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월 27일, Robert Giffen 소장이 이끄는 제18기동함대가 에스피리투산토의 에파테 기지를 출항했다.
기펜 소장은 줄곧 지브랄타 해역에서 근무하다가 42년 11월 말에야 남태평양으로 온 제독으로 대잠전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해군항공분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다.
제18기동함대는 과달카날의 북서쪽으로 나아가서 Robert Briscoe 대령이 지휘하는 구축함 4척으로 편성된 칵터스 타격부대(Cactus Striking Force)와 합류한 후 과달카날 서북쪽의 슬롯을 경계하며 제18기동부대를 뒤따르고 있는 수송선단(제62.8기동부대)의 안전을 책임지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1월 28일에는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가 산호해로 나아가 새러토가 중심의 제11기동부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역시 에파테를 출발했다.
29일 오후가 되자 속력이 느린 호위항공모함들과 같이 가다가는 30일로 예정된 칵터스 타격부대와의 합류가 어렵다고 판단한 기펜 제독은 오후 2시에 18노트밖에 낼 수 없는 호위항공모함 스와니와 체난고에 2척의 구축함을 붙여서 제18기동부대로부터 분리하고 본대는 24노트의 속력으로 북상했다.
이 조치는 항공분야에 대한 기펜 제독의 무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서 적의 항공세력에 의한 위협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작전 일정에만 집착하여 스스로의 항공엄호를 벗어던져 버린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잠시 후 제18기동부대의 레이더에 북서쪽에서 접근하던 일본의 정찰기가 포착되었다.
이때 즉각 요격명령을 내렸으면 아직 제18기동부대의 상공을 지키고 있던 스와니와 체난고의 CAP 세력이 충분히 격추할 수 있는 거리였으나 기펜 제독은 무선침묵을 더 중요하게 여겨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윽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제18기동부대 상공의 CAP세력은 모함으로 돌아갔다.
당시 제18기동부대는 6척의 구축함이 전방에서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경계망을 펼치고 그 뒤를 2열로 배치된 6척의 순양함들이 따르는 진형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진형은 전형적인 대잠진형으로 수상전에도 그런대로 효율적인 배치였으나, 만일 측면이나 후면으로부터 항공공격을 받을 경우에는 대단히 취약한 진형이었다.
대공방어에 가장 유리한 진형은 단연 원형진이다.
한편 과달카날 근해의 정찰기로부터 미해군의 함대가 북상 중이라는 연락을 받은 라바울의 제26항공전대에서는 즉각 제705항공대의 1식육공(Betty) 16대와 제706항공대의 베티공격기 15대가 어뢰를 장비하고 출격했다.
오후 7시 50분, 제18기동부대 부근에 도착한 제705항공대의 베티공격기 16대가 들키지 않도록 남쪽으로 우회한 후 오른쪽 후방으로부터 공격했다.
항진 중이던 함대에게 실시된 것으로는 세계 최초의 야간공습이었다.
비록 정찰기가 조명탄을 투하하고 있었으나 야간에 재빠르게 기동하는 함정에 대한 뇌격은 역시 어려운 법이어서 제705항공대의 뇌격은 전부 실패하고 제18기동부대의 대공포화에 의하여 비행대장기가 격추되는 피해만 입었다.
제705비행대의 공습이 끝나자 일본정찰기가 제18기동부대 상공에 3가지 색깔의 조명탄을 떨어뜨려 후속하고 있던 제706항공대를 유도했다.
(미츠비시 G4M Betty 1식 육상 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3544140 )
오후 8시 8분, 제18기동부대의 북동쪽에서부터 15대의 베티공격기로 구성된 제706비행대가 공격했다.
다시 제18기동부대의 대공포화가 불을 뿜었고 순식간에 2대의 베티가 화염에 휩싸였는데, 그 중 1대가 중순양함 시카고의 좌현으로 접근하여 전방갑판에 돌진했다.
