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월7일, 엔터프라이즈가 하와이 근해의 초계를 마치고 진주만에 입항하자 제8기동부대사령관 헐지 중장이 상륙했다.
다음날인 1월8일에 파이 중장의 계획을 논의하기 위하여 태평양함대사령부에서 열린 작전회의에 참석한 헐지 중장은 니미츠 제독의 공격계획에 반대하는 장교들에게 패배주의자라면서 호통을 치고 파이의 계획을 실시하려는 니미츠 제독을 지지했다.
헐지 제독은 사령관의 계획에 반대하는 장교들은 패배주의자들로서 태평양함대에는 이런 패배주의자들은 필요없으니 다 그만두라는 뜻으로 "공기를 바꾸어야 한다." 고 질타하면서 자기 혼자서라도 사령관의 계획을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헐지 제독은 현역 중장이고 항모기동부대의 사령관이며 부하에 대한 깊은 애정과 동료에 대해 배려할 줄 아는 인간적 매력 덕분에 사령부 내의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리하여 태평양함대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의 한 사람인 헐지 중장이 이런 식으로 니미츠 제독을 적극 지지하고 나서자 회의의 분위기는 일변하여 니미츠 제독의 희망대로 파이의 계획이 채택되었다.
게다가 헐지 중장은 미해군의 항공관계자 중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실력자였다.

따라서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본 적도 없는 니미츠 제독이 항공모함의 운용에 대하여 자신들의 전문적 식견을 존중하지 않는다며 내심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진주만의 항공관계자들도 헐지 중장이 이렇게 나오는 이상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니미츠 제독은 태평양함대사령관으로서의 권위와 지도력이 도전을 받아 흔들리던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 결과 제독 스스로도 '잘리지 않고 6개월만 버텨도 성공' 이라고 생각하던 태평양함대사령관 자리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눌러앉아서 원수 계급장까지 달았다.
니미츠 제독은 이때의 고마움을 평생 잊지 않았다.

 

(윌리엄 헐지 제독)

 

다음날인 1월 9일, 파이의 작전계획이 확정되었다.
헐지 중장 지휘 하의 엔터프라이즈는 사모아로 가서 해병대를 호송해 온 요크타운과 합류하여 해병대의 상륙을 엄호하기로 했다.

그 이후에 2척의 항공모함은 헐지의 지휘 하에 북상하여 길버트 제도와 마셜 제도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윌슨 브라운 중장이 지휘하는 렉싱턴은 웨이크섬을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하와이 근해를 지키기로 되어 있었던 새러토가가 1월 11일에 오아후섬 서남방 800km 지점에서 일본잠수함 I-16 호가 발사한 어뢰에 맞아 대파되는 바람에 렉싱턴에 의한 웨이크섬 공격은 취소되었다.

1월 11일, 제8기동부대가 사모아를 향하여 진주만을 출항했다.
제8기동부대는 핼시 중장의 기함인 엔터프라이즈를 중심으로 순양전대장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소장의 기함인 노샘프턴(CA-26), 솔트레이크시티(CA-25), 체스터(CA-27) 등 3척의 중순양함과 6척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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