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1항공함대 사령관인 나구모 쥬이찌 중장은 아까기가 공격을 당하여 기함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자 경순양함 나가라에 자신의 사령기를 옮겨 달았다.
나구모 중장과 참모들은 아까기의 함교에서 걸어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함교의 유리창을 깨고 밧줄을 타고 겨우 함교 밖으로 나와 구명보트를 타고 나가라로 옮겨갔다.
미드웨이 해전 이전까지 자신이 지휘하는 함을 단 한 척도 잃어본 적이 없던 나구모 중장은 불과 5분만에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정규항공모함 3척이 자기 눈앞에서 치명적인 피해를 당하자 그만 망연자실하여 나가라의 의무실에 드러누워 버렸다.
따라서 제1항공함대의 지휘권은 차석 지휘관인 아베 히로아끼 소장에게 넘어갔다.

아베 소장은 10시 50분에 지휘권을 받자마자 제2항공전대 사령관인 야마구찌 다몬 소장에게 미국항공모함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동시에 자신이 승좌한 나가라를 포함하여 제1항공함대의 모든 호위함정들에게 히류 주위로 모여서 진형을 형성하라고 명령함으로써 사실상 전투의 지휘권을 야마구찌 소장에게 넘겼다.
돈틀레스들의 공격 당시 현장에서 50km 정도 북쪽에 떨어져 있었던 관계로 참화를 피한 히류 함상에서 야마구찌 소장은 전투 지휘권을 받는 즉시 남아있던 히류의 비행대에 발진명령을 내렸다.

 

(일본항공모함 히류. 표준배수량 : 17,300톤, 길이 : 222m, 폭 : 22.3m, 속력 : 34.5노트, 항속거리 : 18노트로 14,200km/hr, 승무원 : 1,126명, 무장 : 5인치 포 12문, 25mm 대공포 31문, 함재기 : 예비기 16대 포함하여 73대)

 

오전 10시 58분, 발 급강하 폭격기 18대와 제로기 6대로 이루어진 공격대가 고바야시 미치오 대위의 인솔 하에 요크타운을 공격하기 위하여 항모 히류의 갑판을 떠났다.
고바야시 공격대는 요크타운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채 일단 2시간 전에 도네의 정찰기가 보고했던 지점을 향하여 출격했으나, 출격 직후 항모 소류를 공격하고 요크타운으로 돌아가던 제3폭격비행대를 발견했다.
고바야시 공격대는 이 돈틀레스들을 공격하는 대신 몰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오전 11시 33분, 제17기동부대의 플레처 소장은 돈틀레스들에게 공격받지 않은 일본항공모함이 최소한 1-2척 더 있다고 판단하고, 제5정찰비행대의 돈틀레스 10대에게 360km 에 걸친 적 항공모함 수색임무를 주어 발진시켰다.

11시 50분, 요크타운의 레이더가 남서쪽 50km 거리에서 접근하는 일본기들을 발견했다.
요크타운 함상에서 급유를 받고 있던 와일드캣들을 포함하여 요크타운의 가용한 와일드캣 12대가 즉각 출격했다.
제17기동부대의 연락을 받은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에서도 각각 4대씩의 와일드캣을 보내왔다.
또한 중순양함 펜사콜라와 구축함 3대가 제16기동부대로부터 파견되어 왔다.
꼬리에 고바야시 공격대를 달고 제17기동함대 상공에 도달한 제3폭격비행대는 요크타운에 착함을 거부당하고, 동남쪽으로 45km 떨어진 해상에 있던 제16기동부대로 날아갔다.

11시 56분, 미해군의 와일드캣들이 고바야시 공격대와 교전에 들어갔다.

일분 후인 11시 57분, 고바야시 공격대가 항모 요크타운의 항적을 발견했다.

미해군의 와일드캣 20대는 고바야시 공격대에 집요한 공격을 퍼부어 18대의 발 급강하폭격기 중 11대를 격추했다.

따라서, 요크타운 상공에 도달한 발 급강하폭격기는 7대였다.
당시 요크타운의 대공포화는 1.1인치 대공포의 시원찮은 성능을 고려할 때 상당히 정확한 편이어서, 선두에서 급강하폭격에 들어간 고바야시 대위 탑승기를 포함한 2대가 대공포화에 맞아 격추되었다.
고바야시 기는 폭탄을 분리한 직후 격추되었으나 250kg 짜리 폭탄은 제2번 엘리베이터 바로 뒤쪽을 뚫고 격납고 갑판에서 폭발했다.
몇 대의 함재기가 폭발을 일으켰으나 격납고의 스프링클러가 재빨리 작동하여 큰 화재로 번지지는 않았다.

