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정찰/폭격 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 32대를 이끌고 있던 엔터프라이즈의 비행단장 Clarence Wade McClusky, Jr. 소령은 9시 20분에 일본함대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해상에 도착했으나, 눈에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뿐이었다.
일본함대가 이미 남동쪽으로 통과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한 맥클러스키 소령은 남서쪽으로 55km 정도 더 가본 다음 침로를 되돌려서 북동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변침하여 귀환하기로 했다.
이함한지 벌써 2시간이나 지나 연료 상황이 우려할만한 수준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시 맥클러스키 소령의 결심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남서쪽으로 갔다가 일본함대를 발견하지 못한 맥클러스키 소령은 북동쪽으로 변침했다.
(맥클러스키 소령)
9시 47분, 맥클러스키 소령은 북쪽 바다에서 가느다란 항적을 하나 발견했다.
일본함대에서 떨어진 함정이 본대를 찾아간 항적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한 맥클러스키 소령은 일본구축함 아라시가 남긴 그 항적을 따라갔다.
(일본해군의 가게로급 구축함 아라시)
제6뇌격비행대의 공격이 끝나고 제3뇌격비행대의 공격이 막 시작되고 있던 오전 10시 02분, 맥클러스키 소령은 3척의 일본항공모함을 발견했다.
제4의 항모인 히류는 그날 가장 일찍 변침했기 때문에 수평선 너머인 50km 정도 더 북쪽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맥클러스키 소령은 엔터프라이즈에 간단한 접촉보고를 하고나서 6,000m의 고도를 유지하면서 공격위치로 이동했다.
제6정찰/폭격비행대의 상태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제6폭격비행대 소속의 Tony Schneider 소위의 탑승기는 적 발견 직후 연료가 고갈되어서 모함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게다가 제6폭격비행대의 돈틀레스 몇 대는 호흡용 산소가 다 떨어졌다.
할수 없이 제6폭격비행대장인 Richard Best 대위는 제6폭격비행대를 이끌고 호흡용 산소가 필요없는 4,500m 고도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 외에는 맥클러스키 소령 지휘 하의 돈틀레스들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공격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적을 향하여 바로 급강하하면 되는 위치에 있었으며, 제로기는 전부 다 저공에서 제3뇌격대와 교전하느라고 폭격을 방해할 제로기도 없었고 그들을 공격하는 대공포화도 없었다.
한마디로 아무런 방해없이 기습적으로 급강하 폭격을 실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일본함대의 남서쪽에서 접근한 맥클러스키 소령은 세 척의 항모 중 남쪽에 있던 두 척의 항모 -서쪽의 카가와 동쪽의 아까기- 를 목표로 정했다.
맥클러스키 소령이 직접 이끄는 제6정찰비행대로부터 1,500m 아래에 있던 제6폭격비행대의 베스트 대위는 자신들로부터 가까이 있는 항모 카가를 공격하겠다고 맥클러스키 소령에게 전했다.
하지만 그 통신을 듣지 못했던 맥클러스키 소령은 제6정찰비행대를 모두 이끌고 카가를 향하여 급강하 폭격에 들어갔다.
베스트 대위는 자신보다 1,500m 더 윗쪽에 있던 제6정찰비행대가 갑자기 제6폭격비행대의 진로를 가로지르며 급강하폭격에 들어가자 깜짝 놀랐으며, 진형을 유지하라는 베스트 대위의 긴급명령을 듣지못한 제6폭격비행대의 돈틀레스 5대도 얼떨결에 맥클러스키 소령을 따라 카가를 향하여 급강하 폭격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카가를 향하여 급강하 폭격에 들어간 돈틀레스는 합계 22대나 되었다.
맥클러스키 소령이 급강하 폭격에 들어간 직후 일본제1항공함대에서도 이 돈틀레스들을 발견했으나 초속 140m 의 속력으로 급강하하는 돈틀레스들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고도 6,000m에서 급강하를 시작한 돈틀레스들은 고도 450m 에 이르자 맥클러스키 소령을 선두로 하여 차례로 폭격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표적이 된 카가는 필사적으로 회피기동에 들어갔다.
그 노력이 주효하여 가장 선두에서 돌입하던 맥클러스키 소령과 그 요기들인 William Pittman 소위와 Richard Jaccard 소위의 폭탄은 빗나갔다.
