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의 날인 1942년 6월 4일, 미드웨이에 접근하고 있던 제1항공함대에서는 새벽 2시 45분부터 미드웨이 공격대의 발진준비를 시작했다.

15분 후인 오전 3시, 미드웨이에서도 전원이 기상하여 목전에 임박한 전투에 대비했다.

진주만에서도 그날 밤에 편안하게 잠을 잔 장교는 거의 없었다.
니미츠 제독은 사령관실에 딸린 부속실의 침대에 누워서 밤새 깜박깜박 선잠을 잤다.

오전 4시, 미드웨이의 카탈리나 기들과 와일드캣들이 각자 정찰과 CAP 임무를 위하여 이스턴 섬의 활주로를 떠났다.

오전 4시 30분, 36대의 제로기, 36대의 Val 급강하 폭격기, 36대의 Kate 뇌격기 등 총 108대로 구성된 미드웨이 공격대가 일본항공모함의 갑판을 떠났다.
원래 미드웨이 공격대는 진주만 기습의 영웅인 후찌다 미쓰오 중좌가 이끌 예정이었으나 그는 하필이면 출항한 날인 5월 27일 밤에 급성맹장염으로 수술을 받는 바람에 도모나가 죠이찌 대위가 대신 이 공격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만에 하나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미항모기동부대를 찾기 위하여 정찰기들이 발진했다.
하지만 그 숫자는 아까기와 카가에서 각각 케이트 뇌격기 1대씩, 중순양함 도네와 치꾸마에서 수상정찰기 각 2대씩, 그리고 전함 하루나에서 소형 수상정찰기 1대등 불과 7대로서 정찰예정지점을 단 한번만 비행하는 일단수색방식이었다.
게다가 도네의 4번 캐터펄트가 고장나는 바람에 정찰기 1대의 발진이 30분이나 늦어졌는데도 나구모 제독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도네급 중순양함 도네. 표준배수량 : 11,200톤, 길이 : 189.1m, 폭 : 19.4m, 최고속력 : 35노트, 항속거리 : 18노트로 14,800km, 승무원 :874명, 무장 : 8인치 주포 연장 4기 8문, 5인치포 8문, 25mm 대공포 연장 6기 12문, 610mm 어뢰발사관 3연장 4기 12발, 장갑 : 최대 100mm, 항공기 :6대)

 

미드웨이 공격대가 출격한 후 일본제1항공함대에서는 혹시나 나타날지도 모르는 미국항모기동부대의 출현에 대비하여 대함 무장을 갖춘 108대의 함재기들이 무라다 시게하루 소좌의 지휘 하에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오전 5시 30분경, 초계 중이던 카탈리나 정찰기가 미드웨이를 목표로 날아오던 일본 항공기의 대군을 발견했다.
이 카탈리나 기는 미드웨이에 즉각 보고한 후에 들키지 않게 일본기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오전 5시 55분, Howard Ady 대위의 카탈리나 기가 일본제1항공함대를 발견하고 보고했다.

"항모 2척, 전함 2척을 포함한 다수의 함정으로 편성된 일본함대 발견, 방위 320도, 거리 180마일, 침로 140도, 속력 25노트"

 

(PBY Catalina. 승무원 : 8명, 길이 : 19.5m, 폭 : 31.7m, 최고속력 : 314km/hr, 항속거리 : 4,030km, 무장 : 7.62mm 기관총 3정, 12.7mm 기관총 2정, 1.8톤의 폭탄이나 폭뢰, 또는 어뢰)

 

이러한 보고를 들은 미드웨이에서는 즉시 모든 전투기를 발진시켜 일본기를 요격할 준비를 하고 나머지 항공기들은 모두 일본함대를 공격하러 가도록 명령했다.

오전 6시, 미드웨이의 레이더도 접근하는 일본군 항공기들의 대편대를 포착했다.

일본제1항공함대가 발견되었을 당시 제16기동부대와 제17기동부대는 미드웨이의 동북쪽, 일본항모들로부터 약 320km 떨어진 해상에 있었다.
전술적 지휘권을 쥔 플레처 소장은 최소한 4척 이상으로 예상되는 일본항공모함 중에 2척밖에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서 불안했다.
그는 고민 끝에 제16기동함대로 하여금 전 항공력을 집중하여 발견된 2대의 적 항공모함을 공격하도록 하고 요크타운은 나머지 적 항공모함들이 발견될 때를 대비하여 예비대 역할을 하기로 했다.
오전 6시 7분 그는 스프루언스 소장에게

"남서쪽으로 진행하여 적 항공모함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는 즉시 공격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스프루언스 소장은 참모들과 상의하여 최대속력으로 적의 항공모함군에 접근한 후 오전 7시 경에 약 250km 거리에서 공격대를 발진시키기로 결정했다.

오전 6시 15분, 일본의 미드웨이 공격대가 미드웨이 상공에 도달했다.
뒤따르던 카탈리나 기가 일본편대의 상공에 조명탄을 투하하여 일본기 편대의 위치와 구성을 폭로시켰다.

이를 신호로 하듯 제221해병전투비행대장인 Floyd B. "Red" Parks 해병소령이 이끄는 20대의 F2A Buffalo 전투기와 7대의 F4F Wildcat 전투기들이 고공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일본공격대를 덮쳤다.

 

(버팔로 전투기. 승무원 : 1명, 길이 : 8m, 폭 : 10.7m, 최고속력 : 516km/hr, 항속거리 : 2,700km, 무장 : 12.7mm 기관총 4정, 기수에 2정, 날개에 2정, 45kg 짜리 폭탄 2발)

 

그러나 사실 그 순간은 돌격명령을 내리기에는 다소 빠른 타이밍으로 그 결과 미국 전투기대는 폭격기와 뇌격기로 구성된 일본의 공격기 군에게 제대로 된 공격을 가해보기도 전에 호위를 맡은 제로기들과의 본격적인 공중전에 말려들어 버렸다.
초반의 기습효과로 2대의 제로기를 격추하는데 성공했으나 곧 제로기들이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을 가해오자 숫자, 항공기 성능, 조종사의 기량 등 모든 면에서 상대가 안되는 미국의 전투기대는 불과 몇 분만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어 파크스 소령을 포함한 17대가 격추되고 10대가 겨우 살아남았으나 그중 8대는 다시는 비행이 불가능할 만큼 심하게 손상을 입었다.

방어에 나섰던 미국의 전투기들을 간단히 쓸어버린 일본의 공격대는 곧 폭격을 시작하여 연료탱크, 병원, 창고, 그리고 수상비행기 운용시설 등에 폭탄을 명중시켰으며 미군에게 전사 24명, 부상 18명의 피해를 입혔다.
방어 전투기 부대를 쓸어버린 제로기들도 가세하여 지상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그러나 미드웨이의 대공포화도 이에 굴하지않고 맹렬한 반격을 가하여 13대의 일본기들을 격추했다.

폭격의 효과를 판단하기 위하여 마지막까지 미드웨이 상공에 남아있던 공격대장 도모나가 대위는 특히 활주로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오전 7시 5분,

'제2차 공격의 필요 있음'

이라고 타전했다.

7시 10분, 미드웨이를 떠난 공격대 중 첫 번째로 Langdon Kellogg Fieberling 대위 지휘 하의 TBF Avenger 뇌격기 6대가 일본제1항공함대를 공격했다.
원래 호넷의 제8뇌격비행대 소속이지만 따로 미드웨이에 파견나와 있던 아벤저 뇌격기들은 전투기의 호위도 없이 용감하게 돌진해 왔다.
TBD Devastater 의 뒤를 이어 새로 개발된 신예 뇌격기인 아벤저가 실전에 참가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벤저의 실전 데뷔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결과로 끝났다.
제로기와 일본함정의 대공포화로 인하여 지휘관인 피벌링 대위 탑승기를 비롯한 5대가 순식간에 격추되었고, 마지막 1대가 살아남아 가까스로 어뢰를 발사하는데 성공했으나 빗나갔다.
이 마지막 아벤저는 제로기의 기관총에 맞아 조종타가 다 부서지고, 후방사수는 전사했으며 조종사와 항법사는 부상을 입은 상태로 겨우 귀환했다.

 

(아벤저 뇌격기. 승무원 : 3명, 길이 : 12.5m, 폭 : 16.5m, 최고속력 : 444km/hr, 항속거리 : 1,610km, 무장 : 12.7mm 기관총 3정, 2정은 날개, 1정은 후방사수석, 7.62mm 기관총 1정, 동체 하부, 900kg 상당의  폭탄 또는 마크13 항공어뢰 1발)

 

잠시 후 어뢰를 장비한 4대의 B-26 Marauder 기가 공격해 왔다.
전에 한번도 어뢰를 발사해 본 적이 없던 이들의 어뢰공격은 당연히 실패로 끝났으나 아까기의 갑판에 기총소사를 퍼부어 승조원 2명을 전사하도록 만들었다.
이들은 2대가 격추되고 2대가 살아 돌아갔다.
쌍발폭격기같은 경우 연합군 측이 속력이나 방어력 등 성능 면에서 일본측을 압도하고 있었다.

 

(B-26 머로더. 승무원 : 7명, 길이 : 17.8m, 폭 : 21.7m, 최고속력 : 460km/hr, 항속거리 : 4,590km, 무장 : 12.7mm 기관총 12정, 폭탄 1.8톤)

 

7시 15분, 도모나가 대위의 무전을 받은 데다가 비록 실패는 했지만 용감하게 육박해오는 미드웨이 항공대의 공격을 지켜본 나구모 중장은 새벽에 발진한 정찰기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으므로 미드웨이 근해에는 미국항공모함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미드웨이에 제2차 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하고 대함공격을 위하여 어뢰와 지연신관을 장착한 철갑탄으로 무장한 채 대기하고 있던 함재기들에게 접촉신관을 장비하고 상대적으로 작약량이 많은 육상공격용 폭탄으로 바꾸어 달도록 명령을 내렸다.
곧 제1항공함대의 항공모함들은 무장을 바꾸는 작업에 들어갔다.

7시 28분, 캐터펄트 고장으로 사출이 30분 정도 지연되었던 도네의 수상정찰기로부터

'10척, 아마도 적으로 추정됨, 미드웨이 북방 380km, 남동쪽으로 고속항진 중'

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플레처 제독이 지휘하던 제17기동부대가 발견된 것이었다.
나구모 중장과 참모들은 이 보고를 접하고 크게 놀랐으나 이 보고에서 적의 함대에 항공모함이 있다는 보고가 없었으므로 현재 진행 중인 무장전환 작업을 중단시킬 것인가에 대하여 15분 이상 주저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7시 45분, 나구모 중장은 제1항공전대(아까기, 카가)에게 일단 무장전환 작업을 중단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라는 지시를 내리고 도네의 정찰기에게 적의 함종을 파악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제2항공전대(소류, 히류)에는 특별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므로 이곳에서는 무장전환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7시 55분, 정찰기로부터 추가보고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제1항공함대에 Lofton Russell Henderson 해병소령이 지휘하는 제241해병정찰폭격비행대(VMSB-241) 소속의 돈틀레스기 16대가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 돈틀레스들을 몰던 조종사들은 대부분 비행학교를 막 졸업한 새내기들로서 사실상 이들은 목표를 향하여 거의 직각으로 내려꽂히는 급강하폭격기술조차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할 수 없이 헨더슨 소령은 부하들에게 적함에 45도에서 60도 정도의 각도로 돌입하면서 폭격을 가하도록 출격하기 전에 명령해 둔 상태였다.
사실 이 각도는 명중률도 떨어지고 무엇보다도 대공포화의 밥이 되기 딱 좋은 각도였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참고로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가미까제 조종사들도 처음에는 미국함정의 대공포화를 피하기 위하여 목표 상공에서 직각으로 내려꽂히도록 교육했으나 전부 다 신참조종사들이라 직각으로 내려꽂히면서 기체를 제대로 조종하기가 불가능했으므로 나중에는 대공포화에 당할 것을 각오하고 45도 각도로 돌입하도록 교육했다.
실제로 가미까제 공격대의 기록필름들을 보면 대부분 45도 정도의 각도로 비스듬하게 돌입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헨더슨 소령의 돈틀레스 기들도 벌떼같이 달려드는 제로기들과 대공포화에 의하여 격추되기 시작했다.
헨더슨 소령 탑승기를 포함한 6대가 폭탄을 투하해 보지도 못하고 격추되었다.
헨더슨 소령은 대공포화에 피탄되자 항모 카가를 향하여 돌진했으나 갑자기 조종성을 상실하여 카가를 빗나가 해상에 추락했다.
참으로 장렬한 최후였다.
미해병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보여준  헨더슨 소령의 용기를 기려서 2달 후 그들이 점령한 과달카날 섬의 비행장에 헨더슨 비행장이란 이름을 붙였다.

지휘관을 잃은 돈틀레스 기들은 굴하지 않고 계속 공격을 감행하여 10대가 폭탄을 투하했고 그중 3대는 히류에 상당히 위협적일 정도로 접근하여 폭탄을 투하하는데 성공했으나 히류의 재빠른 회피동작으로 지근탄 1발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이들의 공격은 일본항공모함들에게 상당한 위협을 주어 이들이 접근할 때마다 항공모함들은 급격한 회피기동을 해야만 했고 그때마다 항공모함 내에서의 작업은 중단되어야만 했다.

폭격을 마친 돈틀레스 기들은 탈출하면서 2대가 더 격추되었지만, 달려드는 제로기들에게 반격을 가하여 1대를 격추했다.

출격한 16대 중에서 8대가 살아 돌아왔는데 그중 6대는 다시는 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손상을 입고 있었다.
확실히 돈틀레스는 방어력이 강한 편이었다.

 

헨더슨 비행대의 공격이 거의 끝나가던 8시 9분, 도네의 정찰기로부터 추가보고가 들어왔는데 항공모함은 없고 순양함과 구축함이 각각 5척이라는 보고였다.
이 전문을 읽은 나구모 중장은 적함 중에 항공모함이 없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고, 헨더슨 비행대의 공격을 받으면서 미드웨이의 항공력이 만만치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던 터라 미드웨이에 대한 재공격을 결심하고 즉시 중단되었던 제1항공전대의 무장전환 작업을 재개하도록 명령했다.

그때 제1항공함대에 또다시 공습경보가 울렸다.
미드웨이를 떠난 15대의 B-17 이 6,000m 상공에서 일본함대를 향하여 폭격을 실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함선공격 훈련을 받은 적도 없는 폭격기 조종사들이 고공에서 폭탄을 투하하여 해상에서 재빠르게 기동하는 함정들을 명중시킨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이들은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았지만 전과 또한 없어서 이들이 투하한 68톤에 이르는 폭탄 중에서 오직 지근탄 1발을 기록했을 뿐이었다.

 

(B-17 폭격기. 승무원 : 10명, 길이 : 22.7m, 폭 : 31.6m, 최고속력 : 462km/hr, 항속거리 : 2.7톤의 폭탄을 적재하고 3,220km, 무장 : 12.7mm 기관총 13정, 폭탄적재량 : 3.6톤)


몇 분 후 미드웨이를 떠난 구형 SB2U Vindicator 급강하 폭격기 11대가 미드웨이 항공대 중에서 마지막으로 공격해왔다.
그들은 처음에는 진형 중심에 있던 항공모함을 노렸으나 방어가 너무 강하자 곧 생각을 바꾸어 외곽에 있던 전함 하루나를 공격했다.
이들 역시 아무런 전과를 올리지 못했으나 진형의 중간에 있던 항공모함에까지 돌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빈디케이터들은 떨어지는 성능에도 불구하고 9대가 살아돌아와서 단지 2대의 희생을 내는데 그쳤다.