당시 일본해군의 급강하폭격기 조종사들 또한 돈틀레스의 조종사 못지않은 베테랑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폭격은 상당히 정확했다.
고바야시 기에 이어 2번째 폭탄이 갑판을 직격했다.
그러나 요크타운은 일본항모들과는 달리 비행갑판에 연료와 무장을 만재한 함재기도, 격납고에 널려있던 폭탄도 없는 상황이었으며, 심지어 항공유 탱크와 파이프에는 폭발에 대비하여 이산화탄소가 채워져 있었으므로 폭탄 자체의 폭발 이외에 추가적인 유폭은 거의 없었다.

이어진 폭탄들은 지근탄을 기록하며 요크타운에 화재를 일으켰고 마지막 폭탄이 굴뚝으로 들어와서 기관실을 직격했다.
이 폭탄은 요크타운의 6개의 보일러 중 5개의 불을 꺼버려서 단 하나의 보일러에 의존하게 된 요크타운은 속력이 5노트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고바야시 공격대는 요크타운이 불길에 휩싸였다고 히류에 보고했다.

 

(고바야시 공격대에 폭격당한 직후의 요크타운 함상. 시커먼 연기는 기관실을 직격한 마지막 폭탄이 일으킨 화재로 인한 것이다. 화면 우측에 망치를 들고 있는 수병은 이전에 떨어진 폭탄으로 인하여 생긴 구멍을 수리하는 중이다. 화면 왼쪽으로 5인치 포와 1.1인치 대공포에 인원이 배치된 것이 보인다.앞에 보이는 와이어는 함재기 착함용 와이어. 윌리엄 로이 2등 사진사가 찍은 사진)

 

플레처 소장은 오후 1시 23분에 상처입은 요크타운을 떠나 순양함 아스토리아로 사령기를 옮겨 달았다.
그리고 니미츠 제독에게 무전을 보내어 전투의 지휘권을 제16기동부대의 스프루언스 소장에게 넘기겠다고 보고했고, 니미츠 제독도 승인했다.

그동안 요크타운의 손상관리반은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화재를 진압하고, 구멍난 비행갑판을 수리하고, 보일러의 기능을 정상화시켜서 오후 1시 50분경에는 속력을 20노트까지 낼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요크타운은 와일드캣들을 착함시켜 연료와 무장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한편 히류에서는 오전에 항모 소류에서 발진시켰던 2식 고속함상정찰기가 돌아와서 야마구찌 소장에게 요크타운의 제17기동부대와는 별도로 2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한 제16기동부대의 존재를 알렸다.
이 정찰기는 하필 제16기동부대를 찾았을 때 무전기가 고장나서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다.
야마구찌 소장은 고바야시 공격대가 요크타운을 격침시키거나 최소한 대파했으므로 이젠 새로 발견된 2척의 항공모함을 공격하기로 했다.

오후 1시 30분, 도모나가 죠이찌 대위가 지휘하는 히류의 제2차 공격대가 발진했다.
도모나가 공격대는 케이트 뇌격기 10대, 제로기 6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모나가 대위 탑승기는 오전의 미드웨이 공격에서 왼쪽 날개의 연료탱크가 파손된 상태였고 따라서 편도연료밖에 실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상 죽음을 각오한 공격이었다.

오후 2시 27분, 제16기동부대에서 지원나와 있던 CA-24 펜사콜라가 70km 전방에서 접근하는 도모나가 공격대를 발견했다.
요크타운에 착함하여 연료보급을 받고있던 와일드캣들이 즉시 연료보급을 중단하고 다시 날아올랐다.
CAP 임무를 맡고 있던 제3전투비행대의 와일드캣 6대는 고도 3,000m 에 있었기 때문에 1,500m 고도로 다가온 도모나가 공격대를 놓쳐 버렸다.
도모나가 대위는 화재를 진압하고 멀쩡하게 작전하고 있는 요크타운을 발견하고는 이 항공모함이 불과 3시간 전에 3발의 폭탄을 얻어맞은 항모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은 다른 미국항모라고 단정하고 공격했다.  

요크타운 전방 20km 지점에서 요크타운을 급히 이함한 와일드캣들이 도모나가 공격대를 덮쳤다.
케이트 뇌격기 4대와 제로기 3대가 격추되었다.
살아남아서 돌진해오는 케이트 뇌격기들을 향해서 제17기동부대의 호위함정들이 불을 뿜었다. 그 중에서 중순양함 아스토리아는 초저공으로 비행하는 케이트 뇌격기의 진행방향에 8인치 주포 사격을 가하여 거대한 물기둥을 연속적으로  일으키는 방식으로 1대의 케이트 뇌격기를 격추했다.

