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1월 10일, 엔터프라이즈를 포함한 제50.2전단은 Operation Galvanic 이라고 불리는 길버트 제도 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진주만을 떠났다.
Galvany 는 개구리의 살이 전기에 닿으면 빠직하고 오그라드는 것을 발견한 과학자이다.
따라서 영어로 Galvanic 이라고 하면 전기 충격으로 찌릿찌릿하는 것을 뜻한다.
번역할 때는 주로 충격작전이라고 번역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번역해서는 이 이름을 지은 태평양함대 참모들의 느낌을 전하기 어렵다.

충격작전에 참가하는 병력은 크게 3개 부대였는데 터너 제독이 지휘하는 상륙작전 함대인 공격부대, 파우널 제독이 지휘하는 제50기동부대, 후버 제독이 지휘하는 기지항공대였다.
충격작전의 목표는 길버트 제도 북부의 메이킨 환초와 그 남쪽의 타라와 환초였는데 이 두 곳에 동시에 상륙하기 위하여 공격부대는 다시 2개부대로 나뉘어져 있었다.

힐 소장이 지휘하는 남부공격부대는 에스피리투산토를 떠나 타라와 환초의 베티오 섬에 상륙하기로 되어 있었으며 상륙군은 Julian C. Smith 해병소장의 해병제2사단과 육군 제37사단의 일부 병력을 포함한 18,300 명이었다.
남부공격부대의 일부 병력은 아베마마 환초를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침공부대 사령관인 터너 소장이 직접 지휘하는 북부공격부대는 하와이를 떠나 메이킨 환초의 부타리타리 섬에 상륙하기로 되어 있었으며, 상륙군은 미육군제27사단의 제165연대전투단으로 총 병력은 6,470 명이며 지휘관은 제27사단장 Ralph C. Smith 소장이었다.
그런데 침공부대의 지상부대인 제5상륙군단의 사령관은 '울부짖는 미치광이(Howling Mad)' 란 별명을 가진 Holland Smith 해병소장이었으므로 길버트 상륙작전의 지상군 지휘관들은 3명 다 Smith 소장이다.
실제 작전시에는 남부공격부대와 북부공격부대가 따로 작전했으므로 원래 제5상륙군단장 스미스 소장은 상륙하지 않고, 북부공격부대를 지휘하던 터너 소장과 같이 전함 펜실베니아 호에서 공격을 지켜볼 예정이었다.

제50기동부대는 정규항공모함 6척(새러토가, 엔터프라이즈, 에섹스, CV-10 요크타운, 벙커 힐, CV-16 렉싱턴), 경항공모함 5척(인디펜던스, 프린스턴, 벨로우드,  카우펜스, 몬터레이), 고속전함 6척(노스캐롤라이나, 워싱턴, 사우스다코타, 인디애나, 메사추세츠, 앨리배마 ), 중순양함 3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21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50기동부대는 다시 4개의 전투단으로 나뉘어져서 각자의 목표를 공격했다.
파우널 제독이 직접 이끄는 제50.1전투단은 정규항공모함 요크타운, 렉싱턴, 경항모 카우펜스, 고속전함 워싱턴, 사우스다코타, 메사추세츠를 중심으로 편성되어 남부 마셜 제도를 공격하여 길버트 제도 상륙작전에 대한 일본기들의 개입을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래드포드 소장이 이끄는 제50.2전투단은 정규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경항공모함 벨로우드, 몬터레이, 고속전함 노스캐롤라이나, 인디애나 중심으로 편성되어 메이킨 상륙작전을 엄호하게 되었다.
몽고메리 소장이 이끄는 제50.3전투단은 정규항공모함 에섹스, 벙커힐, 경항공모함 인디펜던스, 전함 앨리배마 중심으로 이루어져 타라와 상륙작전을 엄호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셔먼 소장이 이끄는 제50.4전투단은 정규항공모함 새러토가, 경항공모함 프린스턴 중심으로 편성되어 남쪽의 나우루를 폭격하여 이쪽 방면의 일본항공기가 길버트 제도 상륙작전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임무를 맡았다.

엔터프라이즈는 제50.2전투단의 일원으로 11월 11일에 타라와를 폭격했고, 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날인 11월 19일부터 11월 25일까지 메이킨 환초를 폭격했다.

길버트 제도 상륙작전이 시작되기 1주일 전인 11월 13일부터 17일까지 육군제7항공대 소속의 중폭격기들이 141소티를 출격하여 173톤의 폭탄을 길버트 제도와 마셜제도에 쏟아부었다.
11월 19일이 되자 제50.2전투단의 함재기가 메이킨 환초에 폭격을 개시했고 상륙일인 20일이 되자 북부공격부대 소속인 구형전함 펜실베니아, 아이다호, 뉴멕시코, 미시시피가 메이킨 환초에 포격을 시작했고 호위항공모함들인 CVE-33 Coral Sea, CVE-39 Liscome Bay,  CVE-41 Corregidor 의 함재기가 폭격에 가세한 가운데 제27사단 제165연대전투단이 상륙을 개시했다.

당시 점령목표였던 메이킨 환초의 부타리타리 섬에는 일본군 800 여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그중에 전투병력은 284명이었다.
따라서 병력 수에서 26대 1의 우세를 점한 제165연대전투단은 하루만에 부타리타리 섬을 점령할 예정이었으나 하와이에 주둔하고 있다가 메이킨 환초 상륙전에 동원되어 실전경험이 전혀 없던 제165연대전투단은 예상보다 훨씬 늦어진 11월 23일에야 부타리타리 섬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다.
펜실베니아 호에 탑승하고 있던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은 제27사단장인 랄프 스미스 육군소장에게 진격을 더 빨리 하라고 소리를 지르기 위하여 부타리타리 섬에 상륙했다.
이러한 의견 차이는 제165연대전투단의 전투능력 외에도 육군과 해병대 간의 전술 차이에 기인하는 바가 컸는데 육군은 병력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신중히 전진하며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적병을 철저히 제거하는 전술을 사용하는데 비하여 해병대에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급속히 전진하는 전술을 채택하고 있었으며 그 이유는 엄호하는 함대가 교두보 근처에 오래 머물수록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메이킨에서는 해병대의 이 전법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1월 24일 오전 5시 10분, 일본잠수함 I-175 호가 호위항모 리스컴베이에게 어뢰 2발을 명중시켜 20분만에 격침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 참사로 제24항공모함 전대 사령관인 Henry M. Mullinix 소장을 비롯한 장교 55명과 진주만 기습당시 용감한 행동으로 훈장을 받은 흑인취사병 Dorie Miller 를 포함한 사병 591명등 646명이 전사하여 부타리타리 섬에서 전사한 66명의 10배에 가까운 희생자를 기록했다.
만일 부타리타리 섬이 예정대로 일찍 점령되었다면 리스컴베이는 진작에 그곳을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메이킨 환초에서 남쪽으로 160km 정도 떨어진 타라와 환초에서는 제2해병사단이 메이킨 환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2,600 여명의 전투병력을 포함한 총 4800 여명이 주둔하고 메이킨 환초보다 훨씬 강력하게 요새화된 타라와 환초의 베티오 섬을 공격한 제2해병사단은 길이 3km, 폭 1km 남짓한 베티오 섬을 탈취하기 위한 76시간의 전투에서 장교 57명, 사병 933명 등 해병대 990명과 태반이 군의관인 해군 29명등 총 1,019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일본군의 전사자는 부타리타리 섬에서 395명, 베티오 섬에서 4,690명, 그리고 아베마마 섬에서 23명등 총 5108 명이었다.

메이킨 환초와 타라와 환초에 근접하여 항공지원을 하고있던 제50.2전단과 제50.3전단은 일본항공기들의 반격을 받았다.
제50.2전단은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매일같이 일본의 베티공격기의 공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11월 25일, 메이킨을 떠난 제50.2전단은 함대 부근에서 일본잠수함 I-19를 발견하고 격침하여 그 전해인 1942년 9월 15일에 과달카날 근해에서 I-19 호가 발사한 어뢰에 맞아서 격침된 와스프의 원수를 갚았다.  
11월 26일에는 메이킨 서방해역에서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제2전투항공대가 3대의 야간전투기를 내보내어 제50.2전단에 대한 야간공격을 위하여 마음놓고 접근하던 베티공격기의 대군을 기습함으로써 태평양에서 최초로 항공모함 함재기에 의한 야간공중전을 선보였다.
별다른 피해없이 일본기의 반격을 잘 처리한 제50.2전단과 달리 제50.3전단은 11월20일에 경항공모함 인디펜던스가 베티공격기가 발사한 어뢰에 우현을 맞아 8개월간의 수리를 요하는 대손상을 입었다.

경항공모함(CVL)으로 분류되는 인디펜던스 급은 원래 에섹스 급이 취역하기로 예상되었던 1944년 3월까지 고속항공모함의 공백을 메꾸기 위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8월에 경순양함 클리블랜드 급의 선체를 개조하여 고속의 소형항공모함으로 개조하도록 제안한 것이 시초이다.
함선국에서는 경순양함의 좁은 선체를 이용하여 항공모함을 만들기는 어렵고 시간도 많이 든다는 이유를 들어 10월 13일에 일단 거부의견을 밝혔으나 1주일 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재차 검토해 볼 것을 지시했다.
그러던 중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 1월 3일부터 함선국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안보다 훨씬 적은 개조만을 가한 경항공모함을 설계하기 시작하여 불과 1주일만인 1월 10일에 건조 중이던 클리블랜드 급 경순양함 암스테르담을 경항공모함으로 개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인디펜던 스 급의 개조 및 건조작업은 착착 진행되어 1943년 1월 14일에 초도함인 CVL-22 인디펜던스가 취역한 이래 마지막 9번함인 CVL-30 San Jacinto 가 1943년 11월 15일에 취역했다.
이중 5척은 건조 중이던 경순양함을 개조한 것이며 4척은 처음부터 경항공모함으로 건조한 것이다.
인디펜던스 급은 배수량 11,500 톤에 속력 32노트로 헬캣 25대와 아벤저 뇌격기 9대를 표준적으로 운용하여 에섹스 급 정규항공모함의 1/3쯤 되는 항공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
무장은 초반에는 5인치 양용포 2문, 보포스 40mm 대공포 16문, 20mm 대공포 16문이었으나 나중에는 5인치 양용포를 폐지하고 20mm 대공포를 8문으로 줄이는 대신 40mm 대공포를 26문으로 증설했다.
인디펜던스 급 경항공모함은 배수량에 비해서는 비교적 양호한 성능을 보였고 수선하 방어력 또한 어뢰방지용 블리스터를 채용하여 형편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소형 함체로 인한 방어력의 부족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경항공모함 인디펜던스 급의 네임 쉽인 CVL-22 Independece)


인디펜던스 급 경항공모함은 전쟁 기간 내내 정규항공모함들과 함께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일원으로서 1943년 11월 3일의 제1차 라바울 공습을 필두로 모든 항공모함 작전에 참가하여 1척(CVL-23 Princeton)이 격침되었다.
프린스턴은 레이테 해전 기간 중인 1944년 10월 24일에 일본급강하폭격기가 투하한 폭탄 1발에 맞아 화재가 발생하여 소화작업 도중에 어뢰저장고가 폭발하면서 소화작업에 임하던 경순양함 CL-62 Birbingham 호에 150명 전사라는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히면서 결국 침몰하고 말았다.

12월 4일, 제50기동부대 사령관 파우널 제독은 제50.4 전단을 제외한 3개 항공모함 전단을 이끌고 마셜 제도의 콰잘레인 환초와 워제 환초를 공격하고 마셜제도 공략을 대비하여 사진을 찍었다.
제50기동부대는 일본함정 4척을 격침했으나 일본군도 반격을 가하여 정규항공모함 렉싱턴에게 1발의 항공어뢰를 명중시켜서 진주만으로 회항하도록 만들었다.
파우널 제독은 원래 콰잘레인에 대하여 2번의 공습을 가하려고 했으나 제1차 공습에서 콰잘레인의 일본군 항공기 세력이 만만찮은 것을 보고는 제2차 공습을 단념하고 물러났다.
충격작전 기간 중에 엔터프라이즈의 제6항공단은 11월 26일에 1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1943년 12월 13일, 엔터프라이즈가 포함된 제50.2전단은 에스피리투산토의 에파테 기지에 도착했다.
1943년 한해 동안 엔터프라이즈는 총 13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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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월 21일에 팬아메리칸 사의 여객기를 타고 가다가 추락사고로 사망한 태평양함대의 잠수함대 사령관 Thomas English 소장의 후임으로 2월에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잠수함대 사령관이었던 Charles Andrews Lockwood 소장이 취임하여 말라리아로 입원하고 있던 니미츠 제독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록우드 소장은 태평양함대의 잠수함대 사령관이 됨으로써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모든 잠수함장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를 해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골칫거리는 바로 Mk14 신형어뢰였다. 

 

(Mk 14 어뢰)

 

미국의 잠수함장들은 개전 직후부터 그들의 신형어뢰에 뭔가 큰 문제점이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어뢰에 대한 그런 불만들은 대부분 보잘것 없는 전과를 올린 무능한 잠수함장들의 핑계쯤으로 치부될 수 있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잠수함장 자신들도 그런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시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1942년 12월 말에 Mk14 어뢰의 개발에 관여한 적이 있는 잠수함장인 티렐 제이콥스가 처음으로 신형어뢰의 결함가능성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지만, 잠수함대 자체가 필리핀에서 자바 섬으로 도망가는 난리통에 아시아함대의 잠수함대 사령관인 존 윌크스 대령은 그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이 소식을 들은 해군병기국에서는 재빨리 사람을 파견하여 신형어뢰가 부정확하게 작동한 이유는 잠수함장들의 취급부주의 때문이라고 몰아세우면서 문제를 덮어 버렸다. 

1942년 3월에 윌크스 대령의 뒤를 이어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잠수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록우드 제독은 어뢰에 대한 불만 때문에 잠수함장들의 사기가 지극히 떨어져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으며 즉시 잠수함들의 항해일지를 면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미국 잠수함들이 개솔린 엔진을 장착했던 시절부터 무려 7척의 잠수함장을 역임하여 잠수함과 그 함장들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미해군에서 몇 안되는 제독 중 한 사람이었던 록우드 제독은 항해일지에 기록된 어뢰의 오작동에 관한 내용 중 상당수가 분명히 어뢰자체의 결함에 의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록우드 제독은 우선 어뢰가 조정심도보다 깊게 항주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워싱턴에 있는 해군본부의 병기국에 편지를 보내어 Mk14 어뢰가 조정심도대로 항주하는지를 실제로 실험한 데이터가 있는지 질의했다.
이 질의에 대하여 병기국은 발끈하여 어뢰가 작동불량이 된 원인은 잠수함장들이 어뢰를 미숙하게 다루어서이며, 조정심도대로 항주한다는 뻔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한발에 1만달러짜리 어뢰를 낭비할 이유는 없다고 회답했다.
사실 Mk14 어뢰가 개발되는 15년 동안 실전용 탄두를 달고 발사시험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단 한번도!!
대신 병기국은 예산을 절약하기 위하여 탄두부에 물을 넣어서 실험했는데 실제탄두와 실험에 사용된 물넣은 탄두와의 무게차이 때문에 실전 상황에서 어뢰가 더 깊이 항주하게 된 것이었다.

무성의한 병기국의 회답에 화가 난 록우드 제독은 1942년 4월에 직접 오스트레일리아 앞바다에 그물을 쳐놓고 어뢰를 발사하여, 어뢰가 조정심도보다 최소한 3m 이상 더 깊이 항주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록우드 제독은 다시 병기국에 편지를 보내어 이 실험결과를 알리고, 실전탄두를 장착한 Mk14 어뢰의 발사실험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알려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으나, 병기국은 록우드 제독이 실시한 부정확한 실험의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이때 미함대사령관이면서 해군참모총장을 겸임하고 있던 킹 제독이 개입했다.
록우드 제독이 병기국에 보낸 편지의 사본을 읽어본 킹 제독은 즉시 병기국에 실전탄두를 장착한 Mk14 어뢰의 발사실험을 실시할 것을 명령했다.
빠져나갈 길이 막혀버린 병기국은 실전탄두를 장착한 Mk14 어뢰의 발사실험을 실시했고, 그 결과 어뢰가 조정심도보다 최소한 3m 이상 깊게 항주한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리하여, 잠수함장들에게는 심도조절시 3.3m 를 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즉 4.5m의 심도를 원하면 심도조절 다이얼을 1.2m 로 맞추는 식이었다.
그것이 1942년 8월의 일이었다.
 
하지만 심도조절 문제가 해결되자 이번에는 어뢰가 적함선에 도달하기 전에 조기 폭발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문제의 원인은 Mk14 어뢰에 사용된 신형 Mk6 자기기폭장치였다.
이 신형의 자기기폭장치는 어뢰의 폭발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위하여 적의 함저를 지나면서 자기장이 최대에 이르렀다가 약해지는 순간 폭발하여 최대의 효과를 얻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방식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했으나, 문제는 함선을 둘러싼 자기장이 실제로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특히 적도 부근에서는 배의 항진방향으로 자기장이 쏠린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누구도 몰랐다는 점이었다.
록우드 제독과 잠수함장들은 직감적으로 이 문제점을 깨닫고 자기기폭장치를 죽여버리고, 촉발장치만으로 어뢰를 격발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었으나 값비싼 자기기폭장치를 무력화시키는 데 따른 병기국의 반발 때문에 잠수함대 전체에 공식적으로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개별잠수함 수준에서 알아서 처리하는 실정이었다.

록우드 제독은 이런 상황에서 태평양함대의 잠수함대 사령관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니미츠 제독이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만나게 되었다.

니미츠 제독은 잠수함용 디젤기관에 대하여 미해군 내에서 최고 권위자 중 한사람으로서 미국잠수함의 엔진을 위험천만한 개솔린 엔진에서 디젤 엔진으로 바꾸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잠수함장과 잠수전대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진주만의 잠수함 기지를 건설한 것도 당시 소령이었던 니미츠 제독이었다.

그는 일본같은 섬나라를 굴복시키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전략 중 하나인 봉쇄작전을 수행하는데 잠수함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태평양함대 사령관 취임식도 잠수함 승무원들의 사기를 고려하여 일부러 잠수함 그레일링 호의 갑판에서 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필리핀 해전에서는 그의 외아들인 체스터 니미츠 주니어 소령도 잠수함장으로 참전할 정도로 잠수함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잠수함의 주무장인 어뢰의 결함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킹 제독에 이어서 실질적인 미해군의 제2인자인 니미츠 제독의 전폭적인 후원 하에서 록우드 제독은 어뢰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병기국을 심하게 압박했다.
언젠가는 워싱턴에 날아가서 해군본부의 모든 국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병기국이 제대로 작동하는 어뢰를 안 만들어주면 함선국에 요청하여 적을 끌어당겨서 구멍을 낼 수 있도록 갈고리 달린 막대기를 잠수함에 부착시켜 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고 발언하여 병기국의 체면을 완전히 구겨버리고 어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전 해군에게 널리 알린 적도 있었다.
비록 증명해내지는 못했지만 어뢰의 조기폭발은 틀림없이 Mk6 자기기폭장치의 문제라는 록우드 제독의 판단을 신뢰한 니미츠 제독은 1943년 6월에 태평양함대의 전 잠수함에 대하여 자기기폭장치의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불발어뢰가 급증했다.
병기국은
 
 “거 봐라, 결국 잠수함장들이 어뢰를 잘못 다루어서 그렇다니깐..”
 
