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솔로몬 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엔터프라이즈는 우선 통가에 들러 탄약을 내려놓고 급유를 받은 다음 진주만을 향하여 출발했다.
중순양함 포틀랜드와 4척의 구축함이 엔터프라이즈를 호위했다.  
엔터프라이즈 비행전대는 해체되어 자위를 위한 와일드 캣 6대와 돈틀레스 6대를 제외한 함재기들은 와스프와 호넷, 그리고 뉴헤브리디즈 제도와 헨더슨 비행장에 분산배치되었다.  
1942년 9월10일, 엔터프라이즈가 진주만에 도착하여 즉각 24시간 내내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갔다.  
엔터프라이즈는 구형의 1.1인치 대공포 4개 포대를 보다 신형인 4연장 40mm Bofos 대공포로 교체하고, 20mm 대공포도 대폭 증설했다.  

엔터프라이즈가 진주만에서 수리를 받고 있는 중에도 과달카날을 둘러싼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가 아직 통가에 있을 때인 1942년 8월 31일, 일본잠수함 I-26 호가 과달카날 동남쪽인 산크리스토발 앞바다에서 새러토가의 우현에 1발의 어뢰를 명중시켰다.  
비록 새러토가에서는 1명의 사망자도 없었고, 격실 하나가 침수된 것 뿐이었지만 이 어뢰는 1월 11일에도 뇌격을 받아 망가졌던 새러토가의 취약한 전기추진기관(turbo-electric propulsion)을 다시 망가뜨려 버렸다.   
결국 새러토가도 함재기들을 헨더슨 비행장을 비롯한 주변 기지에 날려보내고, 통가에 잠시 들렀다가 9월 21일에 엔터프라이즈를 뒤따라 진주만에 입항하여 수리에 들어갔다.  
이때 경상을 입었던 플레처 중장도 미본토에 휴가를 가는 형식으로 전투임무에서 물러났다.
그리하여 남태평양의 항공모함들은 제16기동부대 사령관이었던 킨캐이드 소장이 임시로 지휘하게 되었다.

헨더슨 비행장의 완성 이후 과달카날의 항공기 세력은 차츰 증강되기 시작했다.

1942년 8월20일 활주로의 완성과 동시에 도착한 제223해병전투비행대대와 제232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에 더하여 8월 30일에는 제224해병전투비행대대와 제231해병정찰/폭격비행대대가 도착했다.

다음날인 8월 31일에는 어뢰에 피격당한 새러토가로부터 와일드캣 20대와 돈틀레스 9대가 도착했고, 다시 에파테 기지에 있던 제212해병전투비행대대까지 가세했다.
육군항공대 소속의 P-400 기 5대도 들어와 있었다.  
9월3일에는 해병대 제1비행단장인 Roy geiger 해병준장이 과달카날에 도착하여 소속 군을 가리지 않고 헨더슨 비행장을 기지로 삼아 활동하는 모든 항공기에 대한 지휘권을 장악함으로써 일명 칵터스 비행단라고 부르는 과달카날 비행단의 명령계통이 정식으로 확립되었다.   

한편 일본군은 동부솔로몬 해전 이후에도 과달카날로 일본군 제124연대를 주축으로 하는 가와구찌 소장의 제35여단과 제28연대의 제2진을 과달카날에 상륙시키기 위하여 계속 시도했다.  
그리하여 8월 28일에 제35여단을 수송하던 구축함 아사기리가 침몰되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8월29일 자정에 제35여단의 1개 대대를 포함하여 1,000 여명의 육군병력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했다.  
제35여단의 주력은 8월31일에 가와구찌 소장을 비롯한 1,200 명이 8척의 구축함에 분승하여 타이부 곶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타심보코 해안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9월초에 날씨가 나쁜 시기를 이용하여 하루에 수백명씩 구축함과 바지선을 이용하여 상륙했다.   
제65여단의 병력 중 보병 제124연대장 오까 아끼노스께 대좌가 지휘하는 1개 대대는 산타이사벨 섬에서 60척의 주정에 나누어타고 남하하다가 칵터스 비행단의 P400기(P-39의 수출형)편대의 공습을 받아 350명을 상실하고 650명이 9월 10일에 해병대 교두보 서쪽의 카밈보 해안에 상륙했다.  
그리하여 9월 10일경에는 가와구찌 지대(제35여단 + 제28연대 제2진)이 6,000 여명이 상륙을 마쳤고, 기존에 있던 병력과 합쳐서 과달카날의 일본군 병력은 약 8,000 명이 되었으나 상대방인 미해병대의 병력은 과달카날 섬에만 11,000 명이었다.  