8시 20분, 미드웨이 항공대의 공격이 끝나자 제로기 1대의 희생으로 적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주면서 파상적인 공격을 무사히 막아낸 나구모 중장과 참모들은 한숨을 돌렸다.

그때, 도네의 정찰기로부터 청천벽력같은 보고가 들어왔다.

'적은 항모로 보이는 한 척을 동반하고 있다.'

나구모 중장과 참모들은 충격에 휩싸여 잠시동안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적의 항공모함이 발견된 이상 미드웨이 공격은 차후 문제이며 적 항공모함 격멸이 최우선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잠시 후엔 미드웨이를 폭격하고 돌아온 공격대가 귀환할 시간이었다.

여기서 나구모 중장이 택할 수 있는 방안은 2가지였다.

1.모든 항모의 무장전환을 전면 중단하고 이미 지상공격용으로 무장전환을 마치고 즉각 출격가능한 제2항공전대(소류, 히류) 휘하의 Val 급강하폭격기 36대를 필두로 하여 제1항공함대의 모든 공격기들을 현재 무장 그대로 전투기의 호위없이 적 항공모함을 향하여 최대한 빨리 출격시키는 방안
2.일단 비행갑판 상의 공격기들을 격납고로 내려보내어 미드웨이 공격대를 수용하고, 그동안 공격기들의 지상공격용 무장을 함선공격용 무장으로 다시 전환한 다음에 충분한 전투기의 호위 하에 적 항공모함을 공격하러 보내는 방안

1번을 택할 경우의 문제점은 전투기의 호위없이 적 항공모함을 공격하러 간 공격기들이 극심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많고 폭탄 또한 육상공격용의 접촉신관이라 적 함선에 큰 피해를 주기 어려웠다.
게다가 공격대를 발진시키는 동안 미드웨이에서 돌아온 공격대는 함대상공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연료가 떨어지면 그 중 일부가 추락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2번을 택할 경우 공격이 최소한 1시간 이상 지연되며 그동안 일본항공모함들은 매우 취약한 상태로 적 함재기의 공격에 노출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히류에 승좌하고 있던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찌 다몬 소장은 아까기에 전문을 보내어 적 항공모함이 이미 공격대를 발진시켰을지도 모르므로 다소의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제1안을 실시하자고 주장했지만 나구모 중장은 참모들과 상의한 후에 제2안을 실시하기로 운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즉각 일본항공모함의 비행갑판에서 공격기들이 치워지고 미드웨이 공격대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격납고에서는 반쯤 진행되고 있던 공격기의 지상공격용 무장으로의 전환이 중단되고 다시 함선공격용 무장으로 바꾸는 재환장 작업이 실시되었다.

새벽 2시 45분에 기상하여 6시간 이상을 쉬지않고 미드웨이 공격대 발진에다가 예비대의 무장을 육상공격용 무장으로 바꾸다가 다시 함선공격용 무장으로 바꾸어야 하는 항공모함의 정비병들은 이때쯤엔 거의 녹초가 되었고, 따라서 공격기에서 떼어낸 육상공격용 폭탄들을 일일이 탄약고에 갖다놓지 않고 그냥 격납고에 방치했다.
따라서 일본항공모함들은 격납고 갑판에 폭탄들이 여기저기 마구 널려있는 대단히 위험한 상태가 되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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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태평양함대는 열세한 세력으로 일본연합함대에게 결정적인 기습을 가하기 위하여, 일본측이 자신들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따라서 일본해군이 그들의 장거리 비행정을 띄워서 진주만을 정찰하지 못하도록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구축함을 한 척 빼내어 장거리 정찰시 일본측이 급유장소로 이용하고는 하던 프렌치 프리게이트 숄에 아예 붙박이로 배치해 놓았다.
실제로 일본해군은 미드웨이 공략작전을 앞두고 장거리 비행정에 의한 진주만 정찰을 계획했었으나, 급유장소로 이용해야 할 프렌치 프리게이트 숄에 미국의 구축함 한 척이 배치되어 있는 걸 보고는 포기했다.

혹자는 급유장소로 인근의 네커 섬을 이용하든지 하는 방법으로 정찰할 수 있었는데 정찰을 가볍게 포기했다고 하여 이를 미드웨이 해전을 앞둔 일본해군의 해이한 정신상태를 보여주는 사례로 들고 있으나, 사실 당시 네커 섬에도 감시가 붙어있었고 전반적으로 미해군이 일본해군의 정찰에 대하여 상당히 강도높게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찰이 반드시 불가능하지는 않았겠지만 상당히 어려웠던 것만은 틀림없다.

사실 진주만 기습과 비교해 볼 때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해군의 기밀유지 노력이나 정보획득 노력이 많이 미흡했던 것은 사실이다.
진주만 기습 당시에는 일본해군이 보안에 극도로 신경을 써서 그들의 무선통신에서 진주만 기습을 암시하는 무선통신이 단 한 차례도 감청되지 않았고, 따라서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도 진주만 기습을 사전에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사실 니미츠 제독도 사령관이 된 직후에는 진주만 기습을 미리 경보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미드웨이 공략의 경우에는 전혀 딴판이었다.
야마모또 제독이 너무나 많은 명령을 무선통신으로 내리고, 굉장히 중요한 핵심사항까지 암호해독반에서 감청하게 되자, 태평양함대 사령부 일각에서는 일본해군이 태평양함대를 혼란시킬 목적으로 무선통신으로 엉터리 정보를 흘리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제1항공함대같은 경우 구레 군항에서의 보급품 적재 작업도 일반인들이 다 볼 수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져 누구라도 목표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일본함대가 큰 규모의 작전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고, 하급장교들과 병사들까지 부두에서 미드웨이를 점령하러 간다고 거리낌없이 떠들고 다닐 정도였다.
또한 미드웨이로 항진하는 중에도 한 함정에서 앞으로 병사들에게 편지하려면 주소를 어디로 해야하느냐고 물으면 다른 함정에서 평문으로 미드웨이라고 답한 경우까지 있었다니 보안유지에 대한 개념이 상당히 해이했던 것은 사실이다.

제1항공함대와 본대가 출발할 때 미국잠수함에게 탐지되었고, 일본군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니미츠 제독은 휘하의 잠수함 세력을 여기저기 흩어놓지 않고 대부분의 잠수함들을 미드웨이 침공부대를 요격할 수 있는 위치에 집중적으로 배치해 놓았다.
따라서 만약 미드웨이 침공부대가 예정대로 상륙을 시도했다면 이 잠수함들에 의하여 상당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야마모또 제독의 본대가 출항한 다음날인 5월30일에 심상찮은 첫 번째 징후가 포착되었다.
도꾜의 대본영 군령부에서 하와이 부근에서 훈련 중인 미해군 조종사들의 무전내용을 도청한 결과 미국항공모함이 진주만에서 미드웨이로 이동하는 중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야마도또 제독에게 통보한 것이다.

사실 일본군과 미해군의 도청 실력을 비교해 볼 때 도청한 내용을 해독해 내는 능력은 미해군이 훨씬 앞섰으나, 무선통신 자체를 도청해내고 발신지점을 알아내는 등의 하드웨어적인 능력은 오히려 일본군이 더 우수한 편이었고 이 점은 니미츠 제독도 시인하는 부분이었다.

야마모또 제독은 대본영의 이러한 경고를 나구모 제독에게 중계하려 하였으나, 구로시마 가마히토 소장을 비롯한 참모들이 그렇게 하면 본대의 위치가 발각될 가능성이 있고, 또한 나구모 제독도 대본영으로부터의 무선을 본대와 동시에 받았을 것이라며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사실 나구모 제독은 이런 상황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

또한 제1항공함대가 변침예정지점에 도착했을 때 해상의 안개가 너무 짙어서 깃발신호나 불빛신호를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어서 약한 무선통신을 통하여 변침을 실시했는데 이 통신은 1000km 후방에 있던 야마모또 제독의 본대에서도 뚜렷이 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구모 제독은 미해군이 연합함대의 작전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1942년 6월 3일 오전 8시, 북방함대가 알류샨 열도 우날래스카 섬의 더치하버 전방 330km 까지 진출하여 제로기 5대, 발 폭격기 12대, 케이트 뇌격기 6대를 발진시켜서 공습을 실시했다.
북방함대를 막기 위하여 편성된 제8기동부대를 이끌던 테어볼드 소장은 일본군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알류샨 열도를 차지하려고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북방함대의 진짜 목적은 알래스카라고 판단하여 자신의 함대를 코디액 섬의 남쪽 해상에 배치했다.
이 위치는 북방함대로부터 거의 1,600km 나 떨어진 장소였으나 중순양함 중심의 약체함대였던 제8기동부대로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일본기의 공습은 더치 하버에 약간의 피해를 주었고 이어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대한 상륙작전이 실시되었다.
일본군은 원래 애닥 섬도 점령하려고 하였으나 주변에 미군기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포기했다.

한편 미국은 일본군의 알류샨 열도 공격작전으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된다.
즉 그날 류조를 출발하여 더치하버를 폭격한 제로기 중의 한 대가 연료탱크에 2발의 총탄을 맞은 후에 귀함하지 못하고 아쿠탄 섬이라는 조그만 무인도에 불시착하다가 뒤집혀서 조종사가 사망했다.
약 한 달 후인 1942년 7월 10일에 알래스카 해안경비대 소속의 카탈리나 기가 이 섬에서 뒤집힌 상태의 제로기를 발견하여 조사해보니 놀랍게도 거의 완전한 상태였다.
미국은 즉시 이 제로기를 가져다가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하여 그 성능을 확인했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이미 개발이 진행되고 있던 핼캣에 대대적인 개조를 가하여 헬캣은 명실상부한 제로기 킬러로서 태어나게 된다.

사실 아쿠탄 섬에서 제로기가 발견되기 7개월 전인 1941년 11월 26일에 중국전선에서 불시착한 한 대의 제로기가 중국군에 의하여 입수되었다.

그러나, 이 제로기가 실제로 미국에 들어온 것은 1943년이었고, 따라서 미국이 제로기에 대하여 얻은 지식의 대부분은 아쿠탄 섬에서 발견한 제로기를 시험하여 얻은 것이다. 

 

(아쿠탄 섬에서 발견된 제로기를 조사하고 있는 미군 관계자들)

 

진주만에서는 더치하버 공습 소식을 일종의 낭보로서 받아들였다.
즉 그들은 이 소식을 일본연합함대의 행동에 관한 그들의 예측이 옳았으며, 연합함대가 그 이후에 작전계획을 변경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니미츠 제독은 곧 미드웨이의 정찰비행대에 일본함대의 출현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정찰활동을 더한층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이미 미드웨이의 PBY Catalina 비행정들은 연료상황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멀리 정찰비행을 실시하고, 악천후가 닥쳐도 비행이 가능한 한 이미 예정된 정찰비행을 취소하거나 단축하지 않도록 엄중한 명령을 받고 있었다.
개전 이래의 잇단 승리에 취하여 자신감 과잉으로 분위기가 다소 해이해져 있던 일본연합함대와 달리 미태평양함대는 다가올 해전에서 열세한 세력으로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잔뜩 긴장하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42년 6월 3일 오전 9시가 조금 지난 시각, 미드웨이 정찰대의 Jack Reid 소위가 방위 282도, 거리 1,020km 지점에서 다나까 소장의 미드웨이 침공부대를 발견했다.

다나까 소장은 무선침묵을 해제하고 자신이 발견되었음을 본대와 제1항공함대에 알렸다.
나구모 제독은 미드웨이 침공부대가 발견된 것은 이미 예정되었던 일로 생각하고 계획대로 다음날인 4일 새벽에 미드웨이를 폭격하기로 했다.

오후 4시 30분에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16대의 B-17 들이 다나까 제독의 함대에 폭격을 가했으나 실패했다.

오후 늦게 어뢰를 장비한 카탈리나 비행정 4대가 미드웨이를 떠나 일본군 수송선단을 찾기 시작했다.
이들은 6월 4일 새벽 1시경에 다나까 함대를 발견하고 어뢰를 발사하여 수송선 기요쓰미 마루와 유조선 아께보노 마루에 명중시켜 전사 11명, 중상 8명, 경상 13명의 인명피해를 입히고 양함의 속력을 떨어뜨렸다.

이것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태평양함대가 거둔 첫 전과이자 사실상 항공어뢰에 의한 유일한 전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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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과의 연락선을 차단하기 위하여 피지와 사모아, 뉴칼레도니아로 진출하는 작전에 우선권을 두면서 일본연합함대 사령장관인 야마모또 제독의 미드웨이 공략작전에 반대하던 일본해군 수뇌부의 분위기는 1942년 4월 18일에 있었던 둘리틀 공격대의 도꾜폭격 이후 급격히 야마모또 제독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 5월 5일에 나가노 오사미 군령부 총장은 야마모또 제독에게 미드웨이 공략계획, 즉 MI 계획을 실시할 것을 정식으로 명령했다.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 제독)

 

야마모또 제독과 그 참모들이 작성한 이 작전계획에 따르면 남아있는 미국의 태평양함대 세력을 완전히 격멸하기 위하여 당시 일본연합함대의 함정들 대부분이 참가할 예정이었다.
이 거대한 함대는 크게 4개의 부대로 나뉘어졌는데, 알류샨 열도 공격을 담당한 북방함대, 나구모 중장 지휘하의 제1항공함대(기동부대), 미드웨이 침공부대, 그리고 야마모또 제독이 직접 지휘하는 본대였다.
이러한 작전 계획의 문제점은 함대세력이 지나치게 분산되었다는 것과 각 부대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이 중 어느 한 부대라도 미해군의 반격을 받아 위험에 빠졌을 때 부대끼리 상호지원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나구모 제독의 제1항공함대가 미국 항모기동부대의 공격을 받아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있을 때 야마모또 제독의 본대를 비롯한 다른 부대들은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1942년 5월 27일 오전 8시, 나구모 쥬이찌 중장이 지휘하는 제1항공함대(기동부대)가 경순양함 나가라를 선두로 하여 히로시마 만의 하시라지마 정박지를 떠나 미드웨이를 향하여 출발했다.
제1항공함대는 정규항모 4척(아까기, 카가, 소류, 히류), 전함 2척(기리시마, 하루나), 중순양함 2척(도네, 치꾸마), 경순양함 1척(나가라) 그리고 구축함 12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5월 28일에는 제5함대 사령관인 호소가야 모시로 중장이 지휘하는 북방부대가 오미나또를 뒤로하고 알류샨 열도를 향하여 출발했다.
이 부대는 정규항모 1척(준요), 경항모 1척(류조), 중순양함 3척(나찌, 마야, 다까오), 경순양함 3척(아부꾸마, 기소, 다마), 구축함 12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애투, 애닥, 키스카 섬을 점령하기 위하여 병력을 실은 3척의 수송선을 동반하고 있었다.
이 북방부대는 본대에서 파견되는 다까수 시로 제독의 강력한 호위함대의 지원을 받게 되어 있었는데 이 호위함대는 전함 4척(히우가, 이세, 후소, 야마시로), 경순양함 2척(기타가미, 오이), 구축함 12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같은 날인 5월 28일, 사이판에서 수일간의 상륙연습을 마친 일본육군의 이찌기 지대 3,000 명과 해군 제2연합특별육전대 2,800 명이 다나까 라이조 소장이 지휘하는 수송선단에 승선하여 사이판을 떠났다.
다나까 소장은 12척의 수송선, 3척의 고속수송선과 1척의 보급함으로 이루어진 이 수송선단을 호위하기 위하여 경순양함 1척(진쑤)과 구축함 10척으로 이루어진 제2수뢰전대를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역시 같은 날인 5월 28일에 구리다 다께오 중장이 지휘하는 제7전대가 괌을 출발하여 수송선단과 약 50km 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동진하며 근접호위를 담당했다.  
제7전대는 중순양함 4척(구마노, 스즈야, 미꾸마, 모가미)과 구축함 2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5월 29일에는 제2함대 사령관 곤도 노부다께 중장이 지휘하는 미드웨이 공략부대 주력이 출발했다.
이 부대는 전함 2척(공고, 히예이), 경항공모함 1척(즈이호), 중순양함 4척(아타고, 죠까이, 묘고, 하구로), 경순양함 1척(유라),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같은 날인 5월 29일에 마침내 야마모또 제독이 직접 지휘하는 본대가 출동했다.
이 본대는 북방함대의 지원을 위하여 알류샨 열도로 향한 다까수 제독의 제1전대를 제외하고, 전함 3척(야마또, 나가또, 무쓰), 경항공모함 1척(호쇼), 경순양함 1척(센다이), 구축함 9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두 합쳐 정규항모 5척, 경항모 3척, 전함 11척, 중순양함 13척, 경순양함 9척, 구축함 65척의 거대한 세력으로 여기에다가 잠수함 22척과 수상기 모함, 소해정 및 기타 보조함정들을 합치면 거의 200 척에 가까운 대함대였다.

