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1월 10일, 엔터프라이즈를 포함한 제50.2전단은 Operation Galvanic 이라고 불리는 길버트 제도 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진주만을 떠났다.
Galvany 는 개구리의 살이 전기에 닿으면 빠직하고 오그라드는 것을 발견한 과학자이다.
따라서 영어로 Galvanic 이라고 하면 전기 충격으로 찌릿찌릿하는 것을 뜻한다.
번역할 때는 주로 충격작전이라고 번역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번역해서는 이 이름을 지은 태평양함대 참모들의 느낌을 전하기 어렵다.

충격작전에 참가하는 병력은 크게 3개 부대였는데 터너 제독이 지휘하는 상륙작전 함대인 공격부대, 파우널 제독이 지휘하는 제50기동부대, 후버 제독이 지휘하는 기지항공대였다.
충격작전의 목표는 길버트 제도 북부의 메이킨 환초와 그 남쪽의 타라와 환초였는데 이 두 곳에 동시에 상륙하기 위하여 공격부대는 다시 2개부대로 나뉘어져 있었다.

힐 소장이 지휘하는 남부공격부대는 에스피리투산토를 떠나 타라와 환초의 베티오 섬에 상륙하기로 되어 있었으며 상륙군은 Julian C. Smith 해병소장의 해병제2사단과 육군 제37사단의 일부 병력을 포함한 18,300 명이었다.
남부공격부대의 일부 병력은 아베마마 환초를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침공부대 사령관인 터너 소장이 직접 지휘하는 북부공격부대는 하와이를 떠나 메이킨 환초의 부타리타리 섬에 상륙하기로 되어 있었으며, 상륙군은 미육군제27사단의 제165연대전투단으로 총 병력은 6,470 명이며 지휘관은 제27사단장 Ralph C. Smith 소장이었다.
그런데 침공부대의 지상부대인 제5상륙군단의 사령관은 '울부짖는 미치광이(Howling Mad)' 란 별명을 가진 Holland Smith 해병소장이었으므로 길버트 상륙작전의 지상군 지휘관들은 3명 다 Smith 소장이다.
실제 작전시에는 남부공격부대와 북부공격부대가 따로 작전했으므로 원래 제5상륙군단장 스미스 소장은 상륙하지 않고, 북부공격부대를 지휘하던 터너 소장과 같이 전함 펜실베니아 호에서 공격을 지켜볼 예정이었다.

제50기동부대는 정규항공모함 6척(새러토가, 엔터프라이즈, 에섹스, CV-10 요크타운, 벙커 힐, CV-16 렉싱턴), 경항공모함 5척(인디펜던스, 프린스턴, 벨로우드,  카우펜스, 몬터레이), 고속전함 6척(노스캐롤라이나, 워싱턴, 사우스다코타, 인디애나, 메사추세츠, 앨리배마 ), 중순양함 3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21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50기동부대는 다시 4개의 전투단으로 나뉘어져서 각자의 목표를 공격했다.
파우널 제독이 직접 이끄는 제50.1전투단은 정규항공모함 요크타운, 렉싱턴, 경항모 카우펜스, 고속전함 워싱턴, 사우스다코타, 메사추세츠를 중심으로 편성되어 남부 마셜 제도를 공격하여 길버트 제도 상륙작전에 대한 일본기들의 개입을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래드포드 소장이 이끄는 제50.2전투단은 정규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경항공모함 벨로우드, 몬터레이, 고속전함 노스캐롤라이나, 인디애나 중심으로 편성되어 메이킨 상륙작전을 엄호하게 되었다.
몽고메리 소장이 이끄는 제50.3전투단은 정규항공모함 에섹스, 벙커힐, 경항공모함 인디펜던스, 전함 앨리배마 중심으로 이루어져 타라와 상륙작전을 엄호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셔먼 소장이 이끄는 제50.4전투단은 정규항공모함 새러토가, 경항공모함 프린스턴 중심으로 편성되어 남쪽의 나우루를 폭격하여 이쪽 방면의 일본항공기가 길버트 제도 상륙작전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임무를 맡았다.

엔터프라이즈는 제50.2전투단의 일원으로 11월 11일에 타라와를 폭격했고, 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날인 11월 19일부터 11월 25일까지 메이킨 환초를 폭격했다.