미해병대는 교두보의 동쪽에 대규모의 일분군이 상륙했다는 원주민 정찰대원의 보고에 따라 에드슨 대령의 기습대대를 9월8일에 타심보코로 파견했는데, 이틀 전인 9월6일에 가와구찌 여단의 주력은 이미 남쪽의 정글지대로 떠난 후였다.
기습대대는 타심보코를 지키고 있던 소규모의 일본수비대를 제압한 다음 그곳에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50만발의 탄약과 식량, 의약품등을 모두 불태우고 지도와 서류들을 가지고 그날 저녁에 교두보로 돌아왔다.
이 지도와 서류들을 검토한 미해병대는 대규모의 일본군이 남쪽으로부터 헨더슨 비행장을 탈취하러 공격할 예정임을 알았다.  
이에 따라 해병대는 에드슨 대대를 주력으로 하는 정예병력을 비행장의 남쪽에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남쪽의 방어선을 강화했다.   

 

가와구찌 지대는 미해병대의 예상대로 9월 12일 밤부터 14일 새벽에 걸쳐 남쪽으로부터 공격해 왔다.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 라고 불리는 몹시도 처절했던 이 전투에서 가와구찌 지대는 장교 28명을 포함하여 633명의 전사자를 기록하면서 공격에 실패했다.
정글로 후퇴한 가와구찌 지대는 부상을 입거나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식량과 의약품도 없이 집결장소를 향하여 1주일씩 정글 속을 행군하는 도중에 주로 말라리아로 인하여 전사자보다 더 많은 병력을 상실했다.   
이 전투에서 미해병대는 59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1942년 9월 15일,일본잠수함 I-19호가 대박을 터뜨렸다.
기나시 다까이찌 소좌가 지휘하던 이 잠수함은 에파테에서 과달카날로 제7해병연대와 보급품들을 가득 실은 수송선단을 호위하던 항모 호넷과 와스프를 발견했다.
와스프의 좌현 900m 전방까지 접근한 I-19호는 와스프와 나란히 항진하고 있던 BB-55 North Carolina 가 겹치는 각도로 어뢰 6발을 발사했다.
이중 3발이 와스프의 좌현에 명중했는데 1발은 유류탱크에, 또 1발은 탄약고에 명중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와스프는 그때 막 함재기를 발진시킨 직후라 항공유파이프에는 휘발성이 높은 항공유가 가득 들어있었다.
순식간에 화재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면서 함은 좌현으로 크게 기울었다.
어뢰에 맞은지 1시간도 채 안되어 와스프의 함장 셔먼 대령은 함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와스프는 동료구축함 Lansdowne 의 어뢰 3발을 맞고 침몰했다.
와스프의 승무원 2,250 명중 200 명이 전사했다.

와스프와 나란히 달리던 고속전함 노스캐롤라이나에도 어뢰 1발이 명중하여 전방 좌현 수선하 6m 지점에 직경 1.8m 짜리 구멍이 뻥 뚫렸다.

그러나, 원래 수선하방어력이 강화된 신형전함인 데다가 손상관리반이 기민하게 대처하여, 곧 시속 25노트로 항진할 수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도 수리를 위하여 진주만으로 향했다.
구축함 O'Brien 도 선수에 어뢰를 1발 맞았는데 회항하던 도중에 침몰했다.

호위하던 구축함들이 I-19 에 몰려들어 폭뢰를 투하했으나 격침하는데 실패했고, 수면에 떠있던 와스프의 승무원들만 희생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잠수함이 단 한번의 어뢰발사로 정규항공모함 1척, 구축함 1척을 격침하고, 전함 1척을 대파한 경우는 해전사상 유일한 기록이었다.