한편 이에 대항하는 미태평양 함대의 세력은 상당히 열세한 편이었다.

스프루언스 소장이 지휘하는 제16기동부대는 정규항모 2척(엔터프라이즈, 호넷), 중순양함 5척(미네아폴리스, 뉴올리언스, 빈센스, 노댐턴, 펜사콜라), 경순양함 1척(애틀랜타), 구축함 13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플레처 소장의 제17기동부대는 정규항모 1척(요크타운), 중순양함 2척(아스토리아, 포틀랜드),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알류샨 열도 방어를 위하여 Robert Alfred Theobald 소장 휘하에 제8기동부대를 편성했는데 그 세력은 중순양함 2척(인디애나폴리스, 루이즈빌), 경순양함 3척(내쉬빌, 호놀룰루, 세인트루이스), 구축함 13척이었다.

전체적으로 정규항모 3척, 중순양함 9척, 경순양함 4척, 구축함 32척으로 이루어져 있어 잠수함 19척을 합쳐도 일본연합함대에 비하여 확실히 열세였다.
게다가 제로기의 우수한 성능과 일본측 항공승무원들의 높은 숙련도, 그리고 미태평양함대에 전함이 한 척도 없다는 점등을 고려하면 실제 전력차이는 숫자로 나타난 것 이상이었다.

하지만 미태평양 함대는 일본연합함대에 비하여 유리한 점도 몇 가지 가지고 있었다.

1. 연합함대의 세력이 널리 분산되었고 각 부대간의 거리가 멀어 일단 유사시 상호지원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비하여 태평양함대의 타격력은 효율적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2. 태평양함대는 연합함대가 가지지 못한 레이더를 가지고 있었다.
3. 태평양함대는 연합함대의 공격력(특히 항공력)을 상당부분 흡수할 수 있는 (몸빵용?) 항공기지인 미드웨이를 가지고 있었다.
4. 가장 중요한 점으로서 태평양함대는 상대방인 연합함대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는데 성공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의도는 해전 당일까지도 완벽하게 숨기는데 성공했다.

미태평양함대는 부족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가진 이러한 잇점들을 최대한 살리는데 성공하고, 거기다가 상대방인 제1항공함대의 나구모 제독이 결정적인 순간에 치명적인 판단착오를 일으키는 행운이 따라줌으로써 막강한 전력을 가진 일본연합함대를 무찌르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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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5월 2일, 니미츠 제독은 미드웨이 환초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샌드 섬과 이스터 섬의 방어준비를 시찰한 니미츠 제독은 미드웨이의 총지휘관인 C.T.Simard 해군중령과 지상군 지휘관인 H.Shannon 해병중령에게 그들이 미드웨이를 방어하는데 무엇이 필요한가를 물었다.
곧 여러가지 요구사항을 적은 기다란 목록이 제출되었는데, 그후 1개월동안 니미츠 제독은 그 목록에 적힌것보다 더 많은 비행기와 장비들을 미드웨이로 보내어 이 섬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니미츠 제독은 시머드 중령과 섀넌 중령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그들을 대령으로 진급시키고 대령 계급장을 보냈다.

 

가정에 지나지 않지만 당시 미드웨이 환초의 방어태세를 보았을 때 만일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함대가 미국함대를 격멸하는데 성공하여 미드웨이 환초에 상륙을 실시했더라도 상륙작전 자체는 실패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로부터 1년 후에 미드웨이 해전 당시의 일본군 상륙부대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력한 전력과 장비를 보유하고, 압도적인 화력지원을 받고 있던 미해병대가 타라와 환초에서 치른 희생을 생각해 보면 만일 미드웨이 해전 당시에 해병대원만 2,100명이 넘고 해군 및 조종사 등을 합쳐서 3,600 명이 넘는 병력이 주둔하고 있고, 철조망과 지뢰, 참호 등으로 강력하게 요새화된 미드웨이 환초에 해군육전대 2,800 명과 육군 3,000 명등 불과 5,800 명의 일본군으로 상륙작전을 실시했다간 아마도 상륙부대가 거의 몰살당하는 전대미문의 대참극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일본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했다면 주변의 제해권을 장악했을 테니까 미드웨이 환초에 대한 보급을 끊어서 결국에는 점령할 수 있었겠지만..
그만큼 환초라는 조건 자체가 상륙작전을 실시하려는 공격자에게 얼마나 불리한 여건인지를 타라와 상륙작전 이전에는 미국이나 일본 양측이 모두 잘 모르고 있었다.

당시 일본해군은 JN25 라는 암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암호는 일본 외무성이 사용하던 자줏빛 암호(Purple Code)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JN25 는 5자리 숫자 4만 5천여개로 이루어져 각 숫자가 단어나 구문을 의미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해독을 방해하기 위하여 문장의 중간중간에 아무 의미가 없는 숫자들을 끼워넣는 안전장치와 함께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암호체계는 해독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으며 실제로 일본해군은 암호해독용 난수표가 없는 한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암호에 의한 통신량이 대단히 많았기 때문에 미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은 복잡한 계산을 빨리 처리해주는 IBM사 기기의 도움을 받아 방대한 양의 통신문에서 일정하게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내어 분류하고 이를 이미 알고있는 정보와 대조하여 각 숫자가 뜻하는 내용을 확인하고 해독을 방해하려는 의도로 사용된 의미없는 숫자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 암호를 상당부분 해독할 수 있었다.

1942년 5월 20일, 야마모또 제독이 발신한 암호전문에서 AF 가 공격목표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당시 일본해군은 태평양상의 지명에 대하여 A 로 시작하는 기호를 붙여 사용했는데 가령 하와이는 AH, 일본비행정이 급유를 위하여 잠수함과의 접선장소로 가끔씩 사용하곤 하던 프렌치 프리게이트 숄은 AG 라는 식이었다.
1942년 3월에 일본비행정이 프렌치 프리게이트 숄에서 급유를 받은 다음 진주만의 해군공창을 폭격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이 비행정은 주변의 AF에서 떠오른 정찰기를 주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 이후로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과 이들로부터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고있던 니미츠 제독은 AF가 당연히 미드웨이를 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참모들 중 일부는 AF 가 미드웨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고, 더구나 육군같은 경우는 일본의 다음 목표가 샌프란시스코라고 주장하고 있던 형편이라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으로서는 AF 가 미드웨이를 뜻한다는 보다 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할 필요가 생겼다.
그리하여 암호해독반의 Joseph Finnegan 소위의 제안에 따라 미드웨이에 도청의 우려가 없는 해저전선을 통하여 미드웨이의 해수담수화시설이 고장나서 식수가 부족하다고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평문으로 무전을 치도록 명령을 내렸다.
미드웨이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명령에 따라 멀쩡한 해수담수화시설이 고장나서 식수가 부족하다고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무전을 쳤다.
그로부터 2일 후에 암호해독반이 'AF 에 식수가 부족하다고 한다' 는 내용의 일본군 무전을 도청하여 AF 가 미드웨이라는 사실이 확인했다.

니미츠 제독은 미드웨이의 항공력 강화를 위하여 열차운반선을 개조한 수상기모함 커티스 호에 최신형 TBF Avenger 뇌격기 7대, 와일드캣 7대, 돈틀레스 급강하 폭격기 18대 등을 실어다가 미드웨이에 내려주고, 육군항공대의 B-17 Flying Fortress 19대와 어뢰를 장비한 B-26 Marauder 4대도 보냈다.

 

(수상기모함 커티스 AV-4. 배수량 : 8,671 톤, 길이 : 161m, 폭  : 21.1m, 속력 : 20노트, 승무원 : 1,195명, 무장 : 5인치 양용포 단장 4문, 40mm 기관포 4문)

 

그리고, 조금이라도 먼저, 조금이라도 더 먼 거리에서 적을 발견하기 위하여 진주만에 있던 PBY Catalina 초계비행정 32대도 미드웨이로 파견했다.
그리하여 원래 구식 F-2A Buffalo 전투기 21대와 조종사들이 풍향계라고 부르던 낡은 SB-2U Vindicator 급강하 폭격기 16대등 총 37대로 구성되어 있던 미드웨이 섬의 항공대는 카탈리나 기를 포함하여 합계 124대나 되는 각종 항공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다만 이때 새로 배치된 항공기의 조종사들은 대부분 비행학교를 갓 졸업한 새내기 조종사들이라 그 전력은 보기보다는 많이 약한 편이었다.
실제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미드웨이 항공대는 일본군의 제로 전투기에 의하여 괴멸적인 타격을 입으면서도 나구모 함대에 용감하게 접근하여 공격을 반복함으로써 보다 숙련된 항공모함의 함재기 조종사들이 결정적인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하는데 일정부분 공헌을 했지만 그들 자신의 전과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1942년 5월 하순경, 니미츠 제독은 정보참모 Edwin T. Layton 대령에게 일본함대의 행동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요구했다.
조심스러운 레이튼 대령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니미츠 제독은 더 구체적인 예측을 요구했고 마침내 레이튼 대령은 니미츠 제독에게 거의 예언하듯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함대는 미드웨이 현지시각으로 6월 4일 오전 6시에 북서쪽인 방위 325도, 175 마일 거리에서 우리에게 발견될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함대가 발견된 시각은 6월 4일 오전 5시 55분, 방위 320도, 거리 180 마일로서, 레이튼 대령의 예측으로부터 시간으로 5분, 방위 5도, 거리도 5마일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그분이 오셨어용~~^..^;;)

 

(태평양함대의 정보참모 레이튼 대령)

 

1942년 5월 27일에 태평양함대사령부에서 미드웨이 해전을 앞두고 마지막 작전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적의 정세에 대한 비밀문건을 받아본 장교들은 한결같이 일본측 참가함선의 수, 이름, 작전계획은 물론이고 지휘관의 이름까지 너무도 상세하게 기록된 그 문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회의에서 적의 부대 중에서 나구모 중장의 항공모함기동부대 격멸을 제1의 목표로 하며, 이 목표를 위하여 제16기동부대와 제17기동부대는 미드웨이의 동북방 해상에 매복해 있다가 미드웨이의 북서쪽에서 접근하는 일본의 항모기동부대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이 미드웨이를 폭격하고 돌아가서 항공모함 갑판에 착함하는 순간을 노려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1942년 5월 31일, 항공모함 호넷의 함장이었던 미처 대령이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2년 6월 1일, 지난 1월 11일에 일본잠수함에게 뇌격을 당해 입었던 피해를 완전히 수리한 새러토가가 피치 제독 지휘하에 기동부대 편성을 마치고 샌디에고 항을 떠나 급히 진주만으로 향했으나, 미드웨이 해전이 시작되기 전에 도착하기는 불가능했다.
니미츠 제독은 모자라는 항모세력을 조금이라도 보완하려고 인도양에 있던 영국항모 3척 중 1척을 빌리고자 하였으나, 일본의 다음 목표가 인도양이라고 믿고있던 영국 해군성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1942년 6월 2일, 진주만에서 북쪽으로 650km 떨어진 행운의 지점에서 제16기동부대와 제17기동부대가 합류하여 선임자인 제17기동부대의 플레처 소장이 전술적 지휘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미국항모기동부대는 미드웨이 동북방 해상에서 매복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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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4월 중순경, 킹 제독이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로슈포트 소령에게 향후 일본해군의 전략방향에 관한 정보평가를 요구했다.

로슈포트 소령은 주로 일본군의 무선통신을 해독하여 얻은 정보들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4가지의 요점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1)일본함대는 인도양에서의 작전을 완료하고 본국기지로 철수하는 중이다.
(2)오스트레일리아를 공격하려는 계획은 가지고 있지 않다.
(3)뉴기니아 동쪽 끝부분을 차지하려는 작전을 곧 시작할 것이다.
(4)이러한 움직임 이후 그들은 태평양에서 훨씬 대규모의 작전을 전개할 것인데, 이 작전에는 일본 연합함대의 대부분이 참가할 것이다.

1942년 4월 25일, 둘리틀 공격대 발진 임무를 무사히 마친 제16기동부대가 진주만에 입항했다.

핼시 제독 이하 장병들은 모두 휴가를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에게는 보급과 함의 정비를 위한 5일간의 기간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4월 30일, 제16기동부대는 일본해군의 포트모레스비 공략을 저지하려는 요크타운과 렉싱턴을 지원하기 위하여 진주만을 떠나 산호해로 발길을 재촉했다.
진주만과 산호해 사이의 5,600km 라는 거리를 생각해볼 때 제16기동부대가 시일 내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일본군의 진격이 예상보다 늦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산호해 해전은 제16기동부대가 전투 해역에 도달하기 하루 전인 5월 8일에 끝나버렸다. 산호해 해전은 사상 최초의 함대항공전이자 엔터프라이즈가 참가하지 않은 유일한 함대항공전이었다.

이 해전은 전술적인 면에서는 일본해군의 판정승이었다.
일본해군은 경항공모함 쇼호를 잃었고 정규항공모함 쇼가꾸가 큰 피해를 입었지만, 미국의 대형항공모함인 렉싱턴을 격침시켰고, 또한 요크타운에게 쇼가꾸보다 더 심한 피해를 입혔다.

 

(산호해 해전에서 격침되는 미국항공모함 렉싱턴 CV-2)  

 

하지만 일본측 사령관이었던 이노우에 제독이 포트모레스비 공략을 중지시킴으로써 일본은 개전이래 처음으로 연합군에 의해 진격이 저지되었다.
따라서, 전략적으로는 포트모레스비 방어라는 작전 목적을 달성한 미국의 승리라고 볼 수도 있다.

 

(산호해 해전에서 격침되는 일본의 경항공모함 쇼호. 렉싱턴의 함재기가 찍은 사진)

 

산호해 해전이 끝난 직후 제16기동부대는 북상하여 오션 섬과 나우루 섬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북상 도중 5월 14일에 니미츠 제독으로부터 묘한 명령을 받았다.

그 내용인즉슨

핼시 제독에게 제16기동부대를 이끌고 일본군의 툴라기 기지 전방 900km 까지 다가가서 적의 정찰기에게 일부러 발각되라는 것이었다.
핼시 제독은 이 명령에 숨은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그대로 실행했다.

