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0월 30일에 엔터프라이즈가 누메아에 입항하자 수리함 베스탈이 옆에 붙어서 수리를 시작했고 미해군 건설대대(Construction Battalion = CB = SeaBee's)가 승함하여 엔터프라이즈의 수리를 지원했다.
지상의 도로나 활주로를 건설하고 보수하는 일을 주로 하는 SeaBee's 가 함정에 승함하여 수리를 지원하는 일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엔터프라이즈의 수리를 빨리 끝낼 필요성이 있었다는 뜻이며 실제로 엔터프라이즈는 누메아에 입항한지 12일 만에 다시 바다로 나가야만 했다.     

산타크루즈 해전이 벌어지기 직전인 1942년 10월 24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통합참모본부에 메모를 보내어 과달카날에 대하여 확실하게 지원해 줄 것을 촉구했다.
당시 연합군은 세계 곳곳에서 중대한 시점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워싱턴의 통합참모본부로서는 신경써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토취 작전이 바로 눈앞에 있었고, 북아프리카의 엘 알라메인에서는 1942년 10월 23일부터 몽고메리가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을 공격하고 있었다.
대서양 전투는 10월에만 60만톤의 수송선을 상실하면서 그야말로 절정을 향하여 치닫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아놀드 장군은 독일에 대한 전략폭격을 위하여 장거리 폭격기들을 영국에다가 집중시키고 있었다.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에 치명타를 먹이기 위하여 잔뜩 준비하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에 대처하느라 피곤에 찌들은 통합참모본부 사람들은 남태평양에서 재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체하고 있었는데 루즈벨트 대통령이 여기에 경각심을 일깨운 것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미함대사령관 킹 제독은 과달카날에 대한 야심적인 증원계획을 마련하여 11월에만 남태평양해역군에 30척의 수송선을 할당하고, 이후에 20척을 더 할당하였으며 제63기지항공단사령관 피치 소장은 전력을 다하여 항공기들을 헨더슨 비행장에 파견했다.
그리하여 10월 26일에 29대까지 떨어졌던 칵터스 항공대의 세력은 11월 30일에는 P-38 전투기와 B-17 중폭격기, 뉴질랜드 공군의 허드슨 폭격기까지 포함하여 188대로 증강되었다.
핼시 제독은 이런 분위기 하에서 제1해병항공기술연대(1st Marine Aviation Engineering Regiment) 와 주방위군 소속 제182보병연대, 합계 6,000 명의 병력을 과달카날로 증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아주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일본군은 11월에 또다시 대규모의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승리하고도 제17군의 공세가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일본함대가 트럭  섬으로 퇴각하고 있던 10월 26일,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또 제독은 10월 총공격의 실패 때문에 과달카날을 포기하자는 이야기를 차마 입에 담을 처지가 못되는 제17군을 대신하여 대본영에 과달카날을 포기할 것을 건의했으나 묵살당했다.
오히려 대본영은 산타크루즈 해전의 결과에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그들은 제17군 사령관 햐꾸다께 중장에게 라바울에 있는 제38사단 주력을 대량의 보급품과 함께 과달카날에 상륙시켜, 기존의 병력과 함께 충분한 화력 지원 하에 3만여명의 대규모 병력이 참가하는 과달카날 전투 개시이래 최대규모의 제4차 공세를 실시하여 이번에야말로 헨더슨 비행장을 탈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라바울에 주둔하고 있던 제38사단의 주력 1만여명(제229연대, 제230연대, 공병 제38연대)이 중포 50문, 포탄 8만발, 3만명이 1달간 먹을 식량 등 1만톤의 보급품과 함께 11척의 수송선에 실려 쇼틀랜드에 도착했다.
그 동안에도 구축함을 이용한 도꾜 특급은 지속적으로 실시되어 11월의 첫째 주만 해도 일본해군은 2척의 순양함과 총 65소티에 달하는 구축함 수송을 통하여 과달카날에 병력과 물자를 실어날랐다.

그러는 동안 11월 8일부터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이 다시 일본군의 암호를 제대로 해독해 내기 시작했다.
3달전인 8월 1일에 일본해군이 JN25의 난수표를 교체하면서 완전히 혼란에 빠졌던 암호해독 작업이 다시 본궤도에 오른 것이었다.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한 태평양함대는 일본군의 대규모 증원 병력과 대량의 보급품이 11월 13일에 과달카날에 상륙할 예정이며 이 수송선단을 보호하기 위하여 11일에 일본기들이 헨더슨 비행장에 대규모의 공습을 가하고 12일 야간에는 2척의 전함이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할 예정임을 알 수 있었다.  

