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지역의 미군이 1943년 1월 22일, 파푸아의 부나를 탈환한 데 이어서 2월 9일에는 과달카날을 점령하자 태평양 지역의 정세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이 기간을 이용하여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는 앞으로의 공세작전을 위한 계획을 짜고 함정들을 수리하며 조직을 정비했다.
북태평양해역군 담당 지역에서는 사령관 킨케이드 중장이 육군과의 관계를 호전시키는데 성공했고, 1942년 9월에 건설했던 애닥 섬과 암치카 섬의 비행장에서 폭격기들이 출격하여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대한 보급을 거의 끊어 놓았다.
1943년 3월 26일에는 애투 섬을 향하는 일본군의 보급선단을 요격하려던 Charles H. “Soc” McMorris 소장이 이끄는 중순양함 1척(Salt Lake City), 경순양함 1척(Richmond),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진 미국함대가 이 보급선단을 호송하던 호소가야 보시로 중장의 중순양함 2척(나찌, 마야), 경순양함 2척(다마, 아부꾸마),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진 일본함대와 격돌했다.
코만도르스키 해전이라고 불린 이 해전의 결과 일본함대는 중순양함 나찌가 중파되는 피해를 입었고, 미국함대는 중순양함 솔트레이크시티가 대파되고 구축함 Bailey가 중파되는 피해를 입어 일본함대가 판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일본 측은 애투와 키스카에 대한 보급을 전적으로 잠수함에 의존했다.
(일본 중순양함 나치.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36018896 )
1943년 5월 11일에 킨케이드 제독은 키스카보다 더 서쪽에 있는 애투 섬에 먼저 상륙했다.
미육군제7사단의 병력 3,000 명이 일차로 상륙했고 최종적으로는 14,000 명이 상륙하여 5월 29일에 섬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애투 섬 상륙작전에는 3척의 구식전함(BB-36 Nevada , BB-38 Pennsylvania , BB-42 Idaho ) 과 1척의 호위항공모함(CVE-16 Nassau)이 참가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BB-36 네바다.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8300204 )
8월 15일에는 29,000 명의 미군과 5,300 명의 캐나다 군이 키스카 섬에 상륙했으나 일본군은 이미 7월 28일에 감쪽같이 철수한 후였다.
키스카 섬 상륙작전 이후 북태평양해역군의 관할지역에서는 종전때까지 이렇다 할 대규모 작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뉴기니아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남서태평양해역군이 부나를 함락하고 라에와 살라모아를 위협하게 되자 라에 기지의 증원을 위하여 제18군 사령부와 제51사단을 실은 8척의 수송선들이 8척의 구축함과 41대의 제로기의 호위를 받으며 1943년 2월 28일 밤에 라바울을 출발했다.
이 수송선단은 다음 날인 3월 1일에 미군 정찰기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사흘 동안 제5육군항공대의 공습을 받았다.
비스마르크 해전이라고 불리는 이 해전에서 케니 소장이 지휘하는 제5육군항공대는 3일동안 총 4회의 폭격을 통하여 B-17 Flying Fortress 61소티, A-20 Havoc 24 소티, B-25 Mitchell 22 소티, P-38 Lightning 15소티, Bristol Beaufighter 6소티 등 총 128 소티의 폭격을 감행했다.
이 폭격으로 일본군의 수송선 8척 전부와 구축함 4척을 격침하여 수송 중이던 일본군 3,500 여명을 물고기 밥으로 만들고, 호위하던 제로기 10 대를 격추했다.
제5육군항공대의 손실은 B-17, 보파이터, B-25 각 1대씩과 P-38 전투기 3대등 총 6대에 불과했다.
(브리스톨 보파이터.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8826770 )
당시 폭격에 참가했던 쌍발폭격기들인 A-20 과 B-25 는 skip bombing(물수제비 뜨기 폭격, 반도폭격)이라는 새로운 폭격방법을 선보였다.