순식간에 시카고의 전방갑판에 불타는 휘발유로 인하여 화재가 발생했다.
비록 이 충돌로 인한 피해 자체는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으나 캄캄한 해상에서 마치 횃불처럼 타오르는 시카고의 뚜렷한 실루엣은 일본기들에게 절호의 표적이 되었다.
자연히 일본기들의 공격이 거의 시카고에게 집중되었고 결국 시카고는 우현에 두 발의 어뢰를 얻어맞아 엔진이 멈추고, 함은 우현으로 11도나 기울어졌다.
이때 중순양함 위치타도 한 발의 어뢰를 맞았으나 천만다행으로 불발탄이었다.
기펜 제독은 시카고가 피격된 직후 임무를 포기하고 에파테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시카고의 손상관리반이 기민하게 대응하여 침수부위를 막고 화재를 진압하였으나, 자체동력이 없었기 때문에 예인할 수 밖에 없었다.
밤샘 작업 끝에 중순양함 루이즈빌에 예인로프를 연결하여 30일 새벽부터 4노트의 속력으로 예인하기 시작했다.
한편 시카고가 피격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핼시 제독은 에파테에서 원양예인선인 Navajo 를 호위 구축함과 함께 급파하고, 새러토가 중심의 제11기동부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피격현장에서 560km 남쪽을 항진중이던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기동부대에게 즉시 북상하여 시카고를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제16기동부대는 급히 반전하여 28노트의 속력으로 북상했다.
30일 새벽, 무선침묵을 유지하며 시카고를 예인하고 있던 제18기동부대를 찾기 위하여 4대의 돈틀레스가 엔터프라이즈를 떠났다.
30일 오전 7시 15분에 Robert Gibson 중위의 돈틀레스가 상처입은 채로 예인되고 있던 시카고를 발견하자 즉시 4대의 와일드캣이 제18기동부대의 상공을 지키기 위하여 엔터프라이즈에서 이함했다.
오전 중에 예인선 나바호가 도착하여 루이즈빌과 교대하여 시카고를 예인하기 시작했다.
이제 상황이 좀 호전되었다고 판단한 핼시 제독은 오후 3시 30분에 시카고와 구축함들만 현장에 남겨놓고 나머지 순양함들은 전부 에파테로 돌아오라고 기펜 제독에게 명령했다.
10분 뒤인 오후 3시 40분, 시카고 상공을 지키던 와일드캣들이 60km 떨어진 상공에서 무엇인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고는 즉시 확인하러 갔다.
5분 뒤인 3시 45분, 뉴조지아 섬의 남단에 있던 해안경비대원으로부터 11대의 일본군 쌍발공격기들이 상공을 통과하고 있다는 무전이 과달카날의 통신소에 들어왔고, 그들은 이것을 즉시 제18기동부대에 중계했다.
이 통신은 제16기동부대에게도 동시에 중계되었으나, 핼시 제독에게는 도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펜 제독은 이 새로운 긴급사태에 처하여 핼시 제독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달리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순양함들을 이끌고 현장을 이탈했다.
그리하여 적의 항공공격이 확실시되고 엔터프라이즈에서 보내온 와일드캣 4대마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빈사상태의 시카고는 불과 구축함 6척만으로 이루어진 빈약한 대공방어망 속에 남겨졌다.
이때 보고된 11대의 일본쌍발기들은 뉴기니아의 부나 기지에서 발진한 제751항공대 소속의 베티공격기들이었다.
그리고 시카고 상공을 지키던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와일드캣들이 발견한 것은 이 공격대의 전방에서 정찰을 하고 있던 일본군 정찰기였다.
와일드캣들은 결국 이 정찰기를 격추하는데 성공했으나, 그 결과로 베티공격기들이 시카고에 도달했을 때 그곳 상공은 텅 비어 있었다.
렌넬 섬 부근에 도달한 베티공격기들은 접근 방향을 기만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변침했는데, 그 방향에서는 마침 제16기동부대가 고속으로 북상중이었다.
