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이 시작되었을 때 엔터프라이즈는 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 중의 한척이었을 뿐으로 해군관계자가 아닌 한 이 배의 이름을 한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1942년이 저물 때쯤에는 전세계에서 적어도 가끔씩이라도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영화를 보는 사람 중에서 이 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1942년 한해는 엔터프라이즈에게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일단 굵직굵직한 사건들만 해도 4월 18일에는 둘리틀 중령의 비행대가 일본의 수도 도쿄를 공습했고, 5월 7일에는 산호해에서 미국과 일본의 함대가 사상 최초의 함대항공전을 치렀으며(산호해 해전) 6월 4일에는 유명한 미드웨이 해전이 벌어졌다.

2달 후인 8월 7일에는 미해병대가 과달카날 섬에 상륙하여 일본군과 6개월에 걸친 사투를 시작했다.

8월 24일에는 과달카날 근해에서 3번째의 함대 항공전인 동부 솔로몬 해전이 벌어져서 엔터프라이즈가 지옥 문턱까지 다녀왔고 10월 26일에는 4번째의 함대항공전인 산타크루즈 해전이 벌어졌다.

11월 15일에는 리 제독이 지휘하는 신예전함 워싱턴이 일본전함 기리시마를 일방적으로 두들겨패서 가라앉히면서(과달카날 해전) 과달카날 근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엔터프라이즈는 산호해 해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작전에 직간접적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투의 와중에서 태평양함대의 동료 항공모함들이 하나씩 격침됨으로써 살아남은 엔터프라이즈에게 주어진 부담과 중요성도 높아졌다.  

우선 렉싱턴이 산호해 해전에서 격침되었고, 그곳에서 살아남아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했던 자매함 요크타운도 결국 미드웨이 해전에서 최후를 맞았다.

8월31일에는 새러토가가 1월 11일에 이어서 두번째로 일본잠수함의 어뢰에 피격되어 진주만의 건선거에 들어앉아 있어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고 9월 16일에는 과달카날 근해에서 호송임무를 수행하던 와스프가 일본잠수함의 어뢰 3발을 맞고 최후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호넷마저 10월 26일에 벌어진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침몰해버리자 이제 새러토가가 수리를 마치고 전열에 복귀한 12월 5일까지 태평양함대에 항공모함이라고는 엔터프라이즈 한척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엔터프라이즈 승조원들의 심정을 잘 나타낸 말이 산타크루즈 해전 직후 격납고 갑판에 누군가가 페인트로 굵게 썼다는 다음의 구문이라고 생각된다.

"Enterprise vs. Japan"

이렇듯 1942년은 엔터프라이즈에게는 세계해전사에 영원히 남을 명성을 얻게 해준 시절이기도 하지만 함정과 항공기의 승무원에게는 힘들고 괴로운 시기이기도 했다.
1942년 한해동안 엔터프라이즈는 6발의 폭탄을 맞아 최소한 300명 이상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또한 1942년은 해전사에서 엔터프라이즈의 이름을 쉽게 접해볼 수 있는 마지막 시기다.

1943년이 되어 에식스급 항공모함들이 대거 태평양함대에 합류하면서부터는 엔터프라이즈의 이름은-다른 항공모함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전투서열에서나 찾아볼 수 있지 일반적인 기술에서는 단지 제58(또는 제38)기동부대로 나올 뿐이다.

1943년 이후의 해전사 기술에서 미국의 개별 항공모함의 이름이 거론될 경우는 기함이 아닌 한 대부분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경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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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주만 기습

1941년 12월 7일 새벽, 엔터프라이즈 소속인 제6정찰비행대대의 마누엘 곤잘러스 소위가 조종하는 돈틀리스 급강하폭격기가 포드섬에 있는 해군비행장으로 날아갔다.
오전 8시경, 엔터프라이즈의 통신실에 곤잘러스 소위가 무전기에다 대고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잡혔다.

 

"제발 쏘지 마! 쏘지 말라니까! 이건 미군 비행기라구."
("Please don't shoot! Don't shoot! This is an American Plane.")

