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일 저녁이 되자 진주만에 있는 태평양함대사령부의 분위기는 낙관적으로 변해갔다.
사실 4일 저녁까지만 해도 미국함대가 일본제1항공함대에게 치명타를 먹인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지략이 풍부하고 아직도 막강한 수상함 세력을 잔뜩 보유한 야마모또 제독이 밤새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진주만의 사령부에서는 상당히 긴장된 분위기였다.

게다가 5일 새벽 130분경 미드웨이가 포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긴장은 최고도에 달했다.
전날에는 밤새 깜박깜박 선잠을 잤던 니미츠 제독도 이날은 꼬박 밤을 새웠다.
하지만 5일 낮동안의 경과로 보아 일본함대가 전투를 포기하고 퇴각 중인 사실이 확실해지자 태평양함대사령부의 분위기는 축제 분위기로 변해갔다.
그와 동시에 스프루언스 제독이 밤새 도망가지 않고 일본함대를 추격했더라면 더 많은 전과를 올렸을 것이라며, 역시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항공관계자가 지휘해야 한다는 불평불만이 진주만의 항공관계자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일본측 기록을 들여다본 결과는 미드웨이 해전 당시 스프루언스 제독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일본측이나 미국측이나 전반적으로 이제 전투는 끝났다는 분위기였지만 정작 요크타운의 숨통이 끊어지고 미드웨이 해전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가 벌어진 것은 다음날인 66일이었다.

일본잠수함 I-168 호는 상처입은 요크타운을 찾아 미드웨이 북방 해상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I-168 호에게도 이번 미드웨이 작전은 참으로 재수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원래 I-168 호는 미드웨이 해전을 앞두고 진주만을 정찰하려는 일본의 장거리 비행정에 급유를 해주기 위하여 접선장소인 프렌치 프리게이트 숄에 갔으나 미국구축함 DD-361 Clark 가 죽치고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정찰비행이 취소되어 버렸다.
이후 진주만과 미드웨이 사이에 포진하여 미국항공모함들의 동정을 살폈으나, 이미 미국항공모함들이 빠져나간 뒤라 헛물만 켰다.
일본제1항공함대의 항공모함들이 박살난 후에 야마모또 제독의 명에 따라 5일 새벽 130분에 미드웨이에다가 100mm 포의 포탄 8발을 퍼부어 진주만의 태평양함대사령부를 깜짝 놀라게 하였으나, 곧 미드웨이 작전이 중지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I-168 호의 함장인 다나베 야하찌 소좌는 상처입은 채로 미드웨이 부근 어디에선가 떠돌고 있을 미국항공모함을 반드시 격침하겠다고 결심하고 미드웨이 북방해상을 계속 돌아다녔다.

 

(I-168 과 같은 해대6급의 잠수함인 I-68 의 사진. I-168 의 사진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표준배수량 : 1,400 , 길이 : 104.7m, : 8.2m, 속력 : 수상 23노트, 수중 .2노트, 항속거리 : 수상 - 10노트로 26,000km, 수중 - 3노트로 120km, 승무원 : 68, 무장 : 533mm, 어뢰발사관 6, 전방 4, 후방 2, 어뢰 14, 100mm 대공포 1, 13mm 대공기관총 1, 7.7mm 기관총 1)

 

6일 오전에 I-168은 상처입은 채로 예인되고 있는 요크타운을 발견했다.
요크타운 주변에서 주변에 6척의 구축함들이 엄중한 대잠경계망을 펴고 있었지만 I-168 이 침투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오후 1237, 요크타운 좌현 불과 400m 지점까지 접근한 I-168 4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처음의 1발은 빗나갔지만 2번째 어뢰가 요크타운에 바짝 붙어서 동력과 전력을 공급하고 있던 구축함 해먼에게 정통으로 명중하여 동체를 반으로 꺾어버렸다.