하고 반격에 나섰으나 록우드 제독은 하와이 근해의 해안절벽에 대고 3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그 중에서 불발한 마지막 어뢰를 회수, Mk6 기폭장치의 격침이 너무 무겁고 마찰이 강한 것이 불발의 원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 해결책은 격침을 가볍게 만들고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어서 마찰을 줄인다는 어이없도록 간단한 것이었다.
진주만의 해군공창에서 기존의 격침을 갈아서 가볍게 만든 새 격침을 채용하자 어뢰의 불발률은 거의 제로로 떨어졌다.
이때가 1943년 9월, 이제야 태평양함대의 잠수함장들은 제대로 작동하는 어뢰를 가지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뢰 문제가 해결된 태평양함대와 달리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잠수함장들은 아직도 자기기폭장치의 사용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록우드 소장의 뒤를 이어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잠수함대 사령관이 된 사람이 바로 Mk6 자기기폭장치의 개발자인 크리스티 소장이었다.
크리스티 소장은 자기기폭장치에 대한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어뢰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한 잠수함장들을 좌천시켜 미본토로 쫓아보내거나 지상근무로 돌려버리는 등 보복인사를 자행했다.
하지만 남서태평양해역군 소속 잠수함장들의 이런 어이없는 고생도 1943년 11월이 되자 끝이 났다.
크리스티 소장의 직속상관인 제7함대 사령관으로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었던 토마스 킨케이드 중장이 착임했다.
유능하고 야심만만한 킨케이드 중장은 크리스티 소장의 그런 황당한 행위를 그냥 보아 넘길 인물이 아니었다.
즉시 제7함대 사령관 명의로 남서태평양해역군의 모든 잠수함장들에게 자기기폭장치의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잠수함장들은 실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지 2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작동하는 어뢰를 가지고 작전할 수 있게 되었다.

1943년 3월 초에 통합참모본부는 태평양함대에게 11월 말까지 마셜제도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통합참모본부는 이 작전을 위하여 남서태평양해역에서 작전 중이던 해병제1사단과 해병제2사단을 니미츠 제독에게 할당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이 즉각 항의하여 해병제1사단을 도로 가져가 버렸다.   

1943년 3월 15일에 미해군은 모든 함대에 번호를 붙이기로 하여 태평양 지역의 함대들은 홀수 번호를 붙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핼시 제독이 지휘하던 남태평양해역군 함대는 제3함대, 태평양함대는 제5함대, 그리고 남서태평양해역군 소속의 함대에는 제7함대라는 번호를 붙였다.

1943년 6월 18일, 마셜제도가 지상발진 항공기의 행동반경 밖에 있다는 이유를 들어 보다 남쪽에 있는 길버트 제도를 먼저 공략하겠다는 니미츠 제독이 수정안이 통합참모본부에 의하여 승인되었다.
원래 마셜제도같이 지상발진 항공기의 행동반경 밖에 있는 목표라도 항공모함을 동원하면 일단 점령을 할 수는 있으나, 대양을 돌아다녀야 하는 항공모함이 허구헌날 마셜제도를 지켜주고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앞으로의 전사에 의해서도 증명되지만 항공모함이 육지에 가까운 해안에 오래 머무르면 잠수함에 의한 위협에 노출되기 쉬웠다.
결국 상륙군이 빨리 비행장을 만들어 스스로를 지켜야하는데 그러려면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여 마셜제도의 여러 환초를 동시에 공격해야 했으나, 해병 제1사단을 맥아더 장군이 도로 가져가버리는 바람에 태평양함대에는 상륙병력이 부족했다.
길버트 제도는 남쪽의 앨리스 제도에 있는 푸나푸티 섬과 서쪽의 칸톤 섬에서 출격하는 폭격기의 항속거리 안에 있었으므로 항공모함들이 철수한 후에도 상륙군이 스스로의 비행장을 만들 때까지 충분한 항공엄호를 받을 수 있었다.

또 길버트 제도에 비행장을 만들면 마셜제도에 대한 사진촬영과 사전폭격에 활용할 수 있었고,마셜제도 점령 후에 비행장을 만들 때까지 항공엄호를 제공해 줄 수 있었다.

1943년 8월 5일, 니미츠 제독은 공식적으로 제5함대를 창설하면서 그 사령관으로 태평양함대 참모장이었던 스프루언스 중장(1943년 5월에 중장 승진)을 임명했다.
태평양함대의 참모장 자리는 북태평양에서 돌아온 맥모리스 소장이 맡았다.
8월6일에는 고속항공모함 부대인 제50기동부대(나중에 미처 제독이 사령관이 되면서 제58기동부대로 개칭) 사령관에 엔터프라이즈의 제2대 함장을 지냈던 파우널 소장을 임명했다.
상륙작전시 수송선, 호위함, 구식전함, 호위항공모함 등을 통제하게 되는 태평양함대의 상륙작전부대는 8월 24일에 제5상륙작전부대로 명명되면서 켈리 터너 소장이 사령관이 되었고, 직접 상륙하는 지상군 부대는 제5상륙작전군단으로 명명되어 홀란드 스미스 해병소장이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이 밖에도 제5함대에는 방어용 기지항공대가 소속되어 해군인 후버 소장이 사령관이 되었다.

 

니미츠 제독이 단행한 이 8월 인사는 꽤 많은 반발과 잡음을 만들어냈으며, 그것은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태평양함대의 전투병력을 사실상 한손에 장악하는 제5함대 사령관이나 건조 중이거나 이미 완성된 22척 이상의 고속항공모함들을 지휘하여 사실상 태평양전쟁을 이끌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될 제50기동부대 사령관 자리를 노리는 야심있는 장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육군항공대와 해군의 기지항공대, 또는 상륙작전시 육군과 해병대 간의 지휘권 문제까지 겹쳐 있었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은 군 사이, 또는 병과 사이의 균등안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대로의 적재적소 원칙을 견지하면서 온갖 압력과 불만에 맞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완전히 관철시켰다.
이것은 불과 1년 6개월전에 니미츠 제독이 공격계획 하나를 채택하는 데에도 부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핼시 제독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서야 겨우 자신의 계획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일로써 이제 니미츠 제독이 태평양함대를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1943년 5월에 신예항공모함인 CV-9 Essex 가 진주만에 도착했다.
원래 에섹스 급은 제2차 빈슨트라멜 법에 의하여 요크타운 급의 개량형인 호넷을 설계한 후 20,000 톤 급인 호넷의 후계함을 모색해 본 것이 그 시초이다.
당시 설계팀은 요크타운 급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항공기의 대형화 추세에 발맞추어 비행갑판을 넓히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아 여러가지 시도를 하던 중 제2차대전의 발발과 함께 배수량이 20,000 톤에서 27,000 톤으로 늘어나자 그 동안 고민했던 문제들이 일시에 풀리면서 아주 성공적인 항공모함을 설계해내는데 성공했다.
에섹스 급은 요크타운 급에 비하여 더 길고 넓은 비행갑판을 가지고 있어서 앞갑판에서는 이함하고 뒷갑판에서는 착함을 동시에 하는 일이 가능해졌고, 더 넓어진 격납고 갑판에는 장갑판을 설치했다.
엔진도 15만 마력으로 12만 마력의 요크타운급보다 강화되었고, 아일랜드에 있던 전투정보센터(CIC)를 비행갑판 밑으로 내려서 장갑으로 보호받게 하면서 동시에 아일랜드는 소형화시켜서 비행갑판은 대형화된 함재기들 72대가 동시에 작전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다.
또한 비행갑판 중앙에 있던 엘리베이터를 비행갑판 가장자리로 옮겨서 항공기가 이착함을 하는 중에도 모든 엘리베이터의 사용이 가능해졌다.
대공화기도 전반적으로 더 충실해졌고 손상관리시스템도 보다 근대화되었으며 특히 요크타운 급의 약점으로 여겨졌던 수선하 방어력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었다.

 

(CV-9 Essex. 자세한 내용은 http://blog.daum.net/ironstuff/15357699 )

 

에섹스 급의 설계는 전장환경의 변화를 감안하여 1943년 초에 큰 변화를 겪었다.
이 변화된 설계에 따르면 함체를 20m 정도 늘려서 그 공간에 보포스 40mm 대공포를 증설하고 환기계통이나 조명등의 전기계통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이렇게 바뀐 설계도대로 건조된 에섹스 급을 ‘long-hull’  type 이라고 부르며 이전의 설계대로 건조된 함을 'short hull' type 이라고 부른다.
이 long-hull type 은 최초로 건조된 CV-14 Ticonderoga 의 이름을 따서 타이콘데로가 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CV-14 Ticonderoga)

 

에섹스 급은 정규항공모함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대량건조되어 모두 32척이 예정되어 24척이 실제로 완성되었다.
이들 중 17척이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전에 취역했고, 실제로 전투임무에 참가한 것은 short-hull type 5척 모두와 long-hull type 9척 등 총 14척이다.
에섹스 급은 1943년 8월 31일에 마르쿠스 섬 공격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에 참가하여 고속항공모함부대의 주력으로서 종전시까지 1943년 11월 3일의 제1차 라바울 공습을 제외한 모든 항공모함 작전에 참가하였으며, 그 기간동안 단 한 척도 침몰하지 않았다.

CV-13 Franklin 과 CV-17 Bunker Hill 이 각각 피해를 입고 전쟁에서 물러난 것이 전부이다.
벙커 힐은 1945년 5월 11일에 오끼나와 앞바다에서 2대의 가미까제 공격기에게 당했고, 프랭클린은 1945년 5월 19일에 혼슈 앞바다에서 일본기가 투하한 250kg 짜리 폭탄 2발이 명중하여 둘 다 큰 화재가 발생하면서 수백명의 전사자를 기록했으나, 모두 자력항해로 진주만까지 회항했다.   

1943년 8월 31일, 신예항공모함인 에섹스, CV-10 Yorktown, 경항공모함인 CVL-22 Independence 를 중심으로 한 제15기동부대가 파우널 제독의 지휘 하에 마르쿠스 섬을 폭격하여 항공기 7대를 격추하고 함정 3척을 격침하는 한편 지상시설에 심한 피해를 입혔다.
제15기동부대는 헬캣 2대와 아벤저 1대를 상실했다.
9월 18일과 19일에는 제50기동부대 소속의 항공모함 3척(CV-16 Lexington, CVL-23 Princeton, CVL-24 Belleau Wood )에서 날아오른 함재기들이 푸나푸티 섬에서 날아온 제7육군항공대 소속의 B-24 Libertor 와 함께 길버트 제도를 폭격했다.
10월 5일과 6일에는 6척의 항공모함이 6회에 걸쳐서 웨이크 섬을 폭격했고, 전함과 순양함이 이 섬을 포격했다.
이러한 마르쿠스 섬과 웨이크 섬 공격은 고속함공모함 부대의 승무원들을 훈련시키고 신예기인 F-6F Hellcat 전투기와 Helldiver 급강하폭격기를 시험해 보는 무대였다.

또한 이러한 공격을 통하여 3-4척의 항공모함을 진형의 중앙에 넣은 대규모의 대공원형진을 시험했다.

 

(F6F Hellcat.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rectek2/12226726 )

 

1943년 11월 20일, 엔터프라이즈는 길버트 제도의 메이킨 환초 앞바다에 있었다.
엔터프라이즈는 Arthur W. Radford 소장 지휘 하에 경항공모함 벨로 우드와 CVL- 26 Monterey 와 함께 제50.1전단(TG50.1)을 형성하여 메이킨 환초 상륙작전을 지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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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지역의 미군이 1943년 1월 22일, 파푸아의 부나를 탈환한 데 이어서 2월 9일에는 과달카날을 점령하자 태평양 지역의 정세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이 기간을 이용하여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는 앞으로의 공세작전을 위한 계획을 짜고 함정들을 수리하며 조직을 정비했다.

북태평양해역군 담당 지역에서는 사령관 킨케이드 중장이 육군과의 관계를 호전시키는데 성공했고, 1942년 9월에 건설했던 애닥 섬과 암치카 섬의 비행장에서 폭격기들이 출격하여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대한 보급을 거의 끊어 놓았다.
1943년 3월 26일에는 애투 섬을  향하는 일본군의 보급선단을 요격하려던 Charles H. “Soc” McMorris 소장이 이끄는 중순양함 1척(Salt Lake City), 경순양함 1척(Richmond),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진 미국함대가 이 보급선단을 호송하던 호소가야 보시로 중장의 중순양함 2척(나찌, 마야), 경순양함 2척(다마, 아부꾸마),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진 일본함대와 격돌했다.
코만도르스키 해전이라고 불린 이 해전의 결과 일본함대는 중순양함 나찌가 중파되는 피해를 입었고, 미국함대는 중순양함 솔트레이크시티가 대파되고 구축함 Bailey가 중파되는 피해를 입어 일본함대가 판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일본 측은 애투와 키스카에 대한 보급을 전적으로 잠수함에 의존했다.

 

(일본 중순양함 나치.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6018896 )

 

1943년 5월 11일에 킨케이드 제독은 키스카보다 더 서쪽에 있는 애투 섬에 먼저 상륙했다.
미육군제7사단의 병력 3,000 명이 일차로 상륙했고 최종적으로는 14,000 명이 상륙하여 5월 29일에 섬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애투 섬 상륙작전에는 3척의 구식전함(BB-36 Nevada , BB-38 Pennsylvania , BB-42 Idaho ) 과 1척의 호위항공모함(CVE-16 Nassau)이 참가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BB-36 네바다.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8300204 )


8월 15일에는 29,000 명의 미군과 5,300 명의 캐나다 군이 키스카 섬에 상륙했으나 일본군은 이미 7월 28일에 감쪽같이 철수한 후였다.
키스카 섬 상륙작전 이후 북태평양해역군의 관할지역에서는 종전때까지 이렇다 할 대규모 작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뉴기니아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남서태평양해역군이 부나를 함락하고 라에와 살라모아를 위협하게 되자 라에 기지의 증원을 위하여 제18군 사령부와 제51사단을 실은 8척의 수송선들이 8척의 구축함과 41대의 제로기의 호위를 받으며 1943년 2월 28일 밤에 라바울을 출발했다.
이 수송선단은 다음 날인 3월 1일에 미군 정찰기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사흘 동안 제5육군항공대의 공습을 받았다.
비스마르크 해전이라고 불리는 이 해전에서 케니 소장이 지휘하는 제5육군항공대는 3일동안 총 4회의 폭격을 통하여 B-17 Flying Fortress 61소티, A-20 Havoc 24 소티, B-25 Mitchell 22 소티, P-38 Lightning 15소티, Bristol Beaufighter 6소티 등 총 128 소티의 폭격을 감행했다.

이 폭격으로 일본군의 수송선 8척 전부와 구축함 4척을 격침하여 수송 중이던 일본군 3,500 여명을 물고기 밥으로 만들고, 호위하던 제로기 10 대를 격추했다.

제5육군항공대의 손실은  B-17, 보파이터, B-25 각 1대씩과 P-38 전투기 3대등 총 6대에 불과했다.

 

(브리스톨 보파이터.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8826770 )

 

당시 폭격에 참가했던 쌍발폭격기들인 A-20 과 B-25 는 skip bombing(물수제비 뜨기 폭격, 반도폭격)이라는 새로운 폭격방법을 선보였다.
이 폭격방식은 A-20 이나 B-25 같은 쌍발폭격기들이 고도 60m, 시속 320km 의 속력으로 적함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하여 225kg짜리 철갑폭탄을 투하하면 이 폭탄은 수면에서 약 30m 높이까지 튀어올랐다가 떨어지면서 적함의 수선부근을 강타하는 방식이었다.
폭탄에는 5초 지연신관이 달려있어 폭탄을 투하한 항공기가 안전하게 폭발반경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방식의 폭격은 폭탄이 투하 후 불과 1-2초 이내에 표적에 도달하기 때문에 일단 제대로 투하되기만 하면 사실상 회피기동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폭탄이 수선 부근에 명중하여 마치 어뢰처럼 표적함정에게 침수를 일으키기 때문에 구축함 급 이하의 소형전투함이나 수송선들처럼 현측 장갑이 없는 함정들에게는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했다.
3월 3일의 제3차 공습에서 A-20 12대와 B-25 12대는 합계 57발의 폭탄을 스킵보밍으로 투하하여 이중에 28 발을 명중시키는 놀라운 명중률을 과시했다.
비스마르크 해전 이후로 라에에 대한 일본군의 보급과 증원은 잠수함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연합함대는 4월 초부터 남태평양에서 작전가능한 해군항공기들을 총동원하여 미군에게 대규모의 공격을 가할 목적으로 ‘이’호 작전을 실시했다.
야마모또 제독이 라바울에서 직접 지휘하는 이 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오자와 중장의 제3함대 소속 항공모함 쇼가꾸, 즈이가꾸, 준요, 히요의 항공대에서 제로기 103대와 발 급강하폭격기 54대, 그리고 제11항공함대에서 제로기 88대, 발급강하 폭격기 54대, 베티 육상공격기 72대, 98식 육상정찰기 4대 등 총 375대의 항공기가 라바울과 그 인근 기지에 집결했다.

 

원래 함재기 조종사들은 좁고 짧으며 파도에 따라 요동치는 항공모함의 갑판에서 이착함해야하고 또한 항상 이동하는 항공모함에서 이함하여 원거리를 날아가 적을 공격한 후 그동안 다시 이동한 아군의 항공모함을 찾아서 돌아와야 한다.

따라서, 고정된 길고 넓은 활주로에서 이착륙하고 기지 주변의 지형지물을 참고삼아 귀환항로를 잡을 수 있는 지상기지의 항공기 조종사와 비교하여 따로 이착함 훈련을 해야만 하고 항법능력도 훨씬 뛰어나야 한다.

요즘도 미국의 함재기 조종사들은 지상기지에서 작전하는 공군조종사들을 멍청이라고 부르면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호 작전같이 지상기지에서 발진하는 작전에 항공모함 항공대를 대량으로 투입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페라리로 연탄 나르는 꼴이었으나 제11항공함대의 세력이 빈약하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비록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미항모항공대의 함재기들이 헨더슨 비행장에서 작전한 전례가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으로서 항공모함 항공대는 어디까지나 항공모함에서 운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지상기지에서 발진하는 작전에 항공모함 항공대를 사용한다는 이러한 결정은 또한 건조하는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고, 운용하는 데에도 잘 훈련된 조종사를 필요로 하는 항공모함이 비용대 효과면에서 별로라는 일본군 내부의 비판적인 시각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호 작전은 1943년 4월 7일에 과달카날에 대한 폭격으로 시작되어 11일에 뉴기니아의 오로 만과 하베이 만 , 12일에 포트모레스비, 16일에 뉴기니아의 밀른 만 등 네 차례에 걸쳐 제로기 491 소티, 발 급강하폭격기 102 소티, 베티 육상공격기 81 소티 등 총 674 소티를 출격하여 구축함 1척, 수송선 2척, 소형전투함 2척을 격침하고 25대의 항공기를 격추했다.

그 댓가로 일본군은 제로기 17대, 발 급강하 폭격기 19대, 베티육상공격기 6대 등 총 42대를 상실함으로써 작전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이호 작전이 끝난 이틀 후인 4월 18일에 야마모또 제독이 솔로몬 군도의 일본군을 순시하러 라바울을 떠났다.

암호 해독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아낸 과달카날의 미군이 헨더슨 비행장으로부터 16대의 P-38 라이트닝 전투기를 내보내어 쇼틀랜드 상공에서 야마모또 제독 탑승기를 격추함으로써 야마모또 제독은 전사했다.
4월 25일에 야마모또 제독의 뒤를 이어 고가 미네이찌 제독이 트럭 섬의 무사시 함상에서 연합함대사령장관에 취임했다.