 

잠시 후 곤잘러스 소위가 통신병(이자 후방사수)인 리어나도 코즐렉 일병에게 낙하산으로 탈출하라고 명령하는 소리가 들리고 통신이 끊겼다.

그 직후 엔터프라이즈는 태평양함대 사령부로부터 진주만을 공습한 일본함대를 수색하여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에 따라 엔터프라이즈에서는 8시 15분부터 엔터프라이즈의 비행단장인 하워드 영 소령의 지휘 하에 제6정찰비행대대에서 13대, 제6폭격비행대대에서 4대등 총 18대(1대는 비행전대장기)의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를 발진시켜서 엔터프라이즈의 동남방 240km 지역을 수색했다.

엔터프라이즈에게 수색명령을 내릴 당시 진주만에서는 오아후 섬의 서쪽을 돌아 남쪽으로부터 진주만에 돌입한 일본의 함상공격기를 보고 하와이 남쪽 어딘가에 있는 일본함대로부터 출격하였다고 추측하였으나 틀린 예상이었다.
방향이 엉뚱하게 설정된 관계로 수색은 실패했다.

수색에 참가했던 함재기들은 포드 섬에 착륙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는데 이들이 포드 섬 상공에 도착한 시간이 마침 일본의 제2차 공격대의 공습시간과 맞물려서 일본기의 공격과 아군의 대공포화에 의하여 6대의 돈틀리스 급강하폭격기가 격추되어 8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때 제6정찰비행대 소속의 디킨슨 대위가 조종하던 돈틀레스의 후방사수인 윌리엄 밀러 병장은 제로기의 공격으로 인두부와 손목에 총상을 입으면서도 후방석의 7.62mm 기총으로 총탄이 떨어질 때까지 반격을 가하여 1기의 제로기를 격추함으로써 엔터프라이즈의 공식격추기록 제1호를 달성했다.
그 직후 디킨슨 대위의 돈틀리스는 다른 제로기의 반격을 받아 격추되었으나 디킨슨 대위와 밀러 병장은 무사히 탈출하여 생명을 건졌다.
이때 살아남아서 포드섬과 주변의 비행장에 착륙한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 중 비행이 가능한 9대는 지상에서 대충 정비가 끝나는대로 다시 날아올라 개별적으로 일본기들이 사라져 간 방향인 북쪽으로 약 160km 까지 정찰을 실시했으나 일본함대를 찾지 못했다.

그날 오후 5시 제6뇌격대 소속의 데버스테이터 뇌격기 18대가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을 떠났다.
뇌격기들이 적함에 충분히 접근하여 어뢰를 발사할 때까지 적대공포 사수의 시야를 가릴 연막을 발생시킬 임무를 띄고 제6폭격비행대대 소속의 돈틀리스 6대가  동행하고 있었고 이들을 제6전투비행대대 소속의 와일드캣 전투기 6대가 호위하고 있었다.
이들은 엔터프라이즈의 동남쪽 160km 까지 진출했으나 일본함대를 찾지 못했고 해가 저물자 귀로에 올랐다.

그런데 이때 프랜시스 헤벨 중위가 지휘하던 제6전투비행대대 소속의 와일드캣 6대는 엔터프라이즈로 향한 뇌격기 및 급강하폭격기와 헤어져서 포드섬의 비행장으로 향했다.
이들의 포드섬 도착은 진주만의 모든 함정과 대공포에 반복적으로 예고되어 있었지만 와일드캣이 오후 9시 10분경 히컴 비행장 상공에 도달하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는 격으로 공포발작을 일으킨 지상의 대공포 하나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초 사이에 지상과 함정에서 쏘아올리는 대공포로 인하여 진주만 상공이 환해졌다.
오인사격으로 인한 생지옥 속에서 허버트 멩게스 소위의 와일드캣이 아군의 대공포탄에 맞아 추락하면서 멩게스 소위는 제2차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최초의 해군전투기조종사가 되었다.
그리고 편대장 헤벨 중위와 에릭 앨런 중위가 추락하는 애기에서 탈출하다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여 다음날인 12월 8일에 사망했다.

