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월 21일에 팬아메리칸 사의 여객기를 타고 가다가 추락사고로 사망한 태평양함대의 잠수함대 사령관 Thomas English 소장의 후임으로 2월에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잠수함대 사령관이었던 Charles Andrews Lockwood 소장이 취임하여 말라리아로 입원하고 있던 니미츠 제독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록우드 소장은 태평양함대의 잠수함대 사령관이 됨으로써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모든 잠수함장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를 해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골칫거리는 바로 Mk14 신형어뢰였다. 

 

(Mk 14 어뢰)

 

미국의 잠수함장들은 개전 직후부터 그들의 신형어뢰에 뭔가 큰 문제점이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어뢰에 대한 그런 불만들은 대부분 보잘것 없는 전과를 올린 무능한 잠수함장들의 핑계쯤으로 치부될 수 있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잠수함장 자신들도 그런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시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1942년 12월 말에 Mk14 어뢰의 개발에 관여한 적이 있는 잠수함장인 티렐 제이콥스가 처음으로 신형어뢰의 결함가능성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지만, 잠수함대 자체가 필리핀에서 자바 섬으로 도망가는 난리통에 아시아함대의 잠수함대 사령관인 존 윌크스 대령은 그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이 소식을 들은 해군병기국에서는 재빨리 사람을 파견하여 신형어뢰가 부정확하게 작동한 이유는 잠수함장들의 취급부주의 때문이라고 몰아세우면서 문제를 덮어 버렸다. 

1942년 3월에 윌크스 대령의 뒤를 이어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잠수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록우드 제독은 어뢰에 대한 불만 때문에 잠수함장들의 사기가 지극히 떨어져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으며 즉시 잠수함들의 항해일지를 면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미국 잠수함들이 개솔린 엔진을 장착했던 시절부터 무려 7척의 잠수함장을 역임하여 잠수함과 그 함장들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미해군에서 몇 안되는 제독 중 한 사람이었던 록우드 제독은 항해일지에 기록된 어뢰의 오작동에 관한 내용 중 상당수가 분명히 어뢰자체의 결함에 의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록우드 제독은 우선 어뢰가 조정심도보다 깊게 항주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워싱턴에 있는 해군본부의 병기국에 편지를 보내어 Mk14 어뢰가 조정심도대로 항주하는지를 실제로 실험한 데이터가 있는지 질의했다.
이 질의에 대하여 병기국은 발끈하여 어뢰가 작동불량이 된 원인은 잠수함장들이 어뢰를 미숙하게 다루어서이며, 조정심도대로 항주한다는 뻔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한발에 1만달러짜리 어뢰를 낭비할 이유는 없다고 회답했다.
사실 Mk14 어뢰가 개발되는 15년 동안 실전용 탄두를 달고 발사시험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단 한번도!!
대신 병기국은 예산을 절약하기 위하여 탄두부에 물을 넣어서 실험했는데 실제탄두와 실험에 사용된 물넣은 탄두와의 무게차이 때문에 실전 상황에서 어뢰가 더 깊이 항주하게 된 것이었다.

무성의한 병기국의 회답에 화가 난 록우드 제독은 1942년 4월에 직접 오스트레일리아 앞바다에 그물을 쳐놓고 어뢰를 발사하여, 어뢰가 조정심도보다 최소한 3m 이상 더 깊이 항주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록우드 제독은 다시 병기국에 편지를 보내어 이 실험결과를 알리고, 실전탄두를 장착한 Mk14 어뢰의 발사실험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알려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으나, 병기국은 록우드 제독이 실시한 부정확한 실험의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이때 미함대사령관이면서 해군참모총장을 겸임하고 있던 킹 제독이 개입했다.
록우드 제독이 병기국에 보낸 편지의 사본을 읽어본 킹 제독은 즉시 병기국에 실전탄두를 장착한 Mk14 어뢰의 발사실험을 실시할 것을 명령했다.
빠져나갈 길이 막혀버린 병기국은 실전탄두를 장착한 Mk14 어뢰의 발사실험을 실시했고, 그 결과 어뢰가 조정심도보다 최소한 3m 이상 깊게 항주한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리하여, 잠수함장들에게는 심도조절시 3.3m 를 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즉 4.5m의 심도를 원하면 심도조절 다이얼을 1.2m 로 맞추는 식이었다.
그것이 1942년 8월의 일이었다.
 