 

도모나가 대위는 살아남은 케이트 뇌격기들을 2개 편대로 나누어서 요크타운을 양쪽에서 협격했다.
그리고는 케이트 뇌격기들의 선두에서 앞장서 나가면서 어뢰를 발사하고는 그대로 돌진하여 요크타운의 비행갑판에 충돌했다.
요크타운의 함장인 Elliott Buckmaster 대령은 항공모함을 크게 좌회전시켜 가까스로 도모나가의 어뢰를 피했다.

하지만 도모나가 대위의 통찰력은 훌륭했다.
요크타운의 회전으로 인하여 절호의 사각을 확보한 나머지 4대의 케이트 뇌격기들이 2대씩 나뉘어 고도 15m 로 요크타운 전방 300m 까지 접근하여 함의 양쪽에서 동시에 어뢰를 발사했다. 벅매스터 함장은 그중 우현쪽에서 발사된 2발의 어뢰는 피할 수 있었으나 좌현 쪽에서 발사된 2발의 어뢰는 피하지 못했다.
오후 2시44분, 요크타운의 좌현 중앙부에 2발의 어뢰가 연속적으로 명중하면서 거대한 물기둥을 일으켰다.

 

(요크타운의 좌현에 일본군의 항공어뢰가 명중하는 순간. 중순양함 펜사콜라에서 찍은 사진)

 

즉각 요크타운의 모든 동력과 전기가 나갔으며 함체는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피격 직후에는 기울기가 6도였으나 5분만에 17도로 다시 5분만에 26도까지 기울었다.
피격 11분 후인 오후 2시 55분, 벅매스터 함장은 요크타운에 퇴함명령을 내렸다.

 

(어뢰에 맞은 직후 요크타운 함상의 모습. 비행갑판의 기울기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정면의 수병은 이미 구명의를 입고 있다.)

 요크타운이 어뢰를 맞은 직후인 오후 2시 50분, 오전 11시 33분에 요크타운을 떠난 제5정찰비행대의 돈틀레스 1대가 일본함대에 남은 마지막 항공모함인 히류를 발견했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즉각 공격명령을 내렸다.
제6정찰비행대에서 7대, 제6폭격비행대에서 3대, 요크타운에서 옮겨온 제3폭격비행대에서 15대등 총 25대의 돈틀레스가 제6정찰비행대장 갈라허 대위의 지휘 하에 오후 3시 30분까지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을 떠났다.

엔터프라이즈에서는 또다시 실수를 하여 히류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3시 15분에야 호넷에 전달했는데 그때 호넷은 오전의 출격에서 일본항모를 찾지 못하고 미드웨이로 갔던 제8폭격비행대를 맞아들이고 있었다.
결국 호넷의 공격대가 떠난 것은 4시가 되어서였다.

오후4시45분, 엔터프라이즈를 떠난 돈틀레스들이 히류 상공에 도달했다.

돈틀레스들은 고도 6,000m 상공까지 올라간 후 오후 5시 5분에 태양을 등지고 급강하폭격에 들어갔다.
CAP 임무를 맡고 있던 제로기 3대가 급상승하면서 공격을 가하여 웨버 소위의 탑승기를 격추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총 25대에 달하는 돈틀레스들의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국함대를 향하여 제3차 공격대를 발진시키려던 히류는 필사적인 회피운동을 하여 제6정찰비행대가 투하한 폭탄 중 첫 3발을 피하는데 성공했다.
첫 3발의 폭탄이 빗나가는 걸 본 제3폭격비행대가 전함 하루나를 폭격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제6정찰비행대를 따라 히류를 향하여 급강하폭격을 시작했다.
곧 히류의 앞갑판에 연속적으로 4발의 폭탄이 명중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하여 고속으로 항진하고 있던 히류는 앞갑판의 불이 금방 함선 전체로 번지면서 순식간에 오전에 공격당한 동료항모 3척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제3폭격비행대의 돈틀레스 2대는 전함 하루나를 폭격했으나 빗나갔다.
제로기의 반격에 의하여 2대의 돈틀레스가 더 격추되어 엔터프라이즈의 공격대는 총 3대의 돈틀레스를 상실했으나 그 대신 제1항공함대의 마지막 남은 항모 히류를 끝장내어 버렸다.

 

(불타는 히류. 일본의 수상정찰기가 찍은 사진)

16대의 돈틀레스로 편성된 호넷의 공격대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전투가 끝난지 15분이 지나서였다.
호넷의 공격대는 이미 치명타를 얻어맞고 불타고 있는 히류를 무시하고 전함 하루나와 중순양함 치꾸마를 폭격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그리하여 이 영광과 승리의 날에 호넷의 비행단은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

여담이지만 이날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무능하다고 찍힌 미처 제독은 그후로 고생을 단단히 하게 된다.
즉 그때까지만 해도 미해군의 항공관계자들 사이에서 가장 촉망받는 차기주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던 미처 제독은 미드웨이 해전이 끝나고 3주일 후인 1942년 6월 30일에 단행된 태평양함대의 인사이동에서 요직인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사령관 자리를 꿰차지 못하고 카탈리나 기를 관리하는 한직인 진주만의 정찰비행대장으로 밀려난다.
이후로도 스프루언스 제독이 니미츠 제독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태평양함대의 실세 참모장으로 버티고 있는 동안 미처 제독은 1942년 12월에 누메아의 항공대사령관, 1943년 4월에는 솔로몬군도 항공대 사령관 등을 지냈다.