데이비드 플린 중위의 와일드캣은 아군의 대공포화를 피하여 필사적으로 도망가다가 연료부족으로 추락하였으나 플린 중위는 무사히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그리하여 6대의 와일드캣 중 당초 예정대로 포드섬의 해군비행장에 착륙한 제임스 대니얼스 소위와 포드섬의 골프장에 비상착륙한 게일 허먼 소위의 2대만이 착륙하는데 성공하여 제6전투비행대대는 오인사격으로 와일드캣 4대를 상실하고 조종사 3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조종사 3명의 전사는 제6전투비행대대가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하기 전까지 입은 가장 큰 피해였다.

다음 날인 12월 8일 저녁 무렵에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2기동부대는 급유를 위하여 진주만에 입항했다.
아직도 불타고 있는 전함 애리조나를 바라보며 밤새 급유작업을 마친 엔터프라이즈는 다음 날인 12월 9일 오전 6시, 아직까지 하와이 근해에 있거나 아니면 제2차공격을 위하여 다시 접근할지도 모르는 일본함대를 수색하고 격멸하라는 임무를 띄고 출항했다.
이때 엔터프라이즈 기동부대는 제8기동부대(TF8)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음날인 12월 10일 오전 6시 17분, 제6폭격비행대대 소속의 앤더슨 중위가 엔터프라이즈에서 남쪽으로 60km 떨어진 서경 155도 35분, 북위 23도 45분 지점에서 일본잠수함 I-70 을 발견하고 450kg 짜리 폭탄 1발을 투하하여 격침함으로써 엔터프라이즈의 공식격침기록 제1호를 달성했다.  

 

(I-70 과 같은 해대6급 잠수함. 배수량 : 1,785톤, 길이 : 104.7m, 폭 : 8.2m, 최고속력 : 수상-23노트, 수중-8.5노트, 항속거리 : 10노트로 25,900km, 무장 : 어뢰발사관 6개, 어뢰 14발, 100mm 포 1문, 최고잠항심도 : 75m, 승조원 : 70명)

 

엔터프라이즈는 하와이 근해를 초계하면서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해상에서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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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41년

해가 바뀌어 1941년이 되자 태평양의 전운은 더욱 짙어졌다.
그해 6월 22일에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해나가자 일본으로서는 자원을 찾아 남방으로 진출했을 때 소련에 의한 배후의 위협이 사라졌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일본 수뇌부에서는

"이런 천재일우의 호기를 이용하여 자원(특히 석유)이 풍부한 남방으로 진출하여 석유부족이라는 일본의 전략적 아킬레스 건을 제거하자."

는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하에서 열린 7월 2일의 어전회의에서는

''남방진출을 위하여 남부 인도차이나에 진출하고(북부 인도차이나에는 그 전해인 1940년 7월 29일에 이미 진출해 있었다.) 미국 및 영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계속하되 불가피한 경우에는 일전도 불사한다."

고 처음으로 대미전쟁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 결정에 따라 일본의 제3차 고노에 내각은 7월 16일, 비시 프랑스에 대하여 남부 인도차이나에 대한 일본군의 진주를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가했고 비시 프랑스는 7월 24일에 수락했다.

일본군의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는 미국을 크게 자극했다.
이미 1년 전인 1940년 1월부터 일본에 대하여 단계적으로 강화되는 경제제재를 취하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자신의 경고를 받아들여 자숙하지 않고 확장을 계속하자 심기가 몹시 불편한 터였다.

