총 2정, 후방석에 7.62mm 기관총 1정, 폭장량 최대 1,020kg)


하지만 일본제1항공함대는 도모나가 공격대의 귀환이 끝난 9시 15분에 미드웨이를 향하여 남동쪽으로 오던 침로를 제17기동함대가 있는 방향인 북동쪽으로 바꾸었다.

한편 호넷을 떠난 공격대는 제대로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형성하여 일본항모가 있다고 보고된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갑자기 제8뇌격비행대장인 John C. Waldron 소령이 적이 발견된 지점까지 가지말고 적의 예상침로를 따라서 남서쪽으로 침로를 바꾸자고 호넷 비행단장인 Stanhope C. Ring 중령에게 건의했다.
링 중령이 일단 적이 발견된 곳까지 서쪽으로 가자고 말하자 왈드론 소령은 링 중령과 무전기로 티격태격하다가 본대를 따르라는 링 중령의 명령을 어기고, 독단으로 제8뇌격비행대를 이끌고 본대와 헤어져 남서쪽으로 향했다.

왈드론 소령의 추측은 때마침 변침을 실시했던 일본함대의 행동과 딱 맞아 떨어져서 제8뇌격비행대는 미국항모기동부대의 함재기들 중 가장 먼저 일본 제1항공함대를 찾아내어 공격하게 된다.
이때 호넷의 제8전투비행대는 링 중령의 명령에 따라 제8정찰/폭격비행대를 따라 계속 서쪽으로 감으로써 호넷 공격대도 흩어지게 되었다.
호넷의 돈틀레스들과 와일드캣들은 정찰기가 보고한 해상에 도달하여 보고된 일본함대의 침로를 따라 남동쪽으로 비행하면서 주변을 수색하였으나, 이미 북동쪽으로 변침해버린 일본함대를 찾지 못한 채 연료가 떨어져 제8정찰비행대의 돈틀레스 21대는 호넷으로 돌아왔고, 제8폭격비행대 소속의 14대는 미드웨이로 향했는데 연료부족으로 도중에 3대가 추락했다.
그리고 제8전투비행대는 귀환 도중에 연료부족으로 10대의 와일드캣 모두가 해상에 불시착했다.

엔터프라이즈의 제6전투비행대장인 James S. Gray 대위는 이함 직후 호넷의 제8뇌격비행대를 엔터프라이즈의 제6뇌격비행대로 착각하여 따라왔는데 이때 제8뇌격비행대를 따라 남서쪽으로 변침했다.  
하지만 제8뇌격비행대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접촉을 잃어버렸다.

할수없이 제6전투비행대는 일본함대에서 북동쪽으로 25km 떨어진 지점에서 고도 6,000m를 유지하며 제6뇌격비행대로부터 지원요청이 오기를 기다렸다.
실제로 제6뇌격비행대는 일본함대에 대한 공격 도중 수차례 제6전투비행대에 지원요청을 하였으나 그 어느 것도 제6전투비행대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데버스테이터 뇌격기들이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제로기에 의하여 거의 전멸하고 만 이유이다.
만일 각각 10대씩의 와일드캣을 보유한 제6전투비행대와 제8전투비행대가 예정대로 데버스테이터들을 호위했더라면 데버스테이터들의 희생은 훨씬 적었을 것이고, 어쩌면 일본항공모함 1-2척쯤은 잡아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CAP 임무에 나선 제로기들에게 훨씬 큰 희생을 강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데버스테이터들 중에 가장 늦게 돌입한 요크타운의 제3뇌격비행대를 엄호하던 제3전투비행대가 와일드캣 6대라는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4대의 희생을 내면서 무려 10대의 제로기를 격추했다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항공모함 보호가 우선인 제로기들로서는 공격력을 데버스테이터에 집중할 수 밖에 없고, 이런 상황에서 와일드캣이 제로기를 잡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3전투비행대가 불과 6대의 와일드캣으로 10대의 제로기를 잡아냈으니, 만일 20대의 와일드캣을 보유했던 제6전투비행대와 제8전투비행대가 예정대로 데버스테이터들을 호위했더라면 단순계산으로도 30대 이상의 제로기들을 추가로 격추하여 당시 CAP 임무에 동원될 수 있었던 제로기 57대(총 보유 제로기 93대 - 미드웨이 공격대의 36대 = 57대)중의 거의 75% 가까이 격추할 수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만일 일본제1항공함대의 CAP 세력이 제8전투비행대와 제6전투비행대에 의하여 그 정도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면 마지막에 돌입한 제3뇌격비행대의 데버스테이터들은 상당수가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많다.