야마구찌 지대의 공격이 실패한 이후 라바울의 제17군 사령부에서는 도꾜의 대본영에 과달카날을  포기하자는 의사를 슬쩍 타진해 보았으나, 전보를 보냈던 후다미 아끼사부로 소장의 모가지만 날아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제17군사령관 햐꾸다께 중장은 뉴기니아에 중점을 두던 종래의 방침을 바꾸어 과달카날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햐꾸다께 중장은 대본영을 움직여서 자바에 있던 제16군 휘하의 제2사단과 제38사단을 과달카날에 파견하도록 만들었다.
도꾜의 대본영에서는 제2사단과 제38사단을 합친 3만명 이상의 병력과 80문 이상의 야포를 동원하여 과달카날의 미해병대를 단번에 제압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햐꾸다께 중장은 7,000 - 8,000 명선으로 추정하고 있던 미해병대를 제압하는 데에는 제2사단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제38사단은 1개 연대만 과달카날로 데려가기로 했다.

제38사단의 주력은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 다음 뉴기니아 작전에 활용하려고 라바울에 잔류시켰다.
햐꾸다께 중장은 총공격 예정일을 1942년 10월 20일로 잡았다.  

한편 니미츠 제독은 1942년 9월25일에 진주만을 떠나 남태평양해역에 대한 시찰에 나섰다.
니미츠 제독은 9월 7일에서 9일까지 샌프란시스코의 페더럴 호텔에서 열린 킹 제독과의 회담을 마치고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핼시 제독과 함께 진주만으로 돌아왔었는데, 9월 20일에 미육군항공대 사령관인 아놀드 장군이 진주만을 방문했다.
방금 남태평양을 다녀온 진주만의 육군항공대사령관인 에몬스 장군이 니미츠 제독과 함께 그를 맞았는데 그 자리에서 에몬스 장군은 아놀드 장군에게 해병대가 과달카날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병대가 과달카날을 지킬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니미츠 제독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아 남태평양의 상황을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위하여 참모들을 대동하고 시찰여행에 나선 것이었다.
여기에는 아놀드 장군도 동행했다.

니미츠 제독은 남태평양으로 가던 도중에 칸톤 섬에서 남태평양해역군항공사령관이었던 맥케인 제독을 만났다.
킹이 총애하는 몇 안되는 제독 중의 한 사람인 맥케인 제독은 킹 제독의 부름을 받아 남태평양해역군항공사령관 자리를 진주만의 항공사령관이었던 피치 소장에게 물려주고, 해군본부의 항공국장이 되어 워싱턴으로 부임해 가는 도중이었다.
맥케인 제독은 과달카날에 시찰을 갔다가 하필이면 그날 저녁에 일본군들이 공격해오는 바람에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 기간 중이던 9월12일과 13일을 과달카날에서 지냈다.

그는 니미츠 제독에게 해병대가 과달카날을 분명히 지켜낼 수 있으나, 그러려면 더 많은 병력과 특히 매일 폭격을 가해오는 일본기들을 물리칠 전투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9월28일에 누메아에 도착한 니미츠 제독은 곧 곰리 중장과 회의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는 맥아더 장군의 남서태평양해역군에서 온 서덜랜드 소장과 니미츠 제독과 동행했던 미육군항공대 사령관인 아놀드 장군도  참가했다.
이 회의에서 니미츠 제독은 과달카날을 지킬 수 없다고 확신하는 듯한 곰리 제독과 그 참모들의 비관적이고 소극적인 태도에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다.

회의 도중 아놀드 장군이 남태평양해역군에는 아직도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있는 예비항공기가 많다고 비판하면서 이런 예비항공기들이 전투에 투입되기 전까지는 더 이상 남태평양 지역에 육군항공기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니미츠 제독의 불쾌감은 극에 달했다.

다음날 에스피리투산토를 시찰한 니미츠 제독은 30일에는 B-17을 타고 과달카날을 시찰했다.
그곳에서 니미츠 제독은 밴디그래프트 소장을 비롯한 해병대의 모든 장병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과달카날을 꼭 지키겠다는 굳은 각오를 가지고 있고 또한 반드시 지킬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는 것을 보고는 큰 감명을 받았다.
누메아에 돌아온 니미츠 제독은 곰리 중장에게 누메아를 방어하는 육군부대 중에서 1개 연대를 빼내어 즉시 과달카날로 파견하라고 명령했다.
진주만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니미츠 제독은 비관론자인 곰리 중장을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자리에 앉혀놓은 채로 과달카날 전투를 이기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한편 일본제17군사령관 햐꾸다께 중장의 작전계획에 따라 일본군은 부지런히 도꾜 익스프레스를 왕복시켜 9월말부터 병력과 장비를 속속 과달카날에 양륙하기 시작했다.
10월 3일에는 제2사단장 마루야마 중장의 사령부가 교두보 서쪽의 타사파롱가에 상륙하였고, 10월 9일에는 공격을 직접 지휘하기 위하여 제17군사령관 햐꾸다께 중장이 상륙했다.