하지만 심도조절 문제가 해결되자 이번에는 어뢰가 적함선에 도달하기 전에 조기 폭발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문제의 원인은 Mk14 어뢰에 사용된 신형 Mk6 자기기폭장치였다.
이 신형의 자기기폭장치는 어뢰의 폭발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위하여 적의 함저를 지나면서 자기장이 최대에 이르렀다가 약해지는 순간 폭발하여 최대의 효과를 얻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방식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했으나, 문제는 함선을 둘러싼 자기장이 실제로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특히 적도 부근에서는 배의 항진방향으로 자기장이 쏠린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누구도 몰랐다는 점이었다.
록우드 제독과 잠수함장들은 직감적으로 이 문제점을 깨닫고 자기기폭장치를 죽여버리고, 촉발장치만으로 어뢰를 격발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었으나 값비싼 자기기폭장치를 무력화시키는 데 따른 병기국의 반발 때문에 잠수함대 전체에 공식적으로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개별잠수함 수준에서 알아서 처리하는 실정이었다.

록우드 제독은 이런 상황에서 태평양함대의 잠수함대 사령관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니미츠 제독이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만나게 되었다.

니미츠 제독은 잠수함용 디젤기관에 대하여 미해군 내에서 최고 권위자 중 한사람으로서 미국잠수함의 엔진을 위험천만한 개솔린 엔진에서 디젤 엔진으로 바꾸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잠수함장과 잠수전대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진주만의 잠수함 기지를 건설한 것도 당시 소령이었던 니미츠 제독이었다.

그는 일본같은 섬나라를 굴복시키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전략 중 하나인 봉쇄작전을 수행하는데 잠수함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태평양함대 사령관 취임식도 잠수함 승무원들의 사기를 고려하여 일부러 잠수함 그레일링 호의 갑판에서 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필리핀 해전에서는 그의 외아들인 체스터 니미츠 주니어 소령도 잠수함장으로 참전할 정도로 잠수함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잠수함의 주무장인 어뢰의 결함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킹 제독에 이어서 실질적인 미해군의 제2인자인 니미츠 제독의 전폭적인 후원 하에서 록우드 제독은 어뢰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병기국을 심하게 압박했다.
언젠가는 워싱턴에 날아가서 해군본부의 모든 국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병기국이 제대로 작동하는 어뢰를 안 만들어주면 함선국에 요청하여 적을 끌어당겨서 구멍을 낼 수 있도록 갈고리 달린 막대기를 잠수함에 부착시켜 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고 발언하여 병기국의 체면을 완전히 구겨버리고 어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전 해군에게 널리 알린 적도 있었다.
비록 증명해내지는 못했지만 어뢰의 조기폭발은 틀림없이 Mk6 자기기폭장치의 문제라는 록우드 제독의 판단을 신뢰한 니미츠 제독은 1943년 6월에 태평양함대의 전 잠수함에 대하여 자기기폭장치의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불발어뢰가 급증했다.
병기국은
 
 “거 봐라, 결국 잠수함장들이 어뢰를 잘못 다루어서 그렇다니깐..”
 
하고 반격에 나섰으나 록우드 제독은 하와이 근해의 해안절벽에 대고 3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그 중에서 불발한 마지막 어뢰를 회수, Mk6 기폭장치의 격침이 너무 무겁고 마찰이 강한 것이 불발의 원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 해결책은 격침을 가볍게 만들고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어서 마찰을 줄인다는 어이없도록 간단한 것이었다.
진주만의 해군공창에서 기존의 격침을 갈아서 가볍게 만든 새 격침을 채용하자 어뢰의 불발률은 거의 제로로 떨어졌다.
이때가 1943년 9월, 이제야 태평양함대의 잠수함장들은 제대로 작동하는 어뢰를 가지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뢰 문제가 해결된 태평양함대와 달리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잠수함장들은 아직도 자기기폭장치의 사용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록우드 소장의 뒤를 이어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잠수함대 사령관이 된 사람이 바로 Mk6 자기기폭장치의 개발자인 크리스티 소장이었다.
크리스티 소장은 자기기폭장치에 대한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어뢰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한 잠수함장들을 좌천시켜 미본토로 쫓아보내거나 지상근무로 돌려버리는 등 보복인사를 자행했다.
하지만 남서태평양해역군 소속 잠수함장들의 이런 어이없는 고생도 1943년 11월이 되자 끝이 났다.
크리스티 소장의 직속상관인 제7함대 사령관으로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이었던 토마스 킨케이드 중장이 착임했다.
유능하고 야심만만한 킨케이드 중장은 크리스티 소장의 그런 황당한 행위를 그냥 보아 넘길 인물이 아니었다.
즉시 제7함대 사령관 명의로 남서태평양해역군의 모든 잠수함장들에게 자기기폭장치의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잠수함장들은 실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지 2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작동하는 어뢰를 가지고 작전할 수 있게 되었다.

1943년 3월 초에 통합참모본부는 태평양함대에게 11월 말까지 마셜제도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통합참모본부는 이 작전을 위하여 남서태평양해역에서 작전 중이던 해병제1사단과 해병제2사단을 니미츠 제독에게 할당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이 즉각 항의하여 해병제1사단을 도로 가져가 버렸다.   