이 폭격방식은 A-20 이나 B-25 같은 쌍발폭격기들이 고도 60m, 시속 320km 의 속력으로 적함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하여 225kg짜리 철갑폭탄을 투하하면 이 폭탄은 수면에서 약 30m 높이까지 튀어올랐다가 떨어지면서 적함의 수선부근을 강타하는 방식이었다.
폭탄에는 5초 지연신관이 달려있어 폭탄을 투하한 항공기가 안전하게 폭발반경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방식의 폭격은 폭탄이 투하 후 불과 1-2초 이내에 표적에 도달하기 때문에 일단 제대로 투하되기만 하면 사실상 회피기동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폭탄이 수선 부근에 명중하여 마치 어뢰처럼 표적함정에게 침수를 일으키기 때문에 구축함 급 이하의 소형전투함이나 수송선들처럼 현측 장갑이 없는 함정들에게는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했다.
3월 3일의 제3차 공습에서 A-20 12대와 B-25 12대는 합계 57발의 폭탄을 스킵보밍으로 투하하여 이중에 28 발을 명중시키는 놀라운 명중률을 과시했다.
비스마르크 해전 이후로 라에에 대한 일본군의 보급과 증원은 잠수함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연합함대는 4월 초부터 남태평양에서 작전가능한 해군항공기들을 총동원하여 미군에게 대규모의 공격을 가할 목적으로 ‘이’호 작전을 실시했다.
야마모또 제독이 라바울에서 직접 지휘하는 이 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오자와 중장의 제3함대 소속 항공모함 쇼가꾸, 즈이가꾸, 준요, 히요의 항공대에서 제로기 103대와 발 급강하폭격기 54대, 그리고 제11항공함대에서 제로기 88대, 발급강하 폭격기 54대, 베티 육상공격기 72대, 98식 육상정찰기 4대 등 총 375대의 항공기가 라바울과 그 인근 기지에 집결했다.
원래 함재기 조종사들은 좁고 짧으며 파도에 따라 요동치는 항공모함의 갑판에서 이착함해야하고 또한 항상 이동하는 항공모함에서 이함하여 원거리를 날아가 적을 공격한 후 그동안 다시 이동한 아군의 항공모함을 찾아서 돌아와야 한다.
따라서, 고정된 길고 넓은 활주로에서 이착륙하고 기지 주변의 지형지물을 참고삼아 귀환항로를 잡을 수 있는 지상기지의 항공기 조종사와 비교하여 따로 이착함 훈련을 해야만 하고 항법능력도 훨씬 뛰어나야 한다.
요즘도 미국의 함재기 조종사들은 지상기지에서 작전하는 공군조종사들을 멍청이라고 부르면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호 작전같이 지상기지에서 발진하는 작전에 항공모함 항공대를 대량으로 투입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페라리로 연탄 나르는 꼴이었으나 제11항공함대의 세력이 빈약하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비록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미항모항공대의 함재기들이 헨더슨 비행장에서 작전한 전례가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으로서 항공모함 항공대는 어디까지나 항공모함에서 운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지상기지에서 발진하는 작전에 항공모함 항공대를 사용한다는 이러한 결정은 또한 건조하는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고, 운용하는 데에도 잘 훈련된 조종사를 필요로 하는 항공모함이 비용대 효과면에서 별로라는 일본군 내부의 비판적인 시각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호 작전은 1943년 4월 7일에 과달카날에 대한 폭격으로 시작되어 11일에 뉴기니아의 오로 만과 하베이 만 , 12일에 포트모레스비, 16일에 뉴기니아의 밀른 만 등 네 차례에 걸쳐 제로기 491 소티, 발 급강하폭격기 102 소티, 베티 육상공격기 81 소티 등 총 674 소티를 출격하여 구축함 1척, 수송선 2척, 소형전투함 2척을 격침하고 25대의 항공기를 격추했다.