한편 일본군이 150mm 야포를 상륙시켰다는 정보를 접한 해병제1사단은 교두보의 서쪽을 흐르는 마타니코 강 서안에 주둔하여 헨더슨 비행장을 위협하던 일본육군제4연대를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10월7일 오전 7시부터 제5 및 제7해병연대가 마타니코 강을 건너 공격을 시작했다.
10월9일까지 계속된 미해병대의 공격으로 일본육군제4연대는 700 명이 전사하고, 보유하고 있던 150mm 야포도 몽땅 파괴당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서쪽으로 밀려났다.
미해병대는 이 공격에서 65명이 전사했다.  

10월 9일, 니미츠 제독의 명령에 따라 미육군 아메리칼 사단의 제164연대가 누메아를 떠났다.
당시로서는 최신무기였던 M1 개런드 반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3,000 명 규모의 제164연대는 항모 호넷과 고속전함 BB-56 Washington 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전방에서 Norman Scott 소장이 지휘하는 제64기동부대가 수송선단의 항로를 보호하고, 도꾜 익스프레스를 저지하기 위하여 과달카날 서방해상을 경계했다.
제64기동부대는 중순양함 2척(샌프란시스코, 솔트레이크시티), 경순양함 2척(보이스, 헬레나) 그리고 구축함 5척을 보유했다.

10월 11일 밤, 고또 아리또모 제독이 지휘하는 함대가 병력과 장비를 수송하는 수상기모함 지또세와 닛싱을 호위하고,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기 위하여 슬롯을 따라 남하했다.
중순양함 3척(아오바, 기누가사, 후루다까)과 구축함 2척으로 편성된 고또 제독의 함대는 오후 11시 46분, 에스퍼란스 곶 부근에서 레이더로 이들의 접근을 미리 알고있던 제64기동부대에게 기습을 당했다.
후일 에스퍼란스 해전으로 알려진 34분간의 이 일방적인 전투에서 열세한 세력에다가 불리한 진형으로, 게다가 불의의 선제일격을 얻어맞은 일본함대는 제64기동부대가 발사한 초탄에 기함인 아오바가 대파되면서 사령관인 고또 제독이 전사하는 등 순식간에 전멸의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전투 초반 스코트 제독의 판단착오 덕분에 가까스로 전멸은 면했다.
일본함대는 사령관이 전사하고, 중순양함 후루다까와 구축함 후부끼가 격침되었으며, 기함이던 중순양함 아오바가 대파되는 참패를 당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 북쪽으로 황망히 도주했다.
제64기동부대는 구축함 덩컨이 침몰하고, 경순양함 보이스가 대파되었다.
다만 일본군의 병력과 150mm 야포 등의 중화기를 싣고 왔던 수상기모함 지또세와 닛싱은 과달카날에 무사히 도착하여 양륙에 성공하였는데, 양륙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칵터스 비행단의 공격을 받아 호위하던 구축함 무라구모와 나쓰구모가 격침되었다.

 

10월 13일에는 미육군 제164연대가 과달카날에 무사히 상륙했다.
이로써 과달카날 부근의 미군병력은 총 28,000 여명이 되었고, 과달카날 섬에만 23,000 여명이 주둔하게 되었다.
게다가 수송선단이 제164연대와 함께 싣고 온 식량을 비롯한 대량의 보급품으로 인하여 미군의 보급상태가 크게 개선되어 전투력이 더욱 높아졌다.

10월 14일 새벽 1시에 6척의 구축함을 거느린 일본전함 공고와 하루나가 아이언바텀사운드에 들어와서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했다.
80분간 지속된 이 포격에서 각 8문씩의 14인치 주포를 장비한 2척의 일본전함은 강력한 소이유산탄인 14인치 삼식탄 918발을 발사하여 비행장을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차근차근 조직적으로 파괴했다.
전함의 포격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순식간에 기지에 저장 중이던 항공유와 탄약에 불이 붙어 화염이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고, 90 여대에 달하는 항공기 중 42 대만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활주로에는 달표면처럼 구멍이 숭숭 뚫렸고, 해병대원 41명이 전사했다.
해병대의 지상포대는 포격이 지속되는 동안 탐조등으로 일본함대를 찾으며 대응사격을 가했으나 효과가 없었고, 툴라기에서 출격한 미군 어뢰정 4척이 일본구축함들의 호위를 뚫고 용감하게 육박하여 어뢰를 발사했으나 1발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공고급 전함 공고. 표준배수량 : 31,720톤, 길이 : 222m, 폭 : 31m, 속력 : 30노트, 항속거리 : 14노트로 19,000km, 승무원 : 1,360명, 무장 : 14인치 주포 8문, 155mm 부포 16문, 5인치 양용포 8문, 25mm 대공포 118문)