 

(고가 미네이치 제독. 자세한 설명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5539838 )

핼시 제독의 남태평양해역군은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지 2주 후인 1943년 2월 21일에 과달카날 서북쪽의 러셀 제도에 상륙한 후 어뢰정 기지를 건설했다.
핼시 제독은 4월말에 남서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과 라바울을 목표로 하는 수레바퀴 작전을 의제로 하여 회담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핼시 제독은 맥아더 장군의 카리스마에 완전히 매료되어 이후로 작전 기간 내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불화도 없었다.
수레바퀴 작전에 따르면 핼시 제독의 남태평양해역군이 담당한 북쪽 축선에서 중요한 목표는 뉴조지아 섬, 콜롬방가라 섬과 부겐빌 섬이었다.
1943년 6월 30일에 수레바퀴 작전이 시작되어 남태평양해역군은 뉴조지아섬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렌도바 섬에, 남서태평양 해역군은 뉴기니아의 나소 만에 각각 상륙했다.

일본해군의 제11항공함대는 육군과 협동으로 렌도바의 미국상륙선단에 대하여 6월 30일부터 7월 4일까지 6회에 걸쳐서 제로기 176소티, 베티공격기 26소티, 발 급강하폭격기 14소티, 육군의 1식 전투기 40소티, 육군의 97식 중폭격기 35소티 등 총 291소티의 폭격을 가하여 수송선 6척을 격침시키고 미군기 40대를 격추한 반면 자신들은 제로기 16대, 베티공격기 18대, 육군의 1식 전투기 6대 육군의 97식 중폭격기 8대 등 총 58대를 상실했다.

1943년 7월4일 밤, 뉴조지아 섬의 문다 비행장 수비대를 증원할 병력을 싣고 남하하여 쿨라 만에 진입한 일본구축함 4척이 마침 콜롬방가라 섬의 남쪽인 빌라에 상륙할 5개 대대를 호송하여 와서 빌라의 방어거점을 포격하던 경순양함 3척(호놀룰루, 헬레나, 세인트루시스)과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진 아인즈워스 소장의 제36.1전단(TG36.1)를 발견하고는 어뢰를 쏘아서 구축함 Strong 을 격침했다.
일본구축함들은 막상 병력의 상륙은 단념하고 돌아갔으며 한편 미군 병력은 5일 새벽 0시 36분부터 빌라에 상륙을 개시하여 오전 6시에 상륙을 완료했다.

 

7월 5일 밤에는 제3수뢰전대장 아끼야마 소장이 이끄는 3척의 구축함들이 문다에 상륙시킬 병력을 실은 구축함 7척을 호위하여 쿨라 만에 진입하여, 이를 저지하러 달려온 아인즈워스 소장의 TG36.1 과 교전했다.
쿨라 만 해전이라고 불린 이 전투에서 일본함대는 기함인 구축함 니즈키와 나가쓰키가 격침되어 사령관인 아끼야마 소장이 전사했고, 미함대는 경순양함 헬레나가 일본구축함이 발사한 산소어뢰에 맞아서 격침되었다.
일본함대는 증원병력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했다.

7월 12일,  이자끼 소장의 제2수뢰전단 소속 경순양함 진쑤와 구축함 5척이 문다 비행장 수비대를 증원할 1,200 명의 장병들을 실은 4척의 구축함들을 호위하여 남하하다가 쿨라 만에서 경순양함 3척(호놀룰루, 센트루이스, 리앤더)과 구축함 10척으로 이루어진 아인즈워스 소장의 제18기동부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콜롬방가라 해전으로 불리는 이 해전에서 일본함대는 경순양함 진쑤가 격침되었고, 미해군은 구축함 그윈이 격침되고 경순양함 3척이 대파되었다.
일본함대는 또다시 증원병력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했다.

7월 5일에 뉴조지아 섬에 상륙한 미육군 제43사단, 제37사단, 제25사단의 32,000 명과 해병대 1,700 명은 10,500 명의 일본군이 지키는 문다 비행장을 공격하여 1달간의 혈투 끝에 8월 5일에 점령했다.
그동안 주로 러셀 제도에서 출격한 미군기들은 일본군의 기지와 함정들에 부단한 공습을 가하여 7월 17일에는 구축함 하쓰유키, 19일에는 구축함 유구레, 22일에는 수상기 모함 닛싱, 28일에는 구축함 아리아께와 미까즈끼를 격침했다.
미군이 뉴조지아 섬을 장악하자 일본군은 북쪽에 있는 콜롬방가라 섬의 방어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1943년 8월 6일, 콜롬방가라에 증원할 병력 960명과 보급품 90톤을 실은 일본제4구축전대 소속의 구축함 3척이 구축함 시구레의 호위를 받으며 남하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미해군에서는 제12구축전대장 무스부러거 대령의 지휘 하에 구축함 6척을 파견하여 공격했다.
콜롬방가라 해전 이후 미해군은 순양함과 구축함을 분리하여 운용하기 시작했다.

구축함들로만 이루어진 일본함대에 대해서는 미함대도 구축함으로만 이루어진 함대로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구축함대는 레이더로 적을 먼저 발견한 후 자신들의 위치가 드러날 염려가 없는 어뢰로 선제공격을 가하는 새로운 전술을 채택했다.
벨라만 해전이라고 불리는 이 해전에서 미구축함들은 레이더로 일본구축함들을 먼저 포착한 후 2개의 부대로 나뉘어 3척은 일본구축함들의 진로를 가로지르고 3척은 일본구축함들의 진로와 나란히 기동하면서 6척이 동시에 어뢰를 발사한 다음 어뢰의 명중과 함께 포격을 가했다.

미함대는 불과 20분 만에 시구레를 제외한 3척의 일본구축함을 격침하여, 수송중이던 육군병사 820명과 구축함 승무원 700명, 그리고 수송중이던 보급품 90톤 모두를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자신들은 피해 전무라는 완승을 거두었다.

벨라만 해전은 구축함만을 사용하는 미해군의 새로운 전술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미군은 문다비행장을 점령한 이후 뉴조지아 섬처럼 정글이 밀생해있고 1만명이 주둔하면서 방어가 뉴조지아 섬보다 더 강력한 콜롬방가라 섬을 우회하여 8월 15일에 보다 북쪽에 있던 벨라라벨라 섬에 기습적으로 상륙했다.
이후 남서태평양해역군이 자주 사용하게 되는 개구리뛰기 작전의 시작이었다.
9월 15일에 벨라라벨라 섬에 미군이 상륙하면서 고립의 위험에 빠진 콜롬방가라의 일본군에 대한 철수가 결정되었다.
‘세’호 작전이라고 불린 이 철수작전을 통하여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콜롬방가라의 일본군 9,400 여명이 무사히 부겐빌 섬으로 철수했다.
10월 6일에는 벨라라벨라 섬에 남아있던 일본군 589명이 무사히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이날 철수하는 일본군을 태운 발동선을 공격하려던 프랭크 워커 대령 지휘 하의 미구축함 3척이 철수작전을 엄호하던 일본구축함 6척과 격돌하여 벨라라벨라 해전이 발발했는데 이 해전에서 미함대는 구축함 슈발리에를 잃었다.

뉴기니아에서는 맥아더의 남서태평양해역군이 9월5일에 라에의 동쪽에, 6일에는 라에의 서북쪽에 상륙하여 양쪽에서 협격, 11일에 살라모아를, 16일에는 라에를 함락했다.
뉴기니아 북쪽해안에 확실한 근거지를 확보한 제5육군항공대는 10월 12일, 라바울에 대하여 350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습을 가하여 수송선 1척과 소형선 2척을 격침했고, 이어서 18일, 20일, 23일에 공습을 가했으나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한편 벨라라벨라 섬을 점령함으로써 콜롬방가라 섬을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한 핼시제독의 남태평양해역군은 11월 1일에 부겐빌 섬의 중앙부인 토로키나에 기습적으로 상륙했다.
부겐빌 섬의 일분군은 대부분 남부의 부인에 집결해있었기 때문에 상륙부대인 해병제3사단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에 성공했다.
일본군은 비행장도 없는 정글인 토로키나에 미군이 상륙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나 미해군의 건설대대(See Bee’s)는 아무리 험악한 정글이라도 불과 3주 이내에 대형항공기가 작전할 수 있는 번듯한 활주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토로키나 앞바다인 엠프레스 오거스타 만에 적의 수송선이 집결해있다는 보고를 접한 일본제5전대 사령관 오모리 소장은 중순양함 2척(묘고, 하구로), 경순양함 2척(센다이, 아가노),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이끌고 공격하러 남하했다.
원래 오모리 소장의 뒤에는 토로키나의 미군에 대하여 역상륙을 감행할 목적으로 구축함 4척에 호위된 5척의 수송선이 뒤따르고 있었으나 토로키나에 상륙한 미군이 예상보다 훨씬 대부대라는 걸 알고는 수송선은 라바울로 되돌아가고 호위를 담당했던 구축함 4척은 오모리 제독의 함대에 가세했다.
미상륙선단의 해상엄호는 경순양함 4척(클리블랜드, 컬럼비아, 덴버, 몽펠리어)과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진 메릴 소장의 제39기동부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일본함대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게된 제39기동부대는 엠프레스 오거스타 만 입구에서 단종진을 형성하여 일본함대를 기다리고 있다가 일본함대가 나타나자 레이더 조준에 의한 선제포격을 가했다.
엠프레스 오거스타 해전으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메릴 소장의 제39기동부대는 열세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오모리 제독의 일본함대를 상대로 선전하여 일본의 경순양함 센다이와 구축함 하쓰가제를 격침하고 중순양함 묘꼬와 구축함 2척을 대파했다.

미함대의 피해는 침몰한 함정은 없고 경순양함 덴버와 구축함 2척 대파에 그쳤다.

미해군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엠프레스 오거스타 해전으로 레이더 조준 사격의 정확성과 유효성이 충분히 증명되었다.

11월  1일에 라바울에 있던 200 여대의 제11항공함대 세력에 더하여 쇼가꾸, 즈이가꾸, 즈이호의 함재기들로 구성된 제1항공전대(제로기 82대, 발급강하 폭격기 45대, 케이트 뇌격기 40대, 2식 함재 정찰기 6대)가 도착하여 제3함대 사령관 오자와 중장의 지휘 하에 작전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이 항공세력을 이용하여 부겐빌 섬에 집결한 미군함대를 공격하는 '로’ 호 작전을 시작했다.

11월 5일, 중순양함 6척(아타고, 다까오, 마야, 치꾸마, 모가미, 스즈야), 경순양함 2척(아가노, 노시로),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진 제2 함대가 구리따 다께오 중장 지휘하에 라바울에 도착했다.
이들은 도착한 직후 셔먼 제독의 제38기동부대 소속 항공모함 새러토가와 경항공모함 프린스턴에서 발진한 미함재기 97대로부터 공습을 받았다.
라바울의 제로기 70대가 요격에 나섰으나 미함재기들은 요격망을 뚫고 라바울 항내의 제2함대를 통격했다.
제2함대는 이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어서 비록 침몰한 함정은 없었으나 중순양함 스즈야를 제외한 순양함 7척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중순양함 마야는 자력항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작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호되게 얻어맞은 제2함대는 다시 트럭 섬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일본제2함대의 철수는 이제 전장의 주도권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는 제공권이며, 제공권을 상실한 쪽은 병력집중마저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공습이 끝난 후 라바울을 떠난 일본정찰기가 미국항공모함을 찾아 헤맸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대신 소형함정 3척으로 이루어진 소함대를 발견하여 케이트 뇌격기 14대가 공격하여 이중 1척을 격침했으나 일본기도 4대가 격추되었다.

이 공습을 시작으로 로호 작전이 발동되어 일본기들이 11월 8일에 부겐빌 섬의 미국함대에 대하여 제로기 71대, 발 급강하폭격기 26대, 케이트 뇌격기 9대, 베티 육상공격기 12대를 동원하여 2번의 공습을 실시하였으나 한 척도 격침하지 못하고 경순양함 버밍엄과 수송선 2척에 피해를 입히는데 그쳤다.
일본기들은 제로기 5대, 발 급강하폭격기 10대, 케이트 뇌격기 2대, 베티 육상공격기 5대 등 총 22대의 항공기를 상실했다.

11월 11일에는 셔먼 제독의 제38기동부대에 더하여 신예항공모함인 에섹스, 벙커힐과 경항공모함 인디펜던스 중심의 제50.3전단(TG50.3)까지 가세하여 200 여대의 대편대가 라바울을 재차 공습했다.
제로기 68대가 요격에 나섰으나 미함재기들은 구축함 스즈나미를 격침하고 나가나미와 유바리를 대파했다.
오자와 제독은 물러가는 미국함재기들을 뒤쫓아서 제로기 33대, 발 급강하 폭격기 23대, 케이트 뇌격기 14대를 발진시켜 제50.3전단을 공습했으나 단 한발의 명중탄도 기록하지 못한 채 미군의 CAP 세력과 대공포화에 의하여 제로기 2대, 발 급강하폭격기 17대와 케이트 뇌격기 14대 전부가 격추되어 총 33대를 상실하는 대피해를 입었다.
이날의 결과로 제1항공함대의 가용기 수는 52대로 떨어졌고 결국 ‘로’호 작전은 완전 실패로 끝났다.
라바울 공습 이후 제38기동부대와 제50.3전단은 태평양해역군의 길버트 제도 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남태평양을 떠났다.

11월 24일에는 부겐빌 섬 북부의 부카 섬에 증원병력을 수송하던 구축함 3척과 호위를 담당한 구축함 2척으로 이루어진 일본제31구축대를 알레이 버크 대령이 이끄는 미제23구축전대 소속 5척의 구축함이 기습하여 3척을 격침시키고 한 척을 소파시키면서 자신들은 구축함 1척 소파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세인트 조지 곶 해전)

12월에 들어서자 라바울은 뉴기니아와 부겐빌의 토로키나에서 발진하는 미군기들의 지속적인 공습에 노출되었고 미군은 12월 15일과 26일에 라바울이 있는 뉴브리튼 섬의 남쪽과 남서쪽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미군의 라바울 공격이 멀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라바울의 방어를 강화하면서 한때 80 대 정도까지 떨어졌던 라바울 항공대를 적극적으로 증강하여 항공기 세력을 300 대까지 늘렸으나 그들은 한참 잘못 짚고 있었다.
미군은 13만 5천명이라는 일본군의 대군이 집결해있고, 방어가 철저한 일본군의 대기지 라바울에 정면공격을 가하여 막대한 희생을 치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미군은 라바울을 우회한 후 지속적인 공습과 보급로 차단을 통하여 무력화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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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4월 7일, 엔터프라이즈의 제5대 함장인 하디슨 대령의 뒤를 이어 Carlos W. Wieber 대령이 4월16일까지 10일간 함장직을 맡았고, 4월16일에 제7대 함장인 Samuel P. Ginder 대령이 취임했다.

 

(제7대 함장 Samuel P. Ginder 대령. 재임기간 : 1943년 4월 16일 - 11월 7일)


1943년 5월 1일, 엔터프라이즈는 에스피리투산토를 떠나 5월 8일에 진주만에 입항했다.
엔터프라이즈는 원래 진주만에서 보급을 받은 후 바로 미본토로 가서 오버홀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진주만에 도착했을 때 신규 항공대의 훈련을 담당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하와이 근해에서 신규 항공대의 훈련에 전념하고 있던 엔터프라이즈는 1943년 5월 27일에 항공모함으로서는 최초로 대통령 부대표창(President Unit Citation)을 받았다.

 

(1943년 5월 27일에 엔터프라이즈 함상에서 거행된 대통령 부대표창 수여식 광경.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이 도열해 있는 가운데 함장 긴더 대령이 니미츠 제독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고 있다.)

 

엔터프라이즈는 7월 14일에 진주만을 떠나 7월 20일 저녁에 워싱턴 주 브레머톤의 퓨젯 사운드 해군공창에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이미 수백명의 기술자들이 모여서 엔터프라이즈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곧 엔터프라이즈의 장병들은 1달간의 휴가를 얻었다.
7월 20일 이후 11월 1일까지 100일동안 브레머톤 조선소의 기술자들은 엔터프라이즈의 자잘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수리했고, 나아가서 변화한 전장환경에 맞추어 몇 가지 개장을 실시했다.

이때 실시한 개장으로 인하여 외관상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함체의 옆에 부착한 전체 길이의 75%에 달하는 어뢰방지용 벌지이다.
이 벌지를 부착함으로써 요크타운 급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수선하방어력의 약점을 상당부분 보완할 수 있었다.
비행갑판에 있던 1조의 H Mk2 캐터펄트는 보다 성능이 향상된 H Mk2-1 캐터펄트 2조로 교체되었고, 격납갑판의 캐터펄트는 철거되었다.
승무원 정원이 늘어남에 따라 함내의 숙소도 확장되었고, 함교와 손상관리 시스템도 근대화되었다.

항공기의 위협이 중시되는 새로운 전장환경에 맞추어서 대공화력도 증강되었다.
우선 그때까지 1개 포좌 4문이 남아있던 구형의 1.1인치 대공포를 완전히 철거했고, 46문이 있던 오리콘 사의 20mm 대공포는 4문을 증설하여 50문이 되었다.
가장 많이 증설한 것은 보포스 사의 40mm 대공포로 4연장 포좌 4개로 총 16문이었던 것을 4연장 포좌 2개와 연장포좌 8개를 새로 설치함으로써 24문을 증설하여 총 40문이 되었다.
VT신관을 사용하여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8문의 5인치 양용포의 숫자에는 변함이 없었다.

대공 레이더도 구형의 CXAM-1 레이더에서 보다 신형의 SK 레이더로 교체했다.
따라서 탐색 가능 거리가 3,000m 고도에서 폭격기 같은 대형기의 경우 130km, 전투기 같은 소형기의 경우 50km 정도였던 것이 대형기 190km, 소형기 90km 정도로 크게 늘어났다.
함교의 앞뒤에 하나씩 있던 사격통제장치도 구형의 Mk-4 사격 관제 레이더(Fire Control Radar)와 연동된 Mk-33 에서 보다 신형의 Mk-12 사격 관제 레이더와 연동된 Mk-37 로 바뀌었다.
구형의 Mk-33 전자조준기(Director)는 시속 600km 의 속력으로 비행하는 항공기를 조준할 수 있었으며 Mk-4 사격 관제 레이더는 대형항공기를 37,000m 거리에서 35m 의 오차로 포착할 수 있었고, 수상함은 27,000m 거리에서 포착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하여 신형의 Mk-37 전자조준기는 시속 740km 로 비행하는 항공기를 조준할 수 있었고, Mk-12 사격 관제 레이더는 대형항공기를 42,000m 거리에서 15m 의 오차로 포착할 수 있었고, 수상함은 37,000m 거리에서 포착할 수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한 사람이 조작가능한 Mk51 전자조준기가 있었는데 이 전자조준기에는 Mk-14 조준계산기(gyrosight) 가 붙어 있었다.
이 Mk-14 조준계산기는 MIT에서 만든 일종의 컴퓨터 비슷한 것으로서 대공포 사수가 적기를 조준하여 일정시간 따라가면 계산을 통하여 얼마나 앞쪽에 사격을 가해야 할 것인지 그 각도(lead angle)을 계산해 주는 기기였다.

엔터프라이즈는 이때 개장을 실시하면서 6개의 4연장 보포스 40mm 기관포의 포좌에 각 1조씩의 Mk-51 전자조준기를 설치했다.

이러한 개장의 결과 엔터프라이즈의 비행갑판은 길이가 245m 에서 250m로 5m 정도 늘어났고, 폭도 33m 에서 34.5m로 1.5m 정도 늘어났으며 표준 배수량도 19,800 톤에서 21,000 톤으로 1,200 톤 가량 늘어났다.
또한 어뢰방지용 벌지를 부착함에 따라 수선상의 최대 함폭(Beam)이 25m 에서 29m 로 늘어났다.  

개장을 마친 엔터프라이즈는 1943년 11월 1일에 브레머톤의 퓨젯 사운드 해군공창을 출항하여 11월 6일에 진주만에 입항했다.
다음날인 7일에는 제8대 함장으로 Matthias B. Gardner 대령이 취임했다.
1943년 11월 10일, 엔터프라이즈는 길버트 제도 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진주만을 떠났다.