다음 날인 5월 15일, 툴라기에 접근하던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가 110km 전방에서 일본정찰기를 포착했으나 일부러 접근을 허용했다.
잠시후 엔터프라이즈의 통신실에서 이 정찰기가 무선보고를 보내는 것을 탐지했다.
그때서야 와일드캣이 급히 이함하여 이 정찰기를 추격하였으나 이미 격추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엔터프라이즈의 통신실에서는 다시 이 정찰기가 긴 통신을 보내는 것을 탐지했다.
이제 두 척의 항모를 보유한 제16기동부대의 존재가 일본해군에게 확실하게 알려졌다고 판단한 핼시 중장은 그때서야 침로를 돌렸다.
다음 날인 5월 16일, 제16기동부대는 적에게 들키지 않게 최대한 빨리 진주만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보보고를 통하여 6월 초에 중부태평양에서 일본연합함대의 대공세가 있을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니미츠 제독은 이런 속임수로 일본해군에게 미해군이 일본연합함대의 의도를 전혀 모르고 있으며, 일본해군의 다음 목표가 남태평양 지역일 것으로 예상하여 남아있던 미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들을 몽땅 남태평양에 투입했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했다.

실제로 일본해군은 이런 간단한 속임수에 그대로 걸려들어서 3주 후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치명적인 판단미스를 범하게 된다.  
즉 산호해 해전에서 렉싱턴 뿐만 아니라 요크타운까지 격침했다고 믿고있던 일본해군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인 5월 15일에 미태평양 함대의 잔존항모 2척이 모두 남태평양에서 작전 중인 것을 확인하자 미국은 미드웨이를 공격하려는 연합함대의 의도를 전혀 모르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따라서 나구모 제독은 미드웨이 해전 당일까지도 미드웨이 근해에는 미국항공모함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실제로 전투도 없이 오션 섬과 나우루 섬을 일본군으로부터 지키는 부수적인 효과도 가져왔다.
즉 이 섬들을 공략하기 위한 함대가 5월 10일에 트럭제도를 출발했으나, 미국항모 2척이 모두 남태평양에 있다는 것을 알게되자 작전을 중지하고 다시 돌아가 버렸다.

남태평양에서 돌아온 제16기동부대는 5월26일에 진주만에 입항했다.
니미츠 제독은 소형보트를 타고 상륙한 핼시 중장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핼시 중장은 비록 웃고 있었으나 얼굴에는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몸무게가 거의 10kg 이나 빠졌고, 피부에는 악성 건선이 생겨 진물이 줄줄 흘러서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진주만 기습이래 거의 6개월 동안 상륙한 며칠을 제외하고는 줄곧 해상에서 전투를 지휘하며, 긴장된 생활을 했으니 어쩌면 병이 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핼시 중장은 다가오는 전투에서 자신이 항모기동부대의 지휘를 맡고 싶어했고, 니미츠 제독도 그러기를 원했지만 군의관은 핼시 중장의 모습을 보자마자 팔을 내저으며 즉시 입원명령을 내렸다.

다음날인 5월27일, 입원을 앞둔 핼시 제독은 사령부를 방문하여 니미츠 제독에게 자신의 후임으로 제16기동부대의 순양전대장인 Raymond Ames Spruance 소장을 추천했다.
스프루언스 소장은 핼시 중장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핼시 중장이 조종사 재킷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과 달리 스프루언스 소장은 항상 단정하고 규정에 맞는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핼시 제독이 항공계통에서 경력을 쌓아온 것과 달리 스프루언스 소장은 수상함 계통에서만 경력을 쌓아왔다.
핼시 중장이 불같은 성격의 공격적인 지휘관이라면, 스프루언스 소장은 냉정하고 빈틈없는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핼시 중장은 스프루언스 소장의 정확한 판단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또한 그가 개전이래 순양전대장으로서 줄곧 핼시 중장과 같이 작전하여 브라우닝 대령을 비롯한 제16기동부대의 참모들과도 익숙한 사이인 만큼 그들의 협조를 얻으면 항공관계 경력이 전혀 없다는 약점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니미츠 제독 또한 스프루언스 소장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여, 이미 그를 자신의 참모장으로 삼고 싶다고 킹 제독에게 요청해 둔 상태였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

 

이때 처음으로 항모기동부대의 지휘를 맡은 스프루언스 소장은 1주일 후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승함으로써 입지를 확고하게 굳혔고, 미드웨이 해전 직후인 1942년 6월 30일부터 태평양함대의 참모장이 되어서 1년 동안 니미츠 제독과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그리고,1943년 8월 5일에 태평양함대의 주력전투함들을 거의 망라한 제5함대가 창설되자 태평양함대 내에서 최고의 요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거대한 전투함대의 사령관직을 맡으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핼시 제독과 비교하여 볼 때 대규모의 부대를 지휘하면서 수많은 부하들을 확고하게 장악하여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의 재능과 충성심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능력이나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안목으로 전쟁 전체의 흐름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서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등의 능력은 확실히 핼시 제독에 비하여 좀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의 함대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하고 전장에서 어차피 부족할 수밖에 없는 정보를 가지고도 상황을 재빨리 판단하여 시의적절하게 정확한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는 전술적 능력에서는 오히려 핼시 제독보다 한수 위였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제5함대 사령관이 된 이후에도 전장에서 부딪히는 중요한 결단의 순간마다 신기하리만큼 정확한 판단력을 보여주었다.
필리핀해전 같은 경우 해전의 초기 단계에서 적을 찾아 적극적으로 서쪽으로 나가지 않고 미군의 상륙지점 부근에서 요격전에만 전념했던 전술적 판단에 대하여 전쟁을 최소한 6개월 이상 빨리 끝낼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고 태평양전쟁의 나머지 기간 중 내내 태평양함대의 항공관계자들에게 비난을 받았고, 그 자신도 스스로의 판단에 확신을 못 가졌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일본측 자료를 검토한 결과는 당시 요격에 전념한 그의 판단이 최상의 것이었음을 증명했다.

1942년 5월 27일, 산호해 해전에서 대파된 요크타운이 18km에 걸쳐 기름을 흘리면서 진주만에 입항했다.
요크타운에 승함하고 있던 피치 제독은 귀환 중에 요크타운의 수리에 90일 가량이 걸릴 것이라고 보고했다.
요크타운은 진주만에 입항하자마자 제1번 드라이독으로 직행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드라이독의 물이 완전히 빠지기도 전에 니미츠 제독이 긴 부츠를 신고 검사관과 동행하여 요크타운을 직접 검사했다.
니미츠 제독은 초급장교 시절 엔지니어였고, 미해군 내에서 선박용 디젤기관의 최고권위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이런 행동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냥 남에게 보이기 위한 요식행위는 아니었다.

 

(산호해 해전에서 돌아온 요크타운 CV-5. 진주만에 입항한 직후의 모습)

 

니미츠 제독은 90일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요크타운을 완전히 수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전투에 참가할 수 있을 정도로만 고치면 되는데 요크타운을 직접 검사해보고는 그러려면 훨씬 적은 시간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무엇보다도 요크타운은 동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수리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엘리베이터도 정상작동하고 있었다.
나무로 된 비행갑판은 귀환하면서 이미 수리되어 있었고, 폭탄이 떨어진 부분은 목재로 임시보강을 하면 되었다.
니미츠 제독은 검사를 마친 직후 함정수리 담당관에게 3일 내에 요크타운을 전선에 복귀시키도록 명령했다.  
즉시 수리작업이 시작되어 출항할 때까지 중단없이 계속되었다. 

5월28일, 귀항한 지 불과 이틀만에 제16기동함대는 진주만을 출항했다.

5월 29일 오전 11시, 요크타운이 드라이독에서 나와 진주만에 들어왔는데 함내에서는 여전히  수리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5월 30일 아침, 니미츠 제독이 출동을 앞둔 요크타운에 승함하여 플레처 소장 이하 장병들을 격려하고 기록적인 시간 내에 수리를 완료한 기술자들에게 치하를 하는 그 순간까지도 막바지 수리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지막 기술자들은 니미츠 제독이 이함하고, 요크타운의 엔진이 가동된 이후에야 이함했다.
요크타운 중심의 제17기동부대는 곧 진주만을 출항하여 제16기동부대와의 합류지점인 진주만 북쪽 630km 해상에 있는 행운의 지점’(Point Luck)으로 향했다.

니미츠 제독은 미국항공모함의 이동상황을 탐지하기 위하여 일본의 잠수함들이 미드웨이와 하와이 사이에 전개하기 전에 미리 항모부대를 미드웨이 근해로 파견해 버렸다.
이것 또한 상당히 선견지명이 있었던 행위로서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측이 미국항공모함 부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큰 이유가 된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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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4월 18일 정오경, 미육군의 James Harold Doolittle 중령이 이끄는 16기의 미육군 B-25 Mitchell 쌍발폭격기가 일본제국의 수도 도꾜를 폭격했다.
개전 초기 전승의 기분에 들떠있던 일본제국의 심장부를, 그것도 벌건 대낮에 폭격했다는 점에서 이 폭격사건은 그 실질적인 전과를 떠나서 미국과 일본 양국 국민의 사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B-25 미첼 쌍발폭격기. 승무원 : 6명, 길이 : 16.1m, 폭 : 20.6m, 최고속력 : 442km/hr, 항속거리 : 2,170km, 무장 : 12.7mm 기관총 12정, 폭탄 2,700kg 또는 폭탄 1,360kg + HVAR 8발)

 

진주만에서 일본에게 호되게 당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통합참모본부에 일본의 수도 도꾜를 폭격하는 방안을 연구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폭격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진주만의 치욕을 설욕하고 승전의 기분에 기고만장해진 일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었으나, 문제는 도꾜 폭격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도꾜를 폭격할만한 거리에는 연합군의 비행장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도꾜 폭격을 위해서는 항공모함을 사용하는 방법 이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함재기의 행동반경을 고려하면 항공모함은 도꾜에서 최소한 500km 이내로 다가가서 함재기들을 발진시켜 도꾜를 폭격하고 공격을 마친 함재기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몇 시간을 그곳에서 머물러야 하는데 그것은 사실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문제 때문에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도 1942년 2월10일의 회의에서 잠깐 도꾜 폭격에 대하여 고려해 보았으나 효과에 비하여 위험이 너무 크다고 판단하여 포기했다.  

하지만, 워싱턴에서 수천 km 떨어진 태평양 한가운데에 앉아있던 니미츠 제독과 달리 매일같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얼굴을 보아야만 하는 킹 제독은 그렇게 속편하게 앉아 있을 수 없는 처지였다.
따라서 워싱턴의 해군참모본부에서는 진주만 기습이래 이 문제로 계속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었다.

1942년 1월 10일에 열린 통합참모본부 회의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킹 제독에게 도꾜를 폭격할 계획을 세웠느냐고 물어보았고 대답이 신통치 않자 신경질을 부렸다.
킹 제독으로서는 무엇인가 돌파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 회의 직후인 1942년 1월 둘째 주의 어느 날 해군참모본부의 작전참모인 Francis Low 대령이 의장 중인 신예 항공모함 CV-8 Hornet 을 시찰하러 버지니아 주의 노퍽 항에 갔다가 주변에 있던 비행장을 보고는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즉 함재기보다 훨씬 긴 항속거리를 가진 육군항공대의 폭격기를 항공모함에서 이륙시켜 도꾜를 폭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워싱턴에 돌아온 그는 즉각 항공작전 담당인 Donald Duncan 대령에게 연구를 지시했다.
던칸 대령은 1월 16일에 육군의 중형폭격기인  B-25 미첼 폭격기에 3,200km 이상의 항속거리가 나올 수 있도록 추가연료탱크를 장착한 후 항공모함 갑판에서 이들을 이함시켜 도꾜를 폭격하고 중국의 아군비행장을 찾아가도록 하자는 내용의 계획안을 제출했다.

2월 초에 던칸 대령과 호넷의 함장인 Marc Andrew "Pete" Mitscher 대령이 극비리에 버지니아 주의 에글린 비행장에서 실험해 본 결과 B-25 기가 항공모함 활주로 길이인 150m 길이의 활주로에서도 이륙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자 계획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3월 10일, 던칸 대령이 통합참모본부의 특사 자격으로 진주만에 와서 니미츠 제독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즉 대서양에서 회항 중인 신예항공모함 호넷이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알라메다 공군기지에서 16대의 B-25를 싣고 북태평양을 건너서 일본의 수도 도꾜를 폭격할 예정인데 갑판에 실은 B-25들 때문에 호넷의 함재기를 사용할 수 없으니 도꾜에서 동쪽으로 800km 떨어진 발진예정지점까지 호넷을 엄호해 줄 항공모함 1척을 태평양함대에서 파견해 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니미츠 제독은 정치적 제스추어에 지나지 않는 도꾜 폭격을 위하여 귀중한 항공모함을 위험에 노출시킨다는 점 때문에 이 계획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직속상관인 킹 제독이 제안한 이 작전에 대하여 협조를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3월 20일, 2척의 순양함과 4척의 구축함, 그리고 1척의 유조선을 거느린 호넷이 샌프란시스코 항에 입항하여 16대의 B-25와 지휘관 둘리틀 중령을 위시한 승무원들을 싣고 4월 2일에 출항했다.

 

(제임스 해럴드 둘리틀 중령)

 

4월 8일, 핼시 중장이 지휘하는 제16기동부대가 진주만을 출항했다.
제16기동부대도 엔터프라이즈 외에 2척의 중순양함(노댐턴, 솔트레이크시티)과 4척의 구축함, 그리고 1척의 유조선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4월 10일, 서로 접근하고 있던 호넷과 엔터프라이즈 사이에서 오간 통신을 일본군이 도청하여 최소한 2척의 미국항공모함이 북태평양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4월 13일, 호넷과 엔터프라이즈가 만났다.
제16기동부대는 호넷 기동부대를 흡수하여 항공모함 2척과 4척의 순양함, 8척의 구축함, 2척의 유조선, 2척의 잠수함으로 이루어져 16노트의 순항속력으로 최종 급유지점을 향했다.

4월 17일, 도꾜 동방 약 1,600km 떨어진 해상에서 마지막 급유를 마친 제16기동부대는 구축함들과 유조선들을 떼어놓고 항공모함들과 순양함 4척만이 23노트의 속력으로 발진예정지점으로 항해했다.

계획에 따르면 18일 오후에 둘리틀 중령의 B-25가 먼저 출격하여 해가 진 뒤에 도꾜에 도착하여 소이탄으로 화재를 일으킬 예정이었다.

그리고는 둘리틀 중령보다 3시간 늦게 도꾜 동방 800km 떨어진 지점에서 나머지 15대의 B-25가 출격하여 둘리틀 중령이 일으킨 화재의 불빛을 따라 도꾜에 도착한 후 12대는 도꾜를 폭격하고, 나머지 3대는 나고야, 한신 공업 지대 및 요코스카 군항을 각각 폭격한다는 계획이었다.

공습을 마친 폭격기들은 남서쪽으로 도주하여 동중국해를 건너 중국의 쑤조우에 있는 비행장에 착륙할 예정이었다.
만일 예정대로 작전이 진행될 경우 각 B-25기에는 20분 정도 비행할 수 있는 분량의 예비연료가 남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발진지점으로 향하는 엔터프라이즈. 앞에 보이는 항모는 호넷)

발진 예정일인 4월 18일 오전 3시,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가 16km 전방에서 2척의 수상함을 발견했다.
일본군이 일본본토 동해안 동쪽 1,300km 지점에 약 40km 마다 한 척씩 배치해 놓은 어선을 개조한 감시선이었다.
핼시 제독은 이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하여 북쪽으로 변침하여 한시간 정도 항진한 후 다시 서쪽으로 변침했다.