남하하던 제751항공대의 베티공격기들은 엔터프라이즈의 110km 전방에서 제16기동부대의 레이더에 잡혔다.
방금 과달카날로부터 보고받았던 일본기들의 공격목표가 시카고가 아니라 사실은 자신들이라고 착각한 제16기동부대는 당황했다.
기존의 CAP 세력에 더하여 10대의 와일드캣이 급히 엔터프라이즈의 비행갑판을 떠났고, 엔터프라이즈를 포함한 제16기동부대 전체가 엄중한 대공태세에 들어가면서 방향을 180도 전환하여, 27노트의 속력으로 황급히 남하했다.
4시 35분, 급히 이함한 10대의 와일드캣 중 함대직위를 담당할 4대를 제외한 6대의 와일드캣이 MacGregor Killpatrick 대위의 지휘 하에 고속으로 일본기들을 향해 접근했다.
5분 만에 일본기들의 전방 30km 거리까지 육박한 와일드캣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킬패트릭 대위와 Robert Porter 중위는 일본기들을 우회하여 북쪽으로 나아가 퇴로를 차단하고, Donald Gordon 소위, Lynn Slagen 중위, Steven Kona 소위, Edward Feightner 대위는 남쪽에서 정면공격을 가하기로 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침로를 기만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변침했을 뿐 제16기동부대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일본기들은 그 순간 북쪽으로 변침하여 시카고를 향하여 북상했다.
일본기들보다 1,200m 정도 높은 이상적인 공격위치를 점하고 일본기의 접근을 기다리던 남쪽의 와일드캣들은 갑자기 일본기들이 방향을 180도로 전환하여 북상해버리자 당황하여 그만 공격기회를 놓쳐버렸다.
혼란은 북쪽에 있던 킬패트릭 대위와 포터 중위도 마찬가지로서 이들도 갑자기 일본기들이 방향을 180도로 전환하여 고속으로 접근해 오자 첫번째 공격타이밍을 놓치고 반전하여 다시 공격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나란히 한 대씩을 격추시켰으나, 이들이 고도를 회복하여 재공격을 실시하려 했을 때에는 이미 살아남은 9대의 일본기들이 시카고에 접근하여 어뢰를 발사하고 있었다.
만일 시카고 상공을 지키던 4대의 와일드캣이 제자리에 있었다면 베티공격기들이 어뢰를 발사하기 전에 대부분 격추시켰을 가능성이 높았으나 이 와일드캣들은 일본정찰기를 격추시킨 후 아직 제자리에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시카고를 예인하던 나바호가 일본기가 투하한 어뢰들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시카고의 함수를 돌려세우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오후 4시 55분, 일본기가 발사한 9발의 어뢰 중 4발이 어제 이미 2발의 어뢰에 피격되었던 시카고의 우현을 다시 강타하여 시카고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았다.
피격 직후 시카고에서는 즉시 퇴함명령이 떨어졌고 어뢰에 얻어맞은지 20분만인 5시 15분에 시카고는 우현으로 기울어지면서 고물부터 가라앉았다.
이때 구축함 DD-488 La Vallette 도 1발의 어뢰를 얻어맞고, 대파되면서 21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일본기들은 어뢰를 발사한 직후 구축함들의 대공포화에 의하여 3대가 격추되었고, 뒤이어 쫓아온 와일드캣에 의하여 2대가 더 격추되어 총 11대 중 7대가 격추되고 4대만이 살아서 돌아갔다.
당시 미국함정들의 5인치 양용포에는 당시로서는 최신무기인 근접신관이 장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빈약한 함대세력에 비하면 대공포화가 꽤나 위협적인 편이었다.
이로써 과달카날 전투의 마지막 해전인 렌넬 섬 해전이 끝났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중순양함 시카고를 격침하고 구축함 라밸럿을 대파한 대신 자신들은 10대의 베티공격기를 상실했다.
