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해병대가 과달카날 섬을 점령하자 일본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또 제독은 과달카날 섬의 탈취를 목적으로 하는 ‘과’호 작전 (‘과’는 과달카날이란 뜻)을 발령했다.
이에 따라 8월 11일에 곤도 노부다께 중장의 제2함대를, 16일에는 정규항공모함 쇼가꾸, 즈이가꾸 및 경항공모함 류조를 보유한 나구모 중장 지휘 하의 제3함대를 히로시마에서 남방의 일본해군기지인 트럭 섬으로 파견했다.
그 전날인 8월 14일에는 다나까 라이조 소장의 제2수뢰전대가 호위하는 수송선 3척(긴류 마루, 보스톤 마루, 다이후꾸 마루)이 일본육군 제28연대를 싣고 과달카날을 향하여 트럭 섬을 떠났다.
하지만 2,500여 명에 달하는 제28연대를 전부 수송하기에는 수송선이 모자랐으므로 제28연대장 이찌기 기요노 대좌를 비롯한 916명의 병력은 각자 150발의 총탄과 7일 간의 식량만을 휴대한 채 따로 구축함 6척(하마까제, 가게로, 하기까제, 다니까제, 우라까제, 아라시)에 분승하여 트럭 섬을 출발, 본대보다 4일 앞선 8월 18일 밤에 해병대의 교두보에서 동쪽으로 약 35km 떨어져 있는 타이부 곶에 상륙했다.
제3함대가 떠난 다음날인 8월 17일에는 야마모또 제독의 기함인 대형전함 야마또를 위시한 연합함대의 나머지 세력이 히로시마를 떠나 트럭 섬으로 향했다.
8월 17일, 과달카날의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감에 따라 태평양함대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하와이를 지키고 있던 호넷 중심의 제17기동부대를 남태평양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제17기동부대는 간발의 차로 동부솔로몬 해전에 참가하지 못한다.
1942년 8월 20일, 마침내 헨더슨 비행장이 완성되었다.
과달카날에 배치될 항공기를 싣고 8월 2일에 진주만을 출항하여 8월 13일에 피지에 도착하여 있던 미해군 최초의 호위항모 CVE-1 Long Island가 즉시 과달카날 남동쪽 320km 지점까지 접근하여 Richard C. Mangrum 해병소령이 지휘하는 해병제232정찰/폭격비행대대(VMSB 232) 소속 돈틀레스 12대와 John L. Smith 해병대령이 지휘하는 해병제223전투비행대대(VMF223) 소속 와일드캣 19대를 파견했다.
최초의 돈틀레스가 헨더슨 비행장에 착륙한 시간은 8월 20일 오후 5시였다.
(호위항공모함 롱아일랜드. 표준배수량: 13,500톤, 길이 : 150m, 폭 : 21.2m,속력 : 16.5노트, 승무원 : 970명, 무장 : 5인치 포 1문, 76mm 대공포 2문, 함재기 : 21대)
다음날인 8월21일 새벽 3시, 이찌기 대좌가 지휘하는 일본육군 제28연대의 선발대 916명이 22일로 예정된 본대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미해병대의 4개 대대가 지키고 있는 일루 강 하구의 방어선에 공격을 가해왔다.
하지만 미리 정찰대를 보내어 자신들의 동쪽에 새로운 일본군 부대가 상륙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미해병대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하여 거의 전멸에 가까운 혹독한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다.
같은 날인 8월 21일,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은 10일전인 8월 11일까지의 암호해독상황을 종합하여 일본 내해에 있던 항공모함 쇼가꾸와 즈이가꾸, 야마모또 제독의 기함인 대형전함 야마또 등을 포함한 대함대가 남쪽에 있는 일본해군의 대기지인 트럭 섬을 향하여 남하할 것이며 이들은 8월 22일 쯤 트럭 섬에 도착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니미츠 제독은 이 보고를 받자마자 남태평양해역군사령관인 곰리 중장에게 즉각 과달카날 방어를 위하여 병력을 집중시킬 것을 지시했다.