아침 6시가 막 지났을 무렵 정찰을 위하여 출격했던 제6폭격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 한대가 저공비행으로 다가와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에 메시지를 투하했는데 그 내용은 70km 전방에 감시선 한 척이 있으며 어쩌면 그 배가 돈틀레스기 자신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핼시 제독은 조금이라도 더 도꾜에 가까이 가기 위하여 23노트의 속도로 계속 서진했다.

오전 7시 38분,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호넷의 견시가 감시선의 마스트를 발견했고, 그 순간 호넷의 통신실에서 그 감시선-90톤 짜리 어선을 개조한 닛도마루-이 기지에 보고하는 통신을 감청했다.
핼시 제독은 경순양함 CL-43 Nashville 에게 그 감시선을 포격하도록 명령하는 동시에 둘리틀 중령의 공격대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와 함께 발진명령을 내렸다.

TO COL. DOOLITTLE AND HIS GALLANT COMMAND
GOOD LUCK AND GOD BLESS YOU - HALSEY

(둘리틀 중령과 그의 용감한 지도력에게
행운과 신의 가호가 있기를 - 핼시)

발진 위치는 북위 35도 45분, 동경 153도 40분, 일본의 수도 도꾜까지의 거리는 약 1,070km..
당초 계획보다 300km 가까이 더 먼 거리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속 30km가 넘는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높은 파도가 넘실대는 해상에서 16대의 B-25 기들은 둘리틀 중령을 선두로 한대씩 차례로 호넷의 비행갑판을 떠났다.
비록 1개월간 집중적인 훈련을 받았다고는 하나 원래 항공모함에서의 이함이란 것이 노련한 해군조종사가 모는 함재기도 심심찮게 추락사고가 일어나고는 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어려운 일을 항모에서의 이함 경험이 전혀 없는 육군 조종사가, 그것도 크고 육중한 중형폭격기에다가 1,141갤런의 연료를 만재하고, 225kg 짜리 폭탄 4개씩을 실은 상태로 실행해야 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16기의 B-25 들은 단 한대의 사고도 없이 무사히 호넷의 비행갑판을 떠났다.
참고로 이때 호넷에서 이함한 B-25 들은 그때까지 항공모함에서 이함한 항공기들 중 가장 크고 무거운 항공기로 세계기록을 세웠다.

 

(항모 호넷의 갑판에서 이함하는 둘리틀 공격대의 B-25)

 

오전 9시 20분, B-25 의 발진을 끝낸 제16기동부대는 즉시 동쪽을 향하여 최대속도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제16기동부대는 후퇴하면서 레이더에 잡힌 일본의 감시선 12척에 대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경순양함 내쉬빌이 8,000m 거리에서 함포로 닛도마루를 격침했고,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의 함재기들이 공격을 가하여 합계 5척의 감시선을 격침하고 다른 7척에게 피해를 입혔다.

한편 닛도마루로부터 보고를 받은 군령부와 연합함대사령부는 즉시 육상공격기를 주전력으로 하는 제26항공전대에게 공격명령을 내리는 한편 도꾜 부근의 고사포 부대와 방공전투기 부대에 공습경계명령을 내려 사태에 대비했다.
하지만 일본측은 미함재기의 항속거리를 고려하여 실제 공습은 아무리 빨라도 그날 저녁이나 다음날 아침이 되어야 가능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도꾜 부근 기사라즈 기지에 있던 제26항공전대 소속의 육상공격기 4대는 그날 아침 6시 35분에 기지를 출발하여 미국항모기동부대를 찾고 있었다.(도꾜 시간은 B-26의 발진 지점보다 2시간이 늦다.)
9시 30분쯤 이들 중의 4번기인 유리가와 중위의 탑승기가 둘리틀 공격대 중의 한대와 조우하여 ‘국적불명의 쌍발기 1대 발견’이라고 기지에 보고했으나 미해군 함재기 중에는 쌍발기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되었다.
이날 유리가와 중위의 탑승기는 제16기동부대에서 55km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하였으나 기동부대 상공에 엷은 구름이 깔려있던 관계로 기동부대를 발견하는데 실패했다.

둘리틀 공격대는 고도 60m 의 초저공으로 도꾜 북부를 향해 오다가 12시 30분 경에 목표 상공에 도달하자 고도를 360m 로 높이면서 폭격을 시작했다.
16대 가운데 13대는 도꾜의 유류 저장소, 강철 공장, 발전소 등에 폭격을 가했고 나머지 3대는 나고야 및 한신 공업 지대와 요코스카 군항을 폭격하여 나고야의 미쯔비시 조립공장에 피해를 주고 요코스카에서 건조 중이던 경항공모함 류호에 폭탄을 명중시켜서 이 배의 진수를 11월로 늦추었다.
이 외에도 학교 6개, 군병원 1동 및 가옥 680채를 파괴하여 합계 사망 45명, 중상 145명의 피해를 입혔다.

폭격을 마친 B-25 들은 일본본토 남해안을 따라 비행하다가 가고시마 남쪽 해상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국으로 향하였고 도꾜 상공에서 기관 고장을 일으킨 1대는 북쪽으로 향하여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일본 상공에서는 단 한대도 격추되지 않은 둘리틀 공격대는 약 3,700km를 비행한 후 대부분 중국 동부 지역에 불시착하거나 낙하산으로 탈출하였다.

그 과정에서 4명이 사망했고, 불행하게도 일본군 점령지역에 떨어진 승무원들 중 8명이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장교 3명은 처형되고, 나머지 5명중 1명은 포로생활 중에 사망했다.
그리하여 작전에 참가한 총 80명의 승무원들 중(B-25의 승무원은 원래 6명이지만 둘리틀 공격대가 탑승한 기체는 무게를 줄이기 위하여 기총을 제거했으므로 한 대당 기총사수를 제외한 5명이 탑승)이들 12명과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한 1대의 승무원 5명을 제외한 63명의 승무원들은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모두 안전하게 연합군 지역으로 인도되었다.
블라디보스톡에 불시착한 승무원 5명은 소련 당국에 의하여 억류되었고,  B-25 기체도 압수당했다.
어쨌든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도꾜 폭격을 실시한 후 무사히 도착한 중국군 기지에서 찍은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키작은 사람이 둘리틀 중령)

 

둘리틀 공격대의 도꾜 폭격은 그 실질적인 피해와는 상관없이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우선 루즈벨트 대통령이 기대했던 대로 미국의 항공기가 일본의 수도 도꾜를 폭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국민과 군인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중국인들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가장 큰 고통을 겪었다.
일본군은 이 사건 3일 후인 4월 21부터 중국의 중부지역에 있는 거의 모든 비행장을 맹렬하게 공습하기 시작했고, 지상에서는 제11군과 제13군을 주축으로 하는 대규모의 육군 부대가 작전을 시작하여 중국군과 민간인들에게 조직적으로 보복을 가했다.
이후 약 석달동안 줄잡아 25만명의 중국인들이 일본군의 가혹한 보복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도꾜 폭격은 일본의 전쟁지도방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국민들은 일본제국의 심장인 수도 도꾜가 대낮에 적기에 의하여 폭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고, 정부와 군은 격노했다.
해군은 정부와 육군에 대하여 체면을 잃었고 이는 일본해군의 차기작전계획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실 1942년 3월 초에 자바 섬의 공략이 끝난 이후 일본해군 수뇌부는 차기 전략에 대하여 날카로운 의견 대립을 보이면서 좀처럼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군령부 총장인 나가노 오사미 제독을 비롯한 일본해군 수뇌부는 대부분 나구모 중장의 인도양 작전이 끝난 이후에는 남동방면에 전력을 집중하여 포트모레스비를 탈취하고, 이어서 솔로몬 군도를 지나 뉴칼레도니아, 피지, 사모아 등으로 진출하여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의 연락선을 차단하는데 최우선 순위를 두는 작전을 구상했고 여기에는 육군도 찬성했다.

그러나, 연합함대사령장관인 야마모또 이소로꾸 대장은 현존하는 일본해군의 가장 큰 위협은 진주만 기습에서 살아남은 항공모함들을 주축으로 하는 미태평양 함대의 잔존세력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군이 일단 포트모레스비를 탈취한 이후에는 남동방면으로 전진하기 전에 우선 중부 태평양에서 미드웨이와 알류샨 열도를 탈취하고, 이걸 저지하러 나오는 항모 중심의 미태평양함대 잔존세력을 완전히 격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연합함대 세력이 대부분 참가하는 대규모의 작전이 필요했다.
야마모또 제독은 이 작전에서 만일 미국의 항공모함 부대가 반격을 가하러 전장에 나오면 나구모 중장의 기동부대로 하여금 격멸하면 되고, 만일 싸우러 나오지 않는다면 일본 측은 미드웨이와 알류샨 열도를 쉽게 점령하게 될 것이므로,
이곳에다가 비행장을 건설하여 폭격기를 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이미 확보하고 있는 마셜 제도 및 길버트 제도와 연계하여 하와이의 미국항공모함들이 꼼짝하지 못하도록 감시 및 견제할 수 있으므로 그 이후에는 뉴칼레도니아든 피지든 사모아든 일본군은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이면 미태평양함대에 신경쓰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해군 수뇌부는 대부분 이 계획이 지나치게 규모가 크고 복잡하며 따라서 그만큼 불확실성이 많다는 점 때문에 영 탐탁치 않게 여겼으나 도꾜 공습이 있은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즉 미국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폭격기들에 의하여 일본제국의 심장인 수도 도꾜가 벌건 대낮에 공습을 받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지자 미국항모의 접근을 사전에 차단하지 못한 해군에게 모든 비난이 집중되었고, 일본해군 수뇌부는 만일 앞으로 비슷한 일이 한번이라도 재발할 경우를 생각하면 밥맛이 싹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전에는 무모하게만 보이던 야마모또 제독의 계획이 차츰 그럴듯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만사가 계획대로 잘 진행되어 이번 기회에 남아있는 미국항공모함들을 몽땅 바닷속에 처넣어버리면 그만큼 좋은 일이 없고, 만일 미국항공모함들이 싸우러 나오지 않더라도 일본군이 미드웨이와 알류샨 열도를 차지하게 되면 미국항공모함이 일본본토에 접근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될테니 도꾜 폭격같은 험한 꼴을 다시 당할 위험은 없어지는 셈이었다.
육군 또한 미국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폭격기에 의하여 수도인 도꾜가 폭격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생각이 바뀌어 야마모또 제독의 계획에 찬성을 표하고 미드웨이 공략부대로 정예부대 1개 연대를 내어 놓았다.

이렇듯 둘리틀 공격대의 도꾜 폭격은 차기전략방향에 대한 일본해군 수뇌부의 논쟁을 일시에 종식시키고 미드웨이 해전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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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웨이크 및 마르쿠스 공격(1942.2.14-3.10)

 

1942년 2월 5일, 엔터프라이즈는 엄청난 환영을 받으면서 진주만에 입항했다.
엔터프라이즈가 진주만 입구에 들어서자 진주만 내의 모든 함선에서 뱃고동을 울려댔으며 함정의 수병들 뿐 아니라 지상근무자들도 모두 부두에 몰려 나와서 엔터프라이즈를 환영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엔터프라이즈가 접안하여 현문을 설치하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고 함정의 현측에 매달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핼시 중장을 환영했다.

곧이어 진주만에 있던 수십 명의 기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핼시 중장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상당히 나서기 좋아하고 허풍도 좀 심한, 그리고 어린애같은 면도 좀 있는 핼시 중장이었지만 기자들에게는 그가 진정한 국가적 영웅으로 비쳤다.
인터뷰에 능숙하지만 말투에서 가식적인 냄새가 풍기는 루즈벨트 대통령이나 말투나 행동에서 귀족적인 품격이 느껴지지만 동시에 귄위적이고 독선적인 느낌을 주는 맥아더 장군의 스타일에 다소 식상해 있던 기자들에게 핼시 제독의 친근하면서도 솔직하고 직선적인 매너는 상당히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이 회견에서 기자들이 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냐고 물어보자 핼시 중장은 기자들 앞에서 아주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 이 표정은 곧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이후 기자들은 그에게 '황소(Bull)'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런데 사실 마셜 제도 공격의 전과는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는 상태였다.
먼저 작전에 참가했던 조종사들부터가 적의 피해상황을 분석하는 훈련이 부족하여 전과를 부풀려 보고했다.
예를 들어 핼시 중장은 공격에 참가했던 조종사들의 보고를 기초로 하여 소형 항공모함 1척, 2,500 톤급 잠수함 1척, 수송선 1척, 소형함정 4척을 격침하고 최소한 20-30 대가 넘는 쌍발폭격기를 포함하여 많은 숫자의 일본군 항공기를 지상에서 파괴했다고 보고하였으나 실제로 격침된 일본군 함정은 수송선 1척과 소형함정 2척에 지나지 않았고, 지상에서 파괴한 일본군 항공기도 불과 9대였다.
그리고, 핼시 제독의 보고와는 달리 공격 당시 마셜 제도에는 단지 9대의 쌍발폭격기가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엔터프라이즈에 동승하고 있던 종군기자들은 조종사들의 이러한 과장된 보고를 그대로 받아들여 진주만으로 보냈고, 진주만에서 원고를 받아본 기자들은 이걸 더 부풀려서 본사에 보고했다.
게다가 본사의 데스크에서 이걸 한번 더 뻥튀기하여 많은 신문들이 '일본판 진주만(Japanese Pearl Harbor)' 이란 말도 안되는 헤드라인으로 마셜 제도 공격기사를 실었다.

한편 핼시 제독은 작전보고서(Action Report)에서 미해군 함대의 대공사격기술이 미숙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함정이 25노트 이상의 속력으로 기동중일 때에도 정확하게 대공사격을 가할 수 있도록 대공사격훈련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돈틀레스 2-3대가 긴밀하게 협조하며 움직일 경우 일본군 전투기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로 대항할 수 있다는 점도 발견했다.
그러나 마셜제도 공격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무엇보다도 다가오는 함대항공전에 대비하여 함정과 항공기 승무원들이 귀중한 실전경험을 쌓을 기회를 가졌다는 점이었다.

킹 제독이 1월 초에 웨이크 섬 공격을 요구했을 때 니미츠 제독은 렉싱턴을 보내어 웨이크 섬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1월 11일 새러토가가 일본잠수함의 어뢰를 맞고 본토로 수리하러 가 버리자 니미츠 제독은 렉싱턴을 웨이크 섬 공격에 투입하는 것을 망설였는데, 킹 제독이 1월 15일에 다시 전보를 보내와서 웨이크 섬 공격을 빨리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1월 22일, 니미츠 제독은 할 수 없이 당시 진주만 남서쪽 900km 해역을 항해하고 있던 렉싱턴 호의 브라운 중장에게 웨이크 섬 공격을 명령했다.

그리고, 급유를 위하여 유조선 Neches 호를 급파하였는데 23일에 이 유조선이 적의 잠수함에 의하여 격침되어 버리자 결국 웨이크 섬 공격을 단념하고 렉싱턴 호를 도로 불러들였다.
1942년 1월 23일에 일본군이 라바울을 점령하자 미국은 ABDA 사령부 관할해역의 남동쪽인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뉴기니아,뉴칼레도니아,피지와 솔로몬 제도를 관할하는 ANZAC 방어지대를 황급히 설치하고, 뉴칼레도니아에 2만명의 미군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러한 정세변화에 따라 렉싱턴도 ANZAC 지역의 방위를 위하여 급히 파견되었다.