 

14일 아침이 밝아오자 이번에는 코컴보나에서 일본군들이 지난 11일 밤에 새로 양륙한 150mm 포로 헨더슨 비행장에 포격을 가해왔고 곧이어 일본폭격기들이 대규모로 몰려와 폭격을 가했다.

10월 15일 새벽 2시에는 중순양함 죠까이와 기누가사가 다시 아이언바텀사운드에 들어와 8인치 주포로 포격을 가했다.
중순양함의 8인치 주포사격은 전날에 있었던 전함의 14인치 주포사격보다는 위력이 덜했지만 이번에도 헨더슨 비행장은 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함의 포격으로 인하여 안 그래도 달랑거리던 항공유의 재고가 거의 바닥으로 떨어졌고, 전함의 포격에서 겨우 살아남았던 항공기들이 뒤이은 150mm 포의 포격과 폭격기의 폭격, 이어진 일본순양함의 포격에 의하여 만 하루만에 돈틀레스 1대만 남기고 다 파괴되었다.

일본군은 이제 헨더슨 비행장이 무력화되었다고 판단하고, 6척의 수송선을 보내어 코컴보나 부근 해안에서 15일 새벽 2시부터  병력 4,000 명과 야포, 탱크, 탄약, 식량 등의 양륙을 시작했다.
그런데 날이 밝자 홀연히 헨더슨  비행장에서 1대의 돈틀레스가 날아와서 수송선 사사고 마루에 폭탄을 명중시켜 격침했다.
Patterson 중위가 조종하던 이 돈틀레스는 그날 아침 칵터스 비행단에서 출격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체였다.
곧이어 15일 아침에 에스피리투산토에서 급히 증원된 돈틀레스 7대가 날아와 수송선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맥케인 제독의 뒤를 이어 남태평양해역군항공사령관이 된 피치 제독은 칵터스 비행단을 강화하는데 대단히 적극적이어서, 여건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많은 항공기들을 헨더슨 비행장으로 보냈다.

헨더슨 비행장에서는 항공 정비병들이 파괴된 비행기들에게서 여러가지 부품을 빼내어 좀 덜 망가진 비행기의 부품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항공기 몇 대를 '재생' 했다.
또한 하역할 때 바빠서 기지 안 아무데나 쌓아두었던 항공유들을 온 기지를 샅샅이 뒤져서 400 드럼이나 찾아내고, 파괴된 항공기에 들어있던 항공유까지 몽땅 빼내어 사용했다.
이러한 항공 정비병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힘입어 그날 칵터스 비행단의 항공기들은 1대당 평균 7번씩 출격할 수 있었다.
그들은 15일 하루종일 일본수송선들을 반복적으로 공격하여 사사고 마루에 이어 아즈마산 마루와 규슈 마루를 추가로 격침했다.
칵터스 비행단의 치열한 공습에도 불구하고 일본수송선들은 4,000 명의 병력과 탱크 등은 거의 손상없이 양륙했으나, 야포는 80문 중 50문을 상실하여 30문만 양륙하는데 성공했고, 탄약과 식량도 20% 정도 상실했다.
그날밤, 일본의 중순양함 마야와 묘꼬가 다시 아이언바텀사운드에 들어와 헨더슨 비행장을 향하여 8인치 포탄 1,500 발을 쏟아부었다.
과달카날의 상황은 이제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하고 혼란스런 양상으로 치달았다.

과달카날의 해병대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한 니미츠 제독은 엔터프라이즈의 수리를 서둘러 마치도록 하고, 9월 16일에 암초에 부딪혀서 엔터프라이즈와 나란히 수리를 받고 있던 고속전함 BB-57 South Dakota 와 함께 남태평양으로 가도록 명령했다.
1942년 10월 16일,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는 남태평양을 향하여 진주만을 출항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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