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은 처절한 전투로 점철되었던 1942년과 달리 태평양함대에게는 전반적으로 평온한 시기였다.
2월 초에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 후 11월 말에 길버트 제도 상륙작전을 시작하기 전까지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 실시한 주요 작전이라고는 5월 11일의 애투 섬 상륙작전과 8월 15일의 키스카 섬 상륙작전 정도였다.
그나마 키스카 섬 상륙작전은 일본군들이 몰래 해상철수를 한 뒤였기 때문에 전투도 치르지 않고 탈환했다.
물론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는 수레바퀴 작전에 돌입하여 과달카날 못지않은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지만, 원래 수레바퀴 작전 자체가 남서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의 지휘 하에 실시되는 작전이었으니만큼 진주만의 태평양함대 사령부는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핼시 제독에게 함정과 보급품만 지원해 주었을 뿐 작전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태평양함대 사령부는 비교적 평온한 이 기간을 이용하여 함정들의 수리와 개조를 실시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했다.
엔터프라이즈도 이런 분위기 하에서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자 1943년 4월부터 진주만에서 오버홀을 실시했고 이후 10주간 하와이 근해에서 신규 함재기 조종사들의 훈련을 실시한 다음 7월 20일부터 11월 1일까지 미본토 서해안의 브레머톤 조선소에서 대규모의 개조를 실시하고 11월 6일에 진주만으로 돌아왔다.

 

(워싱턴주 브레머톤의 퓨젯 사운드 해군공창에서 1943년 10월 21일에 찍은 엔터프라이즈의 모습. 개장 작업이 거의 막바지에 들어간 모습이다.)


또한 1943년은 드디어 공업생산력이 제 궤도에 오른 미본토에서부터 진주만의 태평양함대로 엄청난 양의 함정, 항공기, 병력, 보급품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시기였다.
따라서 태평양함대 사령부는 엄청나게 증강된 이러한 전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태평양함대의 조직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하지만 1943년이 밝았을 때에는 아직도 과달카날 전투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1942년 12월이 되자 미군의 공격에 더하여 굶주림과 질병으로 인하여 과달카날에 있는 일본군의 병력은 11월의 30,000 명에서 25,000 명으로 줄어들었다.
반면 미지상군의 병력은 1월 초에 육군제25사단과 해병제2사단의 주력부대가 상륙함에 따라 3개 사단 48,000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헨더슨 비행장의 원래 활주로도 증설되었고 전투기용 보조 활주로도 확장 정비되어 해군과 해병대 전용으로 쓰이게 되었다.
또한 콜리 지역에 제2비행장을 건설하여 카니 비행장이라고 불렀고, 호니아라 근처의 해안 가까이에 쿠쿰 비행장을 완성하여 육군과 뉴질랜드 공군 전용으로 사용함으로써 칵터스 항공대는 실로 4개의 활주로를 운용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1942년 11월부터 뉴조지아 섬의 문다 지역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12월 말에 완성했다.

1월 들어 전력이 더욱 강화된 과달카날의 미지상군은 공격작전에 가속도를 붙여 육군제25사단은 12월 17일부터 공격하고 있던 오스텐 산 정상의 기푸 진지에 최종 공세를 가하여 1월 23일에 점령했다.
이 기푸 전투에서 일본군 518명과 미군 64명이 전사했다.

육군제25사단이 오스텐 산의 일본군들을 소탕하는 동안 해병제2사단과 아메리칼 사단은 마타니코 강의 서쪽으로 전진을 개시하여 1월 중순에는 일본군 사령부가 있는 코쿰보나를 사정거리에 넣게 되었다.
당시 패치 소장은 해병제2사단과 미육군제25사단 및 아메리칼 사단의 3개 사단으로 새로이 제14군을 형성하고, 해병대와 육군의 단위부대를 서로 섞어서 혼성사단(CAM, Composite Army-Marine)을 형성하여 일본군 주력을 코쿰보나에 몰아넣은 채로 전멸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코쿰보나의 일본군이 포위망을 피해 해안선을 따라서 섬을 반시계 방향으로 삥 돌아서 도주하지 못하도록 아메리칼 사단 소속 제147연대의 일부 병력을 상륙주정으로 섬의 남서쪽인 뷰포트 만에 상륙시켰고, 추격하기 곤란한 정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정글로 통하는 통로를 미리 차단한 후 1월 16일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1월 23일에 미육군 제25사단 소속 제27연대가 코쿰보나를 점령했고 이어서 1월 31일까지 일본군 주력을 과달카날 섬의 서북쪽 끝으로 몰아붙였다.
1월 10일부터 1월 31일까지의 공격작전을 통하여 제14군단은 약 4,000 명의 일본군을 사살했고. 자신들은 189 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이제 과달카날의 일본군은 해상을 통한 철수가 실시되지 않는 한 전멸을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처했다.
 
