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1월 16일부터 12월 4일까지 엔터프라이즈는 과달카날 해전에 참가하느라고 미진했던 부분의 수리를 마치기 위하여 다시 누메아의 해군공창에 들어갔다.

한편 제해권과 제공권이 없는 상태에서 과달카날의 일본군에게 보급을 해주기 위하여 일본해군은 드럼통에 보급물자를 넣고 밀봉한 후 이 드럼통들을 그물로 묶어서 구축함에 싣고 고속성능을 이용하여 야간에 과달카날에 도착하여 해안에 던져주고 날이 밝기 전에 철수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1942년 11월 30일, 이 드럼통 수송을 처음 시도하던 다나까 제독 휘하의 일본구축함들이 이를 가로막으려는 순양함 중심의 강력한 수상함대인 Carleton H. Wright 소장의 제67기동부대와 격돌했다.

 

(다나까 라이조 제독.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5539758 )

타사파롱가 해전이라고 불린 이 해전에서 다나까 제독이 인솔하던 일본구축함 8척이 중순양함 4척(노댐턴, 펜사콜라, 뉴올리언즈, 미니애폴리스), 경순양함 1척(호놀룰루), 구축함 6척으로 구성된 라이트 소장의 제67기동부대와 교전했다.

일본구축함들은 미함대의 압도적인 화력 아래에서 순양함열에 접근한 다음 총 47발의 산소어뢰를 발사하여 그 중 6발을 4척의 중순양함에게 명중시켰다.

이 결과 미함대는 중순양함 노댐턴이 격침되고 나머지 3척의 중순양함들은 9개월에서 1년 이상의 수리를 요할 정도로 심한 피해를 입었는데 반하여, 일본함대는 구축함 1척이 격침당했을 뿐이었다.

 

원래 제67기동부대는 엔터프라이즈가 수리차 누메아의 해군공창에 들어감으로써 지휘할 함대가 없어져 버린 킨케이드 소장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11월 27일에 신형 SG 레이더를 탑재한 구축함을 전진배치하여 순양함에서 10,000m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적을 먼저 포착한 후 레이더 조준에 의한 장거리 선제포격으로 적을 제압한다는 야간전투계획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 직후에 니미츠 제독이 킨케이드 제독을 진주만으로 불렀다.
그리하여 킨케이드 제독의 부하이자 제6순양전단장이었던 라이트 제독이 제67기동부대를 이끌고 킨케이드 제독의 작전계획에 따라 전투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라이트 제독은 전투현장에서 순양함의 발포시각을 너무 늦추는 실수를 범하여 일본구축함들에게 단종진으로 천천히 항진하면서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던 제67기동부대의 순양함열에 충분히 접근하여 산소어뢰를 발사할 시간여유를 주고 말았다.

그 결과 제67기동부대는 현저하게 열세한 세력의 일본함대에게 형편없이 얻어터지게 되었고 미해군 수뇌부는 타사파롱가 해전에서 보여준 일본함대의 막강한 야전능력에 경악했다.

그리하여, 이후로는 수상함대를 내보내어 일본의 구축함을 이용한 쥐수송을 저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일본군이 과달카날에서 무사하게 철수하게 되는 큰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한편 이때 진주만에 불려간 킨케이드 소장은 테오발드 소장의 뒤를 이어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 된다.
당시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었던 테오발드 제독은 상당히 명석한 인물이었으나, 성격이 너무 급하여 그 지역의 육군 사령관들 사이에서 ‘역사상 가장 화를 잘내는 제독’ 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육군과의 사이가 나빴다.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 육군과 그렇게 사이가 나빠서야 1943년 3월로 예정된 애투와 키스카 섬 상륙작전이 제대로 실시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니미츠 제독은 테오발드 제독을 보스턴의 제1해군구 사령관으로 보냈다.

그리고, 후임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으로 당시 태평양함대 내의 소장급 제독 중에서 정치적 수완이 가장 뛰어나고, 따라서 육군과의 사이도 가장 원만하던 킨케이드 제독을 임명한 것이었다.
킨케이드 제독은 니미츠 제독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북태평양 지역에서 육군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데 성공하고, 애투와 키스카 섬 상륙작전도 성공적으로 실시한다.

1943년 8월 15일에 실시된 키스카 섬 상륙작전 이후에 중장으로 승진한 그는 더 이상 중요한 작전이 없는 상태로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라는 사실상의 코끼리 무덤에서 중장 계급으로 종전을 맞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태평양함대에는 이미 기라성같은 경쟁자들이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고 있어서 그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하지만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마당발이었던 그는 곧 맥아더 장군의 남서태평양해역군에서 그만의 블루오션을 발견했다.
당시 태평양함대에는 맥아더 장군을 명예욕이 강하고 가식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드라마틱한 언어를 즐겨 구사하는 밥맛없는 3류 연극배우 쯤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재능있고 중량감이 있는 제독들은 누구도 그의 지휘 하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비록 당시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었던 핼시 제독이 수레바퀴 작전에서 맥아더 장군과 훌륭하게 호흡을 맞추고는 있었지만, 니미츠 제독에 이어 명실공히 태평양함대의 제2인자였던 핼시 제독은 맥아더 장군 휘하로 들어가 항공모함은 커녕 구식전함 1척도 없는 제7함대 사령관을 맡기에는 너무나 거물이었다.
따라서 맥아더 장군으로서는 휘하의 제7함대를 맡아줄 재능있고 중량감있는 해군제독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고, 이러한 맥아더의 처지는 어떻게든 한직인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 자리를 떠나 새로운 기회를 잡으려던 킨케이드 중장의 이해관계와 딱 맞아 떨어졌다.
킨케이드 중장은 충분히 재능있는 제독이었으며,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여 해전을 치른 바도 있는 중량감있는 제독이었고, 또한 애투와 키스카 섬 상륙이라는 육군과의 공동상륙작전도 치뤄 본 경험이 있었다.
그가 비록 항공관계자가 아닌 순양전단장 출신이라서 태평양함대 내에서 경쟁하기에는 불리한 여건이었지만, 항공모함이 없는 제7함대 사령관으로서는 오히려 적격이었다.

