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3월, 필리핀을 방어하던 맥아더 장군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탈출하여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하자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 장군과 니미츠 제독의 작전관할지역을 분리하기로 하여 1942년 3월 24일, 태평양지역에 맥아더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남서태평양해역군과 니미츠 제독을 사령관으로 하는 태평양해역군을 설치했다.
남서태평양해역군의 관할지역은 오스트레일리아, 솔로몬제도, 비스마르크제도, 뉴기니아, 필리핀을 포함하는 동경 160도까지였고 태평양의 나머지 지역은 태평양해역군의 관할지역이었다.

그런데 태평양해역군의 관할지역이 너무 넓으므로 이것을 다시 3개로 나누어 적도 이남의 남태평양해역군, 적도에서 북위42도까지를 관할하는 중부태평양해역군, 그리고 북위 42도 이북을 책임지는 북태평양해역군으로 분리했다.
이중에서 하와이를 포함하는 중부태평양해역군사령관은 니미츠 제독이 겸임하기로 했다.
재미있는 것은 태평양해역군사령부가 설치됨으로써 태평양함대사령관은 중부태평양해역군사령관과 동격이면서 동시에 태평양해역군사령관의 직접 지휘를 받는 직할전투부대의 사령관이 되었으므로 니미츠 제독은 태평양해역군사령관 겸 중부태평양해역군사령관 겸 태평양함대사령관의 3가지 감투를 동시에 쓰게 되었다.
북태평양해역군 관할지역에서는 당분간 대규모 작전이 실시될 예정이 없었으므로 제8함대사령관인 테오발드 소장을 그대로 해역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문제는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남태평양해역군사령관의 인선이었다.
니미츠 제독은 이 자리에 진주만기습 당시 태평양함대의 전투부대사령관이었던 파이 중장을 추천했다.
그러나 미국함대사령관 킹 제독은 파이 중장을 거부하고 1942년 6월 19일, 이 자리에 해군참모차장이었던 Robert L. Ghormley 중장을 임명했다.
하지만 이 인사는 곧 킹 제독 최악의 인사실패로 기록된다.
까다로운 킹 제독의 눈에 들었던 인물이니만큼 당연히 곰리 중장도 영민하고 경험이 많은 장교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는 전형적인 참모형장교로서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엄청난 스트레스 하에서 불충분한 정보를 가지고도 때를 놓치지 않고 중대한 결정을 과감하게 내리고 불안해하는 부하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어 일을 추진해 나가야 하는 대부대의 지휘관으로서는 실격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남태평양해역군사령관 자리는 바로 그런 강인한 정신력과 엄청난 스트레스 하에서도 때를 놓치지 않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1942년 7월 6일, 진주만의 암호해독반이 일본군의 한 부대가 툴라기 대안에 있는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부대에 아마도 토목공사를 위한 인원들로 추정되는 다수의 비전투원들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진주만의 암호해독반은 일본군이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려는 의도라고 판단했다.
이 정보에 따라 미태평양함대는 비행장이 완성되기 전에 과달카날 섬을 탈취하여 향후 반격의 초석으로 삼기 위한 망루작전을 계획한다.  
한편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후일의 공식발표에서는 당시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정찰기가 비행장을 발견했다고 둘러대었다.

그런데 문제는 과달카날 섬이 남서태평양해역군의 관할지역에 속해있었다는 점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니미츠 제독의 부하들이 자기 관할지역 내에서 제 마음대로 설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니미츠 제독 역시 지도라고는 해안선이 나오면 끝나는 지도만 가지고, 바다를 통로가 아니라 장애물로만 간주하며, 해군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수심이나 수로, 조류 등의 개념도 모르고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 맥아더 장군 휘하의 '무식한' 육군에게 과달카날 침공작전을 맡기고 금쪽같은 항공모함을 내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의 직속 상관들인 마셜 장군과 킹 제독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져서,
남서태평양해역군과 남태평양해역군의 경계를 동경 160도에서 1도만큼 서쪽으로 이동시켜 동경 159도선으로 변경했다.

그리하여, 과달카날 섬이 포함된 남부 솔로몬 제도를 남서태평양해역군의 관할지역에서 빼내어 남태평양해역군의 관할지역 안으로 편입시켰다.

미드웨이 해전에 대승하고 1942년 6월 13일에 진주만에 개선한 엔터프라이즈는 7월 15일까지 함의 오버홀을 위하여 진주만에 머물렀고 장병들에게는 휴가가 주어졌다.
엔터프라이즈의 장병들 입장에서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래 실로 6개월 만에 맛보는 꿀맛같은 휴가였다.
1942년 6월30일, 태평양함대에서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는데,
그때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1년 3월 21일부터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을 맡아왔던 머레이 대령이 소장으로 승진하여 호넷 중심의 제17기동부대 사령관으로 영전했다.