그 댓가로 일본군은 제로기 17대, 발 급강하 폭격기 19대, 베티육상공격기 6대 등 총 42대를 상실함으로써 작전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이호 작전이 끝난 이틀 후인 4월 18일에 야마모또 제독이 솔로몬 군도의 일본군을 순시하러 라바울을 떠났다.
암호 해독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아낸 과달카날의 미군이 헨더슨 비행장으로부터 16대의 P-38 라이트닝 전투기를 내보내어 쇼틀랜드 상공에서 야마모또 제독 탑승기를 격추함으로써 야마모또 제독은 전사했다.
4월 25일에 야마모또 제독의 뒤를 이어 고가 미네이찌 제독이 트럭 섬의 무사시 함상에서 연합함대사령장관에 취임했다.
(고가 미네이치 제독. 자세한 설명은 http://blog.naver.com/mirejet/110045539838 )
핼시 제독의 남태평양해역군은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지 2주 후인 1943년 2월 21일에 과달카날 서북쪽의 러셀 제도에 상륙한 후 어뢰정 기지를 건설했다.
핼시 제독은 4월말에 남서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과 라바울을 목표로 하는 수레바퀴 작전을 의제로 하여 회담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핼시 제독은 맥아더 장군의 카리스마에 완전히 매료되어 이후로 작전 기간 내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불화도 없었다.
수레바퀴 작전에 따르면 핼시 제독의 남태평양해역군이 담당한 북쪽 축선에서 중요한 목표는 뉴조지아 섬, 콜롬방가라 섬과 부겐빌 섬이었다.
1943년 6월 30일에 수레바퀴 작전이 시작되어 남태평양해역군은 뉴조지아섬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렌도바 섬에, 남서태평양 해역군은 뉴기니아의 나소 만에 각각 상륙했다.
일본해군의 제11항공함대는 육군과 협동으로 렌도바의 미국상륙선단에 대하여 6월 30일부터 7월 4일까지 6회에 걸쳐서 제로기 176소티, 베티공격기 26소티, 발 급강하폭격기 14소티, 육군의 1식 전투기 40소티, 육군의 97식 중폭격기 35소티 등 총 291소티의 폭격을 가하여 수송선 6척을 격침시키고 미군기 40대를 격추한 반면 자신들은 제로기 16대, 베티공격기 18대, 육군의 1식 전투기 6대 육군의 97식 중폭격기 8대 등 총 58대를 상실했다.
1943년 7월4일 밤, 뉴조지아 섬의 문다 비행장 수비대를 증원할 병력을 싣고 남하하여 쿨라 만에 진입한 일본구축함 4척이 마침 콜롬방가라 섬의 남쪽인 빌라에 상륙할 5개 대대를 호송하여 와서 빌라의 방어거점을 포격하던 경순양함 3척(호놀룰루, 헬레나, 세인트루시스)과 구축함 4척으로 이루어진 아인즈워스 소장의 제36.1전단(TG36.1)를 발견하고는 어뢰를 쏘아서 구축함 Strong 을 격침했다.
일본구축함들은 막상 병력의 상륙은 단념하고 돌아갔으며 한편 미군 병력은 5일 새벽 0시 36분부터 빌라에 상륙을 개시하여 오전 6시에 상륙을 완료했다.
7월 5일 밤에는 제3수뢰전대장 아끼야마 소장이 이끄는 3척의 구축함들이 문다에 상륙시킬 병력을 실은 구축함 7척을 호위하여 쿨라 만에 진입하여, 이를 저지하러 달려온 아인즈워스 소장의 TG36.1 과 교전했다.
쿨라 만 해전이라고 불린 이 전투에서 일본함대는 기함인 구축함 니즈키와 나가쓰키가 격침되어 사령관인 아끼야마 소장이 전사했고, 미함대는 경순양함 헬레나가 일본구축함이 발사한 산소어뢰에 맞아서 격침되었다.
일본함대는 증원병력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했다.
