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4월 18일 정오경, 미육군의 James Harold Doolittle 중령이 이끄는 16기의 미육군 B-25 Mitchell 쌍발폭격기가 일본제국의 수도 도꾜를 폭격했다.
개전 초기 전승의 기분에 들떠있던 일본제국의 심장부를, 그것도 벌건 대낮에 폭격했다는 점에서 이 폭격사건은 그 실질적인 전과를 떠나서 미국과 일본 양국 국민의 사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B-25 미첼 쌍발폭격기. 승무원 : 6명, 길이 : 16.1m, 폭 : 20.6m, 최고속력 : 442km/hr, 항속거리 : 2,170km, 무장 : 12.7mm 기관총 12정, 폭탄 2,700kg 또는 폭탄 1,360kg + HVAR 8발)
진주만에서 일본에게 호되게 당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통합참모본부에 일본의 수도 도꾜를 폭격하는 방안을 연구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폭격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진주만의 치욕을 설욕하고 승전의 기분에 기고만장해진 일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었으나, 문제는 도꾜 폭격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도꾜를 폭격할만한 거리에는 연합군의 비행장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도꾜 폭격을 위해서는 항공모함을 사용하는 방법 이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함재기의 행동반경을 고려하면 항공모함은 도꾜에서 최소한 500km 이내로 다가가서 함재기들을 발진시켜 도꾜를 폭격하고 공격을 마친 함재기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몇 시간을 그곳에서 머물러야 하는데 그것은 사실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문제 때문에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도 1942년 2월10일의 회의에서 잠깐 도꾜 폭격에 대하여 고려해 보았으나 효과에 비하여 위험이 너무 크다고 판단하여 포기했다.
하지만, 워싱턴에서 수천 km 떨어진 태평양 한가운데에 앉아있던 니미츠 제독과 달리 매일같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얼굴을 보아야만 하는 킹 제독은 그렇게 속편하게 앉아 있을 수 없는 처지였다.
따라서 워싱턴의 해군참모본부에서는 진주만 기습이래 이 문제로 계속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었다.
1942년 1월 10일에 열린 통합참모본부 회의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킹 제독에게 도꾜를 폭격할 계획을 세웠느냐고 물어보았고 대답이 신통치 않자 신경질을 부렸다.
킹 제독으로서는 무엇인가 돌파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 회의 직후인 1942년 1월 둘째 주의 어느 날 해군참모본부의 작전참모인 Francis Low 대령이 의장 중인 신예 항공모함 CV-8 Hornet 을 시찰하러 버지니아 주의 노퍽 항에 갔다가 주변에 있던 비행장을 보고는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즉 함재기보다 훨씬 긴 항속거리를 가진 육군항공대의 폭격기를 항공모함에서 이륙시켜 도꾜를 폭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워싱턴에 돌아온 그는 즉각 항공작전 담당인 Donald Duncan 대령에게 연구를 지시했다.
던칸 대령은 1월 16일에 육군의 중형폭격기인 B-25 미첼 폭격기에 3,200km 이상의 항속거리가 나올 수 있도록 추가연료탱크를 장착한 후 항공모함 갑판에서 이들을 이함시켜 도꾜를 폭격하고 중국의 아군비행장을 찾아가도록 하자는 내용의 계획안을 제출했다.
2월 초에 던칸 대령과 호넷의 함장인 Marc Andrew "Pete" Mitscher 대령이 극비리에 버지니아 주의 에글린 비행장에서 실험해 본 결과 B-25 기가 항공모함 활주로 길이인 150m 길이의 활주로에서도 이륙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자 계획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3월 10일, 던칸 대령이 통합참모본부의 특사 자격으로 진주만에 와서 니미츠 제독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즉 대서양에서 회항 중인 신예항공모함 호넷이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알라메다 공군기지에서 16대의 B-25를 싣고 북태평양을 건너서 일본의 수도 도꾜를 폭격할 예정인데 갑판에 실은 B-25들 때문에 호넷의 함재기를 사용할 수 없으니 도꾜에서 동쪽으로 800km 떨어진 발진예정지점까지 호넷을 엄호해 줄 항공모함 1척을 태평양함대에서 파견해 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니미츠 제독은 정치적 제스추어에 지나지 않는 도꾜 폭격을 위하여 귀중한 항공모함을 위험에 노출시킨다는 점 때문에 이 계획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직속상관인 킹 제독이 제안한 이 작전에 대하여 협조를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3월 20일, 2척의 순양함과 4척의 구축함, 그리고 1척의 유조선을 거느린 호넷이 샌프란시스코 항에 입항하여 16대의 B-25와 지휘관 둘리틀 중령을 위시한 승무원들을 싣고 4월 2일에 출항했다.