한편, 1942년 12월 26일에 대본영이 드디어 과달카날 철수건의를 받아들이자 일본연합함대와 제8방면군 사령부는 즉각 과달카날 철수를 위한 세부계획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1월 9일에 완성했다.
‘케호 작전’ 이라고 불린 이 철수계획에 따르면 과달카날의 일본군은 2-3회에 걸쳐서 야간에 구축함을 이용하여 철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철수계획을 기만하고 일본군 주력을 공격하고 있는 미군의 진격을 둔화시키기 위하여 야노 게이지 중좌가 이끄는 600 명의 병력을 1월 14일에 과달카날에 새로이 상륙시켜 미군에게 공세를 가하고, 이 지역에서 사용가능한 모든 항공기 세력을 집결하여 1월 28일부터 일시적으로 과달카날의 제공권을 장악하기로 했다.
또한 연합함대 소속 전함들과 항공모함들을 포함한 강력한 함대가 피같은 기름을 소모해 가면서 트럭 섬에서 남하하여 과달카날의 북쪽해상에서 얼쩡거렸다.
최초의 해상철수는 1월 31일 새벽으로 예정되었다.
일본군은 이 철수작전을 실시하면서 보안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과달카날에 있던 제17군 사령관 햐꾸다께 중장에게 이 계획을 알린 것도 1월 17일이 되어서였고, 그나마 보안을 위하여 부하들에게는 구축함에 승선하여 과달카날 섬의 반대쪽에 상륙하여 양쪽에서 미군을 협격할 것이라고 속였다.

때문에 과달카날의 일본군들은 최상급 지휘관과 참모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구축함에 승선하는 순간까지도 자신들이 새로운 공세를 위하여 재배치되는 줄 알고 있었다.
 
대규모 구축함 수송의 재개, 갑작스런 항공활동의 증가, 전함과 항공모함을 포함한 대규모 함대의 남하 등 1월 하순에 나타난 일본 측의 불길한 징조는 곧 미해군의 암호해독반에 포착되었다.
게다가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새로운 일본군 부대가 나타나서 무기력하게 후퇴를 거듭하던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딴판으로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여기에 의존하여 미군의 공세에 거세게 저항하는 사태까지 겹치자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핼시 제독은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이 일본군이 새로운 대규모 공세를 취하려는 전조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핼시 제독은 순양함 4척과 구축함 4척을 보유한 제67기동부대를 고속전함 3척(노스캐롤라이나, 워싱턴, 인디애나)과 구축함 4척을 보유한 리 제독의 제64기동부대에 흡수시켜 제64기동부대를 강화했다.
또한 1월 29일,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에게 산호해로 나아가 동료 항공모함 새러토가와 만나서 강력한 항공모함기동부대를 형성한 후 고속전함 중심의 막강한 수상함대인 제64기동부대와 함께 예상되는 일본연합함대의 대규모 공격에 대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또한 핼시 제독은 과달카날의 지상군을 강화하기 위하여 병력과 물자를 가득 실은 4척의 수송선과 4척의 구축함으로 형성된 수송선단(제62.8기동부대, TF62.8)을 과달카날로 보내고, 또한 호위항공모함 2척(스와니, 체난고), 중순양함 3척(위치타, 시카고, 루이스빌), 경순양함 3척(클리블랜드, 몽펠리어, 컬럼비아),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진 기펜 제독의 제18기동부대에게 이 수송선단에 앞서 과달카날 해역에 나아가 수송선단의 항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흔히 'Baby Carrier' 또는 'Jeep Carrier' 라고 불리는 미국의 호위항공모함(CVE)은 원래 대서양 전투에서의 에어 갭을 메꾸기 위하여 수송선(C-3급)인 Mormacmail 과 Mormacland 의 선체를 개조하여 만든 것이 시초이다.
이중 몰막메일은 개조를 거쳐 1941년 6월 2일에 CVE-1 Long Island 로 취역하였고, 몰막랜드는 호위항공모함으로 개조하여 영국에 공여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 호위항공모함들을 대량으로 건조하여 5개 급에 걸쳐 총 109척을 취역시켰다.(Long Island 급 2척, Bogue 급 44척, Sangamon 급 4척, Casablanca 급 50척, Commencement Bay 급 9척)
다만 이중에 최종형인 커멘스먼트 베이 급의 9척 중에서 6척은 너무 늦게 취역하여 전쟁 중에 실제로 임무에 투입된 호위항공모함은 이 6척을 제외한 총 103척이다.
미국은 호위항공모함 중 몰막랜드를 개조한 1척과 보그 급 32척을 영국에 공여하였기 때문에 미해군이 운용한 호위항공모함은 총 70척이며 이중에서 50척이 카사블랑카 급이었기 때문에 미해군의 호위항공모함이라면 대략 카사블랑카 급이다.
다만 렌넬 섬 해전 당시 제18기동부대에 포함된 호위항공모함들인 CVE-27 Suwanee, CVE-28 Chenango 는 생가몬 급이다.