 

(제8대 함장Matthias B. Gardner 대령. 재임기간 : 1943년 11월 7일 - 1944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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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월 27일, Robert Giffen 소장이 이끄는 제18기동함대가 에스피리투산토의 에파테 기지를 출항했다.
기펜 소장은 줄곧 지브랄타 해역에서 근무하다가 42년 11월 말에야 남태평양으로 온 제독으로 대잠전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해군항공분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다.
제18기동함대는 과달카날의 북서쪽으로 나아가서 Robert Briscoe 대령이 지휘하는 구축함 4척으로 편성된 칵터스 타격부대(Cactus Striking Force)와 합류한 후 과달카날 서북쪽의 슬롯을 경계하며 제18기동부대를 뒤따르고 있는 수송선단(제62.8기동부대)의 안전을 책임지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1월 28일에는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가 산호해로 나아가 새러토가 중심의 제11기동부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역시 에파테를 출발했다.

29일 오후가 되자 속력이 느린 호위항공모함들과 같이 가다가는 30일로 예정된 칵터스 타격부대와의 합류가 어렵다고 판단한 기펜 제독은 오후 2시에 18노트밖에 낼 수 없는 호위항공모함 스와니와 체난고에 2척의 구축함을 붙여서 제18기동부대로부터 분리하고 본대는 24노트의 속력으로 북상했다.
이 조치는 항공분야에 대한 기펜 제독의 무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서 적의 항공세력에 의한 위협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작전 일정에만 집착하여 스스로의 항공엄호를 벗어던져 버린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잠시 후 제18기동부대의 레이더에 북서쪽에서 접근하던 일본의 정찰기가 포착되었다.
이때 즉각 요격명령을 내렸으면 아직 제18기동부대의 상공을 지키고 있던 스와니와 체난고의 CAP 세력이 충분히 격추할 수 있는 거리였으나 기펜 제독은 무선침묵을 더 중요하게 여겨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윽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제18기동부대 상공의 CAP세력은 모함으로 돌아갔다.
당시 제18기동부대는 6척의 구축함이 전방에서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경계망을 펼치고 그 뒤를 2열로 배치된 6척의 순양함들이 따르는 진형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진형은 전형적인 대잠진형으로 수상전에도 그런대로 효율적인 배치였으나, 만일 측면이나 후면으로부터 항공공격을 받을 경우에는 대단히 취약한 진형이었다.
대공방어에 가장 유리한 진형은 단연 원형진이다.

한편 과달카날 근해의 정찰기로부터 미해군의 함대가 북상 중이라는 연락을 받은 라바울의 제26항공전대에서는 즉각 제705항공대의 1식육공(Betty) 16대와 제706항공대의 베티공격기 15대가 어뢰를 장비하고 출격했다.
오후 7시 50분, 제18기동부대 부근에 도착한 제705항공대의 베티공격기 16대가 들키지 않도록 남쪽으로 우회한 후 오른쪽 후방으로부터 공격했다.  
항진 중이던 함대에게 실시된 것으로는 세계 최초의 야간공습이었다.
비록 정찰기가 조명탄을 투하하고 있었으나 야간에 재빠르게 기동하는 함정에 대한 뇌격은 역시 어려운 법이어서 제705항공대의 뇌격은 전부 실패하고 제18기동부대의 대공포화에 의하여 비행대장기가 격추되는 피해만 입었다.
제705비행대의 공습이 끝나자 일본정찰기가 제18기동부대 상공에 3가지 색깔의 조명탄을 떨어뜨려 후속하고 있던 제706항공대를 유도했다.

 

(미츠비시 G4M Betty 1식 육상 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3544140 )

 

오후 8시 8분, 제18기동부대의 북동쪽에서부터 15대의 베티공격기로 구성된 제706비행대가 공격했다.
다시 제18기동부대의 대공포화가 불을 뿜었고 순식간에 2대의 베티가 화염에 휩싸였는데, 그 중 1대가 중순양함 시카고의 좌현으로 접근하여 전방갑판에 돌진했다.
순식간에 시카고의 전방갑판에 불타는 휘발유로 인하여 화재가 발생했다.
비록 이 충돌로 인한 피해 자체는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으나 캄캄한 해상에서 마치 횃불처럼 타오르는 시카고의 뚜렷한 실루엣은 일본기들에게 절호의 표적이 되었다.
자연히 일본기들의 공격이 거의 시카고에게 집중되었고 결국 시카고는 우현에 두 발의 어뢰를 얻어맞아 엔진이 멈추고, 함은 우현으로 11도나 기울어졌다.
이때 중순양함 위치타도 한 발의 어뢰를 맞았으나 천만다행으로 불발탄이었다.
기펜 제독은 시카고가 피격된 직후 임무를 포기하고 에파테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시카고의 손상관리반이 기민하게 대응하여 침수부위를 막고 화재를 진압하였으나, 자체동력이 없었기 때문에 예인할 수 밖에 없었다.
밤샘 작업 끝에 중순양함 루이즈빌에 예인로프를 연결하여 30일 새벽부터 4노트의 속력으로 예인하기 시작했다.

한편 시카고가 피격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핼시 제독은 에파테에서 원양예인선인 Navajo 를 호위 구축함과 함께 급파하고, 새러토가 중심의 제11기동부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피격현장에서 560km 남쪽을 항진중이던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에게 즉시 북상하여 시카고를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제16기동부대는 급히 반전하여 28노트의 속력으로 북상했다.

30일 새벽, 무선침묵을 유지하며 시카고를 예인하고 있던 제18기동부대를 찾기 위하여 4대의 돈틀레스가 엔터프라이즈를 떠났다.
30일 오전 7시 15분에 Robert Gibson 중위의 돈틀레스가 상처입은 채로 예인되고 있던 시카고를 발견하자 즉시 4대의 와일드캣이 제18기동부대의 상공을 지키기 위하여 엔터프라이즈에서 이함했다.
오전 중에 예인선 나바호가 도착하여 루이즈빌과 교대하여 시카고를 예인하기 시작했다.

이제 상황이 좀 호전되었다고 판단한 핼시 제독은 오후 3시 30분에 시카고와 구축함들만 현장에 남겨놓고 나머지 순양함들은 전부 에파테로 돌아오라고 기펜 제독에게 명령했다.
10분 뒤인 오후 3시 40분, 시카고 상공을 지키던 와일드캣들이 60km 떨어진 상공에서 무엇인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고는 즉시 확인하러 갔다.
5분 뒤인 3시 45분, 뉴조지아 섬의 남단에 있던 해안경비대원으로부터 11대의 일본군 쌍발공격기들이 상공을 통과하고 있다는 무전이 과달카날의 통신소에 들어왔고, 그들은 이것을 즉시 제18기동부대에 중계했다.
이 통신은 제16기동부대에게도 동시에 중계되었으나, 핼시 제독에게는 도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펜 제독은 이 새로운 긴급사태에 처하여 핼시 제독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달리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순양함들을 이끌고 현장을 이탈했다.
그리하여 적의 항공공격이 확실시되고 엔터프라이즈에서 보내온 와일드캣 4대마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빈사상태의 시카고는 불과 구축함 6척만으로 이루어진 빈약한 대공방어망 속에 남겨졌다.    

이때 보고된 11대의 일본쌍발기들은 뉴기니아의 부나 기지에서 발진한 제751항공대 소속의 베티공격기들이었다.
그리고 시카고 상공을 지키던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와일드캣들이 발견한 것은 이 공격대의 전방에서 정찰을 하고 있던 일본군 정찰기였다.
와일드캣들은 결국 이 정찰기를 격추하는데 성공했으나, 그 결과로 베티공격기들이 시카고에 도달했을 때 그곳 상공은 텅 비어 있었다.

렌넬 섬 부근에 도달한 베티공격기들은 접근 방향을 기만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변침했는데, 그 방향에서는 마침 제16기동부대가 고속으로 북상중이었다.
남하하던 제751항공대의 베티공격기들은 엔터프라이즈의 110km 전방에서 제16기동부대의 레이더에 잡혔다.
방금 과달카날로부터 보고받았던 일본기들의 공격목표가 시카고가 아니라 사실은 자신들이라고 착각한 제16기동부대는 당황했다.
기존의 CAP 세력에 더하여 10대의 와일드캣이 급히 엔터프라이즈의 비행갑판을 떠났고, 엔터프라이즈를 포함한 제16기동부대 전체가 엄중한 대공태세에 들어가면서 방향을 180도 전환하여, 27노트의 속력으로 황급히 남하했다.

4시 35분, 급히 이함한 10대의 와일드캣 중 함대직위를 담당할 4대를 제외한 6대의 와일드캣이 MacGregor Killpatrick 대위의 지휘 하에 고속으로 일본기들을 향해 접근했다.
5분 만에 일본기들의 전방 30km 거리까지 육박한 와일드캣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킬패트릭 대위와 Robert Porter 중위는 일본기들을 우회하여 북쪽으로 나아가 퇴로를 차단하고, Donald Gordon 소위, Lynn Slagen  중위, Steven Kona 소위, Edward Feightner 대위는 남쪽에서 정면공격을 가하기로 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침로를 기만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변침했을 뿐 제16기동부대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일본기들은 그 순간 북쪽으로 변침하여 시카고를 향하여 북상했다.
일본기들보다 1,200m 정도 높은 이상적인 공격위치를 점하고 일본기의 접근을 기다리던 남쪽의 와일드캣들은 갑자기 일본기들이 방향을 180도로 전환하여 북상해버리자 당황하여 그만 공격기회를 놓쳐버렸다.
혼란은 북쪽에 있던 킬패트릭 대위와 포터 중위도 마찬가지로서 이들도 갑자기 일본기들이 방향을 180도로 전환하여 고속으로 접근해 오자 첫번째 공격타이밍을 놓치고 반전하여 다시 공격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나란히 한 대씩을 격추시켰으나, 이들이 고도를 회복하여 재공격을 실시하려 했을 때에는 이미 살아남은 9대의 일본기들이 시카고에 접근하여 어뢰를 발사하고 있었다.
만일 시카고 상공을 지키던 4대의 와일드캣이 제자리에 있었다면 베티공격기들이 어뢰를 발사하기 전에 대부분 격추시켰을 가능성이 높았으나 이 와일드캣들은 일본정찰기를 격추시킨 후 아직 제자리에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시카고를 예인하던 나바호가 일본기가 투하한 어뢰들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시카고의 함수를 돌려세우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오후 4시 55분, 일본기가 발사한 9발의 어뢰 중 4발이 어제 이미 2발의 어뢰에 피격되었던 시카고의 우현을 다시 강타하여 시카고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았다.
피격 직후 시카고에서는 즉시 퇴함명령이 떨어졌고 어뢰에 얻어맞은지 20분만인 5시 15분에 시카고는 우현으로 기울어지면서 고물부터 가라앉았다.
이때 구축함 DD-488 La Vallette 도 1발의 어뢰를 얻어맞고, 대파되면서 21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일본기들은 어뢰를 발사한 직후 구축함들의 대공포화에 의하여 3대가 격추되었고, 뒤이어 쫓아온 와일드캣에 의하여 2대가 더 격추되어 총 11대 중 7대가 격추되고 4대만이 살아서 돌아갔다.
당시 미국함정들의 5인치 양용포에는 당시로서는 최신무기인 근접신관이 장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빈약한 함대세력에 비하면 대공포화가 꽤나 위협적인 편이었다.

이로써 과달카날 전투의 마지막 해전인 렌넬 섬 해전이 끝났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중순양함 시카고를 격침하고 구축함 라밸럿을 대파한 대신 자신들은 10대의 베티공격기를 상실했다.
핼시 제독과 니미츠 제독은 일본기의 공격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빈사상태의 시카고를 빈약한 대공방어망 속에 남겨놓은 채로 무책임하게 후퇴해버린 기펜 제독에 대하여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특히 1월 중순의 과달카날 시찰 후 말라리아에 걸려 잠복기에 있던 니미츠 제독은 다음날의 회의에서 시카고의 상실에 대하여 분노를 터뜨리며 흥분하다가 쓰러져서 그대로 병원으로 실려갔다.
이 렌넬 섬 해전의 결과는 그 전술적 승패에 상관없이 일본군의 철수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일본군이 이렇듯 공격적으로 나오는 것은 새로운 공세작전을 시작하려는 전조가 틀림없다고 확신한 핼시 제독과 제14군단장 패치 소장은 1월 31일을 기하여 제14군단에게 공세작전을 일시 중단하고, 현 전선에서 참호를 파고 방어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의 철수작전은 렌넬 섬 해전으로 인하여 예정보다 하루 늦은 2월 1일부터 총 3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그리고 이 철수작전을 엄호하기 위한 일본군의 항공작전도 더욱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실시되었다.

2월 1일, 미육군 제132연대 소속 제2대대와 제3대대를 과달카날 서남쪽 해안의 베라휴에 상륙시키고 툴라기의 기지로 돌아가던 브리스코 대령의 칵터스 타격부대 소속 구축함인 DD-449 Nicholas, DD-469 De Haven 과 LCT 3척이 발 폭격기 14대에 의하여 폭격을 받았다.
드하벤 호는 이 폭격으로 3발의 명중탄과 1발의 지근탄을 맞고 폭격이 시작된 지 단 2분만에 방금 상륙한 미군들의 바로 눈앞에서 격침되었다.
드하벤의 승무원 167명이 전사했다.
니콜라스는 다행히 지근탄으로 인하여 조향장치가 파괴되었을 뿐 큰 피해는 면했다.
일본기는 3대가 격추되었다.  

그날 오후 제1차 철수작전을 실시할 기무라 제독의 제10수뢰전대 소속 구축함 14대가 하시모또 제독이 이끄는 제3수뢰전대의 구축함 6척이 호위를 받으면서 남하하다가 미군에게 발각되었다.
즉각 헨더슨 비행장에서 24대의 돈틀레스 폭격기가 14대의 와일드캣과 함께 출격하여 이들을 덮쳤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이 구축함대의 상공에는 30대의 제로기가 있었으므로, 즉각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져서 4대의 돈틀레스가 격추되었다.
이때의 폭격으로 구축함 마끼나미가 1발의 명중탄을 맞고 대파되어 회항했다.
나머지 19대의 구축함은 과달카날을 향하여 계속 남진했다.

미해군은 이들을 저지하기 위하여 에스퍼란스 해안과 도마환초 사이에 300여개의 기뢰를 부설하고, 반격을 위하여 3척의 구축함과 11척의 어뢰정들을 배치했다.
이 기뢰들이 위력을 발휘하여 일본구축함 나쓰구모가 기뢰에 접촉하여 침몰했다.
3척의 미구축함들은 공격기회를 포착하는데 실패했다.
미어뢰정들은 일본구축함들이 사보섬 남쪽으로 접근해오자 과감하게 접근하여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한발의 어뢰도 명중시키지 못한 채 일본구축함과 제로기들의 반격을 받아서 3척이 격침되고, PT123 호의 승무원 4명이 전사했다.
미해군의 집요한 방해를 물리친 철수함대는 에스퍼란스 곶에 도착하여 제38사단 소속의 장병 5,164명과 해군 250명을 구조하여 오후 11시 30분에 떠났다.

제2차 철수작전은 2월 4일에 실시되었는데, 역시 기무라 소장의 제10수뢰전대 소속 14척의 구축함이 하시모또 소장의 제3수뢰전대의 구축함 6척의 호위 하에 철수작전을 실시하기 위하여 남하하다가 미군에게 발각되었다.
즉시 헨더슨 비행장에서 31대의 와일드캣에 호위된 33대의 돈틀레스들이 출격하여 일본구축함대 상공을 지키던 대규모의 제로기들과 격돌하여 미군기 10대와 제로기 17대가 격추되었다.
이번 폭격에서 일본구축함 마이까제가 1발의 지근탄에 의하여 항해불능이 되었고 시라누이의 후방포탑 부근에도 1발의 지근탄이 떨어졌으나 행동에는 지장이 없었다.
철수함대는 오후 8시 50분에 에스퍼란스 해안에 도달하여 햐꾸다께 중장을 비롯한 제17군 사령부와 마루야마 중장의 제2사단 병력 4,458명과 해군 519명을 구조하여 오후 11시에 출발했다.
일본군은 밤에 또다시 대규모의 항공대를 보내어 병력들이 승선하는 동안 헨더슨 비행장에 조명탄을 투하하며 폭격을 가하여 밤새 칵터스 항공대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2월 5일 아침에 밤새 과달카날을 떠난 일본구축함을 포착하러 헨더슨 비행장을 떠난 정찰기는 구축함들은 발견하지 못하고 대신 과달카날 360km 북방해상에서 전함 4척, 항공모함 2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2척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함대를 발견했다.
이 보고를 들은 핼시 제독은 일본연합함대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하고, 엔터프라이즈와 새러토가를 포함한 제16기동부대와 3척의 고속전함을 보유한 제64기동부대에게 즉시 과달카날 부근 해상으로 북상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또한 피지 제도 부근에서 활동하고 있던 구식전함인 BB-45 Colorado 와 BB-46 Maryland 에게도 즉시 과달카날 해역으로 달려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BB-45 Colorado. 자세한 설명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51910156 )

 

2월7일에 마지막으로 제3차 철수작전이 실시되었다.
이번에는 하시모또 소장의 제3수뢰전대 소속 8척의 구축함이 철수작전을 담당하고, 기무라 소장의 제10수뢰전대 소속의 구축함 8척이 호위를 담당했다.
남하하는 구축함대를 발견한 칵터스 항공대는 억수처럼 쏟아지는 폭우를 무릅쓰고, 15대의 돈틀레스를 발진시켜 폭격을 가했으나 이소까제에 2발, 하마까제에 1발의 지근탄을 기록했을 뿐으로 2척 다 행동에는 지장이 없었다.
마지막 철수부대는 오후 9시 7분에 카밈보 해안에 도달하여 100 여명이 살아남은 야노 대대의 패잔병을 비롯하여 제2사단과 제38사단 소속이 아닌 육군장병 2,576명과 해군 53명을 구조하여 오후 10시 30분에 무사히 과달카날을 떠났다.

이 3차에 걸친 해상철수를 통하여 모두 13,020 명의 일본군이 안전하게 과달카날을 떠났다.
이 철수작전을 실시하면서 일본군은 구축함 나쓰구모가 격침되고, 마끼나미와 마이까제가 대파되었다.
이 과달카날 철수작전(케호 작전)은 5개월 후의 키스카 섬 철수작전과 함께 대단히 성공적인 해상철수작전의 전형으로서 미국의 전사가인 Samuel Eliot Morison 제독같은 사람은 이 두 개의 철수작전을 가리켜서 ‘해전 사상 가장 영리한 철수 작전’ 이라고 평가한다.
사실 당시 일본군이 과달카날에서 처해 있던 불리한 상황을 고려해보면 이 철수작전은 믿기 어려울 정도의 성공을 거둔 해상철수작전이다.

일본군의 대공세에 대비하여 전진을 중단하고 열심히 참호를 파고 있던 제14군단이 무엇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진격을 재개한 것은 2월 8일이 되어서였다.
다음날인 2월 9일, 일본군이 마지막으로 철수한 카밈보 해안에 도달한 미군들은 결사항전의 태세로 버티고 있는 일본군 대신 그들이 황급히 철수하면서 남기고 간 잡동사니들만 뒹굴고 있는 텅 빈 해안을 발견했다.
그제서야 미군들은 지난 며칠간 일본군의 행동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깨달았다.
1942년 2월 9일 오후 4시 25분, 제14군단장 패치 소장은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핼시 제독에게

“과달카날에서의 조직적인 저항은 끝났음.”
("ORGANIZED RESISTANCE ON GUADALCANAL HAS CEASED".)