(제임스 해럴드 둘리틀 중령)
4월 8일, 핼시 중장이 지휘하는 제16기동부대가 진주만을 출항했다.
제16기동부대도 엔터프라이즈 외에 2척의 중순양함(노댐턴, 솔트레이크시티)과 4척의 구축함, 그리고 1척의 유조선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4월 10일, 서로 접근하고 있던 호넷과 엔터프라이즈 사이에서 오간 통신을 일본군이 도청하여 최소한 2척의 미국항공모함이 북태평양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4월 13일, 호넷과 엔터프라이즈가 만났다.
제16기동부대는 호넷 기동부대를 흡수하여 항공모함 2척과 4척의 순양함, 8척의 구축함, 2척의 유조선, 2척의 잠수함으로 이루어져 16노트의 순항속력으로 최종 급유지점을 향했다.
4월 17일, 도꾜 동방 약 1,600km 떨어진 해상에서 마지막 급유를 마친 제16기동부대는 구축함들과 유조선들을 떼어놓고 항공모함들과 순양함 4척만이 23노트의 속력으로 발진예정지점으로 항해했다.
계획에 따르면 18일 오후에 둘리틀 중령의 B-25가 먼저 출격하여 해가 진 뒤에 도꾜에 도착하여 소이탄으로 화재를 일으킬 예정이었다.
그리고는 둘리틀 중령보다 3시간 늦게 도꾜 동방 800km 떨어진 지점에서 나머지 15대의 B-25가 출격하여 둘리틀 중령이 일으킨 화재의 불빛을 따라 도꾜에 도착한 후 12대는 도꾜를 폭격하고, 나머지 3대는 나고야, 한신 공업 지대 및 요코스카 군항을 각각 폭격한다는 계획이었다.
공습을 마친 폭격기들은 남서쪽으로 도주하여 동중국해를 건너 중국의 쑤조우에 있는 비행장에 착륙할 예정이었다.
만일 예정대로 작전이 진행될 경우 각 B-25기에는 20분 정도 비행할 수 있는 분량의 예비연료가 남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발진지점으로 향하는 엔터프라이즈. 앞에 보이는 항모는 호넷)
발진 예정일인 4월 18일 오전 3시,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가 16km 전방에서 2척의 수상함을 발견했다.
일본군이 일본본토 동해안 동쪽 1,300km 지점에 약 40km 마다 한 척씩 배치해 놓은 어선을 개조한 감시선이었다.
핼시 제독은 이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하여 북쪽으로 변침하여 한시간 정도 항진한 후 다시 서쪽으로 변침했다.
아침 6시가 막 지났을 무렵 정찰을 위하여 출격했던 제6폭격비행대 소속의 돈틀레스 한대가 저공비행으로 다가와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에 메시지를 투하했는데 그 내용은 70km 전방에 감시선 한 척이 있으며 어쩌면 그 배가 돈틀레스기 자신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핼시 제독은 조금이라도 더 도꾜에 가까이 가기 위하여 23노트의 속도로 계속 서진했다.
오전 7시 38분,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호넷의 견시가 감시선의 마스트를 발견했고, 그 순간 호넷의 통신실에서 그 감시선-90톤 짜리 어선을 개조한 닛도마루-이 기지에 보고하는 통신을 감청했다.
핼시 제독은 경순양함 CL-43 Nashville 에게 그 감시선을 포격하도록 명령하는 동시에 둘리틀 중령의 공격대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와 함께 발진명령을 내렸다.
TO COL. DOOLITTLE AND HIS GALLANT COMMAND
GOOD LUCK AND GOD BLESS YOU - HALSEY
(둘리틀 중령과 그의 용감한 지도력에게
행운과 신의 가호가 있기를 - 핼시)
발진 위치는 북위 35도 45분, 동경 153도 40분, 일본의 수도 도꾜까지의 거리는 약 1,070km..
당초 계획보다 300km 가까이 더 먼 거리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속 30km가 넘는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높은 파도가 넘실대는 해상에서 16대의 B-25 기들은 둘리틀 중령을 선두로 한대씩 차례로 호넷의 비행갑판을 떠났다.