다음날인 22일, 곰리 중장은 플레처 중장에게 제61기동부대를 이끌고 과달카날로 출동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제3함대사령관 나구모 중장은 트럭 섬에 도착하면 먼저 와있던 제2함대사령관 곤도 중장과 작전을 협의할 예정이었으나 트럭 섬으로 남하 중이던 21일, 이찌기 지대의 공격실패 소식을 들은 야마모또 제독으로부터 트럭 섬에 기항하지 말고 즉시 과달카날 해역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같은 날인 8월 21일에 트럭 섬에 있던 제2함대도 제3함대와 작전을 조율할 시간도 없이 서둘러서 과달카날을 향하여 출동했다.
당시 일본함대의 진형은 제2함대와 제3함대의 조율이 제대로 되지 않은 관계도 있고 해서 꽤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4개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공격력의 중심은 역시 항공모함 중심으로 새로 편성된 제3함대였다.
그 중 항모 쇼가꾸와 즈이가꾸로 이루어진 제1항공함대와 그들을 호위하는 구축함 6척이 공격부대를 이루었고, 나구모 중장이 직접 지휘했다.
전함 히예이와 기리시마를 포함한 제3함대의 호위함들은 차석 지휘관인 아베 히로아끼 소장의 지휘 하에 공격부대의 전방으로 나서서 적 함재기에 대하여 일종의 방벽을 형성했다.
이건 공격력이 강한 대신 방어력이 약한 항공모함들이 전면으로 나섰다가 일순간에 전멸해버린 미드웨이 해전의 전훈을 살린 것이었다.
그런데 이 호위함들은 제2함대의 함정들과 함께 호위부대를 형성하여 아베 소장은 전투 중에는 제2함대사령관 곤도 중장의 전술적 지휘를 받았다.
원래 계획 상으로는 공격부대와 전방에 나가있는 호위함대와의 거리는 320km 이상 떨어지게 되어 있었으나 동부솔로몬 해전에서는 그만한 거리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24일 새벽 2시에 제3함대 소속의 경항모 류조를 중심으로 한 견제부대가 하라 쥬이찌 소장의 지휘 하에 공격부대에서 분리되어 호위함대 앞쪽 100km 전방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들과는 별도로 제28연대의 잔여병력 1,500여명을 태운 세 척의 수송선과 8척의 구축함을 보유한 일본제8함대가 동쪽에서 내려오고 있었는데 이 부대는 수송선단을 포함한 다나까 라이조 소장의 제2수뢰전대와 이들을 호위하는 제8함대사령관 미까와 구니찌 중장의 중순양함 4척으로서 침공부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8함대는 연합함대 직속이 아니라 라바울에 기지를 둔 남방함대 소속이었다.
이외에 12척의 일본잠수함들이 작전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 세력을 보면 나구모 중장이 직접 지휘하는 공격부대는 정규항모 2척(쇼가꾸, 즈이가꾸),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져 144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곤도 중장 휘하의 호위부대는 전함 2척(히에이, 기리시마), 중순양함 8척(구마노, 스즈야, 치꾸마, 아타고, 마야, 다까오, 묘고, 하구로), 경순양함 2척(나가라, 유라), 수상기모함 1척(지또세),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져 22대의 수상정찰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라 소장 휘하의 견제부대는 경항공모함 1척(류조), 중순양함 1척(도네), 구축함 2척을 보유하여 30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침공부대는 미까와 중장이 지휘하는 중순양함 4척(죠까이, 기누가사, 아오바, 후루다까)과 다나까 소장이 지휘하는 경순양함 1척(진쑤), 구축함 8척(수송임무), 수송선 3척(긴류 마루, 보스톤 마루, 다이후꾸 마루) 및 경비정 4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함대의 세력은 합계 정규항공모함 2척, 경항공모함 1척, 수상기 모함 1척, 전함 2척, 중순양함 13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22척(8척은 수송임무), 수송선 3척, 경비정 4척, 함재기 174대, 수상정찰기 22대였다.
여기에 맞서는 미국함대는 새러토가 중심의 제11기동부대,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 그리고 와스프 중심의 제18기동부대가 모여서 플레처 중장의 지휘 하에 제61기동부대를 이루고 있었다.
플레처 중장이 직접 지휘하는 제11기동부대는 정규항공모함 1척(새러토가), 중순양함 2척(미네아폴리스, 뉴올리언스), 구축함 5척으로 이루어져 74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킨케이드 소장의 제16기동부대는 정규항공모함 1척(엔터프라이즈), 전함 1척(노스캐롤라이나), 중순양함 1척(포틀랜드), 경순양함 1척(애틀란타),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져 80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노예스 소장의 제18기동부대는 정규항공모함 1척(와스프), 중순양함 2척(샌프란시스코, 솔트레이크시티), 경순양함 1척(산후앙), 구축함 7척으로 이루어져 63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61기동부대 전체로는 정규항공모함 3척, 전함 1척,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8척으로 이루어져 있어 수상함 세력은 일본함대에 비하여 확실히 조금 열세였지만 가장 중요한 함재기 수에서는 217대로서 174대를 보유한 일본보다 우세했다.