이라고 타전하여 과달카날 전투의 승리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로써 1942년 8월 7일에 해병제1사단이 과달카날에 상륙하면서 시작된 6개월간의 처절한 사투가 끝났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은 총 43,726명의 지상군을 투입하여 이 중 4,346명이 해상 수송 도중 전사하고, 37,680명이 전투에 참가하여 28,580명이 전사하고 1,00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일본군의 전사자 중에서 말라리아나 이질, 굶주림 등으로 사망한 병력의 숫자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9,000 여명 정도로 추산한다.
반면 미군은 60,000명이 투입되어 1,592명의 전사자를 기록했으며, 이중에서 1,152명이 해병대였다.

미해군과 일본해군은 과달카날 전투 기간에 모두 7차례의 해전을 거치며 양국 공히 24척의 구축함급 이상의 주력전투함들을 상실했다.

격침된 미국의 주력전투함들은 다음과 같다.

정규항공모함 : Wasp, Hornet (2척, 34,500톤)
중순양함 : Astoria, Quincy, Vincennes, Canberra(호주 해군), Northampton, Chicago(6척, 56,925톤)
경순양함 : Atlanta, Juneau(2척, 12,000톤)
구축함 : Barton, Benham, Blue, Cushing, De Haven, Duncan, Jarvis, Laffey, Meredith, Monssen, O'Brien, Porter, Preston, Walke (14척, 22,815톤)
합계 : 24척, 126,240톤

격침된 일본의 주력전투함들은 다음과 같다.

경항공모함 : 류죠(1척, 8,500톤)
전함 : 히예이, 기리시마(2척, 62,000톤)
중순양함 : 가고, 기누가사, 후루다까 (3척, 26,400톤)
경순양함 : 유라 (1척, 5,700톤)
구축함  : 후부끼, 마끼구모, 무쓰기, 데루즈끼, 유다찌, 아까쓰끼, 아야나미, 다까나미, 아사기리, 무라구모, 나쓰구모 (11척, 20,930톤)
잠수함 : I-1, I-3, I-4, I-22, I-23, I-123 (6척, 11,309톤)
합계 : 24척, 134,839톤

격침된 미국의 기타함정들은 다음과 같다.

어뢰정 : PT-37, PT-43, PT-44, PT-111, PT-112, PT-123 (6척)
수송선 : Colhoun, George Elliott, Gregory, Little (4척)
예인선 : Seminole (1척)

격침된 일본의 기타함정들은 다음과 같다.

수송선 : 나가라 마루, 히로가와 마루, 나쿠 마루, 캔버라 마루, 야마쓰키 마루, 기누가와 마루, 시나노 마루, 브리즈번 마루, 애리조나 마루, 긴류 마루, 규슈 마루, 메이요 마루, 사사고 마루, 나이애가라 마루 (14척)

공중전에서 격추된 항공기의 수는 미군의 경우 118대, 항공기 승무원의 손실은 94명이었고, 일본군의 경우 육군기와 해군기를 합하여 항공기 손실은 893 대이며, 항공기 승무원의 손실은 2,362명에 달했다.
미국해군의 전사자는 5,041명이었고, 일본해군의 전사자는 약 3,800 명이었다.

엔터프라이즈는 과달카날 전투 기간 중에 함정승무원 119명, 항공기 승무원 55명 등 총 174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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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은 처절한 전투로 점철되었던 1942년과 달리 태평양함대에게는 전반적으로 평온한 시기였다.
2월 초에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 후 11월 말에 길버트 제도 상륙작전을 시작하기 전까지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 실시한 주요 작전이라고는 5월 11일의 애투 섬 상륙작전과 8월 15일의 키스카 섬 상륙작전 정도였다.
그나마 키스카 섬 상륙작전은 일본군들이 몰래 해상철수를 한 뒤였기 때문에 전투도 치르지 않고 탈환했다.
물론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는 수레바퀴 작전에 돌입하여 과달카날 못지않은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지만, 원래 수레바퀴 작전 자체가 남서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의 지휘 하에 실시되는 작전이었으니만큼 진주만의 태평양함대 사령부는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핼시 제독에게 함정과 보급품만 지원해 주었을 뿐 작전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태평양함대 사령부는 비교적 평온한 이 기간을 이용하여 함정들의 수리와 개조를 실시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했다.
엔터프라이즈도 이런 분위기 하에서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자 1943년 4월부터 진주만에서 오버홀을 실시했고 이후 10주간 하와이 근해에서 신규 함재기 조종사들의 훈련을 실시한 다음 7월 20일부터 11월 1일까지 미본토 서해안의 브레머톤 조선소에서 대규모의 개조를 실시하고 11월 6일에 진주만으로 돌아왔다.

 

(워싱턴주 브레머톤의 퓨젯 사운드 해군공창에서 1943년 10월 21일에 찍은 엔터프라이즈의 모습. 개장 작업이 거의 막바지에 들어간 모습이다.)


또한 1943년은 드디어 공업생산력이 제 궤도에 오른 미본토에서부터 진주만의 태평양함대로 엄청난 양의 함정, 항공기, 병력, 보급품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시기였다.
따라서 태평양함대 사령부는 엄청나게 증강된 이러한 전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태평양함대의 조직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하지만 1943년이 밝았을 때에는 아직도 과달카날 전투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1942년 12월이 되자 미군의 공격에 더하여 굶주림과 질병으로 인하여 과달카날에 있는 일본군의 병력은 11월의 30,000 명에서 25,000 명으로 줄어들었다.
반면 미지상군의 병력은 1월 초에 육군제25사단과 해병제2사단의 주력부대가 상륙함에 따라 3개 사단 48,000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헨더슨 비행장의 원래 활주로도 증설되었고 전투기용 보조 활주로도 확장 정비되어 해군과 해병대 전용으로 쓰이게 되었다.
또한 콜리 지역에 제2비행장을 건설하여 카니 비행장이라고 불렀고, 호니아라 근처의 해안 가까이에 쿠쿰 비행장을 완성하여 육군과 뉴질랜드 공군 전용으로 사용함으로써 칵터스 항공대는 실로 4개의 활주로를 운용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1942년 11월부터 뉴조지아 섬의 문다 지역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12월 말에 완성했다.

1월 들어 전력이 더욱 강화된 과달카날의 미지상군은 공격작전에 가속도를 붙여 육군제25사단은 12월 17일부터 공격하고 있던 오스텐 산 정상의 기푸 진지에 최종 공세를 가하여 1월 23일에 점령했다.
이 기푸 전투에서 일본군 518명과 미군 64명이 전사했다.

육군제25사단이 오스텐 산의 일본군들을 소탕하는 동안 해병제2사단과 아메리칼 사단은 마타니코 강의 서쪽으로 전진을 개시하여 1월 중순에는 일본군 사령부가 있는 코쿰보나를 사정거리에 넣게 되었다.
당시 패치 소장은 해병제2사단과 미육군제25사단 및 아메리칼 사단의 3개 사단으로 새로이 제14군을 형성하고, 해병대와 육군의 단위부대를 서로 섞어서 혼성사단(CAM, Composite Army-Marine)을 형성하여 일본군 주력을 코쿰보나에 몰아넣은 채로 전멸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코쿰보나의 일본군이 포위망을 피해 해안선을 따라서 섬을 반시계 방향으로 삥 돌아서 도주하지 못하도록 아메리칼 사단 소속 제147연대의 일부 병력을 상륙주정으로 섬의 남서쪽인 뷰포트 만에 상륙시켰고, 추격하기 곤란한 정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정글로 통하는 통로를 미리 차단한 후 1월 16일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1월 23일에 미육군 제25사단 소속 제27연대가 코쿰보나를 점령했고 이어서 1월 31일까지 일본군 주력을 과달카날 섬의 서북쪽 끝으로 몰아붙였다.
1월 10일부터 1월 31일까지의 공격작전을 통하여 제14군단은 약 4,000 명의 일본군을 사살했고. 자신들은 189 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이제 과달카날의 일본군은 해상을 통한 철수가 실시되지 않는 한 전멸을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처했다.
 
한편, 1942년 12월 26일에 대본영이 드디어 과달카날 철수건의를 받아들이자 일본연합함대와 제8방면군 사령부는 즉각 과달카날 철수를 위한 세부계획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1월 9일에 완성했다.
‘케호 작전’ 이라고 불린 이 철수계획에 따르면 과달카날의 일본군은 2-3회에 걸쳐서 야간에 구축함을 이용하여 철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철수계획을 기만하고 일본군 주력을 공격하고 있는 미군의 진격을 둔화시키기 위하여 야노 게이지 중좌가 이끄는 600 명의 병력을 1월 14일에 과달카날에 새로이 상륙시켜 미군에게 공세를 가하고, 이 지역에서 사용가능한 모든 항공기 세력을 집결하여 1월 28일부터 일시적으로 과달카날의 제공권을 장악하기로 했다.
또한 연합함대 소속 전함들과 항공모함들을 포함한 강력한 함대가 피같은 기름을 소모해 가면서 트럭 섬에서 남하하여 과달카날의 북쪽해상에서 얼쩡거렸다.
최초의 해상철수는 1월 31일 새벽으로 예정되었다.
일본군은 이 철수작전을 실시하면서 보안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과달카날에 있던 제17군 사령관 햐꾸다께 중장에게 이 계획을 알린 것도 1월 17일이 되어서였고, 그나마 보안을 위하여 부하들에게는 구축함에 승선하여 과달카날 섬의 반대쪽에 상륙하여 양쪽에서 미군을 협격할 것이라고 속였다.

때문에 과달카날의 일본군들은 최상급 지휘관과 참모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구축함에 승선하는 순간까지도 자신들이 새로운 공세를 위하여 재배치되는 줄 알고 있었다.
 
대규모 구축함 수송의 재개, 갑작스런 항공활동의 증가, 전함과 항공모함을 포함한 대규모 함대의 남하 등 1월 하순에 나타난 일본 측의 불길한 징조는 곧 미해군의 암호해독반에 포착되었다.
게다가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새로운 일본군 부대가 나타나서 무기력하게 후퇴를 거듭하던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딴판으로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여기에 의존하여 미군의 공세에 거세게 저항하는 사태까지 겹치자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핼시 제독은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이 일본군이 새로운 대규모 공세를 취하려는 전조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핼시 제독은 순양함 4척과 구축함 4척을 보유한 제67기동부대를 고속전함 3척(노스캐롤라이나, 워싱턴, 인디애나)과 구축함 4척을 보유한 리 제독의 제64기동부대에 흡수시켜 제64기동부대를 강화했다.
또한 1월 29일,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에게 산호해로 나아가 동료 항공모함 새러토가와 만나서 강력한 항공모함기동부대를 형성한 후 고속전함 중심의 막강한 수상함대인 제64기동부대와 함께 예상되는 일본연합함대의 대규모 공격에 대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또한 핼시 제독은 과달카날의 지상군을 강화하기 위하여 병력과 물자를 가득 실은 4척의 수송선과 4척의 구축함으로 형성된 수송선단(제62.8기동부대, TF62.8)을 과달카날로 보내고, 또한 호위항공모함 2척(스와니, 체난고), 중순양함 3척(위치타, 시카고, 루이스빌), 경순양함 3척(클리블랜드, 몽펠리어, 컬럼비아),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진 기펜 제독의 제18기동부대에게 이 수송선단에 앞서 과달카날 해역에 나아가 수송선단의 항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흔히 'Baby Carrier' 또는 'Jeep Carrier' 라고 불리는 미국의 호위항공모함(CVE)은 원래 대서양 전투에서의 에어 갭을 메꾸기 위하여 수송선(C-3급)인 Mormacmail 과 Mormacland 의 선체를 개조하여 만든 것이 시초이다.
이중 몰막메일은 개조를 거쳐 1941년 6월 2일에 CVE-1 Long Island 로 취역하였고, 몰막랜드는 호위항공모함으로 개조하여 영국에 공여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 호위항공모함들을 대량으로 건조하여 5개 급에 걸쳐 총 109척을 취역시켰다.(Long Island 급 2척, Bogue 급 44척, Sangamon 급 4척, Casablanca 급 50척, Commencement Bay 급 9척)
다만 이중에 최종형인 커멘스먼트 베이 급의 9척 중에서 6척은 너무 늦게 취역하여 전쟁 중에 실제로 임무에 투입된 호위항공모함은 이 6척을 제외한 총 103척이다.
미국은 호위항공모함 중 몰막랜드를 개조한 1척과 보그 급 32척을 영국에 공여하였기 때문에 미해군이 운용한 호위항공모함은 총 70척이며 이중에서 50척이 카사블랑카 급이었기 때문에 미해군의 호위항공모함이라면 대략 카사블랑카 급이다.
다만 렌넬 섬 해전 당시 제18기동부대에 포함된 호위항공모함들인 CVE-27 Suwanee, CVE-28 Chenango 는 생가몬 급이다.

호위항공모함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롱아일랜드 급과 그 뒤를 이은 보그 급은 수송선의 선체를 개조하여 만들어졌고, 생가몬 급은 보다 대형의 함대급유선을 개조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숫자면에서 보그 급과 함께 호위항공모함의 주력을 이루는 카사블랑카 급과 호위항공모함의 결정판이라고 할 커멘스먼트 베이 급은 처음부터 호위항공모함으로 건조된 것이다.
이 중 롱 아일랜드 급, 보그 급과 생가몬 급은 수송선단 호위용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카사블랑카 급은 항공기 수송을 주임무로, 선단호위를 보조임무로 상정하여 설계된 것이며, 생가몬 급의 확대개량형인 최종판 커멘스먼트 베이 급은 처음부터 전투임무를 상정하여 설계되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에서는 호위항공모함들이 상륙작전 시의 근접항공지원(CAS, Close Air Support)을 제공하는 데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즉 일단 상륙이 이루어진 후 상륙군이 필요로 하는 근접항공지원을 호위항공모함들이 전담함으로써 고속 항공모함들이 좁은 상륙지역 부근의 해역을 빨리 벗어나서 그 특유의 기동성을 살릴 수 있었다.
이러한 호위항공모함에 의한 근접항공지원은 1943년 5월11일의 애투 섬 상륙작전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어 이 작전에 같이 참가했던 구식전함 3척의 포격지원과 함께 해군과 해병대, 육군 모두로부터 아주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사실 호위항공모함(CVE)과 경항공모함(CVL)인 Independence 급의 크기나 함재기 운용능력은 그리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는다.(미국항공모함 중 경항공모함으로 분류되는 것은 경순양함 Cleveland 급을 개조한 인디펜던스 급 9척뿐이다.)
즉 11,500 톤의 배수량에 Hellcat 25대와 Avenger 9대를 운용하는 인디펜던스 급에 비하여 호위항공모함의 최종형인 커멘스먼트 베이 급은 11,000 톤의 배수량에 33대의 함재기를 운용할 수 있다.
경항공모함과 호위항공모함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속력이다.
인디펜던스 급이 32노트의 고속을 낼 수 있는데 비하여 호위항공모함 중 가장 고속인 카사블랑카 급의 속력은 20노트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디펜던스 급이 Essex 급으로 대표되는 정규항공모함들과 함께 고속항모기동부대를 형성하여 작전하는데 비하여 호위항공모함은 주로 자신과 같이 속력이 느린 호위구축함(DE)의 호위를 받으면서 역시 속력이 느린 구식전함들과 함께 상륙작전시 교두보 근해에서 작전한다.  

이렇듯 각자의 성격이 뚜렷하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국 항공모함들을 정규항공모함(CV), 경항공모함(CVL), 호위항공모함(CVE) 으로 나누는 일은 아주 단순한 작업이며, 여기에는 어떤 이견도 없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된다.
즉 ‘크고 빠른 정규항공모함, 작고 빠른 경항공모함, 작고 느린 호위항공모함’ 이란 공식으로 아주 간단하게 분류할 수 있다.
이중에서 속력이 빠른 정규항공모함과 경항공모함들이 고속항모기동부대를 형성한다.
하지만 같은 잣대를 가지고 다른 나라들, 특히 일본의 항공모함들을 분류하려면 상당히 애매한 경우가 생긴다.

과달카날로 향하는 수송선단의 전방에서 항로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제18기동부대의 행동과 일본군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과달카날에서 공격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던 일본의 항공세력이 맞부딪쳐서 발생한 전투가 바로 과달카날 전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해전인 렌넬 섬 해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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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1월 16일부터 12월 4일까지 엔터프라이즈는 과달카날 해전에 참가하느라고 미진했던 부분의 수리를 마치기 위하여 다시 누메아의 해군공창에 들어갔다.

한편 제해권과 제공권이 없는 상태에서 과달카날의 일본군에게 보급을 해주기 위하여 일본해군은 드럼통에 보급물자를 넣고 밀봉한 후 이 드럼통들을 그물로 묶어서 구축함에 싣고 고속성능을 이용하여 야간에 과달카날에 도착하여 해안에 던져주고 날이 밝기 전에 철수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1942년 11월 30일, 이 드럼통 수송을 처음 시도하던 다나까 제독 휘하의 일본구축함들이 이를 가로막으려는 순양함 중심의 강력한 수상함대인 Carleton H. Wright 소장의 제67기동부대와 격돌했다.

 

(다나까 라이조 제독.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5539758 )

타사파롱가 해전이라고 불린 이 해전에서 다나까 제독이 인솔하던 일본구축함 8척이 중순양함 4척(노댐턴, 펜사콜라, 뉴올리언즈, 미니애폴리스), 경순양함 1척(호놀룰루), 구축함 6척으로 구성된 라이트 소장의 제67기동부대와 교전했다.

일본구축함들은 미함대의 압도적인 화력 아래에서 순양함열에 접근한 다음 총 47발의 산소어뢰를 발사하여 그 중 6발을 4척의 중순양함에게 명중시켰다.

이 결과 미함대는 중순양함 노댐턴이 격침되고 나머지 3척의 중순양함들은 9개월에서 1년 이상의 수리를 요할 정도로 심한 피해를 입었는데 반하여, 일본함대는 구축함 1척이 격침당했을 뿐이었다.

 

원래 제67기동부대는 엔터프라이즈가 수리차 누메아의 해군공창에 들어감으로써 지휘할 함대가 없어져 버린 킨케이드 소장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11월 27일에 신형 SG 레이더를 탑재한 구축함을 전진배치하여 순양함에서 10,000m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적을 먼저 포착한 후 레이더 조준에 의한 장거리 선제포격으로 적을 제압한다는 야간전투계획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 직후에 니미츠 제독이 킨케이드 제독을 진주만으로 불렀다.
그리하여 킨케이드 제독의 부하이자 제6순양전단장이었던 라이트 제독이 제67기동부대를 이끌고 킨케이드 제독의 작전계획에 따라 전투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라이트 제독은 전투현장에서 순양함의 발포시각을 너무 늦추는 실수를 범하여 일본구축함들에게 단종진으로 천천히 항진하면서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던 제67기동부대의 순양함열에 충분히 접근하여 산소어뢰를 발사할 시간여유를 주고 말았다.

그 결과 제67기동부대는 현저하게 열세한 세력의 일본함대에게 형편없이 얻어터지게 되었고 미해군 수뇌부는 타사파롱가 해전에서 보여준 일본함대의 막강한 야전능력에 경악했다.

그리하여, 이후로는 수상함대를 내보내어 일본의 구축함을 이용한 쥐수송을 저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일본군이 과달카날에서 무사하게 철수하게 되는 큰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한편 이때 진주만에 불려간 킨케이드 소장은 테오발드 소장의 뒤를 이어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 된다.
당시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었던 테오발드 제독은 상당히 명석한 인물이었으나, 성격이 너무 급하여 그 지역의 육군 사령관들 사이에서 ‘역사상 가장 화를 잘내는 제독’ 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육군과의 사이가 나빴다.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 육군과 그렇게 사이가 나빠서야 1943년 3월로 예정된 애투와 키스카 섬 상륙작전이 제대로 실시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니미츠 제독은 테오발드 제독을 보스턴의 제1해군구 사령관으로 보냈다.