1942년 11월 7일, 6,000 명의 증원병력을 실은 7척의 수송선이 12일 도착예정으로 에스피리투산토를 떠났다.
제1해병항공기술연대는 3척의 수송선에 실려 대공경순양함 애틀란타와 3척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진 Norman C. Scott 소장의 호위함대와 함께 과달카날로 향했고, 제182보병연대는 4척의 수송선에 실려 터너 소장의 직접 지휘 하에 과달카날로 향했다.
중순양함 2척(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경순양함 2척(헬레나, 쥬노),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진 Daniel J. Callaghan 소장의 호위함대가 제182보병연대를 실은 수송선단을 엄호하고 있었다.

같은 날인 11월 7일에 핼시 제독은 현지의 실상을 파악하고 주둔 중인 미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하여 과달카날을 시찰했다.
이곳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핼시는 그의 어록 중 가장 유명한 말인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이란 말을 남긴다.

이 말을 너무 좋아한 해병대원들은 툴라기 섬의 부두에 페인트로 이 표어를 60cm 크기로 그려 놓았다.

과달카날 시찰을 마치고 11월 9일에 누메아에 돌아와서 참모장 브라우닝 대령으로부터 일본군의 의도에 대하여 보고를 받은 핼시 제독은 곧 향후 며칠 동안이 과달카날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고비가 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

지금이야말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과감하게 투입해야 할 때였다.  

11월 11일,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가 누메아를 출항했다.
엔터프라이즈의 전방 엘리베이터는 비행갑판에 고정된 채 사용할 수 없었으며 항구를 나서는 순간까지 수리함 베스탈이 옆에 붙어서 마무리 수리를 했다.
곧 누메아의 톤토타 비행장에서 제10전투비행대(와일드캣 38대), 제10정찰/폭격비행대(돈틀레스 41대), 제10뇌격비행대(아벤저 9대)가 날아와서 엔터프라이즈에 착함했다.
제16기동부대는 엔터프라이즈 외에 고속전함 2척(워싱턴, 사우스다코타), 중순양함 2척(노댐턴, 펜사콜라), 경순양함 1척(샌디에고),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져 미해군의 기동부대 중에서 태평양 전쟁 개전 이래 가장 강력한 수상함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전함이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려고 하는 12일 저녁까지 도저히 과달카날에 도달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11월 11일, 6,000 명의 증원부대를 실은 수송선단이 과달카날에 무사히 도착하여 12일 오후까지 상륙을 마쳤다.
이들은 과달카날에 도착한 직후 마침 헨더슨 비행장을 대규모로 공격해 온 일본기들에게 공습을 받았으나 다행히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12일 아침, 말라이타 섬 북쪽을 초계하던 B-17 기로부터 전함 2척이 포함된 대규모 일본함대가 남하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터너 제독은 12일 오후에 병력과 보급품의 양륙을 완료하자 구축함 1척의 호위 하에 수송선단을 에스피리투산토로 철수시켰다.
이때 터너 제독도 기함인 수송선 맥콜리에 타고 과달카날을 떠났다.

