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0월 14일, 핼시 제독은 플레처 제독의 뒤를 이어 남태평양 해역의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브라우닝 대령을 위시한 참모들과 함께 진주만을 떠났다.

10월 15일 오후, 니미츠 제독이 남태평양해역군사령부 시찰에 동행했던 참모들을 모아서 회의를 열어서,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곰리 중장의 해임을 결정했다.
문제는 후임 인선이었는데 후보가 될만한 사람은 남태평양해역군의 해상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켈리 터너 소장과 핼시 중장이었다.

터너 소장은 ‘무시무시한 터너(Terrible Turner)’ 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곰리 제독의 문제점인 패배주의와 우유부단함 등과는 거리가 먼 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그에게는 아직도 사보해전 참패의 그림자가 따라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어느 한 사람의 잘못으로 보기 어렵다는 잠정적인 결론이 내려진 상태라고는 해도 미해군 사상 최악의 참패인 사보해전으로부터 불과 2달 정도 지난 시점에서 사보해전 당시 현장지휘관이었던 터너 소장을 중장으로 승진시켜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을 맡긴다는 것은 대외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따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터너 소장은 과달카날의 제1해병사단이 헨더슨 비행장을 중심으로 하는 좁은 방어진지에서 벗어나 과달카날 섬의 전체 해안선을 따라 동시다발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충분한 병력 증강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헨더슨 비행장의 확보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제1해병사단장 밴디그리프트 소장과 심각한 마찰을 빚고 있었다.
따라서 헨더슨 비행장의 확보 여부가 과달카날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관건이며 일본군을 압도할만한 충분한 전력증강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헨더슨 비행장의 안전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는 병력의 분산을 절대로 피해야 한다는 밴디그리프트 소장의 의견에 완전히 공감하는 니미츠 제독이 자신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터너 제독을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자리에 앉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핼시 제독밖에 없는데 그는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사령관으로써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일 뿐만 아니라 관리면의 경험이 거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의 경력이나 성향으로 볼 때 기본적으로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일에 속하는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으로서는 부적격한 인물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결국 15일의 회의에서는 곰리 중장의 후임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회의를 마쳤는데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일부 참모들이 밤에 사령관저에 찾아와 니미츠 제독에게 핼시 제독이 곰리 중장의 후임으로 적격이라고 주장했다.
안 그래도 곰리 중장의 후임으로 핼시 제독에게 마음이 기울어있던 니미츠 제독은 16일 새벽에 결단을 내려서 곰리 중장의 후임으로 핼시 제독을 결정하고 즉시 워싱턴의 킹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동의를 받았다.

핼시 제독은남태평양 지역의 항공모함 기동부대 사령관으로 취임하기 전에 과달카날의 상황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아두려고 과달카날로 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예정되었던 과달카날 시찰을 취소하고, 즉시 누메아에 있는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로 직행하라는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긴급명령이 떨어졌다.
이 명령에 따라 급히 행선지를 바꾼 핼시 제독이 누메아에 도착한 10월 18일, 니미츠 제독은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곰리 중장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핼시 제독을 임명했다.
적극적인 성격의 핼시 제독이 소극적인 곰리 중장의 뒤를 이어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 되었다는 소식은 과달카날을 포함한 전 남태평양해역군의 장병들을 열광시켰다.
핼시 제독은 남태평양해역군사령관이 되자마자 밴디그리프트 소장에게 무전을 쳐서 상황이 허락하는 한 빨리 누메아에 와서 과달카날의 상황을 설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10월 23일에 누메아에서 열린 회의에서 밴디그리프트 소장에게서 과달카날의 상황에 대하여 보고를 들은 핼시 제독은 밴디그리프트 소장에게 과달카날을 지킬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밴디그리프트 소장이 지킬 수는 있지만 지금보다 훨씬 많은 지원이 요구된다고 대답하자 핼시 제독은 말했다.

“그곳으로 돌아가시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지원해 주겠소.”

그리고, 핼시 제독은 그 약속을 지켰다.

1942년 10월 16일,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가 남태평양을 향하여 진주만을 떠났다.
고속전함인 BB-57 South Dakota 를 비롯하여 중순양함 포틀랜드, 대공경순양함 산 후앙, 그리고 8척의 구축함이 엔터프라이즈를 호위하고 있었다.
해체된 엔터프라이즈 항공단 대신 제10항공단이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 세력을 형성했다.