 

(엔터프라이즈에서 열린 머레이 함장 환송 만찬의 한 장면. 엔터프라이즈의 부함장 월터 분 중령이 머레이 대령에게 미드웨이 해전에서 침몰 직전의 미꾸마를 찍은 사진이 담긴 액자를 기념품으로 전달하고 있다. 사진 중앙 왼쪽의 키 작은 장교가 머레이 대령)

 

머레이 대령의 후임인 제4대 함장으로는 Arthur C. Davis 대령이 취임했다.

 

(제4대 함장 아더 데이비스 대령. 재임기간 : 1942년 6월 30일 - 10월 21일)


그리고 니미츠 제독에게 스카우트되어 태평양함대의 참모장으로 영전해 간 제16기동부대사령관 스프루언스 소장의 후임으로 태평양함대의 순양전단장이던 Thomas Cassin Kinkaid 소장이 제16기동부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그 동안에도 망루작전의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들도 남태평양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1942년 7월 1일, 그동안 대서양에 있던 CV-8 Wasp 중심의 제18기동부대가 제2해병연대를 실은 수송선단을 호위하여 통가에 도착했다.
Leigh Noyes 소장이 지휘하는 제18기동부대에는 미해군 최초의 고속전함인 BB-55 North Carolina 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핼시 제독이 아직 함대의 지휘를 맡을만큼 회복되지 못했으므로 중장으로 승진한 플레처 제독이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계속 지휘하게 되었다.
7월7일, 미드웨이 해전 직후인 6월6일에 진주만에 도착했던 동료항공모함 새러토가가 플레처 중장의 지휘 하에 진주만을 출발했다

7월 15일, 1달간의 오버홀을 마친 엔터프라이즈가 망루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남태평양의 통가를 향하여 진주만을 출발했다.
이 3척의 항공모함은 통가 부근에서 합류하여 플레처 중장의 지휘 하에 제61기동부대를 형성, 제1해병사단의 과달카날 상륙을 엄호할 예정이었다.
엔터프라이즈는 진주만을 떠나 통가로 가는 도중에 엔터프라이즈항공단에 새로 편입된 조종사들에 대하여 집중적인 훈련을 실시했다.
목적지인 통가에는 7월24일에 도착하였으며 이틀 후인 7월 26일에는 새러토가 및 와스프와 만나 플레처 중장의 지휘 하에 제61기동부대를 편성한 후 코로 섬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제61기동부대는 제1해병사단의 인원 및 장비를 실은 35척의 수송선과 그 호위함들로 이루어진 Richmond Kelly Turner 소장 지휘 하의 제62기동부대와 함께 80 여척의 대함대를 형성하여 7월 30일에 과달카날 상륙작전의 리허설을 실시했다.
이 리허설 결과는 사령관들의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으나 이 과정을 통하여 대규모의 상륙작전시 예상되는 몇 가지의 문제점들을 발견하고 그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16,000 명의 해병대원과 그들의 장비와 보급품을 실은 35척의 수송선 및 순양함 8척, 구축함 12척으로 이루어진 제62기동부대와 항공모함 3척, 전함 1척,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3척 및 구축함 12척으로 편성된 제61기동부대는 코로 섬을 떠나 마치 오스트레일리아가 목표인 것처럼 서남쪽으로 항진해갔다.

8월 3일, 마지막 급유를 마친 과달카날 침공함대는 서쪽으로 변침했다가 곧 북쪽으로 변침하여 과달카날을 향하여 접근해갔다.

8월 5일과 6일은 날씨가 나빠서 일본군의 정찰기가 활동하는 데 큰 장애를 받았다.
실제로 상륙 전날인 8월 6일에는 일본군의 정찰기 1대가 침공함대 바로 상공까지 날아와서 미군측에서는 들켰다고 생각했으나 악천후로 인하여 이 정찰기는 침공함대를 발견하지 못했다.

1942년 8월 7일 오전 5시 35분, 제61기동부대에서 과달카날을 향하여 44대, 툴라기를 향하여 41대 등 총 85대의 함재기가 출격했다.
이들은 툴라기와 가부투에 정박해있던 일본군 비행정 및 수상비행기 18대를 격파하고 연료저장고와 많은 시설물들에 피해를 입혔다.