 

(I-168 에게 뇌격을 당한 DD-412 해먼이 격침되는 순간. 요크타운에서 찍은 사진)

 

이어서 2발의 어뢰가 이틀 전에 어뢰에 피격되었던 요크타운의 좌현에 다시 명중했다.
폭포같은 거대한 물기둥이 연속적으로 솟아오르면서 선체가 부르르 떨었다.
주변에 있던 미국구축함들이 I -168 에 달려들어 폭뢰공격을 가하여 I-168 은 상당히 위험한 처지에 몰렸으나 결국 살아남아 무사히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요크타운에 승함해 있던 벅매스터 함장 이하 손상관리반은 다행히 이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었으나 수선하구역을 중어뢰 2발에 직격당한 피해는 그들의 수리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들은 급히 주변의 구축함으로 옮겨 탔다.

그런데도 요크타운은 가라앉지 않고 해가 질 때까지 해상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러자 벅매스터 함장은 다시 한 번 요크타운을 예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어두운 밤에 언제 가라앉을지도 모르는 항공모함에 승선하거나 예인 로프를 연결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잘 알고 있던 그는 날이 밝으면 다시 한 번 예인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날인 7일 새벽 458, 요크타운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침몰하고 말았다. 벅매스터 함장은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오후에 날이 밝을 때 승선하여 침수를 막기위한 응급처치라도 해 둘 걸..

하고 후회했으나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한편 5일 새벽에 탬버 호를 보고 놀라서 서로 충돌한 후에 14 노트의 저속으로 도망가고 있던 모가미와 미꾸마는 비록 5일 실시된 미드웨이 항공대의 공격에서는 겨우 살아남았으나 대공포화에 피탄된 빈디케이터 한대가 미꾸마의 후방포탑에 돌입하여 자폭해버리는 바람에 속력이 더욱 떨어져서 느릿느릿하게 도망가고 있었다.
오후 245분에 이들의 상공에 450kg 짜리 대형폭탄을 장착한 24대의 돈틀레스가 나타났다.
미드웨이 해전의 마지막 전투를 장식하기 위하여 호넷과 엔터프라이즈가 마지막 공격대를 보내온 것이었다.
이미 대파되어 간신히 물에 떠 있던 미꾸마는 450kg 짜리 폭탄이 한 발 명중하자, 순식간에 모든 기능을 잃었고 곧 뒤집혀서 침몰했다.
이때 미꾸마에서는 1,000 여명의 장병들이 사망하여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한 일본함정 중 가장 많은 전사자를 기록했다.
모가미는 천신만고 끝에 격침을 면하고 대파된 채로 트럭섬으로 귀환했으나 향후 1년간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마지막 공격대가 발진한 직후에 2대의 돈틀레스가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을 떠났다.
그들 중 한대가 침몰하기 직전의 미꾸마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일본수상정찰기가 찍은 불타는 히류의 모습과 함께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해군의 참패를 상징하는 사진이 되었다

(침몰 직전의 미꾸마. 엔터프라이즈의 수석사진사 J. A. Mihalovic 이 찍은 사진. 미꾸마는 이 사진이 촬영된 후 2시간 정도 지나서 침몰했다.)

 

일본제1항공함대의 항공모함 3척을 일시에 요절낸 운명의 5을 찍은 사진은 유감스럽게도 한 장도 없다.
공격하는 측이나 당하는 측이나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사진을 찍을 정신이 없었다.

미꾸마에 대한 공격을 끝으로 미국함대는 일본함대에 대한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했다.
어느덧 미국함대는 웨이크 섬의 항공기공격권에 접근하고 있었다.

194266일 오후 7, 스프루언스 제독의 명령에 따라 미국함대는 동쪽으로 변침했다.

이로써 미드웨이 해전은 끝났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연합함대는 정규항모 4(아까기, 카가, 소류, 히류)와 중순양함 1(미꾸마) 격침, 항공기손실 332, 전사 3,500 여명의 피해를 입었다.
미태평양함대는 정규항모 1(요크타운), 구축함 1(해먼) 격침, 항공기손실 147, 전사 307 명의 피해를 입었다.
일본연합함대의 전사자 중에서 특히 제1항공함대소속의 제1급 제로기 조종사 100 여 명의 희생이 특히 뼈아픈 일이었다.

엔터프라이즈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45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는데 전원 항공기 승무원들이었다. 또한 요크타운 비행단 소속이지만 엔터프라이즈에서 작전했던 제3폭격비행대와 제5정찰비행대에서도 6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미드웨이 해전은 확실히 태평양전쟁의 분수령을 이루는 전투였다.