그런데 일본이 남부 인도차이나에까지 진출하면서 거듭된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자 결국 짜증이 폭발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비시 프랑스가 일본군의 남부 인도차이나 주둔을 용인한지 불과 1주일 후인 1941년 8월 1일, 미국 내의 일본자산 전면동결과 함께 대일석유수출 전면중단이라는 경제, 외교상의 초강경 카드를 꺼내들었다.
곧이어 영국과 망명 네덜란드 정부의 호응이 뒤따랐고 일본은 졸지에 자국 석유 수입량의 90%를 잃게 되었다.
석유가 나지 않는 나라인 일본에게 석유공급을 끊는다는 것은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으며 이러한 조치는 굴복이냐 전쟁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만약 일본이 굴복할 경우 1937년부터 수많은 인명과 자원을 투입한 중국전선에서 아무런 댓가도 없이 철수해야 했으므로 실현가능성이 없었다.
따라서 일본의 선택은 전쟁이었고 1941년 8월1일 이후로는 태평양에서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고노에 수상은 남부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이 진주할 경우 미국이 반발할 것이라는 점은 각오했지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석유수출 전면중단이라는 초강경 수단까지 동원하면서 일전불사의 태도로 나오자 당황했다.
그는 미국과의 전쟁이 불러올 파멸적인 결과를 알고 있었고 따라서 어전회의의 결과와 상관없이 대미전쟁은 일본의 자살행위일 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고노에 수상은 어떻게든 미국과의 전쟁만은 피하려고 도죠 육상에게 중국에서의 철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일전불사의 각오로 밀어붙이는 미국과 중국을 포기하면서까지 굴복하느니 차라리 전쟁을 택하겠다는 도죠 육상을 필두로 한 국내의 강경파 사이에 끼어서 어떻게든 미국과의 전쟁만은 막아보려고 노력하던 고노에 내각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10월 16일에 붕괴했다.

다음날인 10월 17일에 대미강경론자인 도죠 히데키 육상을 수상으로 하는 내각이 출범했다.

미국은 고노에 내각의 붕괴와 도죠 내각의 성립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피할 길이 사라졌다고 보았다.
이제 미국에게 남은 길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최대한 빨리 태평양의 방어태세를 완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이 태평양에서 일본의 남방진출을 저지할 전력을 갖추려면 아무리 빨라도 1942년 중반이 되어야 했다.
미국 수뇌부는 태평양의 전쟁준비를 완료할 때까지 일본이 기다려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을 아껴가며 방어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1941년 3월 21일, 제2대 함장이었던 파우널 대령의 뒤를 이어 조지 머레이 대령이 엔터프라이즈의 제3대 함장이 되었다.

 

(제3대 함장 조지 머레이 대령. 재임기간 : 1941.3.20 - 1942.6.30)

 

태평양의 방어태세를 갖추려는 미국의 계획에 따라 당시 엔터프라이즈의 주된 임무는 미서해안에서 육군, 해병대, 그리고 해군의 항공기들을 실어다가 하와이에 갖다놓고 또 이 항공기들을 하와이에서 태평양의 여러 섬에 운반하는 일이었다.

한편 대서양에서 독일의 잠수함들이 예상 외로 선전함에 따라 태평양의 급박한 정세에도 불구하고 대서양 함대를 강화시킬 필요성이 제기되어 엔터프라이즈의 자매함이었던 요크타운이 1941년 4월 20일에 하와이를 떠나 대서양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태평양 함대의 항모 세력은 렉싱턴, 새러토가, 엔터프라이즈의 3척으로 줄어들었다.

1941년 11월 26일, 나구모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함대가 임시 집결지인 에토로프 섬의 히도카프 만을 떠나 진주만을 향하여 건곤일척의 장도에 올랐다.

이틀 후인 11월 28일,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2기동부대(TF-2) 는 F4F 와일드캣 12대로 이루어진 제211해병전투비행대대(VMF-211)을 웨이크섬에 파견하는 임무를 띄고 진주만을 나섰다.

12월 2일,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섬을 향하여 제211해병전투비행대대를 날려보내고 진주만으로 귀환코스를 잡았다.

이때 웨이크 섬에 배치된 제211해병전투비행대대은 12월 11일에 벌어진 제1차 웨이크 섬 공방전에서 헨리 엘로드 대위의 와일드캣이 일본구축함 기사라기에게 45kg 폭탄을 명중시켜 격침시키는 등 맹활약을 하면서 가지오카 소장이 지휘하던 일본군 침공부대를 격퇴하여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 최초의 패배라는 불명예를 안겨주는데 수훈을 세웠다.
이때의 공로로 엘로드 대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해병대 조종사로서는 최초로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받았다.