그리고, 후임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으로 당시 태평양함대 내의 소장급 제독 중에서 정치적 수완이 가장 뛰어나고, 따라서 육군과의 사이도 가장 원만하던 킨케이드 제독을 임명한 것이었다.
킨케이드 제독은 니미츠 제독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북태평양 지역에서 육군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데 성공하고, 애투와 키스카 섬 상륙작전도 성공적으로 실시한다.

1943년 8월 15일에 실시된 키스카 섬 상륙작전 이후에 중장으로 승진한 그는 더 이상 중요한 작전이 없는 상태로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라는 사실상의 코끼리 무덤에서 중장 계급으로 종전을 맞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태평양함대에는 이미 기라성같은 경쟁자들이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고 있어서 그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하지만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마당발이었던 그는 곧 맥아더 장군의 남서태평양해역군에서 그만의 블루오션을 발견했다.
당시 태평양함대에는 맥아더 장군을 명예욕이 강하고 가식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드라마틱한 언어를 즐겨 구사하는 밥맛없는 3류 연극배우 쯤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재능있고 중량감이 있는 제독들은 누구도 그의 지휘 하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비록 당시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었던 핼시 제독이 수레바퀴 작전에서 맥아더 장군과 훌륭하게 호흡을 맞추고는 있었지만, 니미츠 제독에 이어 명실공히 태평양함대의 제2인자였던 핼시 제독은 맥아더 장군 휘하로 들어가 항공모함은 커녕 구식전함 1척도 없는 제7함대 사령관을 맡기에는 너무나 거물이었다.
따라서 맥아더 장군으로서는 휘하의 제7함대를 맡아줄 재능있고 중량감있는 해군제독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고, 이러한 맥아더의 처지는 어떻게든 한직인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 자리를 떠나 새로운 기회를 잡으려던 킨케이드 중장의 이해관계와 딱 맞아 떨어졌다.
킨케이드 중장은 충분히 재능있는 제독이었으며,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여 해전을 치른 바도 있는 중량감있는 제독이었고, 또한 애투와 키스카 섬 상륙이라는 육군과의 공동상륙작전도 치뤄 본 경험이 있었다.
그가 비록 항공관계자가 아닌 순양전단장 출신이라서 태평양함대 내에서 경쟁하기에는 불리한 여건이었지만, 항공모함이 없는 제7함대 사령관으로서는 오히려 적격이었다.

그리하여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자신의 제7함대 사령관으로 킨케이드 제독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1943년 11월 하순에 킨케이드 중장은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 자리를 플레처 중장에게 물려주고 당시 맥아더 해군으로 불리던 소규모의 제7함대 사령관직을 맡게 된다.
이후 그는 명실공히 남서태평양해역군의 해군을 책임지는 최고 실력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고, 이걸 기반으로 결국 대장까지 승진한다.
당시 태평양함대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가장 출세한 편에 속하는 제5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이나 제58기동부대 사령관 미처 제독 등도 결국 대장까지 승진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남들이 다 꺼리는 제7함대 사령관 자리를 차지하여 대장까지 승진한 킨케이드 제독의 도박은 멋지게 성공한 셈이다.

12월 4일, 엔터프라이즈는 수리를 마치고 Frederic C. Sherman 제독의 지휘 하에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5일에는 지난 8월 31일에 일본잠수함의 어뢰에 맞아 수리에 들어갔던 동료 항공모함 새러토가가 수리를 마치고 누메아에 도착했다.

과달카날의 미군세력이 증강됨에 따라 미지상군은 11월 중순부터 헨더슨 비행장을 중심으로 방어에 치중하던 이제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공세로 이전했다.
우선 11월 11일에 제1해병사단의 기습대대가 Evans Carlson 중령의 지휘 하에 헨더슨 비행장에서 동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아올라에 상륙하여 서진하면서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쇼지 대좌 지휘 하의 일본군 2,000 여명을 공격하여 500 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를 헨더슨 비행장 남쪽의 오스텐 산 쪽으로 쫓아내었다.
12월 3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로 기습대대는 16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한편 제2해병사단 제8연대의 도착으로 과달카날의 미군 병력이 39,000 명을 넘어가게 되자 과달카날 상륙 이후 쉬지않고 계속 전투를 해온 제1해병사단은 11월 29일에  휴식과 재정비를 위하여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에 따라 제1해병사단장 밴디그리프트 소장은 12월 9일에 미육군 아메리칼 사단의 Alexander Patch 소장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과달카날 섬을 떠났다.
제1해병사단은 과달카날 상륙 이래 어렵고 힘든 시기를 헤쳐나오면서 681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제1해병사단은 이때의 공로로 미국사단 중에서는 최초로 사단마크를 군복에 착용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사단장 밴디그리프트 소장은 이후로도 계속 승승장구하여 1943년에 중장으로서 해병대 총사령관이 되었고, 1945년 4월 4일에는 해병대 최초의 4성 장군이 된다.

 

(해병제1사단의 사단 마크. 주변에 있는 별들은 남십자성을 상징한다.)

 

12월17일, 미육군 제25사단이 헨더슨 비행장의 남쪽에 있는 오스텐 산의 일본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제2해병사단과 아메리칼 사단은 마타니코 강을 건너 서진하면서 일본군 주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육군은 햐꾸다께 중장의 제17군 사령부가 과달카날에 상륙한 후 그곳에서  발이 묶여 버리자 11월 초에 뉴기니아 작전을 지휘하기 위하여 제18군을 창설하여 아다찌 중장이 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제17군과 제18군을 지휘하기 위하여 새로 제8방면군 사령부를 만들어서 이마무라 히도시 중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일본연합함대는 타사파롱가 해전으로 발전했던 11월 30일 외에도 12월 3일, 7일, 11일에 계속하여 구축함으로 드럼통 수송을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드럼통 투하해역에 조명탄을 터뜨리며 공격해오는 미국의 수상비행기들과 어뢰정들 때문에 제대로 드럼통을 전달하는데 실패했다.
게다가 12월 11일에는 드럼통을 내려놓고 막 출발하려던 구축함 데루즈끼가 미국어뢰정이 발사한 어뢰에 맞아서 격침되자, 야마모또 연합함대 사령관은 다음날인 12일에 구축함을 이용한 드럼통 수송을 중단했다.
이후로는 일본군에 대한 보급품 수송은 잠수함에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이제 과달카날의 일본군들은 미군에게 죽기 전에 굶어죽을 처지가 되었다.
과달카날에 있던 일본군의 처지가 이렇게까지 막바지로 몰리게 되자 드디어 대본영도 고집을 꺾었다.

1942년 12월 26일에 철수의견이 받아들여졌고, 1942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의 어전회의에서 정식으로 과달카날 철수가 결정되었다.

엔터프라이즈는 1942년의 마지막 한 달을 과달카날 근해에서 항공엄호를 제공하며 지냈다.

1942년의 1년 동안 엔터프라이즈는 마셜 제도 공격, 웨이크 공격, 마르쿠스 공격, 둘리틀의 도꾜 폭격,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상륙, 동부솔로몬 해전, 산타크루즈 해전, 과달카날 해전 등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여 함정승무원 110명, 항공기 승무원 120명 등 총 230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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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기동부대에서 분리되어 서둘러 북상해 온 리 소장의 제64기동부대는 14일 오후 7시 20분 경 아이언바텀사운드에 들어섰다.
제64기동부대의 전력은 고속전함 2척(워싱턴, 사우스다코타), 구축함 4척으로서 16인치 주포 18문을 가진 강력한 세력이었고, 2척의 전함에는 신형의 SG 레이더가 장비되어 있었다.
또한 임무에 관한 한 꼼꼼한 완벽주의자인 사령관 리 제독은 미해군 내에서도 레이더 사격의 최고권위자로 알려질 정도로 레이더와 포술의 양면에서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지닌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윌리스 리 제독)

 

한편 야간에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할 목적으로 남하하고 있던 곤도 중장의 일본제2함대는 3개의 부대로 편성되어 합계 전함 1척(기리시마), 중순양함 2척(아타고, 다까오), 경순양함 2척(센다이, 나가라), 구축함 11척의 세력이었다.

이들은 레이더도 없고 대구경 주포의 숫자와 파괴력에서도 기리시마가 14인치 포 8문을 보유했을 뿐으로 2척의 고속전함이 16인치 포 18문을 보유한 제64기동부대에게 결정적으로 열세였다.

대신 곤도 제독은 무서운 산소어뢰를 다수 보유한 강력한 수상함 세력과 야전에 익숙한 숙련된 승무원들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 11월 14일 밤 10시 30분경에 일본함대가 제64기동부대를 발견했다.

미함대는 잠수함의 보고로 일본함대의 접근을 미리 알고 있었는데, 제64기동부대의 기함 워싱턴의 레이더에 일본의 경순양함 센다이가 잡힌 시각은 11시였다.
11시 17분, 센다이에 대하여 워싱턴의 함포가 불을 뿜으면서 과달카날 해전의 두번째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제64기동부대는 구축함 3척이 격침되고 1척이 대파되었으며, 고속전함 사우스다코타가 일본함대의 집중사격을 받아서 14인치 철갑탄을 포함하여 구경 8인치 이상의 주포탄 26발을 얻어맞고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새로운 설계에 의한 중장갑을 두르고 있던 사우스다코타는 그런 엄청난 집중포격 하에서도 함의 핵심 부분은 전혀 관통당하지 않아서 미국의 우수한 장갑설계능력을 과시했다.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사우스다코타.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gold829921/60062401360 )

 

한편 사우스다코타가 일본함대에게 얻어맞고 있는 동안 전함 워싱턴은 8,000 미터 거리에서 일본전함 기리시마에게 기습적으로 레이더 조준사격을 실시했다.

워싱턴은 불과 7분 만에 16인치 철갑탄 75발을 발사하여, 그 중 9발을 기리시마에게 명중시켰다.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기리시마는 완전히 전투력을 상실했고, 곧 침몰했다.

기리시마는 미서전쟁 이후 미전함에 의하여 침몰한 최초의 전함이었다.

 

(공고급 순양전함 기리시마.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5417895 )


14일 오후 11시 17분부터 15일 새벽 0시 30분까지 지속된 이 전투에서 제64기동함대는 구축함 3척 침몰, 1척 대파, 전함 1척 소파의 피해를 입으면서, 적의 전함 1척과 구축함 1척을 격침하고, 중순양함 2척과 경순양함 1척을 소파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해전의 결과로 일본전함에 의한 헨더슨 비행장의 무력화 시도가 물거품이 되었을 뿐 아니라 다나까 제독의 수송선단이 과달카날에 도착하는 시간이 새벽으로 늦어짐으로써 칵터스 항공대의 집중공격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전날의 공습에서 겨우 살아남은 다나까 제독 휘하의 수송선 4척은 15일 새벽 4시에 타사파롱가 해안에 그대로 진입하여 좌초한 다음 서둘러서 양륙작업을 실시했다.
하지만 5시 55분부터 칵터스 항공대의 돈틀레스들이 나타나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칵터스 항공대는 엔터프라이즈의 제10비행단 중 모함 보호를 위해 제16기동부대에 잔류한 18대의 와일드캣을 제외한 약 70대의 세력이 전부 헨더슨 비행장에 가세하여 거의 150대 가까운 대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헨더슨 비행장에서 불과 5분만에 비행할 수 있는 타사파롱가 해안의 일본군과 그들이 양륙한 보급품에 대하여 그날 저녁까지 8차례나 폭격을 반복했다.
여기에 지난밤 해전에서 격침당한 미구축함의 생존자들을 구하려고 제16기동부대에서 분리되어 밤새 북상해온 구축함 Meade 까지 가세하여 해안에 쌓아놓은 일본군의 보급품에다가 42분간 포격을 가했다.
15일 새벽부터 하루 종일 지속된 칵터스 항공대의 폭격은 저녁이 되어 일본군 수송선 4척을 전부 격침시키고, 일본군이 겨우 양륙해 놓은 보급품들을 거의 다 파괴한 다음에야 끝났다.
일본군의 피해는 그야말로 참담했다.
1만여명의 병력 중 6,000 여명이 수송 중에 전사하여, 겨우 4,000 명만이 무사히 상륙했다.

또한 중포 50문, 포탄 3만발과 3만명이 1달간 먹을 식량 등 총 1만톤의 보급품 중 과달카날의 일본군에게 무사히 전달된 것은 탄약 260 상자와 약간의 쌀 등 불과 5톤에 지나지 않았다.
실로 99.95% 의 보급품이 수송 도중에 망실되고 만 것이었다.

1942년 11월 13일에서 15일까지 지속된 과달카날 해전의 결과 과달카날 전투의 승자는 사실상 미국으로 결정되었다.
당장 먹을 것도 없는 과달카날 섬의 일본육군이 막강한 미군을 상대로 헨더슨 비행장을 공격하여 점령한다는 것은 이제는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헨더슨 비행장을 점령하지 못하는 한 과달카날 주변의 제해권이란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일본연합함대는 과달카날 해전 이후 과달카날 주변에서 미해군에게 도전하여 제해권을 탈취하려는 시도를 포기했고, 그들의 임무를 과달카날 섬에 고립된 일본군에 대한 보급에만 국한했다.
반면에 과달카날 해전으로 과달카날 주변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한 미군은 자유롭게 병력의 증강과 보급을 실시하여 과달카날에 있는 일본군과의 전력 격차를 더욱 벌려나갔다.

이런 상황이라면 지체없이 과달카날 섬의 포기를 결정하고 철수를 시작했어야 정상이지만, 도꾜의 대본영은 그래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 이후로도 1달 반이나 질질 끌면서 피해만 키우다가 결국 12월 30일이 되어서야 과달카날 철수를 결정한다.

11월 13일에서 15일에 걸친 과달카날 해전의 결과 일본해군은 전함 2척, 중순양함 1척, 구축함 3척, 수송선 10척이 격침당했다.
미해군은 경순양함 2척과 구축함 7척을 잃었다.

엔터프라이즈의 제10항공단은 과달카날 해전 기간 중 7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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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0월 30일에 엔터프라이즈가 누메아에 입항하자 수리함 베스탈이 옆에 붙어서 수리를 시작했고 미해군 건설대대(Construction Battalion = CB = SeaBee's)가 승함하여 엔터프라이즈의 수리를 지원했다.
지상의 도로나 활주로를 건설하고 보수하는 일을 주로 하는 SeaBee's 가 함정에 승함하여 수리를 지원하는 일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엔터프라이즈의 수리를 빨리 끝낼 필요성이 있었다는 뜻이며 실제로 엔터프라이즈는 누메아에 입항한지 12일 만에 다시 바다로 나가야만 했다.     

산타크루즈 해전이 벌어지기 직전인 1942년 10월 24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통합참모본부에 메모를 보내어 과달카날에 대하여 확실하게 지원해 줄 것을 촉구했다.
당시 연합군은 세계 곳곳에서 중대한 시점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워싱턴의 통합참모본부로서는 신경써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토취 작전이 바로 눈앞에 있었고, 북아프리카의 엘 알라메인에서는 1942년 10월 23일부터 몽고메리가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을 공격하고 있었다.
대서양 전투는 10월에만 60만톤의 수송선을 상실하면서 그야말로 절정을 향하여 치닫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아놀드 장군은 독일에 대한 전략폭격을 위하여 장거리 폭격기들을 영국에다가 집중시키고 있었다.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에 치명타를 먹이기 위하여 잔뜩 준비하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에 대처하느라 피곤에 찌들은 통합참모본부 사람들은 남태평양에서 재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체하고 있었는데 루즈벨트 대통령이 여기에 경각심을 일깨운 것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미함대사령관 킹 제독은 과달카날에 대한 야심적인 증원계획을 마련하여 11월에만 남태평양해역군에 30척의 수송선을 할당하고, 이후에 20척을 더 할당하였으며 제63기지항공단사령관 피치 소장은 전력을 다하여 항공기들을 헨더슨 비행장에 파견했다.
그리하여 10월 26일에 29대까지 떨어졌던 칵터스 항공대의 세력은 11월 30일에는 P-38 전투기와 B-17 중폭격기, 뉴질랜드 공군의 허드슨 폭격기까지 포함하여 188대로 증강되었다.
핼시 제독은 이런 분위기 하에서 제1해병항공기술연대(1st Marine Aviation Engineering Regiment) 와 주방위군 소속 제182보병연대, 합계 6,000 명의 병력을 과달카날로 증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아주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일본군은 11월에 또다시 대규모의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승리하고도 제17군의 공세가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일본함대가 트럭  섬으로 퇴각하고 있던 10월 26일,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또 제독은 10월 총공격의 실패 때문에 과달카날을 포기하자는 이야기를 차마 입에 담을 처지가 못되는 제17군을 대신하여 대본영에 과달카날을 포기할 것을 건의했으나 묵살당했다.
오히려 대본영은 산타크루즈 해전의 결과에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그들은 제17군 사령관 햐꾸다께 중장에게 라바울에 있는 제38사단 주력을 대량의 보급품과 함께 과달카날에 상륙시켜, 기존의 병력과 함께 충분한 화력 지원 하에 3만여명의 대규모 병력이 참가하는 과달카날 전투 개시이래 최대규모의 제4차 공세를 실시하여 이번에야말로 헨더슨 비행장을 탈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라바울에 주둔하고 있던 제38사단의 주력 1만여명(제229연대, 제230연대, 공병 제38연대)이 중포 50문, 포탄 8만발, 3만명이 1달간 먹을 식량 등 1만톤의 보급품과 함께 11척의 수송선에 실려 쇼틀랜드에 도착했다.
그 동안에도 구축함을 이용한 도꾜 특급은 지속적으로 실시되어 11월의 첫째 주만 해도 일본해군은 2척의 순양함과 총 65소티에 달하는 구축함 수송을 통하여 과달카날에 병력과 물자를 실어날랐다.

그러는 동안 11월 8일부터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이 다시 일본군의 암호를 제대로 해독해 내기 시작했다.
3달전인 8월 1일에 일본해군이 JN25의 난수표를 교체하면서 완전히 혼란에 빠졌던 암호해독 작업이 다시 본궤도에 오른 것이었다.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한 태평양함대는 일본군의 대규모 증원 병력과 대량의 보급품이 11월 13일에 과달카날에 상륙할 예정이며 이 수송선단을 보호하기 위하여 11일에 일본기들이 헨더슨 비행장에 대규모의 공습을 가하고 12일 야간에는 2척의 전함이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할 예정임을 알 수 있었다.  

1942년 11월 7일, 6,000 명의 증원병력을 실은 7척의 수송선이 12일 도착예정으로 에스피리투산토를 떠났다.
제1해병항공기술연대는 3척의 수송선에 실려 대공경순양함 애틀란타와 3척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진 Norman C. Scott 소장의 호위함대와 함께 과달카날로 향했고, 제182보병연대는 4척의 수송선에 실려 터너 소장의 직접 지휘 하에 과달카날로 향했다.
중순양함 2척(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경순양함 2척(헬레나, 쥬노),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진 Daniel J. Callaghan 소장의 호위함대가 제182보병연대를 실은 수송선단을 엄호하고 있었다.

같은 날인 11월 7일에 핼시 제독은 현지의 실상을 파악하고 주둔 중인 미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하여 과달카날을 시찰했다.
이곳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핼시는 그의 어록 중 가장 유명한 말인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이란 말을 남긴다.

이 말을 너무 좋아한 해병대원들은 툴라기 섬의 부두에 페인트로 이 표어를 60cm 크기로 그려 놓았다.

과달카날 시찰을 마치고 11월 9일에 누메아에 돌아와서 참모장 브라우닝 대령으로부터 일본군의 의도에 대하여 보고를 받은 핼시 제독은 곧 향후 며칠 동안이 과달카날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고비가 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

지금이야말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과감하게 투입해야 할 때였다.  