그 당시 돈틀레스들은 고참인 편대장과 2명의 신참인 요기를 묶어 3대가 하나의 편대를 이루고 급강하폭격시에도 편대장을 따라 같은 코스로 급강하하다가 편대장을 따라 같은 고도, 같은 위치에서 폭탄을 투하하였기 때문에 편대장의 폭탄이 빗나가면 그 편대의 폭탄은 대부분 다 빗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해군 중의 일부는 자기들의 머리 위에서 바로 떨어져 내려오는 돈틀레스들을 보면서 그 급박한 순간에도 제6정찰/폭격비행대의 폭격실력도 2시간 전의 헨더슨 공격대와 비슷하게 형편없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기대한 사람도 꽤 많았다고 하지만 완전히 착각이었다.
미해군은 복엽기 시대에 이미 함상 급강하폭격기를 정식으로 채택할만큼 함상 급강하폭격기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선구자였다.
(F8C 헬다이버 함상 급강하 폭격기. 육군항공대의 공격기인 A-3 Falcon 의 함상 급강하폭격기 형이다. 승무원 : 2명, 길이 : 8.3m, 폭 : 11.6m, 최고속력 : 224km/hr, 항속거리 : 1,010km, 무장 : 7.62mm 기관총 6정, 4정은 정면, 2정은 후방석, 45kg 짜리 폭탄 2발)
따라서, 미해군 항공대는 특히 급강하폭격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국항공모함의 급강하폭격기 조종사들 중 많은 수가, 특히 편대장 급들은 대부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략하기 이전에 돈틀레스의 전신인 빈디케이터부터 급강하폭격기를 탔던 사람들이엇다.
한마디로 3년 이상의 기간동안 항공모함 비행대끼리 서로 경쟁해가며 밥먹고 급강하폭격만 해온 사람들로서 비행학교를 갓 졸업하여 급강하폭격방식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던 헨더슨 공격대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카가는 급격한 회피기동으로 처음 3개의 폭탄은 무사히 피했으나 10시 22분, 4번째로 돌입한 제6정찰비행대장 Gallaher 대위가 투하한 225kg 짜리 폭탄이 고물쪽 비행갑판에 몰려있던 뇌격기 한가운데 정확하게 명중했다.
순식간에 뇌격기들의 연료와 무장이 폭발하면서 전 갑판에 걸쳐 폭발이 일어났다.
갈라허 대위의 요기들이 투하한 폭탄들은 2발 모두 지근탄을 기록했다.
이들 중 한대인 John Q. Roberts 소위의 탑승기는 급강하에서 고도를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해상에 추락하여, 로버츠 소위와 후방사수인 Thurman R. Swindel 병장이 전사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서 7번째로 돌입한 Norman "Dusty" Kleiss 중위가 투하한 폭탄은 카가의 전방 엘리베이터를 뚫고 들어가 격납고 갑판에서 폭발하여 그곳에서 무장을 달고 연료보급을 받고 있던 함재기들을 순식간에 날려버렸고 그 충격으로 함교의 유리창이 다 깨졌다.
이어서 클라이스 중위의 요기가 투하한 3번째 명중탄이 함교 바로 앞에 있던 유조차에 명중하여 불타는 휘발유의 화염이 함교를 덮쳐 지사꾸 오까다 함장 이하 함교 요원들이 전원 사망했다.
마지막에 명중한 폭탄은 제6폭격비행대가 투하한 500kg 짜리 대형폭탄이었는데 역시 격납고 갑판에 명중했다.
당시 폭격에 참가했던 제6정찰/폭격비행대는 카가에 8발 이상의 명중탄을 보고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명중탄은 위의 4발이다.
카가는 전투를 시작한지 불과 30초만에 4발의 폭탄에 명중당하여 연료와 무장을 만재한 비행갑판과 격납고 갑판의 항공기들에다가 격납고 갑판 여기저기에 널려있던 폭탄들까지 한꺼번에 유폭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통제불능의 치명적 상태가 되었다.
(일본항공모함 카가. 표준배수량 : 38,200 톤, 길이 : 247.7m, 폭 : 32.5m, 속력 : 28.5노트 승무원 : 1,708명, 무장 : 200mm 포 10문, 120mm 포 16문, 20mm 대공포 22문, 함재기 : 에비기 18대 포함하여 90대)
한편, 베스트 대위가 이끄는 제6폭격비행대 소속 9대의 돈틀레스들은 북동쪽으로 나아가 아까기를 공격했다.