제211해병전투비행대대를을 날려보내고 귀로에 오른 엔터프라이즈는 심한 폭풍우를 만나 항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보니 귀환이 늦어져서 원래 12월 6일에 진주만에 입항하려던 것이 12월 7일 그 운명의 아침에 엔터프라이즈는 진주만에서 서쪽으로 240km 떨어진 지점에 있어서 일본기의 공습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천우신조였다.

당시 태평양함대에 있던 엔터프라이즈의 동료 항공모함인 렉싱턴은 미드웨이에 항공기를 배치하러 가던 중이었고 새러토가는 미서해안의 샌디에이고 항에 있었기 때문에 역시 일본기의 공습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우연의 일치는 1944년의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루즈벨트의 4선 재임을 저지하기 위하여 초조해진 공화당 측에서

"진주만 기습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암호 해독을 통하여 일본의 기습 시간과 장소를 사전에 정확하게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참전 명분을 얻기 위하여 일부러 기습을 허용했다."

는 음모설을 들고 나오는 배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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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Enterprise (CV-6)는 아마도 역사상 존재한 군함 가운데 가장 큰 전과를 올린 함정일 것이다.
엔터프라이즈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현장에서 자함 소속의 급강하 폭격기가 격추되면서 태평양전쟁에 참가한 이래 1945년 5월 14일 규슈 앞바다에서 일본기의 가미카제 공격으로 대파되어 전쟁에서 물러날 때까지 3년 5개월간 태평양전쟁에 참가했다.
이 기간동안 엔터프라이즈는 산호해 해전을 제외한 4번의 함대항공전을 포함하여 미해군이 실시한 22회의 중요 작전에 참가했다.
이 과정에서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들은 911대의 적기를 격추하였고 71척의 적함을 격침하였으며 최소한 192척의 적함에게 크고 작은 피해를 입혔다.
이제 태평양전쟁의 중요 장면마다 어김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경이로운 함정인 엔터프라이즈의 탄생에서부터 마지막까지 드라마틱한 일생을 살펴보자.

1. 탄생 - 1940년 말

1931년에 CV-4 레인저가 건조에 들어가게 되자 미국에게는 워싱턴 조약에서 인정받은 항모 보유 쿼터 13만 5천톤 중에서 5만 5천톤 가량이 남게 되었다.

 

 

(레인저 CV-4. 표준배수량 : 14,576톤, 길이 : 234.4m, 폭 : 33.4m, 최고속력 : 29.3노트, 항속거리 : 15노트로 20,000km, 승무원 : 2,148명, 함재기 : 86대)

이 시점에서 항공모함 건조와 관련하여 미해군이 고려하던 방안은 4가지였다.

(1) 워싱턴 조약에서 허용한 항모의 최대 배수량인 27,000 톤급의 대형항모를 2척 건조하는 방안
(2) 레인저급 크기의 소형항모를 4척 건조하는 방안
(3) 레인저급보다 약간 큰 18,000 톤급의 항모를 3척 건조하는 방안
(4) (3)안보다 조금 더 큰 20,000 톤급의 항모 2척 +레인저급 크기의 소형항모를 1척 건조하는 방안