오전 6시 14분에는 과달카날 상륙부대를 엄호하는 순양함 3척과 구축함 4척이 과달카날 상륙예정지를 향하여 함포사격을 시작하였고, 2분 후인 6시 16분부터는 툴라기 상륙부대를 엄호하는 순양함 1척과 구축함 3척이 역시 함포사격을 시작하였다.
미해병대의 상륙은 완전히 기습을 달성한 것으로 솔로몬 제도의 방어를 담당하는 라바울의 일본제17군사령부가 과달카날 상륙작전의 보고를 들은 것은 이미 폭격이 진행되고 있던 오전 6시 12분이었다.
오전 6시 51분에는 상륙주정이 해상에 내려졌고, 툴라기에 대한 상륙은 오전 8시, 과달카날에 대한 상륙은 오전 9시 10분에 예정대로 실시되었다.

오전 11시 30분, 제61기동부대에 부겐빌 섬 남쪽에 숨어있던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연안감시대원인 Paul Mason 으로부터 일본기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경보가 들어왔다.
오전 8시 30분에 라바울 기지를 떠난 다이난항공대 소속 27대의 96식 넬 육상공격기와 18대의 제로기가 공격해 온 것이다.
다이난항공대는 제1항공함대 소속의 제1급 제로기 조종사들이 전멸해 버린 당시 상황에서는 단연 일본해군에서 최고의 기량을 가진 제로기 조종사들이 모여있는 항공대였다.
제61기동부대에서는 즉각 기존의 CAP세력에 추가하여 와일드캣들이 발진하기 시작했다.
엔터프라이즈에서도 오후 12시12분부터 연속적으로 와일드캣을 발진시켰다.

오후 1시 15분에 일본공격대가 과달카날 상공에 도달했다.
고공에서 대기하던  60대 이상의 와일드캣들이 내려꽂히면서 이들을 덮쳤다.
다이난 항공대 소속 제로기 조종사들의 기량이 상당히 뛰어났다고는 하지만 그들에게도 1,000km 이상을 비행한 후에 체공가능시간이 불과 15분 밖에 안되는 상황에서 고공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덮치는 3배가 넘는 숫자의 와일드캣을 제압할 재주는 없었다.
이날 다이난 항공대는 11대의 와일드캣을 격추하는데 성공했으나 자신들도 큰 피해를 입어서 출격한 45대 중에서 무려 32대를 잃었는데 이건 다이난 항공대 창설 이래 최대의 손실이었다.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 로 유명한 일본해군의 에이스 사까이 사부로 상사도 이날 편대비행중인 8대의 아벤저 뇌격기들을 와일드캣으로 착각하여 후방에서 접근하다가 7.62mm 후방기관총의 집중사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다음날인 8월8일에는 뉴아일랜드 섬의 캐비엥 기지에서 출격한 45대의 99식 발 급강하폭격기가 공격해 왔다.
이번에는 부겐빌 북부에 있던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연안감시대원 Jack Read 중위가 오전 8시 40분에 이들을 발견하여 침공함대에게 경보를 발했다.
또다시 제61기동부대에서 와일드캣들이 날아올라 이들을 기다렸으나 일본기들은 예상을 깨고 부겐빌 섬을 지나 북상한 후 반전하여 북쪽으로부터 침공함대에 돌입해왔다.
즉각 제62기동부대의 대공포화가 불을 뿜었고 곧이어 전투기들도 가세하여 13대의 일본기가 격추되었다.
그들은 구축함 1척과 수송선 George Elliot을 격침했다.