10시 26분, 가장 먼저 급강하한 베스트 대위가 투하한 500kg 짜리 폭탄이 아까기의 비행갑판을 뚫고 들어가 격납고 갑판에서 폭발했다.
베스트 대위의 요기들 중 Edwin J. Kroeger 중위의 폭탄은 지근탄을 기록했으나, 이어서 돌입한 Frederick T. Weber 소위가 투하한 500kg 짜리 폭탄은 고물쪽 비행갑판에 몰려있던 함재기들의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제6폭격비행대에서는 아까기에 대하여 몇 발의 명중탄을 더 보고하고 있으나,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베스트 대위와 그의 요기인 웨버 소위의 2발이다.
아까기에서도 역시 카가에서와 같이 함재기의 연료와 무장, 격납고의 폭탄유폭으로 인한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그러나, 카가에서와는 달리 나구모 중장을 비롯한 함교 요원들은 대부분 목숨을 건졌고, 나구모 중장은 그의 사령기를 경순양함 나가라로 옮겼다.
(나구모 제독의 기함 아까기. 표준배수량 : 36,500 톤, 길이 : 260.7m, 폭 : 31.3m, 속력 : 31노트, 항속거리 : 12노트로 15,200km, 승무원 : 1,630명 무장 : 8인치포 6문, 120mm 포 12문, 25mm 대공포 28문, 함재기 : 예비기 25대 포함하여 91대)
엔터프라이즈의 제6정찰/폭격비행대가 카가와 아까기를 폭격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 Max Leslie 소령이 지휘하는 요크타운의 제3폭격비행대는 소류를 공격하고 있었다.
레슬리 소령에게는 그날이 상당히 재수가 나쁜 날이었다.
제3폭격비행대는 인력이 아닌 전기로 작동하는 기계를 이용하여 무장장착을 실시했는데 아직까지 사람의 실력보다 신뢰성이 떨어졌던 그 기계 때문에 17대의 돈틀레스 중에 레슬리 소령 탑승기를 포함한 5대의 폭탄이 불완전하게 장착되었고 그들은 비행 도중에 폭탄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제3폭격비행대 소속 17대의 돈틀레스 중에 실제로 소류의 폭격에 참가한 것은 12대였다.
레슬리 소령의 제3폭격비행대는 일본함대를 발견한 후 제3뇌격비행대 및 제3전투비행대와 헤어져 6,000m 상공에 올라가서 폭격위치를 잡았다.
마침 그때 남쪽에서는 맥클러스키 소령의 제6정찰/폭격비행대가 홀연히 나타나서 카가와 아까기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광대한 대양에서 따로 행동하는 두 개의 공격대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집결하려면 몇 주간의 집중적인 훈련을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참으로 신기한 우연의 일치였다.
오전 10시 28분, 레슬리 소령은 3척의 항모들 중 북쪽에 위치하여 제3폭격비행대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카가로 보이는 항공모함 -사실은 소류- 을 향하여 급강하했다.
하지만 폭탄이 없는 레슬리 소령은 사용가능한 유일한 무기인 12.7mm 기관총을 사용하여 소류의 대공포화와 이물의 비행갑판 쪽으로 기총소사를 가했으나 잠시 후 그것마저 고장나 버렸다.
하지만 레슬리 소령의 뒤를 이어 급강하폭격을 실시한 제3폭격비행대의 돈틀레스들은 소류에 3발의 명중탄을 기록하여 소류를 카가나 아까기와 같은 아비규환의 불지옥으로 만들었다.
(일본항공모함 소류. 표준배수량 : 15,900톤, 길이 : 222m, 폭 : 21m, 속력 : 34.5노트, 승무원 : 1,103명, 무장 : 5인치포 12문, 25mm 대공포 26문, 13.2mm 기관총 15정, 함재기 : 예비기 16대 포함하여 73대)
그리하여 제6정찰/폭격비행대와 제3폭격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들은 불과 5분 동안에 일본이 자랑하는 정예항모 3척을 그 함재기와 함께 철저히 격파했다.
(돈틀레스들의 공격 순간을 재현한 디오라마)
단 5분만에 제1항공함대의 기함 아까기와 동급함인 대형항공모함 카가를 물에 뜬 거대한 불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제6정찰/폭격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들은 눈앞에서 자신들의 모함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는 것을 보고 분노로 눈이 뒤집힌 제로기들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맥클러스키 소령은 2대의 제로기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서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후방사수인 Walter G. Chochalousek 병장은 7.7mm 기관총으로 이 2대의 제로기를 상대하여 한대를 격추시키고 나머지 한대를 쫓아버렸다.