호넷의 제8뇌격비행대를 제6뇌격비행대와 혼동하고, 그나마도 중간에서 접촉을 잃어버려 아군의 뇌격기들이 처절한 희생을 치르는 동안 전투지역 바로 부근 상공에서 허송세월한 제6전투비행대장 그레이 대위의 실수야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호넷의 비행단장이었던 링 중령도 비록 왈드론 소령이 자기 명령을 어겼다고는 해도 그 즉시 제8전투비행대로 하여금 왈드론 소령의 제8뇌격비행대를 따라가도록 명령을 내렸어야 했다.
뇌격기는 공격방식의 차이 때문에 급강하폭격기에 비하여  적 전투기의 위협에 훨씬 더 쉽게 노출되므로 호위전투기가 뇌격기를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점은 대함공격전술의 상식이다.
호넷 공격대에서 이런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은 것은 직접적으로는 호넷의 비행단장인 링 중령의 잘못이고 좀더 위로 따지고 올라가면 사전에 수색코스나 호위의 우선순위 등에 대하여 정확한 지시를 하달하지 않은 미처 제독의 책임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혼란이 일어난 바탕에는 역시 일분일초가 소중한 함대항공전의 상황에서 함대 상공에서 편대를 형성하기로 결정한 스프루언스 제독의 실수가 깔려 있었다.

사실 미드웨이 해전 자체가 미해군이 열세한 세력으로 싸워서 대승한 해전이고, 게다가 그 과정이 마치 3점차로 뒤지고 있던 9회말 투아웃에서 기적적인 만루홈런 한방으로 일시에 전세를 뒤집어버린 듯이 아주 극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전사가들은 이런 전술적 실책에 대하여 대단히 관대하게 다루는 경향이 많다.

사실 대부분의 저작에서는 미해군의 뇌격비행대가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한 채 이런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일일이 다 기술하면서도 정작 그 원인이 되었던 공격대 분산 문제에 대해서는 그 책임소재를 따지지 않고 단지 일분일초가 아까울만큼 시간에 쫓기던 당시 상황에서 일본항모들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식으로 간단히 처리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호넷의 제8뇌격비행대가 일본제1항공함대를 발견하여 공격에 들어간 것은 일본항모들이 미드웨이 공격대를 수용한 직후인 오전 9시 20분이었다.
왈드론 소령은 일본함대의 북동쪽 15km 지점에서 모함인 호넷에 일본함대의 위치와 구성에 대하여 보고했지만 미처 제독은 호넷의 공격대가 모두 함께 있으려니 짐작하고 이 정보를 비행단장 링 중령에게 중계하지 않았다.

 

왈드론 소령은 원래 아까기를 사이에 놓고 양쪽에서 뇌격을 가하기 위하여 2개 편대에 분리를 명령했으나, 일단 분리되었던 공격대가 자신들을 발견하고 새까맣게 몰려드는 제로기들을 보고는 기가 질려서 다시 왈드론 소령의 뒤로 따라붙었다.
할수 없이 제8뇌격비행대는 한덩어리가 되어 소류를 목표로 돌진했다.
하지만 Mk13 항공어뢰의 투하조건 때문에 돌입속도로 시속 약 180km 밖에 낼 수 없었던 데버스테이터들은 날렵한 제로기들에게는 너무나 쉬운 먹잇감에 불과했다.

 

(TBD 데버스테이터 뇌격기. 승무원 : 3명, 길이 : 10.7m, 폭 : 15.2m, 최고속력 : 331 km/hr, 항속거리 : 마크13어뢰를 장비하고 700km, 무장 : 12.7mm 기관총 1정, 전방사격, 7.62mm 기관총 1정, 후방사수석, 544kg 짜리 마크13어뢰 1발 또는 453kg짜리 폭탄 1발)

 