10월 17일, 과달카날의 일본군에게 치명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이틀 전에 칵터스 항공대의 맹폭으로 수송선 3척이 침몰당하면서까지 겨우 양륙해놓은 대량의 보급품을 미처 정글로 옮기기도 전에 미구축함 Aaron Ward와 McCulloch 가 호넷의 함재기와 함께 기습했다.
애런 워드와 맥컬러는 해안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일본군의 보급품에 5인치 소이탄 2,000 여 발을 쏘아대어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혼비백산한 일본군이 겨우 불을 껐을 때 포탄은 6,000 여발, 그리고 식량은 2주일치 밖에 남지 않았다.
원래 일본군은 충분한 포병의 화력지원 하에 교두보의 서쪽에서 헨더슨 비행장에 이르는 단일 축선상에 공격력을 집중하여 해병대의 방어망을 정면으로 돌파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포탄의 부족으로 인하여 일본군은 원래 예정했던 정면공격을 단념하고, 주공과 조공을 분리하여 조공이 교두보의 서쪽에서 공격을 가하여 해병대의 주의를 끄는 동안 주공이 교두보의 남쪽으로부터 헨더슨 비행장에 돌입하는 작전으로 바꾸어야 했다.

따라서 주공부대가 정글을 헤치고 공격지점까지 나아가는 것이 늦어져서 애당초 10월 21일로 예정했던 공격날짜가 계속 연기되었다.

제17군 포병사령관 스미요시 다다시 소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조공은 10월 20일부터 마타니코 강의 미군 방어선에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2,900 여명의 보병과 소규모의 전차부대, 포병대 등으로 이루어진 스미요시 부대는 10월 23일에 총공격을 실시했으나 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고 24일에 살아남은 병력들을 규합하여 재차 공격했으나 이 역시 간단하게 격퇴되었다.
일본군은 이 마타니코 강 하구에 대한 공격에서 전차 10 여대를 상실하고 600 여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5,600 여명의 보병과 포병, 공병으로 이루어진 일본군의 주공은 정글을 돌파하는 동안 진격이 늦어져서 10월 25일 새벽에야 공격을 시작했는데, 도보로 정글을 돌파하는 도중에 화포 등 중장비를 모두 망실했다.

게다가 공격 직전에 현지 지휘관인 야마구찌 소장을 해임하는 등 작전 수행에 혼란을 빚어 공격의 집중성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25일과 26일에 걸친 일본군 주공의 공격도 2,500 여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실패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10월 25일 새벽의 공격 도중에 일본군이 헨더슨 비행장을 점령했다는 잘못된 보고가 올라가서 라바울의 제17군 사령부와 트럭 섬의 연합함대 사령부는 물론 도꾜의 대본영까지 환호성을 올리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10월 29일, 햐꾸다께 중장이 헨더슨 비행장 부근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결국 일본군의 제3차 공격은 3,100 여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실패했다.
가와구찌 지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정글 속을 지나 퇴각하면서 부상과 기아, 말라리아로 인하여 수많은 병력을 추가로 상실했다.
라바울의 제11항공함대도 10월 동안에만 100 여대의 항공기를 상실했다.
미군은  이 기간 동안 90 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한편 트럭 섬에 있던 일본연합함대는 제17군의 비행장 공격과 호응하여 과달카날 해역에 진출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지원하고 이를 저지하러 나올 미국의 항공모함 기동부대와 사상 4번째의 함대항공전을 벌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구모 제독의 제3함대와 곤도 제독의 제2함대를 과달카날 북방해상으로 파견했다.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핼시 제독도 16일에 진주만을 떠나 남태평양에 막 도착한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와 남태평양에서 활동하던 호넷 중심의 제17기동부대에게 과달카날의 동북방 해상인 산타크루즈 제도 부근으로 나아가서 일본함대를 요격하도록 했다.

 

1942년 10월 21일, 엔터프라이즈의 제4대 함장이었던 아더 데이비스 대령이 소장으로 승진, 제5항공모함 전단(호위항공모함) 사령관이 되어 대서양으로 영전해 가고, 제5대 함장으로 Osborne B. Hardison 대령이 취임했다. 

 

(엔터프라이즈의 제5대 함장 오스본 하디슨 대령. 재임기간 : 1942.10.21 - 1943.4.7)

 

10월 24일, 제16기동부대와 제17기동부대는  과달카날 북쪽 1,600km 지점에서 만나서 제16기동부대 사령관인 킨케이드 소장의 지휘 하에 제61기동부대를 형성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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