하지만 정작 실제 전투에서는 와스프 중심의 제18기동부대가 불참함으로써 제61기동부대의 실전 참가 함재기 수는 154대로 오히려 일본함대보다 열세였다.
하지만 미국함대는 지상발진 항공기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즉 남태평양해역군항공사령관(COMAIRSOPAC)인 John Sidney McCain 소장의 제63기지비행대(TF63)가 제61기동부대를 지원했는데, 이들의 세력은 우선 헨더슨 비행장의 해병제23비행전대(MAG23) 휘하의 와일드캣 13대, 돈틀레스 11대, 육군 제67추격기편대 소속의 P-39기 5대, 에스피리투산토에 있는 제11중폭격비행전대 소속의 B-17기 25대와 카탈리나기 33대, 산타크루즈 섬에 있는 카탈리나 기 5대 등이다.
이로써 동부솔로몬 해전에 참가한 미일양국 해군의 전력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맥케인 제독은 1945년 5월에 미처 중장의 후임으로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 사령관이 되어 결국 대장까지 승진하는데 같은 이름의 자기 아들도 해군대장까지 승진했다.
미해군 역사상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대장까지 승진한 기록은 이 맥케인 부자의 경우가 유일하다.
그리고 이 사람의 손자인 John Sidney McCain 3세 역시 A-4 공격기를 몰던 해군조종사로서 베트남 전쟁에서 격추되어 하노이에서 포로생활을 했다.
이후 정치에 투신하여 애리조나 주의 상원의원을 지냈고, 2008년 미국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섰다가 민주당 후보였던 버락 오바마 현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8월 22일 오전 11시,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가 남서쪽 90km 지점에서 접근하는 일본군의 가와니시 비행정을 포착하자, 4대의 와일드캣이 즉시 달려가서 격추했다.
8월 23일 아침, 엔터프라이즈의 정찰기가 남쪽으로 급행하는 2척의 일본잠수함을 발견했다.
통상 일본해군은 대규모 함대작전을 앞두고 잠수함을 파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일본군의 잠수함을 발견했다는 것은 곧 대규모 수상함대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고나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오전 9시 50분, 카탈리나 기가 부갠빌 섬의 동쪽에서 다나까 제독의 침공부대를 발견했다.
오후 2시 45분, 새러토가에서 31대의 돈틀레스와 6대의 아벤저 뇌격기가 침공부대를 향하여 출격했다.
헨더슨 비행장에서도 11대의 돈틀레스와 그들을 호위하는 와일드캣이 침공부대를 노리고 떠났다.
오후 3시 30분,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들이 또다른 일본잠수함을 발견하고 공격하였으나 격침하는데는 실패했다.
한편 다나까 제독은 카탈리나 기에 발견되는 즉시 반전하여 북상했으므로 새러토가의 공격대는 헛물만 켜고 말았다.
새러토가의 공격대는 모함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병대기들을 따라 헨더슨 비행장으로 갔다.
침공부대는 23일 밤늦게 다시 남쪽으로 변침했다.
23일 오후, 태평양함대의 암호해독반이 일본함대가 아직 트럭 섬의 북쪽에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보내왔다.
플레처 제독은 이 정보에 의거하여 일본함대와의 전투는 아무리 빨라도 25일까지는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여 23일 오후, 와스프 중심의 제18기동부대를 급유를 위하여 남하시켰다.
플레처 제독이 진주만 기습 직후 새러토가를 지휘하여 웨이크 섬 구조작전에 나섰을 때 중간에 급유하느라고 웨이크 섬 도착이 늦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손도 한번 못 써보고 웨이크 섬이 함락되었다.
그때 웨이크 섬의 구조에 실패하여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던 플레처 제독은 그 이후로 틈만나면 항공모함의 연료탱크를 가득 채워두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23일 밤에 일본구축함 가게로가 과달카날에 접근하여 함포사격을 가했으나 5인치 포의 위력부족으로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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