제61기동부대는 8월7일과 8일 이틀에 걸친 일본기들의 공격을 무사히 물리쳤으나 자신들도 99대의 와일드캣 중 21대를 상실했다.
플레처 제독은 이대로 가다가는 제61기동부대가 큰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8일 오후 6시, 남태평양해역군사령관인 곰리 중장에게 원래 9일 오후에 철수하기로 되어있던 시간표를 하루 앞당겨서 즉시 과달카날에서 철수하겠다고 타전했으나 곰리 중장으로부터는 아무런 답신이 없었다.
8일 밤에 제61기동부대는 과달카날을 떠나 뉴칼레도니아로 향했다.
8월 24일에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인 데이비스 대령이 작성한 전투보고서(Action Report)에 따르면 엔터프라이즈는 2일간의 과달카날 상륙작전 기간 중 8월 7일에 237 소티, 8일에 135 소티, 합계 372 소티를 출격하여 일본군의 발 급강하폭격기 5대, 넬 육상공격기 6대, 제로기 3대를 격추하고 자신은 6대의 와일드캣을 잃었으며 3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과달카날에 상륙한 제1해병사단의 주력인 제5연대는 무혈상륙에 성공했으나, 제1 기습대대가 상륙한 툴라기와 제1공수대대가 상륙한 가부투에서는 일본군의 격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나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미해병대는 8일밤까지는 툴라기와 가부투의 일본군 수비대를 완전히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8일 저녁에 작전해역인 과달카날의 남쪽 해상을 떠난 제61기동부대가 산크리스토발 섬 앞바다를 지나가고 있던 9일 새벽 3시, 플레처 중장에게 과달카날 앞바다에서 순양함끼리의 야간해전이 있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훗날 사보섬 해전으로 불리게 될 이 처절한 전투에서 일본제8함대사령관 미까와 구니찌 제독이 이끄는 중순양함 5척(죠까이, 아오바, 기누가사, 카고, 후루다까), 경순양함 2척(덴류, 유바리) 구축함 1척(유나기)으로 이루어진 일본함대가 과달카날 앞바다에서 경계망을 펴고 있던 제62기동부대의 중순양함들을 9일 새벽 1시 37분부터 산소어뢰와 함포로 공격했다.

일본함대는 전투개시 불과 40분만에 미국중순양함 3척(아스토리아, 퀸시, 빈센스)과 오스트레일리아 중순양함 1척(캔버라)를 격침하고 중순양함 1척(시카고)과 구축함 1척(랄프 탈봇)을 대파하여 연합군에게 전사 1,024명과 부상 709명의 대손실을 입힌 반면 자신들의 피해는 중순양함 죠까이와 아오바가 소파되고, 전사 35명, 부상 51명으로 그쳐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사보섬 해전은 미해군이 경험한 최악의 패배였다.

한편 플레처 제독은 곰리 중장의 허가도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제61기동부대를 철수시켰다가 9일 새벽 3시에 과달카날 앞바다에서 해전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자 상당히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30분 후인 새벽 3시 30분에 철수를 허가하는 곰리 중장의 전문이 도착했다.
원래 곰리 중장은 플레처 제독의 철수허가요청을 받고 8일 오후 10시 41분에 철수를 허가하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으나 어쩐 일인지 그 전문이 5시간 가까이 지연되어 9일 새벽 3시 30분에야 플레처 제독에게 전달된 것이었다.
플레처 제독은 이 전문을 받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뉴칼레도니아로 발길을 재촉했다.
한편 사보섬 해전의 소식이 들려왔을 때 항모 와스프의 함장이었던 Forrest Percival Sherman 대령은 제18기동부대 사령관인 노예스 소장에게 즉각 북상하여 함재기로 퇴각하는 일본함대를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항모 와스프에는 야간공격 훈련을 받은 조종사들이 있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이는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플레처 중장의 마음을 읽고 있던 노예스 소장은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를 들어 거듭되는 셔먼 대령의 공격주장을 묵살했다.

제61기동부대가 떠나버리고 자체의 해상경계부대도 간밤의 해전으로 사실상 전멸해버리자 제62기동부대 사령관 터너 소장은 휘하의 수송선들에게 9일 하루동안 하역작업을 초스피드로 실시하도록 명령하고 그날 오후에 미처 하역하지 못한 절반 가량의 보급품들을 실은 채로 뉴칼레도니아를 향하여 철수했다.
그리하여 Alexander Archer Vandegrift 해병소장이 지휘하는 제1해병사단은 처음에 계획되었던 양의 1/3 수준인 약 30일치의 보급품과 함께 과달카날에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다.
과달카날 주변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완전히 확립한 일본군은 매일 폭격기를 보내어 해병대의 교두보를 폭격했고, 벌건 대낮에 순양함이나 구축함을 한척씩 보내어 해병대가 보유한 105mm 포의 사정거리 바로 바깥에서 포격을 가하곤 했다.
해병대는 아침에 라바울 기지에서 이륙한 일본폭격기가 과달카날 상공에 도착하는 시간인 정오 경을 ‘도죠타임’ 이라고 불렀다.
보급품이 다 떨어져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기 싫으면 해병대에게 남은 길은 오직 하나, 그들이 탈취한 완성 직전의 일본군 비행장을 빨리 완성하여 과달카날 주변의 제공권을 확보하고 해상보급로를 다시 여는 길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제1해병사단은 딱 한대가 양륙된 불도저와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장비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한시라도 빨리 비행장을 완성하기 위하여 공사에 박차를 가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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