1943년 3월 15일에 미해군은 모든 함대에 번호를 붙이기로 하여 태평양 지역의 함대들은 홀수 번호를 붙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핼시 제독이 지휘하던 남태평양해역군 함대는 제3함대, 태평양함대는 제5함대, 그리고 남서태평양해역군 소속의 함대에는 제7함대라는 번호를 붙였다.

1943년 6월 18일, 마셜제도가 지상발진 항공기의 행동반경 밖에 있다는 이유를 들어 보다 남쪽에 있는 길버트 제도를 먼저 공략하겠다는 니미츠 제독이 수정안이 통합참모본부에 의하여 승인되었다.
원래 마셜제도같이 지상발진 항공기의 행동반경 밖에 있는 목표라도 항공모함을 동원하면 일단 점령을 할 수는 있으나, 대양을 돌아다녀야 하는 항공모함이 허구헌날 마셜제도를 지켜주고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앞으로의 전사에 의해서도 증명되지만 항공모함이 육지에 가까운 해안에 오래 머무르면 잠수함에 의한 위협에 노출되기 쉬웠다.
결국 상륙군이 빨리 비행장을 만들어 스스로를 지켜야하는데 그러려면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여 마셜제도의 여러 환초를 동시에 공격해야 했으나, 해병 제1사단을 맥아더 장군이 도로 가져가버리는 바람에 태평양함대에는 상륙병력이 부족했다.
길버트 제도는 남쪽의 앨리스 제도에 있는 푸나푸티 섬과 서쪽의 칸톤 섬에서 출격하는 폭격기의 항속거리 안에 있었으므로 항공모함들이 철수한 후에도 상륙군이 스스로의 비행장을 만들 때까지 충분한 항공엄호를 받을 수 있었다.

또 길버트 제도에 비행장을 만들면 마셜제도에 대한 사진촬영과 사전폭격에 활용할 수 있었고,마셜제도 점령 후에 비행장을 만들 때까지 항공엄호를 제공해 줄 수 있었다.

1943년 8월 5일, 니미츠 제독은 공식적으로 제5함대를 창설하면서 그 사령관으로 태평양함대 참모장이었던 스프루언스 중장(1943년 5월에 중장 승진)을 임명했다.
태평양함대의 참모장 자리는 북태평양에서 돌아온 맥모리스 소장이 맡았다.
8월6일에는 고속항공모함 부대인 제50기동부대(나중에 미처 제독이 사령관이 되면서 제58기동부대로 개칭) 사령관에 엔터프라이즈의 제2대 함장을 지냈던 파우널 소장을 임명했다.
상륙작전시 수송선, 호위함, 구식전함, 호위항공모함 등을 통제하게 되는 태평양함대의 상륙작전부대는 8월 24일에 제5상륙작전부대로 명명되면서 켈리 터너 소장이 사령관이 되었고, 직접 상륙하는 지상군 부대는 제5상륙작전군단으로 명명되어 홀란드 스미스 해병소장이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이 밖에도 제5함대에는 방어용 기지항공대가 소속되어 해군인 후버 소장이 사령관이 되었다.

 

니미츠 제독이 단행한 이 8월 인사는 꽤 많은 반발과 잡음을 만들어냈으며, 그것은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태평양함대의 전투병력을 사실상 한손에 장악하는 제5함대 사령관이나 건조 중이거나 이미 완성된 22척 이상의 고속항공모함들을 지휘하여 사실상 태평양전쟁을 이끌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될 제50기동부대 사령관 자리를 노리는 야심있는 장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육군항공대와 해군의 기지항공대, 또는 상륙작전시 육군과 해병대 간의 지휘권 문제까지 겹쳐 있었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은 군 사이, 또는 병과 사이의 균등안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대로의 적재적소 원칙을 견지하면서 온갖 압력과 불만에 맞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완전히 관철시켰다.
이것은 불과 1년 6개월전에 니미츠 제독이 공격계획 하나를 채택하는 데에도 부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핼시 제독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서야 겨우 자신의 계획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일로써 이제 니미츠 제독이 태평양함대를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1943년 5월에 신예항공모함인 CV-9 Essex 가 진주만에 도착했다.
원래 에섹스 급은 제2차 빈슨트라멜 법에 의하여 요크타운 급의 개량형인 호넷을 설계한 후 20,000 톤 급인 호넷의 후계함을 모색해 본 것이 그 시초이다.
당시 설계팀은 요크타운 급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항공기의 대형화 추세에 발맞추어 비행갑판을 넓히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아 여러가지 시도를 하던 중 제2차대전의 발발과 함께 배수량이 20,000 톤에서 27,000 톤으로 늘어나자 그 동안 고민했던 문제들이 일시에 풀리면서 아주 성공적인 항공모함을 설계해내는데 성공했다.
에섹스 급은 요크타운 급에 비하여 더 길고 넓은 비행갑판을 가지고 있어서 앞갑판에서는 이함하고 뒷갑판에서는 착함을 동시에 하는 일이 가능해졌고, 더 넓어진 격납고 갑판에는 장갑판을 설치했다.
엔진도 15만 마력으로 12만 마력의 요크타운급보다 강화되었고, 아일랜드에 있던 전투정보센터(CIC)를 비행갑판 밑으로 내려서 장갑으로 보호받게 하면서 동시에 아일랜드는 소형화시켜서 비행갑판은 대형화된 함재기들 72대가 동시에 작전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다.
또한 비행갑판 중앙에 있던 엘리베이터를 비행갑판 가장자리로 옮겨서 항공기가 이착함을 하는 중에도 모든 엘리베이터의 사용이 가능해졌다.
대공화기도 전반적으로 더 충실해졌고 손상관리시스템도 보다 근대화되었으며 특히 요크타운 급의 약점으로 여겨졌던 수선하 방어력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었다.

