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기동부대에서 분리되어 서둘러 북상해 온 리 소장의 제64기동부대는 14일 오후 7시 20분 경 아이언바텀사운드에 들어섰다.
제64기동부대의 전력은 고속전함 2척(워싱턴, 사우스다코타), 구축함 4척으로서 16인치 주포 18문을 가진 강력한 세력이었고, 2척의 전함에는 신형의 SG 레이더가 장비되어 있었다.
또한 임무에 관한 한 꼼꼼한 완벽주의자인 사령관 리 제독은 미해군 내에서도 레이더 사격의 최고권위자로 알려질 정도로 레이더와 포술의 양면에서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지닌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윌리스 리 제독)
한편 야간에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할 목적으로 남하하고 있던 곤도 중장의 일본제2함대는 3개의 부대로 편성되어 합계 전함 1척(기리시마), 중순양함 2척(아타고, 다까오), 경순양함 2척(센다이, 나가라), 구축함 11척의 세력이었다.
이들은 레이더도 없고 대구경 주포의 숫자와 파괴력에서도 기리시마가 14인치 포 8문을 보유했을 뿐으로 2척의 고속전함이 16인치 포 18문을 보유한 제64기동부대에게 결정적으로 열세였다.
대신 곤도 제독은 무서운 산소어뢰를 다수 보유한 강력한 수상함 세력과 야전에 익숙한 숙련된 승무원들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 11월 14일 밤 10시 30분경에 일본함대가 제64기동부대를 발견했다.
미함대는 잠수함의 보고로 일본함대의 접근을 미리 알고 있었는데, 제64기동부대의 기함 워싱턴의 레이더에 일본의 경순양함 센다이가 잡힌 시각은 11시였다.
11시 17분, 센다이에 대하여 워싱턴의 함포가 불을 뿜으면서 과달카날 해전의 두번째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제64기동부대는 구축함 3척이 격침되고 1척이 대파되었으며, 고속전함 사우스다코타가 일본함대의 집중사격을 받아서 14인치 철갑탄을 포함하여 구경 8인치 이상의 주포탄 26발을 얻어맞고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새로운 설계에 의한 중장갑을 두르고 있던 사우스다코타는 그런 엄청난 집중포격 하에서도 함의 핵심 부분은 전혀 관통당하지 않아서 미국의 우수한 장갑설계능력을 과시했다.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사우스다코타.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gold829921/60062401360 )
한편 사우스다코타가 일본함대에게 얻어맞고 있는 동안 전함 워싱턴은 8,000 미터 거리에서 일본전함 기리시마에게 기습적으로 레이더 조준사격을 실시했다.
워싱턴은 불과 7분 만에 16인치 철갑탄 75발을 발사하여, 그 중 9발을 기리시마에게 명중시켰다.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기리시마는 완전히 전투력을 상실했고, 곧 침몰했다.
기리시마는 미서전쟁 이후 미전함에 의하여 침몰한 최초의 전함이었다.
(공고급 순양전함 기리시마.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5417895 )
14일 오후 11시 17분부터 15일 새벽 0시 30분까지 지속된 이 전투에서 제64기동함대는 구축함 3척 침몰, 1척 대파, 전함 1척 소파의 피해를 입으면서, 적의 전함 1척과 구축함 1척을 격침하고, 중순양함 2척과 경순양함 1척을 소파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해전의 결과로 일본전함에 의한 헨더슨 비행장의 무력화 시도가 물거품이 되었을 뿐 아니라 다나까 제독의 수송선단이 과달카날에 도착하는 시간이 새벽으로 늦어짐으로써 칵터스 항공대의 집중공격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전날의 공습에서 겨우 살아남은 다나까 제독 휘하의 수송선 4척은 15일 새벽 4시에 타사파롱가 해안에 그대로 진입하여 좌초한 다음 서둘러서 양륙작업을 실시했다.
하지만 5시 55분부터 칵터스 항공대의 돈틀레스들이 나타나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칵터스 항공대는 엔터프라이즈의 제10비행단 중 모함 보호를 위해 제16기동부대에 잔류한 18대의 와일드캣을 제외한 약 70대의 세력이 전부 헨더슨 비행장에 가세하여 거의 150대 가까운 대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헨더슨 비행장에서 불과 5분만에 비행할 수 있는 타사파롱가 해안의 일본군과 그들이 양륙한 보급품에 대하여 그날 저녁까지 8차례나 폭격을 반복했다.
여기에 지난밤 해전에서 격침당한 미구축함의 생존자들을 구하려고 제16기동부대에서 분리되어 밤새 북상해온 구축함 Meade 까지 가세하여 해안에 쌓아놓은 일본군의 보급품에다가 42분간 포격을 가했다.
15일 새벽부터 하루 종일 지속된 칵터스 항공대의 폭격은 저녁이 되어 일본군 수송선 4척을 전부 격침시키고, 일본군이 겨우 양륙해 놓은 보급품들을 거의 다 파괴한 다음에야 끝났다.
일본군의 피해는 그야말로 참담했다.
1만여명의 병력 중 6,000 여명이 수송 중에 전사하여, 겨우 4,000 명만이 무사히 상륙했다.
또한 중포 50문, 포탄 3만발과 3만명이 1달간 먹을 식량 등 총 1만톤의 보급품 중 과달카날의 일본군에게 무사히 전달된 것은 탄약 260 상자와 약간의 쌀 등 불과 5톤에 지나지 않았다.
실로 99.95% 의 보급품이 수송 도중에 망실되고 만 것이었다.
1942년 11월 13일에서 15일까지 지속된 과달카날 해전의 결과 과달카날 전투의 승자는 사실상 미국으로 결정되었다.
당장 먹을 것도 없는 과달카날 섬의 일본육군이 막강한 미군을 상대로 헨더슨 비행장을 공격하여 점령한다는 것은 이제는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헨더슨 비행장을 점령하지 못하는 한 과달카날 주변의 제해권이란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일본연합함대는 과달카날 해전 이후 과달카날 주변에서 미해군에게 도전하여 제해권을 탈취하려는 시도를 포기했고, 그들의 임무를 과달카날 섬에 고립된 일본군에 대한 보급에만 국한했다.
반면에 과달카날 해전으로 과달카날 주변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한 미군은 자유롭게 병력의 증강과 보급을 실시하여 과달카날에 있는 일본군과의 전력 격차를 더욱 벌려나갔다.
이런 상황이라면 지체없이 과달카날 섬의 포기를 결정하고 철수를 시작했어야 정상이지만, 도꾜의 대본영은 그래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 이후로도 1달 반이나 질질 끌면서 피해만 키우다가 결국 12월 30일이 되어서야 과달카날 철수를 결정한다.
11월 13일에서 15일에 걸친 과달카날 해전의 결과 일본해군은 전함 2척, 중순양함 1척, 구축함 3척, 수송선 10척이 격침당했다.
미해군은 경순양함 2척과 구축함 7척을 잃었다.
엔터프라이즈의 제10항공단은 과달카날 해전 기간 중 7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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