호위항공모함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롱아일랜드 급과 그 뒤를 이은 보그 급은 수송선의 선체를 개조하여 만들어졌고, 생가몬 급은 보다 대형의 함대급유선을 개조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숫자면에서 보그 급과 함께 호위항공모함의 주력을 이루는 카사블랑카 급과 호위항공모함의 결정판이라고 할 커멘스먼트 베이 급은 처음부터 호위항공모함으로 건조된 것이다.
이 중 롱 아일랜드 급, 보그 급과 생가몬 급은 수송선단 호위용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카사블랑카 급은 항공기 수송을 주임무로, 선단호위를 보조임무로 상정하여 설계된 것이며, 생가몬 급의 확대개량형인 최종판 커멘스먼트 베이 급은 처음부터 전투임무를 상정하여 설계되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에서는 호위항공모함들이 상륙작전 시의 근접항공지원(CAS, Close Air Support)을 제공하는 데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즉 일단 상륙이 이루어진 후 상륙군이 필요로 하는 근접항공지원을 호위항공모함들이 전담함으로써 고속 항공모함들이 좁은 상륙지역 부근의 해역을 빨리 벗어나서 그 특유의 기동성을 살릴 수 있었다.
이러한 호위항공모함에 의한 근접항공지원은 1943년 5월11일의 애투 섬 상륙작전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어 이 작전에 같이 참가했던 구식전함 3척의 포격지원과 함께 해군과 해병대, 육군 모두로부터 아주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사실 호위항공모함(CVE)과 경항공모함(CVL)인 Independence 급의 크기나 함재기 운용능력은 그리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는다.(미국항공모함 중 경항공모함으로 분류되는 것은 경순양함 Cleveland 급을 개조한 인디펜던스 급 9척뿐이다.)
즉 11,500 톤의 배수량에 Hellcat 25대와 Avenger 9대를 운용하는 인디펜던스 급에 비하여 호위항공모함의 최종형인 커멘스먼트 베이 급은 11,000 톤의 배수량에 33대의 함재기를 운용할 수 있다.
경항공모함과 호위항공모함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속력이다.
인디펜던스 급이 32노트의 고속을 낼 수 있는데 비하여 호위항공모함 중 가장 고속인 카사블랑카 급의 속력은 20노트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디펜던스 급이 Essex 급으로 대표되는 정규항공모함들과 함께 고속항모기동부대를 형성하여 작전하는데 비하여 호위항공모함은 주로 자신과 같이 속력이 느린 호위구축함(DE)의 호위를 받으면서 역시 속력이 느린 구식전함들과 함께 상륙작전시 교두보 근해에서 작전한다.  

이렇듯 각자의 성격이 뚜렷하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국 항공모함들을 정규항공모함(CV), 경항공모함(CVL), 호위항공모함(CVE) 으로 나누는 일은 아주 단순한 작업이며, 여기에는 어떤 이견도 없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된다.
즉 ‘크고 빠른 정규항공모함, 작고 빠른 경항공모함, 작고 느린 호위항공모함’ 이란 공식으로 아주 간단하게 분류할 수 있다.
이중에서 속력이 빠른 정규항공모함과 경항공모함들이 고속항모기동부대를 형성한다.
하지만 같은 잣대를 가지고 다른 나라들, 특히 일본의 항공모함들을 분류하려면 상당히 애매한 경우가 생긴다.

과달카날로 향하는 수송선단의 전방에서 항로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제18기동부대의 행동과 일본군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과달카날에서 공격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던 일본의 항공세력이 맞부딪쳐서 발생한 전투가 바로 과달카날 전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해전인 렌넬 섬 해전이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