비록 미드웨이 해전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연합함대는 쇼가꾸와 즈이가꾸를 위시하여 8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엔터프라이즈, 호넷, 새러토가의 3척을 보유한 미태평양함대에 비하여 함대항공력에서 여전히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함을 비롯한 수상함세력은 말할 것도 없었고..
하지만 일본연합함대는 이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공격의 주도권을 미태평양함대에 빼앗겨 버렸다.
이젠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시기는 끝나고, 이미 확보한 광대한 영역을 어떻게든 지켜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다.

반면 미태평양함대는 비록 열세한 세력이지만 이제야말로 작전의 주도권을 잡고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을 공격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미본토의 어마어마한 공업력이 제 궤도에 올라서 엄청난 양의 전쟁물자를 쏟아낼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되는 처지의 미태평양함대로서는 이제 태평양전쟁의 승리는 이미 따놓은 당상인 셈이었다.
반대로 일본연합함대로서는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로 인하여 미국을 조기에 회담테이블로 끌어내어 전쟁을 종결한다는 사실상 유일한 승리의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미육군이 해군보다 미드웨이 해전의 대승을 더 기뻐했다.

해군 입장에서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도 자신보다 더 강력한 함대항공력을 보유한 일본을 상대로 앞으로도 1년 이상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육군은 적어도 미드웨이 해전으로 일본의 팽창은 끝났다는 걸 알았고, 따라서 미본토에서 새로 편성 중인 사단들을 마음놓고 영국으로 보낼 수 있었다.

 

사실 미국은 제2차 대전에 뛰어들기 이전에 이미 일본보다 독일을 먼저 처치하기로 영국과 약속했었다.

따라서, 진주만 기습 이후 실제로 미국을 공격한 나라는 일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마셜 장군이 제출한 육군의 유럽 우선 전략을 승인했다.

육군 측에서는 유럽과 태평양에 파견되는 사단의 비율을 2:1 로 맞추려고 했으나, 초기에는 일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태평양함대의 주력이 진주만에서 얻어맞아 거의 마비된 틈을 타서 일본군이 태평양에서 파죽지세로 전진하자, 육군은 훈련이 끝난 사단들을 허겁지겁 태평양 상의 요지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배치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육군의 유럽 우선 전략에도 불구하고, 진주만 기습 이후 미드웨이 해전 이전까지 미본토를 떠난 8개의 육군 사단 중 5개가 태평양으로 보내졌다

게다가 진주만 기습 이전에 해외에 배치되어 있던 3개 사단 모두가 태평양에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사실 미드웨이 해전 이전까지 육군의 유럽 우선 전략은 말뿐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제 미드웨이 해전으로 육군 입장에서는 태평양의 급한 불은 끈 셈이 되었고, 따라서 이후로는 영국으로 육군 병력을 수송하는 볼레로 작전이 급속도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태평양함대가 그토록 열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요인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연합함대의 세력이 널리 분산되었고 각 부대간의 거리가 멀어 일단 유사시 상호지원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비하여 태평양함대의 타격력은 효율적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2. 태평양함대는 연합함대가 가지지 못한 레이더를 가지고 있었다.
3. 태평양함대는 연합함대의 공격력(특히 항공력)을 상당부분 흡수할 수 있는 (몸빵용?) 항공기지인 미드웨이를 가지고 있었다.
4. 가장 중요한 점으로서 태평양함대는 상대방인 연합함대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는데 성공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의도는 해전 당일까지도 완벽하게 숨기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한가지 덧붙인다면 역시..행운이다.
미태평양함대는 일본제1항공함대의 나구모 제독이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착오를 일으키는 바람에 물위에 뜬 화약고나 다름없는 상태의 일본항공모함들을 기습할 수 있었다.
솔직히 제16기동부대도 공격대 출격과정에서 큰 실수가 있었으나, 마침 타이밍이 딱 맞아 떨어져서 단 5분만에 전체 전투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만일 맥클러스키 소령의 공격이 단 10분만 늦어졌어도 이후의 전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승리한 미국함대는 해상에서 급유함을 만나서 급유를 받은 후 1942613일 오후 늦게 진주만에 당당하게 입항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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