7월 12일, 이자끼 소장의 제2수뢰전단 소속 경순양함 진쑤와 구축함 5척이 문다 비행장 수비대를 증원할 1,200 명의 장병들을 실은 4척의 구축함들을 호위하여 남하하다가 쿨라 만에서 경순양함 3척(호놀룰루, 센트루이스, 리앤더)과 구축함 10척으로 이루어진 아인즈워스 소장의 제18기동부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콜롬방가라 해전으로 불리는 이 해전에서 일본함대는 경순양함 진쑤가 격침되었고, 미해군은 구축함 그윈이 격침되고 경순양함 3척이 대파되었다.
일본함대는 또다시 증원병력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했다.
7월 5일에 뉴조지아 섬에 상륙한 미육군 제43사단, 제37사단, 제25사단의 32,000 명과 해병대 1,700 명은 10,500 명의 일본군이 지키는 문다 비행장을 공격하여 1달간의 혈투 끝에 8월 5일에 점령했다.
그동안 주로 러셀 제도에서 출격한 미군기들은 일본군의 기지와 함정들에 부단한 공습을 가하여 7월 17일에는 구축함 하쓰유키, 19일에는 구축함 유구레, 22일에는 수상기 모함 닛싱, 28일에는 구축함 아리아께와 미까즈끼를 격침했다.
미군이 뉴조지아 섬을 장악하자 일본군은 북쪽에 있는 콜롬방가라 섬의 방어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1943년 8월 6일, 콜롬방가라에 증원할 병력 960명과 보급품 90톤을 실은 일본제4구축전대 소속의 구축함 3척이 구축함 시구레의 호위를 받으며 남하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미해군에서는 제12구축전대장 무스부러거 대령의 지휘 하에 구축함 6척을 파견하여 공격했다.
콜롬방가라 해전 이후 미해군은 순양함과 구축함을 분리하여 운용하기 시작했다.
구축함들로만 이루어진 일본함대에 대해서는 미함대도 구축함으로만 이루어진 함대로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구축함대는 레이더로 적을 먼저 발견한 후 자신들의 위치가 드러날 염려가 없는 어뢰로 선제공격을 가하는 새로운 전술을 채택했다.
벨라만 해전이라고 불리는 이 해전에서 미구축함들은 레이더로 일본구축함들을 먼저 포착한 후 2개의 부대로 나뉘어 3척은 일본구축함들의 진로를 가로지르고 3척은 일본구축함들의 진로와 나란히 기동하면서 6척이 동시에 어뢰를 발사한 다음 어뢰의 명중과 함께 포격을 가했다.
미함대는 불과 20분 만에 시구레를 제외한 3척의 일본구축함을 격침하여, 수송중이던 육군병사 820명과 구축함 승무원 700명, 그리고 수송중이던 보급품 90톤 모두를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자신들은 피해 전무라는 완승을 거두었다.
벨라만 해전은 구축함만을 사용하는 미해군의 새로운 전술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미군은 문다비행장을 점령한 이후 뉴조지아 섬처럼 정글이 밀생해있고 1만명이 주둔하면서 방어가 뉴조지아 섬보다 더 강력한 콜롬방가라 섬을 우회하여 8월 15일에 보다 북쪽에 있던 벨라라벨라 섬에 기습적으로 상륙했다.
이후 남서태평양해역군이 자주 사용하게 되는 개구리뛰기 작전의 시작이었다.
9월 15일에 벨라라벨라 섬에 미군이 상륙하면서 고립의 위험에 빠진 콜롬방가라의 일본군에 대한 철수가 결정되었다.
‘세’호 작전이라고 불린 이 철수작전을 통하여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콜롬방가라의 일본군 9,400 여명이 무사히 부겐빌 섬으로 철수했다.
10월 6일에는 벨라라벨라 섬에 남아있던 일본군 589명이 무사히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이날 철수하는 일본군을 태운 발동선을 공격하려던 프랭크 워커 대령 지휘 하의 미구축함 3척이 철수작전을 엄호하던 일본구축함 6척과 격돌하여 벨라라벨라 해전이 발발했는데 이 해전에서 미함대는 구축함 슈발리에를 잃었다.