 

(CV-9 Essex. 자세한 내용은 http://blog.daum.net/ironstuff/15357699 )

 

에섹스 급의 설계는 전장환경의 변화를 감안하여 1943년 초에 큰 변화를 겪었다.
이 변화된 설계에 따르면 함체를 20m 정도 늘려서 그 공간에 보포스 40mm 대공포를 증설하고 환기계통이나 조명등의 전기계통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이렇게 바뀐 설계도대로 건조된 에섹스 급을 ‘long-hull’  type 이라고 부르며 이전의 설계대로 건조된 함을 'short hull' type 이라고 부른다.
이 long-hull type 은 최초로 건조된 CV-14 Ticonderoga 의 이름을 따서 타이콘데로가 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CV-14 Ticonderoga)

 

에섹스 급은 정규항공모함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대량건조되어 모두 32척이 예정되어 24척이 실제로 완성되었다.
이들 중 17척이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전에 취역했고, 실제로 전투임무에 참가한 것은 short-hull type 5척 모두와 long-hull type 9척 등 총 14척이다.
에섹스 급은 1943년 8월 31일에 마르쿠스 섬 공격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에 참가하여 고속항공모함부대의 주력으로서 종전시까지 1943년 11월 3일의 제1차 라바울 공습을 제외한 모든 항공모함 작전에 참가하였으며, 그 기간동안 단 한 척도 침몰하지 않았다.

CV-13 Franklin 과 CV-17 Bunker Hill 이 각각 피해를 입고 전쟁에서 물러난 것이 전부이다.
벙커 힐은 1945년 5월 11일에 오끼나와 앞바다에서 2대의 가미까제 공격기에게 당했고, 프랭클린은 1945년 5월 19일에 혼슈 앞바다에서 일본기가 투하한 250kg 짜리 폭탄 2발이 명중하여 둘 다 큰 화재가 발생하면서 수백명의 전사자를 기록했으나, 모두 자력항해로 진주만까지 회항했다.   

1943년 8월 31일, 신예항공모함인 에섹스, CV-10 Yorktown, 경항공모함인 CVL-22 Independence 를 중심으로 한 제15기동부대가 파우널 제독의 지휘 하에 마르쿠스 섬을 폭격하여 항공기 7대를 격추하고 함정 3척을 격침하는 한편 지상시설에 심한 피해를 입혔다.
제15기동부대는 헬캣 2대와 아벤저 1대를 상실했다.
9월 18일과 19일에는 제50기동부대 소속의 항공모함 3척(CV-16 Lexington, CVL-23 Princeton, CVL-24 Belleau Wood )에서 날아오른 함재기들이 푸나푸티 섬에서 날아온 제7육군항공대 소속의 B-24 Libertor 와 함께 길버트 제도를 폭격했다.
10월 5일과 6일에는 6척의 항공모함이 6회에 걸쳐서 웨이크 섬을 폭격했고, 전함과 순양함이 이 섬을 포격했다.
이러한 마르쿠스 섬과 웨이크 섬 공격은 고속함공모함 부대의 승무원들을 훈련시키고 신예기인 F-6F Hellcat 전투기와 Helldiver 급강하폭격기를 시험해 보는 무대였다.

또한 이러한 공격을 통하여 3-4척의 항공모함을 진형의 중앙에 넣은 대규모의 대공원형진을 시험했다.

 

(F6F Hellcat.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rectek2/12226726 )

 

1943년 11월 20일, 엔터프라이즈는 길버트 제도의 메이킨 환초 앞바다에 있었다.
엔터프라이즈는 Arthur W. Radford 소장 지휘 하에 경항공모함 벨로 우드와 CVL- 26 Monterey 와 함께 제50.1전단(TG50.1)을 형성하여 메이킨 환초 상륙작전을 지원하게 되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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