핼시 제독과 니미츠 제독은 일본기의 공격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빈사상태의 시카고를 빈약한 대공방어망 속에 남겨놓은 채로 무책임하게 후퇴해버린 기펜 제독에 대하여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특히 1월 중순의 과달카날 시찰 후 말라리아에 걸려 잠복기에 있던 니미츠 제독은 다음날의 회의에서 시카고의 상실에 대하여 분노를 터뜨리며 흥분하다가 쓰러져서 그대로 병원으로 실려갔다.
이 렌넬 섬 해전의 결과는 그 전술적 승패에 상관없이 일본군의 철수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일본군이 이렇듯 공격적으로 나오는 것은 새로운 공세작전을 시작하려는 전조가 틀림없다고 확신한 핼시 제독과 제14군단장 패치 소장은 1월 31일을 기하여 제14군단에게 공세작전을 일시 중단하고, 현 전선에서 참호를 파고 방어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의 철수작전은 렌넬 섬 해전으로 인하여 예정보다 하루 늦은 2월 1일부터 총 3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그리고 이 철수작전을 엄호하기 위한 일본군의 항공작전도 더욱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실시되었다.
2월 1일, 미육군 제132연대 소속 제2대대와 제3대대를 과달카날 서남쪽 해안의 베라휴에 상륙시키고 툴라기의 기지로 돌아가던 브리스코 대령의 칵터스 타격부대 소속 구축함인 DD-449 Nicholas, DD-469 De Haven 과 LCT 3척이 발 폭격기 14대에 의하여 폭격을 받았다.
드하벤 호는 이 폭격으로 3발의 명중탄과 1발의 지근탄을 맞고 폭격이 시작된 지 단 2분만에 방금 상륙한 미군들의 바로 눈앞에서 격침되었다.
드하벤의 승무원 167명이 전사했다.
니콜라스는 다행히 지근탄으로 인하여 조향장치가 파괴되었을 뿐 큰 피해는 면했다.
일본기는 3대가 격추되었다.
그날 오후 제1차 철수작전을 실시할 기무라 제독의 제10수뢰전대 소속 구축함 14대가 하시모또 제독이 이끄는 제3수뢰전대의 구축함 6척이 호위를 받으면서 남하하다가 미군에게 발각되었다.
즉각 헨더슨 비행장에서 24대의 돈틀레스 폭격기가 14대의 와일드캣과 함께 출격하여 이들을 덮쳤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이 구축함대의 상공에는 30대의 제로기가 있었으므로, 즉각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져서 4대의 돈틀레스가 격추되었다.
이때의 폭격으로 구축함 마끼나미가 1발의 명중탄을 맞고 대파되어 회항했다.
나머지 19대의 구축함은 과달카날을 향하여 계속 남진했다.
미해군은 이들을 저지하기 위하여 에스퍼란스 해안과 도마환초 사이에 300여개의 기뢰를 부설하고, 반격을 위하여 3척의 구축함과 11척의 어뢰정들을 배치했다.
이 기뢰들이 위력을 발휘하여 일본구축함 나쓰구모가 기뢰에 접촉하여 침몰했다.
3척의 미구축함들은 공격기회를 포착하는데 실패했다.
미어뢰정들은 일본구축함들이 사보섬 남쪽으로 접근해오자 과감하게 접근하여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한발의 어뢰도 명중시키지 못한 채 일본구축함과 제로기들의 반격을 받아서 3척이 격침되고, PT123 호의 승무원 4명이 전사했다.
미해군의 집요한 방해를 물리친 철수함대는 에스퍼란스 곶에 도착하여 제38사단 소속의 장병 5,164명과 해군 250명을 구조하여 오후 11시 30분에 떠났다.
제2차 철수작전은 2월 4일에 실시되었는데, 역시 기무라 소장의 제10수뢰전대 소속 14척의 구축함이 하시모또 소장의 제3수뢰전대의 구축함 6척의 호위 하에 철수작전을 실시하기 위하여 남하하다가 미군에게 발각되었다.