제6정찰비행대 소속 피트맨 소위의 후방사수인 Floyd Adkins 상병은 7.7mm 기관총의 고정대가 망가지자 무게가 80kg 이나 나가는 기관총을 직접 손에 들고 사격하여 제로기 한대를 격추했다.
제6정찰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 6대는 Charles R. Ware 대위 지휘 하에 견고한 그룹을 형성하여 현장을 탈출했다.
이 그룹은 초저공으로 천천히 해면을 비행하며 서로의 사각을 보완하고 접근하는 적기에 화력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한대도 격추당하지 않고 무사히 사지를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후방사수인 Earl Howell 상병은 제로기 한대를 격추했다.
그러나 일본함대 상공에서 살아남은 돈틀레스들에게는 무사하게 항모에 귀환해야하는 또다른 과제가 놓여 있었는데, 여기에는 크게 2가지의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이함한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고 폭격과정과 탈출과정에서 많은 연료를 소비하여 연료잔량이 달랑달랑한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제6정찰/폭격비행대의 그 누구도 제16기동부대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모른다는 점이었다.
원래 함재기 조종사들은 이함할 때 ‘Point Option’ 이라고 하여 그들이 돌아왔을 때 시간별로 항공모함이 있을 장소에 대하여 미리 브리핑을 받게 되어 있었으나, 이번 출격에서는 그러한 포인트 옵션이 없었으며 다만 출격 후에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이 남서쪽으로 25노트의 속력으로 항진할 것이라는 간단한 통보를 받았을 뿐이었다.
연료를 아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6정찰/폭격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들은 하나씩 연료가 고갈되어 추락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희생자는 그룹을 형성하여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 웨어 대위의 그룹에서 나왔다.
제6정찰비행대 소속의 Frank O'Flaherty 소위와 후방사수인 Bruno P. Gaido 병장은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안전하게 탈출하여 구조용 고무보트에 무사히 올라타는 것까지 동료들에 의하여 목격되었다.
그후 오플라허티 소위와 가이도 병장은 일본구축함에 구조되었으나, 일본군들은 그들을 심문한 후에 온 몸을 포박하고, 발에 무거운 물건을 달아서 바다에 던져 버렸다.
웨어 대위의 그룹 5대 중에서 John McCarthy 소위 탑승기만이 제16기동부대를 찾아와서 부근 해상에 착수하여 무사히 귀환했고, 나머지 4대는 방향을 잘못 판단하여 실종되었다.
그 외의 돈틀레스들은 좀 더 운이 좋았다.
제6폭격비행대의 Tom Ramsay 소위와 S. L. Duncan 상병은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6월 12일에 미드웨이의 카탈리나 기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Joe Penland 대위와 후방사수인 H. F. Heard 상병도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다음날 구축함 DD-360 Phelps 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C. E. Dickinson 대위도 무사히 제16기동부대를 찾아와서 부근 해상에 불시착했다.
전체적으로 제6정찰비행대 17대중 8대, 제6폭격비행대 14대 중의 5대가 무사히 돌아왔는데 2대는 손상이 너무 심하여 다시는 비행할 수 없었다.
이들 중 마지막 기체는 정오 직후에 착함하였는데 무려 5시간을 공중에 떠 있었다.
제6뇌격비행대에서는 14대 중 4대가 돌아왔는데 1대는 손상이 너무 심하여 착함한 직후 바다에 밀어넣어 버렸다.
소류를 요절낸 제3폭격비행대의 돈틀레스들은 제17기동부대를 제대로 찾아왔으나 요크타운은 이들의 착함을 불허하고 제16기동부대로 보냈다.
일본항모 중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항모, 히류가 제17기동부대에 공격대를 보내온 것이었다.
'엔터프라이즈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엔터프라이즈 이야기(18)-미드웨이 해전(7) (0) | 2017.12.28 |
---|---|
엔터프라이즈 이야기(17)-미드웨이 해전(6) (0) | 2017.12.27 |
엔터프라이즈 이야기(15)-미드웨이 해전(4) (0) | 2017.12.26 |
엔터프라이즈 이야기(14)-미드웨이 해전(3) (0) | 2017.12.26 |
엔터프라이즈 이야기(13)-미드웨이 해전(2) (0) | 2017.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