스프루언스 제독이 제5함대 사령관직을 맡아 해상으로 나가게 된 1943년 8월의 인사이동에서는 다시 미본토 서해안의 해군항공대 사령관으로 밀려나는 등 1944년 1월까지 해군항공관계자들의 영원한 꿈이자 로망인 항공모함 기동부대 근처에는 얼씬도 해보지 못하고 육상근무만 전전하게 된다.
하지만 미처 제독은 그렇게 육상에서 전전하면서도 항상 맡은 일에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하여 가는 곳마다 뛰어난 성과를 올렸고, 원래가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으므로 곧 핼시 제독을 비롯한 태평양함대의 항공관계자들에게 상당한 신뢰를 얻게 된다.
그러한 태평양함대 항공관계자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바탕으로 그는 1944년 1월에 제5함대가 가진 타격력의 실체이며, 사실상 태평양함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고속항공모함부대인 제58기동부대의 사령관이 된다.

미처 제독은 길버트 제도 상륙작전에서 지나치게 소극적인 작전을 벌였다는 이유로 경질된 파우널 제독의 후임으로 앞으로 직속상관이 될 제5함대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니미츠 제독의 결정에 따라 드디어 마셜 제도 상륙작전에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이 작전에서 미처 제독은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아주 능수능란하게 지휘하여 뛰어난 성과를 거둠으로써 이후로는 스프루언스 제독도 미처 제독의 실력을 인정하게 된다.

오후 6시, 스프루언스 제독은 중순양함 아스토리아 함상의 플레처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어 히류에 대한 공격경과를 보고하고 나서 전문의 말미에 다른 훈령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미 오후 2시에 전투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던 스프루언스 제독이 굳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던 플레처 제독은

“훈령은 없다. 본관은 귀관의 행동을 따르겠다.”

라고 타전하여 제17기동부대를 포함한 전 함대의 전술적 지휘권이 완전히 스프루언스 소장에게 이양되었음을 명확하게 확인해 주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확실히 조심스럽고 신중한 스프루언스 제독은 스포트라이트를 즐기고 나서기 좋아하는 핼시 제독과는 대조적이다.
실제로 1943년 초에 니미츠 제독이 말라리아로 입원하게 되었을 때 만약 당시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이었던 핼시 제독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체스터가 아파서 입원했으니 그가 퇴원할 때까지는 태평양해역의 유일한 4성 제독인 내가 잠정적인 태평양함대 사령관이다."

라고 나설까 봐 두려워하여 진주만의 사령부에 계속하여 4성기를 걸어놓게 하고 입원사실 자체를 비밀로 했었다.(나의 입원을 핼시에게 알리지 말라?)

히류를 격파한 돈틀레스들은 6시 8분부터 엔터프라이즈에 착함을 시작하여 6시 34분에 착함을 마쳤고, 그날의 CAP 임무를 마친 엔터프라이즈의  마지막 와일드캣이 착함한 시간은 오후 7시 20분이었다.

플레처 제독으로부터 함대 전체의 전술적 지휘권을 확실하게 넘겨받은 스프루언스 제독은 오후 7시 15분, 제16기동부대와 제17기동부대에게 동쪽으로 변침할 것을 지시했다.
동쪽으로 물러나던 미국함대는 자정쯤 되어서 북쪽으로 변침했다.

비록 제16기동부대와 제17기동부대가 일본 제1항공함대의 항공모함 4척을 전멸시켰지만 아직도 막강한 일본의 수상함 세력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스프루언스 제독은 수상함대를 지휘하던 직감으로 일본함대가 수상함에 의한 야전을 시도하리라는 점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한척의 전함도 없는 미국함대의 약체 수상함 세력을 가지고 다수의 전함을 보유하고, 게다가 무서운 산소어뢰와 야전에 익숙한 승무원들을 가진 일본함대와 야전을 벌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앞으로 몇 시간 동안만 일본함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망다니다 보면 해가 뜰 것이고 그러면 다시 함재기들을 내보내어 전함이든 뭐든 전부 다 바다에 쓸어넣어 버릴 수 있는데 굳이 열세한 수상함 세력으로 야전의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스프루언스 제독의 판단은 정확했다.

야마모또 제독은 실제로 야전을 기도하고 있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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