뉴기니아에서는 맥아더의 남서태평양해역군이 9월5일에 라에의 동쪽에, 6일에는 라에의 서북쪽에 상륙하여 양쪽에서 협격, 11일에 살라모아를, 16일에는 라에를 함락했다.
뉴기니아 북쪽해안에 확실한 근거지를 확보한 제5육군항공대는 10월 12일, 라바울에 대하여 350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습을 가하여 수송선 1척과 소형선 2척을 격침했고, 이어서 18일, 20일, 23일에 공습을 가했으나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한편 벨라라벨라 섬을 점령함으로써 콜롬방가라 섬을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한 핼시제독의 남태평양해역군은 11월 1일에 부겐빌 섬의 중앙부인 토로키나에 기습적으로 상륙했다.
부겐빌 섬의 일분군은 대부분 남부의 부인에 집결해있었기 때문에 상륙부대인 해병제3사단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에 성공했다.
일본군은 비행장도 없는 정글인 토로키나에 미군이 상륙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나 미해군의 건설대대(See Bee’s)는 아무리 험악한 정글이라도 불과 3주 이내에 대형항공기가 작전할 수 있는 번듯한 활주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토로키나 앞바다인 엠프레스 오거스타 만에 적의 수송선이 집결해있다는 보고를 접한 일본제5전대 사령관 오모리 소장은 중순양함 2척(묘고, 하구로), 경순양함 2척(센다이, 아가노),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이끌고 공격하러 남하했다.
원래 오모리 소장의 뒤에는 토로키나의 미군에 대하여 역상륙을 감행할 목적으로 구축함 4척에 호위된 5척의 수송선이 뒤따르고 있었으나 토로키나에 상륙한 미군이 예상보다 훨씬 대부대라는 걸 알고는 수송선은 라바울로 되돌아가고 호위를 담당했던 구축함 4척은 오모리 제독의 함대에 가세했다.
미상륙선단의 해상엄호는 경순양함 4척(클리블랜드, 컬럼비아, 덴버, 몽펠리어)과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진 메릴 소장의 제39기동부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일본함대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게된 제39기동부대는 엠프레스 오거스타 만 입구에서 단종진을 형성하여 일본함대를 기다리고 있다가 일본함대가 나타나자 레이더 조준에 의한 선제포격을 가했다.
엠프레스 오거스타 해전으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메릴 소장의 제39기동부대는 열세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오모리 제독의 일본함대를 상대로 선전하여 일본의 경순양함 센다이와 구축함 하쓰가제를 격침하고 중순양함 묘꼬와 구축함 2척을 대파했다.
미함대의 피해는 침몰한 함정은 없고 경순양함 덴버와 구축함 2척 대파에 그쳤다.
미해군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엠프레스 오거스타 해전으로 레이더 조준 사격의 정확성과 유효성이 충분히 증명되었다.
11월 1일에 라바울에 있던 200 여대의 제11항공함대 세력에 더하여 쇼가꾸, 즈이가꾸, 즈이호의 함재기들로 구성된 제1항공전대(제로기 82대, 발급강하 폭격기 45대, 케이트 뇌격기 40대, 2식 함재 정찰기 6대)가 도착하여 제3함대 사령관 오자와 중장의 지휘 하에 작전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이 항공세력을 이용하여 부겐빌 섬에 집결한 미군함대를 공격하는 '로’ 호 작전을 시작했다.
11월 5일, 중순양함 6척(아타고, 다까오, 마야, 치꾸마, 모가미, 스즈야), 경순양함 2척(아가노, 노시로),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진 제2 함대가 구리따 다께오 중장 지휘하에 라바울에 도착했다.
이들은 도착한 직후 셔먼 제독의 제38기동부대 소속 항공모함 새러토가와 경항공모함 프린스턴에서 발진한 미함재기 97대로부터 공습을 받았다.