즉시 헨더슨 비행장에서 31대의 와일드캣에 호위된 33대의 돈틀레스들이 출격하여 일본구축함대 상공을 지키던 대규모의 제로기들과 격돌하여 미군기 10대와 제로기 17대가 격추되었다.
이번 폭격에서 일본구축함 마이까제가 1발의 지근탄에 의하여 항해불능이 되었고 시라누이의 후방포탑 부근에도 1발의 지근탄이 떨어졌으나 행동에는 지장이 없었다.
철수함대는 오후 8시 50분에 에스퍼란스 해안에 도달하여 햐꾸다께 중장을 비롯한 제17군 사령부와 마루야마 중장의 제2사단 병력 4,458명과 해군 519명을 구조하여 오후 11시에 출발했다.
일본군은 밤에 또다시 대규모의 항공대를 보내어 병력들이 승선하는 동안 헨더슨 비행장에 조명탄을 투하하며 폭격을 가하여 밤새 칵터스 항공대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2월 5일 아침에 밤새 과달카날을 떠난 일본구축함을 포착하러 헨더슨 비행장을 떠난 정찰기는 구축함들은 발견하지 못하고 대신 과달카날 360km 북방해상에서 전함 4척, 항공모함 2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2척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함대를 발견했다.
이 보고를 들은 핼시 제독은 일본연합함대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하고, 엔터프라이즈와 새러토가를 포함한 제16기동부대와 3척의 고속전함을 보유한 제64기동부대에게 즉시 과달카날 부근 해상으로 북상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또한 피지 제도 부근에서 활동하고 있던 구식전함인 BB-45 Colorado 와 BB-46 Maryland 에게도 즉시 과달카날 해역으로 달려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BB-45 Colorado. 자세한 설명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51910156 )
2월7일에 마지막으로 제3차 철수작전이 실시되었다.
이번에는 하시모또 소장의 제3수뢰전대 소속 8척의 구축함이 철수작전을 담당하고, 기무라 소장의 제10수뢰전대 소속의 구축함 8척이 호위를 담당했다.
남하하는 구축함대를 발견한 칵터스 항공대는 억수처럼 쏟아지는 폭우를 무릅쓰고, 15대의 돈틀레스를 발진시켜 폭격을 가했으나 이소까제에 2발, 하마까제에 1발의 지근탄을 기록했을 뿐으로 2척 다 행동에는 지장이 없었다.
마지막 철수부대는 오후 9시 7분에 카밈보 해안에 도달하여 100 여명이 살아남은 야노 대대의 패잔병을 비롯하여 제2사단과 제38사단 소속이 아닌 육군장병 2,576명과 해군 53명을 구조하여 오후 10시 30분에 무사히 과달카날을 떠났다.
이 3차에 걸친 해상철수를 통하여 모두 13,020 명의 일본군이 안전하게 과달카날을 떠났다.
이 철수작전을 실시하면서 일본군은 구축함 나쓰구모가 격침되고, 마끼나미와 마이까제가 대파되었다.
이 과달카날 철수작전(케호 작전)은 5개월 후의 키스카 섬 철수작전과 함께 대단히 성공적인 해상철수작전의 전형으로서 미국의 전사가인 Samuel Eliot Morison 제독같은 사람은 이 두 개의 철수작전을 가리켜서 ‘해전 사상 가장 영리한 철수 작전’ 이라고 평가한다.
사실 당시 일본군이 과달카날에서 처해 있던 불리한 상황을 고려해보면 이 철수작전은 믿기 어려울 정도의 성공을 거둔 해상철수작전이다.
일본군의 대공세에 대비하여 전진을 중단하고 열심히 참호를 파고 있던 제14군단이 무엇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진격을 재개한 것은 2월 8일이 되어서였다.
