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41년

해가 바뀌어 1941년이 되자 태평양의 전운은 더욱 짙어졌다.
그해 6월 22일에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해나가자 일본으로서는 자원을 찾아 남방으로 진출했을 때 소련에 의한 배후의 위협이 사라졌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일본 수뇌부에서는

"이런 천재일우의 호기를 이용하여 자원(특히 석유)이 풍부한 남방으로 진출하여 석유부족이라는 일본의 전략적 아킬레스 건을 제거하자."

는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하에서 열린 7월 2일의 어전회의에서는

''남방진출을 위하여 남부 인도차이나에 진출하고(북부 인도차이나에는 그 전해인 1940년 7월 29일에 이미 진출해 있었다.) 미국 및 영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계속하되 불가피한 경우에는 일전도 불사한다."

고 처음으로 대미전쟁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 결정에 따라 일본의 제3차 고노에 내각은 7월 16일, 비시 프랑스에 대하여 남부 인도차이나에 대한 일본군의 진주를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가했고 비시 프랑스는 7월 24일에 수락했다.

일본군의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는 미국을 크게 자극했다.
이미 1년 전인 1940년 1월부터 일본에 대하여 단계적으로 강화되는 경제제재를 취하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자신의 경고를 받아들여 자숙하지 않고 확장을 계속하자 심기가 몹시 불편한 터였다.

그런데 일본이 남부 인도차이나에까지 진출하면서 거듭된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자 결국 짜증이 폭발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비시 프랑스가 일본군의 남부 인도차이나 주둔을 용인한지 불과 1주일 후인 1941년 8월 1일, 미국 내의 일본자산 전면동결과 함께 대일석유수출 전면중단이라는 경제, 외교상의 초강경 카드를 꺼내들었다.
곧이어 영국과 망명 네덜란드 정부의 호응이 뒤따랐고 일본은 졸지에 자국 석유 수입량의 90%를 잃게 되었다.
석유가 나지 않는 나라인 일본에게 석유공급을 끊는다는 것은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으며 이러한 조치는 굴복이냐 전쟁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만약 일본이 굴복할 경우 1937년부터 수많은 인명과 자원을 투입한 중국전선에서 아무런 댓가도 없이 철수해야 했으므로 실현가능성이 없었다.
따라서 일본의 선택은 전쟁이었고 1941년 8월1일 이후로는 태평양에서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고노에 수상은 남부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이 진주할 경우 미국이 반발할 것이라는 점은 각오했지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석유수출 전면중단이라는 초강경 수단까지 동원하면서 일전불사의 태도로 나오자 당황했다.
그는 미국과의 전쟁이 불러올 파멸적인 결과를 알고 있었고 따라서 어전회의의 결과와 상관없이 대미전쟁은 일본의 자살행위일 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고노에 수상은 어떻게든 미국과의 전쟁만은 피하려고 도죠 육상에게 중국에서의 철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일전불사의 각오로 밀어붙이는 미국과 중국을 포기하면서까지 굴복하느니 차라리 전쟁을 택하겠다는 도죠 육상을 필두로 한 국내의 강경파 사이에 끼어서 어떻게든 미국과의 전쟁만은 막아보려고 노력하던 고노에 내각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10월 16일에 붕괴했다.

다음날인 10월 17일에 대미강경론자인 도죠 히데키 육상을 수상으로 하는 내각이 출범했다.

미국은 고노에 내각의 붕괴와 도죠 내각의 성립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피할 길이 사라졌다고 보았다.
이제 미국에게 남은 길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최대한 빨리 태평양의 방어태세를 완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이 태평양에서 일본의 남방진출을 저지할 전력을 갖추려면 아무리 빨라도 1942년 중반이 되어야 했다.
미국 수뇌부는 태평양의 전쟁준비를 완료할 때까지 일본이 기다려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을 아껴가며 방어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1941년 3월 21일, 제2대 함장이었던 파우널 대령의 뒤를 이어 조지 머레이 대령이 엔터프라이즈의 제3대 함장이 되었다.

 

(제3대 함장 조지 머레이 대령. 재임기간 : 1941.3.20 - 1942.6.30)

 

태평양의 방어태세를 갖추려는 미국의 계획에 따라 당시 엔터프라이즈의 주된 임무는 미서해안에서 육군, 해병대, 그리고 해군의 항공기들을 실어다가 하와이에 갖다놓고 또 이 항공기들을 하와이에서 태평양의 여러 섬에 운반하는 일이었다.

한편 대서양에서 독일의 잠수함들이 예상 외로 선전함에 따라 태평양의 급박한 정세에도 불구하고 대서양 함대를 강화시킬 필요성이 제기되어 엔터프라이즈의 자매함이었던 요크타운이 1941년 4월 20일에 하와이를 떠나 대서양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태평양 함대의 항모 세력은 렉싱턴, 새러토가, 엔터프라이즈의 3척으로 줄어들었다.

1941년 11월 26일, 나구모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함대가 임시 집결지인 에토로프 섬의 히도카프 만을 떠나 진주만을 향하여 건곤일척의 장도에 올랐다.

이틀 후인 11월 28일,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2기동부대(TF-2) 는 F4F 와일드캣 12대로 이루어진 제211해병전투비행대대(VMF-211)을 웨이크섬에 파견하는 임무를 띄고 진주만을 나섰다.

12월 2일,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섬을 향하여 제211해병전투비행대대를 날려보내고 진주만으로 귀환코스를 잡았다.

이때 웨이크 섬에 배치된 제211해병전투비행대대은 12월 11일에 벌어진 제1차 웨이크 섬 공방전에서 헨리 엘로드 대위의 와일드캣이 일본구축함 기사라기에게 45kg 폭탄을 명중시켜 격침시키는 등 맹활약을 하면서 가지오카 소장이 지휘하던 일본군 침공부대를 격퇴하여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 최초의 패배라는 불명예를 안겨주는데 수훈을 세웠다.
이때의 공로로 엘로드 대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해병대 조종사로서는 최초로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받았다.

제211해병전투비행대대를을 날려보내고 귀로에 오른 엔터프라이즈는 심한 폭풍우를 만나 항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보니 귀환이 늦어져서 원래 12월 6일에 진주만에 입항하려던 것이 12월 7일 그 운명의 아침에 엔터프라이즈는 진주만에서 서쪽으로 240km 떨어진 지점에 있어서 일본기의 공습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천우신조였다.

당시 태평양함대에 있던 엔터프라이즈의 동료 항공모함인 렉싱턴은 미드웨이에 항공기를 배치하러 가던 중이었고 새러토가는 미서해안의 샌디에이고 항에 있었기 때문에 역시 일본기의 공습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우연의 일치는 1944년의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루즈벨트의 4선 재임을 저지하기 위하여 초조해진 공화당 측에서

"진주만 기습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암호 해독을 통하여 일본의 기습 시간과 장소를 사전에 정확하게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참전 명분을 얻기 위하여 일부러 기습을 허용했다."

는 음모설을 들고 나오는 배경이 된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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