실험적 성격이 강한 미해군 최초의 항모인 CV-1 랭글리를 제외하고도 건조 중이던 순양전함을 개장한 33,000 톤급의 대형항모인 CV-2 렉싱턴 과 CV-3 새러토가를 1927년부터 운용하고 있던 미해군은 성공적인 항모가 갖추어야 할 기본 요건에 대하여 비교적 정확하고 구체적인 인식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보와 운용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해군은 꼭 27,000 톤급의 대형항모가 아니더라도 성공적인 항모의 기본적인 특성을 갖추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미해군은 그간의 항모운용경험에서 항모의 속력은 가급적 30 노트가 넘는 것이 좋으며 넓은 격납고와 대형 엘리베이터 그리고 적절한 방어력과 대공무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 또한 깨닫고 있었다.
그런 여러 요건을 충족시키려면 레인저급이나 18,000 톤급의 함체로는 불가능하며, 최소한 20,000 톤급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하여 미해군은 (4)번의 안으로 확정지은 후에 1931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20,000톤급의 새로운 항공모함 -요크타운급- 의 설계를 시작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33년 여름, 미의회에서 역사적인 빈슨-트래멀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에 의해 미해군에는 새로운 군함건조에 사용하도록 2억 3800만 달러라는 거액이 주어졌으며 그중의 4000 만 달러는 2척의 신형 항공모함 건조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4년 5월 21일에 뉴포트뉴스 조선소에서  요크타운급의 네임쉽인 CV-5 요크타운이 건조에 들어갔고 2달 후인 동년 7월 16일에는 자매함인 CV-6 엔터프라이즈가 건조에 들어갔다.
이 두 항공모함의 건조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대부분 공공사업국(Public Works Administration = PWA) 에 고용된 인력들로서 이 사실은 요크타운 급의 건조 또한 뉴딜정책의 일환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1936년 10월 3일에 뉴포트뉴스 조선소에서 거행된 엔터프라이즈의 진수식 광경)

 

엔터프라이즈의 건조는 꾸준하게 진행되어 1936년 10월 3일에 진수하였고 그 1년 반 후인 1938년 5월 12일에 취역하여 초대함장인 뉴튼 화이트 대령의 지휘 하에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로 시험항해를 떠났다.

 

(초대 함장 뉴튼 화이트 대령. 재임기간 : 1938.5.12-12.21)

 

요크타운급 2척에 이은 레인저급 크기의 항공모함은 CV-7 와스프인데 와스프는 비록 크기는 레인저와 비슷하지만 설계사상 자체가 요크타운급의 축소형이기 때문에 레인저와는 다른 급으로 분류된다.
와스프급은 작은 함체에 가급적 요크타운급의 능력을 구비하도록 고려하여 속력이 약간 느려지고 함체가 조금 짧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요크타운급의 능력에 상당부분 근접했으나 결정적으로 어뢰방어를 위한 벌지(방뢰격벽)를 포기하여 수선하 방어력에 치명적인 결점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요크타운급도 수선하 방어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는데 와스프는 그 정도가 심해진 것이다.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태평양전쟁에서 격침된 미국의 정규항모들이 모두 일본함대와의 대규모 함대항공전에 참가하여 나름대로 분전한 끝에 장렬한 최후를 마쳤는데 비하여 와스프만은 과달카날로 향하던 수송선단의 호위임무에 종사하다가 일본잠수함의 어뢰공격을 받고 격침되어 상대적으로 허망한 최후를 맞았다.

요크타운 급의 3번함인 CV-8 호넷은 1938년 제2차 빈슨트래멀법에 의하여 미해군에 신규항공모함 1척의 추가건조를 위한 예산이 주어졌는데 당시 미해군의 군함설계능력이 온통 BB-61 아이오와급의 설계에 집중되어 새로운 설계에 의한 항모건조가 불가능해지자 당시 대단히 성공적인 설계로 평가받고 있던 요크타운 급의 설계를 약간 수정하여 건조한 것이다.     

엔터프라이즈 이야기로 돌아와서..
1938년 겨울에 햄프턴로즈에 돌아온 엔터프라이즈는 자매함 요크타운과 함께 1939년 1월 2일에 카리브 해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당시 해군소장이던 윌리엄 헐지 제독의 지휘 아래 함대훈련에 참가하여 함정 승조원들과 항공기 승무원들의 훈련을 실시하였다.  
당시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은 1938년 12월 21일에 화이트 대령과 교대한 찰스 파우널 대령이었는데 파우널 함장은 훈련기간을 통하여 엔터프라이즈의 즉응태세를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파우널 대령은 이후로도 승승장구하여 고속항모기동부대인 제50기동부대사령관을 거쳐 태평양함대항공부대사령관이 된다.