수송선단을 호위해 왔던 2개의 호위함대는 하나로 합쳐져서 선임자인 캘러헌 제독의 지휘 하에 남하 중인 일본함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북상했다.
미국함대의 세력은 중순양함 2척(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경순양함 3척(애틀란타, 헬레나, 쥬노),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베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함대의 세력은 전함 2척(히에이, 기리시마), 경순양함(나가라), 구축함 11척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미국함대에 비하여 대단히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정이 다급하다고는 해도 전함 2척이 포함되어 14인치 주포를 16문이나 보유한 강력한 적의 함대를 저지하는 임무에 최대구경의 함포라야 8인치 주포에 지나지 않고 함정 숫자조차 딸리는 순양함 중심의 함대를 파견한 터너 제독의 배짱도 대단하지만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적의 전력이 어떻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사지로 떠난 캘러헌 제독과 스코트 제독도 참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캘러헌 제독과 스코트 제독은 그날 밤 안으로 모두 전사했다.
사실 아베 제독은 11일에 수송선단을 공습했던 항공기의 보고를 통하여 수송선단을 호위해 온 소규모의 미국함대가 과달카날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인들이 그런 빈약한 함대세력을 가지고 전함이 2척이나 포함된 자신의 함대에 감히 정면으로 도전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아베 제독과 일본함대는 미국함대와 전투에 돌입하는 순간까지도 적 수상함대와의 교전에 대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남하하던 일본함대와 이를 요격하기 위하여 전진하던 미국함대는 13일 새벽에 과달카날 북쪽의 아이언바텀사운드에서 정면으로 격돌했다.
교전 초기에 서로 얽혀버린 두 함대는 달도 없는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혼란을 극한 처절한 사투를 치렀다.
13일 새벽 1시 48분부터 2시 26분까지 40분 남짓 진행된  전투의 결과로 미국함대는 경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이 침몰하고, 중순양함 2척과 경순양함 1척, 구축함 2척이 대파, 구축함 1척이 소파되는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격침된 2척의 경순양함 중에서 쥬노는 원래 대파되어 에스피리투산토로 후퇴하던 중 일본 잠수함이 쏜 어뢰에 맞아 격침되었다.
캘러헌 제독과 스코트 제독도 전사했다.
하지만 미국함대는 이렇듯 커다란 희생을 치르면서도 일본전함 히에이에 화력을 집중하여 행동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아베 제독으로 하여금 이미 예정된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포기하고 물러나도록 만들었다.
일본함대는 그 외에도 2척의 구축함을 잃었다.

 

(아베 히로아키 제독. 자세한 설명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5539623 )

 

사실 캘러헌 제독은 이 해전을 지휘하면서 함선의 배치, 기함의 선택, 그리고 전투 초기의 발포명령 등에서 실수를 저질렀고, 그 결과 미국함대의 피해를 더 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는 형편없이 열세한 세력으로 강력한 적에게 과감하게 도전하여 비록 치명적인 피해는 입었으나 어쨌든 미국함대는 일본함대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여 작전목표를 달성했다.

 

또한 자신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으므로 전사가들의 평가도 주로 그의 실책을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것보다는 풍부한 전투 경험을 가진 스코트 제독 대신 불과 2주 일찍 소장으로 승진했다고 하여 전투 경험이 부족한 캘러헌 제독을 사령관으로 임명한 터너 소장의 실책을 지적하는 경향이 있다.

 

(대니얼 캘러헌 소장)


한편 13일 저녁에 과달카날에 도달할 예정으로 슬롯을 따라 남하하던 다나까 제독의 수송선단은 밤새 과달카날 근해에서 해전이 있었고 그 결과로 일본함대가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콜롬방가라 부근에서 변침하여 쇼틀랜드로 돌아가 버렸다.

13일 오전 8시 10분, 과달카날 남쪽 480km 지점에 진출해 있던 제16기동부대에서 제10뇌격비행대의 아벤저 9대와 제10전투비행대 소속 와일드캣 6대가 헨더슨 비행장을 향하여 엔터프라이즈의 비행갑판을 떠났다.
제10뇌격비행대는 13일 하루동안 히에이에 대하여 2회 출격하여 3발의 어뢰를 명중시켰다.
13일 하루종일 칵터스 항공대에 시달린 히에이는 14일 새벽에 자침했다.

 

(공고급 순양전함 히에이. 자세한 설명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5390351 )

 