이제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이 무사히 진주만에 돌아오자 킹 제독은 2월 6일에 다시 전보를 보내어 ANZAC 지역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기 위하여 본토 서해안에 있는 6척의 구형전함을 비롯한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 중부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공격하도록 다시 요구해 왔다.
니미츠 제독은 이런 요구에 대하여 세력이 열세한 태평양함대는 힛트앤드런 전법을 쓸 수밖에 없는데 그런 식으로는 ANZAC 지역에 대한 일본의 압력을 제거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구형전함은 그런 작전에는 사용할 수 없다면서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킹 제독이 2월9일에 다시 전보를 보내와서 계속적으로 공격을 요구하자 니미츠 제독은 킹 제독이 신뢰하는 유능한 함대사령관이자 킹의 몇 안되는 오랜 친구 중의 한 사람인 파이 중장을 워싱턴에 보내어 킹 제독을 설득하는 한편 휘하 참모들을 소집하여 킹 제독을 만족시킬 작전계획을 구상했다.

2월 10일에 열린 이 회의석상에서 일본의 수도인 도꾜를 공습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북태평양의 기후가 험하여 해상급유가 곤란하고 무엇보다 효과에 비하여 위험이 지나치게 크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이 회의에서 이리저리 의견을 모은 끝에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을 합쳐 1개의 기동부대를 편성하여 핼시 중장의 지휘 하에 웨이크 섬과 Eniwetok 환초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니미츠 제독은 공격에 구형전함을 사용하라는 킹의 지시에는 끝까지 반대했다.

핼시 중장은 웨이크 섬과 에니웨톡 환초를 공격한다는 작전 계획 자체와 자신이 공격부대의 지휘를 맡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 이의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지휘할 부대의 이름이 제13기동부대이고, 진주만을 출항하는 날짜가 하필이면 2월 13일 금요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태평양함대사령부를 발칵 뒤집어 놓을 심산으로 역시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자신의 참모장 브라우닝 대령을 사령부로 보냈다.
브라우닝 대령이 사령부 작전실에 들어와서 큰 소리로 항의하자 미신을 전혀 믿지 않는 태평양함대의 작전참모인 맥모리스 대령은 속으로 무척 아니꼽게 생각했다.

 

하지만, 위험한 임무를 앞둔 기동부대 장병들의 정서를 고려하여 기동부대 이름을 제16기동부대(TF16)로 바꾸고 유조선의 도착이 늦어진다는 구실을 붙여 출항일을 예정보다 하루 늦춘 2월14일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엔터프라이즈 기동부대는 1943년에 대규모의 항모기동부대인 제58기동부대에 흡수되기 전까지 제16기동부대로서 미드웨이 해전을 비롯한 여러 해전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1942년 2월14일, 제16기동부대가 웨이크 섬 공격임무를 띄고 진주만을 출항했다. 

다음날인 2월 15일에 킹 제독이 진주만으로 전보를 보내왔다.
파이 중장의 설득과 웨이크 섬을 공격하려는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행동 덕분에 마음이 좀 풀린 킹 제독은 지난번처럼 강력하게 공격을 촉구하지는 않았으나 항모기동부대 하나를 ANZAC 지역에 가까운 칸톤 부근에 배치하라고 요구했다.
그 요구에 따라 다음날인 2월 16일에 요크타운은 따로 제17기동부대를 편성하여 칸톤으로 떠났다.

이제 항공모함 세력이 엔터프라이즈 한 척으로 줄어든  제16기동부대는 에니웨톡 환초를 공격 목표에서 제외했다.

2월24일, 엔터프라이즈는 합계 49대로 이루어진 공격대를 내보내어 웨이크 섬을 폭격했다.
마셜제도 공격 때와 마찬가지로 스프루언스 제독이 2척의 중순양함(노댐턴, 솔트레이크시티)과 2척의 구축함(Benham, Mauri)을 이끌고 함포사격을 가하기 위하여 웨이크 섬에 접근했다.

이 함정들은 웨이크 섬 전방 33km 지점에서 적의 전투기들에 의하여 공습을 받았으나 다행히 아무 피해도 입지 않았다.

10시 5분, 스프루언스 제독의 함정들이 포격을 시작했다.
10시 8분, 엔터프라이즈에서 출격한 49대의 함재기들이 폭격을 시작했다.
공격할 목표 자체가 거의 없었던 탓에 전과는 미미했다.

 

(웨이크 섬 상공에서 촬영한 제6뇌격비행대 소속 데버스테이터 뇌격기. 폭격을 마치고, 귀환 중인 장면)

 

다음날인 2월 25일에 핼시 제독은 진주만으로부터 도꾜 남쪽 1,800km 에 있는 Marcus 섬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16기동부대는 이 명령에 따라 서쪽으로 항진하기 시작했다.

2월 28일, 마르쿠스 섬을 포격할 임무를 띠고 중순양함 2척을 기간으로 하는 스프루언스 제독의 부대가 또다시 제16기동부대에서 분리되어 전방으로 나섰다.

 

제16기동부대는 3월 4일에 마르쿠스 섬을 폭격했다.
이 폭격은 완전히 기습을 달성하여 공격대의 피해는 돈틀레스 한 대에 지나지 않았다.  

폭격을 마치고 돌아온 항공기들을 수용한 제16기동부대는 다음 날인 3월 5일, 스프루언스 제독의 수상함 부대와 합류했고 5일 후인 3월 10일에 진주만으로 돌아왔다.

 

(엔터프라이즈의 비행갑판에 놓여있는 제6전투비행대 소속의 와일드캣 전투기들. 마르쿠스 섬 폭격 직후에 촬영한 사진)

 

이번 웨이크 섬과 마르쿠스 섬에 대한 공격은 아군의 피해도 돈틀레스 2대로 가벼웠지만 전과 또한 빈약하기 짝이 없어서 겨우 적의 소형초계정 1척을 격침시켰을 뿐이었다.

이 공격에 참가했던 미해군의 어느 장교는

'일본군은 개가 벼룩을 생각하는 정도로 밖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고 자조했다.

결국 이 웨이크 섬과 마르쿠스 섬에 대한 공격은 -사실 마셜 제도 공격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일본군의 진격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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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기동부대는 진주만을 떠나 사모아로 가는 도중에 나쁜 뉴스와 크고작은 사고에 시달렸다.
진주만을 떠난 첫날인 1942년 1월 11일 저녁에 새러토가가 일본잠수함에게 뇌격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온 데 이어 13일에는 구축함 블루의 승조원 한명이 파도에 휩쓸려 실종되었다.

같은 날 엔터프라이즈의 조종사 한명이 무선침묵을 깨뜨리는 바람에 작전 전체가 위험에 빠질 뻔했다.
16일에는 순양함 솔트레이크시티의 승조원 한명이 사고로 사망했으며 돈틀레스 한대가 착륙 중에 추락하여 또 1명이 사망했다.

게다가 제6뇌격대 소속의 데버스테이터 뇌격기 한대가 실종되었다.
이 뇌격기의 승무원들은 무려 34일을 해상에서 표류하면서 불시착한 해상에서 1,200km 나 떨어진 푸카푸카섬 해안에 도착하여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런저런 사고에도 불구하고 제8기동부대는 예정대로 1월 20일에 사모아에 도착했다.
제8기동부대는 사모아 북방 160km 지점에 자리잡고 북서쪽으로는 일본군의 접근을 감시하고 남쪽으로는 급유문제로 도착이 늦어지고 있는 해병대 수송선단과 요크타운 중심의 제17기동부대를 기다렸다.

1월 23일, 해병대를 실은 수송선단이 제17 기동부대와 함께 사모아에 도착하여, 다음날인 24일에 5,000 명의 해병대가 안전하게 상륙을 마쳤다.
1월 25일, 제8기동부대와 제17기동부대는 북서쪽으로 2,600km 떨어진 마셜 제도를 향하여 사모아를 출발했다.

제8기동부대와 제17기동부대를 통합지휘하던 헐지 제독은 참모장 마일스 브라우닝 대령의 의견을 받아들여 각 기동부대가 따로 목표를 공격하기로 했다.

 

(브라우닝 대령)


그래서 플레처 소장이 지휘하는 요크타운 중심의 제17기동부대는 길버트 제도의 마킨 환초와 남부 마셜 제도의 잴루잇 및 밀리 환초를 공격하고 헐지 중장 자신은 제8기동부대를 이끌고 방어가 더 강할 것으로 생각되는 북부 마셜 제도의 웟제 환초와 말로에라프 환초의 타로아섬을 공격하기로 했다.

여기서 잠깐 용어정리..
중부 태평양에는 환초(atoll)가 많다.
환초란 주로 해저화산 위에 산호가 퇴적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원형, 삼각형, 또는 말발굽형 등의 형태로 수면 바로 밑에 형성된 산호의 방벽(=산호초, reef)에 의하여 외해와 차단되고 1-2개의 수로를 통해서만 외해와 연결된 초호(lagoon)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산호초의 일부가 수면 밖으로 돌출되어 흙이 쌓이고 이곳에 야자나무같은 약간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 해발 수미터 정도의 나지막한 땅뙈기(island=섬)가 있다.
이러한 산호초와 섬과 초호를 모두 합친 것을 환초(atoll)이라고 부른다.

 

(환초=atoll, 초호=lagoon, 산호초=reef)


이러한 환초의 크기는 천차만별로서 작은 것은 초호의 면적이 작은 운동장만한 것에서 세계 최대의 환초인 콰절린 환초같은 경우는 초호의 직경이 100km x 35km, 초호의 면적은 2,700 제곱킬로미터에 댤한다. 
그런데 이 섬들은 환초 이름과 다른 각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혼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태평양전쟁에서 접할 수 있는 전장의 이름은 보통 환초의 이름이다.
예를 들어 피투성이 상륙전의 대명사격인 타라와 상륙작전의 경우 타라와는 환초의 이름이며, 실제로 미해병대가 죽어간 섬은 베티오 섬이다.
그리고 이제 헐지 제독이 공격하려는 북부 마셜 제도의 타로아 섬은 말로에라프 환초에 있는 섬의 이름이다.

물론 환초 이름과 섬의 이름이 일치하는 경우도 있는데, 마셜 제도의 콰절린 환초에서 가장 큰 섬이 콰절린 섬이다.

환초는 해군에게 이상적인 기지가 된다.
초호가 충분히 넓을 경우 외해의 거친 파도에서 보호되는 이상적인 정박지나 수상기 기지가 되며 섬들은 평탄한 지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건물을 짓거나 활주로를 건설하기에 적당하고 산호를 잘게 부수면 활주로의 재료로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는 환초를 점령하려면 섬의 바깥쪽으로 멀리 수면 바로 밑에 밀생하고 있는 산호 때문에 상륙주정의 접근이 어려워서 까다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며 산호를 타고넘어 전진할 수 있는 상륙장갑차(앰트랙)를 대량으로 보유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섬들을 점령하기 어렵다.  

제8기동부대의 최초 계획으로는 웟제 환초와 타로아 섬의 방어가 튼튼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공격목표를 추가할 여력이 없었으나 1월 27일에 태평양함대사령부로부터 추가정보가 들어왔다.
즉 미잠수함 SS-169 돌핀의 정찰 결과 웟제 환초와 타로아 섬의 방어는 튼튼한 편이 아니며 웟제 환초로부터 서쪽으로 240km 떨어진 콰절린 환초에서 적의 항공기 및 함정의 활발한 활동이 관측되었다는 것이다.

 

명민하고 공격적인 브라우닝 대령은 콰잘리 환초도 공격목표에 포함시키자고 주장하여 허지 제독의 승인을 받았다.

콰절린 환초를 공격범위 내에 넣으려면 제8기동부대는 웟제 환초와 타로아 섬에 위험스러울만큼 다가가야 했으나 어차피 적 항공기의 행동반경 내에서 행동하는 이상 안전을 위해서는 적이 알아채기 전에 일격을 가하여 반격능력을 꺾어버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제8기동부대가 진주만을 떠나기 5일 전인 1월 6일에 진주만을 공격했던 나구모 제독의 항공모함 부대가 일본내해를 떠났다.
진주만 공격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제2차 웨이크 섬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파견했던 제2항공함대 소속의 항모 소류와 히류가 아직 합류하지 않아서 기동부대는 아카기, 카가, 쇼가쿠, 즈이가쿠 4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충분히 강력했던 이 부대가 일본내해를 떠나자 어디로 갈 것인지 미해군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만일 이들이 마셜 제도나 길버트 제도로 온다면 일본군의 지상발진항공기들과 함께 이곳을 공격하려는 제8기동부대나 제17기동부대에게 반격을 가하여 격멸해버릴 수 있었다.
우려와는 달리 이 항공모함들은 트럭제도에 들렀다가 남쪽으로 내려가 1월 23일에 있었던 일본군의 라바울 점령시 항공지원을 제공한 후 팔라우 제도 방면으로 가 버렸다.

제8기동부대와 제17기동부대가 나란히 북상하던 1월 28일 오후 4시, 엔터프라이즈는 함대 급유선 플랫의 옆에서 나란히 항진하면서 급유를 받기 시작하여 5시간 30분 후인 9시 30분에 급유를 마쳤다.
주력함이 야간에 이동하면서 측면 급유를 받은 일은 이때가 최초였다.
대낮에도 주력함이 급유선과 나란히 진행하면서 측면 급유를 받는 것이 위험하게 생각되던 시절에 이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후로도 태평양함대사령관인 니미츠 제독이 관심을 가지고 독려한 덕분에 미해군의 해상급유 및 보급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1943년 이후로는 낮이건 밤이건 상관없이 함정들이 급유선이나 보급선의 양옆을 나란히 달리면서 2척이 동시에 급유를 받거나 보급을 받는 일이 일상사가 되었다.

이러한 효율적인 해상보급기술은 연료와 보급품을 퍼먹는다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대규모의 항모기동부대가 원거리를 다니면서 자유롭게 행동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영국해군은 태평양전쟁의 막바지까지도 함정이 보급선의 뒤를 따라가며 한번에 한척씩 보급받는 방법 밖에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1월 29일, 요크타운 중심의 제17기동부대가 길버트제도 공격을 위하여 떨어져 나갔고, 다음날 제8기동부대는 날짜변경선을 통과하여 1월 31일이 되었다.
출격시간이 24시간 내로 다가오자 제8기동부대는 막바지 공격준비에 들어갔다.
제6전투비행대대는 와일드캣의 조종석 뒷면에 보일러용 철판을 덧대어 방어력을 보강했다.
헐지 중장은 기동부대 내의 모든 함정에게 여차하면 다른 함정을 예인하거나 또는 예인당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어 두도록 명령했다.
공격을 마치고 후퇴시 예인할 필요가 생겼을 때 예인 준비를 갖추느라 1분도 허비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항법사들과 항공기 승무원들은 낡은 작전해역 지도를 뚫어지도록 들여다보면서 작전과 지형에 대하여 연구하고 암기했다.

저녁 6시 30분, 제8기동부대는 발진지점을 향하여 시속 30노트의 고속으로 항진하기 시작했다.

다음날인 2월 1일 새벽 2시 20분, 당직을 서고 있던 장교 한 사람이 얼굴에 모래가 부딪힌다며 보고했다.
핼시 제독은 즉시 함대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도록 명령했다.
그 지역의 해도가 오래된 것이라 정확도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까딱하다간 좌초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 그 보고를 했던 장교는 자기 얼굴에 붙은 모래가 입 안에서 금방 녹아버리고, 또 맛이 달다는 것을 깨닫고 살펴보자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서 한 수병이 커피에 설탕을 넣다가 바람에 흩날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다.
40분 후인 2월 1일 오전 3시, 엔터프라이즈의 전 승무원들에게 기상명령이 내려졌다.