그리하여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자신의 제7함대 사령관으로 킨케이드 제독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1943년 11월 하순에 킨케이드 중장은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 자리를 플레처 중장에게 물려주고 당시 맥아더 해군으로 불리던 소규모의 제7함대 사령관직을 맡게 된다.
이후 그는 명실공히 남서태평양해역군의 해군을 책임지는 최고 실력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고, 이걸 기반으로 결국 대장까지 승진한다.
당시 태평양함대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가장 출세한 편에 속하는 제5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이나 제58기동부대 사령관 미처 제독 등도 결국 대장까지 승진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남들이 다 꺼리는 제7함대 사령관 자리를 차지하여 대장까지 승진한 킨케이드 제독의 도박은 멋지게 성공한 셈이다.

12월 4일, 엔터프라이즈는 수리를 마치고 Frederic C. Sherman 제독의 지휘 하에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5일에는 지난 8월 31일에 일본잠수함의 어뢰에 맞아 수리에 들어갔던 동료 항공모함 새러토가가 수리를 마치고 누메아에 도착했다.

과달카날의 미군세력이 증강됨에 따라 미지상군은 11월 중순부터 헨더슨 비행장을 중심으로 방어에 치중하던 이제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공세로 이전했다.
우선 11월 11일에 제1해병사단의 기습대대가 Evans Carlson 중령의 지휘 하에 헨더슨 비행장에서 동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아올라에 상륙하여 서진하면서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쇼지 대좌 지휘 하의 일본군 2,000 여명을 공격하여 500 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를 헨더슨 비행장 남쪽의 오스텐 산 쪽으로 쫓아내었다.
12월 3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로 기습대대는 16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한편 제2해병사단 제8연대의 도착으로 과달카날의 미군 병력이 39,000 명을 넘어가게 되자 과달카날 상륙 이후 쉬지않고 계속 전투를 해온 제1해병사단은 11월 29일에  휴식과 재정비를 위하여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에 따라 제1해병사단장 밴디그리프트 소장은 12월 9일에 미육군 아메리칼 사단의 Alexander Patch 소장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과달카날 섬을 떠났다.
제1해병사단은 과달카날 상륙 이래 어렵고 힘든 시기를 헤쳐나오면서 681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제1해병사단은 이때의 공로로 미국사단 중에서는 최초로 사단마크를 군복에 착용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사단장 밴디그리프트 소장은 이후로도 계속 승승장구하여 1943년에 중장으로서 해병대 총사령관이 되었고, 1945년 4월 4일에는 해병대 최초의 4성 장군이 된다.

 

(해병제1사단의 사단 마크. 주변에 있는 별들은 남십자성을 상징한다.)

 

12월17일, 미육군 제25사단이 헨더슨 비행장의 남쪽에 있는 오스텐 산의 일본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제2해병사단과 아메리칼 사단은 마타니코 강을 건너 서진하면서 일본군 주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육군은 햐꾸다께 중장의 제17군 사령부가 과달카날에 상륙한 후 그곳에서  발이 묶여 버리자 11월 초에 뉴기니아 작전을 지휘하기 위하여 제18군을 창설하여 아다찌 중장이 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제17군과 제18군을 지휘하기 위하여 새로 제8방면군 사령부를 만들어서 이마무라 히도시 중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일본연합함대는 타사파롱가 해전으로 발전했던 11월 30일 외에도 12월 3일, 7일, 11일에 계속하여 구축함으로 드럼통 수송을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드럼통 투하해역에 조명탄을 터뜨리며 공격해오는 미국의 수상비행기들과 어뢰정들 때문에 제대로 드럼통을 전달하는데 실패했다.
게다가 12월 11일에는 드럼통을 내려놓고 막 출발하려던 구축함 데루즈끼가 미국어뢰정이 발사한 어뢰에 맞아서 격침되자, 야마모또 연합함대 사령관은 다음날인 12일에 구축함을 이용한 드럼통 수송을 중단했다.
이후로는 일본군에 대한 보급품 수송은 잠수함에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이제 과달카날의 일본군들은 미군에게 죽기 전에 굶어죽을 처지가 되었다.
과달카날에 있던 일본군의 처지가 이렇게까지 막바지로 몰리게 되자 드디어 대본영도 고집을 꺾었다.

1942년 12월 26일에 철수의견이 받아들여졌고, 1942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의 어전회의에서 정식으로 과달카날 철수가 결정되었다.

엔터프라이즈는 1942년의 마지막 한 달을 과달카날 근해에서 항공엄호를 제공하며 지냈다.

1942년의 1년 동안 엔터프라이즈는 마셜 제도 공격, 웨이크 공격, 마르쿠스 공격, 둘리틀의 도꾜 폭격,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상륙, 동부솔로몬 해전, 산타크루즈 해전, 과달카날 해전 등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여 함정승무원 110명, 항공기 승무원 120명 등 총 230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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