제로기들은 해상에 닿을듯한 저공에까지 내려와서 데버스테이터들을 덮쳤다.
왈드론 소령의 탑승기를 비롯하여 몇 대가 순식간에 격추되었다.
왈드론 소령은 날개의 연료탱크가 피탄되어 불덩어리가 된 기체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칵핏에서 빠져나오다가 해상에 추락했다.
나머지 데버스테이터들도 차례로 격추되기 시작하여 결국 목표였던 소류에게 어뢰를 투하하는데 성공한 것은 George Gay 소위가 조종하던 단 한대였으나 이것마저 빗나갔다.
제8뇌격비행대의 유일한 생존자인 게이 소위는 어뢰를 투하하고, 소류의 상공을 통과하는 순간 격추되었으나 가라앉는 비행기에서 간신히 탈출하여 구명조끼를 입고 고무로 된 조종석 방석에 매달려 일본함대 한가운데를 표류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그는 이후 벌어진 이 역사적인 대해전의 전개를 현장에서 지켜본 유일한 미군이 되었다.
게이 소위는 다음날 오후 2시 30분에 카탈리나 비행정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제8뇌격비행대의 공격이 끝나갈 때쯤인 오전 9시 38분, 이번에는 Eugene Lindsey 소령이 이끄는 엔터프라이즈의 제6뇌격비행대가 남쪽으로부터 일본함대를 공격해 왔다.
원래 제6뇌격비행대는 일본함대를 찾지 못하고 남쪽을 통과하던 중이었는데 제8뇌격비행대의 공격을 받고 있던 일본함대의 호위함들이 내뿜는 연막을 보고 북쪽으로 변침하여 9시30분에 일본함대를 찾았다.
린지 소령도 일본항모 카가를 양쪽에서 공격하기 위하여 공격대를 둘로 나누었다.
그런데 갑자기 카가가 북쪽으로 변침하는 바람에 Arthur V. Ely 대위가 이끌던 그룹은 카가의 고물쪽에서 공격을 해야할 상황이 되었고, 린지 소령이 직접 이끌던 그룹은 카가의 우현을 노리기 위하여 반시계 방향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아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엘리 대위가 이끌던 그룹은 즉각 제로기들과 집중적인 대공포화의 표적이 되었다.
엘리 대위는 출격 전에 미리 약속되어 있던 신호를 통하여 제6전투비행대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사실 당시 제6전투비행대는 그들이 따라오던 제8뇌격비행대를 놓치고 일본함대의 북동쪽 25km 지점의 6,000m 상공에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6뇌격비행대는 실제로 그후로도 몇 번씩이나 지원요청을 했으나 어쩐 일인지 제6전투비행대는 한번도 수신하지 못했다.
엘리 대위가 이끌던 그룹은 제로기와 대공포화에 의하여 총 7대중 5대가 어뢰를 투하해보기도 전에 격추당했다.

A. Walter Winchel 기관준위와 Stephen B. Smith 일등기관준위(Chief Machinist) 가 조종하던 데버스테이터 2기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카가에서 900m 떨어진 지점까지 육박하여 어뢰를 발사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두 대의 데버스테이터는 어뢰를 발사한 후 치열한 방어망을 뚫고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한대는 무사히 엔터프라이즈에 돌아왔다.
윈첼 기관준위가 조종하던 데버스테이터는 귀환 도중에 연료가 떨어져서 해상에 추락했으나 윈첼 기관준위와 후방사수였던 Douglas M. Cossit 일병은 무사히 탈출하여 구조용 고무보트를 타고 해상에서 무려 17일간을 버틴 끝에 6월 21일, 미드웨이의 카탈리나 기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린지 소령의 그룹도 카가를 향하여 돌진하면서 제로기들의 공격을 받아서 린지 소령 탑승기를 포함하여 4대가 어뢰를 발사해 보지도 못하고 격추되었다.
나머지 3대는 어뢰를 발사했으나 한발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이 3대는 모두 무사히 엔터프라이즈로 돌아왔다.  

당시 미국이 사용하던 마크13 항공어뢰는 작약량 262kg, 사정거리 5,760m 에 속력이 33.5 노트였는데 작약량과 사정거리는 그만하면 충분한 편이었고, 속력은 다소 느린 편이어서 한두발이 발사되었을 경우 미리 감지만 한다면 시속 30노트 이상을 낼 수 있는 일본의 항공모함들은 간단하게 회피할 수 있었다.

 

(마크13 항공어뢰)

하지만 사실 이 당시의 마크13항공어뢰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그 투하조건이었다.
즉 이 어뢰는 뇌격기의 비행속도가 시속 200km이하, 고도 15미터 이하에서 투하해야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는데 미드웨이 해전에서 보다시피 제대로 방어준비를 갖춘 적에 대하여 이런 속력, 이런 고도로 접근하여 어뢰를 투하한다는 건 사실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후 미국의 Mk13항공어뢰 개량노력도 속력의 증가보다는 이러한 투하조건의 완화에 중점을 두었다.

그 결과, 1944년 2월의 트럭도 공습 때는 300m 높이에서 보다 고속으로 비행하면서도  투하할 수 있게 되었고, 종전에 즈음해서는 시속 760km 로 비행하면서 700m 높이에서 투하할 수 있을 정도로 투하조건이 완화되었다.

 

(후반기의 마크13항공어뢰. 착수시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하여 탄두부와 프로펠러 주변에 충격흡수용 나무를 부착하여, 보다 높은 고도에서 보다 빠른 속도로 비행하면서 투하할 수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해군이 사용하던 항공어뢰는 진주만 기습때 사용했던 91형 모드2 항공어뢰로서 작약량 200kg, 사정거리 2km, 속력 41노트에 시속 460km 로 비행하면서 투하할 수 있어서 Mk13 항공어뢰보다 작약량이나 사정거리는 좀 딸리지만 속력이나 투하조건 등 전반적인 성능이 훨씬 우수했다.