핼시 중장의 계획에 따르면 아침 7시 직전에 북부 마셜 제도의 3개 목표에 대하여 동시에 공격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오전 4시 30분, 엔터프라이즈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오전 4시 43분, 제6전투비행대 소속의 와일드캣 6대가 전투공중초계(Combat Air Patrol, CAP)임무를 위하여 아직 어두운 밤하늘로 날아 올랐다.
곧 이어서 제6정찰비행대와 제6폭격비행대 소속 36대의 돈틀레스가 엔터프라이즈 항공단장인 영 중령의 인솔 하에 엔터프라이즈의 비행갑판을 떠났다.
오전 5시에는 제6뇌격대 소속인 9대의 데버스테이터와 엔진 고장으로 출발이 늦어진 1대의 돈틀레스가 출격했다.
이 46대의 돈틀레스 및 데버스테이터는 250km 떨어진 콰잘레인 환초로 향했다.

아침 6시 10분에는 제6전투비행대 소속 12대의 와일드캣이 워제 환초와 말로에라프 환초의 타로아 섬을 목표로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을 떠났다.
이들 중 David W. Criswel 소위의 탑승기가 이륙 직후 실속을 일으켜 바다에 추락했고,
크리스웰 소위는 실종되었다.
야간작전에 대한 훈련부족으로 인하여 빚어진 사고였으나 다행히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었다.

이때 출격한 데버스테이터는 어뢰 대신 접촉신관을 장비한 225kg 짜리 폭탄을 3발 달고 있었고, 돈틀레스는 225kg 짜리 폭탄 1발과 90kg 짜리 폭탄 2발을, 와일드캣은 45kg 짜리 폭탄 2발씩을 장비하고 있었다.

제8기동함대의 함재기들이 엔터프라이즈의 비행갑판을 속속 떠나고 있던 그 시각, 스프루언스 제독의 순양함들도 그들의 표적을 향하여 항진하고 있었다.
와일드캣의 공습이 끝나자마자 이들 중 노댐턴과 솔트레이크시티는 워제 환초를, 체스터와 2척의 구축함은 타로아 섬을 각각 포격할 예정이었다.
사실상 워제 환초와 타로아 섬의 경우 와일드캣의 역할은 주로 적의 비행장을 공격하여 일본군의 반격능력을 제거하는 것이었으며, 이어서 순양함들이 함포사격을 가하여  목표물에 실질적인 타격을 입힐 계획이었다.

당시 마셜 제도를 지키던 일본군 항공기들은 제24항공함대의 일부 세력이었다.
몇 개의 섬에 흩어져있던 이 세력은 합하여 33대의 구형 A5M Claude 전투기,9대의 폭격기, 그리고 9대의 비행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수의 폭격기를 포함한 제24항공함대의 나머지 세력들은 트럭 제도와 라바울에 배치되어 있었다.

 

(미츠비시 A5M4 Claude, 96식함상전투기. 승무원 : 1명, 길이 : 7.6m, 폭 : 11m, 최고속력 : 440km/hr, 항속거리 : 1,200km, 무장 : 기수에 7.7mm 기관총 2정)

 

오전 7시 직전, 콰잘레인 공격대 중 Eugene Lindsey 소령이 이끄는 뇌격기대가 콰잘레인 환초 북단의 Roi 섬에서 남쪽으로 70km 떨어져 있던 일본군의 콰잘레인 정박지를 공격하기 위하여 본대를 떠났다.
영 중령이 인솔하는 돈틀레스 37대로 이루어진 본대는 여명 직전의 어둠 속에서, 얕게 깔린 안개를 뚫고서 수십년된 낡은 지도에 의존하면서 로이 섬을 찾아서 계속 전진했다.
이들은 오전 7시 5분, 원래 공격예정시간에서 7분 늦게 제6정찰비행대장인 Halstead L. Hopping 소령이 이끄는 6대의 돈틀레스를 필두로 로이섬 상공에 도착하여 급강하폭격을 시작했다.

엔터프라이즈의 공격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경고를 받았던 로이 섬의 대공포화가 치열하게 불을 뿜었고 지상의 활주로에서는 전투기들이 -고정식 랜딩기어를 가진 구식의 클라우드 기- 급히 출격하고 있었다.
공격대의 가장 선두에서 치열한 대공포화에 노출된 하핑 소령의 탑승기는 폭탄을 투하한 직후 피격되어 바다에 추락, 하핑 소령과 후방사수인 Thomas Harold 병장이 전사했다.
제6정찰비행대는 편대장들인 Earl Gallaher 대위와 C. E. Dickinson 대위의 지휘 하에 공격을 계속했다.
그들은 로이 섬의 일본군 비행장을 두들겨서 탄약저장고와 2개의 격납고, 통신실을 파괴했고, 기지 시설물들과 지상에 주기된 적의 항공기들에 대하여 기총소사를 가했다.
일본군의 전투기들과 대공포화에 의하여 3대의 돈틀레스가 더 격추되었지만 돈틀레스들도 반격을 가하여 클라우드 전투기 3대를 격추했다.

본대와 헤어져 콰잘레인 정박지에 쇄도한 제6뇌격비행대의 데버스테이터 9대는 기습에 성공하여 대공포화의 저항을 크게 받지 않으면서 폭격을 시작하여 몇 척의 함선에 피해를 입혔다.
이곳에서 일본군의 상선들과 잠수함들, 그리고 순양함 가토리를 발견한 린지 소령은 즉시 본대의 영 중령에게 연락해서 더 많은 급강하폭격기들을 보내도록 요청했다.

영 중령은 즉시 제6폭격비행대장인 William R. Hollingworth 소령에게 명령을 내려 제6폭격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 뿐만 아니라 아직 폭탄을 가지고 있는 제6정찰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 7대도 같이 이끌고 로이섬 상공을 떠나 콰잘레인 정박지로 가도록 명령했다.

한편 엔터프라이즈에서는 영 중령이 무전으로 홀링워스 소령에게 내리는 명령을 듣고 남아있던 제6뇌격비행대 소속 9대의 데버스테이터들이 어뢰로 무장하고 출격준비를 갖추었다.

콰잘레인 정박지에 도착한 제6폭격비행대와 제6정찰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들은 4,200m 상공에서부터 차례로 급강하폭격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공격이 끝났을 때 수송선 보르도마루와 구잠함 쇼난마루가 격침되었고, 정박지의 방어사령관을 포함하여 90여 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

콰잘레인 공격대가 로이 섬과 콰잘레인 정박지를 공격하는 동안 제6전투비행대 소속의 와일드캣들도 타로아 섬과 워제 환초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워제 환초는 엔터프라이즈에서 직접 보일만큼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오전 7시 직전에 제6전투비행대장인 C. Wade McClusky 대위가(이 사람은 4월에 소령으로 진급하여 엔터프라이즈 비행단장이 된 후 6월 4일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휘하의 돈틀레스들을 이끌고 일본항모 아까기와 카가를 폭격하여 침몰시킴으로써 미해군에서 가장 유명한 소령이 된다.) 이끄는 6대의 와일드캣이 워제 환초를 기습하여 아직도 단잠에 빠져있던 일본군 기지를 공격하여 건설 중이던 비행장을 폭격하고 지상 시설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James S. Gray 대위가 이끄는 5대의 와일드캣은 타로아 섬으로 향했다.
오전 7시 직전에 그레이 대위는 눈앞에 섬을 하나 발견하자 그의 요기인 Wilmer Rawie 중위와 함께 폭탄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 섬은 타로아가 아니라 Tjan이라는 무인도였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그레이 대위가 남동쪽을 살펴보다가 24k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타로아 섬을 발견했다.
타로아 섬의 상공에 도달한 그레이 대위의 공격대는 이 기지가 방어가 허술한 수상기 기지라는 정보예측과 달리 1.6km 짜리 활주로를 두 개나 갖추고 수많은 적기들이 작전하고 있는 크고 강력한 비행기지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엔터프라이즈에서 동남향으로 불과 160km 떨어져 있는 타로아 섬은 엔터프라이즈의 가장 큰 위협이었다.

2,400m 상공에서 공격에 들어간 5대의 와일드캣은 활주로에 45kg 짜리 폭탄을 떨어뜨리고, 활주로 옆에 길게 주기되어 있던 적 항공기들의 대열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이럴 때 효과적인 소이탄이 장비되지 않았던 관계로 불에 휩싸이며 완전 파괴를 확인한 것은 한 대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외에도 여러 대의 항공기에 손상을 입혀서 적어도 당분간은 작전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 일로 덕분에 엔터프라이즈에 대한 일본군의 반격능력이 현저히 저하되었다.

타로아 섬에 대한 1차 공격을 마치고 고도를 회복한 라위 중위는 전방 1.6km 지점을 비행하고 있는 적의 클라우드 전투기 두 대를 발견했다.
들키지 않고 밑에서부터 접근하는데 성공한 라위 중위는 12.7mm 기관총탄을 퍼부어서 선두기를 격추하고, 곧바로 2번기에게 돌진하였는데 두 전투기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적의 날개가 거의 자신의 비행기와 접촉할 정도까지 접근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라위 중위도 깜짝 놀랐으나 상대방도 혼비백산하여 전속력으로 도망쳐 버렸다.

타로아 기지에서는 거듭되는 와일드캣의 기총소사에도 불구하고 8대의 전투기를 발진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들 중의 3대가 그레이 대위의 와일드캣을 노리고 접근하기 시작할 무렵, 지난 몇 달간 기계적 신뢰성이 부족한 것이 알려져 있던 와일드캣의 기관총들이 고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레이 대위의 기관총 중 3개가 고장을 일으켰고 라위 중위의 기관총 4개도 모두 고장을 일으켰다.
그 외에 Ralph Rich 소위의 탑승기를 비롯한 나머지 와일드캣들도 모두 기관총의 고장을 일으켜서 그들은 할수없이 편대장 그레이 대위를 뒤에 남겨두고 모함을 향하여 타로아 섬 상공을 떠났다.
이제 적기지 상공에 홀로 남아 적기에 둘러싸인 그레이 대위는 살아남기 위하여 아직 작동하는 하나의 기관총을 마구 난사하며 적기 중의 하나에게 고속으로 돌진해 갔다.
깜짝 놀란 그 적기가 피하면서 공간이 생기자 그레이 대위는 전속력으로 도주했다.
천신만고 끝에 모함에 돌아온 그레이 대위의 탑승기 동체에는 30 군데 이상 구멍이 뚫려있었고, 조종석 뒤에 덧대었던 보일러용 철판에도 수많은 탄흔이 남아 있었다.
 

제6전투비행대가 워제 환초와 타로아 섬에서 물러나자 스프루언스 제독의 순양함부대가 포격을 시작했다.
노댐턴과 솔트레이크시티는 오전 7시 15분부터 워제 환초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펜사콜라급 중순양함 솔트레이크시티 CA-25. 표준배수량 : 11,000톤, 길이 : 178.5m, 폭 : 19.9m, 속력 : 32.7노트, 승무원 : 612명, 무장 : 8인치 주포 10문, 5인치 4문, 47mm 대공포 2문, 어뢰발사관 6기, 항공기 : 4대)

 

중순양함 체스터와 구축함 2척은 와일드캣이 떠나가자 타로아 섬의 일본군 비행기지와 항공기를 겨냥하여 포격을 시작했다.
곧 타로아 섬의 일본기들이 반격을 가하여 체스터가 고물 쪽에 소형폭탄을 한발 맞았다.
오전 8시 30분에 8대의 일본군 쌍발폭격기가 800kg짜리 대형폭탄을 사용하여 체스터에게 수평폭격을 시도했다.
이 폭탄들은 한발도 명중하지는 않았으나, 800kg짜리 대형폭탄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진 체스터와 두 척의 구축함은 포격을 중단하고 철수했다.

 

(노댐턴 급 중순양함 체스터 CA-27. 표준배수량 : 9,300톤, 길이 : 182.9m, 폭 : 20.1m, 최고속력 : 32노트, 승무원 : 621명, 무장 : 8인치 주포 9문, 5인치 포 4문, 어뢰발사관 6기, 항공기 : 2대)

 

엔터프라이즈 함상에서는 오전 8시경부터 라위 중위를 필두로 조종사들이 귀환하기 시작하자 타로아 재공격에 내보낼 조종사들을 급히 선발하기 시작했다.
어뢰를 장비한 제6뇌격비행대 소속의 데버스테이터 9대는 Lance Massey 소령의 지휘 하에 이미 콰잘레인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제6전투비행대 소속의 와일드캣들은 대부분 전투공중초계 임무로 돌려야했기 때문에 타로아 섬에 대한 재공격은 주로 제6폭격비행대와 제6정찰비행대가 담당하게 되었다.

오전 9시 30분에 제6폭격비행대장 홀링워스 소령이 이끄는 9대의 돈틀레스기(7대는 제6폭격비행대 소속,2대는 제6정찰비행대 소속)가 타로아 재공격을 위하여 엔터프라이즈를 떠났다.  
이들이 타로아 상공에 도달하자 일본기들이 재급유와 재무장을 위하여 대부분 지상에 있었다.
돈틀레스들은 태양을 등지고 공격을 시작하여 격납고 2동과 지상에 있던 항공기들을 파괴했다.
5대의 클라우드 기가 급히 날아올라서 반격을 가했으나, 돈틀레스들은 한대도 빠짐없이 안전하게 엔터프라이즈로 귀환했다.

오전 10시 30분에 제6폭격비행대의 Richard Best 대위가 이끄는 제3차 공격대가 엔터프라이즈 함상을 떠났다.
제3차 공격대는 타로아의 통신탑, 연료저장고, 그리고 비행장 시설물들을 파괴하여 기지의 기능을 거의 마비시켰다.
이들은 일본기들의 반격을 받아 John Doherty 소위의 탑승기가 격추되었다.

그러나, 도허티 소위와 후방사수인 Will Hunt 일병은 달려드는 일본기들에게 반격을 가하여, 격추되기 전에 이미 2대의 클라우드 기를 격추한 상태였다.
제3차 공격대가 귀환하자 제8기동부대는 일본기의 반격에 대비하면서 북쪽을 향하여 30노트의 고속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오후 1시 30분,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에 적기들이 포착되었다.
일본군의 쌍발폭격기인 96식 Nell 폭격기 5대가 공격해왔다.
제6전투비행대 소속의 와일드캣 4대가 엔터프라이즈 전방 25km 지점에서 이들을 덮쳤으나, 마침 일부 와일드캣의 기총이 고장난데다가 일본기들이 구름 속에 숨어버리는 바람에 이들을 놓치고 말았다.
일본기들은 고도 3,000m에서 구름 밖으로 나왔고, 엔터프라이즈의 우전방 쪽에서 시속 350km의 속도로 접근했다.
곧 제8기동부대 내의 모든 5인치 양용포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으나, 포수들의 훈련이 부족하여 대부분의 포탄들이 일본기의 뒤에서 폭발했다.