13일 정오경, 핼시 제독은 제16기동부대 사령관 킨케이드 제독에게 고속전함 2척을 주축으로 한 수상함대를 형성하여 고속으로 북상, 과달카날 북방해역에 진출하여 일본전함에 의한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Willis A. Lee 소장이 전함 워싱턴과 사우스다코타,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진 제64기동부대를 편성하여 26노트의 속력으로 북상해 버리자 엔터프라이즈의 호위함으로는 중순양함 노댐턴과 펜사콜라, 경순양함 샌디에고, 그리고 구축함 2척만이 남았다.
용감하고 공격적이기는 했지만 무모하지는 않았던 핼시 제독은 태평양 함대의 유일한 항공모함인 엔터프라이즈의 안전을 고려하여 제16기동부대가 과달카날 북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13일 오후에 다나까 제독의 수송선단은 다시 쇼틀랜드를 떠났다.
이들을 호위하고 있던 제8함대 사령관 미까와 중장은 14일 새벽에 아이언바텀사운드에 들어와서 중순양함 마야, 스즈야, 경순양함 덴류, 구축함 3척으로 이루어진 니시무라 소장의 제7전대에게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도록 명령했다.
마야와 스즈야는 1시간 동안 8인치 삼식탄 1,000 여발을 헨더슨 비행장에 쏟아부어 2대의 전투기를 파괴하고 15대의 항공기에 피해를 입혔으나 8인치 주포의 위력부족으로 인하여 그 효과는 전함에 비해서는 미미했다.
미까와 함대는 포격을 마치자 즉시 쇼틀랜드를 향하여 퇴각하기 시작했다.

14일 오전 7시 8분, 과달카날 남쪽 320km 까지 진출한 엔터프라이즈는 10대의 돈틀레스에게 수색폭격의 임무를 주어 북쪽으로 날려보냈다.
이어서 함대 직위로 3대, CAP 세력으로 8대의 와일드캣이 이함했다.  

오전 9시 15분, R. D. Gibson 소위가 미까와 중장의 함대를 발견했다.

아벤저 6대, 돈틀레스 7대, 와일드캣 10대로 이루어진 공격대가 엔터프라이즈를 떠났다.
9시 30분, 깁슨 소위는 중순양함 기누가사에게 급강하폭격을 가하여 1발의 225kg 폭탄을 명중시켰다.
역시 수색폭격의 임무를 맡고 있던  P. M. Halloran 소위가 중순양함 마야에 급강하폭격을 시도하다가 메인 마스트에 접촉하여 갑판에 추락했다.

잠시 후 도착한 엔터프라이즈의 공격대는 미까와 제독의 함대에 450kg 짜리 대형폭탄을 퍼부어서 중순양함 기누가사를 격침하고, 중순양함 죠까이와 경순양함 이스즈를 대파했다.
공격대의 돈틀레스 및 아벤저 전부와 와일드캣 2대는 헨더슨 비행장으로 향했고, 8대의 와일드캣은 엔터프라이즈로 귀함했다.

 

(아오바 급 중순양함 기누가사. 자세한 설명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6011281 )

 

오전 9시 49분, M. D. Carmody 소위가 다나까 제독의 수송선단을 발견했다.
다나까 제독의 선단은 이날 아침에 에스피리투산토에서 날아온 B-17기 15대와 헨더슨 비행장을 떠난 돈틀레스 18대의 공습을 받았으나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이런 정보는 제16기동부대에 전달되지 않았다.
당시 헨더슨 비행장에서는 적의 정세에 대한 정보를 엔터프라이즈에 전혀 전달하지 않아서, 하디슨 함장은 전투보고서에다가 거기에 대한 불만을 적어 놓았다.

오후 2시 5분에 돈틀레스 8대와 와일드캣 12대로 구성된 공격대가 다나까 수송선단을 노리고, 엔터프라이즈를 떠났다.
이 공격대를 발진시킨 후 엔터프라이즈는 18대의 와일드캣만 보유한 상태로 남쪽으로 변침했다.
나머지 함재기들은 임무를 마치고 모두 헨더슨 비행장에 착륙했다.
엔터프라이즈 공격대는 일본의 수송선 시나노 마루와 애리조나 마루를 격침시키고 헨더슨 비행장으로 향했다.
칵터스 항공대는 엔터프라이즈 공격대의 공습 이전에 2번, 이후에 1번의 공습을 더 가하여 4척의 수송선을 추가로 격침하고 1척을 대파하여 쇼틀랜드로 회항하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다나까 제독의 수송선단 11척 중에서 6척이 격침되고 1척이 대파되어 회항했으며 4척만이 살아남았다.
다나까 제독은 이 시점에서 다시 쇼틀랜드로 회항하려고 했으나 연합함대 사령부의 명령에 의하여 제2함대와 조우하여 그 뒤를 따라 과달카날로 향했다.
곤도 중장의 제2함대는 미국함대와의 해전을 치르고 북상해 온 아베 제독의 부대를 흡수하여 전함 기리시마를 중심으로 재편성한 후 다시 한 번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기 위하여 남하하고 있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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