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을 다룬 저작을 보면 대부분 진주만 기습과 둘리틀 공격대의 도쿄 공습 사이인 1942년 초반의 기술은 일본군의 싱가포르 공략, 필리핀 전투와 맥아더의 탈출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점령과정 및 나구모 함대의 인도양 진출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그 기간에 진주만의 태평양함대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경향이 있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1942년 초반 몇달 동안 태평양함대가 망가진 배나 수리하면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알겠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1942년 초반에 태평양함대는 불리한 여건 하에서도 공격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면서 노력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30일, 대서양함대사령관이었던 어니스트 조셉 킹 대장이 미국함대총사령관(Commander in Chief of the United States Navy, CominCh)에 취임했다.
각 지역의 함대사령관들이 공동으로 돌아가면서 맡던 명예직에 가까운 기존의 직위와 달리 킹 사령관은 미해군의 전략을 수립하고 그것을 수행하도록 함대사령관에게 직접 명령할 수 있는 권한뿐만 아니라 중장급 이상의 고위장교에 대한 인사권을 포함한 광범위한 행정적 권한까지 한손에 거머쥔 채 오로지 대통령에게만 보고할 의무를 가진 명실상부한 미해군의 제1인자가 되었다.

 

(킹 제독)

 

킹 제독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하자 스타크 해군참모총장은 할일이 없어져 버렸다.
그러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스타크 제독을 유럽주둔 해군사령관에 임명하여 런던으로 보내버리고 킹 제독에게 해군참모총장을 겸직하도록 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헤럴드 스타크 제독)

 

이리하여 킹 제독은 미해군의 제1인자이면서 동시에 합동참모본부(Joint Chiefs of Staff, JCS) 의 멤버가 되었다.
영국과의 공동작전이 필요할 때에는 연합참모본부(Combined Chiefs of Staff, CCS)가 설치되어 합동참모본부의 상위기관이 되지만 어차피 미국이 주도하는 태평양전선에서 영국이 미해군의 전략에 간섭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태평양전선에 관한 미해군의 전략은 대부분 킹 제독과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니미츠 제독이 수립하고 실행하게 되었다.

킹 제독이 미국함대총사령관에 취임한 다음날인 1941년 12월 31일에는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진주만에 정박한 잠수함 그레일링호의 갑판에서 태평양함대사령관에 취임했다.

 

(SS-209 그레일링 호의 갑판에서 거행된 니미츠 제독의 태평양함대사령관 취임식)

미국함대총사령관이 된 킹 제독의 주된 관심은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 태평양지역의 군사정세였다.

진주만에서 태평양함대를 박살낸 일본은 동시에 영령 말레이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싱가포르를 향하여 남진 중에 있었고 12월 10일에는 사이공에 기지를 둔 일본해군의 지상발진 뇌격기 부대가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하여 싱가포르에 파견된 영국의 신예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스를 쿠안탄 앞바다에 수장시켜 버렸다.

 

(항공공격을 받고 있는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스. 일본항공기에서 찍은 사진으로 윗쪽이 프린스 오브 웨일즈, 아랫쪽이 리펄스)

 

같은 날 일단의 일본군이 괌에 상륙하여 점령했으며, 다음 날인 11일에는 가지오카 소장이 지휘하는 일본군이 웨이크섬을 침공했다.

웨이크섬 침공부대는  127mm 포 2문, 와일드캣 12대를 보유한 449명의 미해병대로 구성된 방어부대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아 2척의 구축함(하야테, 기사라기)과 300 명 이상의 병력을 상실하는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지만 12월 21일에 압도적 병력으로 재차 공격을 가하여 23일에 끝내 점령했다.

12월 22일에는 필리핀에 일본군이 상륙했고 25일에는 홍콩이 점령당했으며 필리핀에 본거지를 두고있던 소규모의 미국아시아함대는 1월 초에 필리핀을 떠나 자바 섬을 향하여 후퇴하고 있었다.

태평양 중부해역에서도 일본은 진격을 시작하여 1914년 이래 일본령이 된 마셜 제도에 인접한 영령 길버트 제도로 진출하고 있었다.

일본항공기는 길버트 제도 서부에 있는 오션섬과 나우루섬을 공격했고, 일본잠수함이 길버트 제도와 진주만 사이에 놓여 있는 존스턴섬과 팔미라섬을 포격했다.
이러한 태평양 중부해역에서의 일본군의 움직임으로 보아 미해군 수뇌부는 일본군이 길버트 제도의 남동쪽에 위치한 엘리스 제도를 거쳐 사모아에 진출하려는 것으로 판단했다.
만일 일본군이 사모아를 점령한다면 비행장과 잠수함기지를 건설한 후 항공기와 잠수함을 사용하여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 사이의 교통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모아의 방위를 강화하는 것이 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의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이상과 같은 태평양에서의 상황판단을 기초로 킹 제독은 취임 직후 니미츠 제독에게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려보냈다.