11월 11일,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가 누메아를 출항했다.
엔터프라이즈의 전방 엘리베이터는 비행갑판에 고정된 채 사용할 수 없었으며 항구를 나서는 순간까지 수리함 베스탈이 옆에 붙어서 마무리 수리를 했다.
곧 누메아의 톤토타 비행장에서 제10전투비행대(와일드캣 38대), 제10정찰/폭격비행대(돈틀레스 41대), 제10뇌격비행대(아벤저 9대)가 날아와서 엔터프라이즈에 착함했다.
제16기동부대는 엔터프라이즈 외에 고속전함 2척(워싱턴, 사우스다코타), 중순양함 2척(노댐턴, 펜사콜라), 경순양함 1척(샌디에고),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져 미해군의 기동부대 중에서 태평양 전쟁 개전 이래 가장 강력한 수상함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전함이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려고 하는 12일 저녁까지 도저히 과달카날에 도달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11월 11일, 6,000 명의 증원부대를 실은 수송선단이 과달카날에 무사히 도착하여 12일 오후까지 상륙을 마쳤다.
이들은 과달카날에 도착한 직후 마침 헨더슨 비행장을 대규모로 공격해 온 일본기들에게 공습을 받았으나 다행히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12일 아침, 말라이타 섬 북쪽을 초계하던 B-17 기로부터 전함 2척이 포함된 대규모 일본함대가 남하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터너 제독은 12일 오후에 병력과 보급품의 양륙을 완료하자 구축함 1척의 호위 하에 수송선단을 에스피리투산토로 철수시켰다.
이때 터너 제독도 기함인 수송선 맥콜리에 타고 과달카날을 떠났다.

수송선단을 호위해 왔던 2개의 호위함대는 하나로 합쳐져서 선임자인 캘러헌 제독의 지휘 하에 남하 중인 일본함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북상했다.
미국함대의 세력은 중순양함 2척(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경순양함 3척(애틀란타, 헬레나, 쥬노),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베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함대의 세력은 전함 2척(히에이, 기리시마), 경순양함(나가라), 구축함 11척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미국함대에 비하여 대단히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정이 다급하다고는 해도 전함 2척이 포함되어 14인치 주포를 16문이나 보유한 강력한 적의 함대를 저지하는 임무에 최대구경의 함포라야 8인치 주포에 지나지 않고 함정 숫자조차 딸리는 순양함 중심의 함대를 파견한 터너 제독의 배짱도 대단하지만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적의 전력이 어떻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사지로 떠난 캘러헌 제독과 스코트 제독도 참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캘러헌 제독과 스코트 제독은 그날 밤 안으로 모두 전사했다.
사실 아베 제독은 11일에 수송선단을 공습했던 항공기의 보고를 통하여 수송선단을 호위해 온 소규모의 미국함대가 과달카날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인들이 그런 빈약한 함대세력을 가지고 전함이 2척이나 포함된 자신의 함대에 감히 정면으로 도전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아베 제독과 일본함대는 미국함대와 전투에 돌입하는 순간까지도 적 수상함대와의 교전에 대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남하하던 일본함대와 이를 요격하기 위하여 전진하던 미국함대는 13일 새벽에 과달카날 북쪽의 아이언바텀사운드에서 정면으로 격돌했다.
교전 초기에 서로 얽혀버린 두 함대는 달도 없는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혼란을 극한 처절한 사투를 치렀다.
13일 새벽 1시 48분부터 2시 26분까지 40분 남짓 진행된  전투의 결과로 미국함대는 경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이 침몰하고, 중순양함 2척과 경순양함 1척, 구축함 2척이 대파, 구축함 1척이 소파되는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격침된 2척의 경순양함 중에서 쥬노는 원래 대파되어 에스피리투산토로 후퇴하던 중 일본 잠수함이 쏜 어뢰에 맞아 격침되었다.
캘러헌 제독과 스코트 제독도 전사했다.
하지만 미국함대는 이렇듯 커다란 희생을 치르면서도 일본전함 히에이에 화력을 집중하여 행동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아베 제독으로 하여금 이미 예정된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포기하고 물러나도록 만들었다.
일본함대는 그 외에도 2척의 구축함을 잃었다.

 

(아베 히로아키 제독. 자세한 설명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5539623 )

 

사실 캘러헌 제독은 이 해전을 지휘하면서 함선의 배치, 기함의 선택, 그리고 전투 초기의 발포명령 등에서 실수를 저질렀고, 그 결과 미국함대의 피해를 더 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는 형편없이 열세한 세력으로 강력한 적에게 과감하게 도전하여 비록 치명적인 피해는 입었으나 어쨌든 미국함대는 일본함대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여 작전목표를 달성했다.

 

또한 자신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으므로 전사가들의 평가도 주로 그의 실책을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것보다는 풍부한 전투 경험을 가진 스코트 제독 대신 불과 2주 일찍 소장으로 승진했다고 하여 전투 경험이 부족한 캘러헌 제독을 사령관으로 임명한 터너 소장의 실책을 지적하는 경향이 있다.

 

(대니얼 캘러헌 소장)


한편 13일 저녁에 과달카날에 도달할 예정으로 슬롯을 따라 남하하던 다나까 제독의 수송선단은 밤새 과달카날 근해에서 해전이 있었고 그 결과로 일본함대가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콜롬방가라 부근에서 변침하여 쇼틀랜드로 돌아가 버렸다.

13일 오전 8시 10분, 과달카날 남쪽 480km 지점에 진출해 있던 제16기동부대에서 제10뇌격비행대의 아벤저 9대와 제10전투비행대 소속 와일드캣 6대가 헨더슨 비행장을 향하여 엔터프라이즈의 비행갑판을 떠났다.
제10뇌격비행대는 13일 하루동안 히에이에 대하여 2회 출격하여 3발의 어뢰를 명중시켰다.
13일 하루종일 칵터스 항공대에 시달린 히에이는 14일 새벽에 자침했다.

 

(공고급 순양전함 히에이. 자세한 설명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5390351 )

 

13일 정오경, 핼시 제독은 제16기동부대 사령관 킨케이드 제독에게 고속전함 2척을 주축으로 한 수상함대를 형성하여 고속으로 북상, 과달카날 북방해역에 진출하여 일본전함에 의한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Willis A. Lee 소장이 전함 워싱턴과 사우스다코타,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진 제64기동부대를 편성하여 26노트의 속력으로 북상해 버리자 엔터프라이즈의 호위함으로는 중순양함 노댐턴과 펜사콜라, 경순양함 샌디에고, 그리고 구축함 2척만이 남았다.
용감하고 공격적이기는 했지만 무모하지는 않았던 핼시 제독은 태평양 함대의 유일한 항공모함인 엔터프라이즈의 안전을 고려하여 제16기동부대가 과달카날 북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13일 오후에 다나까 제독의 수송선단은 다시 쇼틀랜드를 떠났다.
이들을 호위하고 있던 제8함대 사령관 미까와 중장은 14일 새벽에 아이언바텀사운드에 들어와서 중순양함 마야, 스즈야, 경순양함 덴류, 구축함 3척으로 이루어진 니시무라 소장의 제7전대에게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도록 명령했다.
마야와 스즈야는 1시간 동안 8인치 삼식탄 1,000 여발을 헨더슨 비행장에 쏟아부어 2대의 전투기를 파괴하고 15대의 항공기에 피해를 입혔으나 8인치 주포의 위력부족으로 인하여 그 효과는 전함에 비해서는 미미했다.
미까와 함대는 포격을 마치자 즉시 쇼틀랜드를 향하여 퇴각하기 시작했다.

14일 오전 7시 8분, 과달카날 남쪽 320km 까지 진출한 엔터프라이즈는 10대의 돈틀레스에게 수색폭격의 임무를 주어 북쪽으로 날려보냈다.
이어서 함대 직위로 3대, CAP 세력으로 8대의 와일드캣이 이함했다.  

오전 9시 15분, R. D. Gibson 소위가 미까와 중장의 함대를 발견했다.

아벤저 6대, 돈틀레스 7대, 와일드캣 10대로 이루어진 공격대가 엔터프라이즈를 떠났다.
9시 30분, 깁슨 소위는 중순양함 기누가사에게 급강하폭격을 가하여 1발의 225kg 폭탄을 명중시켰다.
역시 수색폭격의 임무를 맡고 있던  P. M. Halloran 소위가 중순양함 마야에 급강하폭격을 시도하다가 메인 마스트에 접촉하여 갑판에 추락했다.

잠시 후 도착한 엔터프라이즈의 공격대는 미까와 제독의 함대에 450kg 짜리 대형폭탄을 퍼부어서 중순양함 기누가사를 격침하고, 중순양함 죠까이와 경순양함 이스즈를 대파했다.
공격대의 돈틀레스 및 아벤저 전부와 와일드캣 2대는 헨더슨 비행장으로 향했고, 8대의 와일드캣은 엔터프라이즈로 귀함했다.

 

(아오바 급 중순양함 기누가사. 자세한 설명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6011281 )

 

오전 9시 49분, M. D. Carmody 소위가 다나까 제독의 수송선단을 발견했다.
다나까 제독의 선단은 이날 아침에 에스피리투산토에서 날아온 B-17기 15대와 헨더슨 비행장을 떠난 돈틀레스 18대의 공습을 받았으나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이런 정보는 제16기동부대에 전달되지 않았다.
당시 헨더슨 비행장에서는 적의 정세에 대한 정보를 엔터프라이즈에 전혀 전달하지 않아서, 하디슨 함장은 전투보고서에다가 거기에 대한 불만을 적어 놓았다.

오후 2시 5분에 돈틀레스 8대와 와일드캣 12대로 구성된 공격대가 다나까 수송선단을 노리고, 엔터프라이즈를 떠났다.
이 공격대를 발진시킨 후 엔터프라이즈는 18대의 와일드캣만 보유한 상태로 남쪽으로 변침했다.
나머지 함재기들은 임무를 마치고 모두 헨더슨 비행장에 착륙했다.
엔터프라이즈 공격대는 일본의 수송선 시나노 마루와 애리조나 마루를 격침시키고 헨더슨 비행장으로 향했다.
칵터스 항공대는 엔터프라이즈 공격대의 공습 이전에 2번, 이후에 1번의 공습을 더 가하여 4척의 수송선을 추가로 격침하고 1척을 대파하여 쇼틀랜드로 회항하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다나까 제독의 수송선단 11척 중에서 6척이 격침되고 1척이 대파되어 회항했으며 4척만이 살아남았다.
다나까 제독은 이 시점에서 다시 쇼틀랜드로 회항하려고 했으나 연합함대 사령부의 명령에 의하여 제2함대와 조우하여 그 뒤를 따라 과달카날로 향했다.
곤도 중장의 제2함대는 미국함대와의 해전을 치르고 북상해 온 아베 제독의 부대를 흡수하여 전함 기리시마를 중심으로 재편성한 후 다시 한 번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기 위하여 남하하고 있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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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연합함대는 제17군의 공세를 지원하기 위하여,1942년 10월 10일경부터 트럭 섬에서 함대를 출격시켜 나름대로 열심히 지원하고 있었는데 트럭 섬에 비축된 함정용 연료가 모자라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심지어는 해상급유를 해주고 트럭 섬에 돌아온 유조선이 전함 야마또와 무쓰의 연료를 빼내어서 싣고 나가야 할 정도로 연료 사정이 악화되어 있었다.
그 상황에서 10월 20일에 애당초 21일로 예정되었던 육군의 총공격이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야마모또 제독은 제17군 사령관 햐꾸다께 중장에게 전문을 보내어 지금 당장 비행장을 점령하지 않으면 연합함대는 육군을 지원할 연료가 없을 것이라고 육군의 공격연기에 대하여 강한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런 것을 보면 확실히 진주만 공습 때 태평양함대의 연료탱크를 날려버리지 않은 나구모 중장의 실수가 그리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일본연합함대는 제17군의 공격과 호응하여 곤도 제독의 제2함대로 하여금 과달카날에 돌입, 함포로써 육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제2함대 사령관 곤도 노부다케 제독. 자세한 설명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5537215 )

 

그리고, 나구모 제독의 제3함대로 하여금 제2함대의 공중엄호를 담당하며 만일 미국의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나타나면 이를 격멸하라는 임무를 주어 과달카날 북방해상에 파견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미드웨이 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항공모함 중심의 제3함대에게 헨더슨 비행장에 대한 공격임무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나구모 제독이 최우선 목표인 미국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격멸하는데 온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곤도 제독이 총 지휘권을 쥐고 나구모 제독이 항공지휘권을 쥔 일본함대는 크게 4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우선 공격력의 핵심인 제3함대는 나구모 제독이 직접 지휘하는 제1항공전대와 아베 히로아끼 소장이 지휘하는 전위부대로 나뉘어져 있었다.
제1항공전대는 정규항모 2척(쇼가꾸, 즈이가꾸), 경항모 1척(즈이호), 중순양함 1척(구마노), 구축함 8으로 이루어져 함재기 158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위부대는 전함 2척(히에이, 기리시마), 중순양함 3척(도네, 치꾸마, 스즈야), 경순양함 1척(나가라), 구축함 7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2함대 또한 곤도 제독이 직접 지휘하는 주력부대와 가꾸다 가꾸지 소장이 지휘하는 제2항공전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력부대는 중순양함 4척(아타고, 다까오, 묘꼬, 마야), 경순양함 1척(이스즈),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2항공전대는 정규항모 1척(준요), 구축함 2척으로 이루어져 54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원래 제2항공전대에는 정규항공모함 히요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20일에 엔진고장을 일으켜서 트럭 섬으로 회항했다.
일본함대 전체로 정규항모 3척, 경항모 1척, 전함 2척, 중순양함 8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23척의 세력으로서 함재기의 숫자는212대였다.
일본함대의 배치는 제2함대와 제3함대가 사실상 거의 따로 다녔는데 제3함대의 경우 제1항공전대 전방 180km 지점에 아베 제독의 전위부대가 앞장섰고, 제2함대의 경우도 제2항공전대 전방에 곤도 제독의 주력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제2항공전대는 제2함대 소속이지만 항공세력이라는 점에서 전술적 지휘는 나구모 제독에게서 받았다.  

여기에 맞서는 미국함대는 제16기동부대와 제17기동부대가 연합한 제61기동부대로서 제16기동부대 사령관인 킨케이드 제독이 지휘권을 쥐고 있었다.

 

(제61기동부대 사령관 토마스 킨케이드 제독.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8685432 )


제16기동부대는 정규항모 1척(엔터프라이즈), 고속전함 1척(사우스다코타), 중순양함 1척(포틀랜드), 대공경순양함 1척(산 후앙),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84대의 함재기를 보유했다.
머레이 제독이 지휘하는 제17기동부대는 정규항모 1척(호넷), 중순양함 2척(노댐턴, 펜사콜라), 대공경순양함 2척(샌디에고, 쥬노), 그리고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져 함재기 85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61기동부대 전체로는 정규항모 2척, 고속전함 1척, 중순양함 3척, 대공경순양함 3척, 구축함 14척의 세력으로서 함재기의 숫자는 169대였다.
전반적으로 미국함대가 함대항공력이나 수상함 세력에서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비록 피치 소장의 제63기지비행단이 상당한 수의 항공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 해전에 개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육상기지의 카탈리나 기는 제61기동부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보통 제2차대전 때의 항공모함을 정규항공모함(CV), 경항공모함(CVL), 호위항공모함(CVE)으로 분류하는데 이 분류는 미국해군의 것이라서 다른 나라의 항공모함 분류에는 잘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항공모함들도 이런 식으로 분류하다 보면 특히 중간에 애매하게 걸리는 것이 바로 히요 급이다.
필자는 히요 급을 정규항공모함에 포함시켰다.

미국의 경순양함 중에서 대공경순양함(CLAA)이라고 불리는 종류는 바로 애틀란타 급을 말한다.
애틀란타 급은 크기도 작고(6,700톤) 미해군에서 어뢰를 장비한 유일한 순양함이라는 점에서도 설계사상 자체가 순양함이라기 보다는 대형의 구축함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던 함이었다.
이 급은 또한 대공화력의 강화를 위하여 경순양함에서 일반적으로 채택하던 6인치(152mm) 주포 대신 우수한 대공사격능력을 가진 5인치(127mm)/L38 양용포를 주포로서 채택하여 비교적 작은 함체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강력한 대공능력을 보유한 함이었다.
하지만 경순양함이면서도 구축함과 같은 5인치 주포를 채택함으로써 수상공격력은 확실히 약했기 때문에 후속함인 클리블랜드 급은 애틀란타 급의 2배 가까운 큰 함체에(11,800톤) 6인치 주포와 5인치 부포를 다 같이 탑재하는 방식으로 다시 돌아간다.

핼시 제독의 작전은 제61기동부대에게 남하하는 일본함대를 동쪽에서 덮치기 위하여 과달카날 섬의 북동쪽, 산타크루즈 제도 부근에 잠복해 있다가 일본항공모함들이 나타나면 급습하겠다는 것으로 미드웨이 해전의 재판을 노린 것이었다.
1942년 10월 25일 정오경, 에스피리투산토에서 출발한 카탈리나 기가 제61기동부대로부터 580km 떨어진 곳에서 남동진하고 있는 나구모 제독의 함대를 발견하여 곧 핼시 제독과 킨케이드 제독에게 보고했다.
킨케이드 제독은 곧 그 방향으로 항진한 후 오후 2시 30분에 12대의 돈틀레스를 서쪽과 북쪽 320km에 걸친 수색폭격의 임무를 주어 내보냈고, 한시간 후인 오후 3시 30분에는 적함의 정확한 위치는 모른 채로 돈틀레스 12대, 아벤저 6대, 와일드캣 11대로 이루어진 공격대를 내보냈다.
하지만 나구모 제독은 카탈리나 기에 발견되자마자 침로를 바꾸어 북상해버렸기 때문에 엔터프라이즈의 항공기들은 목표를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들은 야간착함을 하는 도중 돈틀레스 3대와 아벤저 3대가 착함을 포기하고 승무원들이 탈출했는데, 그 과정에서 Frank Miller 중위가 사망했다.
엔터프라이즈에 새로 배치된 제10비행단은 아직까지는 확실히 기량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26일 새벽 2시 30분, 2대의 카탈리나 기가 다시 나구모 제독의 제1항공전대를 발견하고 즈이가꾸를 겨냥하여 4발의 폭탄을 투하했으나 빗나갔다.
나구모 제독은 다시 제1항공전대를 북상시켰으나 아베 제독의 전위부대는 계속 남진했다.
나구모 제독은 북상하면서 적의 항공모함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남동쪽을 향하여 22대의 케이트 뇌격기를 2단 수색법으로 날려 보냈다.
한편 카탈리나 기가 적 항공모함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들은 핼시 제독은 즉시 킨케이드 제독에게 ‘ATTACK-REPEAT-ATTACK’ 이라는 단 3단어로 이루어진 공격명령을 내렸다.
카탈리나 기의 접촉보고는 통신장애로 킨케이드 제독에게는 전달되지 못했다.

10월 26일 오전 6시, 22대의 돈틀레스가 수색폭격의 임무를 띠고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을 떠났다.
오전 6시 30분, Vivian W. Welch 대위와 Bruce A. McGraw 중위의 수색조가 아베 제독의 전위부대를 발견했다.
오전 6시 50분,  James R. Lee와 그의 요기인 William E. Johnson 소위의 수색조가 제61기동부대의 북서쪽 460km 지점에서 나구모 제독의 제1항공전대를 발견했다.
동시에 일본의 케이트 뇌격기들도 제61기동부대를 발견했다.