라바울의 제로기 70대가 요격에 나섰으나 미함재기들은 요격망을 뚫고 라바울 항내의 제2함대를 통격했다.
제2함대는 이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어서 비록 침몰한 함정은 없었으나 중순양함 스즈야를 제외한 순양함 7척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중순양함 마야는 자력항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작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호되게 얻어맞은 제2함대는 다시 트럭 섬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일본제2함대의 철수는 이제 전장의 주도권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는 제공권이며, 제공권을 상실한 쪽은 병력집중마저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공습이 끝난 후 라바울을 떠난 일본정찰기가 미국항공모함을 찾아 헤맸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대신 소형함정 3척으로 이루어진 소함대를 발견하여 케이트 뇌격기 14대가 공격하여 이중 1척을 격침했으나 일본기도 4대가 격추되었다.
이 공습을 시작으로 로호 작전이 발동되어 일본기들이 11월 8일에 부겐빌 섬의 미국함대에 대하여 제로기 71대, 발 급강하폭격기 26대, 케이트 뇌격기 9대, 베티 육상공격기 12대를 동원하여 2번의 공습을 실시하였으나 한 척도 격침하지 못하고 경순양함 버밍엄과 수송선 2척에 피해를 입히는데 그쳤다.
일본기들은 제로기 5대, 발 급강하폭격기 10대, 케이트 뇌격기 2대, 베티 육상공격기 5대 등 총 22대의 항공기를 상실했다.
11월 11일에는 셔먼 제독의 제38기동부대에 더하여 신예항공모함인 에섹스, 벙커힐과 경항공모함 인디펜던스 중심의 제50.3전단(TG50.3)까지 가세하여 200 여대의 대편대가 라바울을 재차 공습했다.
제로기 68대가 요격에 나섰으나 미함재기들은 구축함 스즈나미를 격침하고 나가나미와 유바리를 대파했다.
오자와 제독은 물러가는 미국함재기들을 뒤쫓아서 제로기 33대, 발 급강하 폭격기 23대, 케이트 뇌격기 14대를 발진시켜 제50.3전단을 공습했으나 단 한발의 명중탄도 기록하지 못한 채 미군의 CAP 세력과 대공포화에 의하여 제로기 2대, 발 급강하폭격기 17대와 케이트 뇌격기 14대 전부가 격추되어 총 33대를 상실하는 대피해를 입었다.
이날의 결과로 제1항공함대의 가용기 수는 52대로 떨어졌고 결국 ‘로’호 작전은 완전 실패로 끝났다.
라바울 공습 이후 제38기동부대와 제50.3전단은 태평양해역군의 길버트 제도 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남태평양을 떠났다.
11월 24일에는 부겐빌 섬 북부의 부카 섬에 증원병력을 수송하던 구축함 3척과 호위를 담당한 구축함 2척으로 이루어진 일본제31구축대를 알레이 버크 대령이 이끄는 미제23구축전대 소속 5척의 구축함이 기습하여 3척을 격침시키고 한 척을 소파시키면서 자신들은 구축함 1척 소파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세인트 조지 곶 해전)
12월에 들어서자 라바울은 뉴기니아와 부겐빌의 토로키나에서 발진하는 미군기들의 지속적인 공습에 노출되었고 미군은 12월 15일과 26일에 라바울이 있는 뉴브리튼 섬의 남쪽과 남서쪽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미군의 라바울 공격이 멀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라바울의 방어를 강화하면서 한때 80 대 정도까지 떨어졌던 라바울 항공대를 적극적으로 증강하여 항공기 세력을 300 대까지 늘렸으나 그들은 한참 잘못 짚고 있었다.
미군은 13만 5천명이라는 일본군의 대군이 집결해있고, 방어가 철저한 일본군의 대기지 라바울에 정면공격을 가하여 막대한 희생을 치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미군은 라바울을 우회한 후 지속적인 공습과 보급로 차단을 통하여 무력화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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