 

(제2대 함장 찰스 파우널 대령. 재임기간 : 1938.12.21-1941.5.21)

 

카리브 해에서 함대훈련을 마친 엔터프라이즈는 1939년 4월에 태평양함대에 배속되어 캘리포니아 주의 샌디에이고를 모항으로 삼게 되었다.
이때만 해도 엔터프라이즈가 앞으로 벌어질 일본과의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미해군 전략의 주류를 이루던 제독들의 머리에 들어있던 항공모함에 대한 인식은 

‘항공모함이란 전함들을 위하여 함재기를 사용하여 수색, 정찰, 견제공격 및 적 항공기에 의한 수색과 정찰을 차단하는 등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함정으로서 함대결전을 앞둔 상황에서는 정찰효과의 극대화를 노려서 주력함대의 전방에 위치해야 하며 상황에 따라서는 적 함대에 의하여 심각한 위험에 노출되거나 최악의 경우 희생되어도 어쩔 수 없다.’

 

는 정도였다.
물론 미해군 내에는 함재기가 갖는 장대한 항속거리와 눈부신 항공기술개발의 속도에 주목하여 가까운 장래에 항공모함이 전함을 대신하여 명실상부한 함대의 주력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장교들도 있었으나 1939년의 시점에서 그들은 계급도 낮고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다.

태평양함대에 배속된 이후에 엔터프라이즈는 태평양함대의 동료 항공모함들 (렉싱턴, 새러토가, 요크타운)에 비하여 높은 운용효율을 보이면서 선저에 달라붙은 따개비를 제거하거나 영화 ‘급강하 폭격기’를 촬영하기 위하여 함내를 개방하는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작전임무에 종사하면서 샌디에이고와 하와이 사이를 뻔질나게 돌아다니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샌디에이고에서 진주만으로 항해중인 엔터프라이즈. 1939년 10월 8일 중순양함 미네아폴리스 함상에서 찍은 사진)

1940년 5월에 일본의 확장정책을 경고하는 의미로 태평양함대가 하와이 진주만에 전진배치되었다.
함재 지원 시설의 미비와 수병 모집의 어려움을 이유로 함대이동을 결연하게 반대하던 태평양함대 사령관 제임스 리처드슨 제독을 해임시키면서까지 강행된 함대이동으로 인하여 엔터프라이즈는 렉싱턴과 함께 모항을 샌디에이고에서 진주만으로 옮기게 되었다.

 

(제임스 리처드슨 제독)

 

모항이 샌디에이고에서 진주만으로 바뀌었어도 엔터프라이즈의 일상은 변화가 없었다.
역사에서 증명된 유능한 인물인 헐지 사령관(1940년 6월 13일에 중장으로 승진)과 파우널 함장의 지휘 하에서 엔터프라이즈의 항공대 승무원들과 함정 승조원들은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면서 다가오는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USS Enterprise CV6 1938년 취역 당시 제원

 

표준배수량 : 19,800 톤, 만재 배수량 :25,500 톤

표준 흘수 : 6.6m, 만재 흘수 : 8.5m

전체 길이 : 246.7m, 수면 길이 : 232m

전체 폭 : 33m, 수면 폭 : 25.4m

전체 높이 : 43.6m

비행 갑판 : 244.4m x  26.2m

격납고 : 166.4m x 19.2m x 5.3m  

엘리베이터 : 3기, 14.6m x 13.4m, 적재중량 : 7.7톤

동력 : 스팀터빈 4기, 밥콕-윌콕스 400psi 보일러 9개

출력 : 12만 마력, 프러펠러 4개

최고속력 : 32.5 노트

연료적재량 : 6,500 톤

항속거리 : 15노트로 19,300 km, 20노트로 14,600 km

함재기 최대적재량 : 96대

장갑 : 12.2cm (수면 ),3.8cm (갑판),10.2cm (사격통제실)

항공유 적재량 : 674,000 리터

항공무기 적재량 : 433 톤

캐터펄트 : 3개(비행갑판에 1개, 격납고 갑판에 2개)

승무원 : 1,889 명(평화시), 2,919 명(전시)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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