비록 1개월간 집중적인 훈련을 받았다고는 하나 원래 항공모함에서의 이함이란 것이 노련한 해군조종사가 모는 함재기도 심심찮게 추락사고가 일어나고는 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어려운 일을 항모에서의 이함 경험이 전혀 없는 육군 조종사가, 그것도 크고 육중한 중형폭격기에다가 1,141갤런의 연료를 만재하고, 225kg 짜리 폭탄 4개씩을 실은 상태로 실행해야 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16기의 B-25 들은 단 한대의 사고도 없이 무사히 호넷의 비행갑판을 떠났다.
참고로 이때 호넷에서 이함한 B-25 들은 그때까지 항공모함에서 이함한 항공기들 중 가장 크고 무거운 항공기로 세계기록을 세웠다.
(항모 호넷의 갑판에서 이함하는 둘리틀 공격대의 B-25)
오전 9시 20분, B-25 의 발진을 끝낸 제16기동부대는 즉시 동쪽을 향하여 최대속도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제16기동부대는 후퇴하면서 레이더에 잡힌 일본의 감시선 12척에 대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경순양함 내쉬빌이 8,000m 거리에서 함포로 닛도마루를 격침했고,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의 함재기들이 공격을 가하여 합계 5척의 감시선을 격침하고 다른 7척에게 피해를 입혔다.
한편 닛도마루로부터 보고를 받은 군령부와 연합함대사령부는 즉시 육상공격기를 주전력으로 하는 제26항공전대에게 공격명령을 내리는 한편 도꾜 부근의 고사포 부대와 방공전투기 부대에 공습경계명령을 내려 사태에 대비했다.
하지만 일본측은 미함재기의 항속거리를 고려하여 실제 공습은 아무리 빨라도 그날 저녁이나 다음날 아침이 되어야 가능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도꾜 부근 기사라즈 기지에 있던 제26항공전대 소속의 육상공격기 4대는 그날 아침 6시 35분에 기지를 출발하여 미국항모기동부대를 찾고 있었다.(도꾜 시간은 B-26의 발진 지점보다 2시간이 늦다.)
9시 30분쯤 이들 중의 4번기인 유리가와 중위의 탑승기가 둘리틀 공격대 중의 한대와 조우하여 ‘국적불명의 쌍발기 1대 발견’이라고 기지에 보고했으나 미해군 함재기 중에는 쌍발기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되었다.
이날 유리가와 중위의 탑승기는 제16기동부대에서 55km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하였으나 기동부대 상공에 엷은 구름이 깔려있던 관계로 기동부대를 발견하는데 실패했다.
둘리틀 공격대는 고도 60m 의 초저공으로 도꾜 북부를 향해 오다가 12시 30분 경에 목표 상공에 도달하자 고도를 360m 로 높이면서 폭격을 시작했다.
16대 가운데 13대는 도꾜의 유류 저장소, 강철 공장, 발전소 등에 폭격을 가했고 나머지 3대는 나고야 및 한신 공업 지대와 요코스카 군항을 폭격하여 나고야의 미쯔비시 조립공장에 피해를 주고 요코스카에서 건조 중이던 경항공모함 류호에 폭탄을 명중시켜서 이 배의 진수를 11월로 늦추었다.
이 외에도 학교 6개, 군병원 1동 및 가옥 680채를 파괴하여 합계 사망 45명, 중상 145명의 피해를 입혔다.
폭격을 마친 B-25 들은 일본본토 남해안을 따라 비행하다가 가고시마 남쪽 해상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국으로 향하였고 도꾜 상공에서 기관 고장을 일으킨 1대는 북쪽으로 향하여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일본 상공에서는 단 한대도 격추되지 않은 둘리틀 공격대는 약 3,700km를 비행한 후 대부분 중국 동부 지역에 불시착하거나 낙하산으로 탈출하였다.
그 과정에서 4명이 사망했고, 불행하게도 일본군 점령지역에 떨어진 승무원들 중 8명이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장교 3명은 처형되고, 나머지 5명중 1명은 포로생활 중에 사망했다.
그리하여 작전에 참가한 총 80명의 승무원들 중(B-25의 승무원은 원래 6명이지만 둘리틀 공격대가 탑승한 기체는 무게를 줄이기 위하여 기총을 제거했으므로 한 대당 기총사수를 제외한 5명이 탑승)이들 12명과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한 1대의 승무원 5명을 제외한 63명의 승무원들은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모두 안전하게 연합군 지역으로 인도되었다.
블라디보스톡에 불시착한 승무원 5명은 소련 당국에 의하여 억류되었고, B-25 기체도 압수당했다.
어쨌든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도꾜 폭격을 실시한 후 무사히 도착한 중국군 기지에서 찍은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키작은 사람이 둘리틀 중령)
둘리틀 공격대의 도꾜 폭격은 그 실질적인 피해와는 상관없이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우선 루즈벨트 대통령이 기대했던 대로 미국의 항공기가 일본의 수도 도꾜를 폭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국민과 군인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중국인들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가장 큰 고통을 겪었다.