다음날인 2월 9일, 일본군이 마지막으로 철수한 카밈보 해안에 도달한 미군들은 결사항전의 태세로 버티고 있는 일본군 대신 그들이 황급히 철수하면서 남기고 간 잡동사니들만 뒹굴고 있는 텅 빈 해안을 발견했다.
그제서야 미군들은 지난 며칠간 일본군의 행동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깨달았다.
1942년 2월 9일 오후 4시 25분, 제14군단장 패치 소장은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핼시 제독에게
“과달카날에서의 조직적인 저항은 끝났음.”
("ORGANIZED RESISTANCE ON GUADALCANAL HAS CEASED".)
이라고 타전하여 과달카날 전투의 승리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로써 1942년 8월 7일에 해병제1사단이 과달카날에 상륙하면서 시작된 6개월간의 처절한 사투가 끝났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은 총 43,726명의 지상군을 투입하여 이 중 4,346명이 해상 수송 도중 전사하고, 37,680명이 전투에 참가하여 28,580명이 전사하고 1,00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일본군의 전사자 중에서 말라리아나 이질, 굶주림 등으로 사망한 병력의 숫자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9,000 여명 정도로 추산한다.
반면 미군은 60,000명이 투입되어 1,592명의 전사자를 기록했으며, 이중에서 1,152명이 해병대였다.
미해군과 일본해군은 과달카날 전투 기간에 모두 7차례의 해전을 거치며 양국 공히 24척의 구축함급 이상의 주력전투함들을 상실했다.
격침된 미국의 주력전투함들은 다음과 같다.
정규항공모함 : Wasp, Hornet (2척, 34,500톤)
중순양함 : Astoria, Quincy, Vincennes, Canberra(호주 해군), Northampton, Chicago(6척, 56,925톤)
경순양함 : Atlanta, Juneau(2척, 12,000톤)
구축함 : Barton, Benham, Blue, Cushing, De Haven, Duncan, Jarvis, Laffey, Meredith, Monssen, O'Brien, Porter, Preston, Walke (14척, 22,815톤)
합계 : 24척, 126,240톤
격침된 일본의 주력전투함들은 다음과 같다.
경항공모함 : 류죠(1척, 8,500톤)
전함 : 히예이, 기리시마(2척, 62,000톤)
중순양함 : 가고, 기누가사, 후루다까 (3척, 26,400톤)
경순양함 : 유라 (1척, 5,700톤)
구축함 : 후부끼, 마끼구모, 무쓰기, 데루즈끼, 유다찌, 아까쓰끼, 아야나미, 다까나미, 아사기리, 무라구모, 나쓰구모 (11척, 20,930톤)
잠수함 : I-1, I-3, I-4, I-22, I-23, I-123 (6척, 11,309톤)
합계 : 24척, 134,839톤
격침된 미국의 기타함정들은 다음과 같다.
어뢰정 : PT-37, PT-43, PT-44, PT-111, PT-112, PT-123 (6척)
수송선 : Colhoun, George Elliott, Gregory, Little (4척)
예인선 : Seminole (1척)
격침된 일본의 기타함정들은 다음과 같다.
수송선 : 나가라 마루, 히로가와 마루, 나쿠 마루, 캔버라 마루, 야마쓰키 마루, 기누가와 마루, 시나노 마루, 브리즈번 마루, 애리조나 마루, 긴류 마루, 규슈 마루, 메이요 마루, 사사고 마루, 나이애가라 마루 (14척)
공중전에서 격추된 항공기의 수는 미군의 경우 118대, 항공기 승무원의 손실은 94명이었고, 일본군의 경우 육군기와 해군기를 합하여 항공기 손실은 893 대이며, 항공기 승무원의 손실은 2,362명에 달했다.
미국해군의 전사자는 5,041명이었고, 일본해군의 전사자는 약 3,800 명이었다.
엔터프라이즈는 과달카날 전투 기간 중에 함정승무원 119명, 항공기 승무원 55명 등 총 174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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