오전 7시 25분, 제로기 21대, 발 급강하폭격기 21대, 케이트 뇌격기 20대로 이루어진 제1차 공격대가 무라다 소좌의 지휘 하에 미함대를 찾아서 떠났다.
8시 10분에는 발 급강하 폭격기 19대와 제로기 5대로 이루어진 제2차 공격대가, 8시 45분에는 케이트 뇌격기 16대와 제로기 4대로 이루어진 제3차 공격대가 즈이가꾸의 비행갑판을 떠났다.

일본군의 제1차 공격대의 발진이 끝날 무렵, 제1항공전대 상공에 엔터프라이즈를 떠난 수색폭격기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전 7시 40분에 수색폭격기 중에서 Stockton Strong 대위와 그의 요기 Charles Irvine 소위의 수색조가 경항공모함 즈이호의 후방 비행갑판에 2발의 225kg짜리 폭탄을 명중시켜 대파했다.

한편 제61기동부대도 공격대를 내보내기 시작하여 오전 7시 30분에 호넷에서 돈틀레스 15대, 아벤저 6대, 와일드캣 8대로 이루어진 제1차 공격대가, 8시에는 엔터프라이즈에서 돈틀레스 3대, 아벤저 8대, 와일드캣 8대로 이루어진 제2차 공격대가, 8시 15분에는 다시 호넷에서 돈틀레스 9대, 아벤저 9대, 와일드캣 7대로 이루어진 제3차 공격대가 출격했다.

 

(엔터프라이즈 함상에서 발진 준비 중인 제10뇌격비행대대 소속의 아벤저 뇌격기. 아벤저의 앞바퀴 뒷쪽에 보이는 수병이 들고있는 판에는 "PROCEED WITHOUT HORNET" 이라고 씌어져 있는데, 이건 호넷의 공격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기다리지 말고, 즉시 공격하러 가라는 뜻이다. 사진 왼쪽의 수병이 들고 있는 판에는  "JAP 'CV' SPEED 25 AT 0830" 이라고 씌어 있다.)


엔터프라이즈를 떠난 공격대는 100km 쯤 떨어진 지점에서 일본의 공격대와 만나서 교전에 들어갔다.
그들은 4대의 제로기를 격추했으나 아벤저 뇌격기 3대가 격추되었고 아벤저 1대는 피해를 입고 모함으로 돌아갔다.

오전 8시 40분,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가 서북쪽에서 접근하는 일본공격대를 발견했지만, 레이더 조작병들은 이 음영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별해내지 못했다.

무려 17분이 지난 8시 57분에야 그들은 이 음영을 일본군이라고 확신했지만, 그때는 이미 일본공격대가 70km 까지 접근해 있었다.  

오전 9시 6분, 일본공격대는 요격세력을 분산하고, 구름 속에 용이하게 숨을 수 있도록 각기 다른 방위와 고도를 비행하는 작은 그룹들로 갈라졌다.

당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상공에는 38대의 와일드캣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이들의 고도는 6.600m 로 너무 낮았고, 함대에서의거리도 불과 16km 에 지나지 않아서 너무 가까웠다.

따라서, 와일드캣들이 충분히 시간을 두고 요격할 기회도 없이 일본공격대는 바로 함대의 대공포화 사정권 내에 진입해 버렸다.

일단 함대의 대공포화가 작렬하기 시작하면 요격기의 활동도 큰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은 15km 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각각 대공원형진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일본공격대가 제61기동함대 상공에 도달했을 때 엔터프라이즈는 스콜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공격은 호넷에게 집중되었다.
각각 20여대의 발 급강하 폭격기와 케이트 뇌격기가 접근고도 차를 이용하여 동시에 호넷에 육박했다.
순식간에 3발의 폭탄과 2발의 어뢰가 명중했고 2대의 일본기가 호넷에 뛰어들어 자폭했다.
오전 10시 20분, 호넷은 함수쪽 절반의 비행갑판이 불길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모든 기능을 상실했다.
하지만 제17기동부대의 대공포화와 뒤늦게 달려든 와일드캣에 의하여 일본의 공격대도 제로기 5대, 발 급강하 폭격기 17대, 케이트 뇌격기 16대가 격추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공격당하는 호넷. 함수 쪽은 이미 피해를 입어 검은 연기에 싸여 있다. 급강하 폭격 중인 비행기는 사토 시게유키가 조종하는 발 급강하 폭격기. 호넷의 후갑판 상공에 이미 어뢰를 투하하고 이탈 중인 일본의 케이트 뇌격기가 보인다.) 


일본군의 제1차 공격대가 귀환길에 오른 후 일본군의 제2차 정찰기 중 1대가 엔터프라이즈를 발견하고 보고했다.
이 보고를 들은 제2항공전대에서는 오전 10시 45분에 준요에서 발 급강하 폭격기 17대, 제로기 12대로 구성된 제4차 공격대가 엔터프라이즈를 향하여 출격했다.
또한 호넷을 향하던 즈이가꾸의 제2차 공격대가 즉시 방향을 바꾸어 엔터프라이즈를 공격했다.
전함 사우스다코타의 레이더가 90km 밖에서 일본공격대를 탐지했으나, 엔터프라이즈의 CAP 세력은 일본공격대가 함대 상공에 도달할 때까지 일본기의 진로를 가로막는데 실패했다.

일본의 제2차 공격대는 단 한 대도 잃지 않고 제16기동부대 상공에 도달했다.

오전 11시 15분, 제16기동부대의 대공화력이 불을 뿜었다.
엔터프라이즈의 사격통제 레이더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함대 전체의 대공사격통제는 전함 사우스다코타가 담당했다.
성능이 뛰어난 보포스 40mm 대공포와 5인치 양용포 및 20mm 기관포를 보유하고 사격통제 레이더의 관제를 받으면서 동부솔로몬 해전에서 이미 실전테스트를 거친 미국함대의 대공화력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빗발치는 대공화망을 뚫고 돌입한 일본의 발 급강하폭격기들은 엔터프라이즈에 250kg짜리 폭탄을 퍼부어서 2발의 명중탄과 1발의 지근탄을 기록하여1번과 2번 엘리베이터를 고장내고 40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11시 17분에 명중한 첫번째 명중탄은 좌현 선수 끝쪽 비행갑판에 명중하여 천만다행으로 그대로 갑판을 뚫고 지나가서 좌현쪽 뱃머리 앞의 허공에서 폭발했다.
파편이 날려서 좌현 선수쪽 함체에 직경 0.5cm 에서 30cm 에 이르는 160여개의 구멍이 뚫렸다.
불과 몇 초 후에 명중한 2번째 명중탄은450m 높이에서 45도 각도로 투하되었는데 전방 엘리베이터의 후방 좌현 쪽에 명중하여 비행갑판에 직경 35cm 짜리 구멍을 뚫으며 관통하였고 격납고 갑판을 관통하기 전에 꼬리 부분이 쑥 빠져서 2개로 분리되었다.
원추형의 꼬리 부분은 격납고 갑판에 격돌하여 직경 40cm 정도의 구멍을 만들면서 폭발했다.
폭탄의 몸체 부분은 직경 35cm 가량의 구멍을 내면서 격납고 갑판과 그 아래의 제2갑판까지 통과한 직후 폭발했다.
이 폭발로 인하여 제3갑판의 수선실과 피복실의 인원 40명이 사망했다.
11시 19분에 떨어진 지근탄은 우현에서 3m 떨어진 곳의 2.5m 물속에서 폭발했는데 엄청난 수압으로 인하여 리벳이 빠지면서 연료탱크 2개가 찢겨져 나갔고, 주변 철판이 35cm 나 안으로 우그러들었다.
하지만 엔터프라이즈는 여전히 속도와 전투능력을 유지했다.  
일본의 제2차공격대는 대공포화와 와일드캣에 의하여 2대의 제로기와 12대의 발 급강하폭격기를 상실했다.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일본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급회전 중인 엔터프라이즈. 이미 2발의 폭탄을 맞아서 함체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오전 11시 44분, 16대의 케이트 뇌격기와 5대의 제로기로 이루어진 제3차 공격대가 엔터프라이즈를 덮쳤다.
이번에는 Stanley 'Swede' Vejtasa 대위를 비롯한 엔터프라이즈의 CAP 세력이 제대로 요격에 성공하여 9대의 케이트 뇌격기를 격추했다.
살아남은 케이트 뇌격기들이 어뢰를 발사하여 구축함 Smith의 함수에 명중했고 엔터프라이즈에게도 뇌격을 가했으나, 하디슨 함장은 교묘한 조함으로 이들을 전부 회피하는데 성공했다.
일본의 제3차 공격대는 10대의 케이트 뇌격기를 상실했다.

한편 호넷을 떠난 미해군의 제1차 공격대는 오전 9시 18분에 일본제1항공함대를 발견했다.
9시 30분, 이미 상처를 입고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던 경항모 즈이호를 무시하고 나구모 제독의 기함 쇼가꾸에 달려든 돈틀레스들은 제로기의 방어와 대공포화로 폭탄을 투하하기도 전에 4대를 잃었으나  나머지 11대는 급강하폭격을 실시하여 그 중의 3발을 명중시켰다.
450kg 짜리 대형폭탄 3발에 직격당한 쇼가꾸는 곧 검은 연기에 휩싸이며 모든 기능을 상실했으나 미드웨이 해전과는 달리 함내에 유폭할만한 비행기도 없고, 연료파이프도 완전히 비어 있었으므로 침몰만은 면했다.
11시 40분, 나구모 제독은 상처입은 쇼가꾸를 떠나 구축함 아라시로 사령기를 옮겼는데 이때부터 항공작전의 지휘권이 준요 중심의 제2항공전대 사령관인 가꾸다 가꾸지 소장에게 넘어갔다.

엔터프라이즈를 떠난 미해군의 제2차 공격대는 중간에서 일본군 공격대와 조우하는 바람에 와일드캣의 연료가 모자라서 제1항공함대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만난 아베제독의 전위부대를 공격했으나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
호넷을 떠난 미해군의 제3차 공격대도 아베 제독의 전위부대를 만나자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폭격을 가하여 중순양함 치꾸마에 450kg 짜리 대형폭탄 3개를 명중시켜 대파했으나 덕분에 사경을 헤매고 있던 쇼가꾸를 격침시킬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2시 20분, 준요를 떠난 일본군의 제4차 공격대가 엔터프라이즈의 상공에 도달했다.
발 급강하 폭격기 한대가 엔터프라이즈의 우현쪽에 지근탄을 1발 기록했는데 함체에서 2.5m 떨어진 5m 깊이의 물속에서 폭발한 이 폭탄으로 인하여 함체가 70cm 정도 안으로 찌그러졌다.
이들은 또한 전함 사우스다코타의 1번 포탑에 1발을 명중시켜, 1명의 전사자를 기록했고, 대공경순양함 산 후앙에도 1 발의 명중탄이 떨어져 갑판을 뚫고 함저까지 도달했으나 천만다행으로 불발탄이었다.  
일본군의 제4차 공격대도 제16기동부대의 대공화기에 심한 피해를 입어 11대의 발 급강하폭격기가 격추되었다.

3차에 걸친 일본군의 공습을 적은 피해로 무난히 막아낸 엔터프라이즈는 오후 12시 35분부터 제16기동부대 상공에 떠있던 57대에 이르는 자신과 호넷의 함재기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착륙한 함재기 수가 47대를 넘어가자 이미 함내에 수용되어 있던 38대와 더하여 엔터프라이즈의  적정 대수인 85대를 넘었고 곧 함재기를 수용할 공간이 부족하다는 경고가 전해졌으나, 착함유도장교(Landing Signal Officer, LSO)인 Robin Lindsey 대위는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착함을 유도했다.
피탄시의 충격으로 제1번과 제2번 엘리베이터가 작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엔터프라이즈의 전방비행갑판에서는 계속하여 함재기들이 착함하고 후방비행갑판에서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항공기들을 격납고에 내리거나 항공기 사이를 최대한 밀착하여 이리저리 꼭꼭 끼워맞추어 배열하여 전방비행갑판에 최대한의 착륙공간을 확보하려는 사투가 벌어졌다.
그리하여 마지막 10대의 아벤저들은 4개의 어레스팅 기어 중 2개만 사용하여 무사히 착함을 마쳤다.
이제 95대의 함재기들을 만재한 엔터프라이즈는 적의 공격에 대단히 취약한 상태가 되었고, 이 상태로는 더 이상의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킨케이드 소장은 엔터프라이즈에게 남쪽으로 후퇴하여 전투지역을 이탈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전투가 끝난 후 엔터프라이즈를 위시한 제16기동부대의 함정들이 진형을 갖추어 항진하고 있다. 전함 사우스다코타에서 찍은 사진)

반대로 일본제2함대의 곤도 제독과 전위부대의 아베 제독은 자신들의 우세한 수상함 세력을 이용하여 야전을 벌일 생각으로 전속력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한편 제17기동부대는 호넷을 살리기 위하여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었다.
오전 10시20분에 3발의 폭탄과 2발의 어뢰, 그리고 2대의 자폭기에 얻어맞은 호넷은 치명적인 화재가 발생하면서 모든 기능을 상실했으나 손상관리반의 기민한 활동으로 오전 11시에는 화재를 진압했다.

이후 제16기동부대가 일본공격대와 싸우는 동안 11시 30분부터 중순양함 노댐턴의 예인로프를 이용하여 4노트의 속력으로 예인을 시작했으나 10분 후에 예인로프가 끊어져 버렸다.
할 수 없이 더 굵은 호넷의 예인로프를 사용하여 오후 2시 50분경부터 예인을 시작했으나 이미 호넷을 살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일본함대의 항공작전권을 인수받을 당시 이미 1척의 미국항공모함이 큰 상처를 입었으나, 아직 격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가꾸다 제독은 남아있던 준요의 함재기들을 닥닥 긁어서 오후 1시에 7대의 케이트 뇌격기와 8대의 제로기로 구성된 제5차 공격대를 내보내어 호넷을 끝장내려고 했다.
미일 양측으로부터 가장 공격적인 성향의 항공지휘관으로 꼽히는 가꾸다 제독은 산호해 해전의 요크타운처럼 치명상을 입은 호넷이 미해군의 놀라운 손상관리능력에 힘입어 다시 살아나는 것을 허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후 1시 15분에는 제1항공전대에서 유일하게 피해를 모면한 항모 즈이가꾸에서 발 급강하폭격기 2대, 케이트 뇌격기 6대, 제로기 5대로 이루어진 제6차 공격대가 이륙했다.
이때 케이트 뇌격기는 어뢰 대신 800kg 짜리 대형폭탄을 장비했다.
오후 3시 33분에 발 급강하 폭격기 4대, 제로기 6대로 이루어진 제7차 공격대가 마지막으로 준요의 비행갑판을 떠났다.

오후 3시 20분, 일본군의 제5차 공격대가 느릿느릿 예인 중인 호넷을 발견했다.
놀란 노댐턴이 급히 예인로프를 끊고 대공사격을 시작했고, 우현 쪽으로 접근하는 케이트 뇌격기들을 향해 호넷 우현의 20mm 기총들이 불을 뿜었다.
호넷은 아직 전기가 충분히 작동되지 않아서 오직 인력으로 사격이 가능한 20mm 기총만이 대공사격을 실시할 수 있었다.
이 대공사격으로 2대의 케이트 뇌격기가 격추되었고, 2대는 노댐턴을 노리고 어뢰를 발사했으나 빗나갔다.
나머지 3대의 케이트 뇌격기가 호넷을 노려 어뢰를 발사했는데 이중 1발이 오전에 어뢰에 피격되었던 부분 바로 근처를 직격, 기관실을 침수시킴으로써 사실상 호넷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잠시 후에는 즈이가꾸에서 날아온 제6차 공격대가 내습하여 800kg 짜리 폭탄 한 발을 명중시켰다.
준요를 출발한 제7차 공격대가 오후 4시 40분에 호넷을 공격하여 250kg 짜리 폭탄 1발을 추가로 명중시키자 호넷의 경사도는 무려 18도에 달했다.
이 시점에서 함장 Mason 대령은 호넷에 퇴함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에게 호넷이 넘어가지 않도록 격침하라는 핼시 제독의 명령에 따라 구축함들이 나아가서 어뢰와 5인치 포탄을 퍼부었으나 격침에 실패했다.

이때 강력한 일본의 수상함정들이 남하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제17기동부대는 호넷을 남겨놓고 서둘러 후퇴했다.
오후 10시 30분에 아베 제독의 전위부대가 모든 기능을 잃고 표류하던 호넷을 발견했는데 파손이 너무 심하여 예인이 불가능하자 구축함에서 어뢰를 쏘아 27일 새벽 1시 35분에 격침했다.
27일 오후, 곤도 제독이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변침, 북상함으로써 산타크루즈 해전은 끝났다.

산타크루즈 해전은 전과면에서 일본해군의 판정승이었다.
일본해군은 정규항모 호넷과 구축함 포터를 격침시키고 엔터프라이즈를 중파, 전함 사우스다코타, 대공경순양함 산 후앙, 그리고 구축함 스미스를 소파시킨 반면 자신들은 격침된 함정은 없고 정규항모 쇼가꾸, 경항모 즈이호, 중순양함 치꾸마가 대파되었고 구축함 4척이 중파 또는 소파되었다.
다만 함재기 손실은 미해군이 74대인데 비하여 92대로서 일본해군의 피해가 더 컸고 항공기 승무원의 전사자도 미해군이 33명인데 비하여 일본해군은 70명으로 2배 이상 많았다.

일본함대는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미드웨이 해전의 전훈을 잘 살려서 비교적 뛰어난 전투를 했다.
우선 미드웨이 해전 때와는 달리 항공모함 중심의 제1. 제2항공전대에게 헨더슨 비행장 폭격임무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관심을 미국항공모함 기동부대의 격멸에만 집중시킬 수 있도록 작전단계에서부터 배려했다.

나구모 제독 또한 일본함대 주변에 미국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 하에 충분한 수의 정찰기로 2단 수색법을 실시하여 적시에 제61기동부대를 발견하고 공격할 수 있었다.
또한 항공모함 함대의 전방에 유력한 수상함정들로 방어막을 펴는 진형 역시 호넷의 제3차 공격대를 유인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나름대로 그 유용성을 증명했다.
여기에 재미를 붙인 일본함대는 1944년의 필리핀 해전 때에도 정규항공모함들의 전방에 경항모를 중심으로 한 3개의 함대를 전진배치하는 진형을 채택했으나 상대방인 스프루언스 제독이 일본함대를 공격할 생각은 안하고 오로지 요격전만 실시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하지만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조종사의 기량이 저하되고 미함대 대공포화의 위력이 증대됨에 따라서 항공기 손실은 미국보다 더 많았고 항공기 승무원의 손실도 미국의 2배 이상이었다.
이런 조종사의 손실을 견디다 못한 일본해군은 이후 1944년의 필리핀 해전까지 함대항공전을 회피하게 된다.

엔터프라이즈는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함정승무원 중 장교 3명, 사병 40명이 전사했고, 12대의 와일드캣, 10대의 돈틀레스, 7대의 아벤저를 상실했으며 16명의 항공기승무원이 전사했다.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호넷이 격침되고 엔터프라이즈마저 누메아에서 긴급수리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자 비록 일시적이긴 하지만 미국은 남태평양에서(아니 태평양을 통틀어) 사용가능한 항공모함이 단 한 척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일본 또한 쇼가꾸와 즈이호가 대파되고 즈이가꾸도 항공대를 재건하러 떠나버리자 히요가 엔진고장을 수리할 때까지 역시 남태평양에서 사용가능한 항공모함이 준요 한 척밖에 없었다.
과달카날 전투는 이렇듯 미일 양측에게 지상군 병력이든 항공기든 함정이든 가릴 것 없이 엄청난 소모전을 강요하고 있었다.

1942년 10월 30일, 엔터프라이즈는 긴급수리를 위하여 누메아에 입항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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