길버트 제도 상륙작전이 시작되기 1주일 전인 11월 13일부터 17일까지 육군제7항공대 소속의 중폭격기들이 141소티를 출격하여 173톤의 폭탄을 길버트 제도와 마셜제도에 쏟아부었다.
11월 19일이 되자 제50.2전투단의 함재기가 메이킨 환초에 폭격을 개시했고 상륙일인 20일이 되자 북부공격부대 소속인 구형전함 펜실베니아, 아이다호, 뉴멕시코, 미시시피가 메이킨 환초에 포격을 시작했고 호위항공모함들인 CVE-33 Coral Sea, CVE-39 Liscome Bay,  CVE-41 Corregidor 의 함재기가 폭격에 가세한 가운데 제27사단 제165연대전투단이 상륙을 개시했다.

당시 점령목표였던 메이킨 환초의 부타리타리 섬에는 일본군 800 여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그중에 전투병력은 284명이었다.
따라서 병력 수에서 26대 1의 우세를 점한 제165연대전투단은 하루만에 부타리타리 섬을 점령할 예정이었으나 하와이에 주둔하고 있다가 메이킨 환초 상륙전에 동원되어 실전경험이 전혀 없던 제165연대전투단은 예상보다 훨씬 늦어진 11월 23일에야 부타리타리 섬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다.
펜실베니아 호에 탑승하고 있던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 해병소장은 제27사단장인 랄프 스미스 육군소장에게 진격을 더 빨리 하라고 소리를 지르기 위하여 부타리타리 섬에 상륙했다.
이러한 의견 차이는 제165연대전투단의 전투능력 외에도 육군과 해병대 간의 전술 차이에 기인하는 바가 컸는데 육군은 병력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신중히 전진하며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적병을 철저히 제거하는 전술을 사용하는데 비하여 해병대에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급속히 전진하는 전술을 채택하고 있었으며 그 이유는 엄호하는 함대가 교두보 근처에 오래 머물수록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메이킨에서는 해병대의 이 전법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1월 24일 오전 5시 10분, 일본잠수함 I-175 호가 호위항모 리스컴베이에게 어뢰 2발을 명중시켜 20분만에 격침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 참사로 제24항공모함 전대 사령관인 Henry M. Mullinix 소장을 비롯한 장교 55명과 진주만 기습당시 용감한 행동으로 훈장을 받은 흑인취사병 Dorie Miller 를 포함한 사병 591명등 646명이 전사하여 부타리타리 섬에서 전사한 66명의 10배에 가까운 희생자를 기록했다.
만일 부타리타리 섬이 예정대로 일찍 점령되었다면 리스컴베이는 진작에 그곳을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메이킨 환초에서 남쪽으로 160km 정도 떨어진 타라와 환초에서는 제2해병사단이 메이킨 환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2,600 여명의 전투병력을 포함한 총 4800 여명이 주둔하고 메이킨 환초보다 훨씬 강력하게 요새화된 타라와 환초의 베티오 섬을 공격한 제2해병사단은 길이 3km, 폭 1km 남짓한 베티오 섬을 탈취하기 위한 76시간의 전투에서 장교 57명, 사병 933명 등 해병대 990명과 태반이 군의관인 해군 29명등 총 1,019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일본군의 전사자는 부타리타리 섬에서 395명, 베티오 섬에서 4,690명, 그리고 아베마마 섬에서 23명등 총 5108 명이었다.

메이킨 환초와 타라와 환초에 근접하여 항공지원을 하고있던 제50.2전단과 제50.3전단은 일본항공기들의 반격을 받았다.
제50.2전단은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매일같이 일본의 베티공격기의 공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11월 25일, 메이킨을 떠난 제50.2전단은 함대 부근에서 일본잠수함 I-19를 발견하고 격침하여 그 전해인 1942년 9월 15일에 과달카날 근해에서 I-19 호가 발사한 어뢰에 맞아서 격침된 와스프의 원수를 갚았다.  
11월 26일에는 메이킨 서방해역에서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제2전투항공대가 3대의 야간전투기를 내보내어 제50.2전단에 대한 야간공격을 위하여 마음놓고 접근하던 베티공격기의 대군을 기습함으로써 태평양에서 최초로 항공모함 함재기에 의한 야간공중전을 선보였다.
별다른 피해없이 일본기의 반격을 잘 처리한 제50.2전단과 달리 제50.3전단은 11월20일에 경항공모함 인디펜던스가 베티공격기가 발사한 어뢰에 우현을 맞아 8개월간의 수리를 요하는 대손상을 입었다.