(1)미드웨이를 포함한 하와이 근해를 방어하고 하와이와 본토 서해안 사이의 교통로를 확보하라.
(2)호주와 하와이 및 본토 서해안 사이의 교통로를 확보하라.

킹 제독은 일본의 일격으로 태평양함대의 전함세력이 사실상 전멸한 데다가 일본이 우위를 누리고 있는 항공모함의 위력이 증명된 이 마당에 오렌지 계획같은 달콤한 망상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즉 태평양에서는 당분간 전략적 수세 방침을 견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포트모레스비-뉴칼레도니아-사모아-피지-미드웨이-알류샨 열도의 더취하버를 잇는 선상에서 일본군의 전진을 저지할 계획을 세웠다.

제 (2)항의 지령과 관련하여 호주 정부는 미국 정부에게  호주와 하와이 및 미본토 서해안을 잇는 항로 전체에 대한 보호를 요구하고 있었으나, 당시 태평양함대에게는 사모아 너머까지 항로의 안전을 보장할 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모아에 미해병대 5,000 명을 배치하기로 결정하여 이들을 태운 수송선단이 1월 6일 샌디에이고를 출항했다.
그리고 전해 4월 20일에 진주만을 떠나 대서양함대에 배치되었던 요크타운 중심의 제17기동부대(TF17)가 프랭크 잭 플레처 소장의 지휘 하에 수송선단의 호송을 맡게되어 요크타운은 진주만을 떠난지 9개월만에 태평양함대로 돌아오게 되었다.

 

(요크타운 CV-5)

한편 킹 제독은 당분간 태평양에서 전략적 수세를 견지하기로 결정하기는 했으나 그것이 일본군에 대한 선제공격을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전보를 보내어 사용가능한 항공모함 부대를 총동원하여 1914년 이후 일본이 영유하고 있던 태평양 중부 해역의 캐롤라인 제도와 마셜 제도 그리고 최근에 일본이 점령한 웨이크 섬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것을 요구했다.
킹 제독은 공격이 성공할 경우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급속히 전진하고 있는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거나 최소한 지연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설사 그것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일본군이 자신들의 시간표에 따라 동남아시아 정리하고 준비를 갖춘 다음에 자기들이 유리할 때 유리한 장소에서 치고 나올 때까지 넋놓고 기다린다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적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싸울 수 있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전략의 기본으로서 이점에 대해서는 니미츠 제독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1942년 1월2일 태평양함대사령부의 참모들은 니미츠 제독에게 마셜제도와 길버트제도에 대하여 진주만에서 출발한 두 개의 항공모함 부대가 동시에 공격을 가하는 것을 기본 골격으로 하는 계획을 제출했다.
그러자 전임 킴멜제독 재임시 태평양함대의 전투함대사령관이었던 윌리엄 파이 중장이 1월 8일에 수정안을 제출했다.
즉 일본군이 사모아에 대한 미국의 방위력증강 계획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태평양을 건너오고 있는 해병대의 안전한 상륙을 보장하기 위하여 호송하고 있는 요크타운과는 별도로 진주만에서 항공모함 1척을 사모아에 파견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병대의 상륙이 끝나면 이 2척의 항공모함으로 하여금 길버트제도와 마셜제도를 공격하도록 한다는 제안이었다.

 

(윌리엄 파이 제독)

니미츠 제독은 파이 중장의 제안을 마음에 들어했지만 실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태평양함대의 고위장교들 중 상당수가 마지막 전력인 항공모함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이유로 일본군 기지에 대한 선제공격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대의 선두주자는 하와이와 주변 도서의 기지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제14해군구 사령관인 클로드 블로크 소장이었다.
블로크 소장은 자신보다 한참 후배인 킴멜 제독이 태평양함대사령관으로 부임해와서 반나절도 안되는 시간에 태평양함대의 전함들을 모두 잃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는 또다시 새까만 후배인 니미츠 제독이 사령관이 되어서 이번에는 마지막 희망인 항공모함을 몽땅 잃어버릴까봐 걱정했다.
블로크 소장은 1938년부터 1940년 1월 6일까지 임시로 대장 계급장을 달고 태평양함대사령관을 지낸 바가 있기 때문에 진주만 기습 당시 소장계급장을 달고 항해국장으로 근무하다가 불과 3주일만인 12월 31일에 태평양함대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중장도 거치지 않고 바로 대장 계급장을 달게 된, 한마디로 말해서 벼락출세한 니미츠 제독의 대선배에 해당했다.
게다가 진주만의 항공관계자들이 대부분 블로크 소장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공관계 경력이 전혀 없는 니미츠 제독으로서는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그리하여 태평양함대사령부에서는 작전회의가 열릴 때마다 공격계획을 관철시키려는 사령관 및 참모들과 반대하는 장교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살벌한 광경이 반복되었으며 이러한 긴장은 1월 6일의 회의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런 상황은 니미츠 제독이 태평양함대사령관이 된 이후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할 때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겪은 지도력의 위기상황이었으며 그에게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 도움은 다음날 왔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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