일본군은 이 사건 3일 후인 4월 21부터 중국의 중부지역에 있는 거의 모든 비행장을 맹렬하게 공습하기 시작했고, 지상에서는 제11군과 제13군을 주축으로 하는 대규모의 육군 부대가 작전을 시작하여 중국군과 민간인들에게 조직적으로 보복을 가했다.
이후 약 석달동안 줄잡아 25만명의 중국인들이 일본군의 가혹한 보복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도꾜 폭격은 일본의 전쟁지도방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국민들은 일본제국의 심장인 수도 도꾜가 대낮에 적기에 의하여 폭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고, 정부와 군은 격노했다.
해군은 정부와 육군에 대하여 체면을 잃었고 이는 일본해군의 차기작전계획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실 1942년 3월 초에 자바 섬의 공략이 끝난 이후 일본해군 수뇌부는 차기 전략에 대하여 날카로운 의견 대립을 보이면서 좀처럼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군령부 총장인 나가노 오사미 제독을 비롯한 일본해군 수뇌부는 대부분 나구모 중장의 인도양 작전이 끝난 이후에는 남동방면에 전력을 집중하여 포트모레스비를 탈취하고, 이어서 솔로몬 군도를 지나 뉴칼레도니아, 피지, 사모아 등으로 진출하여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의 연락선을 차단하는데 최우선 순위를 두는 작전을 구상했고 여기에는 육군도 찬성했다.
그러나, 연합함대사령장관인 야마모또 이소로꾸 대장은 현존하는 일본해군의 가장 큰 위협은 진주만 기습에서 살아남은 항공모함들을 주축으로 하는 미태평양 함대의 잔존세력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군이 일단 포트모레스비를 탈취한 이후에는 남동방면으로 전진하기 전에 우선 중부 태평양에서 미드웨이와 알류샨 열도를 탈취하고, 이걸 저지하러 나오는 항모 중심의 미태평양함대 잔존세력을 완전히 격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연합함대 세력이 대부분 참가하는 대규모의 작전이 필요했다.
야마모또 제독은 이 작전에서 만일 미국의 항공모함 부대가 반격을 가하러 전장에 나오면 나구모 중장의 기동부대로 하여금 격멸하면 되고, 만일 싸우러 나오지 않는다면 일본 측은 미드웨이와 알류샨 열도를 쉽게 점령하게 될 것이므로, 이곳에다가 비행장을 건설하여 폭격기를 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이미 확보하고 있는 마셜 제도 및 길버트 제도와 연계하여 하와이의 미국항공모함들이 꼼짝하지 못하도록 감시 및 견제할 수 있으므로 그 이후에는 뉴칼레도니아든 피지든 사모아든 일본군은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이면 미태평양함대에 신경쓰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해군 수뇌부는 대부분 이 계획이 지나치게 규모가 크고 복잡하며 따라서 그만큼 불확실성이 많다는 점 때문에 영 탐탁치 않게 여겼으나 도꾜 공습이 있은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즉 미국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폭격기들에 의하여 일본제국의 심장인 수도 도꾜가 벌건 대낮에 공습을 받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지자 미국항모의 접근을 사전에 차단하지 못한 해군에게 모든 비난이 집중되었고, 일본해군 수뇌부는 만일 앞으로 비슷한 일이 한번이라도 재발할 경우를 생각하면 밥맛이 싹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전에는 무모하게만 보이던 야마모또 제독의 계획이 차츰 그럴듯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만사가 계획대로 잘 진행되어 이번 기회에 남아있는 미국항공모함들을 몽땅 바닷속에 처넣어버리면 그만큼 좋은 일이 없고, 만일 미국항공모함들이 싸우러 나오지 않더라도 일본군이 미드웨이와 알류샨 열도를 차지하게 되면 미국항공모함이 일본본토에 접근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될테니 도꾜 폭격같은 험한 꼴을 다시 당할 위험은 없어지는 셈이었다.
육군 또한 미국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폭격기에 의하여 수도인 도꾜가 폭격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생각이 바뀌어 야마모또 제독의 계획에 찬성을 표하고 미드웨이 공략부대로 정예부대 1개 연대를 내어 놓았다.
이렇듯 둘리틀 공격대의 도꾜 폭격은 차기전략방향에 대한 일본해군 수뇌부의 논쟁을 일시에 종식시키고 미드웨이 해전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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