그리하여 대공포화가 일본기들보다는 오히려 이들을 추격하는 아군의 와일드캣을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미츠비시 G3M Nell, 96식육상공격기. 승무원 : 7명, 길이 : 16.5m, 폭 : 25m, 최고속력 : 375km/hr, 항속거리 : 4,400km, 무장 : 20mm 기관포 1문, 7.7mm 기광총 4정, 폭탄 800kg 또는 어뢰 1발)

 

엔터프라이즈의 함장 머레이 대령은 엔터프라이즈를 지그재그로 항진하게 함으로써 일본기의 조준을 방해했다.
엔터프라이즈의 1.1 인치 포들이 작렬하는 가운데 일본기들은 각각 3개씩의 60kg 짜리 폭탄을 투하했다.
이 폭탄들은 대부분 빗나갔지만 1발의 폭탄이 항공유 송유관 부근에서 폭발하여 작은 화재를 일으키고 George Smith 상병에게 중상을 입혔다.
폭격을 마친 일본기들은 귀환코스를 잡았는데 편대장인 나가이 가즈오 대위의 폭격기가 갑자기 왼쪽으로 선회하더니 엔터프라이즈를 향하여 돌진해 왔다.
함대 내의 모든 대공포화가 맹렬하게 불을 뿜었으나 이 폭격기를 저지하지 못했다.
충돌 직전의 마지막 순간에 엔터프라이즈는 최대한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아마도 기계적 고장을 일으킨듯한 이 폭격기는 엔터프라이즈를 따라잡지 못하고 이물쪽 비행갑판에서 불과 1m도 안되는 차이로 빗나가면서 엔터프라이즈의 좌현쪽 바다에 추락했다.

오후 3시경에 전투공중초계 중이던 와일드캣 2대가 제8기동부대를 추적하던 2대의 일본 수상비행기를 격추했다.
오후4시경에는 다시 일본의 쌍발폭격기 2대가 나타나서 엔터프라이즈에 수평폭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이때 엔터프라이즈의 대공사수들은 제6전투비행대장인 매클러스키 대위의 탄착수정 하에 1대의 일본 폭격기에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이들이 철수할 때 맥클러스키 대위와 그의 요기는 피해를 입지않은 폭격기는 격추했으나, 대공포화로 피해를 입은 폭격기는 엔진에서 연기를 내뿜으면서도 와일드캣의 추격을 뿌리치고 기지로 돌아갔다.
이것이 일본의 마지막 반격이었다.

핼시 제독은 혹시라도 일본의 정찰기에 발견될 때를 대비하여 제8기동부대의 침로를 하와이 쪽이 아닌 북서쪽으로 잡았다.
그러다가 한랭전선을 만나서 적의 정찰기가 접근하지 못할만큼 해상상황이 충분히 거칠어지자 그때서야 침로를 북동쪽으로 바꾸어서 진주만을 향했다.
1942년 2월 5일, 엔터프라이즈는 진주만에 입항했다.

제8기동부대는 이번 마셜 제도 공격에서 1척의 수송선과 2척의 소형함정을 격침하고, 적기 9대를 지상에서 격파하고 공중전에서 8대를 격추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와일드캣 1대와 돈틀레스 5대를 상실하는 피해를 입었다.

한편, 길버트 제도를 공격했던 제17기동부대는 나쁜 날씨와 플레처 소장의 소극적인 전술 때문에 공식 기록에 남을만한 전과를 전혀 올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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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월7일, 엔터프라이즈가 하와이 근해의 초계를 마치고 진주만에 입항하자 제8기동부대사령관 헐지 중장이 상륙했다.
다음날인 1월8일에 파이 중장의 계획을 논의하기 위하여 태평양함대사령부에서 열린 작전회의에 참석한 헐지 중장은 니미츠 제독의 공격계획에 반대하는 장교들에게 패배주의자라면서 호통을 치고 파이의 계획을 실시하려는 니미츠 제독을 지지했다.
헐지 제독은 사령관의 계획에 반대하는 장교들은 패배주의자들로서 태평양함대에는 이런 패배주의자들은 필요없으니 다 그만두라는 뜻으로 "공기를 바꾸어야 한다." 고 질타하면서 자기 혼자서라도 사령관의 계획을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헐지 제독은 현역 중장이고 항모기동부대의 사령관이며 부하에 대한 깊은 애정과 동료에 대해 배려할 줄 아는 인간적 매력 덕분에 사령부 내의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리하여 태평양함대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의 한 사람인 헐지 중장이 이런 식으로 니미츠 제독을 적극 지지하고 나서자 회의의 분위기는 일변하여 니미츠 제독의 희망대로 파이의 계획이 채택되었다.
게다가 헐지 중장은 미해군의 항공관계자 중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실력자였다.

따라서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본 적도 없는 니미츠 제독이 항공모함의 운용에 대하여 자신들의 전문적 식견을 존중하지 않는다며 내심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진주만의 항공관계자들도 헐지 중장이 이렇게 나오는 이상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니미츠 제독은 태평양함대사령관으로서의 권위와 지도력이 도전을 받아 흔들리던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 결과 제독 스스로도 '잘리지 않고 6개월만 버텨도 성공' 이라고 생각하던 태평양함대사령관 자리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눌러앉아서 원수 계급장까지 달았다.
니미츠 제독은 이때의 고마움을 평생 잊지 않았다.

 

(윌리엄 헐지 제독)

 

다음날인 1월 9일, 파이의 작전계획이 확정되었다.
헐지 중장 지휘 하의 엔터프라이즈는 사모아로 가서 해병대를 호송해 온 요크타운과 합류하여 해병대의 상륙을 엄호하기로 했다.

그 이후에 2척의 항공모함은 헐지의 지휘 하에 북상하여 길버트 제도와 마셜 제도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윌슨 브라운 중장이 지휘하는 렉싱턴은 웨이크섬을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하와이 근해를 지키기로 되어 있었던 새러토가가 1월 11일에 오아후섬 서남방 800km 지점에서 일본잠수함 I-16 호가 발사한 어뢰에 맞아 대파되는 바람에 렉싱턴에 의한 웨이크섬 공격은 취소되었다.

1월 11일, 제8기동부대가 사모아를 향하여 진주만을 출항했다.
제8기동부대는 핼시 중장의 기함인 엔터프라이즈를 중심으로 순양전대장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소장의 기함인 노샘프턴(CA-26), 솔트레이크시티(CA-25), 체스터(CA-27) 등 3척의 중순양함과 6척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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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을 다룬 저작을 보면 대부분 진주만 기습과 둘리틀 공격대의 도쿄 공습 사이인 1942년 초반의 기술은 일본군의 싱가포르 공략, 필리핀 전투와 맥아더의 탈출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점령과정 및 나구모 함대의 인도양 진출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그 기간에 진주만의 태평양함대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경향이 있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1942년 초반 몇달 동안 태평양함대가 망가진 배나 수리하면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알겠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1942년 초반에 태평양함대는 불리한 여건 하에서도 공격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면서 노력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30일, 대서양함대사령관이었던 어니스트 조셉 킹 대장이 미국함대총사령관(Commander in Chief of the United States Navy, CominCh)에 취임했다.
각 지역의 함대사령관들이 공동으로 돌아가면서 맡던 명예직에 가까운 기존의 직위와 달리 킹 사령관은 미해군의 전략을 수립하고 그것을 수행하도록 함대사령관에게 직접 명령할 수 있는 권한뿐만 아니라 중장급 이상의 고위장교에 대한 인사권을 포함한 광범위한 행정적 권한까지 한손에 거머쥔 채 오로지 대통령에게만 보고할 의무를 가진 명실상부한 미해군의 제1인자가 되었다.

 

(킹 제독)

 

킹 제독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하자 스타크 해군참모총장은 할일이 없어져 버렸다.
그러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스타크 제독을 유럽주둔 해군사령관에 임명하여 런던으로 보내버리고 킹 제독에게 해군참모총장을 겸직하도록 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헤럴드 스타크 제독)

 

이리하여 킹 제독은 미해군의 제1인자이면서 동시에 합동참모본부(Joint Chiefs of Staff, JCS) 의 멤버가 되었다.
영국과의 공동작전이 필요할 때에는 연합참모본부(Combined Chiefs of Staff, CCS)가 설치되어 합동참모본부의 상위기관이 되지만 어차피 미국이 주도하는 태평양전선에서 영국이 미해군의 전략에 간섭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태평양전선에 관한 미해군의 전략은 대부분 킹 제독과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니미츠 제독이 수립하고 실행하게 되었다.

킹 제독이 미국함대총사령관에 취임한 다음날인 1941년 12월 31일에는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진주만에 정박한 잠수함 그레일링호의 갑판에서 태평양함대사령관에 취임했다.

 

(SS-209 그레일링 호의 갑판에서 거행된 니미츠 제독의 태평양함대사령관 취임식)

미국함대총사령관이 된 킹 제독의 주된 관심은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 태평양지역의 군사정세였다.

진주만에서 태평양함대를 박살낸 일본은 동시에 영령 말레이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싱가포르를 향하여 남진 중에 있었고 12월 10일에는 사이공에 기지를 둔 일본해군의 지상발진 뇌격기 부대가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하여 싱가포르에 파견된 영국의 신예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스를 쿠안탄 앞바다에 수장시켜 버렸다.

 

(항공공격을 받고 있는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스. 일본항공기에서 찍은 사진으로 윗쪽이 프린스 오브 웨일즈, 아랫쪽이 리펄스)

 

같은 날 일단의 일본군이 괌에 상륙하여 점령했으며, 다음 날인 11일에는 가지오카 소장이 지휘하는 일본군이 웨이크섬을 침공했다.

웨이크섬 침공부대는  127mm 포 2문, 와일드캣 12대를 보유한 449명의 미해병대로 구성된 방어부대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아 2척의 구축함(하야테, 기사라기)과 300 명 이상의 병력을 상실하는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지만 12월 21일에 압도적 병력으로 재차 공격을 가하여 23일에 끝내 점령했다.

12월 22일에는 필리핀에 일본군이 상륙했고 25일에는 홍콩이 점령당했으며 필리핀에 본거지를 두고있던 소규모의 미국아시아함대는 1월 초에 필리핀을 떠나 자바 섬을 향하여 후퇴하고 있었다.

태평양 중부해역에서도 일본은 진격을 시작하여 1914년 이래 일본령이 된 마셜 제도에 인접한 영령 길버트 제도로 진출하고 있었다.

일본항공기는 길버트 제도 서부에 있는 오션섬과 나우루섬을 공격했고, 일본잠수함이 길버트 제도와 진주만 사이에 놓여 있는 존스턴섬과 팔미라섬을 포격했다.
이러한 태평양 중부해역에서의 일본군의 움직임으로 보아 미해군 수뇌부는 일본군이 길버트 제도의 남동쪽에 위치한 엘리스 제도를 거쳐 사모아에 진출하려는 것으로 판단했다.
만일 일본군이 사모아를 점령한다면 비행장과 잠수함기지를 건설한 후 항공기와 잠수함을 사용하여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 사이의 교통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모아의 방위를 강화하는 것이 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의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이상과 같은 태평양에서의 상황판단을 기초로 킹 제독은 취임 직후 니미츠 제독에게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려보냈다.

(1)미드웨이를 포함한 하와이 근해를 방어하고 하와이와 본토 서해안 사이의 교통로를 확보하라.
(2)호주와 하와이 및 본토 서해안 사이의 교통로를 확보하라.

킹 제독은 일본의 일격으로 태평양함대의 전함세력이 사실상 전멸한 데다가 일본이 우위를 누리고 있는 항공모함의 위력이 증명된 이 마당에 오렌지 계획같은 달콤한 망상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즉 태평양에서는 당분간 전략적 수세 방침을 견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포트모레스비-뉴칼레도니아-사모아-피지-미드웨이-알류샨 열도의 더취하버를 잇는 선상에서 일본군의 전진을 저지할 계획을 세웠다.

제 (2)항의 지령과 관련하여 호주 정부는 미국 정부에게  호주와 하와이 및 미본토 서해안을 잇는 항로 전체에 대한 보호를 요구하고 있었으나, 당시 태평양함대에게는 사모아 너머까지 항로의 안전을 보장할 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모아에 미해병대 5,000 명을 배치하기로 결정하여 이들을 태운 수송선단이 1월 6일 샌디에이고를 출항했다.
그리고 전해 4월 20일에 진주만을 떠나 대서양함대에 배치되었던 요크타운 중심의 제17기동부대(TF17)가 프랭크 잭 플레처 소장의 지휘 하에 수송선단의 호송을 맡게되어 요크타운은 진주만을 떠난지 9개월만에 태평양함대로 돌아오게 되었다.

 

(요크타운 CV-5)

한편 킹 제독은 당분간 태평양에서 전략적 수세를 견지하기로 결정하기는 했으나 그것이 일본군에 대한 선제공격을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전보를 보내어 사용가능한 항공모함 부대를 총동원하여 1914년 이후 일본이 영유하고 있던 태평양 중부 해역의 캐롤라인 제도와 마셜 제도 그리고 최근에 일본이 점령한 웨이크 섬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것을 요구했다.
킹 제독은 공격이 성공할 경우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급속히 전진하고 있는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거나 최소한 지연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설사 그것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일본군이 자신들의 시간표에 따라 동남아시아 정리하고 준비를 갖춘 다음에 자기들이 유리할 때 유리한 장소에서 치고 나올 때까지 넋놓고 기다린다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적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싸울 수 있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전략의 기본으로서 이점에 대해서는 니미츠 제독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1942년 1월2일 태평양함대사령부의 참모들은 니미츠 제독에게 마셜제도와 길버트제도에 대하여 진주만에서 출발한 두 개의 항공모함 부대가 동시에 공격을 가하는 것을 기본 골격으로 하는 계획을 제출했다.
그러자 전임 킴멜제독 재임시 태평양함대의 전투함대사령관이었던 윌리엄 파이 중장이 1월 8일에 수정안을 제출했다.
즉 일본군이 사모아에 대한 미국의 방위력증강 계획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태평양을 건너오고 있는 해병대의 안전한 상륙을 보장하기 위하여 호송하고 있는 요크타운과는 별도로 진주만에서 항공모함 1척을 사모아에 파견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병대의 상륙이 끝나면 이 2척의 항공모함으로 하여금 길버트제도와 마셜제도를 공격하도록 한다는 제안이었다.

 

(윌리엄 파이 제독)

니미츠 제독은 파이 중장의 제안을 마음에 들어했지만 실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태평양함대의 고위장교들 중 상당수가 마지막 전력인 항공모함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이유로 일본군 기지에 대한 선제공격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대의 선두주자는 하와이와 주변 도서의 기지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제14해군구 사령관인 클로드 블로크 소장이었다.
블로크 소장은 자신보다 한참 후배인 킴멜 제독이 태평양함대사령관으로 부임해와서 반나절도 안되는 시간에 태평양함대의 전함들을 모두 잃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는 또다시 새까만 후배인 니미츠 제독이 사령관이 되어서 이번에는 마지막 희망인 항공모함을 몽땅 잃어버릴까봐 걱정했다.
블로크 소장은 1938년부터 1940년 1월 6일까지 임시로 대장 계급장을 달고 태평양함대사령관을 지낸 바가 있기 때문에 진주만 기습 당시 소장계급장을 달고 항해국장으로 근무하다가 불과 3주일만인 12월 31일에 태평양함대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중장도 거치지 않고 바로 대장 계급장을 달게 된, 한마디로 말해서 벼락출세한 니미츠 제독의 대선배에 해당했다.
게다가 진주만의 항공관계자들이 대부분 블로크 소장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공관계 경력이 전혀 없는 니미츠 제독으로서는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그리하여 태평양함대사령부에서는 작전회의가 열릴 때마다 공격계획을 관철시키려는 사령관 및 참모들과 반대하는 장교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살벌한 광경이 반복되었으며 이러한 긴장은 1월 6일의 회의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런 상황은 니미츠 제독이 태평양함대사령관이 된 이후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할 때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겪은 지도력의 위기상황이었으며 그에게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 도움은 다음날 왔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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