 

(91형 항공어뢰)

나구모 제독은 호넷에 이어 엔터프라이즈의 뇌격대가 공격해오자 상대방인 미국항모가 요크타운 1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머지 미국항모를 찾기 위하여 소류에서 함재기 한대를 급히 발진시켰다.

제6뇌격대의 공습이 끝난 오전 10시, 이번에는 Lance Edward Massey 소령이 지휘하는 요크타운의 제3뇌격비행대가 공격해 왔다.
앞의 두 뇌격비행대와는 달리 제3뇌격비행대에는 6대의 와일드캣으로 이루어진 제3전투비행대가 호위로서 따라왔다.

 

(F4F 와일드캣 전투기. 승무원 : 1명, 길이 : 8.8m, 폭 : 11.6m, 최고속력 : 515km/hr, 항속거리 : 1,240km, 무장 : 12.7mm 기관총 6정, 1정당 탄약 240발, 114kg 짜리 폭탄 2발)

 

곧 제로기들이 벌떼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John Smith Thach 소령이 지휘하는 제6전투비행대의 와일드캣들이 나름대로 활약했다.  
항공모함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로기들은 데버스테이터에 공격력을 집중시킬 수 밖에 없었고, 와일드캣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로기들에게 공격을 퍼부어 마구 격추했다.
하지만 제로기들은 너무 많았고 와일드캣의 숫자는 너무 적었다.

결국 제3뇌격비행대도 마씨 소령을 비롯한 7대가 어뢰를 발사해보지도 못하고 격추되고 5대가 가까스로 어뢰를 발사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이 4대 중의 3대도 이탈 중에 격추되었고, 겨우 1대가 요크타운까지 날아왔으나 파손정도가 심하여 착륙을 하지 못하고 부근 해상에 불시착했다.
즉각 구축함 Hamman 이 다가가서 구조하였지만, 후방사수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제3전투비행대도 10대의 제로기를 격추하며 분전했으나 절망적인 숫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4대가 격추되었다.

원래 요크타운의 비행단은 제5비행단인데 이 비행단의 항공기들이 산호해 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태평양함대에서는 기존의 제5정찰비행대를 해체하고 대신 기존의 제5폭격비행대를 제5정찰비행대로 이름을 바꾸어 정찰임무를 맡기고 요크타운의 나머지 비행대들은 모두 하와이에 내려놓았다.

대신 원래 새러토가 항공단에 소속되어 있던 제3폭격비행대, 제3전투비행대, 제3뇌격비행대를 요크타운에 배치하여 미드웨이 해전에 내보낸 것이었다.

이 사실은 미국해군이 채택하고 있던 항공모함의 함정 자체와 그 비행단을 분리하여 운영하는 제도가 가지는 유연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산호해 해전에서 항공모함 자체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항모의 비행단이 큰 피해를 입는 바람에 그걸 복구하느라고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하지 못한 일본항공모함 즈이가꾸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이 방식의 장점을 잘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항공모함의 함정 자체와 그 비행단 사이를 분리하는 방식의 유연성은 그 뒤로도 여전히 발휘되었다.

예를들어, 태평양전쟁 후반기에 항공모함 함재기 중에서 전투기의 비율을 크게 늘리면서 동시에 신예 F-4U Corsair 전투기를 항공모함에서 운용하기로 했는데 해군에 있던 코르세어 전투기의 숫자가 부족했다.

그러자, 코르세어를 장비한 해병대의 전투비행대들이 해군의 항공모함에 배치되었다.

오전 10시 20분, 불과 3시간여 동안 무려 8번이나 감행된 미드웨이 항공대와 함재기들의 연속적인 공격을 제로기 11대 격추라는 비교적 적은 피해로 막아내면서 공격대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안겨준 나구모 제독과 그 참모들은 이제야말로 자신들이 미국항공모함에게 본때를 보여줄 때라고 생각하며 기분이 들떠 있었다.
미드웨이 공격에 나섰던 항공기들 중 돌아온 93대는 모두 무사히 착함하여 격납고에서 무장과 연료를 공급받는 중이었고, 함선공격용 무장을 갖춘 공격대와 호위를 맡을 제로기들도 모두 준비를 마치고 비행갑판에 도열해 있었다.
곧 공격대의 제1번기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구모 제독이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바로 그 순간, 일본제1항공함대의 상공, 고도 6,000m 지점에서는 미드웨이 해전의 향방, 나아가 태평양전쟁의 향방을 일시에 결정지을 세력들, 기고만장한 일본항공모함의 머리 위에 곧 재앙의 불벼락을 퍼부을 준비가 된 죽음의 사신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를 떠난 맥클러스키 소령 지휘 하의 돈틀레스기 31대가 마침내 제1항공함대의 상공에 도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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