경항공모함(CVL)으로 분류되는 인디펜던스 급은 원래 에섹스 급이 취역하기로 예상되었던 1944년 3월까지 고속항공모함의 공백을 메꾸기 위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8월에 경순양함 클리블랜드 급의 선체를 개조하여 고속의 소형항공모함으로 개조하도록 제안한 것이 시초이다.
함선국에서는 경순양함의 좁은 선체를 이용하여 항공모함을 만들기는 어렵고 시간도 많이 든다는 이유를 들어 10월 13일에 일단 거부의견을 밝혔으나 1주일 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재차 검토해 볼 것을 지시했다.
그러던 중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 1월 3일부터 함선국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안보다 훨씬 적은 개조만을 가한 경항공모함을 설계하기 시작하여 불과 1주일만인 1월 10일에 건조 중이던 클리블랜드 급 경순양함 암스테르담을 경항공모함으로 개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인디펜던 스 급의 개조 및 건조작업은 착착 진행되어 1943년 1월 14일에 초도함인 CVL-22 인디펜던스가 취역한 이래 마지막 9번함인 CVL-30 San Jacinto 가 1943년 11월 15일에 취역했다.
이중 5척은 건조 중이던 경순양함을 개조한 것이며 4척은 처음부터 경항공모함으로 건조한 것이다.
인디펜던스 급은 배수량 11,500 톤에 속력 32노트로 헬캣 25대와 아벤저 뇌격기 9대를 표준적으로 운용하여 에섹스 급 정규항공모함의 1/3쯤 되는 항공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
무장은 초반에는 5인치 양용포 2문, 보포스 40mm 대공포 16문, 20mm 대공포 16문이었으나 나중에는 5인치 양용포를 폐지하고 20mm 대공포를 8문으로 줄이는 대신 40mm 대공포를 26문으로 증설했다.
인디펜던스 급 경항공모함은 배수량에 비해서는 비교적 양호한 성능을 보였고 수선하 방어력 또한 어뢰방지용 블리스터를 채용하여 형편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소형 함체로 인한 방어력의 부족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경항공모함 인디펜던스 급의 네임 쉽인 CVL-22 Independece)


인디펜던스 급 경항공모함은 전쟁 기간 내내 정규항공모함들과 함께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일원으로서 1943년 11월 3일의 제1차 라바울 공습을 필두로 모든 항공모함 작전에 참가하여 1척(CVL-23 Princeton)이 격침되었다.
프린스턴은 레이테 해전 기간 중인 1944년 10월 24일에 일본급강하폭격기가 투하한 폭탄 1발에 맞아 화재가 발생하여 소화작업 도중에 어뢰저장고가 폭발하면서 소화작업에 임하던 경순양함 CL-62 Birbingham 호에 150명 전사라는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히면서 결국 침몰하고 말았다.

12월 4일, 제50기동부대 사령관 파우널 제독은 제50.4 전단을 제외한 3개 항공모함 전단을 이끌고 마셜 제도의 콰잘레인 환초와 워제 환초를 공격하고 마셜제도 공략을 대비하여 사진을 찍었다.
제50기동부대는 일본함정 4척을 격침했으나 일본군도 반격을 가하여 정규항공모함 렉싱턴에게 1발의 항공어뢰를 명중시켜서 진주만으로 회항하도록 만들었다.
파우널 제독은 원래 콰잘레인에 대하여 2번의 공습을 가하려고 했으나 제1차 공습에서 콰잘레인의 일본군 항공기 세력이 만만찮은 것을 보고는 제2차 공습을 단념하고 물러났다.
충격작전 기간 중에 엔터프라이즈의 제6항공단은 11월 26일에 1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1943년 12월 13일, 엔터프라이즈가 포함된 제50.2전단은 에스피리투산토의 에파테 기지에 도착했다.
1943년 한해 동안 엔터프라이즈는 총 13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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